단편

반짝이던 안녕

주술회전 후시구로 토우지 네임리스 드림

*주술회전 네임리스 드림 합작 ‘그해 우리는’ 참여작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날씨 얘 진짜 미친 새끼가 다 됐네. 하고 절로 악플이 튀어나온다. 뺨을 훑는 바람이 양풍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후덥지근한 탓이다. 먼 훗날엔 이 나라에서 봄이 아주 없어질 거라더니 영 터무니없는 소리도 아닌지. 아침 영상 20도로 시작하여 한낮에는 최고 영상 34도까지 오르는 기록적인 불더위를 나날이 갱신 중인 5월은 이제 카테고리를 봄이 아닌 여름으로 바꾸는 것이 더 바람직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날씨에 명예롭지만, 통풍 더럽게 안 되는 경찰 근무복은 그냥 나더러 더워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었는데. 차마 발가벗은 채로 이 구역 생활 안전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작열하는 가짜 봄의 태양 아래에서 짹짹 새소리나 들으며 탁 트인 먼 산만을 바라보았다.

“근무 중에 멍때리지 마라.”

후시구로 토우지와 함께.

반짝이던 안녕

 

 

 

무릇 인생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고 공평하지도 않기에 최고이든 최악이든 인간에겐 저마다 표백되지 않는 피륙이라는 게 존재한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는 삶이라도 웬만해선 잊기 힘든 기억 하나쯤은 있다는 소리다. 보통은 ‘첫’이라는 관형사가 붙은 특별한 경험이 그러하고, 최근 나에게는 6개월 전에 발생한 어느 불미스러운 사건이 그러하다. 관련 있는 자들 모두가 긴박하고 혼란했던 결전의 밤. 열도의 사회면이 무겁게 들썩였던 그 문제의 밤을, 나는 아마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사고라고 한다면 사고였다. 하지만 그 또한 실수라고 한다면 실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나는 결코 무능한 경찰이라는 결론에서 피할 수 없었다. 강력계가 담당하는 모든 사건에는 늘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했으므로 변명할 건더기를 준비해서도 안 됐다. 변명은 엄연한 자기방어의 다른 이름이고, 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보다 더 죄스러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23구 내에서도 치안이 좋지 않은 편인 다이토구 일대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이었다. 음습하고 치밀한 수법으로 공개된 피해자 수만 무려 여섯이었고 내가 속한 강력3계 측은 유력 용의자를 마침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며 범인 체포에 성공했지만, 마지막 6번째 피해자가 여전히 실종 상태라는 게 매듭짓지 못한 큰 문제였다. 당시 우리는 실종된 피해자의 위치부터 생사까지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었기에 어떻게든 범인 검거 후 심문을 통해서 마지막 피해자의 행방을 알아내야만 했는데⋯⋯.

‘뭐야?! 이 새끼, 윽!’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하던가. 연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양쪽 손목에 단단히 채웠던 수갑이 어떻게 풀리게 된 일인지. 어느새 두 손목 자유로워진 피의자가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돌발 행동에 피의자 좌측을 지키던 모리카와 선배는 코뼈가 완전히 부러졌고, 조수석에 있던 나는 어찌할 틈도 없이 뒤에서 강하게 목을 졸렸으며 운전석에서 차를 몰던 지구대 순경은 이 아수라장에 휩쓸리다가 결국 핸들의 주도권을 놓치고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그렇게 한 차례의 충격이 지나간 후 정신 차렸을 땐 의식 반쯤 꺼진 채로 끙끙 앓는 동료 두 명과 절뚝거리며 도주 중인 피의자만이 내 멍든 시야를 어지럽혔다.

나는 경찰이다. 그건 어떠한 불의의 상황에서도 굽혀지지 않을 명제였다. 죄지은 놈들 잡아다가 벌할 기회를 마련하는 게 생업인 만큼 범인 앞에서 망설일 수 없었다는 뜻이다. 몸 좀 아프다고 게으를 수 없고, 지체한다는 선택만큼 독 될 일도 없는 직업. 그렇기에 이마에서 흐르는 뜨끈한 액체도. 팔꿈치의 찌르는 듯한 통증도. 무엇 하나 별스러운 건 없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찌그러진 조수석 문을 열고 도망치는 피의자 뒤를 정신 없이 쫓을 뿐이었다. 잡는다. 무조건 잡는다. 그 외 다른 생각은 기만이라고 믿으며, 마침내 도주 중이던 범인과의 거리를 좁혔다고 확신한 순간.

끼익. 쾅!

안 된다는 외침은 허공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찢어지는 소음을 온몸으로 맞고도 차마 두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다. 새파랗게 질린 꼴로 고장 난 기계처럼 고갤 돌렸을 땐 이미 피의자의 몸뚱어리가 새하얀 불빛과 함께 7km를 날아간 후였다. 갑자기 뛰어드는 인영 앞,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한 화물차에 의하여.

미디어의 잦은 노출로 이제는 전 국민이 알 테다. 피의자 사망 시 사건은 별수 없이 공소권 없음으로 차차 종결 수순을 밟는다. 팀으로서는 근 5개월간의 개고생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었고, 피해자 가족들로서는 피눈물만 흐를 사태였다. 우리 경찰 측에서는 남은 단서를 통해 아직 발견하지 못한 6번째 피해자를 계속해서 수색하며 진상을 파악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지만, 사실상 마지막 피해자를 구할 방법은 영영 미궁 속에 빠졌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수사 과정에 녹아든 형사들의 지대한 노력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결과적으로 경시청 수사과의 자랑이라던 강력3계는 극악 범죄를 일삼아 온 연쇄 살인범을 끝내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했고, 유가족의 깊은 슬픔과 분노는 길을 잃고 방황할 처지에 놓였다. 해당 사건은 연쇄적인 성격을 띄운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도 꽤 주목받던 사건이었기에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내건 기사가 우후죽순 쏟아졌으며, 관심 있는 자들의 질타를 피하기도 어려웠다.

‘아시잖아요.’

‘⋯⋯.’

‘제가 무리해서 안 쫓았으면 안 죽었을 수도 있어요.’

그즈음 경시청 내부에서는 보여주기식이라도 누군가의 징계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물론 안타까운 사안인 것과 별개로 이게 옷 벗을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죄책감에 절여져 있었기에 뭐라도 책임지겠노라고 뛰어드는 방향이 더 마음 편했던 거 같다. 어떠한 징계든 달게 받겠다던 나의 의지는 다소 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겠으나, 확고했고. 공 팀장님은 피곤한 얼굴로 좀 기다려 보라고 말했지만, 피의자 사망은 엄연히 체포 후 연행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나는 일부 책임에 대해서 깨끗이 인정한다는 일관성 있는 대답만을 내놓았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제물이 되어주는 경찰대 출신 여성 경위는 윗선에서 그저 반갑지 아니했겠는가. 결국 짧은 기다림 끝에 내려진 나의 징계 처분은 이와 같았다.

3개월 감봉 및 경시청 형사부 제 수사1과 강력3계 공시우 팀장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소도시 소재의 파출소로 전출을 명령함.

땅땅.

알겠지. 상황 봐서 금방 다시 부를 테니까 그간 고생한 거 잠깐 좀 쉰다, 생각하고 가 있어. 오래 안 걸려. 아마 1년도 안 걸릴 거야. 그러니까 가서 괜히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그냥 밥이나 잘 먹고 잠이나 잘 자면서 기다리면 돼. 이래 보여도 내가 네 팀장이다. 약속할게. 개인 물품 담긴 상자를 품에 덜렁 안고서 경시청을 빠져나오는 길은 조금 아쉬웠던 기억일까. 그러나 당시 나는 누적된 스트레스로 정신머리가 꽤 오염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공 팀장님의 마지막 위로를 전해 들으면서도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야.”

이 인간이 여길 따라왔다는 것만 빼고.

“감자 먹어라.”

유쾌함과 거리가 먼 회상이 싹둑 잘려 나간다.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눈길이 가로지른 곳엔 파란색 소쿠리를 내미는 토우지 선배가 서 있었다. 나는 어이 출타한 눈으로 선배를 응시한다. 어떻게 된 사람의 행색이 이토록 번듯한 근무복을 입고 있어도 경찰인지 아니면 동네 돌아다니는 백수 아저씨인지 분간이 안 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용달 블루색 소쿠리 안에 모여 있는 감자. 선배는 근무하다가 말고 또 어딜 가서 이 많은 구황작물을 구해온 건지. 이 정도 양이면 간식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은 끼니로 때워도 될 수준이었다.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놈의 감자는 진짜⋯⋯! 선배 무슨 감자 콜렉터예요?”

“어쭈. 싸가지 안 챙기지. 이게 다 어르신들 마음이야, 인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 마음이 감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삐져나와도 눈앞의 선배는 늘 그렇듯 요지부동이었다. 최근 한 달 동안 찐 감자, 구운 감자, 볶은 감자, 조린 감자, 감자, 감자, 감자. 심심할 때마다 온갖 감자를 다 섭렵한 내 입술 앞으로 이번에는 앞부분 껍질만 대충 까진 감자가 바싹 디밀어진다. 미친! 감자 따위 이제 질렸다고요! 선배나 많이 드시고 남은 건 이따 소장님이나 드려요! 내가 턱을 살짝 치켜든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자, 선배가 의문을 표하듯 눈썹을 까딱였다.

“진짜 안 먹냐?”

“안 먹어요! 진짜 이 선배 감자 집착남이야, 뭐야!”

“이거 햇감자랜다.”

“그런 건 진작에 말해주셨어야죠.”

아 햇감자는 못 참지. 햇감자는 죄가 없다. 혐의를 벗은 감자 앞에서 나의 완강함은 여기까지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에서 힘을 풀고 얌전히 입을 벌렸다. 선배의 청회색 빛 눈동자 주변으로 황당이 모여들어도 쌩 모르는 척했다. 아니 햇감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재차 눈을 깜박이고 턱을 까딱이자, 별거 보듯 떨떠름하던 선배의 표정이 한결 다른 감정으로 얼룩덜룩해진다. 이내 짧은 흉터 자리한 선배의 입술 사이로 실소를 뒤집어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거 진짜 순 또라이 아니야.

 

 

 

✦✧✦

 

일본 전국에서도 인구가 적기로 손에 꼽는 소도시 소재의 파출소. 한 해의 끝 무렵 그곳으로 전출 명령을 받고 첫 출근 하자마자 맞닥뜨린 광경은, 놀랍게도 파출소 한구석을 차지한 인조가죽 소파 위에 형편 없이 널브러진 채.

‘어어. 왔냐.’

하며 태연하게 손 흔드는 토우지 선배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그냥 귀신인 줄 알았다. 내가 미쳐서 드디어 헛것을 보는구나 싶었다. 업무 중 발생한 과도한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기어이 정신병이 왔나. 이거 업무상 재해로 근로복지공단에 찌르면 산재 처리되려나. 그게 아니라면 강력3계 에이스 형사가 도대체 왜 여기에?

그러나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본 그는 허깨비가 아닌 현실의 사람. 진짜 후시구로 토우지였다. 밑창 다 떨어진 삼선 쓰레빠만 신고도 도주하는 범인을 잡아다가 조질 수 있으며 쓰레빠 한 짝만으로도 범인 후두부를 가차 없이 후드려 팰 수 있다는 강력3계의 미친 쓰레빠. 출중한 실력으로 높은 검거율을 자랑하지만, 윗선에서 까라면 까지 않고 오히려 윗선을 까버리는 불량스러운 행태에 평생 간부 임관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진급 누락만 수십 차례인 내 파트너.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면서 물었다.

‘서, 선배 설마 이 시골까지 휴가 내고 놀러 오신 거예요?’

돌아오는 답변은 가관이었다.

‘파견.’

‘예? 파견이요?’

‘말이 좋아 그런 거고.’

‘⋯⋯.’

‘좌천.’

파견을 빙자한 좌천. 즉, 징계 처분이란 소리다. 손톱 밑을 매만지며 예사롭게 지껄이는 통보가 기막힐 따름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선배는 그게 뭐 큰일이냐는 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었기에 점차 목청이 커졌다. 그때 그 사건으로 강력3계에서 징계받은 사람은 나 혼자인데 선배가 무슨 좌천이냐고.

말했듯 체포 후 연행 과정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그때 선배는 다른 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쪽의 체포 소식을 듣고 청사로 먼저 복귀 중이었으니 문제의 현장엔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사건이 공개수사로 전환되며 워낙에 언론의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사실 경시청 일각에선 내 징계가 다소 과하고 부적절한 처사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왔던 건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토우지 선배까지 징계라니!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할 거였다면 내게도 언질이 좀 들어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나는 경시청을 떠나기 직전까지 공 팀장님으로부터 어떠한 언질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바보라는 거다.”

“결론이 왜 그렇게 돼요?”

“경찰대 문 닫고 들어간 티가 이렇게 나는군. 꼴통.”

“꼴찌로 들어갔어도 졸업은 수석으로 했다니까요. 자기는 뭐 대학도 안 나왔으면서⋯⋯.”

“뭐? 야.”

“어어? 저 지금 운전대 잡고 있어요?!”

어쨌거나 새하얬던 바깥세상이 푸르게 물들었으니 벌써 몇 개월도 더 지난 일이긴 했다. 이곳에 처음 온 날부터 이미 황당함에 못 이겨 몇 번이나 떠들어댔던 비하인드지만, 선배가 오늘도 크게 질려하는 기색 없이 들어주는 걸 보니 아직 몇 번은 더 지껄여도 괜찮을 거 같았다. 선배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옆에서 종알거리는 내가 웃긴 건지, 아니면 우스운 건지. 도통 알 수 없게끔 이야기 중간중간 영혼 없는 추임새와 함께 피식 입술 끝을 터뜨리다가 별안간 불거진 대학 이슈에 발끈.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서 대충 열을 빼고 순찰차 글로브 박스 안에서 일회용 휴지를 꺼냈다.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 넌 가만 보면 신기할 정도로 공시우를 잘 믿는다고. 까보면 걔만큼 비리 경찰인 놈도 없는데.”

“에이, 무슨⋯⋯. 그래도 팀장님이 비리 경찰까진 아니죠. 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얼마나 많긴. 감찰반에서 내부 총질하면 아마 시우 걔가 제일 먼저 잡혀 들어갈걸. 경찰대 출신도 아닌 놈이 지금 제 나이에 경정, 그거 어떻게 달았을 거 같은데?”

선배가 고개를 한쪽으로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꼭 악당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야 뭐⋯⋯.”

그리고 나는 호기롭게 입을 뗐다가 도로 말끝을 얼버무린다. 솔직히 선배의 말을 완전히 인정할 수도 없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전 세계 어딜 가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탈탈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하듯이 한 집단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청렴결백하기란 어려울 테다. 야망과 상충하는 말이므로.

순경부터 시작했다는 공 팀장님이 나이에 비해 직급이 높은 건 사실이었다. 가끔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큰 논란 없이 해결해 주시는 것도 우리가 모르는 윗선과 어느 정도 견고한 커넥션이 있어서라는 걸 모르는 팀원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닌 거지. 그는 누가 뭐래도 강력3계의 중심을 든든히 잡아주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행해지는 팀장님의 불의도 결국 밑바탕 되는 이유가 제 식구 보호하기 위함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토우지 선배 역시 내 앞에서 말은 이렇게 하지만 팀장님이 정말 돼먹지 못한 인간이었다면 알음알음 들었던 둘의 과거부터 지금까지 긴 세월을 같이 보내지 않았을 테니.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전방 주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선배를 돌아보았다.

“근데 선배 장난 아니다. 이제 보니까 팀장님 뒷담화 엄청나게 하시네요? 팀장님도 이거 알아요?”

“설마 모를까. 내 욕은 그 자식이 더하는데.”

“우와. 두 분 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겠다.”

“허⋯⋯. 좀 신났냐? 까불지 말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

조상님들이 말하시길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강력계 삼 년이면 미친 쓰레빠를 읊는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방금 한 말을 까불면 뒤진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긴장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이런 말을 듣고 졸아붙을 짬이 아니었다. 나는 대충 먹금하는 톤으로 네네 대답하며 핸들을 바로잡았다. 이 순간 선배가 짓고 있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따위야 이미 아는 바이므로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겠다며.

[2호차. 지금 마을 우체국 앞에 만취한 남성이 누워 있다고 신고 접수 들어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모시고 오도록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도쿄에서 나란히 시고쿠 지방의 시골 변두리로 떨어져 나온 뒤. 우리에게 순찰은 일상이 되었다. 강력계 근무할 적엔 순찰이 뭐일쏘냐. 그건 주 담당 업무도 아니거니와 혹여 운전한대도 지금처럼 똑같이 조수석에 토우지 선배를 태우고서 용의자 놓칠세라 교통법규 다 어겨가며 핸들을 이리 꺾었다가 저리 꺾었다가 속도도 제멋대로 밟기 바빴는데 여기선 이렇게 한가로울 수가 없었다. 육지로 나온 거북이처럼 느긋하게 달리며 창밖으로 펼쳐진 바깥 구경도 좀 하고. 심심하면 마을 어르신들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도 좀 따라서 흥얼거리고. 천천히 저녁 메뉴도⋯⋯.

아. 저녁 메뉴.

“선배 오늘 저녁은요?”

“감자전.”

염병. 진짜 감자에 미친 사람인가 봐. 나는 급정거할 뻔한 발가락에 가까스로 힘을 보탠다. 다소 질린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니 선배가 뭐 어쩌라고 식의 눈깔로 받아쳤다.

“뭘 꼬나봐, 인마. 집에 있는 건 다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감자전 손 많이 가요.”

“그게 많이 가봤자 감자지, 뭐.”

“그럼 감자 가는 건 선배가 해주시는 거죠?”

“가는 것만 내가 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예. 부치는 것도 선배가 다 하시겠지만⋯⋯.”

옆에서 허, 하고 허탈하게 스러지는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솔직히 말하면 선배는 이제 나를 한 대 쥐어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날 참아주고 있는 선배의 저 단단한 주먹이 꿈틀거리지 않도록. 아하하. 제가 너무 말이 많았다, 그쵸. 하며 선배 눈치를 살살 봐주는 게 내 신상에 이로운 일이다. 말했듯 강력계 삼 년, 아니 햇수로 오 년이면 미친 쓰레빠를 읽을 줄 아는 법이니.

내가 조금 전과 다르게 자세를 낮추고 생존형 능청을 떨어대자, 이 새끼 어디까지 지랄하나 한번 보자 하는 눈빛으로 나를 관망하던 선배가 곧 천천히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기댔다. 때마침 신호에 걸린지라 나 또한 대놓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겹치면 선배의 입술을 비집고 싱거운 웃음이 툭 하니 흘렀다.

“좀 늘었네.”

“⋯⋯.”

“하마터면 너 별 보여줄 뻔했다.”

아. 이 세상엔 별로 은유할 수 있는 문장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어떤 별은 감성과 낭만 대신 공포를 안겨줄 수도 있었다. 형편 좋게 선배를 따라 웃던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순간 등골이 다 서늘해져 입을 합 다물었다. 이유가 뭐였든 과거에 몇 번 별을 본 경험이 있는 자로서 방금 그건 살인 예고와 다를 바가 없는 발언이라고 단언한다.

하하. 선배도 참. 하마터면 제 손으로 내 이마빡 쪼개버릴 뻔했다는 소리를 이렇게 한다고.

나는 다시 전방 주시에 힘썼다. 평화로웠다.

 

 

 

✦✧✦

 

굉음이 전신을 두드리고 지나간다. 암전과 명전을 정신 없이 반복하던 사위가 끝내 새까맣게 물들 때면 지표 없는 길바닥 위 유일하게 불을 밝히는 건 절뚝거리며 달음박질하는 남자의 등뿐이었다. 나는 탄 냄새 가득 밴 손으로 따끔거리는 목 근처를 연신 주무르다가도 멀어지는 그 등을 보고 있으면 그저 쫓고 싶은 마음이 들어. 앞으로 나아가는 두 다리가 천근만근인 것이 개탄스러울지라도 결단코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면에 발을 디딜 때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뜨겁고 어깨부터 팔목까지가 욱신거렸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앓는 소리가 얼핏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그 작은 소리는 내 안의 우선순위를 뒤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목표가 정해진 나는 오로지 목적 달성만을 위해 달렸으며 마침내 멈추어 섰을 땐 남자의 등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존재했다. 하하. 입술 표피 위로 가쁜 웃음이 번져 나간다. 나는 직감했다. 아. 끝이다. 나의 승리다. 하여 이대로 승기를 틀어쥐고자 그예 손 뻗는 순간이었다.

“정말?”

알 수 없는 물음이 날아와 박힌다. 놀란 마음에 어깨를 움찔 떨면 제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얼굴 마주하며 상반된 시선을 무섭도록 빤히 얽던 그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너.”

슬며시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혀가 악마를 삼킨 양 검었다.

“절대.”

경적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불안이 움튼다.

“못 찾을 텐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헉.”

두 눈을 뜬다. 과거를 오차 없이 본뜬 이상 속에서 막혀 있던 숨이 뒤늦게나마 일으켜진 상체와 함께 공연히 터져 나왔다.

공상의 잔흔이 깨어서도 선연하게 남는 이유는 아마 현실을 너무 닮아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무의식을 반영한 가짜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모르겠다. 알 수 없기에 나는 불안정하게 호흡하며 발바닥으로 아래에 깔린 이불을 밀기 바빴다. 도망을 위한 본능적인 몸짓.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어쩔 수 없을 테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몸이 뒤로 잘 빠지지 않는다는 걸. 이 비겁한 몸짓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막아내는 손길이 있다는걸. 몇 번의 반복적인 행동 끝에 가서 알아차렸을 때.

“야.”

동절기의 밤을 닮은 목소리가 경적으로 점철된 고막을 뒤흔들었다. 호흡이 또 한 번 널뛰었다. 견고한 음성 한 번에 무너졌던 감각이 회까닥 돌았다가 다시 천천히 제자리를 되찾으며 살아난다. 식은땀 녹녹한 목덜미를 단단히 받친 손바닥. 그리고 발발 떠는 두 손목을 손쉽게 결박한 손아귀. 그 주인은 동일하다. 인지하는 순간 턱 끝에 힘이 바짝 실렸다. 푸른빛 감도는 어둠 속에서 전전긍긍 진동하던 내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 마침내 상(像)을 담았다.

“왜 울어.”

선배였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심장이 뛰지 않으면 죽음을 선고받는 게 당연한데도 나는 내 심장 뛰는 게 비정상적인 일처럼 느껴질 때가 더러 있었다. 심장이 이렇게 쿵쿵 소릴 내면서 뛰어도 되는 건가 싶고. 숨은 이렇게 색색 쉬어도 되는 건가 싶을 때. 물론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늘어놓지만, 실은 별스러운 일까진 되지도 못한다. 쉽게 말해 그냥 컨디션 난조, 상태 불량이라는 뜻이니까.

“뭐, 뭘 봐요.”

“경위님 보는데요.”

“⋯⋯.”

“네가 나였어도 기가 막히지 않겠냐. 저녁으로 감자전 잘 처먹고 일어나선 갑자기 뭔 컨디션이 나쁘네, 어쩌네.”

“⋯⋯.”

“그리고 ‘뭘 봐요.’가 뭐야, 이 새끼야. 보세요. 보세요.”

“아!”

“가끔 보면 이중인격 같기도 하고⋯⋯.”

제법 진지한 음성으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선배의 거칠거칠한 손바닥이 내 머리통을 쓸고 지나갔다. 스친 자리마다 나를 진정시키던 온기가 그대로 남는 듯했다. 조금 전의 상황도 그렇지만 이 행태 역시 좀 민망스러워서 괜히 손등을 들어 이마께를 요란스럽게 비비면 반응하듯 꿈틀하는 선배의 눈썹과 그 아래 자리 잡은 두 눈이 내게 대신 읊조렸다. 이 새끼 이거 또 또 지랄하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에 딱히 반박할 거리가 생각나진 않았다.

뭔 좆 같은 꿈을 꾸는 거 같길래 뺨이라도 쳐서 깨우려다가 좀 더 얌전한 방법으로 노선을 틀었다고 전한 선배는 나더러 왜 우냐고 물었었지만 실제로 내가 엉엉 울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쪽팔림이 덜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 순간 따라온 감정은 꽤 복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전부를 소화할 수 없는 나는 이 순간 차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아까부터 말이 없는 선배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둘 다 입을 다무는 형국이니 가뜩이나 좁아터진 당직실에 애매한 정적만이 껴들었다. 그렇게 멋쩍은 모양새로 뺨이나 벅벅 긁적이고 있기를 한참. 옆자리를 가만 지키던 선배가 너, 하고 먼저 운을 뗐다.

“무슨 꿈 꿨어.”

“⋯⋯쫓기는 꿈?”

“누구한테.”

“⋯⋯감자한테?”

“뭔 씨, 그놈의 감자는 진짜⋯⋯.”

똑바로 말 안 할래? 그리고 너는 인마, 감자전만 다섯 장을 작살내 놓고 새끼야. 저녁에 네 입으로 들어간 감자만 족히 스무 개는 되겠다. 선배가 당직실 바닥에 놓인 낮은 베개를 끌어오더니 까불지 말고 바른대로 말하라며 내 다리며 얼굴이며 꾹꾹 밀어 찔렀다. 악. 선배. 아악. 야!! 아, 아니, 선배. 악.

물론 이런 식의 추궁을 받는대도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결에 단편적인 모습을 보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내 입으로 직접 자신의 나약함을 술술 불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에 경시청에 있을 때부터 괜찮냐는 질문 앞에서 몇 번이나 괜찮다고 대답해 왔다. 반년이나 지난 사건에 대해 실은 ‘괜찮지 않아요’라고 번복하기 쉬울 리도 없다.

그렇다면 이럴 땐 그냥 가볍게 유야무야 지나가게 두는 것이 장땡이다. 나는 그냥 있는 감자 없는 감자 전부 동원하여 변명에 변명을 덧붙여 늘어놓았다. 모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가를 땐 역시 감자만 한 게 없었기에. 결국 포기는 선배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넌 다른 것보다도 고집이 수석급이라고 혀를 내두르던 선배가 이내 엄지와 중지를 튕겨서 내 턱 끝을 아프지 않게 건드렸다.

“딱 말해라.”

“옙.”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 없어.”

“없습니다.”

“그럼 네가 알아서 할 거야, 말 거야.”

“할 겁니다.”

“이제 다시 잘 거야, 나올 거야.”

“잘 겁니다.”

나는 자못 해탈의 경지에 오른 사람처럼 두 눈을 내리감고, 허허허. 부처의 얼굴을 흉내 내며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폭 좁은 선택지 앞에서 기다, 아니다로 딱딱 잘라 대답하니 시골 파출소 당직실에서 벌어지는 심문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넵. 옙. 없습니다. 할 겁니다. 그렇게 다시 잘 거라는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제 다 됐죠? 하며 감은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어⋯⋯.”

목빗근부터 흠칫 굳더니 혀끝으로 얼빠진 소리가 흘렀다. 선배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직면하고 당황한 탓인지 언제부터 이러고 계셨어요? 라는 말은 소리로 뱉어지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어버버 말을 빼앗긴 채 당장 두 눈만 끔벅거리면 선배의 손등이 한쪽 뺨에 툭 닿았다. 나는 가만히 움직이는 그 입 모양을 읽었다.

“다시 잠들 때까지.”

“⋯⋯.”

“옆에 있어, 말아.”

내게 친히 선택지를 쥐여주는 눈동자가 올곧다. 있어 달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옆에 눌러앉을 거 같은 기세였고, 괜찮다고 한다면 금방이라도 꺼져 줄 거 같은 기세였다. 이런 눈을 한 선배를 내가 또 언제 본 적이 있었더라. 평범과는 궤를 살짝 달리하는 그만의 자상은 공략법이 없는 거 같다. 좀체 대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맞닿아만 있던 손등이 최소한의 동작으로, 아주 느릿하게 볼을 문질러왔다. 느긋하게 기다려 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재촉하겠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나는 지그시 붙어오는 선배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선택을 위한 생각을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식은땀 녹녹한 목덜미를 받치던 손바닥과 발발 떠는 두 손목을 결박하던 손아귀를 다시금 떠올리며 대답했다.

선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요즘엔 부쩍 그런 생각을 한다. 팀장님은 나의 복귀가 1년도 안 걸릴 거라고 약속했지만, 솔직히 내부 상황이 언제 어떻게 돌아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고. 경시청으로 언제 다시 불릴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대로 좌천된 김에 화끈하게 경찰 옷 벗고 환경 운동가로 사는 건 어떨까? 일단 이마에 띠 하나 둘러매고 어디든 나가서 소리쳐 보는 거다. 자, 자. 여러분! 우리 모두 환경을 보호합시다. 우리의 소중한 지구를 지킵시다. 일회용품 줄이도록 합시다. 분리수거를 잘합시다. 거기 해외 셀럽들은 전용기 작작 타시고요. 왜냐니. 지구 온난화 때문에 봄이 없어지고 있다니까. 아무리 5월 끝자락이라지만 영상 36도는 좀 심하잖아요. 이 미친 날씨를 좀 보라니까요. 이게 봄이야? 이게 봄이냐고!

첫째로는 근무 시간이긴 했지만 굵직한 일이 없어서 (정확히는 아직 신고 접수된 게 없어서) 다행이었고, 둘째로는 동네 어르신들이 틈만 나면 모여 계시던 쉼터가 빈자리라서 다행이었다. 아무도 없는 마루에 혼자 넋 빼고 앉아 있던 나는 좌우로 눈치 한 번씩 보다가 그대로 벌러덩. 몸을 대(大)자로 뉘고 두 눈을 감았다. 이른 무더위에 자꾸 정신이 멍했다. 근래 반복되는 악몽 덕택에 제대로 숙면하지 못한 이유도 한몫 거들었다. 물론 내가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어떻게 돼먹은 오감인지 귀신같이 찾아와서 깨우고 가는 선배가 있었지만, 별개로 수면의 질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 선배.

그러고 보니 경시청에서나 여기에서나 지겹도록 붙어 다니던 선배는 오늘 휴무이고, 때마침 이 주변엔 지나가는 사람도 한 명 없겠다⋯⋯.

이대로 잠깐 눈 좀 붙이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이거 근무 태만이네.”

낮은 음성이 한낮의 물렁물렁한 고막을 주물렀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목소리엔 은근한 비웃음마저 섞여 있다. 내가 멍멍하니 노곤한 눈가를 덮고 있던 손등을 치우자, 햇빛을 등지고 선 인물이 서서히 망에 맺혔다. 나는 살포시 눈살을 찌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토우지 선배?”

“대답이 나오지.”

까칠하게 받아치는 걸 보니 이번에도 허상이 아닌 진짜 토우지 선배였다.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와 다름없는 검은색 쓰레빠를 장착한 선배의 맨발이 마루 아래로 흐느적거리는 내 발을 툭 건드렸다.

“너 누가 근무 시간에 여기 이렇게 누워 있으래.”

이어지는 잔소리 폭격.

“이게 요즘 빠져 가지고.”

폭격.

“정신 안 챙겨?”

폭격!

“아, 알았어요!”

오후 햇볕보다 따가운 선배의 잔소리 3연타를 맞고도 귀에서 피 안 나면 다행이다. 질색하는 표정을 미처 숨기지도 못하고 일단 널브러져 있던 상체부터 못 이기는 척 꼼지락꼼지락 일으켰더니 선배가 내 옆에 털썩 붙어 앉았다. 말 걸기도 진이 빠져서 무슨 용무가 있으시죠? 하는 눈길만 슬쩍 보내면 선배의 투박한 검지가 뻗어와 이제는 눈으로도 욕할 줄 아느냐며 내 눈두덩이를 쿡 찔렀다.

“너 이런 것도 다 직무유기죄다.”

“말도 안 돼.”

따지자면 직무 유기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여기 오기 직전까지는 소방서에 지원 요청해서 경로당 입구에 생긴 벌집 제거하는 일에 협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침부터 마을 어른들의 잔심부름을 도와드렸고, 뭐 이런저런 잡다한 일을 다 하다 보니까 차마 파출소까지 복귀할 기력까진 남아있지 않길래 가는 길에 좀 쉬려고 했던 것뿐인데⋯⋯. 그 잠깐을 안 봐주고 이 사람이 등장한 거다. 뿌연 안개 속에서 고고히 등장하는 저승사자처럼. 누가 미친 쓰레빠 아니랄까 봐 쓰레빠 질질 끌면서.

하지만 평소처럼 일일이 말대꾸하기엔 기운이 정말이지 너무 없었다. 흡사 더위를 먹은 거 같기도 했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냥 한숨이나 푹. 느낌상 열 뜬 듯한 양쪽 뺨을 감싸 쥔 채 끙끙거리기만 하자 여태 잔소리 남발하던 선배도 무언가 이상을 눈치챘는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마저도 거리에 비해 소리가 좀 멀게 다가오길래 두 번은 놓쳤고.

“얀마.”

“왜요⋯⋯.”

세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잡은 말끝도 줄줄 늘어졌다. 옆에서 불만스럽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도 발끈할 기운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선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 앞에 섰다. 신이 작정하고 몰빵한 듯한 월등한 체격은 고작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나의 몸뚱어리를 다 가리는 셈이었다. 이윽고 좀 더 붙어선 선배의 다리와 내 무릎이 툭 부딪히면 나는 추욱 꺾이는 고개를 느릿느릿 치켜들고 선배는 평이하게 말했다.

“걸어, 업혀.”

“네?”

“아니면 들어?”

⋯⋯예?

 

 

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는 언젠가처럼 짹짹 새소리를 배경음 삼아서 시골 마을 특유의 풍경을 내다보며 큰 깨달음을 얻는다. 나⋯⋯ 뽕따 좋아했네.

‘걸어. 업혀. 아니면 들어?’

생략된 말이 과해서 당최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근무복을 입은 채 선배에게 업히거나 짐짝처럼 들리는 건 무지하게 쪽팔리고 꼴사나운 일이 되겠다는 판단 정도는 섰기에. 내가 두 발로 직접 걸어서 선배를 따라 도착한 곳은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이었다. 선배는 도착하자마자 아이스박스를 열더니 대충 쭈쭈바부터 일반 하드까지 닥치는 대로 쓸어 담고는 그 봉지를 내 품에 퍽 소리 나게 안겨주며 지시했다. 야. 저기. 앉아. 까. 먹어.

그러니까 이건 다 그렇게 만들어진 광경이라고. 나는 쭈쭈바 입구를 질겅거리며 눌린 발음으로 말했다.

“선배. 우리 이래도 될까요.”

“뭐.”

“아니. 너무 노가리 까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래도 명색이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리는 직업인데 대낮에 슈퍼 앞 평상에 앉아서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이나 빨고 있는 걸 주민들이 보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나름 진지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더니 선배가 남의 일처럼 코웃음을 쳤다.

“너만 농땡이 피우는 것처럼 보이겠지.”

“웃긴다. 그러는 선배는 백수처럼 보일 걸요.”

“허⋯⋯. 말하는 거 보니까 이제 좀 살만한가 본데.”

나도 정신 나갔네. 누구 좋자고 저 망할 주둥이부터 살려놨군.

선배가 낭패감 어린 투로 중얼거렸다. 나는 들었어도 못 들은 척, 아이스크림 얻어먹고 싶어서 꼼수 쓴 사람처럼 꽝꽝 얼린 쭈쭈바 밑동만을 주물렀다.

솔직히 백수 같다는 말은 일정 사실이었다. 선배는 오늘 휴무이기 때문에 경찰 근무복이 아닌 세상 편안한 차림이었고. 얼굴이야 어딜 가든 다들 형사로 있기엔 아깝다고 말 얹을 정도였으니 논외로 치겠지만, 목 아래로는 거의 이 동네 뒷골목을 주름잡는 백수와 다름없는 꼴이었다. 진짜 어떻게 봐도 경찰로는 안 보이네. 내가 다시 한번 뚫어져라 선배의 행색을 살피자 넌 왜 봄에도 더위를 먹냐? 하며 선배가 한쪽 팔을 뒤로 짚고서 자세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동시에 그가 입은 검은색 반소매 주름 방향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어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그쪽으로 쭉 따라붙었다. 어, 근데 옷이 조금⋯⋯ 붙지 않나?

참 희한한 일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더위에 삼켜져 안 보이던 것들이 아이스크림 하나 먹었다고 이상하리만치 눈에 잘 들어왔다. 특히 선배의⋯⋯ 상체. 원래도 평가하기 입 아픈 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선배가 그단새 몸을 더 키운 걸까. 민망스러운 쫄티까진 아니더라도 핏이 엇비슷하게 나오긴 했다. 고작 맨몸에 티 한 장만 걸쳤을 뿐인데 몸 좋은 게 한눈에 보였다는 소리다. 팔뚝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근육 잘 잡힌 게 훤히 보이는 가슴은. 다른 건 몰라도 진짜 가슴 부분만큼은 면티의 입장을 좀 들어봐야 할 거 같았다. 상태 안녕하신지. 답답하진 않으신지. 혹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근데 계속 보니까 진짜 좀 너무 야한 거 아닌가? 이거 무슨 무슨 음란죄? 같은 거 성립하지 않나?

“읏?!”

그때 의식의 흐름에 끌려가던 내 입에서 외설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두 눈이 크게 뜨이며 목부터 어깨까지가 확 움츠러들었다. 뭐, 뭐야. 당황을 채 떨치지 못한 눈망울 그대로 선배를 올려다보면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척이나 태연한 얼굴로 손에 든 아이스크림만 설렁설렁 흔들 뿐이었다. 뭐, 뭔데. 방금 저게 내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진 거야? 내가 소리 내지 않고 일단 눈썹으로만 의문을 표하면 선배의 입꼬리가 퍽 얄궂게 휘었다.

그가 무감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소리 좋은데.”

⋯⋯이 인간이?

“성희롱 미쳤는데.”

“누가 할 소리를.”

“제가 뭘요?”

“내 가슴에 볼일 많냐?”

켁. 큼. 콜록.

선배의 발언에 내지르려던 성질이 헛기침과 함께 반토막 났다. 이번에도 당황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사람은 정곡을 찔리면 돌연 할 말이 없어지는 법이다. 나는 멋쩍어진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물론 찔린 속에선 안달이 났다. 가슴을, 내가 선배 가슴을 너무 봤나. 아닌데. 그냥 좀 살짝 쳐다본 정도였던 거 같은데. 근데 안 볼 수가 없는 가슴이잖아. 그냥 보이는 가슴인데 어떡해. 애초에 선배 가슴이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또다시 시선이 그쪽을 향하길래 다급히 날뛰는 시신경을 붙잡는다. 그, 그만 봐. 가슴 그만. 가슴 취소. 가슴 종료. 나는 자꾸만 스멀스멀 내려가는 눈깔을 부릅뜨며 온 힘을 다해 능청 떨었다.

“허. 제, 제가. 제가 뭘 또 그렇게 봤다고⋯⋯.”

“보던데. 주의 깊게.”

“다 오해세요. 제가 선배 가슴을⋯⋯.”

“가슴을.”

“그러니까 가슴이, 뭐. 가슴을 본다는 게⋯⋯. 나쁜 가슴은 아니잖아요? 가슴은 그냥 가슴⋯⋯.”

“가슴이 벌써 입에 붙었구만.”

“⋯⋯.”

“수석, 꼴통, 또라이. 이젠 뭐 하다 하다 변태 새끼까지 하시게.”

“⋯⋯.”

“우리 경위님 욕심도 많네. 하나만 해라, 하나만.”

젠장. 건수 하나 잡혔다. 앞으로 선배의 포인트 모를 흥미가 식을 때까진 주기적으로 놀림 당할 것이다. 더군다나 가슴이란 단어를 한 번에 너무 많이 말해서 그런지 이젠 가슴을 이루는 자음과 모음마저 전부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가슴탈트붕괴. 결국 되지도 않는 가슴 이슈 해명을 관두고 에라 모르겠다! 쭈쭈바를 앙물었다. 먹기 좋게 녹은 소다 맛 아이스크림이 입 안으로 쭉쭉 밀려들었다. 하하. 맛있다. 부러 나이에 안 맞는 애처럼 소리 냈더니 선배가 네 속내야 빤히 보인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다시금 도래하는 평온.

얼마 되지 않아 그 분위기에 반전을 가져다준 것은, 선배의 바지 주머니 안에서 요란스레 울려대는 휴대전화였다.

“어. 왜.”

이미 단종된 지 오래인 폴더형 휴대전화를 왼쪽 귀에 붙인 선배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나는 조용히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누구예요? 공 팀장님? 그러자 똑같이 성의 없는 눈짓으로 긍정을 표하던 선배가 날벌레 쫓듯이 손을 휘적였다. 무리해서 해석할 필요도 없는 직관적인 수신호. 통화 중에는 일단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일종의 선 긋는 행동이지만 별로 서운하진 않았다. 되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강력3계 현 팀장과 전 실질적 리더다. 두 사람이 무슨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고. 이제껏 비슷한 상황이야 몇 번이나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의 통화 내용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내게도 필요한 정보라면 어련히 알려주시기도 했으니까.

나는 선배 지시를 따라 정면의 먼 산만을 응시하며 최대한 관심을 멀리했다.

“뭐?”

다만 오늘따라 변수가 있었다면 내용을 전해 듣는 선배의 반응이 평소와 달리 예사롭지 않았다는 거.

“진짜야?”

뭘까. 뭐가 진짜일까. 혹시 복귀 명령인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스리슬쩍 옆으로 따라가는 눈길을 어쩔 도리가 없다. 오늘따라 내 눈깔이 말썽을 참 많이 부린다고 생각했다. 하여 기어이 이번에도 미친 척을 해본다. 곁눈질로 힐끔. 노비가 감히 연모해선 안 되는 양반을 바라보듯 야금야금 훔쳐본 선배는 뭐가 그리 심각한지 그새 미간에 균열을 새긴 채로 통화 중이었다.

“⋯⋯그래. 그랬군.”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건 필연적이었고.

“아, 아이고⋯⋯! 덥다⋯⋯!”

나는 선배와 시선이 겹치자마자 금 훔치다가 들킨 도둑처럼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딴청 피웠다. 어. 어. 아니. 어. 안 그래도 짤막했던 선배의 대답이 더욱이 짧아지는 걸 보니 어느덧 팀장님과의 통화도 끝을 향해 가는 듯했다. 이후로는 듣는 사람 민망할 정도의 무미건조한 반응만이 쭉 이어졌고 마침내 선배는 말했다.

“알겠어. 일단 끊어 봐.”

끝으로 깔끔하게 끊어진 전화.

반대로 한가로운 평상 위에는 무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나는 바닥에 흘렸던 시선을 주워다가 꾸물꾸물 들어 올렸다. 동시에 선배의 날티 나는 얼굴에 남은 미묘한 불편함을 캐치한다. 짐작하자면 무조건 아까 일 때문일 테다. 그렇다면 더 미루지 않고 한시라도 빨리 조금 전 상황에 대한 변명 타임을 시작할 때였다.

“야.”

그러나 이번에도 선배의 선빵.

“찾았다.”

“네?”

순간 나를 입도 못 떼게 만든 선배가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던지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에 변명할 생각도 잊고 뭐를, 하고 되묻는 찰나엔 빈 손목을 덥석 붙잡혔다. 앗 할 새도 없이 내 손목을 쥐고서 무작정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간 선배가 할머니. 좀 빌릴게. 라는 말 한마디로 계산대 옆에 놓인 리모컨을 집더니 텔레비전 전원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서 곧장 낡은 음질이 줄줄 새어 나왔다. 당황하는 나에게 선배는 그저 말없이 턱짓했고 나는 그제야 부랴부랴 저화질의 뉴스 화면을 응시했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야.”

“⋯⋯.”

“얀마, (―).”

“⋯⋯.”

“우냐?”

그렇다. 나는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이고 내 발끝만 내려다보며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앙다문 입술 틈으로 대답 대신 끅끅 젖은 숨만이 토해진다. 여즉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선배의 커다란 손이 짧은 한숨과 함께 스르르 멀어지며 이번에는 내 뒤통수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건 부드러움은 덜해도 분명한 의미가 담긴 손길이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그러니 너도 좀 내려놓으라고.

하여 나는 참지 않고 마저 흐느꼈다. 눈꺼풀 안쪽으로 지난날 나를 괴롭히던 악몽이 스쳤다.

토우지 선배가 틀어 놓은 뉴스에서는 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걸쳐져 발생한 도쿄 다이토구 일대 납치 및 연쇄 살인 사건, 그 6번째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단언컨대 강력계 형사로 살아가면서 마음에 크고 작은 짐 하나씩 짊어지지 않은 이들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던 순간들과, 최선이라고 믿었던 선택을 뒤늦게 후회했던 때가 참 무수히도 많았다.

사건 종결 후 장장 6개월을 더 괴롭혔던 다이토구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좁혀오는 수사망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용의자. 또는 법원의 최종 선고를 앞두고 교도소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피의자. 사건 조사를 하다 보면 간혹 그런 일들도 심심찮게 발생하긴 했지만, 다 잡은 범인을 코 앞에서 놓치고 심지어 그 범인이 내 앞에서 몸을 내던지는 걸 목격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체를 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정신적으로 전해져 오는 충격의 강도가 현저히 달랐다는 뜻이다. 하지만 장면에 의한 충격보다도 더 괴롭게 다가왔던 건. 나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넣고 무의식중 밤마다 눈물짓게 했던 건. 제발 시신이라도 찾아 달라는 유가족의 간절한 바람을 듣고도 끝내 실종된 피해자를 그 품으로 돌려보내 주지 못했다는 답답한 현실이었다.

한낮의 태양 아래서 고갤 들고 다니는 게 힘들 정도로 죄스러웠던 시간이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무리해서 쫓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을 욕심내지 않고 잠시 포기했더라면. 뭐가 우선인지 명확하게 파악했더라면. 선배들과 함께 머리를 식히고 좀 더 치밀한 작전을 세울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다시 한번 범인을 확실하게 체포하고 끈질기게 심문하여 마지막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자책에서 비롯된 수많은 ‘만약에’를 떠올리며 내내 잠 못 드는 시간이 있었다. 사고는 내 잘못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해주는 동료들에게 나 또한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경찰은 오늘 오전 10시, 작년 11월경 발생한 다이토구 일대 연쇄 살인 사건의 실종된 마지막 피해자를 발견했습니다. 실종 후 약 6개월만입니다.

그 소식을 보고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

수도권 강력 범죄는 하루에도 몇십 건씩 쏟아진다. 나는 그 수많은 사건 중에서 이미 종결 난 사건을 누구 한 명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피해자를 가족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한 편으론 너무 오래 걸려서 죄송했다. 어쨌든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땐 여러 감정 뒤섞인 울음만 터져 나왔고, 그날은 공 팀장님과 아주 오랜만에 긴 통화를 했다. 팀장님은 다 극복한 척 누구보다 속 졸이고 있었을 나를 안다며 최대한 자세하게 경위를 설명해 주었고, 그날 밤엔 토우지 선배가 나를 깨우러 오는 일도 없었다.

반년간 나를 괴롭히던 악몽은 이렇게 끝나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모든 걸 매듭지은 걸까.

문득 전화 끊기 직전에 들었던 팀장님의 끝인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너도 그 녀석도 가을 오기 전에는 볼 수 있지 않겠냐. 여기 오면 쉴 틈 없는 거 알지.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좀 마음 편하게 잘 쉬고 있어.

“-라고 팀장님이 말하셨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저 오늘 어차피 2시 퇴근이었고. 내일은 휴무고.”

“어. 그래서.”

“그래서 밭일하다가 새참 먹고 드러누운 경찰 어떤데.”

“진짜 미쳤네.”

어째 마음의 소리가 실수로 튀어나온 듯한 투다. 아래에서 봐도 굴욕 한 점 없는 선배의 얼굴엔 언뜻 푸념 비슷한 것마저 드러났다. 예를 들면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다는 것까진 아닌데 인생이 존나게 고달프긴 하다.-와 같은 푸념.

일상에서든 사건 현장에서든 기막힌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한숨에 실소를 섞는 건 선배의 유구한 버릇이다. 그 행동을 지금 보인다는 건 쉼터가 제 집 안방이라도 된 양 이러고 있는 내가 저 눈에는 기막히다는 뜻일 테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지체하지 않고 어르신 전용 쉼터에 널브러져 있던 내 팔목을 쭉 잡아당겼다. 이에 힘 빼고 있던 몸뚱어리가 흐늘거리더니 밭에서 구슬구슬 붙여온 흙 알갱이도 마루 위로 토도독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세 글자.

“얼씨구.”

퍽 아저씨 같은 추임새를 곁들인 선배가 나를 일으킴과 동시에 뭘 확인해 보려는 듯 빗장뼈 근처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일련의 프레임 하나하나 워낙 자연스러워서 거부감이랄 것도 없었다. 목 부근에 선배의 숨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그가 헛웃음 터뜨리며 물었다.

“얼마나 마셨냐.”

나는 태연하게 양손을 들어 V자를 그렸다.

“막걸리 두 병이요.”

“아닌데.”

그러나 말하기가 무섭게 부정당한다. 내가 아는 너라면 혼자서 2병이 아니라 20병을 조지고도 남았을 거란 의심스러운 눈빛이 따라붙으며 보기 좋게 빠꾸당한다. 결국 바른대로 고하라는 선배의 집요한 눈동자가 양심을 쏘삭거리는 탓에, 나는 천천히 손가락 세 개를 더 펴서 이실직고했다. 하여튼 이 귀신 같은 인간. 언제쯤 한 번 속일 수 있을는지. 그런 날이 정말 오긴 할는지. 시치미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남은 건 멋쩍게 웃으며 침이나 꼴딱 삼키는 엔딩 뿐이다. 내가 펼친 손가락 개수와 똑같이 다섯 병이라고 사근거리자, 선배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미치도록 황당해하는 얼굴.

“자랑이다, 새꺄.”

아니. 그보다도 미치도록 나를 작살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이럴 땐 대부분 이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게 보통일 테다. 선배와 만난 것까진 기억나지만,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라던가. 선배를 만나고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라던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기엔 나는 주량이 센 편이었고, 막걸리 5병 정도로는 아직 정신머리가 멀쩡한 상태였다. 뺨은 좀 빨개지고 기분은 좀 좋을지언정 인사불성 만취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니 오는 길의 과정을 잊는 일 따위도 없었다.

아무런 연락도 안 했는데 별안간 내 앞에 등장한 후시구로 토우지. 그 선배가 언젠가처럼 내게 ‘걸어 업혀 아니면 들어’의 삼지선다를 제시한 것. 하여 내가 이번에도 남부끄러운 선택지를 피해 또 한 번 내 발로 뚜벅뚜벅 집까지 걸었던 것. 오는 길 내내 선배의 잔소리를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들어야만 했던 것. 이 모든 게 완전하고 온전했다.

뭐 그렇다고 한들 이미 몸뚱어리 안에 들어간 알코올은 없었던 일이 되지도 않고 도로 빼낼 방법도 없었기에.

“6캔을 다 꺼내오셨어요?”

이른 저녁을 먹기도 애매하고 잠을 자기도 애매한 시간대가 새로운 길을 텄다.

“왜. 넌 이거로도 모자라지 않냐?”

집 앞마당에 놓인 조립식 평상에서 선배와의 조촐한 2차가 시작된 것이다.

“아뇨, 괜찮은데요. 그것보다⋯⋯.”

나는 말끝을 흐리며 눈동자를 한쪽으로 쭈욱 굴린다. 6개입으로 포장된 캔맥주를 보고 밝아진 시야가 그 옆에 놓이는 고추장색 다라이를 보자마자 도로 탁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유는 명확했다.

“안주가 또 감자라니.”

“기뻐해라. 라스트 감자다.”

이놈의 감자.

“혹시 감자가 우리 몰래 새끼 치는 거 아닐까요?”

“발상 좋네. 네가 잠복해서 한 번 감시해 보던가. 이것들이 새끼 치나 안 치나.”

애매한 장단에 잇새로 밍밍한 웃음이 샌다.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계속해서 남아있는 감자라니 사뭇 괴담 같다.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감자 세계관에 갇힌 엑스트라 2인조가 아닐까. 농담이 아니라 한평생 먹을 감자를 여기 와서 한 달 만에 다 먹은 거 같았다. 그래도 이게 감자의 라스트 댄스라면 축하할 일은 맞으리라.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가로저으며 축배의 캔맥주 하나를 깠다.

“이 와중에 선배는 보리차라서 좀 김샌다.”

“색깔로 구색 맞춰줬으면 됐잖아.”

“진짜 한 캔도 안 해요?”

“안 한다. 알면서 물어.”

선배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원래 사람 심보가 다 그런 법이지 않은가. 혹여 다른 대답이 나올까 낮은 확률에 기대를 걸며 빤히 알면서도 묻는 것. 하지만 본인이 딱 잘라 말한 것처럼 토우지 선배는 정말로 술을 안 마시는 부류이긴 했다. 담배도 안 피웠다. 얼굴만 봤을 땐 여과 없는 말술과 골초의 관상을 타고났는데 막상 겉을 뒤집어 까보면 그는 보기보다 제법 (완전하다는 게 아니다) 건실한 타입이었다. 다만 음주를 멀리하는 이유는 좀 별났다. 나도 처음에는 선배가 술이 약하거나 알코올 안 받는 체질이라 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아무리 들이부어도 취하지 않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뭐랬더라. 맛도 없고 몸에도 안 좋은 거 취하는 메리트도 없으면 뭐 하러 마시겠느냐고 했던가. 들었을 땐 도대체가 어떻게 돼먹은 피지컬인지 신기했으나,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더 신경 쓰진 않았다.

규모가 크든 작든 음주와 회고는 실과 바늘, 숟가락과 젓가락 같은 것이다. 무조건 같이 갈 수밖에 없다. 경찰대 입학하던 스물. 수석 졸업 후 지구대에서 보낸 시간 1년. 강력계에 첫발을 디밀었던 스물다섯.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전부였던 삶에서 또 한 번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던 스물여섯. 그리고 현재 스물아홉.

나는 진짜 맥주가 담긴 캔 표면과 맥주인 척하는 보리차가 담긴 잔을 가볍게 부딪칠 때마다 문득 선배와 강력반에서 굴렀던 4년을 떠올려 본다. 치열하고 빠듯하게 사느라 여유라곤 부족했던 나날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지 아니한가 했던 순간들. 생각해 보면 강력계에 합류하고 나름대로 적응까지 마쳤을 땐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종 그런 말을 듣기도 했었다. 너는 토우지 선배랑 같이 있으면 안 불편하냐. 그 선배 무섭진 않냐. 둘만 있을 때 서로 말은 하냐. 난 너 토우지 선배랑 나갔다고 하면 숨 막혀서 질식사했을까 봐 가끔 걱정된다. 그 외 기타 등등. 다들 비슷한 말을 건네고 끝에 가선 농으로 말끝을 뭉갰지만, 그 밑바닥에 진실한 걱정이 깔려있다는 걸 몰랐던 적은 없었다. 선배가 내외부로 그런 야박한 평가를 듣는 인간이라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일관되게 대답하긴 했다. 난 괜찮다고. 왜냐면 그건 실제로도 정말 괜찮았으니까. 선배가 일하는 방식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부분을 말하자면 그랬다. 남들 말마따나 좀 어렵긴 해도. 좀 무섭긴 해도. 그럼에도 괜찮지 않나.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으로 넘기다 보니 우리는 1년 365일 중 대부분을 함께 하게 되었고 이렇게 붙어 있으면 언제나 할 이야기가 있었다. 사건 이야기든, 평범한 일상 이야기든. 아니면 허무맹랑한 헛소리든.

“미묘한 차이가 있죠. 비슷한데 달라요. 공 팀장님은 이 사람이 우리 편이라서 진짜 다행이다 싶은 사람인 거고.”

“나는.”

“우리 편이라서 든든한 사람. 선배는 여차하면 상부도 까버리는 사람이니까 아무도 못 덤비잖아요. 제가 마약반 상대하러 갈 때마다 괜히 선배를 대동했던 게 아니에요.”

“⋯⋯.”

“그나저나 선배도 없어서, 지그, 아.”

“⋯⋯.”

“지금 팀이 제대로 돌, 아.”

“⋯⋯.”

“돌아갈지 모르, 아. 아 왜 이러세요?”

평상 끄트머리에 나란히 걸터앉은 우리의 이야기가 추억팔이로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아까부터 선배의 손이 불규칙적으로 뻗어오며 내 볼을 슬쩍슬쩍 꼬집는 탓에 말이 자꾸만 잘렸다. 참다못한 내가 고개를 홱 돌리고 불만이 있으시면 제발 말로 하시라 부탁하자, 선배가 이번에는 검지 끝으로 내 입술을 툭 밀듯 건드렸다.

“불만 없는데.”

“⋯⋯.”

“그냥 너 오늘따라 종알종알 잘도 떠든다 싶어서.”

“그래서 꼬집으셨다?”

“안 될 일도 아니고.”

“⋯⋯직권 남용.”

“직급 네가 더 높지 않냐?”

“짬 남용, 나이 남용⋯⋯.”

“얼씨구.”

또 또 저 아저씨 같은 추임새⋯⋯. 내가 눈을 뾰족하게 흘기니 선배가 얄짤 없는 음성으로 명했다. 눈깔 원위치해라. 하여 이다음엔 딱밤이라도 맞을까 봐 도로 두 눈 예쁘게 뜨고서 건배나 한번 더했다. 사실 나도 이 정도 마셨으면 취하는 건 몰라도 배는 불러야 정상인데 오늘은 어째 속이 텅 빈 사람처럼 술이 계속 넘어가는 중이었다. 딱히 술이 달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깨끗하게 비운 세 번째 캔을 찌그러뜨리고 네 번째 캔을 손에 쥐며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는 선배는 오늘따라 말이 없으시네요.”

“네가 내 몫까지 떠들고 있으니까.”

“어쩐지 입이 아프더라. 선배도 재밌는 얘기 해주세요.”

“무슨 얘기 듣고 싶은데. 시우 얘기?”

설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공 팀장님 이야기야 언제 들어도 흥미롭긴 하지만 방금까지도 실컷 했고 실컷 들은 참이었다.

“아니요, 선배 얘기.”

“내 얘기 뭐.”

“하하. 뭐예요. 제가 듣고 싶다는 대로 말해주시려고요?”

“걸러낼 거 걸러내고.”

즉 헛소리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동시에 무언가를 말할 거라면 내 쪽에서 먼저 거른 후 말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선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토록 빈틈이 없어서 가끔 비현실적이었는데, 그게 동료들로부터 박한 평가를 받는 이유가 될 때도 있었다. 내가 고민스럽다며 입 안에서 잠잠히 혀를 굴리는 사이 선배가 한쪽 허벅지 위에 올려둔 팔로 턱을 괴며 퍽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너는 매번 뭐가 그렇게 듣고 싶냐.”

잠잠하고 그윽한 목소리. 때마침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기에 무심코 그를 돌아본다. 새삼 옅은 웃음 흘리는 입술 위로 짧게 패인 흉터가 눈에 박혔다. 아. 순간 체내에서 나슨하게 돌던 취기가 압을 바꾸어 빠르게 도는 기분마저 들었다.

매번 뭐가 그렇게 듣고 싶냐고⋯⋯.

그 말을 부정하진 않겠다. 매번 뭐가 그렇게 듣고 싶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오면서 나는 언젠가부터 선배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특이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야 당신은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곱게 거르고 걸러 지금 이 순간 선배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게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다.

어쩌면 좀 오래됐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어떤 말은 타이밍을 재는 것보다 그냥 뱉는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할 수도 있다. 공기의 무게가 바뀐다. 머릿속에서 뒤섞이던 낱말들이 조화를 이루고 수많은 갈림길이 모여 비로소 한 길을 가리킨다.

나는 캔 입구 부분을 엄지로 꾹 누르며 운을 띄웠다.

“선배는⋯⋯ 여기 왜 왔어요?”

“아. 그 얘길 또 하자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진짜 이유요.”

6개월 전. 후시구로 토우지가 이 소도시에 온 진짜 이유.

“솔직히 좌천은 너무 말도 안 됐던 거 알죠. 내가 이미 징계받는 거로 정리된 일인데 선배가 뭐 하러요. 더군다나 팀장님이 그걸 내버려 뒀을 리가 없는데.”

“⋯⋯.”

“선배는 나랑 또 다르니까.”

급속히 도래한 침묵 속 분위기는 아까와 결을 달리한다. 그 짧은 사이에 해가 좀 더 기울어서 일 수도 있고, 여태 불지 않던 바람이 자꾸만 부는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 발언 자체가 엄한 곳에 불을 지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때가 아니라면 꺼내기조차 어려운 말도 있었다. 누군가가 판을 깔았다면 모가 되든 도가 되든 일단 던져 봐야 하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도로 퍼담을 수 없는 물을 흘리고, 선배는 어려운 눈빛을 내게 꽂는다.

그 얼굴이 내 질문에 대해 선선히 대답해 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움직였다.

“그럼 제가 맞춰 볼까요? 진짜 이유.”

“⋯⋯.”

“첫째. 내가 걱정돼서.”

“⋯⋯.”

“둘째. 내가 되게 걱정돼서.”

“⋯⋯.”

“셋째. 내가 되게 되게 걱정돼서.”

사실은 알고 있다고.

사건의 악몽은 끝났어도 아직 매듭짓지 못한 게 여기, 이렇게 버젓이 남아있다는걸.

“⋯⋯.”

계속 생각해 왔던 거다. 짧은 추리를 마친 나는 선배를 보며 유의미한 반응을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서 나를 차분하게 맞응시하던 선배가 보리차를 내려놓고 슬그머니 몸을 기울여 왔다. 와중에도 두 눈만은 한 치의 비뚤어짐 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행동에 숨어든 의중을 파악하는 사이, 느긋하게 손을 움직인 그가 내 손에 들린 맥주를 가로챘다. 입 댔어요. 덧붙여도 선배는 더 이상 웃을 일 없다는 것처럼 그 흔한 실소도 하지 않았다. 그예 나는 심장박동이 조금 빨라짐을 느낀다.

이후 혼자서 조용히 사색에 잠기는가 싶던 선배가 그리 질색이라던 맥주를 한 모금 삼키더니 낮은 목소릴 내었다.

“나도 하나 맞춰 볼까.”

“⋯⋯.”

“넌 진짜 머리 나쁜 거 맞아.”

아. 그건 내 추리가 틀렸다는 뜻이로구나.

그러나 아무런 상관없다. 그편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웃음마저 나올 정도였다. 내가 틀렸다면 이번에야말로 선배가 가르쳐주면 되니까. 나는 6개월을 돌고 돌아서 어렵게 붙인 이 불씨가 꺼지지 않길 바랐다. 선배는 여전히 무언가를 재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한들 내 기준에서 기다리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당신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약간의 농담도 제외한, 오로지 진심으로만 얼룩진.

그리하여 명확하게 하고 싶은 게 있었다.

벌써 삼 년쯤 되었다.

 

 

형사란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면 할 수 없는 직업이다. 매사에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의심하고 봐야 한다는 건 반대로 사소한 것 하나라도 관심 있게 봐야 한다는 말이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후시구로 토우지는 이 종잡을 수 없는 후배와의 첫 만남을 제법 세세하게 기억했다. 통성명 끝내자마자 더는 볼 일 없다는 것처럼 무감이 내리깔던 속눈썹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사람들은 보통 활달하고 화려한 인간을 강렬하다고 인식하지만, 어떤 인간은 너무 고요하고 무색무취라서 되려 눈에 띌 수도 있었다. 지금에야 우스갯소리 좀 보태어 강력3계의 왈가닥이라고 소개하지만, 지구대 1년 꼬박 채우자마자 곧장 발령받고 올라온 초임 경위에게서 느껴지던 것은 조용하게 타오르는 악과 깡뿐이었다. 그러니 첫인상은 최악에 가깝도록. 토우지는 본인 삶도 원체 녹록지 않고 건조한 편이었지만, 그 눈으로 보기에도 그녀는 참 메마른 인간 같았다. 정말이지 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나이도 별로 안 먹은 애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으면 가만히 있어도 저런 분위기를 자아내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럼 네가 좀 챙겨주면 되겠네.’

‘네가 데려왔으면 네가 책임져, 멍청아.’

‘상관으로써 하는 말이야, 멍청아. 그리고 나보단 너랑 훨씬 잘 맞을 거다. 그러니까 붙여 놓은 거고.’

‘아아. 퍽이나 그렇겠군.’

‘⋯⋯.’

‘⋯⋯말이 없긴 없더라. 답답할 정도야.’

‘너랑 닮았네. 그리고 그런 게 거슬린다면 너도 반성해.’

사건 관련 외 대화는 단절이었다. 대답은 무조건 필요한 대답만 했다. 좋게 말하면 자질구레한 부분이 없었고 나쁘게 말하면 유도리가 없었다. 뭐가 됐든 그때의 그녀를 떠올리면 지금의 모습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때도 저를 데려온 공시우 앞에서는 그나마 좀 서글서글하게 구는 듯 보였지만, 그녀는 대체로. 언제나 우울하고 꼿꼿한 나뭇가지 같았다. 마른 잎 하나 틔우지 못하는 죽은 나무. 세찬 바람 불면 그냥 부러지고 마는 나무. 하지만 그게 신경 쓰였느냐고 한다면 그다지. 애도 아니고 나서서 걱정할 정도였나. 토우지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애초에 먼저 누군가를 살갑게 챙기고 위로해 줄 만한 성격도 못되었다.

‘야. 수석.’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뭐해.’

‘⋯⋯.’

‘공시우가 너 밥도 안 멕이고 일 시켜?’

일종의 변덕이었다. 변덕 앞에 붙은 건 그냥이란 형편 좋은 두 글자였으므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전날 남 말하기 좋아하는 놈들의 입을 통해 우연히 그녀의 불우한 과거사를 들어서도 아니었고,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봐서도 아니었다. 그냥. 진짜 그냥. 모두가 퇴근한 시간에 신입 경위 혼자 경찰서에 남아서 사건 기록지와 증거 물품만 한참 들여다보는데 그 외로운 머리통을 보니 일단 한 번은 말을 걸어야 할 거 같았다. 사실 여기서부터 이미 답지 않다는 생각이었지만, 얼굴을 봤을 땐 붙잡고 나가서 뭐라도 먹여야겠다 싶었고.

‘설렁탕. 순댓국.’

‘⋯⋯.’

‘⋯⋯콩나물국밥?’

24시간 영업하는 가게에 들어가서 마주 보고 순댓국 먹을 땐 여간 껄끄러운 듯. 고개 푹 수그리고 또다시 음울하게 내깔린 속눈썹만 보여주며 뚝배기 바닥 득득 긁더니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이후 묘하게 대화가 늘었다.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심지어는 조금씩 웃기도 했다. 토우지는 평생 가도 타인을 웃겨본 적이 없는 놈이라서 그게 좀 신기했다.

‘너 나 우습냐?’

왜 자꾸 웃느냐는 말을 그따위로 밖에 할 줄 몰랐던 시절. 그녀는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다가도 다시 흐리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선배가⋯⋯.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아서요.’

그 의외의 답변에 토우지는 얼 타다가 처음으로 먼저 시선을 피했다. 후한 인성 평가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악과 깡이 넘친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도 있는 법이거늘, 얼마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갈 거 같았던 초임 경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계 생활에 순조롭게 적응해 나갔다. 모종의 사건들을 통해 성격도 처음과 많이 바뀌었다. 어쩌면 이쪽이 본 모습일 지도 몰랐다. 언젠가 들었던 공시우의 말도 토우지는 갈수록 좀 이해가 갔다. 업무적으로 손발이 잘 맞으니 어딜 가서 뭘 하든 자연스럽게 함께 하길 원했다. 야. 걔는 나한테 보내. 얀마, 애를 어딜 데려가냐. 뭐래. 얘는 내 거야. 독점과 소유가 그득그득 묻은 문장들이 어느덧 토우지의 입버릇이 됐을 땐 알기 쉽게 파트너란 이름으로 묶였다. 아무도 모르는 서로의 사소한 습관, 버릇 따위를 익히는 날들이 늘었고. 부러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대체로 옳게 짐작하는 날들이 늘었다. 그렇게 미우나 고우나 서로를 온몸으로 지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낸 시간이 자그마치 4년이었다.

‘뭐? 걔가 뭔 징계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왜. 아예 다른 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 옷을 벗기지.’

‘농담하는 거 아니다. 감봉에 좌천으로 가닥 잡혔어, 지금.’

‘그럼 대가리만 붙잡고 있지 말고 어떻게든 해.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다이토구 일대 연쇄 납치 및 살인 사건. 팀에서 공공연한 파트너가 된 이후로는 딱 한 번 찢어졌던 현장이었다. 그마저도 자의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하필이면 연행 과정에서 운 나쁜 사고가 발생했고. 또 하필이면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라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대상이 또 하필이면 그녀였다. 토우지는 상황 돌아가는 꼴이 역겨워서 심사가 단단히 뒤틀렸다. 설상가상 그녀는 처분이 내려지기 직전까지 어딜 그렇게 숨어 다니는지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뒤에서 손 쓰는 건 네 특기가 아니었느냐며 드물게 공시우를 쥐어짜도 이번만큼은 녀석이 손을 못 썼다. 아니, 그나마 손을 쓴 처우가 그 지경이었다.

알게 모르게 부패가 만연한 집단은 이럴 때만 본인의 의사를 적극 수용하고 반영한다. 어떻게 해도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공시우는 약속을 어기는 놈이 아니지만 현재로선 복귀 시점도 불투명하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 폐쇄적인 집단의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순진한 것도 아니면서 왜 멍청하게 책임지겠다는 말을 했지. 그 개새끼가 심어 놓은 죄책감이 뭐라고. 너를 그렇게 짓눌러서, 숨도 못 쉬게⋯⋯. 한동안 수많은 상념 속에서 헤매던 토우지는 고갤 젖히고 천장 석고보드를 바라보다가. 또 경시청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상태 불량에 시달리던 그녀를 떠올리다가⋯⋯.

‘야. 비리 경찰.’

‘뭐야. 아침부터 왜 또 시비야?’

‘손 한 번 더 써라.’

‘⋯⋯.’

‘나 보내. 걔 있는 곳으로.’

잠잠히 지난 기억을 되짚던 토우지의 눈동자가 다시금 돌아 현재의 그녀를 담았다. 내가 이 촌구석에 왜 왔는지. 그 진짜 이유를 듣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끊임없이 두 눈 맞추며 기다리는 나의⋯⋯.

아. 그래. 뭐라고 했더라. 제 걱정이 되어서 왔냐고. 토우지는 그녀의 말꼬리를 붙잡고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끝내 코웃음을 흘렸다. 설마 그딴 이유일까 봐. 고작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너 없으면 현장이 어쩌고저쩌고 질리게도 잔소리하던 공시우 들들 볶아가며 여길 왔을까 봐.

그 추리는 틀렸다.

“짜증 나서.”

차라리 내게 처음부터 안겨주지 않았으면 되는 일을. 이제 와 줬던 걸 도로 뺏어 간다니까 억울해서. 4년 동안 매일 같이 보던 너를 어느 날 갑자기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것만큼 열 받는 게 없어서. 그런 주제에 하필 나한테 마지막으로 보여준 게 처음 만난 그날처럼 쓸쓸한 뒷모습이라서. 하지만 웃기는 일이지. 그런 네 얼굴이라도 나는⋯⋯.

“되게 짜증 나서.”

보고 싶을 거 같아서.

“그게 정답이야.”

뭐, 그런 말을 할 수나 있겠냐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 거기서부터 비롯된 인간적인 호정. 고된 일상 속 서로 부대끼며 형성되는 끈끈한 동료애. 그것과는 또 다른 특별한 감정.

“짜증⋯⋯.”

나는 예상 답안에서 완전히 빗나간 대답에 평상 짚고 있던 팔을 삐끗한다.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듣는 이가 좀 편한가. 왜 이렇게 어렵게 가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해석의 여지를 두니 선배가 나를 시험하는 거 아니냔 생각마저 들었다.

“무슨 짜증이요. 내가 징계받은 거?”

“⋯⋯.”

“나랑 최소 1년은 못 볼 테니까. 그게 짜증 났다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경시청 나올 때 팀장님한테만 인사하고 선배한테는 따로 인사 안 해서? 설마 그거 괘씸해서 쫓아온 건 아니죠?”

“취조 하는 것도 아니고 질문 많네. 너 다시 도쿄 올라가면 심문 꼭 이렇게 해라.”

“선배.”

“중요하냐?”

돌연 말이 잘리기에 입을 다문다. 습관처럼 한쪽 손으로 어깨와 목덜미를 주무르는 선배의 입술은 은근한 웃음을 유지했지만, 또 달리 보면 이제 이 상황 자체를 좀 성가시다고 느끼는 것도 같았다. 피할 기회만 생긴다면 당장이라도 피할 기세였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게 뭐. 그 진짜 이유를 네가 알아서 뭐 할 건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할 건데. 너한테, 그리고 나한테. 지금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말마따나 선배는 딱 그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가슴께가 답답해져 목구멍에 맥주를 퍼부으려다가 다시 캔 입구만 손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꾸우욱 누른 후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중요해요.”

“⋯⋯.”

“중요해요. 선배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내가 너무 부끄럽고 슬프니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 거기서부터 비롯된 인간적인 호정. 고된 일상 속 서로 부대끼며 형성되는 끈끈한 동료애.

“⋯⋯나는 선배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그것과는 또 다른 특별한 감정.

돌이켜 보면 경험했던 순간은 무수히도 많다. 잘했다며 뒤통수를 쓰다듬던 투박한 손바닥. 피곤해서 깜박 졸기라도 할 때면 가만히 빌려주던 넓은 어깨. 꼼짝할 힘도 없는 날엔 그냥 입 닫고 얌전히 타라며 선선히 내어주던 등. 난방 망가진 업무용 차량 뒷좌석에서 대충 끌어와 던져주던 작업복 점퍼. 위험하다 싶으면 일단 껴안고 돌아서서 몸으로 막아주던 습관. 까불지 말라고 잔소리하면서도 은근히 미소 짓던 얇은 입꼬리. 눈물 쏙 빠질 만큼 혼내고 난 뒤에 뒤끝 부리면 죽는다면서 사주던 담배. 경력도 나이도 본인이 몇 해는 더 빠르면서 직급은 내 쪽이 더 높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비싼 밥은 네가 좀 사라 하던 능청은 기꺼웠고. 잠은 제발 좀 평범하게 자라며 퉁명스럽게 말해도 정작 식은땀 눌어붙은 내 얼굴 곳곳을 어루만지던 손길은 뜨겁도록 다정했고⋯⋯.

상극처럼 보여도 실은 죽깨나 잘 맞는 파트너. 그런 평가로 선배와 사이좋게 묶인다고 한들 그 속을 백 퍼센트 헤아리기란 어렵다. 유독 내게만 지독하게 굴다가도, 또 돌아서면 유독 내게만 자상하게 굴 때마다. 저 새카만 머리를 온통 깨부숴서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나 속속들이 들춰보고 싶었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후시구로 토우지, 이 인간아. 당신은 정말 꿈에도 모를 것이다.

“뭐?”

“좋아해요.”

연민과 동정, 선망과 동경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애틋했던 감정들이 있었다. 그 감정에서 기인한 낯간지러운 행동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 주제에 우리가 서로를 모르고 나 자신을 몰랐다고 말한다면.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 몰랐으며 똑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겐 이보다 부끄럽고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나 선배 좋아해요.”

혹여 이 관계가 망쳐질까 꽁꽁 묻어둔 진심도 한 번 뱉고 보니 이다음부턴 어렵지도 않고 그냥 기세처럼 말이 나갔다. 맞서는 게 항상 옳다곤 할 수 없지만, 피하는 것 역시 능사는 아니다. 모르쇠도 정도껏 해야지 어떤 인내는 너무 큰 통증을 수반할 수도 있었다. 다치기 위해 안고 있는 마음이 아니다. 그 생각 하나로 기어이 폭탄을 떨어뜨리자, 선배의 표정이 찰나에도 몇 번씩이나 변했다. 선배는 갑작스러운 내 고백에 조금 놀란 듯하다가. 또 내가 무슨 대단한 금기어라도 발설한 사람인 양 허무토록 쳐다보다가. 이제는 또 나이 차이 고작 5살밖에 안 나면서 철없는 어린애의 장난을 받아주는 어른 같은 얼굴을 했다. 그 어울리지도 않는 꼴을 보고 있자니 묘한 오기마저 샘솟아 나는 선배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선배도 나랑 다르다고 생각 안 해요.”

“⋯⋯.”

“세상에 어떤 선배가 단순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좌천당한 후배랑 한배를 타요. 그리고 내가 선배 성격 몰라요? 걱정 끝에, 짜증 끝에 다른 뭔가가 있으니까 온 거잖아요.”

선배의 눈썹이 동요하듯 파도친다. 비독 이 일만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우리는 말하면서도 깊숙이 인지할 것이다. 망가진 거리감에 대한 지적. 늘 타인과 비교하여 조금씩 달랐던 말과 행동의 온도. 때로는 너무 뜨거웠고 때로는 너무 차가워서 기나긴 잠복기를 지나 -- 걸리기엔 참 제격이지 않았느냐고.

“너⋯⋯.”

그때 선배가 나직이 운을 띄웠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면.”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리도 했는지. 한참 만에 성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감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내 행동은 없었던 일이 되지 않지만, 네 생각은 다 망상에 지나치고. 고작 같은 직장 후배한테 쏟는 걱정, 겨우 그 정도의 의미만 있었다면.”

“⋯⋯.”

“그럼 어떡할 건데.”

이젠 선배도 자못 진지하게 나왔다. 다르게는 사나워 보이기도 했는데 나는 어떡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런 전제는 믿기지 않으니 믿지 않을 뿐이다. 말장난 같아도 이게 진실이기에. 당신은 내가 새벽 3시에 순댓국 먹고 싶다고 전화하면 이게 진짜 미쳤나, 하고 잠 묻은 욕지거리 주절주절 흘리면서도 5분 뒤에 나오라고 하던 사람이다. 피의자가 휘두른 짱돌에 내 머리가 터지면 이젠 그딴 잡범한테 두들겨 맞느냐고 실소하다가도 하루 종일 상처 난 부위를 매만지던 사람이다. 수렁에 빠져 끙끙거릴 때면 성가시다 혀 내두르면서도 내 팔을 붙잡아 힘껏 건져 올리던 사람이고, 내가 지금 고백한 감정은 그것들이 모이고 고이다 끝내 넘쳐흐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에 하나 정말 선배가 내게 보인 말과 행동에 아무 감정과 의미도 없었다면. 지금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낭비라면.

“뭘 어떡해요.”

“⋯⋯.”

“그땐 선배 완전 제비 같은 인간인 거지.”

그것도 프로 제비.

순간 내 안에서 지독한 슬픔을 넘어선 노기가 훅 끼쳤다. 진심 꾹꾹 눌러 담아 단호하게 덧붙인 말에 선배의 입술이 뭐? 하고 어느 날의 과거처럼 얼 타듯 벌어졌다. 눈도 좀 동그래지는 게 나쁜 새끼 같은 원색적인 비난보다 프로 제비 쪽이 훨씬 더 타격감 좋았던 걸까. 선배는 황당해 보이는 얼굴로 헛웃음을 연신 떨구다가. 또 지나고 보면 어딘가 석연찮은 듯 한쪽 손으로 자신의 뒷머리를 마구 흩트리다가. 이내 쥐고 있던 맥주캔을 가뜩이나 좁은 우리 사이에 탁 내려놓곤 대뜸 눈 맞추었다.

“넌 네가 안 취하는 거 같지.”

아. 오늘따라 우회적인 말만 골라 해대는 저 입술이 열 받기 그지없다. 선배 입술이 또다시 좋을 대로 움직일 때면 나는 나를 오롯하게 비추는 그 눈동자를 번연히 들여다본다. 그 속에서 분명하게 들끓고 있는 감정은 여태까지 중 가장 여과 없이 붉고 진득한데 말투만큼은 수 빤히 보이는 어린애를 대하는 듯하여 내 딴에는 조금 억울한 심정이었다.

“내가 지금 취해서 홧김에 하는 소리라고 말하는 거죠.”

“네 후회 책임 안 져준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데.”

“나는 내가 책임져요. 그게 후회여도 똑같아요.”

“울잖아.”

너 후회할 때마다 울잖아. 애먼 사람 신경 바싹 말라가게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끔.

“그렇게 울잖아.”

어느새 뻗어온 선배의 손끝이 내 눈 밑을 톡 건드리더니 금세 손길을 바꾸어 깨지기 쉬운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나는 이때까지도 목과 어깨 부근이 좀 경직되어 있었는데, 머잖아 굳은살 박인 손바닥 안쪽에서 은근하게 끼쳐오는 열감을 느끼고부터는 서서히 힘을 빼었다. 뒤늦게서야 느른함이 몰린다. 듣고 보니 나도 참 나지만, 선배도 참 선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까지 내 후회 따위 모르는 척하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해놓고서 이젠 또 훗날 내가 본인 때문에 울게 될지도 모른다며 신경 쓰고 있다니.

나는 뭐라도 반박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어지는 선배의 행작에 그냥 맥 없이 웃고 말았다.

“그 부분은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니까요.”

“⋯⋯.”

“선배가 틈만 나면 나한테 하는 거. 나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그게 오늘인가 봐.”

눈. 귀. 뺨.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타고 내려와 종국엔 입꼬리를 살살 문지르는 거칠거칠한 손끝을 나는 슬그머니 눈짓했다.

“지금 이것도 아무 의미 없어요?”

“⋯⋯.”

“이 다음은요.”

“⋯⋯.”

“후회해, 안 해.”

마침표를 찍는 순간 입술 끝을 어루만지던 움직임도 완전히 멎는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선배와 나 사이에 남아있던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고, 세상이 멈추는 것 같은 착각만이 인다. 날카로움이라고 하기엔 서로를 아프게 찌르는 것이 없고, 긴장감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뜨뜻하고 축축한.

“의미⋯⋯.”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하려는 것이 그리 거창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때가 오면.

“⋯⋯있어.”

“⋯⋯.”

“있고.”

“⋯⋯.”

“안 하지, 후회.”

과연 선배가 평소와 같은 어투로 던진 음절을 하나하나 곱씹을 틈 따윈 없었다. 다시금 시선을 얽는 순간 목덜미는 붙잡혔고 두 눈을 감으면 그대로 당겨져서 입술을 포개었다. 동시에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캔이 툭 밀리며 쓰러진다. 평상 아래로 차가운 맥주가 꼴꼴 흘러 발가락을 움츠러뜨리자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한 선배의 손이 단숨에 내 허리께를 감싸고 본인 쪽으로 끌어당겼다. 신체가 빈틈없이 맞붙고 서로의 갈급한 숨을 먹어 치운다. 마치 일순간의 충동에 불과한 행위가 아니라 오래도록 바라온 일이었다는 것처럼.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골몰한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간 모호하게 방치해 온 마음이 마주 닿았다는 기쁨, 그리고 이 시간 이후 두 번 다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슬픔. 폭 넓게 번져 나가는 감정 위로 선배는 또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하면 그런 나를 알아차린 듯 날렵한 턱이 각도를 달리하여 파고들었다. 차근차근 열 피는 귓속으로 ‘얀마, 집중 안 하지.’라고 말하는 선배 특유의 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에 상념은 저 뒤로. 나는 두 팔을 선배의 목에 감고 바짝 매달렸다. 무더운 봄날의 끝자락에서 겨우 나눈 입맞춤이 더욱 깊어지도록.

새삼 제아무리 깊은 속에 고여 있던 말이라도 소리로 뭉쳐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 온도는 떨어진다는 걸 깨닫는다. 알았다면 우린 진즉에 입부터 맞춰 봤을지도 모를 테지. 나는 비로소 진심이 모여든 혀끝의 진짜 온도를 느낀다. 아. 이렇게나 무겁고 뜨거웠다. 뒤엉키고 설키는 틈 사이로 자꾸만 웃음이 샌다.

“⋯⋯여유 있네.”

“하아⋯⋯. 네? 아, 읍!”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 거기서부터 비롯된 인간적인 호정. 고된 일상 속 서로 부대끼며 형성되는 끈끈한 동료애.

그것과는 또 다른 특별한 감정.

하지만 그리 대단치도 않은 것.

사랑.

/

그해 봄은 여름에 가깝도록 뜨거웠다. 선배의 손길과 눈길이 닿는 곳마다 이를 데가 없이 바짝 약이 오른 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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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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