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블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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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더 블루 8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소장용 결제

진동이 울렸다. 한파주의보 안내 문자였다. 그만큼 날이 몹시 추웠다.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걸었다. 걘 하필 이런 날에 걷자고 했다. 사토루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저를 모셔가려고 대기 중이던 운전기사님을 무시하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고. 오직 내 오른손만이 제가 가진 전부인 양 단단히 움켜쥔 채. 팔자에도 없을 배려를 하겠다며 차이 나는 보폭과 속도를 꾸역꾸역 맞추어 걸었다.

1월에 부는 바람은 폭력적이다. 걸을 때마다 뺨을 후려 맞는 것처럼 몹시도 추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게 고죠 사토루를 꺾을만한 재간이 없어 이 사달이었다. 물론 여태까지의 작태를 미루어 보아 걔 역시 내게 져주는 방법 따위 조금도 모를 테였다. 그렇게 고죠 사토루의 뜻대로 한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왔을 땐 코도 뺨도 죄다 얼어서 새빨개진 상태. 그런데도 걔는 좋다고 킬킬 웃었고.

“웃기니. 추워 죽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선배도 웃고 있거든, 지금.”

신발을 벗던 나도 덩달아 피식 웃고 말았다.

 

 

“따뜻하지.”

따뜻한 물을 적신 손수건이 뺨에 닿았다. 묻는 목소리엔 고저가 미미했지만, 어투 자체는 나긋한 편이라 그런대로 상냥하게 느껴졌다. 응. 따뜻하네. 나 역시 나긋나긋 긍정했다. 그럼 고죠는 이후에도 두세 번 정도 더 얼은 뺨을 살살 닦아내다가 싱크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즈음 나도 소파에서 일어나 큰 방으로 향했다.

공부할 것만 챙겨서 다시 거실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걸 주섬주섬 챙기는 사이에 고죠가 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걔는 새삼스럽게 제 취향대로 꾸며진 방을 -애초에 고죠가 마련한 곳이라 녀석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둘러보다가 침대 옆에 둔 작은 휴지통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아팠어?”

“⋯⋯.”

“아니면 어디 다쳤었나?”

질문을 이해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아마 휴지통 안에서 피 묻은 휴지 뭉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고갤 저었다. 아니, 다친 게 아니고⋯⋯.

“코피 났어.”

“공부하다가?”

“그렇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대답을 흘린다. 말마따나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걔도 그냥 그랬느냐고만 할 뿐 유별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딱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일도 없었다. 나는 그런 고죠한테 잠깐 눈길을 두다가 먼저 거실로 나왔다. 좌식 테이블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두고 소파 아랫부분을 등받이 삼아 기댔다.

간밤에 벌어졌던 작은 소동.

떠올리니 괜히 한 번 코 밑을 문지르게 된다. 당연히 묻어 나오는 건 없다. 어제는 피가 잘 멈추지 않아서 고생 좀 했는데⋯⋯. 오늘은 깨끗했다. 거짓말 같았다.

성적은 늘 하는 만큼 정직하게 나오는 편이었다. 담임 교사는 지금 내 성적으론 1지망 학교에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을뿐더러 전액 장학금을 받아 입학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했지만, 그 말에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최근 꽤 무리하고 있다. 센터 시험까지 이제 2주도 남지 않았고.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있으니 크게 불안한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뭐야~. 갑자기 왜 또 혼자 심각하지?”

“⋯⋯.”

“인상 좀 펴.”

나보다 한발 늦게 나온 고죠가 내 옆에 붙어 앉아 검지로 뺨을 갉작거렸다. 뇌리에서 입시 걱정은 날아가고 연약한 피부를 간질이는 손가락의 감촉만이 남았다. 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갤 슬쩍 내뺐더니 이번엔 머리카락을 가지고 논다. 그러다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척 자연스럽게 귓불로 손을 옮기는데⋯⋯. 평소 타인의 손 닿을 일이 거의 없는 부위라 건드리는 순간 목빗근부터 차츰 굳었다.

“잠깐.”

“이쯤인가.”

최근 들어 고죠 사토루는 나를 자주 만지려고 했다. 그게 말처럼 변태같이 이곳저곳 엄한 곳을 불쾌하게 더듬는다는 건 아니고⋯⋯. 뭔가 끊임없이 나와 닿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군다고 해야 하나.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부쩍 성적 함의가 다분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건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그날부터. 그러니까 내가 자길 좋아하면 자기도 나를 좋아하겠다던 그날부터.

‘선배. 나 안 싫어하는 거 말고. 좋아해 볼래?’

‘⋯뭐?’

‘좋아해 보라고. 나.’

‘⋯⋯.’

‘응? 그럼 나도 그렇게 해볼게.’

일종의 고백도 뭣도 아닌 게 미묘했다. 희한한 전제조건 앞에서 나는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말하지 않았고, 그건 고죠 사토루도 마찬가지였다. 걔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저가 정한 대답을 종용하는 일조차 없이 그냥 내 어깨에 기대어 푸스스 웃기만 했다. 그래서 그날 일은⋯⋯. 그냥 그걸로 끝. 가슴 한구석에 생경한 감정이 고여 잠 못 이루던 밤을 지나 우린 서로의 반경에 서로가 존재하는 일상으로 무사히 되돌아갔다.

‘손 줘.’

‘왜?’

‘잡을 거니까?’

‘⋯왜?’

‘춥잖아.’

‘나 안 추운데.’

‘응. 선배는 상관없고. 내가 추워서.’

그러나, 분명히 있었던 일이다. 결코 없었던 일이 되진 않는다. 고죠의 속내는 물론 나 자신의 감정까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의식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 탓에 원래도 정의하기 애매했던 우리 관계는 내가 고죠 사토루를 전보다 몇 배는 더 의식하면서 더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로 변모되고 말았다. 의식은 의식대로 하고. 의심도 의심대로 하는 그런 이상한⋯⋯.

“읏.”

별안간 민망한 소리가 튀어나와 서둘러 입술을 앙다물었다. 상념에 빠진 사이 귀를 만지는 손길이 더욱 집요해진 탓이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손목을 쳐내려는데 내내 입 다물고 손장난만 치던 고죠가 불쑥 입을 열었다.

“스구루가 이쯤에다가 피어싱을 했어. 두 갠가. 아프진 않았대.”

“그게 나랑 상관있어?”

“없지. 그냥 핑계 좀 대보는 거야.”

“뭐를 위한 핑계인데?”

“글쎄.”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물쩍 회피하고 달아오른 귓불을 두어 번 더 문지르다 멀어진 고죠의 오른손이 돌연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방치된 내 왼손과 덥석 깍지 꼈다. 이제 방해 안 할 테니까 공부해. 걔는 언제 실실 웃었느냐는 듯이 꽤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맞잡은 손에 온 신경이 쏠리는 것을 억지로 다잡아가며 오른손에다가 꾸역꾸역 샤프를 쥘 뿐이다.

좋아해 볼래? 좋아해 볼게.

따각. 따각. 툭. 샤프심이 부러졌다. 사실은 그날 이후로 고죠 사토루를 볼 때마다 마음이 어수선하다. 얘가 앞으로 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그리고 적극적으로 뿌리치지 않는 나도⋯ 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서.

 

 

***

 

 

“졸업하면 뭘 하고 싶어?”

마지막 문제를 풀고 있을 때였다. 지문 위로 뜬금없는 질문 하나가 떨어졌다. 뭘 하고 싶냐고. 선배가 뭐든 필사적으로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나는 지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문제를 풀던 손만 잠시 멈추었다. 저가 내 담임 교사도 아니고 갑자기 진로를 묻는 게 생뚱맞기만 했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가장 큰 목표는 독립이었다. 성인이 되면 큰집에서 깨끗하게 벗어나고 싶었다. 폭력적인 환경 속 마땅한 취미를 찾지 못하여 시작한 공부였지만, 성적을 소홀히 관리하지 않은 건 독립이란 뚜렷한 목표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물론 그 사람들은 졸업과 동시에 날 내보냈을 게 뻔하지만⋯⋯. 아무도 없이 홀로 세상에 내던져질 대비는 충분히 해야만 했다. 그게 학생의 신분으로선 공부였고.

“근데 그건 이미 했잖아. 내 덕에.”

“응. 그래서 이젠⋯⋯.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

대충 둘러대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꾸밈없는 사실이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어떤 일에도 아파하지 않고. 타인에 의해 몸과 마음 무너지는 일 없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서 선택한 전공과 관련 있는 적당한 직업을 가진 다음, 여건이 되면 사람을 돕기도 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 또⋯⋯.

“너한테 갚을 것도 갚고.”

“뭘?”

“졸업하면 그때부터 조금씩 갚을게.”

“그러니까 뭐를?”

“너한테 받은 거 전부.”

항상 마음에 걸렸다. 고죠는 처음부터 뭐 하나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어느 여름. 학생회실에서 눈물범벅인 꼴로 도와달라며 소맷자락을 붙잡았을 때부터. 두 눈이 퉁퉁 부은 꼴로 오피스텔 보안 카드를 건네받았을 때부터. 졸업하면 조금씩 정리해 나가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받은 만큼 갚아 나가야 한다고.

“나한테 말 안 듣는다고 뭐라고 할 처지가 못 되네.”

“⋯⋯.”

“봐. 선배도 내 말 안 듣잖아.”

내 얘기를 듣던 고죠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휘었다.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모양새였다.

“⋯너 화났니?”

“뭐~. 그렇다 치고. 다른 건?”

“화났냐고.”

“다른 건 뭐 없어? 독립 말고. 평범하게 사는 거 말고.”

아닌 척하지만 미묘하게 가라앉은 어투를 알았다. 화났느냔 말을 빙빙 돌려 무시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도대체 화난 포인트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달리 원하는 대답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저가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받은 걸 갚겠다고 고집하는 부분이 거슬렸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에 해당하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없어?”

확실히 기분은 안 좋아 보였다.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아도 기운으로 느껴지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앞에서 나는 부단히도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혹시 듣고 싶은 말이 있어?”

“있다고 하면 당신은 그대로 말할 거야?”

“내가 뭐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나 진짜 서운해서 어떡하지?”

“⋯뭐?”

“근데 선배가 우습고⋯ 기특하기도 해.”

대화가 연신 붕 뜬다. 알다가도 모를 소리만 늘어놓으니 더는 지문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나는 소리 나게 샤프를 내려놓고 눈길을 돌린다. 고죠는 내 예상보다도 더한 무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우습고 기특하다니.

기분 나쁜 건 아니지만, 가만히 듣고 있기도 참 뭐한 말이다. 우리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분명 고죠 사토루지만, 선배로서 후배에게 들을 만한 소린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 무감해 보이는 얼굴 앞에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나는 입도 벙긋 못하고 걔를 쳐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1초. 2초. 3초⋯⋯. 슬슬 마주 보는 게 힘겨워질 무렵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 순간 큼지막한 손이 턱을 붙잡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거였다. 고죠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한 뼘 이상 당겨졌다. 가장 먼저 딸려 온 상체부터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목적이 분명한 완력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력했다.

“아⋯.”

“선배.”

나는 한 손으론 테이블을 짚고 나머지 손으론 고죠의 허벅지를 짚은 채로 올려다봤다. 잠잠한 시선은 미묘하게 나를 빗겨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눈이 아니라 인중과 입술 그 어디쯤을 향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어여쁜 얼굴이 각도를 틀면 눅눅한 숨결이 다가왔다. 그즈음 정상적으로 뛰던 내 심장이 바쁘게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눈도 섣불리 깜박일 수가 없었다. 깜박이는 순간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살다 보면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아빠의 죽음이 그랬고, 또 지금이 그렇다. 이럴 땐 차라리 눈치 없는 사람이면 좀 나았을 텐데 나는 그렇게까지 눈치 없지도 않았다. 이다음에 벌어질 장면이 눈꺼풀 안쪽에 훤히 그려졌다. 마음처럼 빠르게 굴러가지 않는 머리에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마침내 고죠의 입술이 열리면 나의 사고는 완전히 정지했다.

“피해도 돼.”

“고⋯.”

“근데 피하지 마.”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어느 쪽이든 내 의사는 상관없다. 피하지 마, 라고. 그 나직한 음성을 덧씌운 문장에 마침표가 찍히자마자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행위와 단어를 빠르게 연결하지 못하고 눈부터 질끈 감았다. 축축한 혀가 아랫입술을 살금살금 핥아내고 그 생경한 감각에 움찔, 입을 살짝 벌리면 그 틈으로 경험해 본 적 없는 열기가 쏟아졌다.

부드러운 듯 부드럽지 않았고, 여유 있는 듯 여유롭지 않았다. 주저 없이 밀고 들어온 혓바닥이 입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쪽, 쪽. 조용한 방 안을 울리는 젖은 소리. 점차 엉키는 호흡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싹한 감각이 몰아쳤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경직된 고개가 숨까지 모자란 탓에 조금씩 뒤로 밀리자 뺨에 머물던 손바닥이 뒤통수를 붙잡아 바짝 끌어당겼다. 열 오른 볼에 고죠의 높은 코가 깊게 눌렸다.

‘선배. 아직도 나 싫어해?’

‘나도 선배 ⋯좋아해 볼게.’

‘아. 이러니까 우리 되게 좋아하는 거 같다.’

나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숨을 지난날의 기억으로 대신 채운다. 혀끝에서 끈적하게 얽혀드는 것이 타액이 아니라 절절 끓어 녹아내린 내 심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울고 싶어진다. 나는 뭐 하나 똑바로 잡히지 않는 테이블 위만 손톱으로 바득바득 긁다가 절박하게 손을 옮겨 고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기만 하던 행동에도 서서히 제동이 걸렸다.

다소 충동적이었던 입맞춤은 고죠가 내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고 떨어지는 것으로 끝을 알렸다. 나는 가쁜 숨을 색색 몰아쉬고 천천히 닫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고죠가 콩, 하고 가볍게 이마를 맞댔다.

“하하. 사고 쳤다.”

웃음기 녹아든 속삭임. 촉촉이 젖은 시야로 스미는 바다를 닮은 눈동자. 그것들이 언젠가처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몰고 와 내 어수선한 마음을 온통 뒤덮으면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몸을 떨 뿐이다. 고죠 사토루가 앞으로 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적극적으로 뿌리치지 않는 나도 고죠 사토루와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서. 무서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근데 하나도 안 미안해.”

어쩌면 알게 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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