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블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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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더 블루 3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소장용 결제

“혹시 처음 업혀 봐?”

“⋯⋯.”

“목. 똑바로 껴안는 게 좋지 않겠어?”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일종의 경고임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예상이 가능한 뒷말이라 명령 같은 제안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걸 울며 겨자 먹기라고 하던가. 나는 마지못해 뻣뻣하게 걸쳐 놓은 팔에 힘을 주고 너른 등에다가 얼굴을 파묻었다. 동시에 목 안을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잘하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구분할 수 없다. 말하는 뉘앙스가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으므로. 나는 입술을 굳게 닫고 윗니와 아랫니를 꼭 붙이기만 했다. 허리에 둘린 외투며 오금에 닿은 피부의 감촉이며 뭐 하나 불편하지 않은 게 없었다.

“지금처럼 계속 잘 매달려 있어, 선배.”

감히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학교 보건실에서는 소독약과 커피 믹스가 뒤섞인 오묘한 냄새가 난다. 아마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일 테다.

보건 교사 오카다 씨는 평소 유명한 성미대로 느긋하게 예정된 수업을 준비하다가 해당 교실로 이동하기 직전, 교내 유명 인사인 고죠 사토루와 걔한테 업혀 들어온 나를 보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호들갑 떨었다.

“어쩌다가 이랬니?”

“떨어졌어요.”

“뭐? 떨어져?”

“계단에서.”

다친 부위는 입이 아닌데도 상황 설명은 오로지 고죠 사토루의 몫이었다. 그 덕에 나는 입 한 번 제대로 뻥긋하지 못하고 문에서 가장 먼 6번 침대에서 치료부터 받았다. 피가 줄줄 나던 왼쪽 무릎에는 드레싱 밴드가 붙었고, 그 위에다가 수건을 덧대 얼음찜질을 했다. 응급처치를 마친 오카다 씨는 머리부터 떨어진 건 아니라니 다행이라고 안도하다가 이내 수업 안 들어가시냔 고죠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더 늦을세라 서둘러 보건실을 빠져나갔다.

타이밍이 좋다고 말할 순 없겠다. 하필 보건실에 누워 있는 다른 아이들도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라도 나 혼자만 남았다면 편했겠지만, 인생은 늘 내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도 않는다. 침대 헤드에 등허리를 기대고 앉아 있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심쩍은 시선이 향한 곳엔 봐도 봐도 낯설기만 한 고죠 사토루가 있었다. 내 옆자릴 지키며 다친 무릎을 응시하는 걔 얼굴은 감흥 없는 어투만큼 지루해 보이기만 했다.

“⋯⋯.”

다시 떠올려도 일반적인 사고였다.

내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다. 며칠째 가시질 않는 두통이 원인이었다. 계단 앞에서 훅 끼쳐온 어지럼증에 잠시 주춤한다는 게 발을 헛디뎌 그대로 굴러떨어질 줄은 나도, 내 옆에 있던 야마자키도, 그 아래에 있던 고죠 사토루와 걔 옆에 있던 친구로 추정되는 인물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왜?”

⋯⋯그래도 잡아 줄 수 있지 않았나.

물론 마음이 내켜야 했겠지만, 위치로 보나 뭐로 보나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도 내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는 순간 얘는 두 손 놓고 나를 보기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제 친구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잡아 주려는 걸 슬쩍 막기까지 했다. 내가 보기 좋게 굴러서 무릎부터 떨어질 때까지도 고죠 사토루는 꼼짝하지 않았다. 사고의 원인도 결과도 전부 내 책임이었지만, 미묘하게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이었다.

“⋯⋯아니야.”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애써 말을 가리지만, 실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언제는 고죠 사토루를 이해한 적이 있었느냐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하다고 느낀 탓이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를 방관할 땐 언제고 정작 피를 보이고 나서야 다가와서 ‘업힐래?’ 하고 묻는데⋯⋯. 나로선 이 행동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다.

“아니긴.”

고죠는 맞은 편 5번 침대에 털썩 앉더니 곧 음험한 미소를 띠며 다리를 꼬았다. 내 속내를 어느 정도 아는 눈치였다.

“해 봐.”

“안 해.”

“왜?”

“그러고 싶어.”

“있잖아, 선배. 그런 식으론 불을 지피는 거밖에 안 되거든? 그리고 그런 대사는 보통 내 거 아니야?”

“⋯⋯.”

“말해야 할걸. 내가 듣고 싶으니까.”

한없이 자기중심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있는 나는 나도 모르게 혀끝으로 아랫니를 문지르고 있었다. 경박한 웃음 뒤에 숨겨진 고압적인 태도를 마주하자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나를 통째로 관통하는 벽안을 피할 길이 없다. 나는 죄 없는 손끝만을 매만지다가 탄식했다.

“관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니.”

“⋯⋯.”

“싫어하는 사람한테 보이는 관심치곤 조금 지나치다 싶은데. 받는 쪽도 부담스럽고.”

애초에 싫어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고죠는 단 한 번도 내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한 적도 없었다. 눈에 보일 때마다 끊임없이 신경 쓰이게 했다는 뜻이다. 내가 싫다면 그냥 안 보면 되는 일인데 걔는 자꾸만 나를 봤고, 나더러 저를 보게 했다. 나는 고죠 사토루가 학교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그런 녀석이 내게 시간을 할애한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

“시간 아까운 일은 그만하는 게 좋지 않겠니.”

그저 담담하게 전해본다. 충고보다는 조언이라 말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전하는 최선의 조언. 일단 내 의도는 그러했는데 고죠 사토루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어느새 새하얀 낯에서는 웃음이 거두어졌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매가 깊은 고민이라도 하듯 간헐적으로 달싹였다.

고죠가 다시 입을 뗀 건 한참만이었다.

“역시 좀 그렇지?”

“⋯⋯.”

“그럼 그냥 확⋯⋯ 좋아해 버릴까?”

“뭐?”

무릎 위에 올려 둔 얼음주머니가 피부에 주르륵 물길을 내며 미끄러졌다. 내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반면에 형편없는 대답을 내놓은 고죠의 얼굴 위로는 묘한 들뜸마저 엿보였다. 얼이 빠진 나는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걔의 무표정에 가장 큰 일조를 했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가는 걸 보곤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건 지금껏 내가 본 어떠한 사람의 미소보다도 화사했고.

“응? 어떠려나.”

거북했다.

 

 

***

 

 

반신 거울 앞에 서서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린다. 문득 내게 죽을 거 같은 얼굴로 열심히 산다던 고죠 사토루가 떠올라 자조적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혹시 그게 이건가. 이런 얼굴인가. 정답이라면 이제야 조금 알겠다. 그럴만하다는 생각이다. 거울 속에 비친 제 꼴은 한없이 우울하고 음침했다. 꼴 보기 싫을 만도 했다.

‘⋯⋯왜?’

간밤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히로토의 눈이 평소와 조금 달라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잘못되었다고.

‘히로토⋯⋯.’

생각만 했다.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치는 몸짓이 가엾게도 금세 벽과 등이 맞닿았다. 두려움에 짓눌린 몸뚱어리가 벽을 타고 주저앉으면 나보다 한 뼘 반은 더 큰 히로토는 나를 따라 자세를 낮추고 손바닥만 한 드레싱이 붙은 무릎을 손으로 콱 쥐었다. 대놓고 아파보라고 한 행동이라 목구멍에서부터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렁그렁 눈물 고인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억센 손아귀가 목을 틀어쥐었다.

‘히, 히로, 끅. 허억⋯!’

잡고 누른다. 행위 자체는 단순했다. 단순하면서 폭력적이었다. 얘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건가. 그럼 나는 이대로 죽는 건가. 순차적으로 도달한 생각 끝엔 숨통이 꽉 막혔다. 산소를 갈구하는 몸뚱어리가 벌벌 떨리고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공포에 시야가 자꾸만 점멸했다. 숨이 꺼떡꺼떡하며 눈깔이 저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히로토의 섬뜩한 숨소리 위로 별안간 다른 이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근데 선배. 고죠 사토루 같은 목소리.

어디 아파? 아니, 고죠 사토루의 목소리.

미쳤어.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위치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히로토는 아마도 목을 조르다가 내가 쓰러지니 그냥 나간 듯했다. 나는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이내 목에 남은 손자국을 발견하곤 우울해졌다. 이런 걸 당당히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다. 그렇게 정신 차리자마자 다급하게 옷장을 열어 가을에나 입을 법한 트랙탑을 꺼내 들었다. 목 끝까지 지퍼를 올려 흉측한 손자국은 가릴 수 있었지만.

“선배. 지금 몇 월이게.”

“⋯⋯.”

“정답은 7월이야.”

지금은 7월이었다.

나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차림이라는 건 안다. 그러니 내 차림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뚫어지라고 응시하며 한마디씩 얹는 고죠 사토루를 무시하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물론 내 쪽이 아니라 고죠 사토루가 한계인 듯싶었다. 평소 성미를 보았을 때, 오전부터 계속된 내 무미건조한 반응이 내키지 않았을 걔는 손안에서 부스럭거리던 사탕을 내 앞으로 툭 내던짐으로써 제 참을성이 바닥났다는 걸 표현했다. 핑그르르 나뒹구는 막대 사탕이 수학 문제를 절묘하게 가렸다. 아마 거슬리는 태도는 그쯤하고 제게 주목하라는 뜻 같았다.

“안 더워?”

“안 더워.”

“⋯⋯.”

“말했잖아. 감기라고.”

아마 스무 번째 같은 질문을 하고 스무 번째 같은 대답을 한다. 그건 고죠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걜 속이려고 하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녀석이 속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고죠 사토루에게 나를 괜히 들쑤시지 말고, 건드리지 말라는 티를 내는 거면 충분했다. 선 넘지 말라는 경고. 나는 이번에도 노골적인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문제를 가린 사탕만을 옆으로 쓱 밀어냈다.

불편하다. 항상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그랬다. 왜 하필 그때 그 순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떠올렸을까. 호기심만으로 똘똘 뭉친, 그다지 다정하지도 않은 목소리를.

까무룩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단단히 미쳤다곤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고죠 사토루를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신경 쓰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좋든, 싫든. 어쨌든 고죠 사토루라는 존재가 내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거다. 의식이 멀어지는 순간까지도 그 허상을 붙잡고 늘어질 만큼.

그렇게 생각하니 멀쩡하던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미운 정이라고 해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스스로 납득 가능한 이유를 찾다가 무심코 손목을 삐끗하는 순간이었다. 앞에서 픽픽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만을 흘리던 고죠가 우당탕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큰 소리에 놀란 내가 숙였던 고개를 홱 쳐들면 걘 이미 내 앞에서 모습을 감추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묘한 긴장감을 유발했다.

“오늘따라 심하네.”

“⋯지금 뭐 하는 거야?”

“선배. 내가 항상 궁금했던 게 있거든?”

“고죠.”

“그러니까 오늘은 좀 알아야겠어.”

“너.”

“실례 좀 할게?”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목 끝까지 올려 잠갔던 지퍼가 훅 내려가더니 옷깃 부근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덕분에 훤히 드러나게 된 목을 고죠는 망설임 없이 한 손으로 콱 움켜쥐었다. 힘주어 조르는 게 아니라 그저 대고만 있을 뿐이었지만, 간밤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막을 수도 없었다. 고죠는 제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은 나를 알아차린 거 같았으나, 손을 떼진 않았다. 그만두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깨가 의지와는 별개로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나보단 작고.”

“놔⋯.”

“여자는 절대 아니네.”

한 손을 이리저리 틀어가며 목에 남은 손자국과 비교 가늠해보다가 피식 웃는데 그 소리에 혼미하던 정신이 좀 차려졌던 거 같다.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고 선 고죠가 나더러 긴장을 풀라는 것처럼 손끝으로 목울대를 설설 건드렸다. 무서웠어? 나는 태평하게 지껄이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걔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물론 말이 그렇지, 실은 내가 밀어낸 것보단 본인이 순순히 밀려나 준 것에 가까웠다.

“혹시 그거 취향이야?”

“뭐?”

“존중은 하는데.”

“야.”

“아니라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잖아.”

요동치는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불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 날아들었다. 호흡은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거친 상태였다. 나는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고, 와중에도 공포라는 건 쉽게 가시질 않는 감정이라 둥글게 말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고죠의 두 눈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죽 훑는다. 최소한으로만 움직이는 눈동자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나를 몰아세우겠단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게 맞을까나.”

“네가 생각하는 게 뭔데.”

“선배도 지금 생각하는 거.”

“너 지금 무슨⋯⋯.”

“괜한 헛소리할 생각은 말고. 그 정도로 머리 안 나쁜 거 아니까.”

의자에 털썩 앉은 고죠가 한쪽 팔로 턱을 괴고 날 올려다봤다. 알면서 묻는 거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착각이라 둘러댔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던 거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에 말도 행동도 전부 묶인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숨겨오면서도 누군가에게 미움받으며 산다는 게 정말 큰 치부일까? 의심했었는데, 막상 진실이 파헤쳐지니까 알겠다. 수치심에 귀가 다 뜨거웠다.

“언제부터야?”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니라곤 안 하는구나.”

“약점이라도 잡았다고 생각하니?”

“헤에. 이거 약점이었어? 그건 미처 몰랐네.”

“대답해.”

“좀 웃어도 되지?”

“뭐?”

“아니~. 그렇잖아. 선배가 나한테 뭐 그리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약점이란 소릴 들먹여. 내가 선배 약점 잡아다가 뭐에 쓸 수 있는데?”

“⋯⋯.”

“그래도 참 어지간히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야.”

“고죠.”

“울 거 같은 얼굴인데.”

나를 떠보는 얼굴은 마치 흥미로운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앞에서 나는 새삼 나 자신의 초라함을 상기했다. 여유만만한 고죠의 낯짝을 보고 있자니 순간 발아래가 푹 꺼지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지난날의 내 모습이 그저 가여웠다. 그런 내 앞에 서 있는 건 나와는 정반대의 삶을 영위했을 고죠 사토루.

싫다. 너무 싫다. 이런 나를 왜 하필 너한테⋯⋯.

“진짜⋯⋯ 싫다.”

“⋯⋯.”

“내가 왜 너랑 이런 식으로 부딪혀야 하니.”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내뱉곤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고죠의 반응 따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눈물이 그득 차오른 시야가 뿌옇다. 심장은 좋지 않은 의미로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 드는 뺨을 손등으로 거칠게 쓸었다.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후회한다. 어차피 말해도 듣지 않을 거란 핑계를 앞세워 안 그래도 벅찬 내 삶 한 귀퉁이를 밀고 들어오는 고죠 사토루를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았던 일을. 내가 싫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는 행동이라곤 미운 어린아이처럼 한 번씩 신경을 긁을 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진 않으니까. 어느샌가 나도 그냥 안일하게만 생각했던 거다. 좀 피곤하긴 해도 선을 넘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또 이러다가 말겠지. 하며.

공부가 될 리 없다. 애초에 오늘은 별로 할 기분도 아니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자리를 지켰다. 곧장 집으로 들어가진 못하겠지만, 하릴없이 길바닥을 헤매다 보면 시간은 또 흐를 것이다. 그렇게 덜덜 떨리는 손을 모르는 척. 잡히는 물건을 가방 안에다가 대충 쑤셔 넣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내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고죠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가방을 낚아챘다. 반동이 컸다. 미처 다 닫지 못한 가방에서 필기구가 쏟아졌다. 책이며 필통이며 전부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죠가 슬리퍼 앞코로 필기구를 툭 건드렸다.

“내가 뭘 했다고 화풀이를 하지? 선배를 두들겨 팬 게 혹시 나였나?”

“비켜.”

“선배.”

“그만 좀 해!”

“도와줄까?”

그때 쏟아진 필기구 사이로 예기치 못한 제안 하나가 떨어졌다. 일상적인 말투를 뒤집어쓰고 떨어진 폭탄. 나는 일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상황 인지까지 약간 늦는 바람에 호흡이 잠깐 멈추었다. 이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턱을 치켜들면 고죠는 다시 한번 똑똑히 말했다.

도와줄까?

“아니다.”

“⋯⋯.”

“도와달라고 말해봐.”

내게 떨어졌던 제안이 금세 명령으로 바뀐다. 사실상 내 의사는 불필요하다는 것처럼 오로지 고죠에 의해 선택지는 하나로 좁혀진다. 이미 정해진 답을 채근하는 얼굴에선 네가 지금 말만 하면 내가 뭘 못 해주겠냐는 듯한 근거 있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도와 달라고 해. 그럼 썩은 동아줄 따위가 아니라 진짜 황금 동아줄을 내려줄게.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장담하는데.”

⋯⋯그리고 나는 지속적인 학대에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걔가 말을 덧붙일 때마다 부끄러움과 불쾌함이 엉겨있던 감정은 저 아래로 가라앉고, 그저 적선하듯이 내미는 저 손을 붙잡고 싶단 욕망만이 솟구쳤다.

“후회 안 할걸.”

불확실한 관계의 우위가 확실하게 점쳐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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