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블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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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더 블루 외전 : 파스텔 블루 1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소장용 결제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팔자는 타고나는 거라고.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정해지는 거라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고, 바꾸고자 하여 용을 써도 바꿀 수가 없는 것.

물론 상팔자 중 상팔자 고죠 사토루는 그 논리 축에도 안 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닌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거라 믿는 쪽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재미도 없었고, 가치를 따지는 일은 더욱이 희미했다.

“호텔. 큰 애한테 넘겨라.”

고죠 家. 넘치는 부와 명예를 갖추었으나, 그 안을 후비면 고루하기 짝이 없는 집안.

고죠 사토루는 훗날 자신이 짊어질 가문을 겨우 그 정도로만 소개했다. 그리고 그곳에 소속되어 갈수록 따분해져 가는 나날들이 지겹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죽을 만큼 열심히 사는 이 집안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

“말도 안 돼요!”

“아버지. 제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혹은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이 집안의 장남과 차남과 장녀의 얼굴 따위를 보는 일.

“웃기네.”

그래봤자 후계자는 나인데.

 

  

“아침에 걸렸다며.”

날씨가 좋았다. 복도를 거닐던 게토가 운동장 쪽으로 난 창문을 끝까지 열어젖혔다. 익숙한 몸짓이었다. 팔 한쪽을 난간에 걸치면서 가볍게 웃자 고죠는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로 설렁설렁 걸어와 그 옆에 섰다. 한 손엔 빨대 꽂은 요구르트가 들린 채였다. 교문에서 이름 적힌 거지? 이어지는 물음에 고죠가 심드렁하게 고갤 끄덕였다.

“응.”

“야가 선생님이 직접 서 있었나? 운이 나빴어. 그런 일은 드문데.”

“알아?”

“뭐가?”

“오른쪽.”

창문 너머 운동장 한 지점을 뚫어지라고 응시하던 고죠가 턱짓했다. 게토는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곳을 바라봤다. 거리가 좀 있는지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는 정성도 발휘했다. 지금 벤치 지나가잖아. 오른쪽. 간결한 설명이 실시간으로 덧붙여진다. 게토가 모양 좋은 눈썹을 꿈틀하다가 마침내 아는 얼굴과 이름을 연결하며 표정을 풀었다.

“학생회 임원이잖아.”

“쟤가 잡던데.”

“⋯⋯선배야.”

무지에서 오는 오류라기보다는 자만에서 오는 오류였다. 고죠가 생각 없이 내뱉은 짧은 문장에서 게토는 익숙하게 오류를 찾아 바로잡았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오른쪽 학생은 동급생이 아닌 선배임을 똑바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가르치는 보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고죠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갑자기 팔을 잡길래.”

“응.”

“암살자인 줄 알고 때렸어.”

“뭐?”

남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고백하다니. 게토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죠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죠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재연이라도 하듯이 제 왼손으로 오른손을 찰싹 때리며 웃기만 했다.

“한 이 정도?”

반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가 기가 막혔다. 게토는 못 말리겠다며 엄지로 눈썹 뼈를 꾹 눌렀다.

“심했구나. 선배가 놀랐겠어.”

“아니지. 놀란 건 이쪽이 먼저니까.”

“그래도 손부터 나간 건 문제야. 다음에 보면 사과하지 그래?”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안 드는데. 애초에 허락도 없이 잡은 게 문제였고. 그런데 저 사람 유명해?”

“왜?”

“네가 얼굴만 보고 바로 알았잖아.”

“우리 학교는 특히 학생회가 활동을 많이 하니까. 유명하다면 유명하려나. 교무실 가면 자주 봐. 공부를 꽤 잘하는 거 같아. 교사들이 다들 좋아하거든. 예뻐하는 게 눈에 보여. 이 시대의 참된 인재? 그런 거겠지.”

“에. 놀랍네. 예쁨 받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던데.”

“사토루⋯⋯.”

게토의 혀끝에서 탄식이 그치지 않는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지적할 게 너무나 많았다. 특히 방금 발언은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듣기에도 무례한 발언이었다. 게토는 표정을 뚝뚝하게 굳히고 그런 말 하면 못쓴다며 주의 줬지만, 고죠는 이번에도 들은 체 만체했다. 대충 착한 척하지 말라면서 토하는 시늉만 하다가 다시금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고죠가 정색하는 게토를 뒤로하고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잠깐⋯⋯.’

갑작스럽게 팔을 붙잡아 당기던 손길. 반사적으로 뒤돌았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이 닿은 곳은 빨갛게 물든 손목이었다.

‘미안. 놀랐니?’

그다음은 퍽 절절한 사연이라도 있어 보이는 듯한 눈망울.

‘혹시 아팠어?’

대부분 그렇지만 저보다 한참 작은 사람이었다. 고죠는 제 기억 속 어렵지 않게 사과하던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왼손으로 내쳐진 손목을 연신 문지르는 행동이나 미세하게 굳은 입매 따위가 누가 봐도 묻는 본인이 더 아프고 놀란 모양새였는데, 와중에도 제게 명찰이 없어서 그랬다며 반 번호 이름을 대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누군가에게 어여쁨 받기는커녕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듯한 낯빛이었다. 그런데도 아닌 척 소임을 다하려는 꼴이 낯설지 않아서 등 돌리는 것에 시간이 좀 걸렸다. 정말이지 거북할 정도로 낯설지 않아서 조금⋯⋯.

고죠는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여전히 운동장 한 지점을 응시했다. 쪼로로로록.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나의 점으로만 보일 뒤통수를 바라보며 빨대를 쭉 빨았다. 쪼로로로록. 텅 빈 소리가 요란했다.

 

 

***

 

 

계기와 목적은 뚜렷할수록 좋은 편이지만, 반드시 분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의인 고죠 사토루는 그날을 기점으로 목적 불분명한 관찰을 시작했다. 관찰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봄.

“오늘도 죽는 상으로 일하고 있어.”

“그래. 넌 오늘도 시작이고.”

“저건 누가 봐도 완전 무리 아니야?”

정정한다. 솔직히 관찰이라는 명사를 붙일 정도까진 못 되었다. 행위가 그 정도로 거창하지는 않았다. 본인 시간 작정하고 들여서 한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할 만큼 그는 태생적으로 사람에게 성실하지 못한 편이었다. 그러니 이건 관찰이라기보다는 그냥⋯⋯ 발견에 가까웠다. 우연히 밟은 그림자에 눈길이 가는 거였다. 무조건 봐야겠다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지나가면 눈이 알아서 좇았다.

“다리가 좀 이상하지?”

“쓰레기.”

“아니. 걸음걸이가 말이야.”

오해 살만한 단어 선택은 충분히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게토라면 적절치 못했다고 주의만 줬겠지만, 이에이리는 가차 없었다. 쓰레기라 부르는 행동엔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한두 번 뱉어보는 솜씨가 아니었다. 다소 차가운 반응에 헹! 하고 우는 척하던 고죠는 곧 능청스럽게 말을 정정했다. 이에이리가 “걸음걸이?” 하며 말꼬리를 물었다. 그녀가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박스 두 채를 안고서 강당으로 향하는 인물에게 눈길을 던졌다.

“잘 모르겠는데. 게토 네가 보기엔 어때?”

“그냥 무거워서 비틀대는 거 아닐까?”

“땡. 둘 다 틀렸어.”

“문제 풀 생각 없거든?”

“아픈 거 같아.”

그리고 아마도. 내 말이 정답일 거야. 우리 형이랑 누나가 아버지한테 잘못 맞으면 딱 저렇게 걷거든.

고죠는 미묘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타인이 들었을 때 유쾌하지 못할 뒷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건 의미도 없었다. 매분 매초 모든 게 경쟁이고 득과 실을 따져야만 분이 풀리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 눈치는 자연히 길러지게 되어 있다. 보통의 기준치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빠른 편이니 그 정도 내막이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진 추측에 불과했으나, 고죠 사토루는 감마저 좋은 편이었다. 거기에 경험이 더해지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혼자만의 비밀을 껴안은 그가 창문 바깥으로 상체를 더욱 기울였다. 이에이리가 코웃음을 쳤다.

“아. 그러셔. 그래서 걱정이라도 돼?”

“전혀.”

“⋯⋯.”

“근데 궁금하긴 하네.”

도대체가 알고 싶다는 건지, 모르고 싶다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으니 돌아오는 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뿐이다. 질린다는 얼굴로 동급생의 기묘한 작태를 관망하던 이에이리는 마침내 그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가 난 됐으니까 너희 둘이 열심히 궁금해하라며 자리를 피했다.

“아, 너희⋯⋯.”

그리고 얼떨결에 ‘너희’에 묶여 남게 된 게토는 난처한 낯빛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난감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볼 때마다 혼자란 말이야.”

“⋯⋯.”

“원래 학생회가 일이 많은가? 아니면 저 사람만?”

게토는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대답하는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게토 스구루도 눈치라면 알아주는 인간이었다. 자각하지 못하는 거 같길래 꼬집어 말한 적은 없었으나, 솔직히 관심이 아니라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게토가 묘하게 들뜸마저 엿보이는 고죠의 옆태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서 그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사토루.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응.”

“그렇게 궁금하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역질문을 던진 순간이었다. 고죠가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과장을 좀 보태어서 숨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고죠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잘 빚은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고죠의 뜻밖의 행동에 덩달아 당황한 게토가 그 이름을 재차 부르면 그제야 눈꺼풀이 껌벅껌벅 느리게 닫혔다가 열리기를 반복했다.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가 뜬 고죠가 말끝을 늘였다.

“그럴까?”

이윽고 튀어나온 세글자는 게토의 제안이 솔깃했음을 인정하는 세글자였다. 고죠가 아니면 됐고 식의 제안을 긍정하는 순간 활짝 열린 창문 안쪽으로 바람이 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봄꽃 만개한 나무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모양 좋은 입꼬리가 퍽 기분 좋게 휘었다. 동시에 무언가를 깨달은 게토는 슬그머니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보이는 이미지는 예쁠지언정 썩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괜한 말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마워, 스구루.”

아. 역시.

속내 모르게 웃는 얼굴이 영 불길하여 게토 스구루는 확신했다. 저는 방금 고죠 사토루 안에 있던 무언가를 자극했음이 분명하다고.

 

 

***

 

 

돈을 다루는 일이 쉽다. 사람을 다루는 일이 쉽다. 그러니 돈으로 사람을 다루는 일은 아주 쉽고 간단하다. 고죠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그런 걸 배웠고, 세상 밖에 나와서는 필요할 때마다 잘 써먹었다. 나름 반듯한 마인드를 가진 인간도 돈 앞에선 웬만하면 움직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단언컨대 고죠 사토루의 기억 속에서 그게 통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듬해 4월.

한 학년 위의 선배를 향한 흥미와 관심이 식지 않은 채로 2학년이 된 그는 이번에도 비슷한 방법을 통해 학생회에 들어왔다.

“안녕.”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고죠 사토루의 지대한 관심을 빨아들이고 있는 상대가 그를 한껏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

“음.”

고죠는 제 상상과 동떨어진 현실을 마주하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별 의미 없는 인사인데도 그녀는 순수하게 받지 못하고 불편한 기색만을 내비쳤다. 척 봐도 저한테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인데 함부로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건 그녀가 말을 아낄 줄 안다는 뜻이었으나, 고죠는 그마저도 우습다면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허락도 없이 남의 팔을 덥석덥석 붙잡을 땐 언제고, 인제 와서 겁을 내는 듯한 꼴이라니.

“뭐라고 부르면 돼?”

하지만 상대가 먼저 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먼저 가면 되는 일이다. 어렵지도 않고, 못할 일도 아니었다. 습관처럼 다리를 꼬고 앉은 고죠가 그녀의 이름을 알면서도 가슴팍에 매달린 명찰부터 쳐다봤다. 한참 동안 두 눈으로 그 이름을 아로새기던 고죠는 마침내 입을 열어, 제 혓바닥 위에 그토록 발음해보고 싶었던 이름을 얹었다.

“(―)?”

반응은 빨랐다.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무슨 짓이야?”

“마음에 안 들어?”

“갑자기 이름만 달랑 부르는 경우가 어디 있니. 나는 네 친구가 아니야. 선배라고 해.”

“아. 그래.”

정론이군.

유복함과 특별함으로 무장한 환경은 고죠 사토루를 오만불손한 인간으로 자라게 했지만, 그는 타인의 말을 들어줄 줄도 아는 인간이었다. 물론 ‘듣는다’와 ‘들어준다’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고죠는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더 마음을 곱게 써보기로 했다. 뻔한 정론에 질색하다가도 이내 “좋아, 선배.” 하며 흔쾌히 바라는 대로 불러주었더니 그녀가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마도 이름이나 선배나 불편하게 다가오는 건 비슷한 모양이었다.

알기 쉽네. 속으로 중얼거린 고죠가 한쪽 팔을 세워 턱을 괴었다.

“선배.”

“뭘 자꾸 부르는 거야⋯⋯.”

“웃어 봐.”

다짜고짜 뱉은 언짢은 요구에 날카로운 정적이 내렸다. 화자가 부탁처럼 말하지 않았으니 청자에게 부탁처럼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죠 사토루의 태도며 어투며 그냥 내가 보고 싶으니까 어디 한번 웃어 보라는 거였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입술만이 눈치도 없이 바람 새는 소리를 흘렸다. 고죠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 침묵하는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허리를 기댔다. 또한 이번에도 속으로만 말했다.

아. 웃어 보랬더니 되려 찡그리고 있네. 그럴수록 더 보고 싶어진다는 걸 당신은 잘 모르나 봐.

그날부터였다.

고죠는 후계자 수업을 주말로 미루고 평일 오후엔 학생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6시 38분. 언제나 같은 시간에 맞춰 학생회실 문을 열면 처음 몇 번은 놀라는가 싶던 그녀의 표정도 갈수록 익숙함과 지겨움으로 변해가는 게 눈에 보였다. 뭐든 고루한 게 질색인 그는 그런 사소한 변화를 나쁘지 않게 여겼지만, 진실로 보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게 성미에도 안 맞는 짓을 한 지도 어느덧 한 달째.

“⋯⋯너 할 거 하지 그러니.”

고죠 사토루는 아직도 그녀의 우울한 얼굴밖에 모른다.

“하는 중이야, 지금.”

고갤 처박고 공부만 하니 목이 아플 법도 했다. 그녀가 슬쩍 고갤 드는 순간 눈이 마주치는 건 필연적이었다. 고죠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피식 웃기나 하지 피하는 법이 없었으나, 그녀는 찰나의 어색함도 견디지 못하여 재빨리 노트 안으로 도망쳤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너 할 거나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문장 속에서 부담스럽다는 뜻을 읽어 낸 고죠가 나른한 미소를 흘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촘촘하게 훑었다. 할 일이야 말처럼 이미 충분히 하고 있었다.

당신은 매사에 섬약한 기세로 성실한 사람. 우울한 얼굴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은 하는 편이지만, 실은 골라내고 삼키는 말이 훨씬 많은 사람. 마치 일찍이 삶의 방식을 그렇게 정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줄줄 늘어지는 생각만큼 턱을 괴고 있던 고죠의 상체도 책상 위로 눕다시피 늘어진다. 자세는 한없이 비뚤어지는 와중에도 시선은 그녀에게 콱 박혀서 빠지지 않은 채였다. 사실 매일 같이 반복하는 행위지만, 이 행위가 지겹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고죠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스스로 놀랄 만큼 지겹지 않더라고. 이따금 그녀의 모습에서 제 형제들이 떠올라 거슬리긴 하는데 신기하게 질리진 않더라고. 원체 사물이든 사람이든 특별히 애착하는 법이 없는데도. 그래서 뭐든 쉽게 떠나보내는 버릇이 있는데도 그렇더라고.

“피곤해?”

“신경 쓰지 마.”

“내가 신경 쓰는 것처럼 들렸어? 그냥 물어본 건데.”

“⋯아니. 그렇게 안 들렸어. 그냥 내가 실언했어.”

앉은 자리에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던 그녀가 피곤한 기색으로 말을 고쳤다. 정말로 실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냥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서 본인이 숙이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러더니 곧 일어나서 구석에 있는 캐비닛을 열어 초콜릿 한 봉지를 꺼내왔다. 고죠는 살면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브랜드의 싸구려 초콜릿이었다.

고죠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오는 것도 잊은 채 그녀가 초콜릿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또다시 하나를 꺼내어 눈치 보다가 앞에 있는 고죠에게 쓱 내밀었다.

“⋯⋯너도 먹을래?”

“⋯⋯.”

“아. 이런 거 안 먹나⋯⋯.”

쭈뼛쭈뼛 권해놓곤 자신 없이 덧붙인다. 그 앞에서 고죠는 이끼리 부딪치며 실소를 참아내야만 했다. ‘이런’ 거⋯⋯.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 않았다. 고죠는 제 앞에 디밀어진 미니 초콜릿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긴 침묵을 거절로 알아들어 도로 무르려는 그녀의 손끝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곤 놀란 그녀가 어깨를 흠칫 떨든 말든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선배. 방금 본인이 한 행동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

“편견이라고 해.”

가만히 있는 후배 편견이나 하고. 알고 보니 나쁜 선배잖아.

입술 끝까지 짓궂은 미소가 번진다. 고죠가 보란 듯이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또 녹으면 녹을수록. 솔직히 누나가 기르는 고양이 사료가 훨씬 더 나을 정도로 더럽게 맛이 없었지만.

“그래⋯⋯. 오해해서 미안해.”

“⋯⋯.”

“참나⋯⋯.”

마음에도 없을 사과를 건네며 맥없이 웃는 얼굴을 보니 그럭저럭 용서해줄 만한 맛이어서.

“응. 봐줄게.”

고죠 사토루는 그날부터 입에도 안 맞는 싸구려 미니 초콜릿을 달고 살았다.

첫인상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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