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블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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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더 블루 9 (完)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소장용 결제

모종의 이유가 도화선이 되어 전날까지도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엉망인 기분으로 치른 센터 시험이지만, 손까지 덜덜 떨어가며 확인한 가채점 결과는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빠르게 다가온 2월. 그리고 졸업 전에 거머쥐게 된 1지망 대학 합격 소식.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한 이는 수험생만큼이나 가슴 졸이고 있을 담임 교사였다. 선생님, 저 붙었어요. 그렇게 말했을 때 3년 동안 고생 많았다며 웃어주는 그의 얼굴은 보기에 몹시도 좋았다.

“잘됐네. 파티할까?”

물론 고죠 사토루의 귀에도 합격 소식은 들어갔다. 걔는 축하한다는 말 대신 잘 됐다는 말을 건넸고, 마치 반려동물을 칭찬해주는 듯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다가 쪽. 대뜸 양 손목을 구속하더니 무방비 상태인 입꼬리에 가벼이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당황한 내가 제자리에서 뻣뻣이 굳어도 그때처럼, 또 항상 그래왔듯이 제 행동에 대한 별다른 해명이나 설명 따윈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스즈무라가 요코하마의 국립 대학을, 야마자키는 교토의 사립 예술 대학을 나란히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겉옷을 정리하며 창밖을 가만 내다봤다. 어느덧 새하얀 눈이 녹고 찬 겨울은 지나간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고 있었다.

바쁘게 지냈다.

살면서 가진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학 합격과 동시에 모든 긴장이 풀리고 나니 뭔가 정리할 게 수두룩했다. 그 과정에서 큰집과 친조부모님 댁에도 잠시 발을 붙였다. 꺼려져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보기 싫은 낯짝을 대면하는 내내 불편하고 무서워서 속이 울렁거렸지만 -실제로 오피스텔에 돌아와서 그날 먹은 음식을 다 토했다- 어떻게 잘 견뎌내긴 했다. 물론 아빠의 사망 보험금 수령 이야기를 제외하곤 별로 기억에 남는 대화는 없었다. 히로토가 어느 대학에 합격했는지도 모르겠다. 큰어머니가 고상한 척 웃으며 뭐라 뭐라 자랑을 했던 거 같긴 한데⋯⋯. 도통 기억나질 않는다.

그즈음 고죠 사토루도 무척 바빴다. 이따금 결석하는 일도 생겼다. 존재 자체가 워낙 유명 인사인지라 입학한다는 이야기가 돌던 그때처럼 암암리에 별의별 소문이 파다했지만, 나는 본인에게 대충 집안 사정이 있다고만 들었다. 굳이 더 캐묻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까지 들었으면 됐다 싶었다. 어차피 나와는 관계없는 세상의 이야기일 테였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쪽 세계의 자세한 내막까진 관심 없었다.

서로 바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얼굴 보는 일이 줄었다. 사흘에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내가 예전만큼 허전함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고죠와 연락하는 빈도를 늘렸기 때문이었다.

잘 잤어? 아침 인사부터.

잘 자. 밤 인사까지.

매일 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우리는 서로의 연락으로 시작하고 마무리 지었다.

[알아.]

지금처럼 통화도 하고.

[이름이 스즈키였지? 안경 쓰고.]

늦은 밤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걔는 대뜸 기분이 안 좋다고 했다. 내일 아침부터 이상한 할아버지를 만나러 일찍이 교토에 가야 한다고 투정 부렸다. 그러면서 나더러 오늘은 뭐 했느냐고 묻길래 나는 걔가 바라는 대로 특별할 거 하나 없는 내 하루를 스피커 너머로 담담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스즈키 아니고 스즈무라⋯⋯. 그리고 내 친구 중에 안경 쓴 애는 없어. 전부터 누구랑 착각하는 거니.”

[아. 그랬던가?]

대화를 나누면서 문득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인제 보니 얘는 내 친구에 대해 뭐 하나 똑바로 기억하는 게 없었다. 나는 게토 스구루도 알고, 이에이리 쇼코도 알고, 그 아이들의 생김새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고죠 사토루는 그렇지 않았다. 저번부터 내 친구들 얘기만 나오면 전혀 관계없는 요소들만 맞지 않느냐며 줄줄 읊어댔다. 영 감흥 없다는 듯한 말투도 그렇고⋯⋯. 여러모로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단 티가 났다.

[근데 나 안 보고 싶어?]

그때 예고도 없이 주제가 튀었다. 방금까지 오늘 낮에 먹은 레몬 파운드 케이크가 맛있었단 감상평 따위를 내뱉고 있었는데 걔가 앞뒤 맥락 없이 ‘근데’로 말을 자르더니 저가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동요하지 않은 척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흘 전에도 봤는데. 우리.”

[에에. 그 전엔 매일 봤잖아~.]

“⋯⋯.”

[응? 선배.]

“⋯⋯너는?”

충동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무슨 용기가 샘솟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담담히 되물을 땐 언제고 뒤늦게 아차 했다. 내가 말하고도 너무 놀라서 휴대전화를 던지듯 내려놓고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래서 사람이 말을 할 땐 항상 신중해야 하는 건데. 얼마나 당황한 건지 손바닥과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방법이 없기에 이토록 낭패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차라리 놀리거나 웃기라도 하면 좀 나았을 텐데 스피커 너머는 무서울 정도로 잠잠했다. 숨소리조차 희미했다. 솔직히 여기서 변명하는 게 더 이상할 거 같았지만, 상대의 반응이 너무 없으니까 이쪽은 당장이라도 둘러댈 생각만이 만만이었다. 먼저 실언했다고 말하는 게 나을성싶다. 결심한 순간 여태 조용하던 고죠 사토루가 정적을 밀어냈다.

“고죠. 방금 그건⋯⋯.”

[보고 싶어.]

“⋯⋯.”

[말하니까 더 그래.]

이다음은 모른다. 전화 통화를 어떻게 끝냈는지에 대한 기억은 깔끔하게 휘발되었다. 나는 이불을 되는대로 품 안 가득 끌어안고 모로 누웠다. 두 눈을 감으면 애써 회피하던 지난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 몸뚱어리 안쪽을 마구 들쑤셨다.

‘피해도 돼.’

‘고⋯.’

‘근데 피하지 마.’

인간의 몸에 최초로 새겨진 감각은 고작 한 번일지라도 강렬할수록 영원한 모양인 걸까. 어느새 달아오른 손끝이 수분기 없는 입술을 가만가만 매만진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확신하지 못하는 진심과 자신 없는 감정으로 새카만 밤이 얼룩져만 간다. 번져가는 얼룩의 색채는 고죠 사토루의 눈동자 색깔과 진배없고.

좋아해 볼래? 좋아해 볼게.

그날 이후 나를 태운 열차의 종착역은 언제나 그 지점이다. 정말이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지점이다.

> 잘 자

⋯⋯이제 그만 내릴 때도 됐는데.

 

 

***

 

 

3월.

대강당 안은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오늘이 졸업식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식순이 적힌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내빈 소개부터 학교장 말씀, 축사, 재학생의 송사 및 졸업생의 답사와 졸업장 수여, 공연⋯⋯. 대충만 훑어도 상당히 긴 졸업식이 되리라 예상했다.

어. 엄마 지금 뒤에 있다고? 아빠도 왔어?

복잡하고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건너 건너 다른 반 아이가 부모님과 통화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나는 대강당 뒤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곳엔 자녀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부모님들이 참 많이도 모여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도 그랬고 중학교 졸업식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저렇게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의 졸업을 축하해 줄 어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조금 씁쓸한 일이다.

당연하게도.

세 번의 졸업식을 치르는 동안 내겐 사진을 찍어주는 엄마도, 꽃다발을 건네주는 아빠도 없었다. 주어진 현실이라는 게 그랬다.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잘 알지만, 이럴 때마다 마음이 헛헛해지는 것 또한 어쩔 도리는 없다. 하필 간밤에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의 꿈을 꾸어서 마음이 더 그런 듯싶었다. 쓸쓸했다. 좋은 날인데 괜히 혼자 뒤숭숭한 기분이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분명 내 것임에도 내 영역 밖의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런 일도 결국엔⋯⋯. 서글프지만 괜찮다고 매듭짓는 방법뿐이 없고.

“다음은 내빈 축사가 있겠습니다.”

“언제 끝나⋯⋯.”

졸업장 수여까지 끝마친 마당에 학교 관계자의 축사가 눈치도 없이 이어졌다. 앉은 자리 구석구석에서 조용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한 번 내리막길을 탔던 기분은 좀체 상승기류를 타지 못하고 막연히 바람 쐬고 싶다는 생각만이 절실했다. 그때 마침 옆에 앉은 야마자키가 부모님과 통화하는 듯하더니 자리를 이탈했다. 뿐만이 아니라 장시간 진행되는 졸업식에 지쳐서 하나둘씩 이탈자가 생기고 있었다. 내게도 기회가 있다면 분명 지금이었다. 나는 단상 앞에 선 사람과 주변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3번 문으로 빠져나왔다. 무사히 나와서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려고.

“어디 가?”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했다는 건 결국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내가 3번 문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누군가가 옆에서 팔을 홱 잡아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던데,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나를 붙드는 강한 힘에 한번 놀라고, 솥뚜껑만 한 손의 주인을 확인하며 두 번 놀랐다. 무방비한 몸이 강제로 돌려졌을 땐 일순간 호흡마저 턱 멈추었다. 한 손으론 내 팔목을 쥐고 나머지 손에는 꽃다발을 든 채 고개를 갸웃하는 녀석.

“졸업 축하해, 선배.”

“너⋯⋯.”

“감동이지.”

가장 외로운 순간마다 마법처럼 나타나는 너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니.

 

 

***

 

 

빠지는 건 늘 순식간이고 깨달았을 땐 이미 늦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녀석이 여기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였다. 나는 환하게 웃는 얼굴과 꽃다발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울컥하고 만다. 얼른 받으라며 내미는 꽃다발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걔는 이건 또 무슨 상황이냐며 실실 웃다가도 내 손을 고쳐잡고 빠르게 대강당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대강당 건물 뒤편까지 오고 나서야 비로소 잡은 손을 놓았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 주목받을 게 뻔하니까 일부러 바깥에서 기다렸는데. 갑자기 선배가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지 뭐야.”

“⋯⋯.”

“그래서 뭘까? 갑자기 울 거 같은 얼굴이나 하고.”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너야말로 갑자기 어떻게 나타난 거야.

그러나 자신이 없어 속으로만 말할 뿐이다. 나는 그냥 내 발끝만 쳐다봤다. 고죠는 허리를 낮추고 연이어 물었다. 선배. 몸이 안 좋아? 아니면 안에서 누가 괴롭혔어? 설명해 봐.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묵묵부답.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만 있자 헛웃음을 터뜨린 걔가 건물 외벽에 기댄 채로 팔짱을 꼈다.

“나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

“무시는 그쯤하고 여기 좀 보지?”

“안 볼래⋯⋯.”

“왜?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다소 늘어지는 듯한 어조로 시작한 말은 뒤로 갈수록 뚝뚝하게 변모하여 나를 할퀸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그 말에 줄곧 바닥을 기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이건 내 의지로 봤다기보단 걔가 억지로 보게끔 한 거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오늘 처음으로 고죠와 제대로 마주보긴 했지만⋯⋯. 솔직히 어쩔 줄을 모르겠다.

선배. 모양 좋은 입술이 그저 목석처럼 선 나를 부르다가 호선을 그렸다.

“물어봐.”

“⋯어떻게 왔니?”

“차 타고.”

“그게 아니라. 왜⋯.”

“왜. 내가 오면 안 됐어?”

내내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기세였다가도 역으로 묻는 순간엔 금세 순진함을 뒤집어쓴다. 그늘진 곳에 서 있느라 탁한 파랑 빛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날 가둔 채로 느리게 깜박였다.

“내가 울고 싶게 한 거냐고 묻는 건데, 지금.”

“⋯맞다고 하면 넌 어떡할 건데.”

“이유를 들어보고 사과할지 말지 결정할 거야.”

“납득 못할 이유면.”

“내가 납득할 때까지 선배더러 말하게 하겠지.”

생글생글 웃고 있으나 결코 만만해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단호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 그럴 생각인 거 같았다. 돌이켜보면 고죠 사토루는 여태 자신이 말한 건 그대로 지키던 애였다.

⋯⋯그래. 널 쳐다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가장 외로운 순간 네가 마법처럼 나타났기 때문에. 내가 그 순간 치솟은 내 감정을 전혀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시간이 있다. 그 긴 시간을 지나오며 애써 포기하고 버린 것들이 있고, 그런 식으로 바닥났던 것들이 다시금 충족되는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 역시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은 건⋯⋯.

“네가⋯⋯.”

“⋯⋯.”

“꽃을 가져왔잖아.”

과연 야마자키나 스즈무라, 혹은 다른 사람이 내게 꽃다발을 건네주며 웃어주었어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같은 상황의 다른 인물이었어도 내가 지금과 똑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이렇게 얼굴을 보자마자⋯⋯ 쏟아지는 조명에 눈이 멀어버린 척 품 안으로 뛰어들고 싶었을까.

“응. 내가 선배한테 주고 싶어서 가져왔잖아.”

“⋯⋯.”

“예쁘지?”

정답은 아니다. 그걸 고민했다. 아마 며칠을 고민했다. 어쩌면 몇 달을 고민했다. 사소한 언행에도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부풀었다가 꺼지고 차올랐다가 무너지길 반복하는 건 그가 고죠 사토루라서. 손길 한 번과 눈길 한 번에 내 기분이 좌우지 되는 건 그가 고죠 사토루니까. 그렇기에 지금 순간에도 내가 얘를 보며 느끼는 모든 감정은 오직 하나의 동사만을 가리키고 있다.

⋯⋯좋아해 볼래?

빠지는 건 늘 순식간이고 깨달았을 땐 이미 늦다. 책에서 그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그 문장 역시 옳다. 틀린 부분이 없다. 나는 네가 없어도 네 생각을 한다. 너를 보고 있어도 너를 떠올리게 된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게 이유야? 꽃?”

“⋯⋯.”

“다시 말해야 될 거 같은데. 나 전혀 모르겠거든.”

“⋯⋯.”

“선배.”

“고죠.”

네가 그때 물었었지. 졸업하면 뭘 하고 싶냐고.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했어. 나는 독립하고 싶어.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리고⋯⋯.

고죠의 말을 가로채고 손을 뻗었다. 애써 의연한 척하려고 해도 손목부터 벌벌 떨리고 있었다. 도무지 이 떨림을 감출 수가 없다. 나는 그 언젠가처럼 고죠의 소매 깃을 꾹 그러쥐었다. 그럼 걔도 나만큼이나 여전했다. 그 언젠가처럼 내가 잡으면 잡는 대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나 졸업해도⋯⋯ 널 계속 보고 싶어.”

내렸다. 드디어.

드디어 내렸다. 종착역에서 날 기다리는 건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고죠 사토루다. 나는 고갤 위로 꺾었다. 또다시 눈이 마주치니 심장이 달음박질한다. 머리는 터질 것만 같은데 버티고 선 몸뚱어리는 뻣뻣하기만 했다. 멋대가리 없이 고한 진심 뒤로 말 줄임표가 길게 붙었다가 끊어졌다. 한참만의 정적 끝에 고죠가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쳐왔다.

보고 싶다고⋯⋯.

내 말을 되풀이하며 피식 웃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왜. 돈 갚으려고?”

“⋯그것도.”

“그거 말곤.”

“그거 말고도.”

“그런 식으론 못 알아들어.”

“⋯⋯좋아해.”

좋아한다. 비로소 인정한다. 그 발화의 주체는 고죠 사토루. 누군가를 성애적으로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서 이토록 오래 걸렸다. 처음이라는 건 늘 두려움을 수반하니까. 그렇잖아. 너는 내가 싫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좋다고 말한 적은 없었어. 그러니까 짓궂게 굴지 마. 네가 봐주는 게 맞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모르는 체하는 태도에 울음이 맺힌다.

“좋아해.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너도 나⋯ 좋아해 줘.”

“하⋯⋯.”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여기까지 와서 일방통행인 건 싫다. 애초에 좋아한다는 말 빼곤 다 했었다. 키스도 했다. 그건 심지어 얘가 먼저 했다. 날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으면서 내게 연신 닿아오며 심란하게 했다. 자길 좋아해 보라고도 먼저 말했다. 사람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고 숱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망할 전제조건을 내세운 것도 고죠 사토루다. 그러니 전부 보상받을 것이다. 같은 크기로. 같은 무게로. 나는 이제 비우는 일 따윈 몰라. 네가 계속 채워주기만 했으니까.

“뭐라고 말 좀⋯⋯.”

대답을 채근하며 물기가 한가득 오른 눈을 벅벅 문지르는 그때였다. 이 모든 게 전부 남의 일인 것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던 고죠가 여태 들고 있던 꽃다발을 짧게 휘둘러 내 손을 걷어냈다.

“선배. 나는 진짜⋯⋯.”

“⋯⋯.”

“하하. 울면서 고백하는 사람은 처음 봐.”

그러더니 툭. 들고 있던 꽃다발을 미련 없이 바닥에 떨구곤 이번엔 제 손을 직접 뻗어온다. 무성의한 건지, 다정한 건지 모를 긴가민가한 손길로 젖은 눈가를 쓸어준다. 내가 내팽개쳐진 꽃다발을 좇아서 바닥으로 눈길을 돌리면 다시 제게로 시선을 가져오듯 손가락은 축축한 뺨을 타고 내려간다. 눈 돌리지 말고. 나 계속 봐야지. 배회하던 손끝이 마침내 닿은 곳은 입술. 어깨를 움찔하자 야트막한 웃음이 따라붙었다.

왜 떨어. 무서워?

⋯⋯무서워.

뭐가?

전부 다.

킥킥.

내가 걔를 볼 때면 걔도 나를 본다. 이 순간 우리의 시선은 빈틈없이 맞물려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그리는 입매. 머잖아 빤히 주시하던 그 입술을 비집고 자못 진지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있지. 당신은 너무 겁이 많아.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이 되게 우습고.”

“⋯⋯.”

“⋯⋯되게 귀여워.”

“⋯⋯.”

“무슨 뜻인지 알겠어?”

뒷머리를 받치는 손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땐 조금 늦어서⋯⋯. 더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새하얀 웃음소리가 바람에 날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얼굴이 나의 눈높이만큼 내려왔다가 슬그머니 멀어진다.

“나 약속 같은 거 무지 잘 지키니까-”

그렇다면 구태여 뒷말까지 들을 필요가 있을까. 고백 뒤로 입술을 겹쳐왔으니 없다고 여기고 싶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죠 사토루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걔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나를 받았다. 부드럽게 토닥였다. 머리와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고, 옷깃 위로도 선명하게 전해지는 온기를 통해 안정을 불어넣었다.

내가 앞으로 고죠 사토루와 하고 싶은 건 애정을 기반으로 한 모든 행위.

인간의 감정은 소모되는 것이고, 나 역시 바보처럼 영원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불완전하고 어리숙하다고 해도 당장은 상관없을 거 같았다. 내가 가진 패는 전부 보였으니 이젠 고죠 사토루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믿는다.

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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