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블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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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더 블루 7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소장용 결제

센터 시험을 두 달 남겨둔 무렵이었다. 나는 여느 날처럼 식탁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푸는 일에 열중했고, 고죠 사토루는 딴짓하는데 정성이었다.

“선배.”

틀린 문제의 식을 바꿔 다시 풀어도 여전히 틀린 답이 나와서 골치 아파하는 참이었다. 샤프의 뒷부분으로 턱 아래를 쿡 누르며 소리 없이 끙끙대고 있는데, 고죠가 포장을 벗기지 않은 캐러멜로 탑을 쌓다가 말고 나를 불렀다.

“어⋯. 잠깐만.”

“슬슬 거리를 두는 게 좋겠지?”

건조한 음성. 무심한 말투. 미련 없는 손끝에 의해 공들여 쌓은 캐러멜 탑이 무너졌다. 별 얘기 아닐 거라며 대충 흘려들을 생각만 하던 나는 그제야 문제를 풀던 행동도 안일한 생각도 전부 멈추고 공책 위로 데굴데굴 넘어온 캐러멜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엔 11월의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 잘 지내?

 큰집을 떠나고 5개월 만이었다. 때아닌 인물의 메시지는 단 세글자만으로도 여전한 두려움을 유발했다. 벌레를 삼킨 듯한 기분이 들어 조용히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고개를 꺾고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며칠 잠을 설친 사람처럼 정신이 조금 멍했다.

책 귀퉁이를 볼펜으로 연신 긁어냈다. 히로토의 이름을 지워내기 위함이다. 그렇게 손목이 조금씩 뻐근해지면 불현듯 떠오르는 음성이 있다. 슬슬 거리를 두는 게 좋겠지? 내 귓불에 악착같이 매달린 그 음성은 오늘따라 유난히 진하고 선명하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뭉근히 문질렀다. 그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의 제안인 척하는 통보는 무척 뜬금없었다. 센터 시험까지 두 달뿐이 안 남았으니까 그전까진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던 고죠 사토루는 한 달째 연락은 고사하고 얼굴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당분간 내 시간을 뺏지 않겠다는 말은 당분간 나와 생판 모르는 남처럼 지내겠다는 말이었는지,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틈만 나면 내 시야에 걸리던 걔는 하루아침에 변하여서 처음부터 내 삶에 없던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고죠 사토루가 남긴 것은 그대로이나 정작 걔만 쏙 빠진 내 일상은 조용하고 무난하게 흘러갔다. 나는 예전처럼 학교에서 친구들과 적당히 어울리다가 혼자 하교를 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 공부를 했고, 혼자 밥을 먹었고, 주말에도 오로지 집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일상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그래.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쁘진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고죠 사토루가 먼저 찾지 않는 이상 걔와 엮일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고죠가 손을 놓으면 혹은 말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는 관계. 몰랐던 적 없지만, 시간이 흐르고 여러 일을 거치며 은연중에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던 걸까. 새삼스럽게 허무하단 단어를 입에 올려도 봤다. 실은 그렇게 느끼는 나 자신에게 가장 놀랐다.

센터 시험은 대학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고, 그걸 앞둔 내게 주어진 것은 걔가 말한 대로 아무런 방해 받지 않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문득 열흘이 지나자 이게 진짜 편한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설상가상 학교에선 담임 교사가 요새 좀 멍한 느낌이 있다는 지적도 했다.

내가 왜 이럴까.

나는 조금씩 엉망이 되어가는 하루의 원인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으로 눅눅해진 시리얼을 씹어 삼키며 알아차렸다.

‘선배. 내가 이것도 먹으라고 한 거지, 이것만 먹으라고 갖다 놓은 건 아니거든?’

‘⋯⋯.’

‘다 갖다 버린다?’

아. 나는 아빠가 돌아가시고부터는 늘 혼자였던 주제에 고작 몇 달 좀 시끄럽게 살았다고 그새 혼자인 걸 어색해하고 있구나.

모든 건 상실감에서 오는 외로움이다. 나를 좀먹는 듯한 감정의 중심엔 믿기지 않게도 고죠 사토루가 있었다.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인정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오피스텔에 입주하던 날처럼 방 안을 훑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걔가 나를 봤고. 내가 여기에 앉으면 걘 이쪽에 서 있었고. 이 식탁에서 매일 저녁을 같이했었고. 이따금 나가서 주변을 걷기도 했었고. 내가 안 간다고 해도 걔가 저 좋을 대로 끌고 나갔으니까⋯⋯. 그 짓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 가선 이름만 떠올려도 실소가 터졌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틈만 나면 가라고 하네.’

‘⋯딱히 너한테만 그러는 건 아닌데.’

‘근데 끝까지 안 가는 건 나밖에 없지?’

‘넌 내 말을 잘 안 들으니까.’

‘그래도 내가 진짜 가버리면 막상 되게 서운할걸.’

‘그러니⋯⋯.’

‘그 반응 뭐야. 아닐 거 같아?’

나는 이따금 적막 위에 혼자 남겨진 채로 고죠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걔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나면 이어서 내 목소리를 흉내 내는 기가 막힌 환청 따위를 들었다.

넌 아닌 척했을 뿐 실은 의중을 알 수 없는 호의라도 좋았던 거야. 늘 기댈 구석이 필요했잖아. 의지했던 거지. 그 집을 나와서 네 손에 떨어진 것들을 좀 봐. 과연 누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었겠어?

‘뭐. 먼저 연락하면 더 좋고?’

나는 회상 끝에서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말을 기억해 낸다. 내가 아직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 그때 내세운 조건 같지 않은 조건도 유효할 테다. 나는 히로토의 이름이 번쩍대는 꼴이 싫어서 뒤집어 놨던 휴대전화를 바로 잡았다. 고죠와 가장 최근 연락한 시간은 정확히 한 달 전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호기롭게 키패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은 너, 까지만 입력하곤 이후의 움직임을 거부했다.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니. 너는 잘 지내니. 너로 시작하는 수많은 예시 문장을 넘기다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리는 순간 액정 위로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너

너 왜 나를 혼자 두니.

 

 

***

 

 

“물만두야?”

그저 곤란하다는 투였다. 고죠는 엄지손가락으로 눈물 자국이 선명한 내 뺨을 문질렀다. 원래 힘 조절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할 생각이 없는 건지. 약간 힘을 실어 문지르는 탓에 목이 뒤로 살짝 밀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뭐가 그렇게 서럽고. 또 뭐가 그렇게 슬픈지도 모르는 채로 갑자기 터진 눈물이었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어쨌든 실수로 너-까지만 전송해놓고는 눈물만 뚝뚝 떨구던 참이었다. 띄운 라인은 어느새 읽었단 표시로 바뀌어 있었고 그걸 알아차린 순간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고죠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이쪽 상황은 어떤지도 모르고 말을 하다 마는 게 어딨느냐며 스피커 너머로 실실 웃던 걔는 내가 대답 대신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만을 들려주자 일순간 침묵했다. 우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한참 동안 내가 숨죽여 끅끅대는 소리만 듣다가 종국에 한마디만 덧붙일 뿐이었다. ‘아, 이해했어. 오라는 거지?’하고.

오래 걸리진 않았던 거 같다. 전화를 끊고 얼마 안 가 출입문 보안 카드는 물론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는 고죠가 굳이 초인종을 누르며 등장했다. 걔는 직접 현관문을 열어 저를 마중한 눈물범벅의 나를 보자마자 진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나는 한 달 만에 보는 고죠 사토루의 이름을 허망하게 한 번 읊조린 후에 본격적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진심으로 다른 뜻은 없었는데.”

“⋯⋯.”

“이렇게까지 놀라게 하기 있어?”

선배 의외로 서프라이즈에 재능 있잖아!

분명 놀리듯 하는 말이다. 무시하고 갑 티슈만 뽑아 들었다. 놀랐다고 말하는 사람치곤 무척 태연했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고죠가 식탁 위에 올려 둔 내 휴대전화 옆에 제 휴대전화를 겹쳐서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있잖아. 나 사과해?”

고죠는 내가 어느 정도 진정에 접어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렇게 물었다. 자신이 사과하느냐고. 질문 자체가 꽤 천연덕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고죠가 옳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고갤 끄덕였다.

“그렇지? 솔직히 사과할 생각도 없었어~. 아무리 봐도 내 잘못은 아니야. 나 진짜 도와주려고 그런 거니까. 완전 순수하게.”

“⋯⋯.”

“그래도 싫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선배가 알겠다고 하길래 나는 그대로 믿었잖아.”

“그게 아니라 네 방식이 너무 이상하니까⋯⋯.”

센터 시험. 진심이든 아니든 취지가 좋았다는 건 알겠다. 제안 같은 통보이든, 통보 같은 제안이든. 어쨌거나 내 생각을 하긴 했다는 것도. 하지만 거리를 좀 둔다는 게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겠다는 건 줄은 미처 몰랐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당시 그 무덤덤한 얼굴에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외로움에 몸서리 칠 줄도 몰랐다. 나는 네 방식이 이상했다며 자신 없이 말끝을 흐렸다.

그런가? 고죠가 고갤 갸웃했다.

“근데 내가 선배 혼자 두는 게 뭐가 이상해.”

“⋯⋯.”

“그게 문제가 되나?”

이렇게 울 정도로?

생략된 뒷말은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고죠 사토루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거기서 또 이유 없이 심장이 철렁하는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기에 할 말은 없었다.

말마따나 문제없다.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고죠 사토루는 나를 얼마든지 혼자 내버려 둬도 괜찮다. 얘는 나의 보호자가 아니고, 무슨 이유에서든 당장 나의 의식주를 책임져 주고 있긴 하지만, 그게 의무인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무엇 하나 당연한 건 없었다. 전부 고죠 사토루의 마음이 내켜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저 지금의 내가 그걸 못 견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나는 그걸 왜 못 견뎌 하느냐.

“그건 아닌데.”

“아닌데.”

머리가 조금 하얘졌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른다. 모르겠다. 이 상황이 혼란스럽고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말할 때마다 목구멍 안으로 멀어졌던 울음기가 그득 찬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더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툭툭 떨어졌다.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어. 근데, 오늘 갑자기, 걔한테 연락도 왔고, 불안해서, 혼자 있다는 게, 조금⋯⋯.

“걔?”

“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정리되지 않은 말을 더듬더듬 잇다가 결국엔 모르겠다고 종결시키자 고죠가 한숨 쉬듯 나를 불렀다. 그리고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내 앞에 바짝 붙어 서더니 허리를 번쩍 안아 들어 그대로 식탁 위에 앉혔다. 나는 눈물을 닦다가 말고 놀라서 반사적으로 그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걔는 내가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 약간 벌어진 다리 사이로 제 몸을 단숨에 밀어 넣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잠깐⋯.”

“보고 싶었다는 말을 뭐 이렇게 길게 해.”

찡그린 듯 입술은 또 호선을 그리고 있어서. 짜증이 난 건지, 아니면 관대함을 과시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겐 모든 게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저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을 앙다물고 울먹이기 바빴다.

“응, 응. 눈물이 안 멈추지? 큰일이네~.”

고죠 사토루와 재회하고부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수초마다 제 안으로 밀려들고 빠져나가길 반복한다. 그게 뭔지 명확하게 파악해내기가 버거워서 훌쩍이면 고죠가 착실하게 반응했다. 걔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세수시켜주듯 꼼꼼히 닦아주었다. 아까보다 많이 부드러워진 손길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내자 먼저 대화를 시도해왔다.

“무서웠어?”

“⋯응.”

“외로웠지?”

“좀⋯.”

“서운한 건?”

“⋯모르겠는데.”

“나 많이 보고 싶었어?”

“몰라⋯.”

“울었으면서.”

“모른다니까.”

“킥킥. 내일 되면 부끄러워할까?”

“⋯널 피할지도 모르지.”

“그건 별로 상관없어. 못 피하게 할 거니까. 나 그런 거 되게 잘하고.”

“⋯⋯.”

“아. 이러니까 우리 되게 좋아하는 거 같다.”

“⋯⋯.”

“선배가 나 좋아하고.”

“⋯⋯.”

“나도 당신 좋아하고.”

어깨 위를 짚은 손에서 떨림이 멎은 건 그즈음이었다. 고죠는 대답하지 않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하다가 왼손으론 내 오른손을 슬며시 붙잡고 오른손으론 내 왼쪽 허벅지를 가볍게 쥐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무척 자연스러운 탓에 무섭다거나 불쾌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안 들었고⋯⋯. 귓가에 내리는 나직한 목소리에만 집중하게 됐다.

“선배. 나 안 싫어하는 거 말고. 좋아해 볼래?”

“⋯뭐?”

“좋아해 보라고. 나.”

“⋯⋯.”

“응? 그럼 나도 그렇게 해볼게.”

나도 선배 ⋯좋아해 볼게.

귀 기울인 말은 ‘선배’로 시작해서 ‘좋아해 볼게’로 끝났다.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귀를 의심할만한 말만을 담담히 내뱉은 고죠는 할 말은 여기까지라는 듯 내 어깨에 얼굴을 묻더니 마치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느릿느릿 머릴 비비적거렸다. 하지만 몸을 굳게 만드는 건 뒤늦은 행동이 아닌 앞선 말이다. 나는 눈만 연신 끔벅이다가 방금 들은 말을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선배. 나 안 싫어하는 거 말고. 좋아해 볼래? 좋아해 보라고. 나. 응? 그럼 나도 그렇게 해볼게. 나도 선배 ⋯좋아해 볼게.

한 번 되새길 땐 역시 꿈인가 싶어 정신이 아득해지고, 두 번부터는 현실임을 인정하여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진다. 마침내 세 번째. 히끅. 기어코 터진 딸꾹질에 낮은 웃음소리가 달려들었다. 평평한 발바닥이 둥둥거렸다.

좋아해 볼래? 좋아해 볼게. 내가 방금 삼킨 게 진정 인간의 언어인지 아니면 불덩이인지. 미지근한 숨결이 닿은 목 언저리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열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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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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