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블루 (完)
유료

파우더 블루 6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소장용 결제

꿈을 꿨다. 바닥이 다 비칠 정도로 투명하여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강물과 바다, 호수 따위에 내 몸을 기꺼이 내던지는 꿈을.

잠든 줄도 몰랐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금실대고 있었다. 그 푸르스레함에 홀리어 혹시 꿈속의 꿈은 아닐까. 다시 눈을 감았더니 나직한 음성이 낙엽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귓속으로 쏟아졌다. 꿈 아닌데. 눈 뜨고. 정신 좀 차려.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세운 가정을 귀신같이 알아채더니 엑스자를 긋는다. 그리곤 부드러운 어투로 이제 막 잠에서 깬 내게 현실 직시를 요구했다.

“⋯안 갔어.”

“응. 안 갔잖아.”

“⋯⋯.”

“보라니까.”

미지근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콧등에 수시로 내려앉는 음성은 마치 젖은 손으로 건드리면 형태가 망가질 듯한 거품 같다. 꿈만 같은 현실. 그러나 꿈이 아닌 현실. 나는 마침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내가 뛰어든 꿈속과 비슷한 색채를 띠는 눈동자를 면밀히 마주했다.

“괜찮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을 뒤덮었다.

아침 식사는 달걀죽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고죠의 연락을 받고 방문한 사용인의 작품이었다.

몸 상태는 어제보다 한결 나았다. 기침은 거의 멎었고 쉬이 떨어지지 않던 열도 지금은 정상 체온이었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던 구토감이나 어지럼증도 마법처럼 가셨다.

“잘 못 먹네.”

그럼에도 입맛은 별개의 일이라. 나는 아까부터 앞에 놓인 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맞은 편에 앉은 고죠가 이런 내 행동을 탐탁잖게 여기고 한마디 보탤 것을 짐작하면서도 그랬다. 만취한 사람처럼 수시로 삐끗대는 손목은 내 의지이면서 내 의지가 아니었다.

“너무 어색해하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으니까.

고죠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지만, 말을 삼킨 이쪽은 아무래도 웃기가 어려웠다. 나는 아픈 날에도 아프고 난 다음 날에도 언제나 혼자인 게 익숙한 사람이다. 오늘처럼 잠에서 깨자마자 누군가 괜찮냐고 물어봐 주고, 열을 재주고, 아침까지 차려주는 일 같은 건 아빠가 살아계실 적에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꿈인 줄만 알았다. 꿈이 아니라며 씩 웃는 고죠 사토루를 보고도 걔의 존재 또한 내겐 그다지 당연한 게 아니기에 마냥 꿈인 줄로만 알았다. 걔는 그걸 조금 어이없어하긴 했지만, 내가 현실을 깨닫는 것까지 도와주긴 했다. ‘응? 뭐, 손이라도 잡아볼래?’ 하며.

“선배.”

“고죠.”

목소리가 맞물렸다. 똑바로 전해지지 못하고 순간 공중에 붕 떠버린 두 글자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는 먼저 말해 보라는 듯한 관대한 눈빛 앞에서 시선을 슬쩍 떨어뜨리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

고맙다고. 이제야 전한다. 사실 말하려면 어제 병원에서부터 말했어야 하는데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선 이다지도 서툴렀다. 고죠 사토루는 그런 나의 미숙함 앞에서 입매를 당겼다. 선배. 고개 좀 들어 봐. 나는 조금 들뜬 듯한 목소리를 부러 모르는 척 고집스럽게 식탁 모서리만 쳐다봤다. 그러자 수저와 식기가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게 고죠가 제 참을성이나 인내심 따위를 청각적으로 표현했다는 걸 알았다.

굳이 변명하자면 꿈에서 깬 직후부터 계면쩍어 그렇다. 어제의 나 자신을 표현하라니 민폐라는 단어 밖에 생각나질 않는다. 고죠 사토루는 안 그래도 내가 감당 못 하는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상대였다. 열에 잔뜩 취해서 가지 말라고 보채던 순간을 떠올리면 또 한 번 얘한테 보잘것없는 인생의 바닥을 내보인 것 같아 착잡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니까 당장은 마주보기가 힘들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애꿎은 손가락만 꼼질댔다. 그즈음 걔가 자세를 고쳐 앉는 듯 뒤척이는 게 느껴졌다.

“선배.”

“⋯응.”

“아직도 나 싫어해?”

고죠 사토루가 가볍게 툭 던진 말은 내게로 와 자주 쿵 하고 무거워진다. 나는 마치 내 턱을 억지로 쥐어 잡고 돌리는 듯한 질문에 항복했다. 다시금 마주한 걔는 평소처럼 장난스레 웃고 있지도 않았다. 보고 있자니 입 안에 얼음을 한가득 물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울렸다.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낱말들이 목구멍에 걸렸다.

아직도 저가 싫으냐고.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걸까. 고죠 사토루 본인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지만, 만약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똑같이 지금처럼 대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과거를 들추고 현재를 음미했다. 작년 강당에서부터 지금 이곳까지. 스치는 나날들 속에서 고죠 사토루는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고, 나는 그 옆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내가 고죠 사토루를 언제부터 싫어했지. 또 얼마만큼 싫어했지. 지금은 또 어떻지. 나는 예나 지금이나 걔의 짓궂은 말이 성가셨고, 속내를 알 수 없는 행동은 불편했다. 아직도 이해하는 부분보다 이해 못 하는 채로 넘어가는 부분이 훨씬 더 많지만, 그것들을 자신 있게 혐오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쉬이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었다. 명백하게 다른 감정이었다. 헷갈리면 고죠 사토루와 히로토를 나란히 두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전자는 부담스러운 거고 후자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난⋯⋯ 너 싫어한 적 없어.”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 나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것과 별개로 고죠 사토루라는 인간 자체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는다. 지금으로선 이게 사실인 거 같았다. 더군다나 현재 고죠 사토루는 무슨 이유이고 변덕인 간에 나를 잠시나마 지옥 같은 곳에서 빼내어 주고 독립의 발판을 마련해준 사람이다. 염치가 있다면 내겐 이제 그를 싫어할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날 싫어하는 건 너잖아.”

그러니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애초에 질문 자체가 오류다. 나 역시 한동안 잊고 산 듯했으나, 날 싫어한다고 먼저 말한 건 고죠 사토루였다. 그날 학생회실에서 분명히 말했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를 싫어하는 편이라고. 죽을 거 같은 얼굴로 뭐든지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이 거슬려서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그래 놓고 갑자기 나를 도와주고. 이유를 물어도 알려 주지 않고⋯⋯.

당시에도 복잡한 심경 속 서운함은 자리하지 않았기에 인제 와서 그런 감정을 느낄 리도 만무했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날을 반추하며 다 식은 죽을 뒤적거렸다. 고죠는 단지 침묵할 뿐이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비음만 줄줄 흘리는 모습이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잖아 양팔을 세워 턱을 괸 걔가 졸음을 못 참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가만가만 까딱이다가 푸스스 웃었다.

“선배.”

“어⋯.”

“그거 남기지 마.”

맥 빠진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다. 나도 모르게 싱거운 웃음을 흘린다. 한두 번 반복된 패턴도 아닌데⋯⋯.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김새는 나 자신이 퍽 우습고 낯설었다.

 

 

***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란색 동전 지갑을 잃어버린 학생 또는 외부인께서는 3층 분실물 센터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찾으러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란색 동전 지갑을⋯⋯]

 

학교는 10월에 접어든 때부터 종일 바쁘고 부산스러웠다. 각종 행사가 모여있는 달이기 때문이었다. 그중 가장 큰 행사인 문화제가 오늘부로 시작됐다. 나는 물 밀려오듯 하는 내부인과 외부인들 틈에서 STAFF라고 쓰인 행사용 목걸이를 건 채 고죠와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먹을래?”

상체를 약간 앞으로 빼고 걷던 고죠가 방금 부스를 지나오면서 얻은 솜사탕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뭐가 왜니⋯⋯. 그냥 안 먹고 싶으니까.”

“음⋯⋯. 그래도 먹어.”

“안 먹, 읍.”

대답한 의미가 없다. 입이 벌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설탕 덩어리가 밀고 들어왔다. 주먹만 한 실뭉치가 혀에 닿자마자 금방 녹아들어 입 안에 단맛이 퍼졌다. 손등으로 녹은 설탕이 묻어 찐득거리는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 고죠는 찡그린 나를 보며 키득대다가 내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문화제는 매년 그래왔듯이 학생회를 포함해 각 학년 학급 임원이 전부 스태프 역할을 떠맡는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스태프들끼리 다닐 필요는 없는데 나는 굳이 대강당에 접이식 의자를 놓던 때부터 고죠와 함께이긴 했다. 친구들이 바쁜 탓이었다. 연극부 부장인 야마자키는 연극 홍보하느라. 스즈무라는 부스에서 버블티를 파느라. 나 역시 스태프로서 여기저기서 부르면 부르는 대로 크고 작은 잡다한 일을 하긴 했지만, 이벤트 주역인 그들만큼은 아니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온종일 내 옆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고죠 사토루다. 나는 스즈무라가 교대하기 전까지 빈 교실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걔는 오늘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고죠가 제 친구는 어디에 두고 나랑 다니려는 건지 신경이 쓰여 물어보기도 했다. 너 일행이 있지 않았니. 너만큼 키가 큰 애. 앞머리가 조금 특이하고⋯⋯. 그러자 고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선배. 스구루한테 관심 꺼.’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었다.

의견 조율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오로지 고죠에 의해. 또 고죠가 좋을 대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이번에는 시청각실로 끌려왔다. 여기선 영화 감상 동아리가 국적과 장르를 불문하고 3일 내내 마감 시간까지 90년대 영화를 상영해준다고 들었다. 입구엔 실제 영화관처럼 매대를 놓고 먹거리도 팔았다. 딱히 관심사는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외부인보다는 내부인이 많았고 영화를 보는 사람보단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규모가 큰 문화제를 준비하느라 진이 빠진 듯 영화 감상을 핑계로 그냥 쉬러 온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들어서니 아예 안대를 쓰거나 담요를 두르고 수면 중인 학생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맨 뒷줄, 그리고 가장 구석에 자릴 잡았다. 고죠가 바깥쪽을 자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벽 안쪽으로 붙었다. 나는 바깥에서 받아온 담요를 무릎에 덮으며 말했다.

“나는 보다가 먼저 나갈 수도 있어.”

“왜?”

“2시에 연극 보러 가야 돼. 친구 나오는 연극이라.”

“그래? 그렇게 해.”

솔직히 내 일정에 대해서 고죠한테 허락받을 필요는 없고, 싫다고 해도 무조건 연극을 보러 갈 생각이었지만, 혹시 몰라서 말을 꺼내 봤는데 의외로 담백한 반응이 돌아와서 좀 놀란 참이었다. 평소 성미나 행실을 미루어 보아 또 희한한 고집을 부릴 줄로만 알았던 거다. 나는 번듯한 옆태를 바라보면서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싶었으나, 금세 의심을 거두었다. 어차피 변덕이 아니라면 이번에도 내 편견이 빚은 오해일 거라고 넘기며.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취향도 아니었다. 외국 영화의 영상미는 처음부터 뛰어났지만, 스토리는 처음부터 지루했다. 뻑적지근한 눈에다가 영혼 없이 스크린을 담고 있으려니 순간 상반신이 옆으로 픽 기울었다.

졸았다.

아무도 신경 안 쓸 테지만, 괜히 나 혼자 조금 민망해져 헛기침했더니 고죠의 왼손이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내 오른손을 툭 건드렸다. 나는 고갤 돌렸다. 고죠는 예상과 달리 정면을 보고 있었다. 마냥 평온하기만 한 옆태. 실수였나보다고 넘기려는 찰나 그 생각을 비웃는 듯이 다시 한번 툭 건드린다. 이번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왜 그래?”

“⋯⋯.”

“고-”

내 오른손이 마치 고죠의 왼손에 삼켜진 것처럼 모습을 감춘 건 그때였다. 녀석의 이름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낯선 온기와 감촉에 놀라 움찔하면 포개어진 손바닥이 달래듯. 손등 위를 가볍게 문지르다가 슬며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껴왔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뒤늦게 잡힌 손을 비틀어보지만, 손등 위에서 내리누르듯 낀 깍지는 풀어지지 않는다. 당황스러웠다. 맥락 없는 스킨십을 자행한 고죠를 쳐다봐도 걔는 간간이 깍지 낀 손에 힘만 실을 뿐, 시선은 여전히 영화에만 고정한 채였다.

이 상황에서 다급해지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고죠. 손 좀 놔 줘. 뭐 하는 건데. 나 이제 가야 해. 듣고 있어? 야. 나는 작은 목소리로 수십 차례 말을 걸었지만, 걔는 엔딩 크레딧이 전부 올라갈 때까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흔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연극을 보러 가지 못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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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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