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 블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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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더 블루 외전 : 파스텔 블루 4

주술회전 고죠 사토루 네임리스 드림

*소장용 결제

너는 그 애랑 싸운 적 한 번도 없지? 야마자키가 물었다. 토끼 같은 얼굴엔 드문 근심이 가득했다. 턱 아래 놓인 죄 없는 수플레는 수십 분 전부터 포크로 난자당한 상태였다. 필시 본인의 심리를 겉으로 표출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대답하기에 앞서 수플레 접시를 이쪽으로 슬쩍 당기고, 청포도 에이드를 야마자키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 애가 기다렸다는 듯이 빨대를 물곤 독개구리처럼 양 볼을 부풀렸다.

“왜 없어⋯. 자주 티격태격하지.”

“⋯없네. 없어. 나처럼 이런 식으로 싸운 적은 없어.”

야마자키는 믿지 않는다며 입술을 내밀었다. 뾰족한 눈초리가 계면쩍어서 그냥 웃어넘기려니 이번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른 어깨가 기운 없이 처졌다. 솔직히 부러워. 애인이랑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싸워? 나는 방법 좀 알려 달라는 투정에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용히 빨대를 물었다.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크림소다를 쪼로록 빨아당기자 어디서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빼꼼. 덩달아 발신자를 확인한 야마자키가 눈치 보는 내게 괜찮다며 손을 휘적였다.

마침내 그어지는 초록색 직선.

“⋯응. 사토루.”

[집에 없네. 밖이야?]

오른쪽 귀를 붙이기가 무섭게 벌집 닮은 스피커를 타고 단 음성이 쏟아졌다. 좋아하는 목소리는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있잖아. 나 어제부터 말했었지? 무지 보고 싶다고. 근데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거 있어? 전해오는 말만큼이나 허탈해하는 고죠의 모습이 그려지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패였다. 엊그제 애인과 크게 다퉈 머리 아파하는 야마자키 앞이라 조금 민망한 감이 있긴 했지만, 오늘도 나와 고죠 사토루의 애정전선은 맑음.

구름 한 점 없는 맑음이었다.

 

 

 내 사랑은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탄생했다. 그만큼 어리숙하기도 쉬웠다. 물론 어설피 시작한 관계치곤 무탈하게 이어가고 있으나, 바보처럼 영원을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스무 살. 대강당 뒤편에서 고죠 사토루의 품에 안겨 소금 맛 키스를 나누었을 때부터.

나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과분한 연인의 과거와 현재도 모자라 먼 미래까지 가지고 싶다는 바람은 분수에 안 맞는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더군다나 본디 과한 욕심은 어떤 식으로든 화를 부르기 마련이라. 내 삶은 이따금 꿈으로 앓는 영원만으로도 1년의 절반이 달았다.

“그래서 소라가, 읏⋯!”

평범하게 말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허리를 잘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고죠의 왼손이 내 턱을 붙잡더니 검지 끄트머리가 입안으로 쏜살같이 들어왔다가 도로 빠져나갔다. 흐지부지 종결된 문장에 인상을 찡그리자 이번엔 두 손으로 뺨을 꽉 붙잡곤 쪽쪽 연달아 입술을 부딪쳐온다. 잠깐, 쪽. 사, 쪽. 으응! 쪽. 쪽. 이 막무가내 작태가 가리키는 원인은 오직 하나뿐. 또 뭐가 본인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얘가 어떻게 해야 멈출까, 머릴 굴리다가 5번째에는 내 쪽에서 먼저 입술을 맞댔다.

쪽.

순간 주도권을 빼앗긴 고죠가 찰나의 정적 끝에 잠잠히 입꼬릴 말아 올렸다.

“이걸로 봐 달라는 거야?”

“왜 기분이 상했는데?”

“2주 만에 보는 애인한테 남 얘기만 하면 곤란해.”

“그건⋯⋯.”

“안 궁금하단 말이지. 야마모토의 이야기 같은 건.”

“⋯⋯야마자키야. 야마자키 소라.”

“알아. 미야자키 소스케.”

몇 번을 지적해도 소용이 없구나. 고죠는 내 입술을 살짝 빗겨 간 부근에 마저 누르듯 키스했다. 끝까지 제멋대로 발음하는 곤조에 피실피실 허무함이 샜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얘는 여전히 나 아닌 사람에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애인과 다툰 사람이 야마자키 소라든, 미야자키 소스케든. 고죠 사토루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 그저 불필요한 정보라고 여기는 것이다.

고죠가 이제 남 얘기 말고 내 얘길 해보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 어제 점심으로 오므라이스 먹었잖아.”

“응. 당신이 좋아하는 거. 사내 식당에 나왔다며.”

“응. 다 먹었는데.”

“그런데?”

“체 했어.”

“⋯⋯참 빨리도 얘기해.”

감추었던 이야기를 슬쩍 꺼내자 허리를 감은 팔에 은근히 힘 실리는 게 느껴졌다. 그걸 왜 이제 얘기하느냐며, 일종의 불만 표시라는 듯 고죠가 내 어깨 위로 이를 세우더니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아예 말을 안 해버리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고죠는 그렇게 덧붙이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지그시 눌러오는 무게가 감당 범위를 넘어선다. 상반신이 점차 뒤로 밀렸다.

“그건 그렇고⋯⋯. 나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거.”

“어떤, 무거워⋯⋯. 어떤 거?”

“반지 어딨어?”

“반지? 잠시만, 사토루. 이러다가 눕겠어⋯⋯.”

“응. 반지. 없는데.”

“무슨 소리니. 반지는 여기 잘⋯⋯.”

“잘?”

예상과 달리 깨끗한 왼손에 말문이 막힌다. 원래 하려던 대답이 흐리게 뜨면서 등허리와 침대가 완전히 맞닿았다. 오롯이 넘어온 고죠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눕혀진다. 입술 꾹 다물고 천장과 마주한 왼쪽 손바닥을 움찔거리자 투박한 손가락이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껴왔다. 나는 곁눈질로 얽힌 손을 한 번,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고죠를 한 번 번갈아 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욕실에 있을 거야. 아까 씻을 때⋯ 잠깐만 비켜 봐.”

반지는 우리가 나누어 낀 커플링을 말한다. 고죠 사토루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 위에서만 존재할, 이 세상에 단 한 쌍뿐인 반지. 재작년, 지금 회사에 취직하면서 맞춘 -사실상 선물 받은- 것이었다. 평소 씻을 때와 설거지할 때를 제외하곤 항상 끼고 있는 터라 뜬금없는 부재에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반지가 있을 욕실에 다녀오겠다며 잠시 그 품에서 빠져나가길 바랐으나, 고죠는 딱히. 그것까진 원치 않았는지 오히려 내가 벗어날 수 없게끔 몸을 더욱이 낮추기만 했다. 내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거리만큼 내려온 걔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면 됐어.”

“당연하지. 일부러 아니야.”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눈썹을 우그러뜨린다. 고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알고 있다면서 구김진 미간에 입술을 내렸다. 부끄러움을 제외하면 이제는 그저 편안한 행위였다. 이윽고 원하는 바가 명확하도록. 내가 두 눈을 감고 턱을 약간 치켜들자 위쪽에 머물던 입술이 눈, 코, 뺨을 타고 차례로 내려오다가 마지막엔 내 입술을 종착역으로 삼았다. 간질간질 깨물기만 하는 짓궂은 장난이 지나간 후엔 다소 외설스러운 소리와 함께 숨이 반 토막 났다.

조금 이른 밤이었다.

 

 

***

 

 

없다.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 집안 온갖 곳을 샅샅이 뒤집고 있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찬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세면대 앞을 부산스럽게 서성거리다가 끝내 무릎을 풀썩 접으며 주저앉았다. 솔직히 부러워. 애인이랑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싸워? 지난날 들었던 야마자키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되감아진다. 착잡한 심경이었다. 기억대로라면 욕실 선반에 있어야 할 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욕실은커녕 아무 데도 없었다.

그렇게 반지를 잃어버린 지 보름째.

“자기야.”

즉, 그 사실을 숨긴 지도 어느덧 보름째가 되는 날이었다.

외식하다가 말고 뻗어온 고죠의 손가락이 내 뺨을 건드렸다. 놀란 마음에 파드득 떨며 커트러리를 놓치자, 걔도 놀랐는지 덩달아 움직임을 멈추었다. 순간 바짝 굳은 얼굴로 내 상태를 살피던 고죠가 자못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

“어디 아파?”

아프다. 굳이 말하자면 양심이.

고죠는 오늘도 비어있는 약지를 매만지며 ‘에. 오늘도야? 내 손가락 불쌍해!’하고 우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깜박했다는 변명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의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도. 언제까지나 통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유일한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는 탓이었다.

“속이 좀⋯⋯.”

“속이 안 좋아?”

“미안⋯⋯. 요새 자주 이러네.”

흔한 변명을 쥐어짠다. 언제 들통날지 모르는 거짓말은 또 한 번 몸집을 부풀린다. 죄책감에 주눅 든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식탁 아래 감추어진 손가락을 구부리고 괜스레 시선을 흐리면 고죠가 물 잔을 내려놓더니 자리를 옮겼다. 내 옆으로 다가온 걔가 내 이름을 나직이 부르곤 턱과 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비스듬하게 숙이고 있던 고개가 고죠의 손길에 의해 천천히 딸려 올라갔다. 부러 피하던 시선을 어떻게든 맞추게끔 하는 행동이었다.

“아픈 게 죄야?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

“이런 일로 사과하지 마. 그냥 좀 더 빨리 눈치채지 못한 내 탓으로 할 테니까.”

고죠 사토루의 태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늘 여유가 묻어난다. 그것이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단연 입매다. 그래서일까. 얘는 이번에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미소를 내걸며 나를 어르기 시작했다. 잘못은 내가 하곤 되려 내가 위로받는 이 상황이 모순적이지만, 겁이 많은 나는 여기서 진실을 밝힐 수도 없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죠는 그저 능청 피우며 엄지로 내 뺨을 살살 문질렀다.

“어쩐지 선배 요즘 계속 컨디션 안 좋았지.”

“⋯미안.”

“근래 계속 불편했어?”

“응.”

“토하지는 않고?”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소화만 잘 안돼.”

오고 가는 진심 어린 질문과 거짓투성이 대답에 미안함은 소리 없이 증폭된다. 내 대답을 듣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고죠가 조금 뜸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

“병원 갈 일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야 돼. 알겠지? 숨기지 말고.”

“⋯⋯어?”

“어? 가 아니라 약속하자는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말한 건 반드시 지켜 달라고. 만약 어기면 그때는 나 진심으로 화낼지도 모르니까.”

“⋯⋯.”

“킥킥. 얼빠진 얼굴은 그만하고. 돌아갈까?”

할 말을 마친 듯한 고죠는 내 뺨에서 미련 없이 손을 뗐다. 그리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둔 내 왼손을 움켜쥐었다. 집에 가자. 선배. 장난기 어린 미소 때문인지, 아니면 저가 부르고 싶을 때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선배라는 호칭 때문인지. 멍하니 올려다본 고죠에게선 아직도 그 시절 소년 같은 면모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

 

 

꿈을 꿨다. 굳이 분류하자면 악몽이다. 그리고 현실성 짙은 꿈은 한낱 꿈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간밤의 뒤숭숭한 꿈자리는 사람 마음을 평소와 달리 먹게 만드는 법이라. 오늘은 반지에 대해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마저 되었다.

나는 타이밍을 쟀다. 출근 직전. 지하철 탔을 때. 출근 직후. 점심시간. 양치를 끝낸 후. 거래처 사람에게 메일을 송신한 후.

“위하여!”

그렇게 종일 타이밍만 재다가 보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다짐이 무색하게도 아직 고죠에겐 반지의 비읍 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마셔요, 마셔!”

퇴근 후 같은 부서 사람들끼리만 하는 가벼운 회식 자리. 나는 한 모금 마신 맥주를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건너편에서 다른 직원이 열변을 토하는 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사토루. 나 말이야. 우리 반지⋯ 잃어버렸어. 정말 염치없지 않니. 이 말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할까. 고민하려니 또 답답해져서 맥주잔을 도로 쥔다. 입 안이 썼다.

술을 잘 못 하는 내가 맥주 500cc를 다 비울 때쯤에는 팀 회식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소지품을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별안간 타케우치 대리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요. 같은 방향이니까 태워다 줄게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건 누구에겐 솔깃한 제안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고, 나는 취하지도 않았으며 혼자 귀가할 방법은 많았기 때문이다.

“하하. 사양 안 해도 되는데. 나는 술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걱정하지 말고 그냥 타고 가요.”

“그래~. 그냥 타고 가!”

그러나, 한 차례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계속해서 부딪혀 왔다. 좋은 게 좋은 거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혼다 과장의 부추김 또한 주저하는 내 등을 마구 떠밀고 있었다. 그럼 하는 수 없이. 그들보다 연차도 직급도 낮은 나는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을 허락할 수밖에 없다. 매일 보는 얼굴들과 괜히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또한 사회생활이었다.

나와의 친밀도를 점수로 매기자면 10점 중 5점 정도 되는 타케우치 대리는 운전하는 내내 먼저 대화를 시도해왔다. 다행히 그 안에 불편한 주제는 없었다. 우리는 그냥 회사 얘기나 서로 적당히 대답하기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나는 꾸물대지 않고 안전띠를 풀었다. 내리기 직전엔 감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조수석에서 내려 내 갈 길을 가려던 순간.

“잠시만요.”

이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타케우치 대리가 운전석 문을 열고 따라 내리더니 내 팔목을 다급하게 붙잡아 돌렸다. 놀란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또 한 번 예기치 못한 제안을 꺼냈다.

“이 근처에 괜찮은 곳을 아는데. 같이 한 잔만 더 하고 갈래요?”

“네?”

“아니. 좀 아쉬워서.”

아쉽다고? 뭐가?

솔직히 달가이 여길 수가 없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불편함이 스멀스멀 몸을 감쌌다. 나는 호감형 얼굴 뒤편에 감추어진 새카만 속내를 눈치챈다. 타케우치 대리의 얼굴 위로 떠올리기 싫은 이의 모습이 겹쳤다. 불편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또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며 잡힌 손을 뿌리쳤다. 예의상 조심히 들어가시란 말만 전하고 다시 등을 돌릴 생각이었다.

“잠시만!“

강제성이 엿보이는 손길이 또다시 나를 가로막았다. 남성과 여성의 힘 차이를 실감하는 여기부터는 불편을 넘어선 공포였다. 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가방끈을 꾹 쥐며 본능적인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런 내가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겠다는 건지. 타케우치 대리가 목덜미를 쓸며 머뭇거렸다.

“솔직히 관심 있어요.”

“⋯⋯.”

“그런지 좀 됐어. 회사 사람이고, 애인도 있다고 하길래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지금은 애인이랑 헤어진 거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단언컨대 나는 이 사람이 내게 사적인 호감을 표현하는 것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다만, 애인이랑 헤어진 거 아니냐는 그 말은 듣자마자 온몸에 얼얼한 충격이 일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지만, 타인에게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타케우치 대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내 왼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아차 했다. 요즘 반지 안 껴? 며칠 전 동료 주임에게 스치듯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의 안일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 왜 관계도 없는 이 사람에게 해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더 불편한 감정이 쌓이기 전에 오해를 바로잡긴 해야 할 거 같았다. 먼저 속에서 말을 정리하고 대리님, 하며 운을 떼는 순간이었다.

“자기야.”

익숙한 목소리. 그것이 내 입을 틀어막고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무겁게 웃는 낯이 보였다.

 

 

***

 

 

예고 없는 마중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죠 사토루가 등장함으로써 타케우치 대리와의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이번 주말이 지나고 회사에 출근했을 때. 나와 그 사람 사이엔 이전과 다른 민망한 기류가 흐르겠지만, 그건 어차피 우리밖에 모를 해프닝에 불과하다. 설령 원치 않은 방향으로 소문이 난다고 해도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오늘도 깜박했어?”

내가 진정으로 견디기 힘든 건 그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나의 허전한 왼손을 꼭 붙잡고, 평소처럼 발맞추어 걸었던 고죠 사토루 말이다.

“말하고 싶은 게 많을걸. 내가 듣고 싶은 게 많으니까.”

“⋯⋯.”

“편하게 말해 봐. 나 지금 들을 준비 다 했잖아.”

단단히 짜증 났으리라고 예상한 고죠는 의외로 차분하고 평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지라. 나는 입을 열기에 앞서 최대한 작은 몸짓으로 가방부터 식탁에 내려놓았다. 찰나에도 고죠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의식하지 않는 척을 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실망할까 봐 겁이 난다. 어떻게 말해도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고죠가 내 이름을 재차 불렀다. 눈이 마주치면 양쪽 발끝이 곱아들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들킬 일이었음을 안다. 그럼에도 시간 끌어가며 피하던 이유는 분명히 있다. 반지는, 많은 의미가 담긴 물건이었다. 영원을 맹세하는 결혼반지까진 아니더라도 고죠와 내가 처음으로 나눠 낀 것이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던 거고,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존재와 의미를 분명하게 증명하던 것이었다. 디자인부터 섬세한 세공까지. 고죠가 간섭하지 않은 부분이 없으니 그 값은 말할 것도 없다.

“2년을 잘만 끼고 다닌 반지가 이제 와서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닐 거야.”

“⋯⋯.”

“그럼 마음에 안 드는 건 나인가?”

고죠는 말도 안 되는 추리로 나를 한 번 떠보곤 고개를 까딱였다. 입술 표면에는 웃음이 자리했지만, 결코 유쾌하여 내보이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찬 바람이 불고 있다. 따뜻한 조명 아래서 분위기는 착실히 얼어붙고 있었다. 은연중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으면서도 상상과 현실은 달라서.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몸이 절로 굳는다. 불에 달군 돌멩이를 삼킨 것처럼. 타는 입술만 연신 달싹이면 이번에도 고죠가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

“나 싫어진 거면 말을 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문장의 기저엔 지친 한숨이 녹아 있다. 부러 감추고 있었을 분노도 희미하게나마 엿보였다. 발설하지 않은 뒷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과거를 통틀어 가장 냉담한 모습이었다.

고죠는 벽면에 등을 기댄 채로 나를 응시했다. 최근 성가신 일이 많이 생겼다더니 정말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애를 근래 가장 피로하게 했던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무겁게 느낄수록 무섭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던 지난날은 우스워진다. 내가 진실로 겁냈어야 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나의 아둔함이 기어코 고죠의 입에서 저런 말을 나오게 한 것이다.

“⋯⋯어.”

“뭐?”

목소리가 갈라졌다.

“잃어⋯⋯버렸어.”

안에서부터 주눅 든 음성은 바깥에서도 초라하게 흘렀다. 고죠는 자신이 기다려 줄 테니까 어디 한 번 들어나 보게 계속해서 해보라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도 기억이 안 나. 계속 찾으려고 했는데⋯⋯. 못 찾았어. 끝까지 숨길 생각은 아니었고, 말은⋯. 너한테 말은 계속하려고 했는데. 원래 오늘 하려고 했었어. 근데 미안하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려워서⋯⋯.”

정돈되지 않은 말을 깨끗하게 종결하기란 어렵다. 다른 곳에서 아무리 말 잘한다는 소릴 들어도 고죠 사토루 앞에서는 자주 이런 식이니 그저 부질없다. 나는 지저분해진 말끝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떨궜다. 어쩌면 내가 걱정했던 건⋯⋯. 얘가 나한테 실망했을까 봐 가 아닐 수도 있다. 사실은 그냥 반지를 잃어버린 나 자신이 나도 싫어서. 그걸 보이는 것 또한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정적이 길다. 실제로 긴 것인지 아니면 체감만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침묵이 뼈아파서 자꾸만 사위가 암전되는 착각마저 일었다. 이런 식으로 싸우고 싶지 않다. 코끝이 따끔거렸지만, 잘못한 사람이 울기까지 하는 그림은 최악일 거 같아서 아닌 척 내 발끝만 한참을 주시하는 때였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의 몸통을 가위로 가로지르듯이. 코앞에서 소탈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난 또 뭐라고.”

“⋯⋯.”

“뭐야~. 그런 거였어?”

⋯⋯이게 무슨 반응인지. 당황스러운 시선을 던지면 고죠의 넓은 어깨가 으쓱였다. 걔는 이게 뭐 별거냐는 듯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나 참. 조그만 머리로 또 이상한 생각을 했을 줄이야. 그렇게 덧붙인 후엔 멍청하게 서 있는 나와 거리를 좁혔다. 큼지막한 손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솔직히 타격감이 아예 없다곤 못 하겠군. 지금까지 네가 날린 것 중에서 이번이 최고로 유효타야.”

“⋯⋯화 안 나니?”

“음? 화났다고 하는 건데. 날 상대로 끝까지 숨기지도 못할 거짓말을 한 건 우습고. 아까 그 상황은 다시 생각해도 무지하게 열 받고. 반지도 가벼운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아쉽긴 하다고. 하지만⋯⋯.”

이마 근처를 배회하던 손이 늘어지는 말끝을 따라 천천히 이동한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얼굴 여기저기를 간 보듯이 하다가 종국엔 처음부터 목적은 이쪽이었다며. 무방비한 코를 꼬집고 떨어졌다.

“싫어질 리가 없지.”

내 겁쟁이 선배. 매번 뭘 걱정하는 거람.

고죠가 허리를 굽히며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내 기분은 조금⋯⋯. 괜찮다며 웃는 얼굴을 보는데도 안도라고 부를 수 없는 미묘한 감정만이 밀려왔다. 고죠 사토루의 진심은 대체로 가벼이 휘는 입꼬리 안에 꼭꼭 가려져 있어서 그런 걸까. 나는 진실을 고백했음에도 여전히 가슴을 돌덩이로 누르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그나저나 회식이라더니 빨리 끝났네?”

나만 놔두고 되돌아가려는 일상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

 

 

어린 날 고죠 사토루와의 관계 변화를 감지했던 일처럼.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니 지금껏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우리가, 서로 얼굴 한 번 안 붉히고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었던 이유 또한 안다.

그날 야마자키에게 내놓지 못했던 정답.

그건 매사에 지는 일이 익숙한 나를 만나면서 고죠가 저 나름대로 양보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깊고 무거운 밤은 내 눈꺼풀까진 누르지 못했다. 억지로 눈을 감아봤지만, 수마가 덮쳐오는 일 따윈 없었다. 결국, 나는 꾸역꾸역 잠을 청하고 포기하길 반복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아래 조심히 발을 내리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쪼르르. 컵에 냉수를 따르는 소리는 텅 빈 속에 물 굴러가는 소리와 비슷하다. 과거에 내 안에서 자주 들리던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마르지도 않은 입을 축이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을 회상했다.

짧은 해명을 들은 후, 고죠는 잠들기 직전까지도 평소처럼 행동했다. 떨떠름한 반응이 절로 나올만한 시시한 농담을 했고, 그러면서도 평소의 애정 어린 태도를 보여줬다. 물론 나는 그 앞에서 내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헷갈릴 만큼 어색히 굴었지만, 걔는 나더러 쉬운 길을 굳이 어렵게 돌아왔다는 것처럼 굴었다.

‘반지는 뭐, 다시 맞추면 되지.’

아쉬움은 별개로 친다고 했다. 고죠는 그 일만 두고 봤을 땐 내게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단다. 자신이 이런 이유로 나를 싫어할 리가 없다고도 말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게 모르게 얼어있던 이유. 평소의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늦은 밤까지 뒤척이던 까닭.

‘나 싫어진 거면 말을 해.’

탁. 손에서 컵을 놓친다. 자꾸만 그 순간이 떠오르는 탓이다. 오해로 빚어진 장면은 이야길 끝내고도 소흔처럼 남았다. 불온했던 첫 만남. 그보다 더 사늘했던 고죠 사토루의 말투와 눈빛 따위가 왜인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타이밍에 묻혔을 뒷말 역시 짐작할수록 우울해진다.

너는 왜⋯⋯.

나는 서러운 생각을 잇는 대신 손바닥 안쪽으로 눈자위를 비볐다.

“흑⋯⋯.”

반복적인 행동 끝엔 기어코 흐느낌이 터졌다. 눈 비비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뺨이 젖어 들었다. 너 왜 나한테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인간은 이토록 이기적이라 제 잘못은 금세 잊고 상대에게 서운했던 감정만을 부풀려 반추한다. 이게 정상이 아니란 건 알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도 없다. 나는 입을 앙다물고 눈가며 뺨이며 계속해서 닦아냈다. 버릇처럼 흐느끼는 소릴 막으려고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누르는 그때였다.

“이럴 줄 알았지.”

어두운 부엌에 불빛이 쏟아졌다. 막힌 호흡이 두 번 뛰었다. 번진 시야로 전등 스위치를 등진 고죠 사토루가 스몄다. 걔는 말마따나 이 상황을 예상한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을 마주하니 또다시 왈칵 울음기가 치솟았다. 나는 아예 팔목까지 사용해 얼굴을 닦아냈다. 그러다가도 아닌 척. 모르는 척. 있는 힘껏 시선을 회피하면서 애먼 빈 컵만을 정리하려고 움직이자, 묵묵히 있던 고죠가 반응했다. 성큼성큼 나와의 거리를 메운 걔가 자기야, 하며 내 팔목을 붙잡아 내렸다.

“(―).”

“⋯⋯.”

“선배. 나 좀 봐 봐.”

가끔 선배라는 단어는 얘한테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것만 같다. 물론 그 호칭에만 유독 달리 반응하는 내 탓이 더 클 테다.

고죠의 뜨거운 손바닥이 축축한 뺨에 닿았다. 고개를 슬그머니 반대쪽으로 피하자 턱도 없는 반항이라는 것처럼 아예 양쪽 뺨을 다 쥐듯이 했다. 내 입술을 비집고 훌쩍임이 새어나가면 고죠 입술에선 반대로 얕은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음. 이상하다. 나 잘못한 거 없는데. 걔는 방울지는 눈물을 대신 닦아주며 퍽 무구하게 말한다. 솔직히 맞는 말이었지만, 조절하는 법을 잊은 눈물은 지치지도 않고 차올랐다.

“아까부터 계속 울고 싶어 했던 건 알아. 대충 이유도 알고. 다 보였거든. 당신 성격에 반지 잃어버렸을 때부터 끙끙 앓았겠지. 바보같이. 나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서 긴장하고. 쓸데없는 걱정 하고.”

“나는⋯⋯.”

“그래도 너무 많이 우네. 속상하게.”

고죠는 자기 할 말만 던져놓곤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럼 나는 하고픈 말을 가로채였음에도 일단 걔 허리에 두 다리를 감고 두꺼운 목을 끌어안는다. 이윽고 침대가 있는 안방 대신 거실 소파로 이동한 고죠가 품속을 끝도 없이 파고드는 내 머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걔는 저 편한 곳에다가 아무렇게나 입술을 붙이곤 속살거렸다.

선배. 그만 울고. 좀 들어 봐. 있잖아.

속닥속닥.

띄어쓰기 하나마저 나를 달래는 주문처럼 느껴진다. 나는 내 몫의 속상함과 서운함을 책임져 주는 목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호흡이 정상 궤도를 찾을 때쯤에는 천천히 고갤 들어 올렸다. 마주 본 고죠가 눈물에 이리저리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엉망진창~. 이대로 욕실 갈까?”

“사토루, 너⋯⋯.”

“그래. 나한테 미안한 거 다 알아.”

“다시는⋯⋯ 그러지 마.”

“응?”

고죠가 꺼진 조명 아래서도 명료한 두 눈을 깜박였다. 나는 우느라 한층 잠긴 목소리로 다시 한번 단연하게 말했다.

“다시는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

“그런 표정 짓지 마. 나한테⋯⋯.”

그러지 마.

염치없이 당부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고죠는 다소 얼빠진 얼굴을 했다. 자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고, 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걔는 머리카락 정리해주던 손까지 멈추고선 ‘내가 무슨 말을 했었더라?’라고 되묻는 듯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 그쪽이었나.’ 하며 힘없이 입술을 터뜨렸다.

“조금⋯⋯ 뻔뻔해지긴 했어.”

“뭐?”

“사랑스럽다는 말이야.”

고죠의 양팔이 내 허리를 보다 힘주어 껴안았다. 작은 소동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지그시 응시했다. 머잖아 내가 먼저 떨림이 남은 양손을 가슴팍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면 젖은 입술이 짧게, 또 각도를 약간씩 달리하여 여러 번 겹쳤다가 떨어졌다. 하하. 소금 맛. 나는 나를 놀리듯 슬쩍 빼내는 혀와 봐도 봐도 비현실적인 눈동자를 면밀하게 살피며 비로소⋯⋯.

⋯⋯인정했다.

나는 이 사랑이 되도록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헬리오토로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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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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