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프로포즈 로그

20210724

*CoC 7판 팬메이드 시나리오 '나의 바니걸 워리어!" 스포일러 함유

 안녕, 피어. 제로야. 이렇게 너한테 편지를 써. 선물이 많아서 놀랐어? 꽃다발에, 반지에. 반지는 노란색 보석이랑 초록색 보석 둘 중에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남는 건 내 걸로 할게. 가벼운 연애편지는 몇 장 썼던 것 같은데, 이런 걸 쓰는 건 처음인 것 같네. 정말 오랜만에 긴장이라는 걸 하는 것 같아. 나 긴장하면 자꾸 목이 마른가봐. 이만큼 쓰는데도 벌써 물을 한 컵하고 반 마셨어. 천천히 이야기할게. 왜 긴장했는지나, 반지나.

 너랑 만난 지 이렇게 오래된 줄 몰랐어. 처음 너랑 만났을 땐 나이 앞자리 수가 1이었는데 이제 2가 됐어. 나이는 상관 없는 거라는데 난 그냥 계속 세고 싶어져. 내가 살아온 게 그만큼이라는 거잖아. 숫자가 하나하나 늘어가는 게 재밌는데, 어디서 재미를 느끼느냐 하면 그건 모르겠더라고. 그냥 사는 게 재미있는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잘은 모르겠지만 친구들이랑 지내는 시간은 즐거워. 그 시간들이 쌓여서 지금이 됐나봐. 그래서 재밌다고 느끼는 거라고, 결론을 내리기로 했어. 숫자가 늘수록 지낸 시간도 쌓이는 거니까.

 그렇지,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일도 재밌었어. 조금 놀랐지만. 그런 복장이 멋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생각을 바꿨어. 특이하긴 했지. 바니걸 복장... 그런 걸 입고 총을 쏘고 호텔문을 날려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아마 유명해졌을 거야. 그래도 좋게좋게 끝나서 됐어. 정말 다행이야. 크리스마스에 본 불꽃놀이 중에 그 날이 제일 멋졌어. 절대 잊지 못할거야. 끝나고 나서 맛있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먹었잖아. 딸기 잔뜩 올라가있고, 초콜릿으로 장식한 거. 네가 평소에 티타임에 가져오는 케이크보단 덜했지만 맛있었어. 혼자 한 판 다 먹을 수 있었는데 참았어.

 수다가 좀 길었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야. 이런 이야기 너랑 마주보고 해도 되는데, 자꾸 용건을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다른 말을 쓰게 돼. 아마 이 편지 너 읽게 두고 난 앞에서 네 눈치나 살피겠지. 일단...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부터 설명해야 돼.

 불쾌할 지 모르겠지만, 난 피어를 애인이라고 정의하기 싫었어. 절대 네가 싫다는 말이 아냐. 그냥, 마음에 안 들어. 애인이라는 말은 너랑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거 같거든. 나는 피어랑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 근데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 지 모르겠더라. 애인이라는 말은 거리감 있어서 싫은데, 그것보다 더 가까운 사이는 뭔지 모르겠어. 아, 몰랐어. 왜 거리감있다고 생각했냐면 가족할인은 있는데 애인할인은 없잖아. 그것도 있고, 서류상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게 조금 걸렸어. 네가 나한테 흔적처럼 남았으면 좋겠어. 어떤 형태로든 말이지.  그런 생각때문에 당분간 계속 답답했어. 딱히 좋은 생각이 안 났거든. 먹는 것도 안 들어가고. 정말 심할 땐 밥 한 그릇밖에 못 먹었어. 심각하지. 그랬어. 태어나서 고민을 그렇게 해본 건 처음이야. 나한텐 정말 컸어. 피어랑 계속 함께일 수 있는 방법. ...바스한테 물어봤는데, 그런 게 있으면 자기도 좀 가르쳐 달라고 말하더라. 모르겠다고. 주변에 바스 밖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되니까 더 고민됐고 말이지.

 한 한 달을 그렇게 보낸 것 같아. 그 때 피어가 나 좀 아파보인다고 했었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서 미안해. 아무 것 맞았어. 너랑 연결된 거라 말을 제대로 못 했어. 네가 걱정하니까 적어도 너 앞에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뭐라도 먹으려고 평소 점찍어뒀던 샌드위치 가게에 가려고 했는데, 안 보이던 가게가 눈에 띄더라.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웨딩드레스 파는 가게. 응. 그 가게였어. 한참을 거기 서 있었어. 배고픈 것도 모르겠더라. 드레스가 예쁜 것도 있었어. 한 번도 누구 결혼식을 간 적은 없으니까, 가까이서 보는 건 그게 처음이었거든. 근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난 너무 자연스럽게 네가 그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내 옆에 서있는 걸 상상했어. 그 상상이 너무 즐거워서 거기 머물렀던 거야. 

 좀 알겠더라. 내가 너랑 뭘 하고 싶은지.

 이리저리 알아봤어. 뭐가 필요하고, 뭘 준비해야하고... 그런 거? 생각보단 준비할 게 없더라.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나봐. 오히려 그런 것보다 너한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제일 어려웠어. 그런 상상을 한지는 이미 한참인데, 그 말이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편지로 쓰고 있어. 태어나서 지금이 제일 어려워. 그렇지만 이 순간을 주는 게 너라는 점이 난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

 네가 없었다면 난 아직도 감정 없는 껍데기처럼 살았을 거라 생각해. 워낙 내가 표현도 안 하고, 할 필요성도 못 느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 나 참 차갑게, 껍데기처럼 살았다고.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로봇 있잖아. 그게 딱 나같다고 생각했어.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알 것 같아서. 잘 된 일이기도 해. 피어를 보면서 한 번도 무섭다고 생각한 적 없어. 피어가 능력을 쓸 때도. 그냥 소름이 살짝 돋는 정도였거든. 그래서 피어가 나한테는 좀 편했던 걸까? 나랑 닮았어... 그런 생각을 했거든. 사람들한테 쉽게 다가가질 못 하는 게. 

 너를 만나고, 어떤 게 즐거운 건지, 어떤 게 슬픈 건지, 좋은 감정 나쁜 감정 가릴 게 없다는 것도 알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됐어. 너랑 있으면 행복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먹는 것도 양보할 수 있어. 헤어지는 건 아쉽고, 다음엔 언제 만날까. 다음 일정을 생각하게 돼. 피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뭐든 다 하고 싶어. 언젠가 피어가 행복한 게 내 행복의 척도가 됐어. 책같은 데 보면, 내 한평생을 바쳐서 사랑할거다. 이런 표현 나오잖아. 그런 말 이해 못 했거든. 이젠 이해가 돼. 내 인생을 바쳐서 널 사랑하고 싶어.

 나, 진짜 잘 할게. 피어가 싫다고 하는 거 절대 안 해. 늦잠도 안 자고. 요리는 내가 다 할게. 요리학원 다닐 거야. 청소 빨래 이런 것도 내가 하고... 장보는 것도 내가 할게. 아무튼 일은 내가 다 할게. 피어는 그냥 나랑 있어주기만 하면 돼. 그냥 나랑 가끔 손잡고 나가서 산책하고 자기 전에 나랑 이야기해주면 돼. 정말, 난 그거면 만족해.

 크리스마스, 꿈에서 나가기 전에 말이야.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불빛만 있고, 너는 나한테 손을 내미는데. 그 때 딱 예식장에 서서 네 손을 잡으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을 했어. 엄청 행복했고, 설레더라. 그 때 확신을 가진 것 같기도 해. 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진 않을 거야. 어려움이 있겠고, 지금까진 없던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좋은 일이 더 많도록 할게. 나 노력도 많이 할 거고 이 마음 변치 않을거야. 날 믿어줬으면 해.

 꽃다발, 크리스마스에 네가 말했던 것처럼 수국으로 준비해봤는데, 좋아했으면 좋겠다. 보라색 수국 꽃말은 진심이래. 여기 내 진심도 같이 전해졌으면 좋겠어.

 맞아. 이건 프로포즈야.

 피어, 나랑 결혼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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