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어르신
내가 죽고 나서는 알려주실 겁니까.
𝐓𝐞𝐱𝐭
메리 크리스마스, 어르신
인물 소개
킨센트: 저택의 어르신. 청년이지만 왜인지 도련님으로 불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프로타 출신. 현재는 재력으로써 권세를 얻은 新계층인 ‘프로이데’에 속한다.
조르주 드 라투르: 노년기에 접어든 집사장. 저택 관리인이자 킨센트의 오랜 친우. 신사적인 면 뒤로 호탕한 성격을 숨겼다. 안타고 출신.
시엔 베흐난: 천방지축 메이드. 부모가 빚 때문에 도주한 탓에 어려서부터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다. 킨센트를 가족처럼 따른다. 코러스 출신.
테오 반 카르벤튀스: 바텐더를 꿈꾸는 멋쟁이. 타인의 마음을 눈치로 금방 알아챈다. 몰락한 안타고 출신.
요한나 체레번: 회계 담당. 조르주의 후계로, 성격은 그를 똑닮았다. 손재주가 좋아 종종 까다로운 요리를 쉽게 선보인다. 프로타 출신.
마르호트 앙젤: 킨센트의 광팬. 붙임성이 좋고 성가시다. 매일 다른 디자인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다. 코러스 출신이며, 프로이데에 속한다.
케세르와 마케르스 쌍둥이: 저택의 사무 업무를 보조하는 남매. 충성스럽지만 표현이 무뚝뚝하다. 프로타 출신.
빌 헤세드: 저택의 궂은일을 도맡는 순박한 청년. 코러스 출신.
1부: 크리스마스이브에 파티를
1
“자네 진심이야?” 킨센트가 착잡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뭔지 모른다고? 아니, 애초에 ‘파티’는 아나?”
“먹을 건가요?”
그런 대답 후에 몇몇 사용인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 이름인가? 그럴지도 몰라. ‘크리스마스’ 뒤에 붙은 걸 보면 기념 훈장 같은 건가? 왜, 귀족 나리들이 가슴에 붙여 놓는 반짝반짝한 거……. 저들 나름대로 그럴듯한 추론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아는 사용인들과 킨센트만이 이들을 어쩌면 좋지 하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나. 자네는 알지?”
“알다마다요.”
“파티가 뭔데?”
“어르신이 하고 싶으신 거 아닌가요?”
“잘 피해 가네. 누가 보면 해본 사람인 줄 알겠어.”
“하핫.”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모르는 이들만 하하호호 웃는 풍경은 뭐란 말인가? 하기야 알 법도 하다. 이 저택에 머무는 이 중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제대로 즐겨본 인간이 몇이나 있겠는가? 안다 쳐도 구식이나마 맞춰 푸석한 빵 조각과 감자와 무른 과일을 똥 씹는 얼굴로 먹고 포도주를 비웠을 것이다. 아니면 그날마다 킨센트처럼 귀족네들이 뒤처리한 음식을 주우러 갔든지. 그래……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들인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한차례 머리칼을 헝클어트린 킨센트가 묻는다.
“키 작은 나무 파는 곳 아는 사람?”
“저요! 옛날 집 뒤편에 많으니까 하나 업어오겠습니다.”
“그 집…… 안타고가 등쳐먹고 차지한 땅이라 했던가?”
“그런 것까지 기억해주십니까? 맞습니다.”
“세 그루 털어와. 한 그루는 크리스마스트리야. 말해줘도 자네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알아. 한 그루는 유리 온실 안에 심고, 나머지 하나는 겨우내 땔감용이네. 땔감용으론 본디 큰 나무가 제격이네만 안타고 땅이라 하니 열받으니까 그냥 싹 훔쳐 와. 그 집 주변에 상가도 있댔나?”
“넵!”
“그럼 올 때 노케를 재료 사와.”
“넵!”
“아, 살구잼도 좀 더 사는 게 좋겠어. 슬슬 떨어져 가더군.”
“술이 얼마 남았는지는 한사코 모르겠다며 더 사시더니 살구잼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아시는군요.” 노집사가 끼어들어 빈정댄다.
“조르주, 나 지금 빌이랑 얘기하고 있잖아.”
킨센트가 노집사 조르주를 흘겨보고는 다시 빌에게 고개를 돌렸다. “위스키도 사와. 품명은 따로 메모해줄 테니.”
킨센트가 금화가 든 자루를 빌에게 던져주었다. 나무 세 그루뿐 아니라 빌의 옛집 부지 전체를 사들이고도 남을 만한 수량이었다.
“다 하고 남은 돈은 자네가 가져.”
“넵……!” 어르신 맙소사.
2
킨센트는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다 말고 시야에서 책을 치운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빌이 노케를을 담은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남은 손에는 킨센트가 금화를 퍼담아 주었던 자루가 들려 있었다. 전과 비슷하게 묵직해 보이는 것이, 아마 빌은 킨센트가 사라고 지시한 것만 산 후 돌아온 모양이었다.
“자네 가지랬더니 왜 도로 들고 오나?”
“어차피 어르신께서 저희를 위해 써 주실 돈이지 않습니까.”
“내 돈이 이미 자네 돈이라는 뜻이야?”
“삼 할 정도는……?”
빌의 대답에 그가 빌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땡. 자네들에게 오 할 정도는 쓰고 있네.”
“오 할이나요?”
“뭘 놀래? 나 죽을 때 되면 팔 할로 늘려줄 텐데.”
“상속은 안 하십니까?”
“자네들에게 한다고는 생각 못 하나?”
“그럼 자식분들은요?”
“있지도 않은 자식 생각을 뭐 하러 해.”
“그래도 말입니다.”
“그보다 자네 집은 아쉽지 않던가? 사고 남을 돈이었을 텐데.”
“아, 그게…….”
빌이 머뭇거리다 입을 뗀다.
“실은 저도 돈을 가지고 한을 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고를 찾으려고 보니 마당에서 어느 애가 꽃을 구경하고 있더라고요. 아마 집주인 딸이겠지요. 정말 즐겁게 웃고 있었습니다.”
“허, 그래서?”
“아무리 안타고의 자식이라지만 애까지 증오할 순 없지요, 암요…… 그래서 구석진 곳에 있던 나무 세 그루만 사고 나왔습니다.”
빌이 말을 마치곤 볼을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께서 모처럼 신경 써 주셨는데요.”
“그 애는……” 킨센트가 뜸을 들인다. “사랑스러운 애던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애였죠.”
킨센트는 시야에서 거두었던 책을 도로 들어 제 안면에 덮었다. 그리고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렇다면 자네도 자식 아닌 이에게 상속하고 온 셈이로군.”
3
킨센트의 사용인들은 한두 명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두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태생의 신분이 고귀하건 미천하건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성년을 지났더라도 스무 살을 넘지 않았다. 즉 불혹을 한참 넘긴 조르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스물한 살인 킨센트보다 어리다.
사용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킨센트에게 의탁했다. 고아이거나, 가족을 신뢰할 수 없거나, ‘어르신’의 면모에 여러모로 반했거나, 단지 급전이 필요해서. 그러나 서로 생활하며 느끼는 바는 똑같았다. 이만한 직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이런 보금자리는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노라고. 킨센트의 저택은 직장이라기보다 사실상 보육원에 가까웠다. 의식주도 교육도 휴가도 원하는 만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킨센트는 사용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원하는 것을 감추는 아이에게 혼을 내곤 했다.
― 자네가 뭘 원하는지는 말해야만 알 수 있어.
킨센트는 이상한 남자였다.
동시에 온화한 어르신이다.
킨센트가 그 스스로 자선 사업에 뜻을 둔 건 아니었다. 거리에서 딱한 아이를 보고 자기연민에서 비롯한 동정심이 들었을 때, 마침 그의 저택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자기가 카우치 소파에 널브러져 마카롱을 우물거릴 때 땀 흘려 일하는 수고를 감사히 여겨 잘 대하는 것이고, 정이란 것은 잘해주다 보면 정말로 생기게 된다―― 라고 킨센트는 주장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가 사용인에게 헌신적인 이유는 필요에 의한 행동이 쌓인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 킨센트는 사용인들을 사랑할 뿐이다.
4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 해가 이미 곯아떨어진 바깥에도 불구하고 사용인들과 킨센트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방 한구석에서는 손재주 좋은 요한나가 케이크에 생크림을 바르기 바쁘고, 또 다른 구석에서는 오븐에 칠면조를 넣은 시각을 아무도 기록해두지 않아 빌과 시엔, 엘리사벳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지금 탄내가 나네 마네 설전하고, 주방과 연결된 간이 바에서 테오가 위스키와 드람뷔를 조합해 여러 실패작을 내놓고 있으며, 조르주가 심혈을 기울여 테이블을 멋들어지게 세팅하는 차에, 마르호트를 비롯한 열 살이 안 된 아이들이 킨센트와 저택 홀에서 키 작은 전나무를 꾸미고 있었다.
킨센트가 가장 높은 곳에 별을 단다. 마르호트는 킨센트를 자꾸만 곁눈질하며 말린 물망초를 나뭇가지 틈틈이 꽂아놓고 있었다. 트리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누구는 알전구를 매달고, 또 누구는 솔방울을 붙이고…….
한편 주방에서 그릇 엎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바닥을 걸레로 벅벅 닦는 소리가…….
“테오?”
킨센트가 트리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간이 바 쪽을 보았다. 쏟아버린 술을 벅벅 닦던 테오가 왁스를 듬뿍 발라 고정한 앞머리를 괜히 만지작대며 킨센트의 눈치를 봤다.
“면, 면목 없습니다, 어르신.”
킨센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테오를 쳐다본다.
“……쏟은 건, 위스키? 아니면 70년산 드람뷔?”
“둘 다 조금씩…….”
테오의 대답을 듣고는 킨센트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다.
“아아, 그렇구나. 다양하게도 쏟았군…….”
킨센트는 눈물이 차오르는지 고개를 들고 샹들리에 조명을 눈에 담으며 하하 웃고 있었다. 마르호트가 킨센트를 보고 제 양갈래를 아래로 쭈욱 잡아당기며 안절부절못하더니 고개를 홱 돌려 테오를 노려본다.
“테오 오빠 때문에 내 어르신이 쓰러졌어……! 오빠 때문이야! 오빠 때문이라구!”
“딱히 네 어르신은 아니잖아.”
“테오, 그 술들 말이야, 걸레 대신 깨끗한 수건으로 닦도록 하게. 나중에 내가 짜서 마실 테니까…….” 킨센트가 중얼거린다.
“오빠 때문에 어르신이 노망나셨어……!! 흑, 어르신 제가 이마에 호 해드릴까요? 뽀뽀해드릴까~요~!?”
마르호트가 킨센트의 옆에 슬금슬금 붙어 앉으며 물었다.
“네 어르신 경찰 아저씨한테 넘겨주고 싶으면 그리하거라.”
킨센트가 마르호트의 머리를 쓰다듬곤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난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아직 노망날 나이 아니야.”
“‘네’ 어르신…….”
그렇게 중얼거린 마르호트가 “마르호트, 오늘부터 무덤 들어갈 때까지 절대 안 씻어!”라며 트리의 선물상자 장식을 정돈하고 있던 리스를 붙잡고 떠든다. 리스는 질린 얼굴로 마르호트에게 루돌프 장식물을 쥐여주었다, 마르호트가 싱글벙글 웃으며 루돌프를 장식할 즈음 킨센트는 테오에게로 걸어가 똑같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네. 화내지 않아. 술을 쏟았다고 화낼 생각이었다면 자네 대신 조르주에게 이 일을 맡겼겠지. 자네가 조주를 연습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연습은 실패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거야. 그러니 실패했다고 해서 겁먹지 말게.”
“감사합니다. 그럼 저기 찬장에 있는 브랜디도 써도 되나요?”
킨센트가 입만 웃는다. “내가 한 말 잊게. 자네는 겁을 좀 먹게 둬야겠군. 싹수가 심상치 않아.”
킨센트가 테오의 볼을 잡고 죽죽 늘리는 사이, 요한나는 5단 케이크 맨 아래층에 딸기와 블루베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또 다른 구석에서는 빌과 시엔, 엘리사벳이 촉촉하게 구운 칠면조 요리를 셋이서 번쩍 들고 자랑하고 다닌다. 조르주의 손을 거쳐 깔끔하게 세팅된 테이블에 갓 구운 빵과 버터, 스테이크가 자리마다 놓여 있었다. 마르호트를 비롯한 열 살이 안 된 아이들은 저택 홀에서 전나무에 건 전구들의 불을 켜고 있었다.
킨센트가 테오의 볼을 놔주고 말한다.
“조주는 파티 후에 연습하자, 테오. 대신 자네는 드레스룸에서 양말을 가져와 주겠어?”
“양말이요?”
“드레스룸 구석에 놓여 있을 거야. 웬만한 양말보다 크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네.”
테오는 잠시 고민하더니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킨센트의 저의를 알아챈 듯했다. 그리고는 양말 양말, 하고 잊지 않으려는 듯 중얼거리며 홀과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킨센트는 테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어 킨센트는 찬장에서 브랜디 대신 샴페인을 두 병 꺼내었다. 파티를 위해 오늘 낮 저장고에서 꺼내둔 컬렉션이다. 한 병은 제 몫, 나머지 한 병은 성년을 맞이했거나 곧 그렇게 될 사용인들을 위한 것이다. 샴페인 두 병을 테이블에 놓은 뒤에는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사용인들의 자리마다 사과주스를 놓았다. 음료를 모두 세팅한 후에, 킨센트는 먼저 식탁의 왼쪽 끝자리에 앉았다.
일반적인 ‘어르신’이라면 가운데 상석에 앉으렷다. 그러나 킨센트의 저택 테이블에는 상석이 없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 사용인들과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둘, 특히 크리스마스 파티란 누구 한 명의 기분을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을 맞이할 기회는 모두 동등해야 한다. 그것이 킨센트의 생각이었다.
킨센트는 테이블의 반대편 대각선 끝자리― 가장 먼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 너머 주방에서부터 묵직한 메인 디너를 들고 오는 빌, 시엔, 엘리사벳도. 세 사람이 킨센트와 눈을 마주치고는 활짝 웃는다. 시엔의 걸음이 다른 두 사람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하자 킨센트가 따라 웃으며 조용히 구순으로 뜻을 전했다. 그러다 쏟겠어. 시엔이 발걸음을 허겁지겁 빌과 엘리자벳의 속도에 맞춘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 무사 착륙한 칠면조 요리를 한가운데로 옮긴다.
이어 케세르와 마케르스 쌍둥이가 클로시를 덮은 요리들을 트레이에 담아 가져왔다. 그들은 야채나 생선 요리 따위를 칠면조 요리 주위에 올리고, 수프와 크림, 페이스트리를 개인 접시 가까이에 놓았다.
자기 일을 마친 사용인들이 각자 늘 앉던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리고, 다들 익숙하게 자기 몫의 잔을 들어 올린다. 모두가 높이 쳐든 자신의 잔을 바라본다. 킨센트는 느긋하게 샴페인이 든 잔을 횃불처럼 들어 올렸다. 샴페인의 기포 안에 샹들리에의 불빛이 튀긴다. 킨센트는 미소 지으며 축사를 시작했다.
“주여, 당신의 베푸심에 감사드리나이다. 우리가 잔을 드니 당신께서는 한 해의 마무리를 축복해주시옵고…….”
그 말에 사용인들이 일제히 킨센트를 쳐다본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당신 평판에 똥칠하는 양 새끼들을 하루빨리 거둬 가소서.”
사용인들은 저들끼리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각자의 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르신, 아무리 작은 연회라지만 체통을 지키십시오.”
조르주만이 헛기침하며 킨센트를 흘겨보았다.
“참나. 내가 자네들 앞에서 체면치레하게? 됐고 아멘이야, 아멘!”
킨센트가 피식 웃곤 샴페인을 들이킨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과 탄성이 튀어나오고, 하나둘 자기 음료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멘!”
테오가 유쾌하게 웃으며 사과주스 한 모금을 마셨다.
“아멘.”
요한나가 얌전히 사과주스를 입에 대었다.
“아멘……?”
성년을 앞둔 빌이 샴페인을 조심스레 마신다.
또한 사과주스를 받은 시엔이, 마르호트가, 리스를 비롯한 네 명의 어린아이들― 반과 코르넬, 크루아, 둘라, 샴페인을 받은 조르주, 엘리사벳, 안나, 그리고 케세르와 마케르스가, 아멘을 외치며 마른 목을 축인다.
킨센트는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한다.
‘본가를 방문한 이들도 함께했다면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킨센트는 자조적인 웃음을 냈다.
‘하긴, 난 그들의 보모가 아냐. 내 욕심이겠지…… 그래도…….’
“레이 씨와 에밀 씨도 함께했다면 더 좋았겠죠.”
그 생각을 엿듣기라도 한 듯 맞은편에 앉은 테오가 킨센트를 향해 눈짓해 보였다. 안 그래요, 어르신? 테오가 입 모양으로 되묻는다. 킨센트가 나지막이 웃었다. 확실히 그래.
“눈치 빠른 녀석이라니까.”
“다 들립니다 어르신.”
“귀가 좋은 거였나?”
5
식사를 마치자마자 킨센트는 반눈을 꿈벅이며, 분주하게 그릇을 들고 나르는 사용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킨센트가 “하?” 하고 기가 찬 소리를 내뱉고는 주방으로 향하는 사용인들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빌이 든 거대한 접시(칠면조 요리를 담았던 것)를 빼앗아 품에 안고 그 위로 요한나, 테오, 케세르와 마케르스가 든 접시와 잔들을 올렸다.
“어르신, 이게 무슨……?” 테오가 어느새 비어버린 손과 킨센트의 낯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됐어. 파티를 연 건 내 욕심이니 정리는 내가 하지. 자네들은 휴가나 즐기도록.”
“싫어요. 돌려주세요.” 케세르와 마케르스 쌍둥이가 입을 모았다.
“쉬래도.”
“어르신. 함께 먹은 건 함께 치워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식탁보를 돌돌 말아 안은 조르주가 킨센트가 안은 그릇 위에 올려진 잔 두 개를 집어 가며 핀잔을 주었다.
“조르주, 자네까지 이럴 거야?”
킨센트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조르주의 뒷모습을 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도 일은 충분히 해주었어. 오늘은 내가 하지.”
“오늘은 어르신도 휴가잖아요!” 시엔이 볼에 바람을 넣었다.
“내가?”
킨센트가 태연하게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단언한다.
“시엔, 어르신은 휴가 없네. 매일 빈둥거려서.”
“네네, 저희도 어르신 덕에 자주 빈둥거리니까 휴가 반납하겠습니다?” 요한나가 킨센트가 든 접시 두 장을 홀랑 빼간다.
“저도요.” 빌도 같은 양의 접시를 들고 도망친다.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엔 케세르와 마케르스 쌍둥이가.
“어르신은 푹 쉬고 이따 시엔한테 책 읽어 주시기예요!” 시엔도 제 접시를 되찾는다.
결국 킨센트의 품에는 칠면조 요리를 담았던 큰 접시만이 남아 있었다. 킨센트가 싱크대로 떠나가는 사용인들을 보며 허망한 목소리로 외친다.
“참나, 오늘만 쉬라니까요? 매번 내가 시키기만 하면 미안하단 말이에요!”
가지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테오는 어쩐지 킨센트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고 느꼈다.
“어르신, 이럴 때 보면 ‘젊은이’답네요.”
“뭐?”
“행동이 유치해요.”
“그런 말을 미성년자에게 듣는 기분도 생각해주겠어?”
“여하간 미안하다고 하셨죠.”
테오는 기어이 킨센트가 든 큰 접시에 손을 댄다.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더구나 부담스러워요. 사용인 된 입장에서 사용자가 일을 도맡으면 불안하지 않겠어요?”
테오는 접시를 가져가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접시가 영 뽑혀 나오지 않았다. 테오가 이상하게 여기고 고개를 들자, 킨센트가 접시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사용자인 건가요.”
그리고는 킨센트가 웃으며 테오에게 그릇을 넘겨주었다.
“미안함이 이유라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감정이길 바랐어요.”
“사용인과 사용자도 인간 대 인간이잖아요?”
“그거 말고요…… 동거인으로서이길 바랐는데.”
“아, 가족으로서?”
킨센트가 헛기침한다. “얘,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그 얘기 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
“고용주로서는 최악이네요. 가족 같은 직장 행세하는 곳은 좆같은 직장밖에 없잖습니까.”
“저 좆같아요?”
“얘,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테오가 한 팔로 뒤통수를 긁는다.
테오는 눈앞의 어르신을 신중하게 훑는다. 킨센트는 그답지 않게 의기소침해 보였다. 테오에게 그릇을 넘겨준 뒤 비어버린 손으로 괜히 소매 끝을 지분거리지 않나. 시선도 여전히 테오를 비껴가고 있었다. 테오는 턱을 살짝 들어올려 오만한 포즈를 취하고는 킨센트를 뚫어져라 보았다. 테오가 킨센트에게 그릇을 도로 돌려준다.
“근데 뭐, 어르신이라서 괜찮습니다.”
그 말에 킨센트가 주섬주섬 그릇을 안다 말고 테오를 똑바로 본다. 테오가 킨센트와 시선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인다. 테오는, 킨센트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테오를 보고 있으며, 곧 킨센트의 안면에 해사한 웃음이 번져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똑똑하신 것치고는 다루는 법이 단순한 분이라니까. 킨센트가 테오의 생각을 눈치챈 건지 헛기침했다. 품위를 되찾기 위한 행동이었다.
“자네들과 나 사이에 사적인 감정은 불필요하다는 걸 알아. 설령 서로 가족처럼 아낀대도, 사무적인 면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네. 내 기분에 억지로 맞춰줄 필요 없어. 그래도, 고마워.”
“뭘요. 저도 어르신이랑은 가족이고 싶죠.”
“정말?”
킨센트가 음역대를 한층 높인 소리로 답했다. 말씨를 진중하게 가다듬은 게 무색하지 않나.
“그러니까 더 솔직하셔도 됩니다.”
“이미 자네들에게는 솔직한 편이네만.”
“고민거리는 자주 숨기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도요.”
“이도 숨긴 셈인 거야?”
“처음부터 ‘나는 자네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책임을 함께 지고 싶은 거야’했으면 제가 이런 말도 안 했죠.”
킨센트의 멋쩍은 웃음.
“그 정도로 솔직하기는 어렵겠어.”
“그럼 됐습니다. 제가 알면 되죠. 저 눈치 빠르잖아요?”
테오가 엄지로 자신을 척 가르켜 보이자 킨센트는 테오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내 킨센트는 너털웃음을 냈다.
“아하하, 확실히 그래! 자네가 내 통역사지.”
6
식사의 흔적을 정리한 뒤 킨센트와 사용인들은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킨센트에게 양말을 받아 가고 있었다. 테오가 킨센트의 지시에 따라 드레스룸에서 가져온 그 양말이다. 킨센트가 푹신한 자루에 손을 푹 밀어 넣고 양말을 꺼내 자기 앞에 옹기종기 모인 스무 명의 사용인들에게 그것들을 전달한다. 새하얀 양말은 트리의 알록달록한 빛을 덧입고 사용인들의 손에 들렸다.
이따금 크리스마스의 풍습을 잘 모르는 사용인들이 킨센트에게로 와 양말의 쓰임을 물었다.
“어르신, 이거 신고 자도 돼요?” 예컨대 시엔이 그랬다.
“안 돼.”
“야호! 고맙습니…… 네? 양말인데요!?”
“자네 발에 맞지도 않잖아?”
“다 커서도 신으라구 큰 거 주신 줄 알았는데.”
“신지 말고 저기 벽에 걸어두게. 줄하고 고리 보이지?”
킨센트가 벽난로와 이어진 벽에 장식된 은색 줄을 가리켰다. 앞서 양말을 받은 사용인들이 줄에 달린 고리에 양말을 끼워 놓고 간 탓에 열댓 개의 양말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에엥…… 이것도 장식품이에요?”
“그런 셈일 수도, 아닐 수도.”
킨센트가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시엔의 머리를 검지로 살살 쓸어 주었다.
“저기 걸어두면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넣어두고 갈 거야. 시엔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주긴 준다나.”
“산타?는 어르신네 할아버지예요?”
“아아, 자네도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구나…….”
킨센트가 산타클로스라는 인간의 행위를 시연하기 위해 준비한 산타 모자와 흰 수염을 주섬주섬 집어들기 시작하니 테오가 빙긋 웃으며 킨센트의 손을 가로막았다. 그런 다음 킨센트가 잠깐 내려놓은 양말 자루를 그의 손에 도로 쥐여주었다.
“제가 알려주겠습니다. 어르신은 들어가 주무시죠.”
“참, 그렇지. 자네는 안타고 출신이니 잘 알겠어.”
“이러나저러나 몰락 안타고잖아요. 구색만 갖췄을 뿐입니다.”
테오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픈 구석을 찌른 거야?”
“아뇨. 어르신 때문에 가슴이 시리는 건 이미 자주 겪어서 괜찮습니다.”
“조르주 같은 말을 하는군. 그럼 시엔에게 잘 알려줘. 과학적인 근거도 몇 개 날조해서.”
“뭐를요. 산타가 선물을 전달하려면 사실상 선물을 광선처럼 쏘는 수밖에 없다?”
“그래. 그러니 괜히 돌아다닐 생각 말고 침대에 있으라고 해.”
“분부 받듭죠.”
테오가 경례하는 척해 보이자 킨센트가 우물쭈물대다 똑같이 경례하는 포즈를 취했다. 킨센트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테오가 깨닫는다. 참, 어르신은 경찰이고 군이고 전부 싫어하시지……. 테오가 멋쩍게 입꼬리나 올렸다.
킨센트와 마주 보고 있던 테오가 문득 다시 입을 연다.
“그런데 어르신 선물은요? 양말은 스물두 개인데, 자러 들어간 분들이랑 조르주 씨가 열여덟 명, 저랑 시엔을 합하면 스무 명이고. 어르신 성격에 레이 씨와 에밀 씨를 안 챙길 리가 없으니 둘 더하면 딱 스물두 개. 어르신 건 없잖아요.”
“내가 선물을 왜 받아? 난 산타 역이야.”
“받아야죠. 크리스마스 파티는 모두가 주인공이라면서요.”
“아서라 아서. 파티 때나 그렇지, 지금은 파티 끝나서 괜찮아.”
“진상을 알아버린 저는 안 괜찮은데요.”
“시엔두요.” 방치당해 있던 시엔이 상체를 서로 숙이고 속닥거리는 두 사람 틈새에 끼어들었다.
“자네는 안 들어가고 뭐 했어?”
“어르신도 선물 받아요! 어르신도 아직 어리잖아요! 고생은 저희만큼 하시면서!”
“받아라. 받아라.” 테오가 추임새를 넣는다.
슬슬 시엔에게 산타를 가르쳐줘야 한다는 과제는 잊혀버렸다. 킨센트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밝히고 쳐다보는 두 사람을 피해 눈을 슬슬 옮겼다. 곧 벽난로 옆에 줄지은 양말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양손에 하나씩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년서부터는 자네들이 내 산타 해주게.”
시엔과 테오가 킨센트와 서로를 번갈아본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큭큭 웃었다. 두 사람이 몸을 돌려 킨센트의 품에 파고든다. 당연하죠. 보석보다 멋진 걸 들고 올 거라구요. 두 사람이 입 모아 중얼거리자 킨센트가 둘의 어깻죽지를 토닥인다.
7
다음날, 크리스마스 당일. 파티는 이브날에 끝났고 저택에서는 국교를 믿는 이들이 각자 기도하는 것 외에 어떤 신성한 의식도 치르지 않았으나, 사용인들은 아주 중요한 사건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로 양말 안에 든 선물과 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빌의 양말에는 양손에 작은 나무를 든 여자아이 조각이, 요한나의 양말에는 그녀가 관심을 보였던 요리 관련 서적이 두 권 들어 있었다. 한 양말 위로 삐죽 튀어나온 목도리는 케세르와 마케르스 쌍둥이가 함께 두를 수 있을 만큼 컸다. 마르호트는 킨센트의 낯을 닮은 강아지 인형을 들고, 마르호트를 보며 정색하는 리스 앞에서 그것을 마구 흔들어댔다. 시엔은 탐정에게 어울리는 작은 수첩을 받았다. 그리고 테오는 프레임에 유리구슬이 박힌 손거울을 받았다.
테오의 양말 안에 든 편지는 다른 사용인들보다 간결했다. 그 내용 중 킨센트가 왜 테오의 선물로 손거울을 골랐는지에 대한 의견을 발췌한다: “그대는 타인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재간이 있어. 하지만 그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배울 수 있는 기술이네. 나 역시 익혀 두었지. 다만 그대는 타인의 속을 읽고 접근할 때에 그 자신도 투명해. 그 구슬처럼 말이야. 또 그대는 거울처럼 스스로를 비춰 보고 나서야 타인의 생각을 입에 올리지.
그건 내가 그대의 앞날을 기대하는 이유야. 남의 더러운 속도 읽을 줄 아는 이가 상냥하기란 쉽지 않거든. 부디 마음속에 깨끗한 자신을 남겨두길 바라네. 언제나.”
2부: War Is Over
1
손거울에 테오가 비친다.
늘 그렇듯 흐트러짐 없이 3:7 가르마를 유지한 크림색 머리와 벽안. 그 아래 테오답지 못한 다크서클이 져 있다.
11년 전,
크리스마스에 어르신에게 선물받은 이 손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종종 뒤에서 다가오는 어르신이 프레임의 유리구슬에 함께 비치곤 했다. 구슬 안에 쪼그라든 채 담긴 그와 자신의 모습이 색이 다른 보석을 붙여둔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이제 유리구슬에 남은 사람은 테오 자신뿐이다. 어르신이 프레임 속 유리구슬에 비치지 않게 된 지는 어르신이 27세였을 적부터 3년쯤 됐다.
“어르신.”
테오는 어르신의 방문 앞에 서 있다.
문 너머 어르신은 대답이 없다.
2
테오는 자신이 오늘 파티에 반드시 어르신을 데리고 오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때, 조르주만이 강경하게 반대했던 것을 떠올렸다.
― 오지 않으실 겁니다.
― 테오 씨, 아시지 않습니까. 어르신께 요청해본들 긁어 부스럼입니다. 마음을 더 닫으실지도 모릅니다.
― 고집부릴 나이는 지났습니다. 파티는…….
― 파티는 우리끼리 합시다.
그러나 테오는 그때 조르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손톱의 큐티클을 정리하고 있었다. 조르주가 한 말들은 모두 타당하다. 허나 그것은 조르주의 진심이 아니다. 조르주는 강경한 어투에 비해 마치 변명하는 이처럼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했다. 또, 말하는 동안 손톱을 불규칙적으로 튕기기도 했다. 테오가 미용을 위해 손톱을 만진 것과는 다른 감정이 담긴 행위다. 테오는 조르주가 만류하는 말을 마친 후에도 끄떡 않고 자기 의사를 반복했다. 가겠습니다.
― 그 친구가 제발 정신 좀 차리게 도와주십시오.
조르주는 그제야 갈라진 목소리로 허락을 토했다.
3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인 건 기억하시죠?”
문 너머 킨센트는 대답이 없다.
4
킨센트가 27세였을 적, 곧 체르니 로드가 죽은 지 1년이 넘은 어느 밤에 킨센트는 재산의 팔 할을 남기고 떠났다. 그의 오랜 친구인 조르주에게조차 귀띔하지 않았다. 다만 재산 분배에 관한 쪽지만을 남긴 채였다. 돈과 겉옷 그리고 그의 애장품인 보석 몇 개만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방은 이후 3년 간 생활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기행도 잠시 떠났다 돌아올 외출처럼 보이게 했다.
킨센트가 떠나고 난 아침에, 빌은 킨센트의 실종 소식을 접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빌이 손을 떨면서 이리 말했다.
― 어르신이…… 전에 저한테…… 자기가 주, 죽을 때가 되면, 저희한테 재산을 “팔 할로 늘려줄” 거라고, 하셨, 셔, 셨어요, 설마, 설마아…… 아니, 아니겠죠? 어르신이…….
빌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감정 변화를 겉으로 티 내는 법이 없던 케세르와 마케르스 쌍둥이마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럼에도 쌍둥이들은 냉철해지려 입술을 악물었다.
― 찾죠.
― 카지노나 보석상이나 술집 중에 계실 거예요.
스물두 명의 사용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 되신 킨센트께는 불행하게도 그의 사용인들은 주인 없는 집을 가꿀 만큼 성실하지 못한 것이다.
사용인들은 발 벗고 나서서 베르우아즈, 나아가 스트리아-온 전체의 카지노와 보석상과 술집을 뒤졌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결과적으로 애먼 장소에 시간을 쏟았으며, 킨센트는 그들이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두뇌가 비상한 남자였다. 첫째는 장소 예측의 문제. 그는 카지노에 출근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체르니 로드가 죽은 그날부터였다. 보석상을 들렸다는 소문도 없었다. 재산의 2할만으로는 그의 욕심에 맞는 물건을 사들이기가 어려웠겠지. 둘째는 킨센트를 예측하지 못한 문제. 가끔 킨센트는 술집에서 모습을 비추었으나 사용인들이 닿기 전에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도망쳤다. 선 자리에서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가 하면 베르우아즈의 복잡한 뒷골목 지형을 활용해 미로― 그것도 기구한 프로타들이 이방인의 발목을 부여잡으며 동냥하는 곳으로 유도해 사용인들의 발을 묶곤 했다.
― 씨발,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킨센트를 눈앞에서 놓친 지 세 번째가 되자 요한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거리에 주저앉았다.
― 도대체 어르신은 왜 우릴 피하는 거야? 왜? 우리가 뭘 잘못한 건데……!!
― 요한나, 어르신은…….
테오가 요한나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 하자 요한나는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요한나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 아, 그래, 테오! 너라면 알겠지? 넌 우리 중에서 머리가 제일 잘 돌아가잖아?
요한나가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테오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너라면 방법이 있겠지. 너는 어르신 마음도 금방금방 알잖아. 요한나가 덧붙였다. 테오가 보기에 요한나는 테오가 정답을 알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듯했다. 그보다는 오답이어도 좋으니 그럴듯한 말을 꺼내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테오는 어금니를 악물고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가 요한나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 어르신은…… 처음부터 이랬어.
자네가 뭘 원하는지는 말해야만 알 수 있어. 그렇게 사용인들의 의사 표현을 강조해 왔던 킨센트는 사실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의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테오의 말에 요한나는 실없이 웃었다.
― 멍청한 인간.
― 그러니까, 요한나. 찾아내면 우리가 가르쳐 드리는 거야. 적어도 자기가 가르친 건 지키라고. 설거지할 땐 솔선수범을 그렇게 좋아하시더니 이럴 때는 빼먹으려고 해? 어림도 없지.
요한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다시 킨센트의 소문을 찾아 거리를 전전했다. 그러나 사용인들이 품은 희망이 무색하게도 킨센트는 제 발로 저택에 돌아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의 일로 탈력감에 사로잡힌 요한나는 킨센트가 돌아온 후에도 몇 주간 제대로 된 웃음을 지어 보이지 못했다.
킨센트는 30세 여름이 되어서야 저택을 찾았다. 입에 담기 힘든 소동 이후 킨센트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사용인들 한 명 한 명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저택을 떠난 사용인들에게도 연고를 물어 알음알음 얻은 정보로 찾아가 인사했다고 했다. 그제야 사용인들이 아는 킨센트다웠다. 그들은 그들에게 다시 안온한 일상이 찾아오는 줄로 믿었다. 킨센트 자신 또한.
킨센트는 봄에 카지노에 들러 딜러직을 관두었다고 전했다. 사용인들은 그의 선택을 수긍하고 그가 이전에 손을 대었던 사업체들을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르신이 준 만큼 우리도 어르신한테 줄 거야. 사용인들의 뜻은 서로 같았다. 정확히는, 뜻이 같은 이들만이 킨센트의 부재 후에도 그의 사용인으로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킨센트는 결국 그들의 어르신으로 남지 못한 듯했다.
5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언제나처럼요.”
문 너머 낯선 이는 대답이 없다.
6
킨센트는 이상해졌다. 그가 이상해진 것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체르니 로드가 죽은 뒤부터 그답지 않게 공포에 질린 얼굴을 내보이는 일이 잦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무서웠던 거겠지. 사용인들의 생각은 비슷했다. 킨센트의 이상행동을 사별의 아픔만으로 판별하고서 그가 이별에 적응할 때까지 자리를 물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킨센트는 포커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리고 나가버렸다.
가출 사건은 분명 사용인들에게 충격이었으나, 사용인들은 킨센트가 이상하다는 감상을 받지 못했다. 가출의 원인은 순전히 사별의 아픔이었다. 킨센트가 사용인들의 손을 꼭 쥐며 털어놓기로 “삶이 괴롭고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으니.
그러나 그가 30세를 맞이한 해, 가을. 사용인들은 킨센트가 다시 그 공포에 질린 얼굴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킨센트는 이상해져 있었다. 잘 꾸민 얼굴 가죽으로 심정을 뒤덮어도 그의 안색을 창백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해소되지 않았다. 킨센트가 혼자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한 것이 도리어 증상을 악화시킨 걸까. 사용인들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자신의 입에서 헛구역질을 토하는 게 고작이었다.
― 미안…… 다가오지 마! 부, 부탁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킨센트는 사용인들을 볼 때마다 귀신을 본 것처럼 괴성을 질렀다. 병자처럼 전신을 떨며 울먹거리기도 했다.
― 아아, 알고 있어. 한심한 꼴이라는 건 충분히 깨닫고 있으니 들어오지 마. 음식은 문 앞에 두고 가게. 늘…… 고마워.
또한 방에 틀어박히는 일이 잦았고 술을 물처럼 마셨다.
― 미안하네만 말하지 말아주겠어?
한 번은 그가 조르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기까지 했다. 조르주는 그의 오랜 친우 킨센트의 손을 붙잡고 떼어냈다. 조르주는 킨센트가 이상해진 일로 인해 자주 목젖까지 치솟는 분노를 끌어내리길 반복했다. 그날만은 단도직입으로 묻지 않으면 다른 사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길길이 날뛰고 말지도 몰랐다.
― ‘보고’ 있다는 것에 익숙해지면 정신 차릴 텐가.
조르주가 묻자 킨센트가 어깨를 움츠렸다.
― 모르겠어요…… 그,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요.
― 센, 자네가 미치는 것도 한두 번 봐야지…….
― 제발, 조르주,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아줘…….
― 이렇게 몇 번이고 괴로워하는 꼴을 보는데, 쇤네가 해줄 만한 건 그뿐인가? 다른 건? 또 혼자 삭힐 셈이라곤 안 할 테지?
― 아, 다른 거…….
킨센트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 자네도 오지 말아줘.
― ……그래. 혼자 삭히겠다, 그 소리군.
빌어먹을 고집불통 같으니. 조르주는 그날 킨센트를 지나쳤다. 현재, 크리스마스 파티를 앞두고 킨센트가 참여해주길 간절히 소망하는 지금은 후회하는 행동이다. 그래선 안 됐다. 신경 좀 긁혔다는 이유로 유리 같은 남자를 내쳐서는. 그 유리 같은 놈팽이가 혼자 방 안에서 구르다 깨져버리고 말았다. 킨센트는 그날부로 사용인들과 완전히 거리를 두었다.
킨센트는 전처럼 사용인들과 식사 자리를 함께하는 대신 서가에서 홀로 케이크 두어 조각을 으적거렸다. 사용인들의 식사 시간은 언제나 킨센트 몫의 한 자리가 비었다. 그 한 자리가 어느 곳인지는 매번 달랐다. 늘 다른 위치에 빈자리가 생기니 그곳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상석 하나가 꾸준히 비는 것보다도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상석은 모두가 동등하게 ‘함께’이기 위해서 두지 않았던 것인데.
한편 킨센트는 자신이 먹은 그릇을 항상 사용인이 잠든 밤에 치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조르주가 부엌에서 밤을 새워 킨센트가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날부로 킨센트는 그릇을 반납하러 부엌에 내려가는 대신 식사가 끝날 때마다 그릇을 깨서 자신의 방 한구석에 모아 두었다. 킨센트의 방이 자리한 3층에서는 이따금 도자기 깨지는 소음이 여인의 절규처럼 울렸다. 시엔은 그때마다 어르신이 울고 있다며 안절부절못했다.
7
“빌 씨와 시엔이 칠면조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요한나가 케이크를 만들었고요. 마르호트와 케세르 씨, 마케르스 씨는 트리를 장식했죠. 예전에 반했다고 하셨던 술, 러스티 네일 맞죠? 제가 만들어 뒀습니다. 한 방울도 쏟지 않고요.”
문 너머 타인은 대답이 없다.
8
킨센트가 마음을 바꿔 먹은 시기도 있었다. 31세 봄 한 철 동안 킨센트는 조르주와 담소하며 저택을 돌아다녔다.
이에 킨센트를 발견한 마르호트가 반가워하며, 그를 끌어안았다고 했다. 그 특유의 사랑스러운 눈길로 킨센트를 올려다보며 그가 자신을 쓰다듬어 주길 간청했댔다. 그러나 킨센트는 마르호트를 뿌리치며 자기 코트에 붙은 먼지를 털었다.
― 「마르호트. 사용인으로서 예를 지키시길.」
마르호트는 지나치게 ‘깍듯’해진 킨센트의 말투를 따라 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 어르신이 노망나셨어. 이번엔 진짜야.
마르호트는 한참을 폭소하고, 오열을 참기 위해 입에 드레스 자락을 쑤셔 넣었다.
― 어르신한테 책 읽어 달라고 했는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시면서 보모가 필요하냐고 묻는 거 있지! 시엔 상처받았다구…… 책은 이제 혼자서도 읽을 수 있어. 시엔은 어르신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야…….
유독 어르신과 정이 들었던 사용인들, 예컨대 시엔도 킨센트의 매정한 태도에 의기소침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뢰한 이에게 버림받거나 안타고의 텃세에 당해 저택을 찾았던 이들은 킨센트 역시 다른 권세가들과 다를 바 없다면서 저택 일을 때려치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택에 열세 명의 사용인이 남았다. 그들은 감정을 가다듬고 킨센트가 마음을 회복하길 기다렸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상냥한 어르신이 킨센트의 본질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적어도 킨센트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체르니 로드와 서로의 인생을 다 바칠 것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킨센트는 반쯤 반려였던 이와 사별하고, 그 슬픔을 감내하려 노력하다 실패한 채 기어들어 왔다. 대다수 사용인은 킨센트의 저택에 오기 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세상에 빼앗겼으나 무엇도 되찾지 못하는 감정과 부대끼듯이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킨센트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공감해준 그 사람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저 킨센트에게 한 가지만을 바랐다.
우리가 여기 있음을 잊지 말기를.
킨센트는 사용인들이 힘들어할 때 손을 내밀었다. 사용인들은 그런 킨센트를 지탱하기 위해 저택을 가꿔 나갔다. 킨센트가 킨센트다운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직 잃지 않은 것도 많다는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서.
한편 기대했다. 우리가 가족이기를 바랐다면 부디 언젠가 어르신의 힘든 일을 ‘같이’ 해결하자고 말해주기를.
9
“어르신 양말도 걸어뒀습니다. 계단 밑에 산타가 열셋이나 있다고요. 진짜 안 내려와 보세요?”
테오가 방문을 실컷 두드린 후에야 문 사이로 틈이 찔끔 생긴다. 방 안은 불을 꺼놓고 있었는지 어둡기만 했다. 복도에 흐르는 난색 불빛이 방 안으로 슬금슬금 몸을 뉘자 문 가까이에 널브러진 킨센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닥에 눌린 그의 뺨이 벌겋고, 와인을 닮은 머리카락 역시 바닥에 눌린 쪽만 거의 뭉개져 있다.
“하루종일 그러고 계셨습니까?”
“네. 좆같은 어르신이지요?”
“그 말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고요.”
테오가 관자놀이를 검지로 거칠게 눌러대며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문이 발칵 열리자 킨센트의 모습이 조금 더 자세히 보인다. 머리맡에 공 하나를 두고 굴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품 중 하나로 보였다. 어디서 나셨어요? 킨센트는 손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귀하들이 주무실 때 뜯어왔습니다.
“양말 얘기 말입니다만.” 킨센트가 테오를 등지고 눕는다. “제 선물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럼 어르신 선물 제가 뜯어갈 테니까 파티만 나오세요.”
“내려가서 귀하들끼리 지내세요. 전 관심 없으니.”
“관심 있는 건 뭡니까?”
“술, 보석, 금전, 아무튼 반짝이는 것…….”
“술도 있고 어르신 보석 뜯어다 장식도 했고 금화도 있고 아무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물도 있으니까 나오시라고요.”
“…….”
킨센트가 침묵하자 테오는 아주 조용하고 나직한 소리로 말을 꺼낸다. 속엣말을 뻐끔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음량이다.
“다들 기다립니다. 어르신이 오면 기뻐할 거예요.”
퍼뜩 킨센트가 끌끌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조소했다.
“저 없인 아무것도 못 합니까?”
그리고는 목재 바닥을 손톱으로 긁는다.
“제가 가봤자 분위기를 망칠 겁니다.”
킨센트가 쐐기를 박았다. 테오는 그의 방문을 절반만 닫아주며 혀를 찼다. 이 인간은 정말로 이런 이미지를 밀고 갈 셈인가……. 그리 생각하며 테오는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긴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평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르신은 옛날부터 푼수 같고 부드러운 이미지라 지금 바꿔 먹기는 글렀어요. 케이크에 설탕 다섯 봉지 들어갔다니까 빨리 내려오시기나 해요.
테오가 1층 홀에 다다른다. 사용인들은 이미 테이블이며 트리며 벽난로 옆에 건 양말들이며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를 모두 마치고서 테오가 전할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르주는 아직 테오의 호언장담을 불신하는지 체념한 낯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킨다. 요한나가 대표로 나서서 묻는다.
“안 좋은 소식이야?”
테오는 부러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외쳤다.
“좋은 소식이야!”
그 말에 더 놀란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요한나가 아니라, 방문을 등지고 누운 킨센트였다. 뭐? 킨센트의 되물음을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3층과 1층 간의 거리가 있어 실제로는 불가능할 터이나, 꼭 마법처럼!) 테오가 자신만만하게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킨다.
“어르신이 조금만 기다려주면 내려오시겠대.”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 킨센트가 몸을 벌떡 일으켜 방문을 우악스럽게 쥐고 열었을 때, 아래층으로부터 이미 사용인들의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특히 마르호트와 빌과 시엔의 목소리가 컸다. 킨센트가 차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방문턱을 밟은 채 굳어 있는 동안, 테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보고’ 계시죠? 어르신.
내려오지 않으시면 분위기를 망치는 겁니다.
테오가 느끼기로, 킨센트는 저택에 돌아온 후부터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사용인의 행동을 확인할 수 없는 거리에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채거나, 사용인이 말하지 않은 정보를 이미 얘기해본 화젯거리처럼 발언하는가 하면, 그가 물리적으로 들을 수 없는 소리에도 반응했다. 테오가 구태여 어르신을 찾아간 데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음성보다 숨소리를 더 섞어 중얼거린 말. 들었더라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한번 되물을 법한 소리를 듣고도 킨센트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듯 응답했다. 테오가 알던 킨센트는 그렇게까지 귀가 좋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킨센트는 킨센트만이 아는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가 술을 처먹더니 알코올 누적 반응으로 웬 초능력을 각성했다 치는 한이 있어도, 킨센트의 인식 범위가 비약적으로 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누가 갬블러의 사용인 아니랄까 봐.”
테오가 선취점의 기쁨을 누리는 사이, 킨센트는 도로 바닥에 누워버린 채 베개를 끌어안으며 앓는 신음을 낸다.
“조주를 배우라 하였더니 도박을 배웠군요.”
킨센트가 이를 열댓 번이나 까득거린다. 솜이 터져 나올 것처럼 베개를 쥐어짜는 것도 질렸는지 그것을 던져버리고는 멍하니 들여다보던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다시 손에 쥐었다.
킨센트가 고개를 바닥에 지그시 뭉개며 새빨간 바탕에 은색 줄무늬가 그려진 공을 바라본다.
Commsion by ©husbandhunter
토기가 치민다.
킨센트는 장식용 은제 리볼버를 어디에 전시해 두었던가 생각했다. 두께가 넉넉한 액자에 넣어 홀에 장식했던 것 같다. 턱 밑에 동그란 총알구멍 하나 내보려면 결국 사용인들의 낯을 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킨센트는 물이 맺힌 눈가를 바닥에 비벼 닦으면서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신이시여. 내가 그리 미우십니까. 어디가 그리 미우셔서 사랑하는 이들을 인질 삼아 죽음도 빼앗아 가십니까. 당신을 욕한 것이 죄였습니까? 어차피 그쪽 생일인데 더럽게 치사하군요.
킨센트는 눈앞에 흘러가는 자신의 독백을 ‘읽는다’.
10
킨센트는 까마득한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식탁의 왼쪽 끝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빌이 킨센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빌 정도면 시선이 덜 부담스러웠다. 원래도 종종 킨센트를 대단한 사람처럼 보았으니까. 킨센트가 익숙지 않은 것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었다…… 다들 그가 이 떠들썩한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나 같이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 아하하. 킨센트가 어색하게 웃었다.
“웃는 꼴이 이상한데. 저 인간 진짜 어르신 맞아?”
요한나가 묻자 테오가 팔꿈치로 그를 꾹 찔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킨센트는 시선을 자기 몫의 그릇으로 돌렸다.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다. 노릇하게 익은 아스파라거스에서 싱그러운 향이 났다. 11년 전 첫 크리스마스 파티와는 달리 요리에 익숙해진 시엔이 구운 것이다. 킨센트가 고개 들어 허공을 본다. 그렇군요. 시엔이 구웠습니까.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무엇이든 알 수 있었다. 즐거운 일이다.
“어르신!”
조르주가 호통치는 소리에 킨센트가 불현듯 자신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포크의 날카로운 부분을 눈알 가까이 두고 있었다. 킨센트가 싱글벙글 웃으며 “장난이야”하고 포크를 내렸다. 대신 잔을 든다.
“건배해야지, 건배.” 방금 미소는 꽤 자연스럽지 않았나? 킨센트는 목덜미를 적신 식은땀을 무시하며 생각했다.
사용인들이 일제히 잔을 든다. 사과주스를 담은 잔은 한 개도 남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잔에는 샴페인이. 그들의 잔 아래에서 물결을 이룬 금색 빛이 테이블보 위를 유영한다.
“신이시여.”
킨센트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 모인 귀중한 분들께 비호를 베푸소서…….”
모두 잔에 시선을 둔 가운데 요한나가 킨센트를 바라본다.
“테오, 저 인간 진짜 어르신 맞아?”
“맞아. 제발 조용히 해.”
‘분들께’? 눈치 빠른 테오는 물론 여기 모인 모든 사용인이 위화감을 느낀다. 저마다 눈썹을 꿈틀거리거나 다리를 괜히 모으는 식으로 소름끼치는 감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상식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경어를 쓰는 인간은 없잖은가. 그런즉 킨센트의 축사는 오직 사용인들에게만 향한다. 킨센트가 평소에도 겸손한 인간이었다면 모를까.
“부디 비호하소서…….”
비호?
무엇으로부터? 테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킨센트의 눈치를 살핀다. 괴로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면 불안증일 뿐일까. 생각에 빠진 테오를 이번엔 요한나가 팔꿈치로 툭 쳤다. 그래도 온 게 어딘가. 비록 오자마자 자기 눈알을 파내려고 한 정신병자지만 얼굴이라도 비춰줘서 고맙다. 그나마 희망 한 줄기를 엿본 것 같아서.
킨센트는 눈을 접어 웃는다.
‘희망이라…….’
잔을 쥔 손이 떨렸다. 자기 생각을 문장 기호와 함께 재확인하는 기분이 더럽다. 이런 서술을 본 것은 유년부터고, 그간 이름 모를 지병으로 여겼으나 몇 년 전부터 지병에 대한 감회가 색달랐다. 킨센트는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침을 묻히고서 건배사를 마친다.
“아멘.”
파티는 물 흐르듯 진행된다.
분위기는 사용인들의 예상보다 화기애애했다. 킨센트는 거만한 태도를 버렸으며 사용인들의 얘기를 귀담아들었다. 들어주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만 온화한 어르신이 아직 킨센트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용인들은 기뻤다. 특히 마르호트와 시엔은 그들이 사랑한 어르신을 부정당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더욱이 즐거웠다. 킨센트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다들 기다려줬어! 도망치고, 무시하고, 상처 주고, 마음고생하게 해서, 그리도 심한 짓을 저질러서 9명이나 저택을 나갔다고 들었는데도! 여기 남아 있어! 내 사람들, 우직하기 짝이 없는 내 소중한 사람들, 보고 싶었어. 보답하고 싶어. 킨센트는 하나하나 문장화되는 생각들을 내심 노랫말처럼 외며 와인을 들이킨다.
사랑해.
요리 실력이 몰라보게 성장한 빌과 시엔의 칠면조 구이를 칭찬하고, 요한나의 손을 거쳐 보름달처럼 빚어진 노케를을 떠먹는다. 아슬아슬하다. 섬뜩하다. 지금껏 실실거리고 살았는데 등신 같은 웃음 하나 유지하기가 피곤하다. 의식 한 켠에서 한기가 새어 나온다.
전부 가짜잖아.
순간 킨센트가 입안에 밀어 넣은 리소토를 토했다.
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자의식이 있다 믿으며 살아가고 있을 뿐, 모조리 가짜다.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불시에 튀어나온 생각이 킨센트를 잘근잘근 짓밟는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신이 원하는 대로 쓰기 위해서. 신의 이름은 스크립트다. 스크립트의 목적은 한동안 킨센트에게 시련을 주는 것에 있었다. 신이 사용인들을 창조했다. 킨센트를 위해서. 저것은 인형인가? 아니면 신의 사자들인가?
킨센트가 명치를 부여잡으며 툭 툭, 끊어지는 숨을 들이마시려고 애썼다. 위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몸부림치다 의자가 쓰러진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킨센트가 바닥에 나뒹군다. 기분 나쁜 생각을 잊기 위해 흡입했던 음식들을 게워낸다. 옆자리에 앉은 빌이 입을 양손으로 가리며 “어르신!”하고 급히 의자에서 내려온다. 십자가 모양 동공이 신속하게 빌의 낯을 훑는다.
이것도 천사.
조르주가 눈을 희번뜩 뜨고 킨센트에게로 달려왔다.
이것도.
마르호트와 시엔이 동시에 킨센트의 양쪽 팔을 붙잡고 그를 일으키려 한다.
이것들도. 전부 날 조롱하려고 탄생한 거야. 그래서 다정해.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마르호트와 시엔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킨센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샹들리에가 퍼트리는 빛이 꼭 어느 성화(聖畫)에서 천상의 사자들이 내려올 때 비치는 헤일로와 같다. 킨센트가 소매로 입가를 훔친다. 시야가 흐리다. 머리가 답답하다. 깨버리고 싶어. 공기마저 이 속에서 맴돌다 역류할 것만 같다. 싸구려 고무 냄새가 나서.
그, 그, 그런 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가짜들한테 휘둘리는 인생이라니. 증오스러워.
싫지 않아…….
싫어.
싫지 않아요.
역겨워.
역겹지 않아요!
신의 노름이어도 혐오스럽고, 저급한 것들이 내 속을 헤집을 뿐이라 해도 신경질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아니란 말이에요!
오늘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진중한 척 행세하던 조르주가 조급한 아이 같은 얼굴로 킨센트를 쳐다보고 있으니 혐오감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해결할 수 있어. 가짜 주제에…… 참견하지 마. 신이 명령하시던가? 내가 너희를 사랑하게 하라 하셨는가? 나를 얼간이처럼 웃게 하고 내게 목줄을 채우라 하시던가?
“센.” 조르주가 킨센트의 어깨를 붙잡는다.
고작 친우가 부른 애칭 하나에, 혐오감이 그 수 배의 죄책감으로 덮여 오는 나야말로 급 낮은 인간인가?
“아…….”
급 낮은 인간이지요. 프로타니까. 킨센트는 입가에 나른한 웃음을 틔웠다. 킨센트가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며 웃자 시엔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긴장한 목소리로 묻는다.
“속이 안 좋으셨던 거예요?”
“어떡해…… 저, 저희가 너무 무리하게 해드렸나 봅니다. 올라가서 쉬시는 게…….” 빌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방황한다.
“여기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들어가 보세요.” 건배사를 들은 후에도 퉁명스럽던 요한나마저 염려하며 미간을 모은 채였다.
왜 화내지 않아요?
킨센트는 의아한 눈길로, 제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을 면전에서 욕했다. 신분과 차별과 사람 문제로 고통받았던 이들에게 그 모든 것을 아울러 악담을 퍼부었단 말이다. 이 자들은 귀가 막히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사용인들은 정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킨센트가 눈살을 찌푸린다. 갬블러로서 살아온 세월에 비추어볼 때 사용인들의 순진한 얼굴은 진품이다.
킨센트가 고개를 든다. 분주하게 엎질러진 그릇과 의자를 치우고 킨센트를 부축하려 달려오는 사용인들 가운에 이질적인 이가 한 명 있었다. 가만히 서서 경악한 얼굴로 킨센트를 바라보는 사내가. 킨센트는 겁에 질린 테오를 응시한다. 저 표정. 킨센트가 체르니의 죽음 이후 메타픽션을 인지한 이래 처음으로 사용인을 그저 창작물로 보았던 날. 그때 킨센트 자신의 표정을 닮았다. 그러나 테오의 공포는 자신의 공포와는 기틀이 달랐다. 자신은 소중한 사람을 그따위로 사고하게 된 것이 두려웠다. 지금 테오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한 말이 둘러대기가 아닌 예지몽이었음을 깨달아 놀란 것이다.
“봐요. 제가 오면 분위기를 망친다고 했잖습니까.”
그 말만은 육성으로 뱉었다. 킨센트가 읊조리자 소란스럽던 사용인들이 신호탄을 받은 양 입을 닫았다. 킨센트는 오늘 들어 가장 기분이 좋아진 채 허밍을 냈다. 조르주는 킨센트의 지병에 대해서만 안다. 테오는 킨센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킨센트를 가장 잘 알고 잘 알아채는 이들이 이 모양이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킨센트가 허공을 향해 자랑스럽게 웃어젖혔다.
이 사랑스러운 이들은 내가 겪는 고뇌를 모릅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뿐이죠.
기분이 너무나 유쾌해서, 킨센트는 어느새 자신의 등을 받치러 온 테오에게 기대 시원스러운 웃음을 장장 오 분이나 쏟아냈다.
11
어르신은 그 뒤로 축하연에 참석하는 일 따위 없었다. 어르신은 자신의 대저택을 어떻게 활용하든 상관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의 흥미를 끌기 위해 저택 내에서 다양한 연회를 열었지만, 어르신은 한 번도 내려와 보지 않았다. 어르신의 생일 기념 연회에도. 곧잘 춤을 즐기시던 무도회도. 기념하는 주기가 점점 늘어나던 우리의 크리스마스 파티도.
어르신을 보기 힘든 것은 연회뿐만이 아니었다. 어르신은 자신이 저택에서 사라진 것처럼 행동했다. 드물게 저택 관리인을 그 방 안에 들이는 것 외로는 얼굴을 마주치려 들지도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면 술집을 전전하며 도망쳤던 그때처럼 일순에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외로운 일이었다.
테오가 킨센트의 비석을 쓰다듬는다.
― 사랑합니다.
비석의 이름도, 사망한 날짜도 없이 그렇게만 적혔다.
조르주의 뒤를 이어 가문 관리인이 된 요한나는 킨센트가 죽은 후에 사용인들에게 그의 유언을 전했다: 재산의 반절은 조르주 드 라투르를 위해 쓰고, 나머지는 사용인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분배한다. 재산을 상속받은 후 가능한 한 흩어질 것을 권하나(아마 이것은 사용인들이 신분에 관계 없이 교류했으므로 후견인이 없는 상황에서 왕실의 핍박에 처할 것을 걱정한 흔적으로 보였다), 함께하고 싶다면 저택의 주인을 새로 정하라. 본인은 테오 반 카르벤튀스를 추천한다. 그가 원하지 않거나 반발이 심하면 요한나 체레번이 후계를 지명한다.
킨센트가 사용인들과의 관계와 자기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은 죄다 엉망이었음에도 유서만이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다. 감정 하나 없는 문서에 귀한 정성을 들이고서, 자신의 비석에는 그 보잘것없는 사랑 고백만을 실어놓되, 유언은 이리 남겼단다.
― 「미안해요」라고…… 하셨습니다.
테오는 그 말을 읊던 요한나의 표정을 기억한다. 사용인들 대개가 그런 얼굴이었다. 씁쓸함을 머금고 애도했다. 그러나 억했고,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사랑하고 미안했다면 죽기 전에 언질이나 해주지. 풀 길 없는 원망이 자꾸만 들었다. 그러나 누구도 어르신에 대한 원망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누구는 마음이 약해서, 또 다른 이는 어르신이 괘씸해서였을 터다. 어르신이 바란 것이 바로 그 원망일 테니까. 끝날까지 어르신은 사용인들이 자신을 미워하기를 바라는 듯 굴었다. 조르주와 시엔의 묘에서 보름 내내 새벽마다 기대 울었으면서.
대체 무엇 때문에 그 남자는 넘쳐흐르던 정을 거둬들였을까. 어느 무엇이 괴로웠기에 사용인들을 마주할 때마다 새파랗게 질렸을까. 얼마큼의 고통을 느꼈기에 서로 대등한 관계에 서서 신뢰하기를 바랐던 태도를, 위계적으로, 그리고 냉소적으로 뒤바꾸었던 걸까.
“메리 크리스마스, 어르신.”
테오가 중얼거린다. 내가 죽고 나서는 알려주실 겁니까.
- 카테고리
-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