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은 어디로
어글리후드 네임드 5인 Non-CP
2020.09.13 포스타입 연성 백업
어글리후드 여름 합작 참여작
“보스, 우리는 피서 안 갑니까?”
“그럴 여유 없다.”
피콕의 물음에 답하는 제니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피콕은 잠시 실망했다는 듯 축 처진 표정을 지었지만, 곧 납득했다. 다른 세 사람의 의견도 동일했다. 네임드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상, 피서 같은 것은 그들에게 사치나 다름없었다. 다섯 사람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더운 날씨 탓인지 피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피콕의 짧은 한마디를 시작으로, 아지트는 잠시 피서 이야기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런 아지트 안에서 갑작스럽게 말을 꺼낸 사람은 크리스였다.
“6년 전에 우리 피서 갔을 때 생각나네.”
네 사람은 일제히 그의 쪽을 돌아보았다. 소란스럽던 아지트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6년 전, 네임드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피서. 그들 중 그 날의 피서를 잊은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네 사람 틈에서 제니퍼가 말을 이었다.
“나도 기억한다. 즐거웠지.”
“옙! 저도요!”
피콕의 우렁찬 목소리도 함께 퍼져나갔다. 제니퍼는 두 팔을 머리 뒤에 받친 뒤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제니퍼 역시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시간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로비 15살, 크리스 17살, 피콕 19살, 벤자민 20살, 제니퍼 28살. 네임드가 처음 모였을 때의 나이이다. 이들 중 다섯 사람이 이렇게 모일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벤자민과 크리스, 로비와 피콕과 제니퍼는 같은 수용소에서 왔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진 못하였다. 수용소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예상치 못하게 네임드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쎄타시 빈디카리는 뭉쳐야 했다. 그러나 뭉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단지 함께 모여 있는 것만이 결합은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은 틈이 날 때마다 부딪혔다. 호전적인 피콕은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였고, 벤자민은 능력으로 인해 생긴 결벽증 때문에 피콕이나 로비와 자주 다투었으며, 크리스는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다함께 모여 있을 때에도 그는 구석에 홀로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기 일쑤였다. 어린 나이에 큰 상처를 안게 된 그들은 서로에게 쉽게 섞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그들을 이끌던 사람은 제니퍼였다. 제니퍼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네임드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가장 강하고, 그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이유였다. 그런 그도 겨우 28살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들을 한 자리에 끌어 모은 사람은 레나였으며 레나는 그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도왔지만, 개인의 감정에 대한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게다가 레나와 함께 있을 때면 그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숨겼다. 그들은 다정하지만 엄격한 레나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레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쎄타시 빈디카리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던 레나는 그들 사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레나와 상담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제니퍼였다. 제니퍼는 네임드가 쎄타시의 얼마 남지 않은 빈디카리 세력이라는 이름에 짓눌리기보단, 거창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들이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 제니퍼의 이야기를 들은 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을 위한 사건을 하나 마련하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레나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제니퍼 역시 레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들 짐 싸라.”
어느 날, 제니퍼가 홀로 나간 뒤 아지트에 돌아와 네 사람에게 건넨 말이었다. 네 사람은 갑작스러운 제니퍼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질문을 건넨 사람은 피콕이었다.
“무, 무슨 짐을 말입니까?”
“여행 갈 짐 말이다. 여름이지 않나. 피서는 한 번 다녀와야지.”
“저희끼리요?”
피콕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른 세 사람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머지 네 사람과는 전혀 상의가 되지 않은 일이었으니. 게다가 제니퍼는 지금까지 체계적이고 냉철한 모습만 보였으니 제니퍼가 이렇게 혼자 갑작스럽게 어떤 일을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란 모양이다. 제니퍼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근처 바다를 알아보았다. 멀리 가는 건 위험할 것 같더군. 숙박시설을 빌리긴 힘드니 캠핑 용품을 준비했다. 하루 정도 머물 생각이지. 전부 레나 님이 도와주신 일이다.”
“…….”
“내일 떠날 거다. 로비, 너는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와라. 나머지는 준비하고.”
“네…….”
“누구, 이의 있는 사람 있나?”
제니퍼의 물음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저 조금 당황했을 뿐이었다. 별로 가깝지 않은 사이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 꺼려지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게다가 나쁜 제안도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모두의 동의 아닌 동의가 끝난 뒤, 그들은 속전속결로 움직였다. 바로 다음 날 피서를 가기 위해 아지트에 있던 여러 가지 물건과 옷가지를 챙겼다.
레나가 마련해주기로 한 계기는 여행이었다. 물론 최선의 해답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가깝지 않은 사이에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간 오히려 사이가 더 멀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규칙을 몇 가지 정했다. 첫 번째는 서로에게 이유 없이 화내지 말 것. 두 번째는 요구 사항이 있다면 즉각 말할 것. 세 번째는 적극적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려고 노력할 것. 네 번째는 어색해하지 말 것. 아주 간단한 규칙이었다.
그들은 이른 시간에 출발했다.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첫 번째로 일어난 사람은 이 여행을 제안한 제니퍼, 두 번째로 일어난 사람은 소리에 예민한 벤자민. 그리고 크리스와 피콕, 로비가 차례로 일어났다. 그들은 약속했던 대로 각자의 짐을 챙겨 일어났다.
이들 중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제니퍼뿐이었다. 피콕과 로비, 크리스는 운전을 하기에 너무 어렸고, 벤자민도 스무 살의 나이에 네임리스가 되는 바람에 면허를 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제니퍼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말없이 나서 운전대를 잡았다. 네 사람은 차례로 차에 탔다. 피콕은 제니퍼의 옆에 타겠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제니퍼가 그를 제재했다. 쓸데없이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이유였다. 어찌됐든 나머지 세 사람이 제니퍼의 옆자리를 부담스러워하는 바람에 피콕이 조수석에 앉게 되었고, 남은 셋은 뒷좌석에 앉았다. 다섯 사람 중 붙임성이 특별히 좋은 사람은 없었다. 그 탓에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많은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벤자민과 크리스가 조그맣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와 피콕과 로비가 티격태격하는 소리, 그리고 피콕이 제니퍼에게 이것저것 묻는 목소리만이 가끔 차 안의 침묵을 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동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지는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였다. 약 1시간의 주행 끝에 그들은 드넓은 바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레나가 제안한 외진 여행지. 수평선에는 어스름한 새벽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이른 탓에 도착한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도착했다. 짤막한 제니퍼의 한마디에 다섯 사람은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잔잔하게 뺨을 스치는 바닷바람과 조용히 일렁이는 파도소리. 이에 유난히 눈을 반짝인 사람은 피콕이었다.
“너무 예쁩니다…….”
“피콕은 바다가 처음인가?”
“바다는 처음 와봅니다!”
“예쁘지? 많이 봐둬라.”
“옙!”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모래사장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신이 난 피콕이 먼저 모래사장으로 뛰어들자 다른 네 사람도 약속했다는 듯 그를 따라 모래사장에 발을 내디뎠다. 이리저리 찍히는 피콕의 커다란 발자국을 따라 네 명 몫의 발자국이 따라왔다.
“벤자민, 크리스, 로비. 너희는 바다에 와본 적 있나?”
제니퍼의 물음에 가장 먼저 답한 사람은 로비였다. 자신이 열두 살이고 줄리아가 여덟 살일 때 가족들과 함께 바다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이보다 조금 더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은 바다로 말이다. 제니퍼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벤자민과 크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게는 나중에 묻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즐거웠겠네. 이곳의 바다도 예쁘지. 다음에는 줄리아도 함께 오면 좋겠군. 제니퍼는 덤덤하게 화제를 돌렸다. 크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먼저 가 있던 피콕은 바다 앞에서 멈추어 섰다. 투명한 바다는 어스름한 태양빛을 머금어 파란색으로, 붉은색으로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었다. 피콕은 발아래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곧 그를 뒤따라온 제니퍼가 피콕의 옆에 가 섰다.
“제니퍼 님……. 물이 마치 하늘 같습니다. 너무 예뻐요!”
피콕은 신발을 벗고 물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부드럽게 밀려오는 물결이 발에 닿았다. 제니퍼도 피콕을 따라 신발을 벗었다. 피콕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머지 한 발도 앞을 향해 디뎠다. 하얀 파도가 그의 발을 간질이다 천천히 부서졌다. 제니퍼도 그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피콕은 여전히 제 발 밑에서 흐트러지는 물결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파도도 예쁘지?”
“예, 옙!”
피콕은 바다를 반짝이는 눈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늘 무표정하던 제니퍼의 입가에 웃음이 스치었다. 뒤따라온 크리스와 로비도 천천히 바다로 걸어 들어왔다. 이전보다 큰 파랑이 해안가로 밀려들어와 그들의 발아래에서 느릿하게 스러졌다. 바다에 들어오길 망설이는 사람은 벤자민뿐이었다. 벤자민이 망설이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다의 물비린내, 소금의 짠 냄새. 지독한 냄새가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는 코를 막더니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들 중 벤자민의 괴로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크리스였으며, 그렇기에 그에게 먼저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도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제 손에 물을 한가득 모아 벤자민에게 뿌렸다. 야! 크리스 탓에 팔이 흠뻑 젖은 벤자민이 화가 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크리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벤자민에게 물을 뿌렸다. 그 탓에 머리부터 다리까지 물로 범벅이 된 벤자민은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바다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왔다.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는 제 두 손으로 더 많은 물을 퍼 크리스에게 뿌렸다. 그들을 가만 바라보던 피콕은 크게 웃으며 로비에게 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손을 이용해 막무가내로 튀기는 모양이었다. 로비는 얼굴을 팍 구기며 피콕에게 물을 묻혔다. 바닷가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얼마 뒤, 네 사람은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제니퍼는 천천히 얕은 물을 가로질러 걸으며 그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제니퍼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곧 세 사람과의 장난을 그만둔 피콕은 한 손에 물을 잔뜩 담아 제니퍼에게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리곤 제니퍼의 머리에 물을 홱 뿌리는 것이었다. 제니퍼의 짧은 머리에 찬 바닷물이 닿았다. 뚝, 뚝. 머리칼 아래로 물이 흘러내렸다. 시끄럽던 바다는 금세 조용해졌다. 세 사람은 제니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제니퍼는 아무렇지 않게 피콕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제니퍼의 능력은 이런 장난에 훨씬 특화되어 있었다. 다섯 사람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이 후회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주변에는 마땅히 샤워를 할 장소가 없었다. 크리스에 의해 바닷물에 흠뻑 적셔진 벤자민은 소금물 냄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로비와 피콕은 여전히 서로를 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제니퍼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털어내는 중이었다. 제니퍼는 이런 사건은 다툼에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다섯 사람은 이러한 일로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작은 공중화장실에서 대충 머리와 몸을 닦은 그들은 다시 차 근처로 모였다. 이제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둑한 새벽을 지나, 해가 중천에 걸렸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불을 피우고, 준비한 음식을 조리했다. 음식 조리는 대부분 크리스의 몫이었다. 피콕과 로비는 음식에 소질이 없었고, 벤자민은 음식 냄새를 싫어했다. 그렇게 되면 남는 사람은 제니퍼와 크리스 두 사람뿐이었는데, 크리스는 제니퍼가 입을 열기 이전에 먼저 제가 요리를 맡겠다고 말했다. 제니퍼는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크리스의 음식 준비를 돕기로 했다. 피콕 역시 제니퍼 옆에 찰싹 달라붙어 제니퍼의 재료 손질을 도왔다. 당근 같은 재료는 간혹 피콕의 입으로 몇 개 들어가기도 했다.
그들은 모여 앉아 간단히 조리한 요리와 간편 음식 따위를 먹었다. 대단히 호화로운 식사는 아니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지금 이 여행이 쉽게 준비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레나의 배려를 생각했다. 다섯 사람이 모이게 된 원인과, 불평해선 안 될 이유를 생각했다. 식사를 챙기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보통 이번 여행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피콕은 들뜬 목소리로 즐거웠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 조용하던 크리스도 작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고, 벤자민과 로비도 몇 마디 거들었다. 제니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정리는 벤자민이 맡았다. 누가 먼저 나설 것도 없이 벤자민이 먼저 정리를 시작했다. 곧 다른 네 사람도 제 몫의 쓰레기를 치웠다. 여전히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이전보단 편해진 모습이었다. 약간의 장난스러운 농담이 오고가기도 했다. 2시가 넘어갈 즈음에 그들은 다시 바다로 향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의 바다는 한결 다른 분위기였다. 밀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져 있는 바다. 그들은 방파제 근처에 서 거센 바람을 맞았다. 더운 공기에 시원한 바람이 섞여 흘러왔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제니퍼는 땀에 젖은 옷을 살짝 펄럭였다. 로비는 다시 바다에 뛰어들려하는 피콕을 말렸다. 제니퍼는 먼저 방파제 아래로 성큼성큼 걸을을 디뎠다. 그는 울퉁불퉁한 방파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다섯 사람은 각각 방파제 하나를 골라서 그 위에 걸터앉아 바다를 마주했다. 크리스가 겁이 많은 벤자민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니퍼 님.”
말을 꺼낸 사람은 로비였다. 네 사람의 시선은 그의 쪽으로 집중되었다. 로비는 허공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크게 푹 쉬었다.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제니퍼는 조용히 그를 기다려주었다. 로비는 고개를 푹 숙여 흐르는 바닷물을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아니에요.”
“…….”
제니퍼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수평선만을 응시하였다. 흐린 수평선은 시야가 닿지 않는 곳까지 멀리, 더 멀리 뻗어가고 있었다. 제니퍼는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귀 아래로 칼 같이 잘린 머리칼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나쁜 생각은 하지 마라. 전부 네게 독이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제니퍼는 딱딱한 어투로 말하며,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비도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다섯 중 고민이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갑작스럽게 비명이 들려왔다. 크리스가 실수로 벤자민의 텀블러를 건드려 텀블러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풍덩.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텀블러는 순식간에 파도에 밀려 먼 바다로 사라졌다. 다시 한 번 크리스가 물을 뿌렸을 때처럼 소리를 빽 지른 벤자민은 손으로 크리스의 등을 강하게 때렸다. 피콕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다시 장난스러운 일상의 것으로 변했다.
여름의 해는 길었다. 7시가 한참 넘어서야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텐트를 쳤다. 그들이 준비한 텐트는 총 두 개였다. 힘이 센 피콕이 폴대를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피콕이 폴대를 구부려 연결하고 있으면, 마무리는 섬세한 벤자민의 몫이 되었다. 텐트를 치는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는 제니퍼 님 옆에서 자겠습니다!”
“난 차에서 혼자 잘 거다. 나머지는 너희들끼리 정해라.”
제니퍼는 무심하게 말하며 돌아섰다. 네 사람은 잠시 눈씨름을 했다. 결국 벤자민과 크리스가 작은 텐트를, 피콕과 로비가 큰 텐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로비는 인상을 구기며 짐 사이에서 주섬주섬 돗자리를 꺼내와 큰 텐트 옆에 깔았다. 따로 나와 자겠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크리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피콕은 잠시 화를 냈다가 어차피 이렇게 되면 텐트는 모두 제 차지라며 오히려 좋아했다.
저녁 시간에는 캠프파이어를 피웠다. 다섯 명은 동그랗게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아침과 점심보다는 호화로운 메뉴였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바비큐 파티를 즐겼다. 피콕은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만큼이나 반짝이는 눈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제니퍼는 속으로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해준 레나의 배려에 감사했다.
해가 완전히 지자, 어슴푸레한 불빛만이 그들을 비추었다.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음, 여전히 잔잔하게 울리는 파도소리, 풀벌레 소리……. 그 사이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밤바다의 바람은 꽤나 서늘했고, 거셌다. 그들은 불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장소에 있지만,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셈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이 침묵을 깬 사람은 벤자민이었다.
“……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해볼까?”
“각자의 얘기?”
“……. 내가 먼저 할게.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섯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간단하고 기본적인 사정뿐, 깊은 이야기는 나눠보지 못하였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네 사람은 일제히 벤자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벤자민으로서는 굉장히 용기를 낸 발언이었다. 타오르는 불길만 조용히 응시하던 벤자민은 조용히 입술을 떼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덤덤한 어투였다. A급이었을 적의 이야기, 교회의 차별에 반대하는 논문을 쓴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가지 담담한 고백들.
“숨길 이유도 없으니까…….”
“…… 그렇지.”
“다른 세 사람도, 괜찮다면 말해줄래? …… 제니퍼 님도, 괜찮으시다면.”
벤자민의 목소리는 곧 장작 소리에 묻혀 들어갔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소리는 여전히 주위를 가득 울렸다. 크리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피콕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번째로 입을 연 사람은 로비였다. 자신이 D급으로 태어나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 어째서 어린 나이임에도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제니퍼는 조용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피콕은 여전히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목소리는 피콕의 것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곳과 생활, 그리고 외로움에 대하여. 제니퍼는 끝내 울먹이는 피콕을 토닥여주었다. 세 사람은 제니퍼가 위로에 서툴지만 그래도 다정한 사람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콕은 무심하게 저를 토닥이는 제니퍼의 손길에 꽤나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남은 사람은 크리스와 제니퍼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크리스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 제니퍼는 크리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크리스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홱 돌린 제니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우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 네.”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콕 역시 결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로비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벤자민은 표정이 좋지 않은 크리스를 데리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 피콕도 제 텐트 안으로 들어가 팔다리를 쭉 뻗고 누웠으며, 로비는 그 옆에 작은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저녁 시간이 끝나가는 것을 느꼈다. 제니퍼는 차에 들어가 조수석에 몸을 기대었다.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다가, 금세 지워버렸다. 대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아니,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을 생각했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영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제니퍼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밝은 초승달을 멍하니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조금 더 걸어 나오자 낮에 보았던 바다가 눈에 띄었다. 지금은 물이 전부 빠져 하얀 백사장이 다시 드러난 채였다. 모래사장은 달빛을 받아 푸른색으로 빛났다. 제니퍼는 한 벤치 앞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새까만 바다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낯설지만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제니퍼는 천천히 뒤를 돌아 다가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였다. 벤자민이었다. 그는 조금은 피곤하고, 조금은 울적한 표정이었다.
"…… 누군가 나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역시 제니퍼 님이셨군요."
"그래. 잠이 안 와서."
"……."
낮보다 거센 파랑이 그들 앞에 일렁였다. 벤자민은 제니퍼를 한 번, 그의 옆을 한 번 바라보곤 천천히 다가와 제니퍼와 거리를 두고 앉았다. 제니퍼는 그런 그의 모습을 슬쩍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딱히 말릴 마음은 없어 보였다. 네 사람이 제니퍼를 어려워한다는 것은 제니퍼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제니퍼가 숨을 뱉어내자 옅은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제니퍼는 담배를 손에 들고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담배 연기, 싫어하나?”
“…… 괜찮아요.”
“…….”
제니퍼는 한 손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벤자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제니퍼를 바라보았다. 단정하지 않은 짧은 곱슬머리에 무심해 보이는 날카로운 얼굴. 다부진 팔과 작지만 단단한 체구. 언뜻 푸른빛이 내려앉은 제니퍼의 낯엔 차갑지만 다정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섬세한 벤자민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제니퍼는 여전히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것은 차가울지언정 무심하지는 않았다. 벤자민은 다시 그의 눈을 피했다.
“…… 감사합니다.”
“뭐가.”
“아침부터 낮까지 배려 많이 해주셨잖아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제니퍼는 여전히 표정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린 네 사람의 눈에는 제니퍼가 자신보다 한참 작음에도 누구보다 커 보였을 것이다. 벤자민이, 다른 세 사람이 그때의 제니퍼도 겨우 28살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도 완벽하지 않은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또한, 제니퍼가 꽤나 큰 책임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겨우 15살, 17살, 19살, 20살이었던 그들의 눈에 제니퍼는 너무도 어른스러웠고, 큰 사람 같았다. 제니퍼는 자신의 행동에 크게 생색을 내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의 일에 크게 개입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들을 도울 뿐이었다. 제니퍼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크리스는 잠들었나?"
"네……."
"아직 힘들어 보이더군. 시간이 필요하겠지."
"………."
"너는 괜찮은 건가?"
벤자민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덤덤해 보이나, 그늘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묻고 싶은 사람은 벤자민이었다. 벤자민이 제니퍼의 얼굴에 스친 어두움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제니퍼 님은 괜찮으세요? ……. 뱉지 못한 물음이 목 안으로 삼켜 들어갔다. 그는 그저 제니퍼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릴 뿐이었다. 대신 대화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어요. A급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과 실제 낮은 계급의 삶은 얼마나 다른지.”
“…….”
“그래서…….”
“자책은 하지 마라. 쓸모없는 짓이니.”
“역시 그렇겠죠…….”
잠시 뒤, 또 다른 인기척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제니퍼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피콕은 성큼성큼 걸어와 제니퍼와 벤자민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딱 피콕이 앉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잠이 안 와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밤의 바다가 보고 싶었어요! 제니퍼는 우렁차게 외치는 피콕을 보며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피콕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곤함과 신남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제니퍼의 얼굴에 깃든 어두운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피콕은 밤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며 커다란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밤은 여전히 밝았다. 그들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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