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겸

[원겸] 진심 眞心

원겸 밖에 쓰지 못할 이야기가 있어서... 199x년의 조각글...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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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에게.

 

  안녕, 석민아.

 

  여기는 아직 추운 겨울이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있다 할 지라도, 당장 경칩이 곧 이기에 결국은 봄이 올 걸 모두 알고 있어. 네가 도착한 그곳에는 이미 일찍 당도한 봄이 있을 거라 생각해. 네게 그것이 봄이 아니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네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사실 이 편지를 쓰기 전까지 많이 고민했어. 네가 나에게 고백했을 때, 사실 알고 있었고. 네가 고백하기도 전에 그 진실을 마음에 묻고 지낸다는 게 죄악감으로 느껴졌어. 결국은 나에게 고백했을 때, 몇 번이고 상상해온 거절을 한다는 게 쉽지 만은 않았다. 정말 쉽지 않았어. 그것 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석민아.

 

  거절하는 대신, 네가 들어달라 했던 소원. 이것 만큼은 지키는 것이 그 죄악감에 대한 속죄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가 너와의 정, 그 이상으로 해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잔인한 말이지만, 가끔 감정을 잘라내기 위해 너에게 이런 말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석민아. 그곳에서도 봄이 올 거야. 늘 봄이 될 거야. 너라는 아이이기에 올 수 있는 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어. 네가 성인이 되는 해가 다음 해였지. 모자란 네 과외 선생님보다 더 나은 네 인연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 잔인한 말들이 네 감정을 잘라내기 이전에, 시간의 바늘이 네 감정을 모두 잘라낼 수 있기를 바랄게.

 

  첫 편지로 너무 야속한 이야기를 써서 미안해. 하지만 너라면 알아 줄 거라 생각해.

 

  더위를 많이 타는 네게 그곳의 날씨 만큼은 잔인하지 않기를 바랄게.

 

  원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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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에게

 

  안녕, 석민아.

 

  그곳이 따뜻하다니 다행이야. 내 편지가 오히려 따뜻해서 잔인하다는 말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네게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매 편지마다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

 

  석민아. 나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해. 적어도 네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어. 그 때 말했던 것처럼 나는 네게 맞지 않는 사람이야. 그건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나이 뿐만이 아니라, 네가 미성년이라는 이유 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어. 우리는 사는 배경이 너무나도 다르고, 살아오며 듣고 자란 모든 것이 달라.

 

  내 카세트 플레이어가 금세 부서지고 낡은 것처럼 나의 삶이 다르고, 네 손이 맑고 깨끗한 것처럼 너의 삶이 다른 거야. 어리다는 말로 치부해서 미안하지만, 결국 커 가면서 그 차이가 상처의 깊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

 

  나는 말도 잘 하지 못해. 네게 전하지 못했던 모든 진심을 이 편지로, 글로 전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진심을 써서 보내. 어느 순간에는 이 사람이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구나. 쓸데없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조금은 질렸으면 하는 마음까지 있어.

 

  내내 너에게 나의 모자란 부분을 써서 보낼게. 그게 네 이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원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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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에게

 

  경칩이 지나도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여전히 찬 봄이야. 늘 따뜻할 거라 생각하며 맞이하는 봄이, 결국 이렇게 춥다는 사실에 매번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네. 너도 한국에 있었을 땐 그랬을까?

 

  미국에서 네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즐거워 보여 다행이다. 나를 잊겠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도 반가웠어. 이제 이 편지들은 너와 나의 이별에 대한 방명록이라고 하자. 점차 발걸음을 끊어 가며, 세월 속에 묻었다가 나중에 꺼내는 추억 같은 거야. 그 땐 그리운 마음이 들겠지만 지금보다 아프진 않을 거야.

 

  나의 근황에 대해서 궁금해 하기에 몇 자 적는다. 나는 네 부모님이 힘 써 주신 덕분에 학비에 대해서는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니고 있어. 그 점에 대해서는 따로 편지를 동봉하여 보내니 같이 전해 드리면 좋겠다. 내 모자란 실력으로 원래부터 잘 되었어야 했던 널 가르친 것 뿐인데, 후하게 대해 주셔서 언제나 감사해.

 

  너를 가르치면서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 것도, 네게 감사해. 선생님이 된다면 아마 첫 제자였던 너를 잊지 못할 거야. 우리는 그런 식으로도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거야. 이별이 그저 단순하게 우리 사이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같이 걷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해.

 

  석민아. 모자란 나보다 더 사랑 받기 마땅한 너를 사랑해 줄 사람이 나타날 거야. 나에 대한 추억을 잊기 힘든 후회로 남기지 않도록 나는 열심히 편지를 쓸게. 네 감정을 닳고 닳도록 내뱉는다면, 언젠가 무뎌지는 날이 올거야. 그 때 네가 어른이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겠지.

 

  미안하다, 석민아.

 

  원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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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에게.

 

  늦어진 답장에 대해서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석민아. 이곳은 여름에 접어 들었다. 그 계절처럼 우리의 편지가 서로 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고,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결과야.

 

  너에게 재밌는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몇 번을 써보고 써봐도 네게 결국 지루할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재미 없는 건 아니야. 난 나 나름대로 재밌게 살고 있지만, 친구들은 매번 그 이야기에 웃지 않더라고.

 

  그래서 오늘은 큰 맘 먹고 텔레비젼을 들였어. 코메디쇼를 처방해 준 친구가 있었거든. 보다 보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결국은 나에게 휴식을 선물해 준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사실 코메디쇼보다 가요무대를 더 보고 있어. 이건 그 친구에게 비밀이야.

 

  요즘은 김광진의 노래가 좋다. 그곳에선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좋은 노랫말들이 많아. 언젠가 너에게 전할 수 있는 노랫말이 있다면 같이 써 보낼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석민아. 미안해 하지 마. 네가 나에게 미안해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건 나만 네게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해. 그러니 더 이상 편지에 미안하단 말이 없기를 바라.

 몸 조심하고. 나에 대해 더 신경쓰지 않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원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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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에게.

 

  계절보다 늦어지는 답장이, 다소 반갑게 느껴져. 이 말이 아직도 네게 잔인한 말일까?

 

  네가 전해 주는 미국의 소식들이 흥미롭고 재밌다. 그만큼 흥미롭고 재밌는 소식을 전해 주기엔, 한국의 소식은 네가 보고 듣고 자란 것들 투성이야. 나는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고, 네 부모님께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게 갚는 거라고 말씀하신 것,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씀 드리면 좋겠다.

 

  벌써 일 년의 반이 지나가고, 더 지나가 가을을 넘었어. 그곳의 계절보다 뚜렷한 이곳의 계절은 늘 정직하게 흐르고 있어. 내 카세트 플레이어도 정직하게 나이를 먹고 결국 고장이 났어. 몇 번이고 고쳐 쓴 자국들이 선명한데. 결국은 보내 줄 때가 된 것 같다.

 

  세월이라는 건 참 신기해. 만남이 있는가 하면 결국은 이별로 마무리 해야 하는 어느 순간은 오게 된다. 영원함이 없다는 것을 늘 곱씹어 알려 주는 것 같아. 네가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아도 상관 없어. 내가 네게 전할 수 있는 잔인함을 담아, 이렇게 보낸다.

 

  이렇게 벼린 말조차 네게 무뎌질 때까지. 내가 너를 도울게, 석민아.

 

  원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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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에게.

 

  계절은 다시 우리가 시작한 순간으로 돌아왔어. 하지만 그 겨울과 이 겨울은 같을 수 없겠지. 우리에게 매번 계절은 그런 식으로 새로운 얼굴을 한다. 낯설지만, 어느 순간엔 익숙한 거야.

 

  입영 통지를 받았어. 네가 뜸해진 것이 다행일 정도의 적막이 우리 사이에 찾아 오겠지만, 그게 너에게 별 일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갑다. 휴가 때마다 잊지 않고 네 답장을 체크하겠지만, 부대에서는 네 편지를 받지 않을 생각이야. 그게 너에게도 나에게도 낫다고 생각했어.

 

  석민아, 이제 곧 1999년이 찾아 온다. 과연 우리는 그 안에 멸망할 수 있을까? 영원한 것은 없고 우리는 언제나 이별하게 되기 마련인데. 우리가 늘 예지 하는 이 이별처럼, 그 이별도 예지한 그대로 오게 될까?

 

  멜랑콜리한 이 마음은 편지로 나마 솔직해 질 수 있는 시간에 담아 보낸다. 너에게 더 재미없고 유치한 남자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너는 종말이 찾아 온다면 무얼 하고 싶어? 나는... 모르겠다. 그걸 찾을 수 있는 계기가 종말 안에 찾아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원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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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송 처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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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송 처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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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에게.

 

  답장이 너무 늦어, 이번에도 내가 미안하게 되었네. 종말이란 것이 증명되지 못한 새천 년에 네 편지를 보게 되어 반가워. 보아하니 몇 번 더 보냈던 것 같은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네게 좋은 인연이 생겼다는 이야기, 전해주고 싶어 하는 네 맘은 충분히 받았어. 이제 이 편지에 대해 집중할 시간을 그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겠지.

 

  이곳은 다시 겨울이야. 겨울을 걸러 다시 겨울로, 그리고 다시 겨울로. 계속 돌아오지만 똑같은 겨울이 아니라는 사실에 매번 일 년이 낯설다. 그만큼 너는 자라고 있었어. 그에 반해 나는 아직도 김광진의 똑같은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도. 무슨 노래를 듣냐 늘 물었지만, 난 네게서 끝나는 김에 사소한 욕심으로써. 의문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에 말하지 않을 거야. 이것 역시도 같이 용서해 주길 바라.

 

  드디어 봄이 오는 구나, 석민아. 모든 것이 잠에서 깨는 절기가 지나면, 네 안에 핀 감정들이 이전보다 더 무성하길 바란다. 그 꽃에 비애는 한 점도 없길 바라. 넌 그래도 되는 아이니까.

 

  네 감정의 마지막을 축하해. 그리고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해.

  안녕, 석민아. 

 

  원우가.

 

-

...

*

 

  웃는 얼굴이 예쁜 애였다. 서운한 일이 생겨도 결국은 웃을 수 밖에 없는 애라서, 울 일이 많고 그만큼 마음이 얇아도 결국은 웃는 애라서. 원우는 석민에게 자주 눈길이 가곤 했었다. 허나, 여린 얼굴이 제 얼굴을 살피는 일이 잦아지는 때에는 모른 척 했다. 그가 눈길을 거두면 그 길에 제 눈길이 닿는 것을, 계속 모른 척 해야 했다.

 

  말 그대로였다. 늘 석민에게 말했던 이별의 이유들은 곧 자신에게 닿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편지를 쓰면서도 그것을 되새김질 하며, 자신에게 타이르듯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너와 나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만날 수 없는 것이라고. 계절은 흘러가고, 흘러가는데.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하지 못함을 증명하는데. 같으면서도 다른 계절 안에서 자신의 타이르는 목소리는 늘 같았다. 

 

  종말이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원함이 없다는 사실을 강제로 나마 알고 싶을 때가 있었다. 

 

  마지막 편지를 끝내며. 수없이 고치고 또 고쳐 왔던 편지들이 휴지통에 나뒹구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플레이어에서는 김광진의 진심이 수도 없이 흐르고 있었다. 역설적인 기다림이 가사 위에 오르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그에게 보낼 편지를 봉하고, 새로운 편지지를 꺼냈다. 수신인이 없는 편지였다. 내 감정을 닳고 닳도록 내뱉는다면, 언젠가 무뎌지는 날이 올거야. 그 때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겠지. 너에게 그렇게 닳도록 이르고 이른 그 말들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이 과연 올까?

 

  석민에게.

 

  나는 아직도 너와 처음 만난 순간을 잊지 못한다. 네게 수도 없이 전하고 싶었던 노랫말이, 늘 영원을 말하는 것만 같아. 만년필과 시곗바늘이 갈라내는 것은 너의 진심이 아니라, 나의 진심이었어, 석민아.

 

  석민아.

 

  석민아. 석민아.

 

  너보다 늦게 도착하는 내 이별을, 언젠가는 남의 일처럼 꺼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작은 종말이, 결국은 너와 같이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그 뒤로 편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원우는 그 편지 마저 실패한 답장 더미 위로 구겨 올렸다. 그 또한 여전히 실패한 답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축축한 눈가를 손목으로 눌렀다. 한참을 떼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이 모든 겨울이 계속 영원할 것 같아, 석민아.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게 두려웠다. 그 두려움이, 결국은 영원함을 증명할 것만 같았다. 

 


 

김광진 -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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