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T

Lost [Nov. 2, 2023]

익숙한 것에 감사함이 결핍된다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해. 모든 순간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너도나도 여기에 남아 끝끝내 순간에 시들게 되겠지.

제이크. 내 사랑, 내 사람.

나는 네게 어떤 존재일까.

처음과 끝일까. 혹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할까.

그래서 우리가 싸우는 걸까?

.

.

.

아침부터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혀 찬란하게 흐트러졌었던 것 같다. 나는 제이크의 침대에서 제이크의 식어가는 체취에 눈을 떴었다.

"..제이크."

나지막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당연하게도 그는 내 옆에 없었다.

우리가 같이 산 지 벌써 몇 년이 흐른 거지? 시간은 해를 거듭할수록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속절없이 흘렀다. 그 일이 완전히 종식된 후 나는 그의 곁에 머물러 그에게 종속되기를 바랐었다. 다행히 제이크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고 우리는 서로의 삶을 청산한 뒤 이곳, 더스크우드 숲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내 고향, 가족, 직장, 친구들을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내려놓았고 그는 그가 평생 하던 일을 내려놓았다. 서로에게 온전하기 위해.

처음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처음에는.

물끄러미 제이크가 떠난 자리를 그저 지켜봤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이크가 누워있던 자리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질 않았다. 너는 계속 같은 사람이구나,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그랬었어, 너는.

아침부터 제이크 때문에 침울해 있기 싫었다. 그래서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말끔히 정리했다. 방 안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냄새도 이젠 숨이 막혀 창문을 끝까지 열어젖혔다. 맑은 더스크우드 숲의 흙내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이 느껴졌다.

"오늘은 산책이라도 가봐야겠네."

텅 비고 고요하기만 한 집에서 무슨 대답을 기대할까.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나의 목소리를 느끼며 조곤조곤 말했다. 오히려 그가 어디선가 듣고 있기라도 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제이크 생각이지. 또.

돌고 돌아 내 생각은 왜 항상 너에게 도착하는 걸까.

"..지긋지긋하다, 정말."

나는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고 아직 차가운 더스크우드 숲의 아침에 대비해 가벼운 숄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에 이슬비라도 내렸었던 모양이다. 비 온 뒤에 느껴지는 흙의 향이 내 코를 찔렀다. 떨어진 지 오래되어 보이는 나뭇잎들은 내 발에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아침을 알리는 산새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도 까마귀 소리에 순간 심장이 덜컹하는 것이 느껴진다.

"후... 조금 춥네."

애써 나의 두려움을 무시하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나는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 두렵다. 제이크가 내 곁을 떠날 거라는 징조보다 더. 두려움에 잠식 당하는 일을 더 이상 겪고 싶지가 않다.

실제로도 온도가 좀 낮은지 손이 시린 게 느껴졌다. 더 두터운 옷을 입고 나와야 했었을까. 얇은 숄로는 비 내린 뒤 숲의 냉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지금 얼마나 추운 걸까 문득 궁금해져 허, 하고 입김을 내뱉었다. 예상했던 대로 꽤 추웠던 모양인지 입김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하얀 숨으로 변했다. 내가 내뱉은 숨은 정처 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냥 돌아가야겠다."

15분쯤 걸었으니, 또 15분을 걸어가야겠지. 집에 들어가면 방금 먹었던 아침을 정리하고 차를 몰고 콜빌로 가 장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 방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눈에서 치워버려야겠다. 직접 내 손으로 치우는 건 정말 심적으로 고통스럽겠지만 그냥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다시 15분 정도를 걸어가자 제이크와 함께 계약했던 오두막집의 지붕이 보였다. 지붕 위 끝에 달린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이크가 집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차키가 테이블 위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잠깐은 마주쳐야 된다. 차키만 가지고 얼른 나오자. 그렇게 생각하고 현관문 앞에 섰다.

"하.."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이젠 제이크의 얼굴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너는 어떨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은 게 벌써 며칠 째인지 세는 것도 고역이라 금새 포기했었다.

금색의 투박한 문고리를 돌리고 집 안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제이크는 거실에 있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장작을 넣는 중이었다. 내가 문을 여는 소리에 제이크는 내 쪽을 뒤돌아봤다.

"..."

제이크는 말 없이 나를 보곤 다시 벽난로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의 저런 차분함 혹은 조용함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증오한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심장께가 다시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내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을 정의 내리기가 어려워.

"..."

나도 말 없이 문을 닫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차키가 분명 여기 있었을 텐데? 여러 열쇠를 보관하는 작은 접시 안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금속들은 짤랑거리며 접시와 맞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차키를 찾나?"

내 뒤에서 바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샌가 제이크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얼마 만에 말을 거는 거야? 솔직히 반가움보단 불쾌한 감정이 더욱 컸다. 나는 그의 눈을 보는 것이 거북해져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다시 접시 안에 집중했다.

"응."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 의도보다 훨씬 더 차갑게 나오는 말투에 내가 말해놓고도 놀랐다. 하지만 금방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내 심장을 그렇게 원래 없던 것처럼 짓이겨 놓았는데 나라곤 못할까?

"..여기 있다."

제이크는 접시 옆에 차키를 내려놓았다. 내 차키인데 왜 네 손에 있는 걸까? 순간 의구심이 들어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이크의 파란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독히도 사랑했던 또 나를 무참히 무너뜨린 그 눈을.

"이게 왜 너한테 있어? 내 거잖아."

"차키를 착각했다. 근데 어딜 가는 거지?"

"허,"

헛웃음.

내지는 비웃음이 토해졌다. 왜 도대체 이제 와서 그걸 궁금해하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콜빌."

"..병원에 가나?"

제이크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찌그러지는 까만 눈썹이 그와 닮았다 생각했다. 넌 그동안 내게 관심조차 없었으면서 그걸 왜 묻는 건지. 너랑 정상적인 대화를 나눈 게 언제쯤이더라.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걸까, 너는. 되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목에서 삼켰다. 이젠 그의 눈동자가 내게 닿는 순간 내 피부가 얼어버릴 것 같았다. 다정함을 가장한 냉기가 느껴져 더더욱 역해졌다.

"장 보러 가는 거야. 이제 와서 병원에 가는지 마는지 그걸 묻는 거야?"

"..."

"...더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거지? 다녀올 테니까 이 집에서 나가든 말든 알아서 해."

"줄리아."

제이크가 내 이름을 부르자 다시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그 이름, 그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건데. 억누르는 감정들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려 하는 게 느껴져서 잠시 숨을 멈췄다.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나는 그에게 몸을 똑바로 하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더 잃을 게 없어. 어디 한 번 해 봐.

"줄리아. 나는... 네가 괜찮기를 바란다."

"괜찮기를 바랐던 사람이 그렇게 했었어?"

속이 울렁거려.

아, 넌 진짜 가식적이구나.

도저히 그의 눈을 보고 대화할 수가 없다. 제이크의 눈은 방금 다녀온 더스크우드의 숲보다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어느 것이 그의 진심이고 거짓일까. 충분한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그저 자리를 떠났었던 그의 뒷모습이 다시 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내가 그날 얼마나... 얼마나 너를 필요로 했는데. 어떻게 그냥 그렇게 나가?"

"줄리아."

"아니. 그냥 나가.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가."

".. 줄리."

"못 들었어?"

나는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차키를 낚아채듯 들었다. 차키 끝에서 분홍색 리본이 너풀거리며 흔들렸다. 도저히 뗄 용기가 나질 않았던, 내 아이의 상징.

"그냥 내가 나갈 테니까 알아서 해."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집을 박차고 나가 곧장 차에 타 콜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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