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전제

독백

아수라장이 된 광장 한복판에 별안간 밝은 빛이 터져 나온다. 광장에 있는 대부분이 그 근원지를 바라본다. 모든 광경이 슬로우가 걸린 것처럼 보이고, 사방에 튀는 돌조각과 핏물이 공중에 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이 현실감을 없앤다. 내 몸마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 날 가로막는 느낌이 든다. 마치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힘겹다고 생각했다가, 금방 정정한다.

뒤로 밀려나는 것도, 당겨지는 것도 아닌 생경한 감각이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걸어온 길을 돌아간다. 위화감을 느낀 순간, 지금 이 상황이 내가 죽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기분 나쁜 능력은, 온 세상을 뒤져봐도 딱 한 놈만 가지고 있으니. 천천히 재조립되는 세상에서 내 고개가 이 일을 벌인 놈을 향해 돌아간다. 오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멀리서도 분명히 보였다.

‘재수 없는 새끼.’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빠른 속도로 세상이 되감긴다. 터져나간 분수대가 다시 붙고, 흩뿌려진 핏방울이 다시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겨운 감각에 소름이 온몸을 타고 올라온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가더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태엽이 멈춘다. 전부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가운데 움직이는 것은 바닥에 쓰러져 헛구역질하는 나와 이쪽으로 달려오는 그놈뿐이다.

“A!”

멈추지 않는 헛구역질과 덜덜 떨리는 몸에 자기 혐오가 가득 찬다. 아직도 그 날을 못 잊어 멍청하게 구는 내 모습이 한심하다. 심장이 점점 더 빨리, 크게 뛴다. 쿵 하고 무언가 내려앉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의 피로 흥건한 광장의 바닥이 그날 내 시야를 가득 채웠던 핏빛 깃발들과 겹쳐 보인다. 정신 차려! 놈의 목소리와 세상을 떠나버린 옛 동료들의 목소리가 함께 들린다.

억지로 일으켜 세워져 정면을 보면 기분 나쁜 눈동자가 나를 향해있다. 세상의 모든 밝은색을 모아놓은 것처럼 빛나는 눈이다. 그 맞은편에서 거무죽죽하게 죽어있을 내 눈동자에 고여있던 눈물이 떨어진다. 부족한 숨을 몰아쉬는 동안에 놈은 나보다도 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내 몸 상태를 확인한다. 그 꼴에 잠시 죽어있던 분노가 되살아난다. 단정히 정리되어 있던 셔츠가 내 주먹 안에서 구겨진다. 방심하던 틈에 잡힌 멱살에 이제는 제가 숨이 모자라게 되어 캑캑거린다.

“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겠다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입 밖으로 나오는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린다. 꽉 다물린 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살벌하다.

“살기 싫었어. 네놈 손에 다시 살아나기보다 죽기를 택했어. 넌 날 사랑한다면서도 내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 조금도 없잖아.”

“A, 제발….”

“모르겠고, 다 때려치워. 그냥 나 좀 보내줘. 너 좋자고 날 살려놨으면, 내가 살아갈 이유도 같이 살렸어야지. 아니야?”

찬란한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마저 빛나는 것 같아서. 그 빛이 나를 비웃는 듯 보여서. 그 대단한 능력을 고작 나 하나 살리겠다고 쓰는 게 우스워서. 열등감일지 질투일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절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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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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