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
일반
북적이는 홀을 뒤로하고 흑발의 남자가 급히 어디론가 향한다. 붙잡으려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연회장에 잡아놓는 데 성공하진 못한다. 그들의 권유를 거절하는 남자의 태도는 어딘가 상대를 낮잡아보는 듯했지만, 무표정에 어린 특유의 거만함과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이 그 태도를 자연스럽게 한다. 거절당한 이들도 익숙하다는 반응으로 돌아서 이내 저들 각자의 파티를 즐긴다.
남자의 바쁜 발걸음은 결국 건물을 벗어나 바깥으로 간다.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벽 몇 겹에 가려 웅얼대는 무언가로 들려올 때쯤, 그는 속도를 늦춰 숨을 고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짙은 남색의 풍경 사이 이질적인 분홍빛이 넘실거린다. 익숙하면서도 매번 홀리게 되는, 크게 굴곡진 머리칼이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자 그의 눈앞이 환해진다. 마치, 환상 마법에 걸린 것 같이.
‘뭐 해, A?’
“뭐 해, A?”
“B.”
깊어진 밤, 뺨을 스치는 차갑고도 살랑이는 바람, 은은하게 내리쬐는 달빛. 분홍 물결이 사락, 흩어지고 A는 여전히 환상 마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도회인 만큼 화려하고 우아하게 치장한 B는 A가 회상하는 그날과는 사뭇 달랐지만, 달빛 아래서 그의 인기척에 돌아보는 모습이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 있는 A가 의아해 B의 표정이 점점 의아해진다. 또 안 좋은 소리를 들었나. B의 걱정하는 속도 모르고 A는 다가오는 B를 바라만 본다. 팔랑이는 긴 속눈썹 아래 빛을 등지고 있어도 찬란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다가 그는 정말 자신이 큰일 났음을 직감했다.
“B.”
처음 그에게 반했던 순간이 사무치게 그리우면서도 지금의 B가 너무 아름다워서. 걱정하는 듯한 표정에 자신을 바라보며 살짝 찌푸린 미간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A는 어느새 한 발짝 남은 거리에 서 있는 B에게,
“사랑해.”
“뭐?”
“네 성을 따를래.”
“뭐!”
최고의 순간에 그는 최악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손 끝의 온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