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독백

‘당신이 내 고모라고요.’

위태롭다. 사납다. —의 자식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아직 어리다. 여리고. 그래서 그만큼 독하다. 나는 몇 번 보지도 못 한 제 어머니의 무언가일까? 그러나 날카롭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눈빛만큼은, 아아….

‘영특하구나. 졸업도 전에 스스로 알아오다니.’

‘무슨 뜻이에요?’

‘네가 졸업할 때 내 추천서와 함께 알려줄 생각이었어.’

‘하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내 평생의 후회가 될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 나를 또다시 짓누른다. 전쟁의 최전방에서 정의와 신념을 논하던 얼굴로 나를 책망한다.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기에, 속에서 무작위로 튀어 오르는 다정한 말들을 무한히 삼켜낸다. 아버지는 하나도 닮지 않았구나, 미인이야. 웃는 건 닮았을지도 모르겠구나. 네 아버지도 그렇게 표정이 시원시원했거든. 얼굴은 몰라도 성격은 똑 닮았구나. 네 아버지도 무서우리만치 정의를 외쳤단다. 보고 있노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정한 사람이 된 기분일 정도로. 당신의 열정이 뜨겁고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될 정도로. 하지만 감히, 어떻게 이 아이 앞에서 아버지 얘기를 꺼내겠는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를 아는 모두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말이다. 그 A가? 하지만 그래, 아이야, 너의 행보는 꼭 누군가를 닮아서, 나는 그 누군가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지던 사람이라서, 그리고 그에게 평생을 다 바쳐 속죄해야 할 사람이어서. 그래서 네 마음을 온전히 얻고 싶었는데, 자신이 없구나.

‘B.’

정신없는 독백 사이로 불쑥 뛰쳐나간 애칭이 고요한 복도 사이를 메꾼다. 아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란다. 네가 이렇게 화낼 줄 몰랐다는 변명으로 넘어가려는 치졸한 사람이란다. 준비한 건 너에게 나라는 존재가 불공정이라는 단어를 안겨줄까 봐 숨었다는 비겁한 말뿐이란다.

‘A 저택에 가보지 않을래?’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이마저도 너에게는 상처가 되겠지. 하지만 정말이야, 네가 내 존재를 알아 좋을 것 없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쩌겠니, 영리하고 올찬 네가 스스로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테니, 너 역시도 네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주어야지.

‘저택과 가문에 대해 소개해주마.’

나는 뻔뻔하게도 너에게 내가 가족이 되기를 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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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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