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메어
일반
♬Gabriel Fauré - Sicilienne, Op. 78
수없이 많은 가는 선이 가로지르는 창문 아래, 다 식은 차 한잔과 고서를 옆에 두고선 A는 잠들어있다. 동유럽의 마녀집회 때문에 한참을 시달리다 겨우 여유가 났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가 짧은 휴식을 즐기기 위해 책을 들고 자리에 앉은 건 분명 따스한 햇볕이 창문을 살피던 한낮이었지만, 지금 그를 비추고 있는 건 창백한 달빛이다. 뉴욕은 춥지 않지만, 누군가가 저질러놓은 사고로 뉴욕 생텀은 한겨울처럼 싸늘하다. 마냥 푸르지만은 않은, 어쩌면 초록빛의 달빛이 A의 눈가에서 망토처럼 일렁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스터, 네 선택에 온 우주의 운명이 달렸어. 현실을 지킬 열쇠는 언제나 타인의 희생이 쥐고 있었나 봐? 13,078,306번째 경우의 수에서는 —가 타이탄에서 사망해 실패. A, 언제나 칼을 쥐는 건 너잖아. A, 이제는 정말 선택해야 해. 네가 성공할 방법은 뭐지? 자네는 항상 우위에 서길 좋아하지. 그게 자넬 결국 파멸로….
“A?”
허공에 타오르는 불꽃 특유의 소리와 B의 목소리가 그를 깨운다.
“... 이런.”
“졸았나 보군. 천하의 A가.”
“놀릴 일도 아닌데 그래. 피곤할 만했단 건 자네도 알잖아, B.”
미간을 짚는 그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전신으로 전달된다. 저도 모르게 흘리던 땀이 차갑게 식어 가벼운 움직임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B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쯧, 차곤 본인이 직접 찻잔을 집어 든다. 가빠진 호흡이 제 속도를 되찾을 때까지 B는 별말 없이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다. 아래층에 —가 와 있으니 내려가 봐. 적당히 낮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말해온다. 자네가 말하는 —가 —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재미도 쓸데도 없는 개그는 언제쯤 그만둘 건가? 시답잖은 농담이 오고 가며 몸에 들어갔던 힘이 서서히 풀리고 떨림도 잦아든다.
“—는 왜 왔다던가?”
“제 사고는 제가 수습하겠다던데. 너무 닦달하진 말게.”
“자네만 할까, B.”
“내가 뭘.”
달칵. 다시 내려놓은 찻잔에는 라벤더 향과 함께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그냥 이거나 마시고 있어도 되네.”
허, 코웃음일지 탄식일지 모를 소리에 B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A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웃는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섬세하다니까.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A를 보며 이번엔 B가 웃는다. 역시나 B의 반응에 무시로 답하는 A다.
“이번엔 나이트메어가 또 뭘 보여줬는지 몰라도, 내가 할 말은 항상 같잖나.”
그래, B. 그 항상 하는 말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 자네와 함께 멀쩡히 앉아있는 것 아니겠나. A는 마른 입술만 달싹였다. 진심 어린 위로에 진심으로 답하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일이었다.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A의 반응은 그저 B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이는 것뿐이었지만, B는 그의 긴장이 풀린 얼굴을 보고 안도하고는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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