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번져있는 잉크의 편지)
1967. 05
어떻게 편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어떤 연유로 편지를 쓸 수 없고, 그럼에도 나와의 편지가 뭐라고 그 급박한 상황에서 작은 종이 쪼가리를 보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주변에서 큰 학생운동이 일어나 취재하고 집에 돌아와 서랍 속에 놓여있는 그 쪽지를 봤을 때 제 심정을 알 수 있겠나요? 당신이 가는 길이 쉽지 않고,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걸까요. 당신이 언제나처럼 편지하고 저와 대화를 나눌 것을 생각했어요. 마법과 기적이 있는 세계이니, 당신에게도 그런 행복한 일들만 생길 거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했어요. 지금 펜을 들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만약 편지했는데, 당신에게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을까 봐요. 당신을 탓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 무사히 살아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다시 내게 편지할 때를 생각해서 무언가 써놔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아무것도 쓰질 못하겠어요. 한심하죠,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편지하나에 답장 못 하는 꼴이라니. 그래도 한 번만 봐줘요. 당신의 편지를 한 손에 쥐고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어요.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편지를 기다리면서 무너지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죠.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니, 이제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네요. 그러니까, 지금 난 일을 제외하고서 일주일 만에 펜을 잡은 거예요. 그러니 혹시 편지의 내용이 오락가락하더라도 이해해 줘요. 여전히 불안하고 당신이 걱정되어서 힘들지만, 오지 않는 편지를 편집증 환자처럼 기다리는 것보다는 제 편지가 기적이나 행복이라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게 낫겠죠.
일주일 전 학생 운동이 크게 일어났어요. 저는 기자니 취재 겸해서 시위 현장에 찾아가 학생들에게 인터뷰를 따내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었어요. 인종차별을 없애길 바라기도 하고, 여성 인권을 말하기도 하고, 베트남전쟁에 반대했죠. 사랑과 자유를 내세우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했어요.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저마다 조금 다르긴 했지만, 분명 기존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반감을 품는 건 확실해 보였어요. 혹자는 그들을 ‘히피’라고 부르더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사상에 동의하는 부분도, 반대하는 부분도 있지만 최근 미국 사회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야말로 미국 시민의식이 크게 변하는 격동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다만 원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꼭 분위기를 흐리는 이들이 있잖아요. 방금 이야기한 ‘히피’ 문화가 변질되어서 마약을 하는 집단도 있더군요. 마약이 사람을 가장 ‘자유로운’ 형태로 만들어 준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정신을 놓고 쾌락만을 좇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자유라면 전 그냥 전근대적인 사고로 살래요. 물론, 이건 일부의 생각일 뿐이고, 대부분은 그저 머리를 기르거나 가죽점퍼를 입는 정도로 개성을 표출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최근에 가죽점퍼를 하나 구매했답니다. 이건 그저 예뻐서 산 게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지만요.
공사장의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무슨 학생운동 이야기를 하나 싶겠지만, 학생운동이 끝난 뒤에 그 공사장으로 들어가는 몇몇 이들을 봤어요. 당연히 그들을 따라 들어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하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군요. 혼자서 그곳에 들어가기엔 너무 위험하기에 주변에서 한동안 누가 왔다가 가는지 확인해 봤는데,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어요. 저번에 인터뷰했던 사람들 대부분 들어갔다가 나왔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상태가 어쩐지 다들 안 좋아 보였어요. 안에서 어떤 사람이 연설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도 들리고요. 예상하는 것은 있지만, 확신하기는 일러서 다음에는 경찰들과 함께 와서 살펴봐야겠어요. 당신도 내가 혼자 들어가려고 했다면 당연히 말렸겠죠? 당신이 준 행운의 금화 한 닢이 있다고 해도요.
사실 당신의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멀쩡히 취재를 해놓고서 하나도 적어두지 않아서 다시 찾아가기도 하고 기사를 적어놓고 엉뚱한 서류를 제출해서 성격 더러운 상사에게 왕창 깨지기도 했죠. 당신 때문이에요. 아니, 당신에게 너무 정 줘버린 내 탓이겠죠.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앞으로도 요원한 이가 이렇게 걱정되다니, 당신의 편지가 내게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란걸 이번 기회를 통해서 깨달은 참이에요. 사실 당신이 제게 대답할 의무 같은 건 없어요. 당신 이야기가 궁금한 것도,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는 것도 모두 내 멋대로 한 일들이죠. 그래도 우리 친구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당신을 잃을 준비 같은 건 한 적 없어요. 그러니 꼭 답장 줘야 해요.
답장 없어도, 다시 편지할게요.
From. Inseparable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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