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To.UR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일은 드물었다. 제 방을 드나드는 이의 수가 적은 탓도 있지만, 이전에 있던 부관이 유독 바빴기에 문턱이 닳을정도로 문이 열리고 닫힌 탓도 있을 터였다. 늦은 밤, 그것도 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카딘은 대체적으로 시간 안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 했으며 행여 일이 남아 있어도 타인의 손을 빌리는 일은 드문 편이니까.
사각사각. 만년필의 소음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눈동자가 바삐 굴러간다. 이것만 보면 오늘치는 끝인가. 막연한 생각을 하며 뒤늦은 허기감에 괜시리 제 배를 문질렀다. 소파 위에 정갈하게 놓인 담요와 테이블에는 퇴근 전 부관이 사다놓은 샌드위치만이 자리했다. 더 없지? 누구에게 묻는지도 모를 혼잣말을 중얼이며 그제야 늦은 업무를 종료한다. 시간을 확인하고 가벼운 기지개를 피며 포르르, 숨을 내쉰다. 고요한 적막감이 감돈다고 생각할 즈음 어디선가 예민한 걸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누구지, 이 시간에.”
정확하게 제 집무실을 향하는 걸음걸이에 절로 귀가 곤두서고 촉각이 예민해진다. 초조한 모양새로 시간을 재차 확인하며 오늘 하루를 빠르게 돌이켜본다. 특별한 일이 있던 건 아닌데. 언제나와 똑같은 하루였다. 일상에서의 변화가 쉬이 오는 법은 아니니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초침이 넘어가는 것을 눈으로 느리게 덧그린다. 미묘한 긴장감에 속이 울렁거리는 감각이 든다. 제 눈 높이만한 인영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열고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물의 잔향이 코 끝을 간질이며 안으로 훅, 들어온다.
“………율리안.”
평소와는 다르게 급작스레 들이닥친 사내를 보며 카딘의 눈이 커졌다. 묘하게 뿜어져나오는 위압감과 여유없는 표정이 그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무슨 일이지? 저럴 성격이 아닌데. 당최 제 이야기를 하는 법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으며 그와 동시에 저에게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그였다.
율리안 레온하르트와 카딘 녹스는 서로에게 조심스러우며 한없이 기대기 편한 기묘한 관계였다. 부관일 때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부분은 되려 율리안이 인사과를 나가고 나서 더욱 도드라졌다.
그는 때때로 카딘의 집무실을 노크했으며, 제 부서의 사람이 아닌 그를 카딘 또한 곧잘 받아주곤 했으니까. 외부에서 보자면 업무를 도와준게 아닌가? 싶은 상황이었지만, 반절은 맞았고 반절은 틀렸다. 때때로 카딘은 제 부관을 반쯤 울리면서 율리안을 불러내기도 했으며(이 때문에 성격이 묘한 방향으로 더러워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구태여 불러내지 않았음에도 종종 카딘의 집무실에서 머물고 있는 율리안을 목격하기도 했으니까.
‘레온하르트 준장님, 녹스 소장님 좀 어떻게 해주세요.’
‘……지금 집무실에 계시는 거 아닙니까?’
‘태평하게 소파에 늘어져서 졸고 계세요. 일이 산더민데!’
몇 번 째 바뀐건지 모를 카딘의 부관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율리안의 연락처가 공유되고 있었다. 녹스 소장이 게으름을 피우면 레온하르트 준장을 부르라고. 이 사실을 카딘도 율리안도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암암리에 묵인하고 있을 뿐.
율리안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턱 짓으로 문 쪽을 가르켰다. 퇴근하세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는 경례를 하고 후다닥 감찰과를 빠져나갔다.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는 아주 가끔, 그러니까 이럴 때에만 생겨난다. 율리안은 무심코 제 워치의 수치를 확인하고는 긴 복도를 가로질러 익숙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이 옷을 정리하고 집무실 앞에 선 율리안이 노크 대신 목소리를 냈다.
‘율리안입니다. 소장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고리를 돌리고 들어간 율리안의 눈이 자연스레 소파로 향했다. 반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율리안을 맞이한 카딘의 눈에는 약한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등받이에 팔을 걸고 몸을 문 쪽으로 튼 채, 카딘이 율리안을 빤히 쳐다봤다.
‘……쉴 때 되었잖아, 너. 겸사겸사 얼굴 익히고?’
제 부관이 누군지 바뀌면 꼬박꼬박 얼굴을 보이게 하는 카딘이었다. 어느새 고정되어버린 일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율리안은 소파에 대충 걸쳐져 있는 담요를 정리하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철을 흘끔 보았다.
쌓인 양과 카딘의 일처리 속도를 가늠하며 짧게 계산을 마친 율리안이 약한 숨을 내쉰다. 카딘은 몸을 틀어 자세를 바로 한 뒤, 어느새 책상 곁으로 다가온 뒤였다.
‘부관은? 퇴근 시켰어?’
‘예, 보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보필이라고 말은 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저 카딘이 업무를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을 때가 태반이었다. 어느새 의자에 앉은 카딘이 만년필을 움직이며 업무를 재개했다. 물끄러미 그의 모습을 보던 율리안은 소파에 앉은 채, 그런 카딘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카딘은 그에게 궁금한게 많았다. 물음표가 많은 관계라는 것은 어쩔 땐 굉장히 어려웠다.
‘감찰과는 어때? 할 만 해?’
‘예, 그럭저럭. 나쁘지 않습니다.’
‘……능력. 많이 쓰는 거 아니지?’
‘….’
행여 잔소리가 될까, 혹은 제 직속도 아닌데 부담이 될까, 묻는 목소리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물론 구태여 묻지 않더라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카딘은 애써 워치를 외면한 채, 그에게 구두로 답할 것을 요구했다.
율리안의 침묵 속에서 카딘은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인사과에 있을 때보다 꽤 많은 능력을 쓰고 있다는 것과 정말로 감찰과에서 일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묘한 박탈감과 함께 체념이 올라오는 것은 순식간이었기에 카딘은 빠르게 남은 업무를 쳐내기 시작했다.
‘소장님은 왜 매번 부관들을 울리십니까?’
‘내가 울렸어? 지들이 그냥 운 건지…난 별 말 안 한단 말이야.’
카딘의 부관이 찾아오는 시기는 공교롭게도 일정했다. 그러니까 이쯤이면 오겠구나, 하고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퇴근 직전, 달에 혹은 2주에 한 번. 율리안으로서는 약간 한계치를 찍겠다, 싶을 즈음에 카딘의 부관이 감찰과를 두드리는 일상이었다.
이상하다. 저가 모실 때는 저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무엇이 그에게 변화를 주었는지, 율리안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내가 그렇게 성질이 더러워 보여?’
성질이 더러운 건 아니지만 가끔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율리안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얼른 마무리하고 퇴근 하시죠. 동행하겠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쉬어. 앞으로 한…30분이면 될 거 같아.’
‘예.’
카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율리안이 시선을 돌린다. 제게서 떨어지는 시선을 곁눈으로 확인한 카딘은 그제야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일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가끔 마주치는 것 말고 율리안이 카딘의 집무실에 찾아온 적은 없었다. 때문에 카딘은 갑작스런 변주에 다소 당황했다. 그마저도 정직한 얼굴에 도드라졌지만 그걸 알아봐 줄 이는 여유가 없어보였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조용히 닫혔고, 묘한 정적이 집무실 안에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율리안이었다. 망설이는 듯 몇 번인가 달싹이던 입술이 느린 숨과 함께 문장을 자아낸다.
“실례, 합니다. … …안 바쁘시면, 잠시 시간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조금 뒤늦게 자기 주장을 하며 카딘의 워치가 날카롭게 울렸다. 거의 동시에 울리는 워치의 소음은 귀를 찢을 듯한 이명을 만들었다. 절로 미간이 구겨지며 카딘이 자연스럽게 율리안의 앞에 섰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고, 상태를 체크한다.
“…너, 대체.”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러두었건만. 틈만 나면 이야기를 하고 관리를 하는 것으로는 택도 없었을 것이다. 입술새로 숨이 먹히고 저도 모르게 울음이 나오려는 설움을 애써 씹어삼킨다. 어째서 저가 더 억울한 것인지. 감찰과에 보내지 말걸 그랬나? 온갖 사고가 사방으로 튀며 이마에 얹었던 손을 뺨으로 내렸다.
체온이 시시각각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제 손 끝도 더럭 차가워진다. 이까짓걸로는 택도 없다는 양 상대의 체온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쥐고 주물러본다. 손을 잡음과 동시에 율리안이 강한 악력으로 카딘의 체온을 갈구한다. 드물게도 조급해보이고 초조해보였으며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쩌자고 이 지경까지 참은 건데.”
“죄송, 합니다.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
오염도에 반쯤 잡아먹힌 이의 눈을 안다. 카딘은 두려움과 동시에 화가 치미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입술을 달싹이며 자아내는 말조차도 얄밉게 느껴지고 지금까지 참은 미련함에 화가 난다. 이 커다란 몸을 마구 때리고 싶다는 충동도 든다.
요 전에 왔을 때, 억지로라도 하는 건데. 구태여 부탁하지 않으면 해주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암묵적인 룰이 생긴지는 오래였다. 그나마 인사과에서 얼굴을 볼 땐 관리라도 해줬던 게 다행이었을 지경이었다.
“……혼나는 건 나중에 해. 지금 너한테 화풀이 해봤자잖아.”
어쩐지 카딘은 저가 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커다란 몸을 끌어당겼다. 발들이 뒤엉키고 소파에 율리안을 앉히며, 카딘은 무심코 시간을 확인했다. 침대 위가 아닌 집무실. 그것도 소파. 콘돔이 있기는 한가? 온갖 생각이 튀어올랐지만, 지금 당장은 눈 앞에 있는 센티넬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카딘은 자연스레 앉혀둔 율리안의 위에 올라탔다. 가슴팍을 느리게 더듬으며 살결을 만져대면서 가쁘게 숨을 쉬는 턱을 손으로 쥐어든다. 입술이 벌어짐과 동시에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간다. 입술이 맞물리고 타액이 엉키며 혀가 얽힌다. 다행히도 이 상태의 그는 반항을 하지 않는건지 순순하게 카딘에게 제 입 안을 모조리 내주었다.
순순한 율리안 레온하르트라니. 아니, 원래도 그는 순종적이기는 했다. 반항 한 번 한 적이 없고 대꾸조차도 드물었다. 그나마 포스트잇으로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러번 생각할만큼. 카딘은 떠오르는 상념을 밀어내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허리춤을 붙들고 그 위를 진득하게 문지르며 성감을 고조 시킨다. 씨근대는 숨소리를 알아차릴 새도 없이 머리통을 붙들고 가볍게 토닥이기를 반복한다.
“...괜찮아, 율리안. 괜찮으니까.”
미안하다고 속삭였나. 그 말은 울음조차도 되지 않았다. 한없이 사죄에 가까운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가슴 한 쪽이 뜯겨져 나가는 불쾌한 감각. 달래는 말들로 어르고 속삭여도 그 감각은 오히려 선명해져만 간다.
이 감정은 카딘 녹스에게 여전히 물음표다.
어쩌면 구태여 외면하고 싶은 현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물음표에 이름이 붙는 순간,
——의 도피처는 사라질지도 모를테니.
희뿌연 새벽이 주는 힘은 굉장했다. 며칠 째에 일정한 시간에 깨어남에 따라 몸이 그 시간에 적응하고 만다. 아직은 낯선 천장을 보며 카딘이 선명해진 의식에 눈을 깜빡거렸다. 몸을 덮고 있는 푹신한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요근래들어 꾸는 꿈들이 어쩐지 과거의 이야기 투성이었다. 때로는 그것이 불쾌할 때가 있었고, 때로는 그것이 달가운 때도 있었다. 여전히 잠에서 깨진 못한 몸을 일으키며 느린 걸음으로 베란다를 향했다.
카딘 녹스는 일련의 사건이 정리됨과 동시에 부대 근처에 작은 집을 얻었다. 적당히 혼자 살 만한 곳을 아파트가 아닌 주택으로 구한 것은 순전히 본인의 취향이었다. 바다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자리한 소담한 주택에 짐을 풀고 생활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뒷정리로 이리저리 불려다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단락 된 지금, 여유가 생겨 휴가라는 명목 하에 집을 구하고 이사 비슷한 것을 한 셈이었다.
“….”
품에서 담배를 꺼내고 손에 쥐며 자연스럽게 불을 당긴다. 끊었던 담배를 종종 피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는지, 카딘은 부쩍 담배를 태우는 일이 늘었다. 그렇다고 한들 일이 바쁘면 그럴 시간조차 없다는게 불행중 다행이었다.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바쁜 나날은 오히려 괜찮았다. 일을 하고 지친 몸을 쉬게하는 것에 집중하면 되니까. 허나,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면 여지없이 의문을 찾게 된다. 그 생각 끝의 언저리는 여전히 의문형이다.
“…뭘하고 있담.”
멍하니 중얼거리며 카딘은 담배를 비벼 껐다. 작은 재떨이에 꽁초를 담아 안으로 들어가며 얇은 가디건을 고쳐 입는다. 침실을 빠져나와 1층으로 내려 가며 카딘은 차근차근 할 일을 생각했다. 청소랑 짐 정리, 식료품 채워넣기. 굉장히 일상적인 것들로 이뤄졌지만 그래서 어딘가 낯선 느낌의 일들. 하나씩 손가락으로 꼽고 있자니, 예민한 귀가 쫑긋 선다.
“?”
문 밖에서 누군가가 서성이는 감각.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시간은 일렀고, 심지어 이 곳을 알고 있는 사람조차도 소수였다. 문 밖의 기척은 어쩐지 여러번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 이런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는데.
카딘은 그대로 문가로 슬쩍 몸을 옮겼다. 블라인드에 올려둔 손을 내리고 숨을 죽인 채, 발소리를 낮춘다. 걸음이 문가에 멈출 때면 똑똑, 정갈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카딘의 청각이 절로 예민해지면 바깥의 소음에 집중한다.
“소장님, 율리안입니다.”
예상했던대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고리를 돌리며 이번에야말로 저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길 카딘 녹스는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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