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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To.UR

창고 by 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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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사바의 아침은 유독 추웠다. 새삼스레 체감한 온도에 카딘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어느새 흐트러진 머리칼을 길게 늘어 뜨린채, 유독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린다. 틈새로 들어오는 희뿌연 빛이 아직 동이 트기 전임을 암시한다. 옆자리에 있는 이의 체온에 느슨한 숨을 내쉬며 가만히 상대의 낯을 살핀다. 일찌감치 움직이기 시작한 이들의 기척을 느낄 새도 없었다. 

불면증이라 했던가? 칼같이 시간만 되면 잠이 드는 저와는 달리, 어제의 상대는 밤이 되어도 유독 잠에 들기 어려워했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또한 그의 의지임을 알기에 카딘은 구태여 말을 얹지 않았다. 따지자면 저 또한 잠에 깊이 잠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눈만 감고 있을지도.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카딘은 멍한 와중에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제 몸에 덮인 얇은 담요를 끌어당긴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정리며 시중이며 다 들었을 상대를 생각하니 조금은 어이가 없다.

정신줄이 나간 건 비단 저 혼자만이 아닐텐데. 근육이 붙은 몸을 눈으로 훑으며 상처가 가득한 몸을 다시 본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 된 상처가 많이 보인다. 그 동안 이렇게 살펴본적이 없던가? 본부대에서의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카딘 녹스. 그 혼자만 지냈던 세월은 꽤나 길었으며 그-, 율리안 레온하르트와 함께한 시간은 적었다. 되려 그 시간이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체감상의 시간은 더 적었다. 

늦은 밤, 율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과 문장들을 기억한다. 율리안이 조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상황과 흘러나왔던 고해의 말들을 모조리. 괜찮다며 달래고 잊겠다고 다짐했으나, 카딘 녹스는 아마 평생에 걸쳐 그 날의 일을 기억할 것이었다.

“…진짜 자고 있긴 한가?”

미동도 없는 율리안을 보며 카딘이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제 코 끝을 문지르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유심히도 율리안의 얼굴을 살핀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그의 얼굴을 관찰하겠냐는 듯이. 고른 숨소리와 잠잠한 워치는 현재의 상황이 꽤 안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율리안과 처음 재회했던 날의 일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이 평온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심 율리안에게 서운했던 부분을 내비치고 나니, 그 후에 차오르는 수치심은 덤이였다. 어느 누가 부관이 부서를 옮겼다고 꽁해서 그걸 마음에 담고 있는지. 서늘한 아침 기온에 카딘이 널부러진 옷가지를 꿰어입었다.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은 멍한 상태로 막사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느슨한 입매를 매만진다.

“……처음에 어땠더라.”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도 많아진다고. 제 꼴이 딱 그 꼴이었다. 본부대에 출퇴근할 때야 업무량이라도 많았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안 했다지만 일이 터지고 나니 남는 건 시간이고 할 것은 생각 뿐이었다. 문득 눈 앞에 상대를 두고 있자니,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른 목을 축이며 무릎을 끌어안은 카딘이 고민하다가 재차 침상에 털썩, 몸을 뉘인다. 주홍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연신 데록데록 굴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부관이 새로 온다고? 이제 막 적응했는데 또 바뀌는 거야?”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조금 급하게 발령 받은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괜찮으시겠죠.”

녹스 소장님이라면. 웃음기 섞인 말로 덧붙인 말에 카딘의 눈동자가 느리게 굴렀다. 적응만 할라치면 바뀌어대는 제 직속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누구든 그럴 것이 자명했다. 손발이 조금이라도 맞겠다, 싶으면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거나 혹은 본인이 원해서 부서이동을 신청한다.

군대라는 계급에 갇혀있긴 하나, 본부대는 사실상 회사의 체계에 조금 더 가까웠다. 말인즉, 조금이라도 높은 곳을 향하려면 보다 튼튼한 동앗줄이 필요한 곳이었다. 카딘 녹스 소장에 사실상 그에 걸맞은 인재가 아니었다. 인사과, 그것도 꽤 젊은 나이에 소장직을 달고 있으면서 출세욕이란게 거의 없는 편이니. 야망이 있고 조금이라도 출세욕이 있는 젊은 군인들은 오히려 죄다 회피하기 바빴다.

“…누군데? 이력서 정도는 있을 거 아냐.”

“율리안 레온하르트 대령님입니다. 소장님이랑 동기던데요?”

이제 곧 헤어질 부관이 내미는 서류에는 짤막한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탐사대 출신이고, 조사의 이력이 있으며 그가 분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사실상 표면적으로 적히는 것들이 인사과에 도달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카딘은 인사과에 들어오는 서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취급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응, 기억나. 굉장히 얌전했던 친구였는데.”

이제는 까마득한 기억의 일이기도 했다. 졸업을하고 임관을 하며 나름대로 바쁘게 지내온 10년 가량의 세월은 사람의 인식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서류를 검토하며 평온한 어조로 대답하자, 부관의 고개가 절로 기울어진다. 그런 이미지인가? 하는 표정이 낯에 떠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카딘은 이력서를 다시 부관에게 돌려주며 펜을 놀렸다. 잠시간 사각거리는 펜소리만이 집무실에 들렸다.

탁. 책상 위에 펜을 놓으며 카딘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제 앞에 여전히 서 있는 부관의 얼굴을 보며 다소 얄밉다는 듯 눈을 흘겼다.

“언제부터 레온하르트 대령이 오는거지?”

“조금 있다가 인사하러 방문하시고, 내일부터 정식 출근 하실 예정입니다.”

“그래. 아쉽네. 이제 좀 익숙해지나, 싶더니.”

“그 동안은 감사했습니다. 배워가는 것도 많고요.”

말이나 못하면. 카딘은 나직하게 중얼이며 얼른 나가보라는 양 손을 내저었다. 깍듯하게 인사를 마친 부관이 집무실을 나가자, 그제야 카딘이 긴장된 숨을 토해냈다. 몇 개월 단위로 바뀌는 부관이 불편했으나, 그런 이야기를 할 위치가 아님을 알고 있다. 이번에는 몇 개월이나 가려나. 카딘은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책상 위에 놓인 초콜릿을 하나 까 넣고 입 안에서 느리게 굴렸다. 가득 차 있던 통이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것에 약한 아쉬움을 내비친다.

똑똑.

잡념이 지나간 자리에 파고든 소리에 카딘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문 밖에 서 있는 인영을 확인하고, 제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대충이나마 걸쳐뒀던 겉옷을 어깨로 끌어올려 걸친 뒤, 목소리를 낸다. 들어오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고리가 돌아가며 비슷한 눈 높이의 사내가 들어왔다.

어릴 때의 얼굴이 남아있나? 카딘은 문득 그거부터 떠올리며 그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찰나의 시간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공허함이 떠있는 그의 표정이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내일부터 소장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율리안 레온하르트입니다.”

말을 맺기 무섭게 허리를 숙이는 율리안을 보며 카딘이 묘하게 복잡한 심정으로 제 입술을 매만졌다. 원래 저런 인상이던가.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카딘 녹스가 기억하는 율리안 레온하르트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기에, 더더욱. 카딘은 망설이다가 그의 앞에 선뜻 손부터 내밀었다.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율리안은 재촉하듯이 손을 살랑, 흔드는 모양새에 어쩐지 마뜩찮은 기색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해, 레온하르트. 나는 뭐…, 그냥 일만 오래 같이 해주면 바랄게 없겠네.”

느슨한 어조로 말하는 카딘의 말투에 율리안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무슨 저런 소릴 다 하느냐는 얼굴에 카딘이 느슨하게 웃으며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어쩐지 어색한 감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여년 전에 봤던 율리안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카딘의 기억과는 많이 달랐다.

체격이 커졌고 키가 엄청 자랐으며, 늘상 끼고 다니던 안경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때도 얌전해 보이는 성격이긴 했는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손을 흔들고 있는 카딘의 손이 누군가에 의해 뚝 멎었다. 저와는 달리 다소 강한 악력에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민망한 표정으로 손을 슬쩍 빼낸다.

“…반가워서. 불쾌했어?”

가이드와의 접촉을 싫어하는 센티넬은 드물다. 허나,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편은 아니었다. 카딘은 염려가 담긴 표정으로 율리안의 낯을 습관처럼 살피며 되물었다. 무뚝뚝한 얼굴에는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좋고, 싫음의 강도는 물론이고 불쾌함과 반가움, 그 어떤 영역의 기분이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사람이 아닌 것을 보는 기분.

카딘은 떠오른 문장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 저었다. 괜찮습니다. 낮게 말하는 음색조차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있으라고 해서 여기에 서 있는 것과도 같다는 강한 생각.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문득, 카딘 녹스는 율리안 레온하르트의 지난 시간이 궁금해졌다. 

조사를 받았다, 혐의가 없었다. 그러므로 본부대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 짧은 문장이 아닌 율리안의 입으로 들을 수만 있다면 꼭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 시간은 알 거 같고. 와서 내 업무를 도와주는 일이고, 특별히 어려운 건 없을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짧은 인사말과 함께 율리안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딘은 그제야 제 워치가 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요 근래들어 이게 울린 적은 없는데. 가끔씩, 그러니까 아주 때때로 울리던 이 워치는 본부대에서는 꽤 잠잠했다. 그렇다고 가이딩 업무가 아예 삭제 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응급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허.”

확인을 해볼걸 그랬나? 자연스레 떠오르는 율리안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침착하고 차분했으며, 이 정도의 오염도따윈 대수롭지 않다는 낯이었다. 보통은 이 정도도 견디기 힘들텐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어쩐지 카딘의 직감이 조심히 접근해야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이런 직감이 틀린적은 없기에, 카딘은 그 직감을 믿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이면 조금씩 알게 되겠지. 이번에는 몇 개월이나 있으주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제 자리에 앉아,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소장님. 거기 서류에 오타 났습니다.”

“어? 진짜네. 고마워. 이걸 왜 못 봤지?”

율리안과의 업무는 생각보다 순탄했다. 오히려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카딘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렇게 의존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늘 율리안이 옆에 있으면 평소에 하지않던 실수도 종종, 하곤 했으니까. 사각거리는 펜을 놀리다가 문득 책상에 앉아 있는 율리안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본격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한 시선을, 율리안은 당연하게도 오해했다.

“무슨…시키실 일이라도..”

“……그게 아니고, 내가 요즘 율리안을 너무 의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장님을 옆에서 도우는게 제 일이 아닙니까?”

“맞긴한데….”

지금까지 스쳐지나간 부관들을 떠올리면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단순히 동기이기 때문에? 글쎄. 그조차도 잘 모르겠단 판단 하에 카딘은 정의를 보류하고 있었다. 그럼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재차 묻는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카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부정한다.

“아니, 이러다 바보 멍청이가 되겠어.”

카딘은 평온한 어조로 말하며 불쑥 율리안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널뛰는 율리안의 오염도를 보고 카딘이 결정한 방법이었다. 익숙하다는 듯 손을 쥐고 위 아래로 흔드는 모습에 카딘의 입꼬리가 절로 들썩였다. 물론 이것과 별개로 당최 뭘 하고 다니는지, 율리안의 오염도가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지만. 그나마 이 정도는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손을 흔들며 짧은 상념에 잠긴 카딘을 현실로 끌어낸 건, 율리안이었다.

“소장님-, 오늘 결재해야하는 서류가 산더미입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으십니다.”

“어차피 지금 바쁜 건 일단 다 끝났잖아…….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

“그럼, 5분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율리안이 부관으로 온 지 반 년. 그 반 년동안 카딘은 꽤 편안한 업무환경을 갖춰나갔다. 다만, 제 부관의 오염도가 요동치는 것만 제외한다면. 발령을 받고 며칠 간, 관찰한 결과 율리안은 가이딩에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다. 카딘 녹스는 생애를 통틀어 가이딩에 그렇게 관심없는 센티넬은 처음봤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의 상태에 무관심했기에 카딘이 되려 그의 상태를 체크해주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럼, 쉬는 김에 잠깐 묻겠습니다.”

응? 소파에 반쯤 널부러진 빨래처럼 늘어져 있던 카딘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율리안이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고, 심지어 제 쪽에서 먼저 꺼내는 것도 드물었다.

카딘은 어쩐지 상관을 대하는 기분으로 자세를 고쳐잡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어딘가 긴장한 카딘의 모습에 율리안이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당최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담아서. 왜, 뭐. 어쩌라고.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명백히 반항과 도발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맞받아친다. 이럴 때면 율리안보다 카딘 본인이 어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까지 허용이 되십니까?”

주어가 쏙 빠진 질문에 카딘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입술 새로 어, 하고 얼빠진 탄식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율리안이 재차 입을 열었다.

“가이딩 말입니다. 몇 개월 째 계속 몰래 몰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눈치 챘어?”

“매일같이 악수하자는 상관이 어디 있습니까, 소장님.”

“그럴수도 있지. 매일같이 반가우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워섬기며 카딘이 민망한지,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잠시간 침묵하며 느리게 눈동자를 굴리던 카딘이 짧게 침음성을 내뱉는다. 망설임과 민망함이 동시에 온 탓이었다. 율리안은 짧은 침묵을 고수하는 카딘을 빤하게 쳐다보았다. 어쩐지 뚫릴 것만 같은 시선에 그의 입꼬리에 어색한 웃음이 걸린다.

뭐라고 대답해야 알기 쉬울까. 그런 생각은 찰나였다. 어차피 저는 가이드였고 눈 앞에 상대는 센티넬이었다. 그것도 관리를 거의 하지 않는. 구태여 한계선을 정해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상관없어. 율리안, 네가 필요한 부분까지는.”

느슨한 어조로 중얼이며 카딘의 시선이 비스듬하게 허공을 가른다. 그 스스로가 정한 규칙이지만 어쩐지 누군가에게 명확하게 짚어준 것은 새삼 처음이라는 생각에. 카딘의 말이 어떤 방향으로 해석 되든 율리안, 그라면 카딘에게 큰 해를 입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시간이 쌓였고 신뢰가 쌓였으며, 종내에는 많은 것을 율리안에게 맡기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단단하게 쌓인 신뢰의 위에 얹어진 말의 무게는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것은 카딘 녹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로 신뢰를 하고 있었나. 막연한 생각이 확신이 되어 다가온 순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

“...왜? 이거 아니야? 아니면 다른 대답을 해야하나.”

맹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문장에 율리안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었다. 세상 천치를 보는 듯한 그런. 기민하게 그의 시선을 눈치 챈 카딘이 가볍게 눈을 흘긴다. 벌떡, 소파에서 일어나며 제 책상에 도로 앉으며 괜히 펜을 들어 책상을 탁탁, 두드린다.

“눈으로 그만 욕하고 일 해, 일.”

“…제가 언제….”

“방금, 눈으로. 내가 느꼈어.”

새침하게 대답하며 일부러 종이서류 한 뭉치를 꺼내 제 옆에 두기도 한다. 어린애같은 반응에 율리안은 결국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포스트잇이 한 가득 붙은 서류를 보며 카딘이 미간을 구겼다. 그의 부관인 율리안의 짓이라는 것을 카딘은 명백히 알고 있었다.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포스트잇에 적어서 말하는 것이 편하다며 그가 내린 절충안이었다.

그 안에는 업무에 관한 것은 물론 카딘의 사생활 부분도 포함이었다. 그렇게까지 개판으로 하고 살진 않았는데. 그런 상념도 잠시였다. 불편하다며 거절했던 사생활 돌보미의 영역은 어느새 그의 손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이마저도 다른 상관이 부르면 저는 뒷전이긴 했지만.

때때로 율리안의 손길을 받으며 아침을 준비할 때는 옛날 귀족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은 생각도 더러 들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양심이 조금 깎여 나가는 것은 덤이었다. 카딘은 한 가운데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점심, 먹었어. 아까 율리안이 자리 비웠을 때.”

요 근래 율리안은 조금 바빴다. 소장인 저보다도 바쁜게 말이 되나? 싶지만….말이 된다는게 가장 큰 흠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일처리 능력이 알음알음 소문 나면서부터 율리안은 여기저기 불려다니기 시작했다.

때 늦은 오후에야 돌아온 율리안은 포스트잇을 죄다 정리하고 서류까지 말끔하게 서명해둔 것을 보고 은근한 압박을 보내왔다. 정확히는 눈으로 말했다는 쪽이 조금 더 맞을지도 모른다.

“……무슨 바람이라도?”

미적미적 일 자체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처리하는 스타일의 카딘이다. 발령 초기에 율리안은 그런 그의 행태를 보고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에도 용케 일이 굴러갔다며 속으로 그런 생각까지 했더랬다.

율리안의 직설적인 질문에 카딘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저렇게 직설적이야? 하는 생각과 내가 그렇게 게을렀나? 하는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탓이었다. 반쯤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던 카딘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유능한 부관이 자리를 비우시니, 어쩌겠어? 내가 다 해야지.”

농담처럼 약한 투덜거림은 덤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묶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것을 보며 율리안이 등 뒤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그에게 머리를 내맡기고 피로감에 카딘이 눈을 살짝 내리 감는다. 잠시간 집무실 안에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간지러운 소음이 가득했다.

그 소음을 느슨하게 귀로 흘려내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카딘이 문득 떠오른 듯 율리안에게 툭, 질문했다.

“주변에서 스카웃해가고 싶어서 난리던데…, 율리안은 어때?”

“……무슨 말씀이신지.”

“이동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어?”

“….”

예상치 못한 침묵에 카딘의 고개가 절로 움직였다. 아직 안 묶었습니다. 율리안의 만류에 의해 금세 고개가 다시 돌아가며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카딘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며 몸마저도 들썩거렸다. 그런 동요를 눈치챈건지, 율리안이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꾹, 주물렀다.

“고민 중입니다. 감찰과장님이 권유해주신게 있어서.”

“………. 감찰과로 가게?”

“예. 거의 확정이긴 합니다.”

말을 맺으며 율리안이 어깨에 올려둔 손을 떼어냈다. 그제야 자유의 몸이 된 카딘이 몸을 틀어내며 율리안의 얼굴을 올려본다. 당황함이 낯에 드러난 것은 아주 약간의 찰나였다. 체념은 어렵지 않았다. 그 기간이 조금 길어서 착각하고 있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을 뿐. 그래. 나직하게 흘러나온 것은 승낙의 언어였다.

“어쩔 수 없지, 뭐. 1년….”

아주 조금은, 아니다. 사실은 지나치게 아쉬웠다. 허나 이 감정을 내비치면 율리안의 발목을 붙들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때문에 카딘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여 표정을 갈무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율리안은 가만히 카딘을 빤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저가 모시는 상사의 심기가 불편한지 않은지, 헤아리는 눈빛이었다.

“내가 지겨워진 거야?”

농담처럼 카딘이 한결 가벼운 어조로 물어본다. 전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어쩐지 불쑥 심술이 솟아올랐다. 그만큼 내 곁이 어렵고 불편했나?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도 치솟았다. 카딘은 진짜로 하고 싶은 질문을 꽁꽁 싸매기로 했다. 후에 아주 시간이 지난 뒤에 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어쩐지 설움이 복받치는 기분이라고 하면 그는 믿을까? 카딘은 제 입꼬리를 꾹꾹 눌러 매만졌다. 검지로 미소를 덧그려내고 비스듬하게 틀었던 고개를 돌려 그제야 율리안을 시야에 담는다.





까무룩 들었던 잠이 다시 깨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야트막한 꿈 속에서 그 어느 날을 본 기억이었다. 카딘은 처음 눈을 뜰 때보다 한결 밝아진 막사 안을 둘러본다. 제 옆에서 잠들어 있던 커다란 몸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가만히 숨을 내쉰다. 대충 입었던 옷을 주워 섬기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그대로 나간 줄 알았던 율리안이 다시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율리안.”

“일어나셨습니까?”

응.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그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내며 다시금 재차 숨을 내쉰다. 한결 홀가분해 보이는 건가? 문득 그런 궁금증이 치솟는다. 발 끝으로 맨 바닥을 툭툭 차며, 카딘이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살짝 올린다. 복슬하게 감기는 머리칼을 쓸어대며 가벼운 장난을 쳐본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하던가.”

“네. 이제 이동해야 합니다. 일어나시죠. 식사도 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물흐르듯이 이어진 잔소리에 카딘이 작게 웃음을 짓는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몸을 일으킨다. 그 언젠가 떠오르는 대화가 다소 즐거운 까닭에 힘든 와중에도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 왜….”

“-그냥. 이 와중에도 즐거운 건 즐겁구나, 싶어서. 옛날 생각도 나고.”

옛날. 까마득하게 칭하긴 했으나, 사실상 얼마 되지 않은 몇 년 전의 이야기였다. 그냥, 그랬다고. 카딘은 말을 줄이며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레 곁에 붙어 서는 율리안을 흘끔 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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