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가물어가는 계절을 지새고 떨어진 열매가 있어

충돌

*Warning: 폭력/동물(포켓몬) 학대 묘사.

BGM


자정을 아주 약간 넘긴 시각, 거사를 앞둔 상황실의 분위기는 매 작전 때마다 늘 그랬듯 진중했다.

이 바깥에 있는 도시는 나른한 물안개를 끌어안고 차츰 완연한 잠에 빠져들 것이다.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쉼없이 움직이던 공장들도 가동이 모두 중단되어 온 도시에 평온함이 깃드는 시간대, 유일하게 깨어있는 곳은 상시로 배가 드나드는 모란만의 공업항 뿐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하나지방 곳곳에서 십 수명에 가까운 레인저들이 파견되었으며, 지역 경찰 측에서도 비슷한 숫자가 배치되었다. 범행을 저지하기 위해 뜻이 일치한 사람들끼리 맺은 일종의 동맹이라고 보아도 무관했지만, 국제경찰이 쥐고 있는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은 까닭에 지휘의 총책임은 이쪽이 가지고 있었다. 후배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모습을 보면 역시 저와 마찬가지 심정인 것 같아서, 은엽은 한숨을 내심 쉬고는 침잠하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무전기를 들었다.

“…레인저 리안, 상황은 어떻습니까?”

상황실 한쪽에서 태세를 정비하던 레인저들이 하나둘씩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서 딱딱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을 나선 레인저의 보고였다.

-적들이 항구의 두 군데에 산개되어 있어. 우선 3번 부둣가에 적재된 컨테이너 주변에 열다섯 명 정도. 다들 포켓몬을 하나씩 동반하고 있어. 다행히 컨테이너 위에는 감시 인원 같은 건 없네. 꽤 일찍부터 여기 와서 배를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경계심을 내세우는 게 짜릿하게 느껴져. 국제경찰 측에서 말한대로, 지방 곳곳에서 밀렵되어 온 포켓몬들이 저기에 갇혀있는 것 같아. 포켓몬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 진 모르겠어. 컨테이너가 잠겨있어서 안으로 진입하기 힘들어 보이는걸.

리안은 파동을 감지하는 능력과 일반인보다 월등한 시력을 십분 활용하여 항구 일대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는 상황실에서는 모란만 항구의 조감도를 도식화한 지도가 홀로그램의 형태로 허공에 구현되어 있었고, 후배가 리안의 보고를 들으며 지도 속 이미지들을 열심히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형사들과 레인저들이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을 하는 동안 리안의 동료 레인저인 시오레가 고개를 저어 보인다. 혹여나 리안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안까지 들어가는 건 아닐지 염려가 되는 얼굴빛을 본 은엽은 고갯짓으로 조용히 동의의 표시를 보여주며 응답했다.

"다른 곳은 어떤지 말씀해 주십시오."

-5번 부두의 컨테이너 단지. 이건... 음. 저쪽에 간부가 있는 것 같네. 거래 상대를 기다리기 따분한 모양이야. 근처에 경계 인원은 세 명. 역시 각자 포켓몬을 데리고 있다. 3번 부두에 비하면 무척 적네. 이건 내 의견인데, 그 간부가 고스트타입 전문가랬으니 고스트 포켓몬들을 보초로 세웠을 수 있어. 그러니 5번 부두에도 쉽게 접근하긴 힘들 거라고 봐.

은엽은 리안이 홀로 간부와 대면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무전기를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그 정도면 충분히 파악해 주셨습니다. 나머지는 작전에 돌입 후 살피면 될 것 같군요. 이만 귀환해 주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레인저 리안.”

-…알았어.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민간의 출입이 없어야 했기에, 리안의 보고가 끝난 직후 모란만시티의 형사들은 관할의 경찰들에게 항만의 입구를 봉쇄하라는 지시를 내려두었다. 상황실이 잠시 부산스러워진 사이 출입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통통 노크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알아들은 시오레가 부리나케 뛰어가 문을 열어주니, 재채기 소리와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이상하게 춥네. 기분 탓이라서 그런가….”

상황실 안을 두런대는 대화들 속에서 두리번거리던 리안의 시선이 이쪽을 잠깐 스쳤다. 은엽은 그의 눈길을 못본 체하며 작전 브리핑에 집중해달라는 의미의 화두를 꺼냈다.

“레인저 리안의 정찰을 토대로 작전 지도를 구체화했습니다. 전반적인 작전팀의 숫자는 저쪽에 대응해서 둘로 나누고, 혹시 무슨 사태가 벌어질 지 모르니 후방 지원을 해주실 백업 인원도 두 팀으로 둘까 합니다.”

조감도의 두 군데에 균일하게 흩어져 있는 붉은 점들이 미약하게 깜박거리는 동안, 홀로그램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한 레인저가 잠자코 손을 들어 올렸다.

“각 팀당 구성은 어떻게 될까요? 레인저들은 가급적 3번 부두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두 명의 레인저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그쪽을 맡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거기에 경찰 분들께서 추가로 들어가 조직원들을 제압해주시는 일을 맡고요. 경찰이 주를 이루어 조직원 검거에 힘을 쏟되, 조직원들에게 붙잡히거나 이용당하는 포켓몬들이 있을 터라 이를 커버해주실 분들이 필요합니다.”

질문을 던졌던 레인저는 잘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주의 인물의 정보를 묻는 형사의 질문이 뒤따랐고, 은엽은 자연스레 설명을 이었다. 홀로그램 지도 옆에 한 인물의 머그샷이 떠올랐다.

“이 자의 이름은 레베카, '탈리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포켓몬 밀렵 활동을 십년 가까이 벌여왔으며, 과거 플라스마단에도 밀렵한 포켓몬을 대거 팔아넘겨 수배 대상에 오른 범죄자입니다. 그간은 변장으로 외모를 바꾸면서 행적을 거의 남기지 않아 검거에 애를 먹었으나, 20번 도로의 시설에서 감식을 벌인 끝에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자는 '화중화'라는 불법업체의 실세로, 대리인을 앞에 내세우고 뒤에서 꾸준히 포켓몬 밀렵을 자행해온 자이기도 합니다.”

치안을 담당하는 직군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 모양인지, 머그샷 속의 얼굴을 알아보는 반응이 상황실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던가. 은엽은 감식반 요원들이 마시고 버린 에너지드링크 캔이 쓰레기통을 가득 채우고도 온 책상과 바닥을 굴러다니던 광경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노고를 쏟았던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본다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싶었다. 참여 인원들의 의욕은 충분히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내용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은엽은 그들이 다시 차분해지기를 기다린 후 말문을 열었다.

“작전에 들어가기 앞서 특별히 주의하셔야 할 사항을 전달드립니다. 이는 여러분의 안전과도 이어지는 내용인 만큼 귀담아 들어주시길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던 레인저들의 시선이 휙 되돌아왔다. 은엽은 ‘안전’이라는 단어가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통하는지 새삼스레 깨달으며 후배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후배가 은엽을 대신해 내놓은 안내사항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조직에서는 포켓몬의 밀매를 주업으로 삼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또 다른 분야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것은 바로 포켓몬 실험을 통해 어떤 기술을 개발한 것이었는데, 해당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장비가 '포켓몬 기술의 위력을 무효화하는 효과'를 지녔기 때문에 포켓몬의 기술에 의존해 제압을 시도하는 경우 이 장비를 착용한 적에게 반격을 당할 위험이 크다는 내용이었다.

후배는 금속제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 가운데서 그가 꺼내 든 물건은 다름 아닌 방호조끼였다.

“이것은 약 2년 전 미혹의 숲에서 어떤 포켓몬 헌터를 검거했을 때 압수한 장비로, 조직 측에서 그 헌터에게 시제품으로써 제공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조끼에도 그 기술이 입혀져 있는데, 여러분이 그 효과를 직접 확인하실 수 있도록 시연을 보여드릴게요.”

후배는 직접 방호조끼를 착용한 뒤 제 주변을 떠돌던 어둠대신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남겼다. 지시를 들은 어둠대신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주인을 향해 섀도볼을 발사했다. 여기저기서 숨막히는 듯한 소리가 터져나오는 사이, 그림자공이 후배의 몸을 묵직하게 강타한 직후 소멸했다. 후배는 움츠렸던 허리를 곧게 펴고 자신이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음을 어필했다.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흐르는 가운데서 어둠대신이 우는 얼굴을 하며 주인의 품속으로 냅다 뛰어든다. 은엽은 후배의 아이디어가 실현되는 과정을 흐릿하게 지켜보다가, 시연에 충격을 받은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마, 조직이 그렇게 많은 포켓몬들을 잡아들였던 이유가 그걸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었을까요? 2년 전의 장비가 그런 효과를 뚜렷하게 지니고 있을 정도라면… 이미 시중에 널리 풀리고도 남았을 텐데.”

모든 레인저들의 생각을 대변해 제시된 시오레의 질문이었다. 은엽은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의구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저것 하나를 만드는데 얼마의 목숨이 희생되었는가?’ 레인저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들끓기 시작한 것을 지켜본 후배는 고개를 애매모호하게 흔들었다.

“아직은 암시장에 대량으로 풀릴 만큼의 기술력은 확보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어요. 확실한 사항은, 오늘의 거래가 해당 조직의 앞날을 판가름하는 기로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직의 입장에서는 올인원이라는 거죠.”

후배는 딱 거기까지만 언급하고 어둠대신을 쓰다듬는 행동을 취했다. 어둠대신은 기어코 제 주인의 품에 엉겨 붙었다.

‘솔직히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닌데도 크게 한탕 벌일 수 있다는 욕심에 이따위 짓을 벌이는 꼴이잖아요. 이 작자들이 생명을 뭐로 보고 있는 건지 각이 딱 나오는데,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는 걸까요?’ 언젠가 후배가 분통을 터뜨리며 외쳤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사례들을 숱하게 겪어본 은엽으로서는 그저 조용히 그를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막기 위해 우리 같은 인간들이 있는 것이죠.’ 지극히도 단순하고도 단편적인 위로였지만, 분노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꺼내야 했던 말이었다. 이 작전에 모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배의 이런 분노를 똑같이 나눠 가지게 되었을 것이며,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이들도 많아졌을 것이다. 은엽은 힘이 바짝 들어간 후배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한편으로 유려하게 주제를 이어받았다.

“방금 니스 요원이 말한 바와 같이, 이번 일은 그들에게도 굉장히 중대한 사안일 겁니다. 따라서 이번 작전으로 그들의 숨통을 완전히 조일 수 있겠으나, 조직원들이 바짝 긴장한 상태임을 유념해서 만전을 기해주십시오.”  

작전 브리핑은 이쯤에서 마칠 수 있었다. '알려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알려주었던가? 추가적인 질문 사항이 있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 없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은엽은 애매한 기분으로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무언가를 뒤늦게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레인저 리안?”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스타일러를 점검하고 있던 리안이 오이를 발견한 나옹마처럼 펄쩍 뛰었다.

“깜짝이야, 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불렀는데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 걸까, 은엽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눈총을 머쓱하게 외면하며 그에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레인저 리안께서 저와 행동을 같이 해주실 것을 제안하려 합니다만. 적의 동태를 쉽게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으려면 당신의 힘이 필요하거든요.”

“…단도직입적이네. 알았어.”

리안은 시오레와 시선을 교환한 후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엽은 제 목소리와 표정이 사무적으로 비쳤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서 얼른 뒤돌아섰다. 후배가 다가와서 일반 방호조끼를 냉큼 건넸다.

“저는 3번 부두의 오른편에서 천천히 접근할 거고요, 형사님들이 좌측에서 들어가신대요. 선배님은 5번 부두 쪽으로 가실 건가요?”

“예… 어느 쪽이든 위험 부담이 커서, 전면전을 치러야 할 지도 모르겠더군요.”

비장하게 말하면서도 후배에게서 받아든 조끼를 상반신에 걸치고 장비들을 주머니 속에 챙겨넣는 손놀림은 빠르기만 했다. 이미 준비를 마친 후배는 긴장을 풀려는 듯이 배시시 웃는다.

“조심하라는 말씀이시죠? 저는 조심 빼면 시체니까 선배님이야말로 조심하시고요.”

그는 익살스러운 윙크를 남기고 자신이 속한 팀의 인원들이 모인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버린다. 은엽은 하릴없는 웃음을 짓고 나서 루카리오를 볼 바깥으로 불러냈다. 오늘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미리 귀띔을 받은 루카리오는 어수선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눌리는 일 없이 귀를 쫑긋거리며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대규모 작전은 이번이 두 번째네.”

은엽은 루카리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자그마한 한숨을 삼켰다. 제아무리 거사를 앞에 두고 각오를 다졌어도, 정작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은엽은 악몽 속 폭발이 남긴 잔상을 가만히 억누르며 소소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만에 하나 유사시 내 목숨은 내가 지킬 테니, 너는 내 걱정 말고 네 목숨을 지켜야 한다. 알았지, 소소리?”

어미의 정의감을 비롯한 모든 요소들을 빼닮은 그가 자기희생적인 성격만큼은 닮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파트너를 잃는 사고는 단 한 번 겪은 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은엽은 소소리와 자신을 동시에 다독이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번은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루카리오는 제 뺨을 쓰다듬는 주인의 손을 붙잡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은엽은 포켓몬들의 말뜻을 알아듣는 리안이 새삼스레 부러워져서, 자신의 곁에 리안이 다가왔을 땐 그가 루카리오의 마음을 해석해주러 왔나 하는 착각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슨 일이시죠?”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용건을 물으니, 리안이 손에 쥐고 있던 조끼를 불쑥 들어 올린다.

“이거 입는 것좀 도와줘. 우리 쪽 사람들 다 바빠서 날 도와줄 사람이 당신 밖에 없거든.”

“아, 예.”

은엽이 방호조끼 착용을 돕는 동안 소소리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있던 리안이 불쑥 말을 꺼냈다.

“레인저들끼리는 합을 많이 맞춰봤어도 경찰과 협동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은엽은 조끼의 허리 부분을 맞춰주는 데 집중을 쏟다 고개를 무심코 들었고,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는 연청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게 되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 지 몰라서 멍하니 바라보려니 상대방의 얼굴에 약한 웃음기가 떠오른다.

“…당신이 저번에 그랬었지, 발목 잡지 않겠다고. 그건 나도 매한가지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가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으로 싱거운 대답이었다. 은엽은 실망조 섞인 시선이 되돌아올 것을 각오하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어떤 까닭으로 머릿속이 텅 비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소소리의 꿀밤이 좋은 충격이 되어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소소리는 트레이너가 처해있는 상황을 완전히 모르는 척할 셈인 듯했다. 은엽의 불안한 예상과는 달리, 리안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며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내 탓으로 소중한 사람을 또 잃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내가 잘 할게.”

"예?”

어깨선을 고정하던 손길이 흠칫 떨렸지만 리안은 이를 알아채지 못한 듯이 고개를 앞으로 숙이기만 했다.

“잘 부탁한다는 말을 길게 풀어서 꺼낸 건데, 지금 말하기엔 좀 그런 내용이었으려나?”

그는 방호조끼의 착용이 잘 되었는지 몸을 움직여보고 그대로 돌아섰다. 또렷한 눈빛이 문득 두렵게 느껴져, 은엽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날 믿어줄 거지?”

그가 내뱉은 것은 여느 때와 비슷한, 일방적인 요구였다. 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데도, 은엽은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은엽은 몇 번이고 심란한 마음을 다잡은 뒤 비로소 답을 꺼냈다.

“그럼요, 레인저 리안.”

자신의 말이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였음을 그가 알아서는 안 됐다. 그래서 은엽은 시선을 피하는 대신 여상스러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는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 두기였다. 저 또한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덧붙이지는 못했다. 리안은 답을 듣자마자 자리를 떠버렸고, 은엽은 루카리오를 곁에 둔 채로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3분이 될까말까한 시간 내로 순식간에 지나간 대화였지만 1분이 10분으로 늘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은엽은 상황실의 벽에 기대서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며 자괴감을 곱씹기 시작했다. 루카리오가 푹 내쉬는 한숨이 유독 크게 들려온다. 은엽은 그 소리가 귓가에 덜컥 걸리는 것을 느끼며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가 일어난 것만 제외하면 은엽의 팀은 작전을 무난히 수행 중이었다. 작전 파트너의 감정에 좋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사소함이라고 칭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은엽은 그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동행하는 레인저도 마찬가지 심정일 텐데, 저보다 앞서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보니 여전히 짜증에 물들어있는 것 같았다. 굳이 따져본다면 말싸움 탓에 리안의 감정이 상해버렸기 때문인데, 이러다 작전에 지장이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반,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회한이 반씩 섞인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중간에 끼어 있는 파트너 포켓몬들이 곤혹스러운 시선을 주고받는 동안 은엽은 리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시기적절한 말을 건넬 기회를 한참 모색하고 있었다.

컨테이너들이 적재된 구역에서 팀이 둘로 갈라지고 은엽과 리안이 오른쪽 통로부터 돌파하기로 한 이후에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통로의 반대편에서 조직원 한명이 접근해오기 직전, 리안이 ‘나한테 맡겨’라는 말과 함께 나서서는 정면으로 적을 붙들고 생전 처음 보는 체술로 기절시켜 버린 것이다. 그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은엽이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리안은 적의 리그레를 빠르게 제압해 낸 조로아크에게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은엽은 주변 풍경으로부터 투명한 막이 한꺼풀 벗겨지는 감각을 느낀 뒤에야 리안이 일루전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나섰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리안의 ‘우리 어땠어?’라고 묻는 듯한 눈을 보며 찰나의 고민을 거친 뒤, 미소를 짓는 얼굴에 대고 우려를 표하는 문장을 꺼내 들고 말았다.

“…깔끔하게 제압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조금 무모하셨어요. 레인저 리안께서는 일루전에 상당히 의존하시는 것 같군요.”

그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시는 걸 봤을 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변명을 해보자면 은엽은 그때까지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에 짓눌려 있는 상태였고, 따라서 그는 원칙적으로 그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실에서 니스 요원이 알렸던 주의사항이 있었죠. 이들이 지니고 있는 장비는 포켓몬의 특성마저 무효로 할 가능성도 없잖아 있음을 상정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레인저 리안이 위험해질 수 있는 행동이었어요.”

“내가 아인스의 일루전을 자주 써먹는 건 맞긴 맞는데, 속전속결로 가려면 어차피 이 방법밖에 없는걸? 게다가 내 나름대로 조심성을 챙긴 건데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없잖아.”

‘내 말이 틀렸어?’라고 묻는 그에게 약간의 답답한 감정을 느낀 은엽은 기어코 단호한 음성을 내버렸다.

“저는 그저 레인저 리안께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런 대규모 작전에서는 미세한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주셔야 해요.”

주인들 사이에서 뜬금없이 일어난 말다툼을 어디쯤에서 말려야 할지 몰라 숨 가쁘게 지켜보던 조로아크와 루카리오는 은엽의 말을 듣고 거의 동시에 콧잔등을 짚었다. 은엽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숨을 삼켰다.

“날 믿지 않는구나.”

리안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엽이 아차 싶어서 뭐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은엽을 제치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지나간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보통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어긋난 상태로 누군가를 적대해야 하는 상황이 다시 발생한다면 작전 파트너 사이의 호흡이 맞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질 수 있었다.

…제대로 큰일 났군. 말을 붙일 기회를 찾지 못해서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는 상상을 하는 사이에, 제 앞을 꿋꿋한 태도로 걸어가고 있던 리안이 갑자기 우두커니 멈춰 섰다. 은엽은 그와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멍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레인저 리안?”

리안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은엽의 팔을 붙잡고 컨테이너벽으로 끌어당겼다. 그 예측불허한 행동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는 거세게 움켜쥐었던 은엽의 팔을 놓아준 후 맞은편의 통로를 눈짓했다.

“내가 행동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약속하면 날 믿을 거야?”

은엽이 미처 목소리를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잠자코 끄덕이기만 하니, 리안은 작게 숨을 뱉고는 곧바로 은엽을 좁은 틈새로 밀어 넣었다.

“오고 있어. 인간 둘, 포켓몬 둘.”

그러고 보니 루카리오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평소 땐 잘만 알아챘던 것도 못 알아보고 있었다니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은엽은 리안이 조로아크를 데리고 반대편의 좁은 길에 숨어드는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다가, 두런두런 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쯤 루카리오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리안이 일렀던 대로, 조직원 두 명이 각자 럭시오와 악비르를 데리고 통로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문득 건너편에서 리안이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워 보이는 제스쳐를 취했으며, 은엽은 조직원들이 볼멘소리로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아휴, 초과근무를 시킬 거면 돈이라도 더 주든가. 몬스터볼 없이 포켓몬 하나씩 내주고 생색만 내네. 얘네 그냥 튀면 어쩌냐.”

“알 게 뭐람. 우리 월급 줄 돈은 남아있는지 모르겠는데? 여기도 슬슬 망조 드는데 우리도 이대로 입 싹 씻고 튀는 건 어때.”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돈 없대?”

두 사람은 걷다 말고 길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던 럭시오와 악비르가 허둥거리며 멈춰서자 조직원 하나가 짜증을 냈다. 그 동료는 주변을 살피는 시늉을 했지만 근처의 컨테이너 틈샛길에 숨어있는 적들까지는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이거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경영팀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찔러준 얘긴데, 밀매 루트가 쭉 새어나가는 바람에 막대한 손해가 났대. 게다가 저번 달에는 보관소가 털려서 여러모로 쪼들리게 된 모양이더라고. 요모조모 새어나간 금액도 꽤 되는 모양인데….”

말을 꺼낸 조직원은 비밀 중의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목소리를 확 줄였지만, 사방이 컨테이너로 막힌 덕분에 소리가 흩어지지 않아서 은엽은 어렵지 않게 나머지 이야기까지 엿들을 수 있었다.

“오늘 거래를 위해 조직 자금을 전부 쏟았다나 봐. 저쪽 부두에 있는 컨테이너 크기 봤어? 거기 들어있는 포켓몬들 숫자가 적어도 백 이상은 넘길걸. 거래 파토나면 저것들을 또 우리가 돌봐야 한다는 소리가 되는데, 아무래도 도망칠 각이 세게 서지 않나 싶은데.”

“…도망치면 찾아내서 끝장 낼 거란 소리를 방금 듣고 왔잖아…. 오늘 간부 처음 봤는데 저렇게 살떨리는 인간인 줄은 몰랐다고.”

“전 직원 다 합쳐서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간부가 직접 나온 걸 보면 참 급해졌나 본데. 지금까지 뭉그적거릴 게 아니라 진작 도망쳤어야 했다.”

조직원들은 누가 들을세라 동시에 입을 닫아버렸다. 대화에서 소외된 럭시오와 악비르는 인간들의 눈치를 보며 슬슬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리안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은엽과 시선을 마주쳤다. 은엽은 그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신호하면 눈을 감았다가 3초 후에 안경을 맡아. 나는 모자를 맡을게.’

고개를 내려보니 소소리는 이미 눈을 감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동을 다루는 이들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리안은 스타일러를 쥐고 럭시오를 쳐다보며 펼쳐 든 손가락 세 개를 하나씩 접었다. 잠시 망설이던 은엽은 그를 믿기로 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레인저의 스타일러에서 발사된 라인이 맑은 소리를 냄과 동시에 럭시오의 낮게 으르렁거리는 울음이 이어졌고, 그다음 순간에 터져 나온 빛이 닫힌 눈꺼풀 사이를 파고들었다. 은엽이 눈을 다시 떴을 때도 럭시오가 터뜨린 빛의 잔상이 남아있을 정도였으며, 그 빛을 정통으로 받아들인 조직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 쥐며 한창 휘청거리고 있었다. 악비르는 진작에 땅굴을 파고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은엽은 어렵지 않게 바로 근처에 있는 조직원을 붙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으악, 뭐야!”

"네, 당신은 체포되었습니다.”

은엽이 친절하게 안경 쓴 조직원을 제압하고 있는 동안, 리안은 자신이 맡은 조직원을 진작에 제압해 두고 럭시오와 정답게 주먹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 표정이 조직원들이 뱉는 욕지거리를 듣고 심기가 불편해진 듯했는데, 리안은 그것들을 일일이 받아치는 대신 부리나케 달려온 형사들이 조직원들을 연행해갈 때까지 차분하게 참아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에야 리안은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괜찮으십니까?”

은엽이 걱정을 담아 묻자 그는 아직 멀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아무 문제 없어. 계속 가자.”

리안은 곁을 스쳐 지나가며 은엽의 팔을 툭 건드렸고, 그가 럭시오에게서 전달받았을 정전기가 은엽의 팔을 타고 짜릿하게 올랐다. 은엽은 무심결에 팔을 주무르며 그 뒤를 따랐다.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를 믿겠다고 약속한 게 있어서 무엇을 입에 올려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경계를 서는 인원이 3번 부두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적다고 했었는데.' 은엽은 럭시오가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리안이 보고했던 내용을 곱씹었다. 간부가 고스트타입 포켓몬을 보초로 내세웠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를테면, 그림자라든지.

"리안 씨!"

"숙여!"

서로를 향한 외침이 겹치는 순간, 은엽은 루카리오의 힘에 떠밀려 바닥에 함께 나동그라졌다. 자신의 머리가 있었던 위치를 시커먼 손톱이 휩쓸고 지나치는 광경을 목도한 은엽은 즉각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은엽은 황급히 몸을 굴려 따라큐의 공격 범위를 벗어서면서 리안의 안위를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보였으나, 이번에는 따라큐가 리안을 향해 똑바로 달려들고 있었다. 다급히 일어서려는 은엽을 루카리오가 순간 제지했다.

"소소리, 왜?"

은엽이 당혹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지만 파트너는 고집스레 그의 팔을 잡아당기기만 했다. '진정해.' 붙잡힌 팔을 억지로 빼내려는 은엽의 머릿속으로 실낱같은 목소리가 스쳤다. 주인이 무심결에 우뚝 멈춘 것을 확인한 루카리오는 그제야 손을 놓으며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를 눈짓했다. 이에 은엽이 그곳을 바라보면, 일루전의 틈새로 기습을 가하며 따라큐의 탈을 찢어내는 조로아크의 모습과 스타일러 대신 로프를 휘두르는 레인저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훌륭한 콤비를 이루어 능수능란하게 따라큐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으며, 그 장면을 본 은엽은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알지 못할 위험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못해 냉정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레인저 리안의 실력은 은엽이 상상했던 바를 가볍게 초월했으므로 웬만해서는 그를 걱정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

언제나 한발 앞서서 감당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은엽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은엽 자신부터가 그러했으며, 그 행동이 외로운 싸움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숱한 싸움을 거쳐 온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인걸까.' 은엽은 씁쓸한 생각을 흘리며 루카리오의 도움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인저가 던진 로프가 이제 막 탈포켓몬의 몸체를 칭칭 휘감는 순간이었다.

따라큐의 꼬리 끝에서 튀어나온 연보랏빛 구슬이 반짝 빛을 내는가 싶더니, 소규모로 터져나온 연막이 삽시간에 시야를 가렸다. 강제로 차단된 시각에 당황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은엽의 손을 붙잡아 연막 바깥으로 끌어내며 으르렁댔다.

"그 녀석, 연막탄을 지니고 있었어. 주인이나 포켓몬이나 영리하네. 당신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약간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를 본 은엽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일전에 발각당하던 날 연막탄을 이용해서 탈출을 시도했었습니다. 그걸 배운 모양이군요."

리안은 은엽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따로 없는지 확인한 것인데, 은엽은 정작 리안의 안위를 지켜보느라 이를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리안은 조로아크의 갈기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조그맣게 혀를 찼다.

"도망간 따라큐가 곧바로 주인에게 달려갔다면 곤란한걸. 명색이 악의 파동사인데 고스트타입 상대로 애를 먹다니."

루카리오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침착을 되찾은 은엽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의견을 냈다.

"기습은 물건너간 상황이니 이대로 정면돌파를 하죠. 어차피 그자는 어디론가로 도망갈 위인이 아니니까요."

은엽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리안에게 나직이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당신께 맞추겠습니다. 그러니 혼자 싸우지 마시고 저와 함께 싸워 주시죠. 제 청을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레인저 리안?"

물빛 눈망울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지금껏 가라앉아서 찾아볼 수 없었던 환한 미소가 리안의 얼굴에 빠르게 번졌다. '저렇게까지 기뻐할 일인가.' 은엽은 숨이 훅 멎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를 향해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상처투성이 작은 손이 그 손을 덥썩 붙잡는다.

"응. 물론이야. 얼른 가자."

파트너 포켓몬들이 저마다 훈훈한 표정을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은엽은 가슴이 이상스럽게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레인저의 뒤를 따랐다.

임무 중에 느끼기에는 곤란한 감정이다.


타깃을 추적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리안이 '바로 근처에서 적나라한 악의가 느껴진다'고 알렸고, 그들이 표적을 좇아 조심스레 접근한 지점은 여러 개의 컨테이너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간이었다. 은밀한 거래를 벌이기에 딱 알맞은 장소에서는 이미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흔적이 선명했다. 그들은 조로아크의 일루전이 마련해주는 베일에 몸을 숨긴 채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간부는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서 히스테릭한 울화를 터뜨리고 있었다. 붙잡힌 상대는 차림을 보아 거래처 인물인 것 같았고, 그 주변의 바닥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이들 위로 팬텀이 부유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은엽은 자신의 곁에서 숨을 틀어막는 리안을 흠칫하며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리안은 약간 헬쓱한 얼굴로 소리없이 말했다.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은엽은 그가 조로아크에게 몸을 기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정신 안 차려? 당신이 바라는 대로 만들어 줬는데 왜 받아먹지를 못해? 조무래기들이 만들었다고 시제품만 못하면 어쩌자는 건데! 연구부 놈들부터 붙잡아야 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몰라, 내 탓 아니라고! 이건 다 그 자식 탓이야. 냉큼 일어나서 당신 입으로 멀쩡하다고 얼른 말해!"

정황상, 기술을 개발한 주체인 연구부가 통째로 잠적해 버려서 조직은 어느 시점부터 이렇다할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달리는 실력으로나마 간신히 만들어낸 장비조차 제대로 된 효과를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작전 회의 때 후배가 직접 시연했던 것과 비슷하게, 간부가 마지막 발악인마냥 거래처 상대에게 강제적으로든 반강제적으로든 불완전한 장비를 착용하도록 만들고 공격을 가했던 모양이다. 상대는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붙잡혀 숨막히는 소리를 냈다.

"수행원... 들을, 어떻게... ..."

'은엽, 저러다 저 사람마저 죽겠어.' 무언가를 감지한 리안이 다급하게 은엽의 팔을 끌어당겼다. 은엽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조로아크에게 일루전을 거두어달라 부탁했다. 베일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는 단계는 끝났고, 이제는 정말로 나서야 할 순간이었다. 일단은 저 위험한 팬텀부터 쓰러뜨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루카리오가 잇새로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린다. 은엽은 간부를 올곧게 쏘아보는 리안에게서 눈을 떼며 조용히 속삭였다.

"갑시다."

선수필승의 법칙을 따라 루카리오가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아갔다. 위력에 속도가 붙은 주먹이 탄환처럼 뻗어나가 무방비 상태의 적을 가격하자, 불시의 습격을 받은 그림자포켓몬은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뭐야?"

간부가 당황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 습격자를 인식했다. 한때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던 눈빛이 휘둥그레 크기를 키운다.

"당신, 역시 살아있었잖아! 대체 어떻게... ..."

독살스러운 외침을 내뱉으려던 간부가 돌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팔을 움켜쥐었다. 은엽은 느닷없이 풀려난 인질을 조로아크가 잽싸게 후송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간부의 팔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거세게 가격당한 듯 부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팬텀! 나자빠져 있지 말고 냉큼 일어나! 네가 그토록 먹고 싶어 안달하던 인간이 나타났으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간 안에 울려 퍼지자 사위가 한순간 서늘해졌다. 그로기 상태를 벗어난 팬텀이 쏜살처럼 날아와서 간부의 앞에 착지했다. 은엽은 일행이 가까운 곳에 있는지 확인하고 자세를 더욱 긴장시켰다. 도망갔던 따라큐는 곧바로 주인에게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간부에게는 팬텀만이 있었지만, 은엽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결코 낙관적으로 여길 수 없었다. 어쨌거나 간부는 고스트타입으로 상대방을 사냥하는 인물이었고, 궁지에 몰린 사냥꾼만큼 위험한 종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리안은 냉엄하게 그를 응시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사태를 파악하려던 간부는 곧 비스듬한 미소를 떠올린다.

"하, 차라리 잘 됐지... 오늘은 팬텀을 포식시켜줄 수 있는 날이네. 어디 한꺼번에 덤벼 봐. 이전처럼 톡톡하게 갖고 놀아주지."

간부를 응시하는 리안의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흉포하게 번뜩이는가 싶은 순간이었다. 틈을 살피고 있던 팬텀이 보랏빛 그림자처럼 치솟아 올라서는 붉은 안광을 길쭉하게 남기며 그림자 분신을 만들어냈다. 경고성 발언을 외칠 시간마저 없었다. 은엽은 조로아크가 진보랏빛 파동을 퍼뜨리는 모습을 시야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루카리오에게 지시를 남겼다. 집중해서 팬텀의 기척을 좇아. 루카리오는 즉시 명상에 잠겨들어 으슥한 파동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이 남겨놓는 비웃음이 기이한 곡조처럼 정신력을 흔들었으나, 루카리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강철의 파동을 쏘아낼 준비를 갖췄다.

"지금이야." 하나로 합쳐진 차분한 음성이 파트너들의 길잡이가 되어, 이윽고 이색(二色)의 강력한 파동 줄기가 팬텀의 본체를 직격타 한다. 유효한 공격들을 한꺼번에 허용한 팬텀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 위를 굴렀고, 이를 본 팬텀의 주인이 성급하게 다그쳤다.

"태평하게 굴러다닐 때가 아냐! 내가 쥐여준 거 있잖아."

간부의 말에 아군이 주춤하는 사이 팬텀이 꺼내든 것은 자뭉열매였다. 팬텀은 식욕에 물들어 체력을 상당 부분 회복했고, 덩달아 기세를 회복한 간부가 팬텀에게 재빨리 공격을 지시했다. 커다란 그림자공이 이번에는 은엽을 노리고 쇄도하지만... ... 이를 판별한 루카리오가 한발 앞서서 막아내기를 성공한다. 무게중심을 잡고 있던 루카리오의 발이 지면에 묵직한 자국을 남겼다.

"의외로 제법 버티는구나? 그렇지만 이쪽도 아직 버티고 있으니 공정하게 굴어보자고."

악에 받힌 목소리가 그림자포켓몬에게 다른 명령을 내렸다. 루카리오와 조로아크를 초조하게 번갈아보던 팬텀은 즉각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버렸다. 한바탕 난전이 벌어지던 공터에 찰나의 적막이 내리고, 간부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짐짓 상냥하게 웃었다.

"이봐요, 매니저님. 당신이 경찰이라고 진작에 말해줬어야 내가 대비를 할 것 아니겠어. 내가 오랫동안 공들인 노력이 이렇게 무너지기 직전까지 오니까 좀 많이 억울하네."

"세상만사 사필귀정이라고 하지요."

은엽은 루카리오와 함께 그림자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한편으로 짤막한 응수를 남겼다. 적이 어떤 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에 길게 대꾸해줄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그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한 간부는 실망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번에는 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아가씨는 저 사람 동료? 그렇게 귀여운 얼굴로 무서운 표정 짓지 말아 줘. 친해지고 싶은데 이름이라도 알자. 응?"

리안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응답이 없는 주인 뒤에서 조로아크가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을 뿐이다. 간부는 한층 더 즐겁게 웃고는, 이내 입가에서 미소를 싹 지워버렸다. “당신이지? 내 팔을 부러뜨린 게."

"... ...엄살이 심하네. 그냥 금만 가게 만든 정도인데."

간부는 축 늘어뜨렸던 팔을 움찔거리더니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삽시간에 커진 그림자가 은엽의 다리를 단숨에 묶고 움직임을 봉했다. 지난번과 같은 상황, 같은 방식의 함정에 빠진 것을 인지한 은엽은 루카리오가 갖은 수를 시도하며 주인을 구해내려 애쓰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리안의 눈빛에 공포심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은엽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리안은 움찔했다. 저이는 지금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까. 이를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은엽은 리안을 외면했다. 간부는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그림이 나왔음에 만족하며 박수를 크게 쳤다.

"역시 둘이 친한 사이로구나! 이런 게 동료간의 우정이란 걸까~. 눈물이 나요, 눈물이."

누군가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은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음에 이어질 시나리오를 구상해 보았다. '팬텀이 지난번처럼 그림자 속에서 내게 저주를 걸고, 다음에는 리안을 노릴 것이다. 리안은 어떻게 대처할까.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레인저라고 하더라도 다수의 상대를 혼자서 쓰러뜨린 강적을 이길 수 있을까. 소소리에게는 어떤 지시를 내려두어야 하나......' 이미 저주에 한번 당해 봤었던 입장에서는 두번째라고 해서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이후의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가 두려울 따름이었다.

"이럴 땐 여흥을 즐겨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장비를 팔지 못할 경우의 대책도 마련해 뒀으니, 그거라도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해서... ... 어머, 말이 길었다."

'뭐 어때.' 간부는 시니컬하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주위를 뒤덮은 그림자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해, 은엽은 다가올 고통을 대비하여 눈을 지그시 감는다. 주변에서 의미불명의 외침이 연달아 터졌다.

"... ... ...아!"

가느다란 비명이 자신의 입이 아닌 곳에서 튀어나왔다. 은엽은 눈을 번쩍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리안이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서 이쪽을 돌아본다.

리안의 가슴 정중앙에 새카맣고 뾰족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날 아프게 만들었으니 앙갚음이라도 해 줘야지. 안 그래? 레인저 아가씨."

냉정을 잃고 벌어진 은엽의 턱을 바라보며 간부가 흡족하게 중얼거린다. 리안의 가슴을 꿰뚫어 놓은 그림자는 비산하여 사라지고, 중심을 잃어 비틀거리는 주인을 조로아크가 황급히 부축했다. 루카리오가 감정의 파동을 받아들이고 격노하며 팬텀의 그림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보기 좋게 빗나간 공격은 지면을 강타하고 작은 구덩이를 만들고 만다.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경찰 아저씨와 레인저 아가씨. 팬텀한테는 미안하게 됐네... 뭐, 어쩔 수 없나? 따라큐 얘는 또 어딜 갔는지 몰라."

땅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던 루카리오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간부는 마찬가지로 기절한 팬텀을 몬스터볼 속에 들여넣고는 장소를 벗어나려 다리를 움직인다. 바야흐로 궁지를 벗어난 사냥꾼이 기회를 도모하려 하는 중이었다.

"... ...기다려."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가 혼란을 금세 얼려버리고 간부의 목덜미를 붙잡아 멈춰세웠다. 주인을 보필하던 요괴여우 포켓몬이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냈다.

"어딜 가는 거야. 그쪽 말고 악몽 속으로 떨어져야지... ..."

그림자의 구속에서 벗어난 은엽은 기절한 파트너를 볼 속으로 회수한 다음 간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환영에 깊숙이 지배된 눈동자는 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없이 굳어 있었다. 자신의 손목이 수갑으로 단단히 채워져도, 몸이 강제로 땅 위에 엎어져도, 부상을 입은 부위가 욱신거려도, 간부는 저항의지를 일절 나타내지 않은 채 그대로 산송장이 되었다.

완전히 제압된 간부의 모습을 확인한 은엽은 뜸을 들이지 않고 리안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조로아크의 품에 맥없이 안긴 자세로 호흡을 쌕쌕 뱉고 있었다. 떨리는 손길로 그의 열을 재본 은엽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차가운 온도에 몸서리치고 말았다. 리안에게 들어간 저주의 효과는 자신이 겪었던 것과는 종류가 달라 보였다. 조로아크의 털에 파묻힌 채로도 그는 연신 추위를 호소하며 입술을 새파랗게 떨어댔다.

“추, 추워… 죽을 것 같아.”

약한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뱉은 신음이었다. 리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돋아나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은엽은 그의 땀을 닦아주며 주문을 외는 듯이 속삭였다.

“제가 있으니 괜찮아요. 리안 씨, 눈 좀 떠보실래요?”

냉증과 오한을 겪는 환자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미리 알아뒀어야 했다. 은엽이 되는대로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흐리멍덩하게 뜨인 눈이 초점을 좀처럼 잡지 못하고 불안하게 깜박거렸다. 말뜻은 잘 알아듣는 것 같아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내듯 앞을 더듬던 손길이 은엽의 어깨를 붙잡고 끌어당기려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이 미끄러져 내리려는 것을 급히 잡아주는데 흐느낌이 이어졌다.

“추워… 추운데, 너무 추워, 죽기 싫어, 죽는 건 싫어… …아인스, 도와줘….”

조로아크는 이에 기겁하듯 헉 소리를 내더니 주인의 얼굴을 정신없이 어루만졌다. 늘 신중한 빛을 유지하는 포켓몬이 이렇게 동요할 정도면 여간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은엽은 몸 전체를 떨기 시작하는 리안을 조로아크에게서 조심스레 넘겨받으며 되뇌었다.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제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초연히 굴고, 어떤 사람은 죽음 앞에서 발버둥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죽음 앞에서 무력해질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넘나들수록 미련은 짙어진다고 하였고, 은엽 또한 이를 겪었기에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미련을 켜켜이 쌓아두고 있었다. 미련으로부터 비롯된 한에서 느끼는 공포야말로 겪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려움이었다. 한에 시달리다보면 홀로 고립되기 일쑤였으며, 그렇게 다가온 외로움은 마침내 약점이 되어 버린다.

“내, 나, 나를 내버려 두지 마, 날 두고 가면 안 돼, 윽, 흑……”

그러니 제 울타리 안에 든 이가 이렇게 애원하면 자신도 덩달아 한없이 약해지고 마는 것이다.

“…당신을 두고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안심하세요.”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은엽은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듯이 재차 읊조렸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약속합니다.”

은엽은 방호조끼를 모두 벗겨내고는 리안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렇게라도 체온을 전달해야 그나마 떨림이 잦아들 것 같았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숨소리는 옅었지만 꾸준했고,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심박은 차츰 리듬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어 축축하고 차갑기만 했던 손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열기 덕분에 원래의 온도를 회복해갔다. 은엽은 리안의 호흡 속도를 조절해주기 위하여 천천히 숨쉬는 한편으로 그의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리안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제 탓이에요."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자기 입으로 내세운 공언을 어기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이는 리안의 파트너였을테고, 때문에 은엽은 그에게 사죄를 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리안의 파트너에게서 미움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할 말이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사죄를 들은 조로아크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이유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어떤 쪽으로든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인스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래... ..."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은 인간과 포켓몬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지점으로 쏠렸다. 리안은 넓은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동감인데. ...우리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조금... 섭섭하거든."

"리안 씨, 괜찮으세요?"

은엽은 제 품 안에서 몸을 더욱 움츠리는 그를 부축하면서 급히 물었다. 어깨에서 미끄러져내린 손이 은엽의 옷섶을 꾹 쥐었다.

"...몰라. 아직 몸이 으슬으슬 추워... 힘이 안 들어가. 그나마... 당신이랑 아인스 덕분에 죽을 것 같진 않네."

동공이 미미하게 열린 눈이 스르륵 움직여서 은엽과 조로아크를 차례로 응시했다. 조로아크는 기쁨과 안도에 젖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주인의 관자놀이에 콧잔등을 대고 약하게 부볐다. 리안은 쥐고 있던 옷섶을 놓고 파트너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지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은엽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 조끼 왼쪽 주머니에 기력의 조각이 있어. 그걸 소소리한테 먹여 줘..."

리안의 말을 따라서 꺼낸 조각은 전부 두 개였다. 은엽은 그 중 하나를 챙기고는 리안을 다시 조로아크의 품에 넘겨주며 물었다.

"이거, 인간도 먹을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리안 씨도 먹어 두시는게... ..."

"싫어. 나 신맛 싫어해."

저주 때문에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단호한 거부반응이 나왔다. 은엽은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는 기절한 루카리오의 입에 기력의 조각을 넣어주었다.

"그래도 정신을 잃는 것보다야 나을 텐데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조로아크를 힐끔 바라보면, 파트너 포켓몬 또한 은엽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이 고개를 은밀히 끄덕여온다. 은엽은 기력을 되찾고 눈을 번쩍 뜬 루카리오를 잠자코 쓰다듬어 주면서 리안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연약해진 레인저와 강건한 포켓몬이 씨름하는 소리가 컨테이너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야트막하게 메아리쳤다. 이를 배경음으로 '3번 부두의 진압을 마치고 포켓몬들을 구출했다'는 무전이 들려와, 은엽은 들릴 듯 말듯한 한숨을 내쉬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찔했지만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조직의 간부와 외부에서 온 밀렵꾼은 나란히 인사불성인 상태로 호송 차량에 실려갔으며, 수행원들의 시신은 빠르게 수습되어 현장을 벗어났다. 추가로 배정된 차량이 없는 까닭에 5번 부두를 담당했던 인원들은 상황실까지 걸어서 복귀해야 했다. 레인저가 기진한 상태였지만 조로아크가 파트너를 업고 이동하기로 해서 은엽 역시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다. 소탕 작전이 모두 종료된 모란만의 항구는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컨테이너가 적재된 구역을 빠져나와서 간이통로를 따라 걷고 있노라면 방파제 앞으로 밀려온 파도가 찰랑이는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제가끔 두런두런 퍼지는 대화가 항구의 적막을 깨트리고는 하였다.

"신맛이 가시질 않아....... 인간한테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맛이라고, 이거... ..."

"그래도 효과는 있는 모양이군요. 저 때는 기절하기까지 얼마 안 걸렸거든요."

"끔찍해... 싫어..."

기력의 조각 맛이 싫다는 의미인지, 저주에 걸린 것이 싫다는 의미인지 헷갈렸다. 은엽은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리안의 등을 토닥이며 한숨을 삼켰다.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다른 주제라도 아무거나 끄집어내야 했다.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은엽은 이내 리안이 가장 잘 알고 있을 만한 주제를 떠올렸다.

"전투 초반에 리안 씨가 간부에게서 밀렵꾼을 분리하셨을 때... 그때도 파동술을 사용하셨던 건가요?"

리안은 조로아크의 갈기털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이쪽으로 겨우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껌벅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거... ...응. 파동을 공처럼 뭉쳐서 쏜 거야. 파동탄 기술처럼 필중하지는 않지만... 크기와 위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

"그렇군요... 수련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리안 씨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계셨네요."

은엽은 루카리오가 쉬고 있는 몬스터볼을 가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짧은 침묵 후 한숨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파동사가 그다지 만능은 아니야. 이건 나도 오늘 처음 안 사실인데... 몇몇 고스트 포켓몬의 파동을 감지해내는 게 꽤 힘들더라. 그래서 내가 오늘 그렇게 애를 먹었었나 봐......"

리안은 회한 섞인 어조로 웅얼대며 눈을 꾹 감았다. 은엽은 묵묵히 정면을 응시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지에 돌아가시면 한숨 푹 쉬세요."

앞으로 가까워지는 컨테이너 탑이 그 밑의 바닥으로 짙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 놓고 있었다. 은엽은 그 너머의 틈샛길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리안 씨가 살던 과거는 어떤 세계였는지도 궁금한데요. 이에 대해 여쭤도 되겠습니까?”

참 빨리도 물어본다는 시선이 되돌아왔다. “내가 자세히 얘기해 준 적은 없었던가…?”

“당신이 여기로 온 경위, 그리고 신분제 이야기 밖에 없었지요.”

은엽의 중얼거림에 작게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나중에 시간 널널할 때 얘기해줄게.”

즉석에서 바로 약속을 만들어 버리는 그 다운 선택을 한 걸 보아, 리안의 상태가 아까 전보다 많이 호전된 모양이어서 은엽은 그를 따라 하릴없이 웃어버렸다. 하긴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아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에 자연히 풀렸던 긴장은 리안의 눈동자를 빠르게 물들인 감정의 의미를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했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고 몸이 앞으로 기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이유마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몸이 나른해지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비슷한 감각을 최근에도 겪었던 것 같은데, 가물거리는 이지가 끝내 시간감각마저 지탱해주지 못하고 흩어지려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무척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삽시간에 지나가서 알지 못한 일 같기도 했다. 은엽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어딘가를 헤매고 다니면서 아득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했다. 떠오를 듯 말 듯한 것이 그를 약오르게 만들었다. 이제 그가 겨우 기억해 낸 것들은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다'거나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다' 따위였으며,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이 상황이 중요한 무언가를 진작에 놓쳤던 대가였음을 꾸역꾸역 떠올렸다. '무엇을 놓쳤더라?' 은엽은 다시금 혼란에 잠겨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알 필요는 있는 걸까.' 중요한 일이라는 점은 알겠는데, 그의 의식은 급격히 쏟아지는 피로에 나태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는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나 있겠지.' 따위 생각을 하며 의식마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꿈 속에서 항상 등장하던 인물이 이번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자신도 손을 내밀었다.

그가 조용조용 말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가 미소를 지었을 때 숨을 멈추었다.

그가 눈을 반짝일 때면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화를 낼 때마다 고민에 빠졌다.

그가 감정을 숨길 때마다 고뇌에 빠졌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가 부탁을 할 때마다 거절을 하지 못했다.

그가 붙잡은 손을 놓으려 할 때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의식을 휩쓸어대는 꿈의 속도에 지친 나머지 갈증이 찾아온다. 의식을 일깨워 줄 수분기를 찾아서 한참을 방황했던 것 같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있지도 않을 옹달샘을 찾아다니던 은엽은 마른침이라도 삼켜서 해갈을 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맛은 다디달고... 무척이나 부드러웠으며... 신맛이 강하게 났다. 그토록 찾아헤매던 의식을 단번에 되찾고 눈을 번쩍 뜰 만큼 강렬한 맛이었다. 몇 번인가 빼앗겼던 숨이 타의로 돌아오며 겨우 찾은 의식을 흩어놓았다. 미각을 가득 채운 말랑함을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맑은 물빛 눈동자가 시야를 크게 스치고, 한결 자유로워진 호흡이 차가운 공기를 급히 채갔다. 둔탁한 머리통증이 시야를 괴롭히는 사이로 입가를 쓱 문질러 닦는 리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 ... ... ..."

"... ...미안. 설명은 나중에 할게. 아인스를 부탁해."

리안은 멍하니 누워있는 은엽에게 피로에 겨운 목소리로 속삭인 뒤, 제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앞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은엽은 제 상체 위로 쓰러진 리안을 무의식적으로 붙들었다. 미지근한 체온 밑에서 연약해진 숨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리안 씨... ...?"

그의 이름을 발음하는 잇새로 잘게 쪼개진 무언가의 조각이 씹혔다. 무심코 그것을 삼키고 강한 신맛에 시달리는 은엽에게, 언제 볼에서 나왔는지 모를 루카리오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 충격으로 머리가 흔들린 까닭에 컥, 하는 신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은엽은 징징 울려대는 머리를 부여잡을 새도 없이 리안과 루카리오를 동시에 안았다.

"......소소리...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통곡을 하다시피 울음소리를 길게 뽑고 있던 소소리가 팔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눈으로 따라간 은엽은 나직이 탄식을 뱉었다. 땅 위에 쓰러져 기절한 조로아크의 모습과, 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마찬가지로 기절해 있는 따라큐의 모습이 보였다. 은엽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따라큐의 존재를 잊어서 이 사달이 났구나. 조로아크를 리안 소유의 볼 속으로 겨우겨우 회수한 은엽은 맥을 탁 놓아버리고 뒷머리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편안하게 누운 자세가 되니 두통이 조금 가신 듯했다.

"상황실... 아스펜입니다. 중앙 통로에 부상자 둘, 기절한 아군과 적군 포켓몬 각각 한 마리씩 있습니다. 이송 부탁드려요..."

무전 너머로 후배의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 작전을 무사히 마치고 복귀한 모양이다. '잘 되었지...' 은엽은 까마득한 밤하늘을 시야에 가득 담으며 홀로 중얼거리고는 제 품에 담은 이들을 조심히 끌어안아 보았다.

더이상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밤이었다.


"몇 년간 시달리던 일에서 벗어나게 되니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야... ..."

"동감. 피자 더 먹을래?"

"아니, 몇 조각 안 남았잖아. 선배님 한 개째도 아직 다 안 드셨는데. ...선배님? 피자 안 드세요?"

"예?"

음식물의 냄새가 낭낭하게 퍼진 회의실 안에서 세 명의 요원들이 서로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은엽은 그들의 대화 주제를 따라오지 못한 채로 멀뚱하니 접시만 들고 앉아 있었다. 후배와 그의 소꿉친구는 잠시 시선을 교환하는가 싶더니 일견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은엽을 바라보았다.

"혹시 두통이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뇌진탕을 심하게 겪으셨다면서요... 그럼 지금이라도 빨리 병원으로,"

"아니, 아니에요. 지금은 아주 멀쩡합니다.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사라는 그를 골똘히 바라보다가 음료수가 담긴 컵을 밀어주었다.

"개인적인 일이에요?"

"예... ...그렇죠."

"그렇군요... 그런데 저랑 에단은 피자 거의 다 먹었어요. 고민을 깊이 하실 거면 우리는 팀장님께 방해가 될 테니 나가볼게요."

'모처럼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혼자 동떨어지지 말라'는 의미를 한 바퀴 꼬아서 말하는 사라를 후배가 서둘러 진정시켰다. 은엽은 한 입만 베어먹은 자신의 몫을 내려다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별로 중요하진 않아요. 축하하는 자리에서 혼자 딴생각을 해버렸네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러실 수도 있죠 뭐. 그럼 우리 에필로그! 마무리는 어떻게 됐는지 얘기할까요? 그거면 우리끼리 속풀이도 잘 될 테니까요."

분위기 전환 담당이 자기 역할을 잘 해내는 모습을 본 사라는 흡족해진 표정으로 음료수를 홀짝였다. 은엽은 후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자를 크게 베어물었다. 한꺼번에 복잡하게 쌓인 사건들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는 까닭이었다.

수사 대상이었던 불법 조직 '화중화'는 문자 그대로 공중분해되었다. 비밀 시설에서 자행되었던 포켓몬 실험이 수면 밖으로 드러나던 날, 조직 측에서 바지사장으로 앉혀놓았던 인물을 비롯해 악행에 동참했던 조직원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며칠 전 있었던 소탕 작전에서 간부와 남은 조직원들이 모두 체포된 것으로 해당 조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조직에 사로잡혀 있었던 포켓몬들은 보호소로 이동되어 치료를 받으며 각자의 주인을 기다리거나, 혹은 개체의 서식지에 방생될 예정이라고 하였다. 비밀 시설의 지하 연구실에서 수집한 자료들은 그 내면에 포함된 실험의 악질성을 고려하여 폐기 처분되었다.

"그 조직, 초기에 향정신성 약물도 개발하려고 했던 것 같더라."

"어, 그러고보니! 그때 미혹의 숲에서 잡았던 포켓몬 헌터의 상태가 좀 이상했었지, 아마? 선배님은 아시는 거 있어요?"

"제가 시설관리팀의 매니저직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연구팀장이 잠적했었죠. 그때 핵심기술 자료가 같이 날아가버린 모양이더군요. 덕분에 조직 내부의 분위기가 한동안 어수선했습니다."

"제 책상 상태보다 더 개판이었나 봐요. 그런 조직이 단기간에 그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야."

"다들 제대로 된 죗값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후배가 조용히 투덜거리고는 남은 조각을 한꺼번에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나머지 두 명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국제경찰은 법을 집행할 뿐, 형을 정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참, 에단의 후임으로 배정될 사람은 누구예요? 팀장님이 최종 면접에 들어가셨잖아요."

최근의 조직 개편으로 인해서 다수의 요원들이 신규로 임용되었고, 교육 기간을 거치고 얼마 후면 부서별로 배정된다고 하였다. 몇 년동안이나 팀의 막내 위치에 있어야 했던 후배로서는 그야말로 희소식일 따름이었다. 은엽은 후배의 급격하게 밝아진 표정에 너털웃음을 흘리고는 음료수를 한모금 마신다.

"단기간에 체육관 배지 여덟 개를 모두 취득하고 밀렵 활동을 저지하는 데 꾸준히 도움을 주었던 트레이너입니다. 경찰 학교를 거치지 않고 급하게 채용된 분인데다 나이가 적은 편이라서 당분간 실전 투입은 무리지만, 에단 씨처럼 의식이 투철한 분이라서 수습 기간을 잘 거치고 나면 뛰어난 인재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 호오...' 하는 맞장구를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던 에단이 되물었다.

"코드네임은 받아보셨대요?"

"코드네임 애쉬(Ash)라고 합니다. 신입 분께서 분위기에 적응 잘 할 수 있도록 에단 씨가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 저도 돕겠지만, 저보단 에단 씨가 초심을 더 많이 간직하고 계시니까요."

"선배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좀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볼래요."

새로이 변화를 이룬 국제경찰 조직에 합류할 이들은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까. 은엽은 요원들이 더이상 자원으로 소모되어 떨어져나가지 않기를 희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기를 충전한 듯한 태세로 피자 크러스트를 열심히 공략하는 후배 옆에서 사라가 갸웃거렸다.

"전 그것도 궁금해요. 소탕 작전 끝나고 팀장님이 레인저 분과 복귀하시는 길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아~... 저도요. 갑자기 부상자가 생겼다길래, 제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선배님도 그렇고, 리안 씨도 괜찮으시대요?"

목구멍 아래로 내려가는 음식물이 중간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엽은 애써 음료수로 목넘김을 하고는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가 대화 초반에 한참 넋을 잃고 있었던 이유와 연결되는 주제인 탓에 생각을 재차 가다듬어야 했다.

리안의 포위망으로부터 도망쳤던 따라큐는 사실 현장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었고, 자신의 주인인 간부가 적들과 전투를 벌인 끝에 체포당하는 과정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과 강제로 헤어지게 될 처지에 놓인 따라큐는 주인을 쓰러뜨린 인간들을 응징하고자 그들의 뒤를 몰래 밟았고, 주인에게 손수 수갑을 채웠던 은엽부터 먼저 습격했다고 한다. 은엽은 '칼춤' 기술로 강화된 '야습' 공격을 머리에 가격당해 그대로 행동불능 상태가 되었으며, 리안이 즉각 나서서 따라큐의 습격에 대처한 다음에 은엽에게 구호 조치를 취한 것이 상황의 전말이었다.

"......선배님 어떻게 살아계세요?"

"살아계신 거 맞죠?"

설명 끄트머리에서 후배와 사라가 동시에 물어와, 은엽은 뒷머리 어드메의 꿰맨 부위를 은연 중에 떠올리며 어설프게 웃었다.

"레인저 리안 덕분이죠. 그래서 이렇게 피자도 먹고 있잖아요."

싸해진 분위기를 해소해보려고 농담까지 섞어보지만 사라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섀도볼 물리 버전으로 머리를 공격당하셨잖아요. 간단한 봉합으로 처치가 끝날 만큼 상처가 작지도 않았을 텐데..."

"저도 그때 선배님이 그런대로 잘 걸어다니시길래 아주 걱정할 만큼은 아닌가보다 했는데... 아, 설마 소소리가 치유파동으로 응급처치를 해줬다거나... ...?"

사실, 기력의 조각 한 알만으로 의식을 되찾은 점이 설명이 되는지 당사자조차 긴가민가 하고 있던 차였다. 은엽은 후배가 제기한 의문에 고개를 저었다.

"소소리는 그때 치유파동을 배우지 않았던 상태였습니다. 에단 씨의 말씀처럼은 아닌 것 같네요."

은엽의 말을 들은 후배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기울더니, 별안간 손가락을 탁 튕긴다.

"그럼 리안 씨! 리안 씨는 파동사시니까 치유파동도 쓸 줄 아실 것 아녜요?"

"...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그럴 듯한데."

후배는 소꿉친구의 맞장구에 힘을 얻어 당당해진 표정으로 은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은 은엽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리안 씨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통 언급을 하지 않으셔서."

"그럼 레인저 리안에게 직접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그러고보니 그 분은 괜찮으시대요? 저주의 여파로 정신을 잃으셨다면서요."

후배가 뜨악해진 얼굴로 사라의 입을 막으려 허우적대는 동안 은엽은 침음성을 조용히 뱉었다. 작전이 종료되고 리안이 레인저 기지로 이송된 이후로 단 한번, 그의 연락처로부터 '이제 정신을 차렸고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문자메시지만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어진 연락은 없었다. 은엽이 그에게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하루에 한 번씩 보내봤지만, '읽지 않음' 상태가 바뀔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통화조차 연결이 되지 않는 덕분에 은엽은 내내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리안이 상주하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는 것은 몹시 곤란했다. '그건 스토킹이지.' 은엽은 무심코 한숨을 뱉고는 두 요원을 바라보았다.

"예... 괜찮으시답니다. 미션에도 계속해서 참여하시는 것 같고요."

후배와 사라는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교환하고는 테이블 위를 분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갑작스러운 태세 변화에 은엽이 당황하는 가운데, 후배가 다가와서는 엄지를 척 내밀어보인다.

"... ...예?"

그 제스처의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 은엽이 부지불식간에 멍한 목소리를 내자, 후배는 은밀한 제안을 건네듯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긴 우리가 치울게요. 리안 씨랑 통화하고 오시라고요."

"하지만요... ..."

테이블 정리를 금세 끝낸 사라는 손을 탁탁 털고 나서 은엽의 등을 밀어 일으켰다. 후배까지 가세해 등을 꾹꾹 밀어대는 바람에 은엽은 하릴없이 회의실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국제경찰 본부 옥상에 위치한 정자는 은엽이 외부에 전화를 걸 때 자주 애용하는 장소였다. 평소에는 이 자리에 앉아서 동생과 통화를 하고는 했는데, 오늘은 라이브캐스터의 애꿎은 테두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번호를 누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근 일주일 간 부재중 상태를 유지하는 상대에게 오늘 전화를 걸어본다고 받아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은엽은 정자의 서까래를 한참 올려다보고는 아예 뒤로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조금 전 먹었던 음식물이 뱃속에서 더부룩하게 쏠리는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속이 답답해봤자 심란한 마음만 못했다.

뒷통수를 받친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실밥의 감촉이 선명했다. 은엽은 천천히 눈꺼풀을 닫아 세상으로부터 시각을 차단했다. 예와 같은 어둠이 유리체를 뒤덮으면, 이윽고 의식이 그 안을 맴돌며 과거의 감각을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가슴 안쪽으로 흘러들었던 자극적인 맛, 가슴을 채우고 돌아나가던 부드러운 숨, 그리고 입술에 맞닿았던 중독적인 감촉... ... 어느 한 부분에서 떠올린 중독성을 무마하고자 입술을 꾹 깨물어보지만 그다지 소용 없는 일이다. 은엽은 정자가 무너져라 숨을 토하며 눈을 떴다.

자신이 누워있던 마루의 공간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은엽은 등을 울리는 진동에 펄쩍 일어나 앉았다가 얼떨떨한 자세로 라이브캐스터를 집어들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우뚝 멈췄던 것은 화면에 표시되는 발신자번호를 보았을 무렵이다. 은엽은 허둥지둥 통화기기를 조작하며 자신의 목소리가 멀쩡히 들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리안 씨?"

구부정하게 구부러졌던 허리가 저절로 곧게 세워졌다. 은엽은 숨조차 죽여가며 선 너머에서 들릴 목소리를 기다렸다.

-... ... ...은엽.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한참만에 들려왔다. 자신이 꿈 속에서 매번 듣곤 하였던 것과는 조금 다른 톤이어서, 은엽은 혹여 상대방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을까 가슴을 졸이면서 거듭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어디 달리 다친 곳은 없습니까?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

이번에도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은엽은 자신의 인내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튀어나오고자 하는 속마음을 애써 눌러참으며 리안의 응답을 기다렸다. 이대로 상대방이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에 저편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들려왔다.

-난...... 괜찮아. 그보다... 주말에 일정이 어떻게 돼?

우글우글 끓어나오려던 문장들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괜찮다는 말 앞에 왠지 망설임이 있었던 것 같지만, 기분탓이려니 했다. 은엽은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더듬어보고는 어렵사리 한 문장을 끄집어냈다.

"토요일이 옛 파트너의 기일이라 타워 오브 해븐에 방문할 예정입니다. 일요일은 당직이고요......"

-토요일. 토요일에 타워 오브 해븐의 입구 앞에서 만나자. 시간은 당신한테 맞출게.

이번에는 비교적 빠른 응답이 돌아왔다. 다만 한 번도 생각조차 못한 내용이라서 이번에는 은엽 쪽이 한참의 뜸을 들이고 말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재촉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오전 아홉 시에 방문을 예약해 두었습니다만, 리안 씨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문제는 없는데요..."

'내가 서리에 대한 얘기를 리안 씨께 한 적이 있었던가?' 고민에 잠긴 은엽이 무의식적으로 말을 길게 늘릴 무렵이었다.

-알았어. 그럼 그 때 만나.

통화는 바로 끊어졌다. 은엽은 미지근하게 달아오른 라이브캐스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머릿속에 기록이 제대로 되지 않은 바람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것도 뇌진탕 증상인가?' 무심코 뒷통수를 문지르던 그는 리안이 자신에게 치유파동을 사용했었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은엽은 기력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기둥에 상체를 기대고 앉았다.

"토요일... 오전 아홉 시."

'차라리 그 때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볼까. 그래, 그러자. 어차피 리안 씨에게 물어볼 사항이 많다.' 은엽은 마구 들끓는 사고회로를 서투르게 수습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거 계속 그대로 내버려 두면 오빠나 그분이나 힘들어질 거야. 하루 빨리 마음 정리를 하든지, 얼른 결론을 지어야 마음이라도 편해질 걸. 이건 노파심에서 해 주는 말인데, 오빠 혼자서 동료애나 우정이 아니냐면서 자기부정하고 끙끙 앓지 말고.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나고 꿈에서까지 계속 나올 정도면 그게 바로 사랑에 빠진 거지, 달리 뭐겠어? 이거 내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이니까 잘 새겨 들어."

일전, 자신의 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은엽의 마음에 철심을 마구 박아넣고는 '드디어 내 오빠를 지켜 줄 사람이 나타났다'면서 좋아라 하던 동생은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콕 집어서 물었었다. "그분은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 그리고 자기 나이 또래라는 충격적인 답을 듣자마자 통화는 뚝 끊어졌었다.

은엽은 마루에 다시 드러눕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후배와 그의 소꿉친구가 궁금해 하던 사항의 답은 얻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간 쭉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이쯤하면 만족할 만하지 않을까.

하나, 모란만시티의 항구처럼 온통 안개가 끼어버린 머릿속에 만족감이란 한 톨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Q: 루카리오/조로아크/팬텀/따라큐의 기배

A: 루카리오 - 불릿펀치, 명상, 러스터캐논, 판별

조로아크 - 기습, 악의파동, 카운터, 손톱갈기

팬텀 - 섀도볼, 저주, 멸망의노래, 그림자분신

따라큐 - 야습, 칼춤, 섀도클로, 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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