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유료

대지 아래 잠든 생명은 다음의 풍요를 기약하나니

결속

*Warning: 자기비하 표현

BGM

BGM 2


근 일주일 간의 행적을 회고해보는 일은 리안으로서는 퍽 힘들었다.

널뛰기를 하는 감정을 어찌 수습하질 못해서 일으킨 잔실수가 나날이 늘어났고, 리안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인물들까지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게 된 까닭이다.

"리안, 그냥 확 저질러 버려. 보는 내가 다 안타깝다." 리안이 뒤집어쓴 이불을 휙 걷어내고 시오레가 한 말이었다.

"청춘의 아픔을 겪는 데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임무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면 좋겠구나. 그러다 다치면 너만 손해다." 깨작대며 식사를 하는 리안을 측은하게 여기며 리더가 한 말이었다.

'리안이 놀아주지 않아서 심심해. 주인, 아프지 마. 주인 왜 힘들어? 주인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 조로아크를 제외한 나머지 엔트리 포켓몬들이 휴게 시간에 우르르 몰려와서 저마다 건넨 말들이었다.

"나는... 모르겠다.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닌 것 같네." 꿈 속의 시안은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말했던 것 같다.

리안은 일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히려, 자신은 그 국제경찰 요원과 거리를 두어야 마땅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로부터 문자메시지나 전화가 걸려와도 꿋꿋하게 통화기기를 열지 않았던 이유는 타당했다.

"내가 추태를 그렇게나 부렸는데 그럼 어떻게 해?" 리안이 답답한 감정을 표하는 파트너에게 항변하며 던진 말이었다. 저주에 걸리는 바람에 평소였다면 꺼내지도 않았을 것들을 줄줄이 흘려버리고, 또 탈포켓몬을 쓰러뜨린 뒤에는 기절한 그에게 인공호흡을 빙자한 입맞춤을 허락없이 저질러 버렸다. 전자나 후자나 정말 어쩔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은엽이 자신을 탓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일화였다.

-넌 그냥 낯선 상황에 겁을 내고 있는 것뿐이다, 리안. 일부러 네 약점을 스스로 드러낸 것도 아니었고, 기력의 조각을 도로 뱉어뒀다가 나중에 사용한 것조차 남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 너는 너 다운 행동을 했을 뿐인데 누가 너를 탓하겠어. 네가 그 조각을 빼돌렸을 줄은 몰랐다만...

아인스는 길고 뾰족한 손톱으로 자신의 입가를 슬쩍 가렸다. 조로아크가 웃음을 참는 행동이었다. 리안은 토라진 반응을 보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몰라. 그냥... 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로군. 봐라, 뻔하잖냐. 그 인간과 억지로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 네가 힘든 거지. 하지도 않을 짓을 하니 네 감정이 축나는 거다.

조로아크는 따라 한숨을 내쉬면서 주인의 등을 토닥였다. 리안은 말없이 쪼그려앉은 자세로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사실 파트너의 말이 백번 옳았다. 늘 마음속에 그리던 파동을 억지로 멀리 하려니 거리감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꿈 속에서 매일 그와 마주치고, 그 빈도수에 비례해서 하루하루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자신이 말라죽게 될 것이라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렇게 리안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오레의 말대로 일을 저지를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려고 그때 타워 오브 해븐에 방문했던 건 맹세코 아니야.' 국제경찰 요원의 옛 파트너의 기일이 가까운 주말이라는 사실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리안은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며 승부수를 준비하고 통화기기를 찾아 들었다.


리안은 물씬 풍겨오는 백합과 국화의 향기를 조용히 가슴 속에 품어보았다. 이주일 쯤 전에도 이와 같은 향기를 맡아보았었지만, 당장 그저께의 일처럼 선명해서 기분이 묘했다. 리안이 고른 꽃을 능숙하게 포장해 다발로 돌려 준 꽃집 주인은 영수증까지 건네주면서 넌지시 물어왔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모양이네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바람에 주인이 말을 걸어올 줄을 몰랐던 리안은 흠칫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진중한 빛을 띤 황안(黃眼)이 손님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리안은 어색하게 눈을 돌리며 웅얼거리듯 답했다.

"네. 그럴... 그런 일이 좀 있었어요."

상대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은 어쩌면 유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주인은 주름진 입가를 어루만지고는 빙그레 웃었다.

"레인저님께서는 큰딸이 제게 말했던 그대로시군요."

꽃다발을 쥔 손가락이 제멋대로 꿈지럭댔다. 리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지만, 그는 잔잔한 미소만을 짓고는 여상적인 태도로 원예 가위를 쥐고 온실 통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꽃도 추가로 넣어드릴 테니 잠깐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속뜻을 품은 제안이 다가왔다. 리안은 반쯤 어리둥절하고 반쯤 멍한 기분으로 주인의 뒤를 따랐다. 시오레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 도리는 없었지만, 누군가가 청하는 대화를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는 예의에 어긋났으므로. 게다가 지나치게 일찍 온 덕분에 약속까지는 한시간 가까이 여유가 있었다.

리안은 알맞은 습도와 온도 속에서 흐르는 갖가지 향들을 남몰래 맡아보며 통로를 걸었다. 그러는 사이 화분이 그득한 선반에 다다른 주인은 염두에 두었던 것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리안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어정쩡하게 서서 그가 하는 꼴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꽃의 색깔별로 나열된 화분을 눈으로 훑던 주인은 이윽고 연노랏빛 생화 대여섯 송이를 거둬서 들쑥날쑥 자라난 가지를 원예 가위로 단정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해 멀뚱멀뚱한 리안에게로 주인이 잡담처럼 흘리는 목소리가 다가온다.

"시오레가 이렇게 말했어요. 남의 마음을 최우선으로 헤아릴 줄 아는 동료가 있어서 레인저 생활이 편안하다고. 그 동료가 좋지만, 지나치게 솔직한 나머지 가끔 걱정이 든다고도 했지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서툴러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본인이 생각하시기엔 어떤가요?"

느닷없이 정곡을 찔리게 된 리안은 꽃다발을 든 채 입을 멍하니 헤벌렸다. '시오레가 가족 분께 저에 대해 별말을 다 했군요.' 물론, 머리에 떠오르는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성과 눈치를 갖춘 리안은 가까스로 다른 문장을 내놓았다.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렇게 깊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리안의 대답을 들은 주인은 빙긋이 웃고는 꽃다발을 잠깐 내어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는 건 참 힘들고 대단한 일이죠. 자기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마찬가지로 힘들고요. 아마 후자가 더 힘들 수도 있겠어요. 저는 둘다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딸아이에게 진솔한 말을 전하지 못했거든요."

남의 가정사를 이렇게 그냥 들어도 되는 걸까. 리안은 알쏭달쏭 망설이는 기분으로 꽃다발을 주인에게 넘겨주고는, 그가 새로운 꽃들을 하얀 꽃묶음 사이사이에 장식하듯이 꽂아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인은 어딘가 부자연스레 튀어나온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다발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럴 땐 제일 먼저 자기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속단하지는 않았는지, 이치에 맞는 판단을 했는지... 얼핏 들으면 무척 기본적인 이야기 같지만, 의외로 많이들 간과한다더군요."

그는 정갈하게 정리한 꽃다발을 아직껏 멍한 기색을 가리지 못한 리안의 손에 쥐여주었다. 리안은 '이런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지 잘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샛노란 홍채가 따스하게 휘었다.

"...레인저님이 시오레의 듬직한 동료가 되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꺼낸 말이었는데, 조금 장황하게 흘러갔네요. 부모 된 사람으로 시오레가 직장에서 위험한 일이나 힘든 일을 겪고 있을까 봐 걱정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렇게 마음이 성급해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시오레가 듣기 거북한 소리들을 늘어놨었는데, 훗날 레인저님을 직접 보게 되니 신기하게도 안심이 되더랍니다. 시오레에게 미안해지기도 하고요..."

리안은 새로이 받은 꽃이 어우러진 향을 말없이 맡고는, 이윽고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떠한 통찰력은 실수를 거듭 겪어가며 더욱 부드럽게 벼려지는구나. 리안은 속으로 중얼거려본 뒤 주인의 눈을 마주보았다.

"저야말로 시오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와서... 어떻게든 시오레와 어깨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아버님께서 해주신 말씀에 어떻게 답을 드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감사하다는 말은 꼭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시오레가 아버님을 많이 닮았네요."

꽃집 주인은 눈을 둥글게 뜨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리안은 그만 꽃다발 속으로 얼굴을 묻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 시오레가 여기 있었다면 '정말 내가 생각하는 리안 그대로'라며 제 아버지와 똑같이 웃었을 것이다. 주인은 헛기침으로 애써 웃음기를 얼버무리고는 통로를 나가자는 손짓을 해 보였다. "제가 레인저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죠? 출입문까지 바래다드리죠."

그는 손님을 꽃집 문앞까지 배웅하고 나서 자그마한 마분지 봉투를 내밀었다.

"겪고 계시는 일 다 잘 풀리라는 의미로 특별 서비스 삼아서 드리는 씨앗입니다."

다소 쑥쓰러운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드는 리안을 위해서 주인은 친절한 설명을 곁들어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걸 키워보세요. 식물이란 자고로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생명체니까요. 인간이나 포켓몬과도 다를 바가 없지요."

그는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리안의 눈을 바라보면서 얼핏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어떤 생명체도 무관심 속에 홀로 남게 되면 메마르는 법이죠. 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예요."

'행운을 빌게요.' 주인은 짤막한 인삿말을 남긴 후 온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안은 한 손에는 추모용 꽃다발, 다른 한 손에는 씨앗 봉투를 든 채로 하염없이 자리를 지켰다. 짧은 시간 안에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받아버렸더니 진작에도 복잡했던 마음속이 이제는 혼잡해지고 있었다. 리안은 약간 막막해진 심정으로 길거리 맞은편에 솟아오른 추모탑을 바라보았다.

".......하아..."

꾹꾹 눌러뒀던 한숨을 모조리 토해낸다고 탑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리안은 씨앗 봉투를 품 속에 여며넣고는 한 걸음씩 목적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새로 받은 꽃의 이름은 무엇인지, 씨앗이 나중에 어떤 꽃으로 자랄지에 대한 의문은 언젠가 풀리게 되리라는 막연한 낙관이 소심한 발걸음과 함께했다.


시간은 착실히 흘러서 오전 아홉 시 십 분전이 되었다. 7번 도로에 흐르는 여름의 거친 기류가 행인의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을 마구 흩뜨리고 지나쳐 갔다. 리안은 몇 번째인지 모를 비행기의 이륙 소음을 하늘로 떠나보내며 그 주위에 드문드문 뜬 뭉게구름을 눈으로 좇았다. 날씨 걱정도 했었는데, 하늘에 푸른색으로 덮인 부분이 많아 보여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던가.

리안은 고개를 내리고 옷매무새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는 날에 하얀 카디건과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온 것은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꽃다발을 들지 않은 빈손으로 머리카락까지 정리하는 동안 리안은 주변을 흐르는 파동에 넌지시 주의를 기울인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일주일 만에 느끼게 될 파동을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보고 있으려니 가슴 부근이 이상하게 붕 뜨는 느낌이었다. 초조한 눈길이 시계를 스치지만 바늘은 이전과 똑같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 됐나...?'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리안은 까닭모를 의혹에 사로잡혀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보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방문 날짜를 다른 날로 옮겨버렸나? 오는 길에 사고가 났나? 본인이나 엔트리의 누군가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갔나? 아니면 내가 시간을 착각했다거나, 이 시계가 멈췄다거나... ...' 만일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라이브캐스터로 연락이 진작에 왔겠지만, 리안은 불안감으로 삐걱대기 시작하는 사고회로를 붙들고 있느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꽃다발을 쥔 손에 식은땀이 맺힐 무렵, 리안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고 익숙한 기척을 향해 시선을 쏘았다. 도로변을 따라 걸어오던 인물이 잠시 멈춰서는 모습이 보였다. 리안은 파동과 달리 어딘가 낯설어 보이는 상대의 외견에 주춤했지만, 곧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서로간의 거리를 좁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은엽은 평소보다도 조금 더 격식을 차린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뒤로 넘겨서 길게 묶어내린 머리카락, 매끈하게 면도한 턱선, 조문을 위한 정장 차림......

"많이 기다리셨죠, 리안 씨."

그의 눈동자에 한순간 넋을 잃었던 리안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너무 일찍 왔어."

어디선가에서 은은한 향기가 기류를 타고 흘러왔다. 리안은 그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꽃에서 저런 향이 나던가?' 그리고는 왠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은엽을 향해 비슷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그야 내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있었으니까.' 리안은 자신의 과거 행적과 어긋나는 말을 뱉은 것에 후회를 느꼈지만, 이어지려는 한숨을 심호흡으로 절묘하게 바꿔놓고는 입을 다물고서 은엽의 감정을 느껴보려 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거대한 안도와 미약한 의구심. 목소리는 태평한 것처럼 들렸어도 내면에 출렁이는 파동만큼은 선명했다. 그에 리안은 하마터면 평정을 잃을 뻔했지만, 표정을 간신히 다듬고 거짓을 미량 섞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럭저럭... 지냈던 것 같아. 일단 들어가기부터 할까?"

"그러죠. 바람이 많이 부네요."

나란히 서는 발걸음이 제법 굳어있었다. '고비는 이미 진작에 시작된 상태였을지도 몰라.' 리안은 속으로 가만히 읊조리면서 은엽을 따라 타워 오브 해븐의 출입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던가. 리안은 이에 대한 답안을 준비하지 못해 입안에 도는 쓴맛을 꿀꺽 삼켰다.

은엽의 옛 파트너가 잠들어 있는 곳은 탑의 삼층 변두리 부근이었다.

일전 리안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헌화했던 꽃다발은 이주일 새 시들어서 말끔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리안은 비석 밑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움직였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은엽은 무릎을 꿇은 채 비석을 쓰다듬던 손길을 멈췄다. 그는 비석의 윗면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예, 무엇이든지요."

리안은 비석 앞에서 무릎을 한쪽으로 모아 앉은 자세로 겉면에 새겨진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루카리오 서리, 1997년에 태어나 2010년에 잠들다. 그 생애 동안 쌓고 쌓였을 기억은 과연 얼만큼이나 되었을지, 리안은 마음 한켠에 줄곧 담아두고 있던 궁금증을 조심스레 꺼냈다.

"당신은 어떻게... 이걸 견디고 있어?"

그의 심상 속에서 체험했던 그 감각, 상실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은 느낌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가운데를 꾹 누르며 감정의 파동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슬픔이 깃들었을지언정 그에 흔들림조차 없는 조용한 물결과도 같았는데, 리안이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라서 그 이유라도 알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질문을 들은 은엽은 고민에 잠기는 듯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견딘다기 보다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진 거죠. 아니, 받아들였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한 표현일까요."

그의 손가락이 음각을 따라서 움직이며 획을 느릿하게 긋기 시작했다. 마치 '서리'에 새겨진 추억을 더듬는 듯한 몸짓이었다.

"서리는 소소리처럼 제가 알에서 직접 부화시킨 포켓몬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 정도로 버거운 사건이었죠. 제 파트너이기 이전에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극복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언젠가부터는 신기하게도 서리의 부재에 익숙해져 있더군요. '서리가 아직 여기 있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서리는 이제 없다'로 차츰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예리했던 칼날이 시간이 흘러서 녹이 슬고 무뎌졌다고나 할까요. 그 칼날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어루만져야 상처를 입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고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은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 문장씩 따라 이해를 시도해보던 리안의 노력은 어느 부근에서 가로막힌 듯했다. 아마도 상실을 겪은 다음의 시간의 흐름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저 추상적으로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리안은 획 긋기를 끝마친 은엽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그 칼날,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질까?"

그 물음을 들은 은엽은 나직하게 부정의 뜻을 보내왔다.

"아니오. 이건 제 남은 평생동안 제자리를 지킬 겁니다. 그러니......"

곁에서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리안 씨는 저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길 바라요."

리안은 천천히 눈을 뜨고 비석을 응시했다. 누군가가 몇 번이고 쓰다듬었을 돌덩어리의 모서리가 어렴풋이 닳아 있었지만, 그 묵직한 회색은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킬 것처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리안은 조금 전 루카리오의 주인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다. 비석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 한가득 전달되어 오자, 리안은 기억 속 루카리오를 품에 끌어안았을 때 느꼈던 감촉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

리안의 입술이 달썩이자 은엽이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리안은 그 눈가에 어른거리는 감정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당신이 자책하지 않기를 바라."

두 인간은 동시에 말문을 닫았다. 추모 공간에 흐르던 파동에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리안은 고요함이 감정을 다스리고 가라앉혀 줄 때까지 기다리며 탑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몇 번째인지 모르도록 꾸준히 울리던 종소리가 어느 샌가 완전히 사그라들어 있었다. 은엽은 부동자세를 벗어나고 일어선 후 리안에게 손을 내밀었고, 리안은 멍하니 그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은엽은 손을 거둬들이면서 미소를 짓고는 짐짓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소원의 종을 울리러 갈까요?"

리안은 손을 움츠렸다 펴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비석 아래 잠든 루카리오에게 작별을 고하고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어쩐지 무겁고 더디기만 했다. 리안은 추모탑의 둥근 내벽을 따라 층계를 오르며 숨을 가만히 들이쉬었다. 이대로 한없이 계단을 오르다 하늘에 닿는다면 그것대로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타워 오브 해븐의 최상층에 설치된 거대한 종은 주변을 휘감는 바람에도 미동 없이 추모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안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작게 숨을 골랐다. 지상과 달리 서늘한 공기가 가슴속을 갑작스레 파고들어 한기를 남긴 까닭이었다. 가벼운 카디건과 원피스 차림으로는 높은 고도의 추위를 막기에 무리가 있었다. 지난 방문에는 최상층에 오지 않았던 탓에 대비를 못했다는 점이 조금 억울했다. 리안은 조금씩 어깨를 떨면서 온기를 찾아 무심코 옆사람의 곁에 붙어섰다. 오늘 만난 이래로 거리감을 은근히 유지해오긴 했지만 이 정도쯤은 가까워도 괜찮을 것이다. 리안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숨을 소리없이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길 무렵이다.

"리안 씨, 잠시만요."

"응?" 자신을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제 어깨 위로 두터운 옷감이 내려와서 상반신을 온통 뒤덮어 놓았다. 바람결에 싱그러운 향이 언뜻 스치는가 싶더니 예상치 못한 온기가 양어깨와 팔을 감싼다.

"추우실 테니 그거라도 걸치고 계세요."

은엽이 걸쳐 준 외투를 한 번, 은엽의 모습을 한 번씩 돌아보던 리안은 곧 외투의 옷깃을 꾹 쥐고 여미며 물었다.

"고마운데... 당신은 안 추워?"

은엽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매까지 걷어올렸다.

"저는 계단을 올랐더니 덥습니다. 바람에 외투가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만 해 주세요."

"으응..."

리안은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은엽을 따라서 소원의 종 가까운 곳까지 걸어갔다. 은엽의 외투에 팔을 꿰어넣고 보니 펑퍼짐해진 차림새가 마치 옷에 잡아먹힌 듯한 꼴이 되어 있었다. '꽃향기라고 생각했던 냄새가 사실은 옷에서 나는 향기였구나.' 특별한 세제라도 사용한 걸까, 뜬금없는 생각을 흘려낸 리안은 타종봉이 보관된 함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걸로 종을 울리면 되는 건가?"

은엽은 그렇다고 응답하며 보관함에서 큼직하고 길쭉한 나무토막을 꺼낸 뒤, 그것을 리안에게 불쑥 내밀었다. 리안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은엽과 타종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종을 울리는 거야? 당신이 아니라?"

은엽은 눈매를 둥글게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제가 쭉 소원의 종을 울렸으니 슬슬 서리가 다른 사람의 종소리를 듣고 싶어할 것 같아서요. 자기를 위한 종소리라는 사실을 서리는 잘 알 테니 괜찮습니다."

리안은 갑작스레 떨어진 제안에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타종봉을 받아들었다. 그 묵직한 무게가 금방 어깨 밑으로 전해져 온다. 은엽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리안이 종을 울리기를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리안은 조금 막연해진 기분으로 소원의 종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본 종은 초대형 동탁군보다도 더한 위용을 뽐내고 있어서 어지간한 도구로는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나무막대로도 과연 괜찮은 걸까...' 리안은 염려 섞인 생각을 떠올리며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의 운동선수처럼 호흡을 가다듬었다. 타종봉의 손잡이를 굳게 쥔 손가락에 힘이 더욱 들어간 순간 목재 표면에 미세한 금이 생기는가 싶었다. 파동이 실린 막대가 종신부를 강하게 타격하고, 다음 순간 퍼지는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영혼을 울리는 소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바로 이러한 소리인걸까.'

높은 대기의 육방으로 퍼지는 음향은 낮고도 소름이 끼칠 만큼 부드러웠으며, 길고 긴 여운까지 남기며 잦아들 줄을 몰랐다. 리안은 쥐고 있던 도구를 내려놓고 눈을 감은 채로 음색을 느껴 보았다. 추모탑의 아래층에서 듣곤 했던 소리들에서도 이런 느낌이 났었던가, 리안은 기시감을 떠올리면서도 결국에는 종의 구조가 특이하겠거니 하는 결론을 내렸다.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쓸어낸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끝까지 믿었을 결론이었다.

"어... ..."

리안은 볼까지 문질러보고 나서야 자신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기가 찬 공기와 닿아서 식어버린 얼굴을 부여잡고 있으려니, 은엽이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을 띠며 다가왔다.

"이걸로 닦아요."

리안이 타종봉을 휘두른 손과 팔을 허둥지둥 만져보던 그가 서둘러 리안의 손에 쥐여준 것은 하얀 손수건이었다. 리안은 손수건을 쥐고서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못하고 멀거니 은엽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내 종소리 이상했어?"

짙푸른 눈동자에 당혹감마저 올라온 것을 발견한 리안은 한차례 흐느끼기까지 하면서 물었다. 자신이 울고 있는 이유도 알 수 없어서 답답했는데, 이제는 감정까지 북받쳐 오르니 더더욱 미궁에 빠져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오, 전혀요. 오히려 서리가 분명히 좋아할 음색이었는데도요... 손수건 다시 주시겠어요?"

리안은 자신이 직접 손수건을 돌려주었는지 혹은 은엽이 손수 거둬갔는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감아달라는 말을 별생각 없이 따르며 홀로 고민해 보려고 했건만 오리무중인 것은 여전했다. '오늘 뭔가를 해 보려고 했는데 바보처럼 망쳐버렸다. 괜히 만나자고 했나......' 리안은 제 뺨 위를 스치는 천의 감촉에 수치심을 느끼며 한탄 어린 한숨을 쉬었다. 볼이 화끈거리는 이유를 추운 기온 탓으로 돌릴까 하던 리안은 '다 되었다'는 은엽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내려갈까요? 계속 여기 있다 보면 감기에 걸리실까 걱정되네요..."

걱정 일색인 목소리가 반가우면서도 쓰라리게 다가왔다. 또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리안은 눈물을 그치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가 반쯤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놀랐다면 미안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말했지만, 달리 '괜찮다'는 대답 같은 건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보폭만 맞춰주던 은엽은 수 초간의 침묵을 낸 후에야 넌지시 말했다.

"레인저 기지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가시죠, 리안 씨."

파동이 한 차례 꿀렁인 것 같았다. 리안은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는 데 실패하고는 힘없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응."

짤막한 대답 뒤로 이어진 적막은 무덤 속의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마치 나락으로 향하는 길 위를 걷듯이 육중하기만 했다.


타인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는 능력만큼 피곤하고 힘든 건 없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긴 했어도, 지금만큼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한 능력임이 틀림없었다. 은엽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삼십 분 전에 궐수시티를 떠나서 이제 물풍경시티에 들어서고 있었으며, 차량 내부에서는 지시등 깜박이는 소리나 대시보드 카메라가 동작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쥐죽은 듯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리안은 자신이 차멀미를 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제쳐버리고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에 집중했다. 더 정확하게는, 옆좌석에 앉은 인물의 파동을 읽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원래도 조용했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더 조용해. 화를 내기 직전인 걸까.' 무심코 떠올려보는 기억 속에서 은엽이 누군가에게 표출했던 분노는 가히 위태로울 정도로 폭발성이 짙었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낼 때가 제일 무섭다고 했는데, 은엽이 정확히 그러한 유형의 인물이었다. 리안은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낼 만한 타당한 근거를 하나씩 짚어 보았다. '일단 밀착형 신체접촉을 허락 없이 했고, 연락을 무시했고, 그 과정에서 걱정과 스트레스를 적잖이 유발했을 테고, 옛 파트너의 기일에 막무가내로 만나자고 했고, 또... ...난 대체 왜 울었지?' 이 와중에 제 손으로 쌓은 업보가 많기도 참 많았다. 리안은 자기자신에게 어처구니 없어진 나머지 한숨을 마구 삼켜대며 창밖을 한참 노려보았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그와 만나자고 한 걸까. 초점이 풀려가는 시야 속으로 뇌문시티와 이어지는 도개교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다리를 건너고 도시를 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인저 기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은엽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대화. 대화가 필요해.'

머릿속을 퍼뜩 스친 문장에 깨달음을 얻은 리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그대로 창문에 머리를 대차게 부딪쳤다. 쿵 하는 커다란 소리가 지리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시원스럽게 쫓아내 버렸다.

"리, 리안 씨?"

옆에서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자동차는 널찍한 갓길로 방향을 틀었다. 리안은 충격에 얼얼한 머리를 손으로 감싸쥐며 다급히 말했다.

"아냐, 난 괜찮아. 괜찮으니까... 바로 기지에 가지 말고 16번 도로에 가자."

"......예?"

고요 일색이던 파동이 찰나에 요동친다. 리안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은엽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16번 도로에 있는 미혹의 숲으로 가 줘. 부탁할게."

걱정과 혼란으로 흔들리던 눈빛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의 입술이 몇 번인가 달싹였지만, 끝내 흘러나온 문장은 물음이 아닌 수락의 내용이었다.

"......알겠습니다."

갓길에 멈춰섰던 자동차는 다시금 움직여 차도 위로 복귀했다. 은엽은 목적지를 새로이 정한 이유를 묻지 않았으나 그 내면의 감정선은 길게 너울치고 있었다. 리안은 도개교의 붉은 외관에 시선을 던지며 한숨 아닌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분노의 감정이 담긴 파동은 아니었으므로 조금이나마 시름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혹의 숲은 생명이 완연히 흐드러진 풍경을 방문자들에게 내어주고 있었지만, 숲 특유의 고요하고 의뭉스러운 분위기만큼은 수 년전과 변함이 없었다. 초입을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면 보이는 공터에는 조로아크의 환영이 깃들지 않아서인지 리안은 과거 자신과 포켓몬들이 은거했던 장소를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난 공터는 천연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야생을 그대로 간직함으로써 외부의 접근을 쉽게 허용해주지 않을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리안은 숲의 따스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제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인물을 돌아보았다. 공터의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던 은엽이 그 시선을 느끼고 보폭을 넓혀서 다가와서 마침내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형태가 되었다. 의문이 담긴 파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서, 리안은 제 속눈썹에 부딪히는 햇볕을 느끼며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우리, 대화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어쩌면 그 파동은 의문형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리안은 자신의 파동 감지력에 끝내 스스로 의심을 품고 나서 은엽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어보이던 얼굴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차분해졌다가, 곧 입가에 미약한 미소를 떠올려낸다. 어쩐지 처연해 보이는 웃음기가 신경쓰인 리안은 눈길을 아래로 향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당신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아뇨, 저도... 마침 당신께 여쭈고 싶은 몇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만......"

다만. 리안은 긴장감으로 조여드는 가슴에 무의식적으로 헛숨을 뱉으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은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다음의 문장을 꺼낸다.

"개인적인 대화가 될 텐데 장소가 지나치게 트여서... 조금 더 협소한 공간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해는 마시고요...' 덧붙여지는 어절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던 리안은 뒤늦게나마 그의 말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회의실 같은 장소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은엽이 고개를 힘주어 끄덕이자 리안은 냉큼 그를 이끌고 공터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레인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해지는 알맞은 장소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최초에 미혹의 숲으로 들어서면서 세웠던, '자신의 모든 생각을 풀어내 버리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뒤죽박죽으로 얽히고설켜서 이제는 마치 잔가시가 빼곡히 돋아난 덩굴이 가슴 속에 꽉 들어찬 것 같았다. 리안은 이 모든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목적지를 향해 걷는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자라난 가시덩굴을 꾸준히 다듬고 또 다듬었다. 속마음을 급히 꺼내느라 가시에 쓸려서 신음할 일이 없도록, 그리고 이 혼란스러움에 자신의 감정을 그릇되게 내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리안이 은엽을 인도하여 다다른 곳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모인 장소 중에서도 나무들의 좁은 틈새 속에 위치한 은혈이었다. 야생 포켓몬들이 안식처 삼아 찾아오는 안전한 공간, 또는 레인저들이 외부의 눈을 피해 휴식을 취하곤 하는 아늑한 공간이기도 했다. 비좁은 오솔길을 걸어오느라 옷에 나뭇가지며 나뭇잎이 잔뜩 걸려나온다는 점만 제외하면 단둘이서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때마침 그들이 들어온 은혈의 중앙에는 나무 그루터기가 자리하고 있어서 두 사람은 그것을 원형 테이블 삼아 마주보고 앉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숲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여기로 왔었다면......'

리안은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은혈의 여기저기를 살피는 상대방을 지켜보면서 과거의 어느 날을 가정했다. 좀처럼 다다르기 어려운 장소에 고립되었다면 과연 이 사람이 나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잠자코 상상에 잠겼던 리안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신경을 쓰는 일은 관두기로 마음먹고 목을 가다듬었다. 자기가 들어도 어색한 헛기침 소리가 공간 안을 맴돌았다. 목소리가 어디론가로 새어나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성 싶었다. 리안은 자그맣게 한숨을 쉬고는 저와 마찬가지로 긴장을 올리는 은엽을 향해 물었다.

"누가 먼저 시작할까? 궁금한 점을 가진 쪽이 먼저?"

조금씩 망설이는가 싶던 그는 이내 결심의 빛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괜스레 콩닥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그의 첫 질문을 기다렸다.

"제가 따라큐의 습격을 받아 쓰러졌을 때 말입니다. 그때... 리안 씨가 제게 정확히 어떤 구호조치를 취해주셨는지..."

리안은 자신의 얼굴이 금세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까닭을 따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작부터 반칙이잖아. 상대방 역시 질문을 하면서 무안함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리안은 한계를 모르고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리듯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궁금증을 나름 쉽게 해결해 줄 수는 있었지만, 혼자서 몇 번이고 되돌아보며 곱씹었던 내용을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 날 밤, 탈포켓몬에게 강력한 습격을 당했던 은엽의 상태는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었다.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공격당한 탓에 생명의 파동은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고, 실제로 리안은 그의 몸뚱이를 붙들었던 손가락들 사이로 생명력이 새어나가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었다. 리안은 그 순간에 자신이 뱉었던 절규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상처를 지혈하려고 했었지. 당신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시도해보려고 했거든. 그러면서 어쩌다... 내 파동이 저절로 넘쳤고... 그게... 내 생각엔 치유파동이랑 비슷했는데... 아무튼 피를 멎게 하는 데 성공하긴 했어."

'만일 그때 그런 기적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리안은 이 섬뜩한 가정문을 떠올리고 덜덜 떨리려는 어깨를 간신히 추스르고 문장을 한 차례 끊었다. 매초가 백년처럼 느껴지던 순간의 일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기란 역시 무리여서, 리안은 자신의 손바닥을 하릴없이 빤히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다.

"그래도 당신이 의식을 찾질 못해서, 그, ...내가 먹지 않고 따로 빼뒀던 기력의 조각을 당신한테 억지로 먹였어. 효과가... 있긴 있었는데. 그, 많이 불쾌했지. 미안해......"

말을 끊임없이 늘어뜨리면서 힐끔대는 시선으로 살펴 본 상대방의 안색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그에 반해 전달되어 오는 파동은 적나라하게 흔들거리고 있어서 은엽의 낌새를 더욱 알 수 없어지게 된 리안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이보다 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심정에 침몰하는 동안 세 호흡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리안 씨 덕분에 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불쾌감 따위를 느낄 여지가 있을까요."

살짝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은엽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리안이 멍하니 손을 내리자, 그는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말문을 이었다.

"오히려 리안 씨께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죠. 어떻게 보은을 해 드려야 할지는 고민을 해야겠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 나중에 리안 씨와 좀 더 깊은 대화 시간을 가져보고 싶군요."

리안은 문자 그대로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이런 주제는 예전에 진작 못을 박아뒀던 것 같은데?' 자신의 기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은엽을 향해 리안이 말을 횡설수설 뱉는다.

"당신이 일어나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니까 보은 같은 거 안 해도 돼. 다른 질문 있어? 뭐라도 좋으니까 다른 걸 물어 봐."

은엽은 재빠르게 쏟아지는 문장 모음을 듣고는 짤막한 고심을 거친 질문을 내는 것으로 리안의 말에 따른다.

"리안 씨께서 오늘 말고 최근에 서리를 찾아가신 적이 있었는지요?"

이번에는 시간이 아예 멈춰버린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언뜻 방심하고 있었던 청자에게는 벽력과 같은 내용이었는지라, 리안은 기이하게 뒤틀리는 속내에 진땀을 흘리면서 힘겹게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비석 위에 먼지가 거의 쌓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쩐지 당신이 서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죠."

'경찰의 직감이란... 파동사의 것을 훌쩍 뛰어넘는구나.' 리안은 이제 자신의 머릿속이 조금씩 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상대방은 어쨌거나 국제경찰이었고, 따라서 언젠가는 반드시 들켰을 진실이었다. 그 시기가 지나치게 빨라서 더욱 강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일터였다.

"......그래. 서리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주일 쯤 전에 찾아갔었어."

리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털어놓고는, 제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마주하고 말문을 우뚝 닫아버렸다. 의구와 의혹이 하나로 합쳐져 일렁대는 파동에 지레 겁을 먹게 된 리안은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 아예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게 좋겠다는 판단으로 바늘을 기울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산들바람이 빽빽한 나무기둥 사이로 속살거리며 새어나가는 동안 리안은 호흡을 성글게 가다듬었다. 말문을 열기 위해 입을 벌리는 단순한 행위가 이토록 힘겹게 느껴지다니.  

"...내가 서리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내가 당신의 기억을 들여다본 적이 있어서야."

은엽의 눈에 당황하는 빛이 강렬하게 서렸다. 일반인이었다면 당장에 거부감을 표하고 자리를 떠났겠으나, 리안은 은엽이 제아무리 당황하더라도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리라는 근거없는 생각에 빠져서 이야기의 타래를 거듭 잡아당겨 댔다.

"당신을 구출한 다음 날, 의식불명에 빠진 당신을 깨우기 위해서 당신의 심상세계에 들어갔었어. 거기서 당신의 기억... 악몽들을 모두 지켜봤어."

이제 은엽이 보이는 얼굴과 표정은...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긴 나였어도 저렇지. 리안은 자신의 예상 그대로인 반응을 보면서 들리지 않을 한숨을 쉬고는, 이야기의 가속을 멈추고 증명문을 문장 별로 끊어서 내밀었다. 그것이 한마디마다 잔인한 설명일 줄도 일부러 외면한 채였다.

"...높새의 목덜미에 남아있는 흉터, 그건 삼삼드래가 물어서 남긴 상흔이지."

"... ...그걸 어떻게,"

"당신의 우측 상완에는 화상 흉터가 남아있어."

"... ... ..."

"당신이 호흡계통 질병 때문에 병원에 장기간 입원한 적이 있었을거야."

"... ... ..."

자신의 목소리가 절반쯤 밀폐된 공간 안을 홀로 맴돌이치는 느낌이 기이했다. 파르륵 떨리는 기류가 새삼스럽게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리안은 그러한 감각의 묶음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한 파악을 일부러 피하면서 속엣말을 섣부르게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더 이야기하진 않을게. 하지만 이걸로도 설명이 됐을 거야. 나는... 당신이 겪었던 일들을 당신의 내면에서 있는 그대로 지켜봤어. 당신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당신이 어떤 고난길을 걸어왔는지, 전부 다. 그랬던 주제에 나는 당신의 기억을 이용해서 오늘의 만남과 같은 수작을 부렸어. 당신이 겪은 아픔을 내 사적인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써먹었다고."

가시를 뱉는 것처럼 속이 마구 쓰라려 왔지만, 이것으로도 아직 충분하지 않음을 느낀다. 마치 오랜 기간 막아두었던 수도의 밸브를 열었다가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의 수압 때문에 도로 잠그지 못하는 상황과 동일한 꼴이 되었다. 숨을 쉬는 것을 제외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는, 그리고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않는 은엽의 그 모습들이 꼭 세상이 끝나더라도 제 말을 듣고 보겠다는 태도처럼 보여서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한 번 꺼낸 문장은 맥락을 맺어주어야 했기 때문에 리안은 속에 담았던 말들을 꾸역꾸역 꺼내놓았다.

"나는 당신의 기억을 훔쳐본 것 외에도 숨겨온 행적들이 많아. 내가 과거에 전장에서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목숨을 취한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아? 나는 그런 주제에 지금 와서는 그 과거를 어떻게든 외면해 보겠다고 위선자처럼 발버둥치고 있잖아. 그리고 이전에 현대로 이미 한 번 떨어진 전적이 있는데도 당신에게는 내가 시간여행을 처음 한 것처럼 가장했어. 당신은 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솔직하게 대해줬는데, 나는 당신한테 거짓말만 일삼았다고. 다들 나보고 솔직하다고들 하는데, 그건 틀렸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 거짓투성이란 말야! 당신이 이대로 날 내버려두고 여길 당장 떠나더라도 나한테는 할 말이 없다고!"

가슴 깊이 묻어뒀던 걸 모조리 파헤쳐서 드러냈는데도 속은 여전히 쓰리고 고통스러웠다. 본래 꺼내려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꺼내 버려서이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마음이 편해질 것을 위해 듣는 사람의 입장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무책임하게 진실을 드러낸 마당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상대방이 어떤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줄까봐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역하게 다가왔다. 좌절감과 죄책감 때문에 울음이 치솟았지만, '대체 뭘 잘했다고.' 리안은 스스로를 다그쳐대면서 몸을 한껏 웅크렸다. 지금 이 순간조차 숨기고 있는 진실, 즉 자신은 죽음을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있다는 진실만큼은 절대로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자신에게 괴로운 기억이기 이전에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 뻔히 보였으므로, 그러나 이마저 위선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리안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호흡을 고르는 은엽의 행동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묵직한 움직임이 숨을 더욱 죽여놓는다.

"......리안 씨."

나직한 음성이 리안의 이름을 발음했다. 무척이나 조용하지만 강렬한 힘이 실려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이에 고개를 들어보면, 은엽이 자신의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 손을 쳐다보기만 하니, 은엽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간곡한 어조로 말한다.

"잠시 이리로 와 주시겠습니까?"

리안은 그 말을 듣고서도 한참을 머뭇거렸으나, 끝내 그 손을 잡았을 때... 은엽이 다른 손으로 그의 팔꿈치를 감싸쥐고 부드럽게 당겨 안는 것이다. 그 품속으로 무력하게 이끌려 들어간 리안은 최초로 따뜻한 향을 맡았으며, 그 다음에는 포근한 온기를 느꼈다. 동결의 저주에 걸린 채로 죽음의 공포에 빠져 마구 몸을 떨었던 날이 떠올라서, 리안은 숨을 확 죽이며 고개를 내려버린다. 지금의 이 품은 그날 자신이 들던 품처럼 따스했던 것이다.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마저 따뜻하여, 리안은 강제로 얼어붙게 만든 숨이 저절로 녹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제 질문을 모두 받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적당한 선에서 답해주실 수도 있었는데, 가감없이 말씀해주셔서 조금 벅찬 게 사실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그 중에서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그 침착하고 조곤조곤한 어조는 순식간에 리안의 머릿속을 채운 공포심을 몰아내 가라앉히고는, 전혀 다른 성질의 감정인 혼란스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왜 나를 이렇게까지 따뜻하게 대해 주는걸까. 화를 내야 마땅할 텐데. 내게서 당장 떨어지는 게 당연할 텐데....' 그러나 그는 리안의 혼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리안의 눈가에 남아있는 물기를 엄지로 조심스레 쓸어냈다. 리안은 크게 솟아나려는 훌쩍임을 가슴 안쪽으로 꾹 밀어 넣으며 이 악문 소리를 냈다. 머잖아서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토닥임이 다가온다.

"솔직함이라는 개념은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솔직함이란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지금껏 보아 온 리안 씨가 바로 그러한 인물입니다. 당신은 스스로가 말씀하시는대로의 거짓투성이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두 사람의 주변을 둘러싼 대기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리안은 그러한 감각에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지만 여전히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흘러넘치도록 다정한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은엽은 이를 너그러이 여기고 그다음으로 계속 이어 말했다.

"당신은 제 기억을 악용했다 하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제 기억을 엿보셨다 한들 나쁜 의도에서 시작된 일도 아니었죠. 당신이 소원의 종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까닭 또한 저를 대신해서 고통을 승화해내셨기 때문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리안 씨께서 서리, 그 아이를 기억해주신 것 자체가 저로서는 몇 번이고 감사를 드려도 부족한 일이에요."

은엽은 말을 잠시 멈추고 가슴 깊은 곳에서 숨을 들이마셨다. 리안이 무의식적으로 그 호흡을 따라서 숨을 마시니 마음이 이전보다 더 진정되는 것 같았다. 희미한 웃음기와 함께 짧은 부탁이 다가온다. "잠시 고개를 들어 저를 봐 주시겠어요?"

리안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들고 은엽을 바라보았다. 바다색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표정을 살피는 듯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리안은 그 흔들림을 따라서 멍하니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이와 같이 깊게 출렁거리는 파동을 최근의 언젠가에도 종종 느껴본 적이 있어서, 리안은 문득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바로 헤아리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저는 당신이 과거에 행했다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죄를 묻겠노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심판관같은 인물이 아니니까요."

리안은 눈물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씩 떼어내는 손길을 느끼고 무심코 눈꺼풀을 내리감았으나, 그 손길은 이윽고 턱선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리안의 턱을 살짝 들어올린다. 그렇게 눈이 재차 맞춰진 순간에 진한 푸른빛이 리안의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만...... 저는 당신이 앞으로 걷고자 하는 길을 곁에서 응원하고, 당신이 바라는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어요."

리안은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보느라 눈을 흐리멍텅하게 떴다. 문장이 어휘의 단위로 조각조각 분해되어 머릿속을 떠도는 기분이었고, 이해력은 둔감 상태에 빠진 채 느리게 회전하고 있었으나, 단어들이 하나씩 연결되기 시작하면 열기를 얻어 차츰 속도를 더해나갔다. 그렇게 귀를 기울였을 때 다가온 음성은 듣는 이의 뇌리에 또렷한 흔적을 차근차근 남긴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리안 씨. 당신은 괴물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 더 나은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제가 본 중 가장 선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에요. 더욱이, 이미 당신은 저를 포함해 많은 수의 생명을 구해내셨습니다. 이 또한 사실이지요."

리안의 얼굴 언저리에서 머무르던 은엽의 손은 아래로 내려가 가슴 언저리에 놓였던 작은 손을 찾아서 쥐었다. 리안은 숨을 헐떡이던 것도 잊고서 하염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가 내어주는 눈빛과 파동은 이제 리안에게 분명한 뜻을 전달하고 있었으므로, 리안은 주의깊게 숨을 쉬려 노력하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애타게 기다렸다.

"맹세했지 않았습니까…. 당신 곁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요."

시간의 흐름 자체가 소멸해 버린 공간 속에서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유이한 지표가 되었다. 리안은 열 번의 호흡만에야 비로소 말문을 급하게 텄다.

"내가... ..."

그리고는 갑자기 또 눈물이 솟구쳐서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닦아주며 잠자코 기다리는 모습을 바라만 보던 리안은 서투르게 숨을 내쉬면서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내가 성가시지 않았어?"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가, 내가 소름끼치지 않아?"

"절대로요. 단 한번도, 앞으로도 리안 씨께 그런 마음을 품을 일은 절대 없어요."

은엽은 단호한 어조로 문답을 끝맺고는 작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 속에 섞인 탄식성은 안타까움이 되어서 리안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양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이 없었더라면 리안은 자신이 그 품에서 그대로 사라졌을 것이라는 착각을 흘린다.

"그러니 제가 부탁을 드리건대, 리안 씨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기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대하는 언행을 그만둬 주십시오. 정 어려우시다면 제가 곁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부탁은 지나치게 막연했기에, 이를 듣고 나서도 시도해 볼 엄두가 한참 떠오르질 않았다. 리안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심정으로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어떻게?"

"리안 씨의 마음을 진솔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당신이 가장 잘 해내실 수 있는 일이기도 하죠. 저는 여기서 가만히 듣고 있겠습니다."

너무나 까마득해서 제 시야로는 영원히 들어오지 않았을 해답을 은엽은 너무나 쉽게 제시해 주었다. 리안은 불현듯 치를 떨었다. '제일 공명정대하게 행동해야 할 사람이 아까부터 자꾸만 반칙을 저지르고 있어.' 그 예전의 어느 날, 낯선 병실에 앉아 낯선 세계를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에게서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를 제안받았던 순간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리안은 지금에 와서 이 기억이 떠오르는 까닭을 잘 알지 못했지만, 차라리 그를 탓하고 싶을 만큼 얄궂다는 생각까지도 함께 들고 말았다. 끝내 체념에 잠긴 리안은 자신의 내면 가장 옅은 곳을 배회하는 속말부터 차례로 건져내기 시작했다.

"당신과 처음 만났던 시기에는 그저 내가 당신에게 받은 것들을 소화하는 데 정신이 없었고,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 날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야. 나는 베풂에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는 당신이 대책없이 선량한 줄로만 알아서... 그래서 오기가 생겼어. 당신이 날 돕는 데 어떠한 의도를 가졌더라도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했어. 난 내가 받은 걸 되갚지 않고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거든. 어떻게... 우리가 재회한 다음에는, 드디어 당신한테 빚을 갚을 기회를 얻었다고 여겼는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은엽이 제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를 절대 잃고 싶지 않았고, 그가 자신으로써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그와 함께 밤하늘 속의 무수한 별을 헤아리고 싶었으며, 그가 품고 있는 바다가 자신으로써 풍요로워지길 바랐다. 막 세상 밖으로 나와서 모든 것을 낯설어하던 시절의 자신에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고, 그 동안에는 울타리를 넓히기를 꺼리는 것보다 예상 밖으로 넓게 드리워진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그 안에 들어온 존재들 하나하나에 애착을 가지게 되니 관계의 단절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스러운 감정에 짓눌려 질식한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서, 리안은 이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진정한 속마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꾸만 당신한테 시선이 가고, 당신만 보면 웃음이 나오고, 어떨 땐 울고 싶어져. 당신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당신을 만나서 이 세계에 적응하고 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했어. 당신이 앞으로도 계속 내 옆에 있어야 정말로 행복할 것 같아.”

말을 한바탕 쏟아낸 리안은 잠시 숨을 헐떡이는 동시에 숨을 보충하며, 상대방이 무엇을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가장 밑바닥에 남은 응어리를 드디어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해.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정도로, 당신을 예전부터 쭉 사랑했어."

가슴 속을 메웠던 감정의 덩어리를 모두 토해내고 드는 탈력감이 상상 이상이었다. 더불어서 은엽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도저히 들지 않았기에, 리안은 상반신을 맥없이 늘어뜨리고 보이는 넓은 가슴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무심코 취한 행동이지만 단단한 가슴 너머에서 들리는 깊은 숨소리와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어째서인지 편안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리안은 그렇게 자세를 유지하며 가만히 은엽의 반응을 기다렸다.

"......저도, 리안 씨와 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요."

곧장 밀물처럼 밀려오는 애정의 무게에 짓눌린 리안은 물 밖으로 나와 호흡곤란을 겪는 총어처럼 다시금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를 살며시 끌어당기는 감각 뒤로 정수리에 무게감이 잠깐 실리는가 싶었다. 리안은 익숙치 않은 듯 익숙한 그 감촉에 금세 취해서는 모든 몸짓과 사고를 멈춰버리고, 오로지 오감만을 이용해서 은엽이 전달하는 마음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당신을 사랑해요. 제 삶을 이루는 모든 요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신 당신께... 제 남은 생을 감히 바치고 싶습니다."

리안은 자신의 등을 조심스레 더듬는 손길에 반응하여 상대방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숨막힐 정도의 울음이 곧장 올라와서, 리안은 이에 대한 사실이나 까닭을 한참 모르는 채로 은엽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정신없이 울고 또 울었다. 자신을 품어준 이의 옷섶이 물기에 흠뻑 적셔지는 것도 모르고, 자신을 열심히 달래는 토닥임조차 인지하지 못하며 완전히 지칠 때까지 한참을 울었다.


"아까 전 질문을 드렸을 때 취조를 하는 것처럼 들렸었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아냐, 나야말로. 무작정 연락 무시한 거 미안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왠지 겁이 났었어."

"이렇게 되면 피장파장이라고 여기는 게 낫겠군요. 하지만 전 당신을 탓하지 않아요. 이해했으니까요."

"왜 그렇게 성인군자처럼 구는 거야...... 당신의 그런 태도는 정말 예전 그대로잖아."

"그렇다면... 당신이 갑작스레 밝혔던 진실처럼 저도 비슷한 내용을 밝혀볼까요."

"...불안하지만, 들을래."

"사실은... 오늘 이 숲에 오기 직전까지는 리안 씨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대체 왜......?"

"...우리의 나이차 때문에요. 수백년 전의 과거였다면 몰랐겠지만, 요즘 시대에서는... 그다지 좋지 못한 시선을 받을 만한 격차거든요."

"따지고 보면 내가 당신보다 수백년을 앞선 사람인데, 그럼 나이차가 다 무슨 소용이야."

"아...... 그럼... 제가 리안 씨를 누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절대 싫어. 차라리 내가 당신을 '너'라고 부를래."

"그것도 괜찮네요. 저는 리안 씨가 절 어떻게 부르시든 다 좋습니다."

"그냥 '씨' 빼고 내 이름만 불러 줘. 너한테 리안 씨라고 불리면 거리감 느껴져서 싫거든."

"하하, 네. 리안... 그러고보니 이 대화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데요."

"실제로 똑같은 얘기를 네 심상세계에서 했으니까. 게다가 너는 거기서 날 누나라고 부르려고 했는걸."

"...심히 묘했겠군요. 그러면 저는 그 때부터 리안에게 마음이 동했던 걸까요."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뭐, 꿈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하니까."

"그것도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는 문장이네요. 리안은 언제부터 저를......?"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이 숲에서 너를 제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

"자각한지는 얼마 안 됐어. 꽤... 힘들더라고."

"그런가요... ...그렇죠."

"...응. 우리, 새삼 먼 길을 돌아왔구나 싶어."

"그렇네요... 괜히 미안해지는 걸요. 혹시 제게 원하시는 바가 더 있나요, 리안?"

"...갑자기? 음... 당장 떠오르는 건... 글쎄. 면도한 쪽도 좋지만 역시 수염 있는 쪽이 더 낫다는 정도?"

"예? ...왜죠?"

"어? 일부러 기르는 거 아니었어? 그냥... 음... 내 취향이라서? 이렇게 맨들맨들한 것보다는 오돌토돌한 감촉이 더 중독성 있고 좋으니까."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고려해 보도록 하죠."

"네 마음대로 해.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지,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잖아."

"예... ...조금 더 이렇게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 상당히 오랫동안 여기에 있긴 했지. 슬슬 더운데 나갈까? 은혈에 찾아올 손님이 우리 말고 또 있을지도 모르니."

"네, 그러죠."

하지만 리안의 퉁퉁 붓고 짓무른 눈가를 나른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은 영 멈출 줄을 몰랐다. 리안은 자리에 이대로 계속 버티고 싶은 욕구를 꾹꾹 밀어내면서 눈앞을 느릿하게 떠도는 은엽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다간 한바탕 감정을 태우고 잔류하는 열기에 질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안은 한껏 움츠리고 있던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서 너른 품을 벗어난 뒤, 앉은 자세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엽은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비좁기만 한 오솔길을 뚫고 지나가기 위해 리안이 앞장을 섰을 때, 은엽은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입을 뗐다.

"리안."

"응, 은엽."

리안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마주한 눈빛은 이미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요."



리안은 까마득한 예전부터 해피엔드를 바랐지만 그 개념을 진실로 믿지는 않았다.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리고 끊임없이 행복하기만 할 것도 아닐 테다. 더러는 일상적인 다툼에 마음이 상하고, 때로는 전쟁 같은 일과를 보내면서 그 안에 스며있는 악의를 느끼고 골치를 썩이기도 할 것이다. 슬픈 일을 겪게 되면 목놓아 펑펑 울기도 할 것이다. 가끔이면, 먼 시간대에 두고 온 이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꼼짝하지 못할 때도 있을 테다. 그럴 때면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다음처럼 속삭이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언젠가 꿈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스치는 것이 정말로 그 애가 말한 것인지, 혹은 자기암시처럼 떠오른 말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으므로, 리안은 지금 자신이 붙잡고 있는 손을 더욱 힘주어 잡고는 했다.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푸른 눈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바다처럼 느껴지는 까닭에, 리안은 제 감정을 메마르게 만들 추위조차 견뎌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이상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리라고 안도할 수 있었다.


<가뭄의 끝> 본편 마침. 


↓이하는 주저리 사담 푸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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