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사막, 숲, 초원 (上)

[번외] 어느 지망생의 시점.

BGM



한여름의 향취가 서린 숲속은 활기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이로써 나무들이 색을 더욱 짙게 머금어 강한 생명력을 발산할수록 이들이 이루는 벽은 한결 견고해지고, 벽 안으로 드리워진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풍요로운 낙원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낯선 미로가 되곤 하였다.

카말라 에버렛은 초록 일색인 수해(樹海) 속에서 꼼짝없이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다. 그 옆으로는 흡사새의 형태를 취한 포켓몬이 정찰을 하는 듯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린 아이를 두고 일정 거리 이상을 떨어지지 않아서 빽빽한 숲속에서는 길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에 짓눌려 스러져가는 유적지 안에서 정형화된 루트를 일생동안 떠돌다 나온 심보러에게 살아있는 숲이란 미궁이나 다름없었으니, 난관을 겪고 초조함이 떠오르는 것은 인간이나 포켓몬이나 매한가지였다.

카말라는 열 두살짜리 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으음…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데 차라리 날아서 가면 안됨까, 심보러 씨?”

주위를 요리조리 살피던 외눈이 빙글 돌아서 인간을 쳐다보았다. 가본 적이 없는 장소로 이동하지도 못하거니와 여행에 숙련되지 않은 인간을 불안정한 사이코 파워로 들어 올려서 동반비행을 시도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카말라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깜박이는 눈을 마주하며 시무룩한 눈빛을 만들었다.  

“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슴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세월을 허송으로 보내는 게 얼마나 따분한 일인지 심보러 씨도 잘 알고 있지 않슴까?”

심보러는 난처한 낯으로 꼬리날개를 흔들었다. 어쩌다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과거를 되짚어보는 심정이 착잡하기만 하다.

언제쯤 모래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지 모르는 세상에 갇혀있던 포켓몬에게 어린 인간이 다가와서 드넓은 세상을 같이 돌아보자며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이 꼬마가 보금자리를 내팽개쳐 두고 모래바람 속을 가로질러서 낡은 성까지 쳐들어왔을 때 심보러의 고리타분한 일과가 무너져버리고, 꼬마가 부모나 친구 대신 야생의 심보러를 말동무로 삼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차갑고 건조한 모래빛 세계에 따사로운 태양이 들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백 년에 이르는 시간을 야생에서 보낸 심보러의 눈에는 이러한 빛이 참으로 낯설고도 매혹적으로 비쳤으나, 한편으로는 이 여린 생명이 미지의 위험에 밀려 스러질까 걱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것이 심보러가 수호의 대상을 수천 년 묵은 유적지에서 올해로 고작 열 하고도 두 번째 여름을 맞이한 아이로 바꾼 까닭이었고, 아이가 단출한 준비를 거쳐 사막 바깥의 장소로 뛰쳐나온 이후로는 부릅뜬 눈에 힘을 뺀 횟수가 날갯대를 꼽을 정도였다.

‘그 심보러, 네가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버거워 보이는데.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라면 트레이너 스쿨에서 기초부터 익힌 후에 실력을 쌓는 게 어때?’

도로 위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엘리트 트레이너가 카말라의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며 다짜고짜 배틀을 걸어온 후 던진 말이었다. 심보러에게 제대로 지시를 내릴 줄 모르는 카말라와 상대 포켓몬을 파트너의 지시 없이도 공격하려 하는 심보러의 모습은 초보 트레이너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엘리트 트레이너의 충고는 원대한 여행을 꿈꾸고 있던 카말라에게 뼈 아픈 충격을 주었고, 결국 카말라는 이에 수긍하여 트레이너 스쿨이 있는 성신시티를 목적지로 정하고 먼 거리를 열심히 걸어온 참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광활하게 트인 사막에서 지내왔던 카말라에게 길이 미로처럼 이리저리 얽힌 숲은 최대의 고비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하나지방을 단순하게 도식화한 지도 한장에 의지해서 돌파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니, 카말라가 숲을 통과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희미하게 보이는 오솔길을 표지삼아 걷는 것뿐이었다. 식물이 성장하는데 환상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숲속에서 길의 흔적이 금방 지워지는 경우는 흔했으니,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버린 카말라와 심보러는 그대로 녹색 감옥에 갇혀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심보러는 이런 상황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인간에게 감탄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불안감을 멀리 쫓아내려고 일부러 아무 이야기나 꺼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카말라는 씩씩한 태도를 고수하며 풀숲 사이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나무를 오르기도 했다. 물론 그런 방법으로 길이 바로 보일 리는 만무하다.

“…근데 꼭 배틀하면서 여행을 다녀야 하는 걸까요? 으음, 전 그냥 세상만 둘러보고 싶은 것뿐인데~ 아무튼 기초 정도는 알아야 하니 스쿨에 가긴 가는검다만, 거기서 이론만 가르쳐주지는 않겠죠? 하나지방 여기저기서 많은 학생들이 모일 텐데 그분들과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거라면… 앗, 그건 별로 재미없을 거 같슴다…. 다들 심보러 씨의 적수도 되지 못할 텐데요!”

카말라는 한숨을 쉬는 것처럼 눈을 내리감는 심보러를 보고 작게 킥킥거렸다.

“잘하면 심보러 씨 동료로 톱치 씨를 함께 데리고 다닐 수도 있겠슴다, 어어, 심보러 씨가 꽤 오래 살았으니 동료라기보다는 동생이려나요? 그러고 보니 심보러 씨 나이가 어떻게 되심까? 톱치 씨가 저랑 엇비슷한 나이이긴 함다만.”

물론 포켓몬이 인간의 언어로 대답을 해줄 수 없으니 침묵만이 감돌 뿐이다. 숲에 내려앉은 고요는 짧은 시간 만에 청각을 먹먹하게 만들 만큼 묵직했고, 심보러는 카말라가 자그마한 소리로 뱉는 한숨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밝은 낯을 하고 분위기를 띄우려 해도 내면의 불안감마저 막지는 못했다. 카말라는 발치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툭 걷어차며 중얼중얼 말했다.

“오늘 안으로 숲을 나가게 된다면 라일리네 집에서 신세를 져야겠슴다….”

‘오늘 안으로 나갈 수 있다면 말임다,’ 심보러는 카말라가 애써 감춘 마디까지 읽어내고 눈을 절반쯤 떴다.

언제 어디서 야생 포켓몬이 뛰쳐나오는 지 알 수 없는 이상 한시 빨리 길을 찾아서 숲을 나가야 하는데, 조바심으로 날카로워진 에스퍼 포켓몬의 감각에 느닷없이 포착된 기이한 기류가 있었다. 아마 카말라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숲의 정적은 어떤 소음이든지 몇 배의 크기로 키워낼 수 있었고, 이로써 멀지 않은 방향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리게 해 주었다. 카말라는 반색하며 나무 기둥을 타고 아래로 주르륵 내려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의 풀숲으로 뛰어들기 직전, 심보러는 사이코 파워로 카말라의 움직임을 가로막아 버렸다. 당황한 낯이 포켓몬을 향하지만 신중한 눈빛은 풀숲 너머를 가만히 쏘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감시자의 해묵은 본능이 인기척에 숨겨진 다른 무언가를 읽어낸 것이다.

“심보러 씨…?”

카말라는 심보러가 자신을 놓아준 후 풀숲 속으로 천천히 날아드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의 동공이 자기 쪽을 힐끔 향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가까이 붙어서 천천히 따라와.’라는 의미임을 알아차린 카말라는 얼른 심보러의 뒤에 달라붙어서 살금살금 풀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풀을 헤치는 소리까지 죽여가며 어느 정도 걷자, 앞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던 나무들이 점차 듬성듬성해지는 지점이 나타나고 두 사람이 그 위를 거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카말라는 심보러를 따라서 커다란 나무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낯선 사람들의 동향을 지켜보았다.

근처에서 개울이 졸졸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서 드디어 숲의 언저리에 다다랐다는 짐작이 드는 찰나, ‘이 깊은 곳까지 무슨 일인 걸까요~…’ 카말라가 떠올린 의문은 금방 해결될 수 있었다.

그들이 숲의 깊은 곳으로 통하는 길목 앞에 이상한 장비를 설치해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누는 대화가 유독 또렷하게 들려왔다.

“뭐가 잔뜩 있을 줄 알았더니만 소미안 잎사귀도 안 보이는데. 정말 이런 곳에 전설이 살고 있단 말이야?”

“트레이너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퍼진 소문이야. 제보도 있었으니 밑져야 본전이지.”

수군거리는 말투가 뭔가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지켜보려니, 그들 중 한 명이 장비를 만져보면서 내뱉는다는 소리가 위험천만했다.

“숲에다 불을 지르면 숨어있던 것들이 전부 놀라서 뛰쳐나오겠지. 전설 얼굴 보려면 그만한 값은 내야 하지 않겠어?”

다른 한 명도 금방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고 커다란 가방 속에서 길쭉한 모양의 탄을 꺼냈다. 카말라는 저것이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 알진 못했지만 방금 들은 목적을 통해서 그 효과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매체에서만 접했던 ‘포켓몬 헌터’라는 사실까지 떠올려내고 나서는 낯선 공포에 얼어붙었다.

'숲에 불을 낸다고? 왜? 저 악당들이 불을 질러서 불길이 퍼지면 숲이 타 버리고, 포켓몬들도 위험하고, 옆에 있는 마을도 위험해지는데 그 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본 해외 산불 현장이 눈앞을 스치고, 상식 바깥의 행위가 바로 목전에서 펼쳐지기 직전인 상황이 카말라의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저걸 막아야 할 텐데, 무기 같은 걸 들고 있어서 앞으로 나서기가 힘든데, 심보러 씨도 위험해질 수 있는데…! 하지만 저걸 막지 않으면 전부 다 위험한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딱.

그것은 갈팡질팡 헤매고 있던 카말라의 발밑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카말라는 ‘헉’하고 숨을 삼키며 양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심보러가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헌터들이 날카롭게 고개를 들었다.

“뭐지, 포켓몬인가?”

“다다익선이랬으니 먼저 잡고 나서 불 질러버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두렵기 그지없었다. 카말라는 심보러가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보며 속으로 외마디 소리를 좀 지른 뒤 나무기둥 옆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앗, 아앗, 에라, 거기 나쁜 놈들 멈추십쇼!”

카말라의 삿대질을 받은 헌터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였다. 곧장 험악한 기류가 조성되는 가운데서 히죽 떠오르는 웃음기가 카말라의 사고회로를 천천히 얼리기 시작했다. 카말라는 심보러를 응시하는 눈빛이 탐욕스럽게 반짝이는 것을 보고 치를 떨었다.

“꽤 강해 보이는 녀석을 데리고 다니네, 꼬마야. 너 같은 초짜한테는 과분하지 않아? 그거 우리한테 얌전히 넘기고 집으로 돌아가라. 네가 다치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까.”

카말라는 제 주변을 굴러가는 상황이 너무나도 급박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헌터의 소곤거리는 말을 듣고 울화가 바짝 치밀어오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앞으로 자꾸만 나서려는 심보러를 뒤쪽으로 꾹꾹 밀어내면서 악을 쓰다시피 고함을 질렀다.

“버, 버릇없게 심보러 씨한테 그거라고 하지 마십쇼! 당신들 눈에는 포켓몬이 뭘로 보임까! 그리고 여기에 불지르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는검까?!”

“아, 씨, 쪼그만 애가 목청 하나는 유별나네.”

삿대질을 당한 헌터는 인상을 찡그리며 땅에 대고 침을 탁 뱉고 동료에게 턱짓을 보냈다.

“못 움직이게 해 놔. 이런 애들은 눈앞에서 불이 나 봐야 정신을 차려.”

카말라는 자신과 심보러를 향해 겨눠지는 총을 보고 눈을 꽉 감아버렸다. 제 몸을 휘감으려는 심보러의 사이코 파워가 느껴졌지만 이미 장소를 피할 때는 늦었다는 직감이 사지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심보러의 앞을 필사적으로 가로막은 팔이 덜덜 떨렸다.

‘심보러 씨, 당신만이라도 피하십쇼….’

호기롭게 시작한 여행이 운 나쁘게 마주친 악당들에 의해 끝이 나버리다니, 이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인지,

카말라는 무력감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이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헤아리는 매초가 잔인할 정도로 길었다. 나는 진작 무엇을 해야 했을까, 뒤늦게 떠오르는 후회가 시간 감각을 무한대로 잡아 늘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숲속에서 왜 파도가 치고 있는 걸까?


카말라는 어느 일이 맨 처음 순번으로 벌어졌는지 헷갈렸다.

심보러의 사이코 파워로 들어 올려지는 순간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나동그라지고, 흙이 묻은 얼굴 위로 물방울이 튀기고, 조용하던 사위가 파도 소리로 가득 차고, 헌터들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욕설을 외치고, 물냄새가 후각을 채우고, …

갑자기 누군가가 제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바람에 카말라는 단말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흡떴다. 그렇게 되살아난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목구멍을 타고 오르던 비명마저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강한 물살이 흐르는 풀숲의 풍경 위로 헌터들이 물에 빠진 파비코마냥 늘어져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마릴리가 노기등등한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는 중이었다. 물에 푹 잠긴 장비들은 그대로 물살에 밀려나다가 먼발치 나뭇등걸에 걸려 버리고, 카말라와 가까이 있는 나무 위에서 레인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모든 광경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럼 누가 날 들어 올리고 있는 걸까, 얼떨떨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카말라는 심보러의 걱정 어린 눈빛 외에도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요괴여우 포켓몬의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 …조로아크가 왜 여기에…?”

포켓우드 필름에서 악당의 포켓몬 역할로 등장하곤 했던 조로아크는 카말라의 머릿속에 빌런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니 그러잖아도 어리둥절한 심경이 물음표로 가득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 조로아크는 카말라의 감상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고 풀숲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지점에 그를 덩그러니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카말라는 제 얼굴을 한차례 훑어본 조로아크가 심보러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지는 모습을 보며 입을 헤벌렸다. ‘네 친구를 잘 돌보고 있으라.’ 즉각 곁에 붙어온 심보러는 그대로 카말라에게 포옹당해 꼼짝없이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조로아크는 그들을 뒤로 하고 레인저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가, 물살이 거의 가라앉은 풀숲으로 날렵하게 몸을 날린다. 어찌어찌 정신을 차리고 주춤주춤 자세를 회복하던 헌터들은 일대를 아우르는 환영에 그대로 발이 묶여버렸다. 카말라는 덩굴식물들이 헌터들의 발목과 다리를 타고 자라나 그들을 단단히 속박하는 장면을 보면서 눈을 멍하니 깜박거렸다. 환영이 어찌나 현실적이었던지,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인 인간의 지각 능력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 숲 전체가 정말로 살아서 움직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릴리, 조금만 더 힘을 빌려줘.”

나무 위의 레인저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치자 마릴리가 엄숙하게 고개를 주억이고 나서 헌터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마릴리는 천하장사다운 힘으로 헌터들을 번쩍 들어 올린 후 인정사정없이 차례차례 바닥에 메다꽂아 버렸고, 그 충격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그들에게 레인저의 올가미가 날아들어서 저항의 움직임을 완전히 무위로 만들어 버린다. 순식간에 팔다리를 구속당하고 욕지거리를 왁왁 날려대고 있는 헌터들에게 레인저가 다가와서 무어라 속삭이니, 무슨 내용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두려운 낯으로 입을 꾹 다무는 모양을 보아하면 상당히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레인저는 흡족한 표정을 떠올리고 나서 무전기처럼 보이는 기계에 대고 말했다.

“바람개비 숲 내부 사색의 들판 앞에서 밀렵을 저지했어요. 두 명을 검거했고… 이 사람들, 방화를 꾀했던 것 같아요. 어린 트레이너 한 명과 그의 포켓몬이 현장에서 대치 중이었는데 다행히 피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계 너머에서 무어라 응답이 돌아온 것 같았지만 카말라는 그 내용까지 듣지는 못했고 그저 레인저가 알았다는 답을 남기는 것만을 들을 수 있었다. 레인저는 하늘을 향해 작은 한숨을 올려보내고 카말라가 심보러와 함께 주저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니?”

카말라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제게 내민 손을 잡았다.

“어… 네, 넵,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함다….”

레인저는 상냥하게 웃고 카말라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천만에. 너야말로 무서운 악당들을 앞에 두고 용감했는걸, 도와줘서 고마워.”

돕다니… 내가 뭘 했더라? 악당들한테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 한 일이 없었는데. 카말라의 고개가 어리둥절하게 기울어지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으음… 불을 지르려던 저 사람들을 네가 막아섰잖아. 그래서 내가 늦지 않고 제때 도착할 수 있었고.”

레인저는 카말라의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떼준 뒤 심보러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네 친구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이 애를 잘 부탁할게.”

심보러는 물끄러미 레인저를 쳐다보다가 당연한 말을 한다는 눈짓을 했다. 아까는 트레이너라고 칭했는데 지금은 친구라는 단어를 쓰네. 엄밀히 따지면 레인저가 맞게 보았고, 카말라는 두 단어 사이에서 느껴지는 격차에 어쩐지 설레는 감정을 느끼며 더듬더듬 목소리를 꺼냈다.

“저… 누님도 트레이너심까…?”

“아니, 나는 그냥 레인저야. 포켓몬을 데리고 배틀을 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달라.”

레인저라는 직종이 있는 줄은 알았는데 트레이너와 궤를 달리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카말라는 자신의 세계가 생각 이상으로 좁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레인저는 이를 모르는 체하며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 온 거야? 여긴 바람개비숲의 가장 안쪽이라 쉽게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카말라는 아차 하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 어어, 칠보시티로 가고 있었는데 길을… 잃어버렸슴다…. 한참 헤매다가 여기까지 들어오게 됐는데….”

카말라는 ‘이 사람이 길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레인저를 반짝반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레인저는 조로아크와 마릴리의 철벽 감시를 받는 헌터들을 돌아보며 골똘한 낯으로 생각에 잠겨 드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마릴리에게 손짓을 보냈다.

“나는 여기 남아서 일을 더 봐야 하거든. 이 마릴리라면 너를 숲의 출입구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데려다줄 수 있을 거야. 마릴리, 마지막까지 잘 부탁할게.”

레인저의 부름을 받은 마릴리는 제게 맡기라는 듬직한 얼굴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카말라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고 안도하는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마릴리의 안내를 앞세우고 뒤에서 심보러의 호위를 받아 가며 걷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카말라는 숲을 가로질러서 흐르는 개천을 발견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리가 놓여있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숲에 들어와서 헤맨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의 간단한 경로였지만 카말라는 그 허무함마저 느끼지도 못하고 안도감에 젖어서 그저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마릴리는 다리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카말라를 바래다준 후 해맑은 미소를 남기고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카말라는 감사와 아쉬움을 담아 마릴리에게 인사를 보내고 다리 위를 걸었다.

“그 레인저 누님… 무척 멋졌지 말임다….”

위기일발의 상황을 겪는 순간에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게 혼란스럽기만 했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서 그 순간을 되돌이켜보니 모든 일들이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무들 사이로 몰려오는 파도와 이를 조종하는 마릴리의 위풍당당한 모습, 정의의 사도처럼 등장한 레인저와 조로아크가 보여준 환상적인 호흡…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카말라가 겪은 공포를 온데간데없이 증발시켜 버리고 만다.

“…심보러 씨, 저 결심했슴다…!!”

카말라는 피로하게 끔벅거리던 파트너의 눈이 반짝 뜨이는 것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 레인저가 될 검다. 아까 그 누님처럼 멋진 레인저 말임다!”

흐릿하기만 한 트레이너의 길보다는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된 레인저의 활약이 열 두살짜리의 열혈 감성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심보러의 표정은…. 심리적으로 오 백 살 정도 늙은 포켓몬의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 선명한 윤곽을 남기고 있었다.

물론 카말라는 제 파트너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우아악! 그 분 성함 물어보는 걸 까맣게 잊었슴다!!”

처절한 비명이 바람개비숲의 평온한 대기를 쩌렁쩌렁 울리고 만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