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끝

사막, 숲, 초원 (下)

[번외] 어느 지망생의 시점.

BGM


칠보시티에서 맞이하는 주말 아침은 고향집에서 보내는 주말보다 훨씬 생기가 돌고 바쁘기도 바빴다.

전날 바람개비숲을 빠져나온 카말라는 칠보시티의 포켓몬 센터를 지나쳐서 외곽 부근의 꽃집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뒤 숙박비라는 명목으로 자진하여 꽃다발을 포장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꽃집을 운영하는 부부는 먼 곳에서 놀러 온 딸의 친구가 일을 돕겠다는 말에 사양의 뜻을 내비쳤지만, 카말라는 어차피 시간도 남는데 친구와 수다도 떨 겸 일손을 덜어드리겠다고 우겨서 일감을 얻어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라일리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는 시원한 숲 그늘을 닮은 아이였다. 카말라는 그와 고대의 성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이와 같은 인상을 받았고, 그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맺은 인연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이 아이가 지닌 온후함에 반해서 바깥세상을 꿈꾸는 또 다른 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라일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전날 밤 꽃집의 초인종을 눌렀을 때 열린 문 사이로 기쁘게 웃는 얼굴이 있었으니, 카말라는 지난 2년 간 주고받은 편지가 헛되지 않았다고 마음 편히 결론짓게 되었다.

“네가 우리 마을을 지나간다길래 언제 오나 했더니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들어오더라. 숲 무섭지 않았어?”

비닐을 자르는 가윗날 사이로 사각거리는 소리가 흘러내렸다. 라일리가 꽃대를 종이로 잘 감싸서 틀을 만들어 놓으면 카말라는 그 위에 색지와 비닐을 올리고 리본으로 모양을 고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라일리가 톡 내놓은 문장은 상대방의 집중력을 깨지 않고도 작업 분위기를 활발히 끌어올리는 효과를 만들어냈는데, 카말라의 입장에서는 바로 전날에 겪은 모험담을 친구에게 생생히 들려줄 수 있어서 신난 기색이 되어 역동적인 손놀림으로 꽃다발을 빠르게 완성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후아! 그 레인저 분의 당당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엄청 매력적이지 말이었슴다! 악당들한테는 가차 없는데 저와 심보러 씨한테는 무척 친절했고, 그분의 파트너 포켓몬도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멋졌고요! 라일리도 숲속에서 파도가 치는 광경을 봤어야 하는 건데 말임다!”

하지만 카말라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의 눈썹은 살짝 쳐져 있었다. 라일리는 한숨을 폭 내쉬며 종이를 돌돌 말았다.

“그치만 카말라, 큰일날 뻔했다고. 요즘에 밀렵꾼들이 부쩍 늘어났대서 마을 사람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그, 그렇슴까, 아, 그렇겠죠…? 우…, 레인저가 되면 그런 나쁜 사람들 다 물리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레인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 말임다….”

‘그분 성함을 모르는 것도 섭한데 근본적인 내용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방금까지 잔뜩 들떠있던 카말라는 갑자기 맞닥뜨린 현실에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서 약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마음 약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온전히 라일리의 몫이었다.

“으음… 성신시티에 트레이너 스쿨 말고도 레인저 스쿨이 있긴 한데….”

라일리는 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반짝 뜨이는 눈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있긴 한데…?”

위험한 길을 걸어가려는 카말라가 걱정되는 한편으로도 친구의 기대를 꺾어놓게 되어 유감이었다.

“…며칠 전에 모집 기간이 끝났어.”

카말라는 가위를 내려놓고 머리를 싸매며 소리 없이 ‘No’를 외치다, 이내 급박한 낯빛으로 라일리에게 되물었다.

“다음 모집 기간은 언제인지 아심까…?”

“대략… 다섯 달 후?”

결국 한숨이 늘어나고 말았다. '다섯 달이라니, 집에 남아있기가 싫어서 바깥으로 뛰쳐나온 마당에 그 긴 시간동안 무얼 하고 살지.' 트레이너의 길에도 관심이 팍 사라져 버린 이상은 단 하나 남은 희망이 레인저였는데, 다음 모집 기간 때까지 심보러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다 어제와 비슷하거나 곤란한 일들을 겪게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일단 세상을 돌아다니려면 몸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순위이기 마련인데… 카말라는 자신의 배짱을 돌이켜보고 스스로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떠올려 버렸다.

“…라일리는 어떻게 그런 걸 잘 알고 있슴까?”

트레이너도 레인저도 아닌 사람이 스쿨의 일정을 꿰고 있으니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이었다. 라일리는 잠시 그를 쳐다보고 나서 화병에서 꽃다발을 꺼내 들었다.

“트레이너 스쿨이랑 레인저 스쿨에서 매해 입학식, 졸업식을 할 때마다면 우리 가게에도 주문이 많이 들어오거든. 몇몇 단골들도 언급할 때가 있고… 아빠 일을 돕다 보니 어쩌다 알게 된 내용이야. 레인저 스쿨이 두 달 전에 졸업식을 했으니 여름 학기 모집도 벌써 끝났지.”

‘이럴 수가….’ 인생의 악화 일로를 맞이한 사람처럼 낙담하는 카말라를 지켜보던 라일리는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면서 레인저에 대해 미리 공부해두는 건 어떨까 하는데. 내가 편지 부칠 때 레인저 소식지도 같이 보내줄게. 단골 레인저들한테 부탁하면 되니까….”

딸랑.

가게의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감돌았다.

꽃집 안으로 들어선 인물이 점원을 찾는 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오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일리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알아본 카말라가 무의식적으로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숲속에서 제게 도움을 주었던 그 레인저였다.

“안녕, 여기서 또 만나네.”

'레인저님의 눈동자 색이 맑은 하늘빛이었구나.' 어제는 어둠에 잠겨서 알아보지 못했는데, 밝은 곳에서 마주하는 눈웃음이 퍽 곱게 다가왔다. 카말라는 반가움과 약간의 어색함이 어우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보냈다. 동그란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라일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레인저에게 싹싹하게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걸 찾으러 오셨나요?”

카말라는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이 작업대의 구석에 물러나 앉아서 얌전히 포장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혹시, 누가 이걸 주문했는지 알 수 있을까? 지난번 졸업식 때 누군가가 나한테 꽃바구니를 보냈는데… 배송자 이름이 가게 이름으로 적혀서 왔거든.”

힐끔대는 시야 속으로 레인저가 라일리에게 무언가를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카드와… 무슨 번호가 적힌 종이였는데, 손님에게서 받아든 것들을 읽어보는 라일리의 안색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죄송해요, 고객 정보가 보호되고 있어서 손님이 말씀해 주신 건 제가 마음대로 확인해드릴 수가 없네요.”

라일리의 미안해하는 표정을 본 레인저의 눈빛에 약간 실망하는 기색이 비쳤다.

“역시 그렇겠지…? 미안, 이상한 요구를 해 버렸네.”

‘그럼 이건 됐고.’ 레인저는 익숙한 일인 양 말끔하게 감정을 지워버리고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열매랑 비료를 볼 수 있을까? 여기에선 어떤 종류를 팔고 있는 지 알고 싶어.”

“아, 그건 저 안쪽에 있어요! 이리로 와 주세요.”

라일리는 레인저를 이끌고 가게의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대화를 더 들을 수 없게 된 카말라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레인저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소식이 돌아다닐 테니, 운 좋게 마주친 저 사람한테 한 번 부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아니, 아냐,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건 실례려나? 하지만 이대로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지만 역시 실례겠지… 그렇지만 역시 레인저가 되고 싶은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카말라가 결국 굴레에 빠져 과부하되기 직전의 상태에 놓였을 무렵 도란도란하는 목소리가 다시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대량주문도 받고 있니? 아무래도 여기서 자주 열매를 구할 것 같거든.”

“네, 물론이죠! 주소랑 연락처 남겨 주시면 손님께서 연락해주실 때마다 빠르게 준비해드릴 수 있어요.”

계산대로 쪼르르 달려오던 라일리와 대화를 열심히 엿듣고 있던 카말라의 눈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라일리는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친구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고, 계산대 앞으로 온 레인저에게 종이를 내밀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어조로 물었다.

“저… 혹시 올해 레인저 스쿨에서 추가모집이 있을까요? 입학식을 대비해서 꽃다발을 준비해둬야 하는데, 증원이 있을지 미리 알아둬야 수량을 무난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야말로 카말라의 귀가 번쩍 뜨이는 내용이었다. 레인저는 무언가의 내용을 종이 위에 적어 내리다 말고 고개를 가만히 기울였다.

“글쎄… 내가 알기로 하나지방에서는 그런 소식이 없었는데. 다른 지방이라면 모를까….”

어떤 좋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으려나 싶었던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레인저는 간단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매대에서 가지고 나온 열매 종자의 값을 치른 후, 알차게 채워 넣은 비닐백을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 너도 잘 지내고.”

레인저가 가게의 문 앞까지 걸어가며 두 아이에게 인사를 남기려는 순간이었다. 카말라는 이대로 그를 떠나보내면 올해의 기회는 잡지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급한 마음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자 다리가 나무바닥에 긁혀 밀려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카말라는 라일리의 깜짝 놀란 시선과 레인저의 의아한 시선을 동시에 받아내며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운 욕망을 표출했다.

“저… 저! 저도 누님처럼 레인저가 되고 싶슴다…! 어떻, 어떻게 해야 레인저가 될 수 있는지 알려주십쇼!”

너무 긴장해 버려서 평소엔 더듬지도 않던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그러나 레인저의 꿈에 대한 열망만큼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는지라, 꽃집의 평온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카말라의 열기에 밀려서 일렁거리는 듯했다. 레인저는 자신을 열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말없이 응시하다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려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무슨 의미지, 거절의 표현인 걸까? 카말라의 얼굴에 불안함이 깃들기 직전 둘 사이의 기류를 읽고 있던 라일리가 슬그머니 끼어들어 말을 건넸다.

“저… 위층에서 얘기 나누실래요? 지금은 다른 손님들이 안 계셔서 수월하게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카말라는 자신의 친구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다행히도 레인저는 매정한 인물이 아니었는지 라일리의 제안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먼저 앞서서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고, 카말라는 라일리에게 ‘네가 최고임다!’라는 의미의 엄지를 올려 보이고 레인저를 따라서 후닥닥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라일리는 남몰래 쓸쓸한 미소를 짓고 나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갔다.


꽃과 나무로 가득 찬 1층과는 달리, 가게의 2층에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카말라와 레인저가 각자 자리를 잡는 동안 라일리는 카운터 뒤의 작은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가서 가게의 작은 주인다운 물음을 냈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라일리가 작은 목소리로 ‘공짜!’라는 단어를 덧붙이자 카말라는 무심코 ‘에나코코아, 아이스!’라고 외쳤다가 이크, 하는 소리를 내며 레인저를 돌아보았다. 레인저는 잠깐 웃음을 흘리더니 라일리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나는 따뜻한 에나코코아.”

라일리는 곧장 달큰한 향이 피어오르는 진갈색 음료 두 잔을 내온 후, 손님을 받으러 가겠다며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버렸다. 덕분에 위층에 남은 두 사람은 다른 듣는 이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레인저는 자신의 음료를 한모금 홀짝이고 나서 반대편 자리에 바짝 얼어붙어 있는 카말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왜 레인저가 되고 싶은 걸까?”

처음부터 본질적인 질문이 던져지니, 그러잖아도 잔뜩 긴장해 있던 카말라는 레인저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상대방은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으로는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때문에 카말라는 제 몫의 음료잔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보이지 않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레인저는 제 앞에 앉은 아이가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느슨한 자세로 손깍지를 끼며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지. 나는 리안이고, 네 이름은?”

카말라는 퍼뜩 고개를 들고 정신없이 대답했다.

“카말라, 카말라 에버렛임다.”

카말라는 저를 향해 둥글게 휘는 눈매를 보며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주 웃었다. 리안은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며 온기를 느끼는 듯하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응, 카말라. 편안하게 생각하고 말해 줘. 가급적이면 ‘누군가를 동경해서’라는 이유 말고도 진짜 네 마음을 듣고 싶네.”

마치 처음부터 네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듯한 어조였다. 카말라는 일순 머리 한쪽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는 컵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때아닌 자아 성찰에 빠져드는 동안 지나가는 시간이 길고 길게 느껴졌다. 꼭 어제 숲속에서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 같은데, 상황만큼은 전혀 다르니 적어도 숨이 막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동경하는 레인저가 차분하게 대해주니 처음 들었던 긴장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심보러 씨는 건너편의 건물 안에서 아직도 깊은 수면에 빠져 있겠지, 파트너의 상태까지 잠깐 짐작해보는 여유까지 가지게 되니 이제는 자신이 집을 뛰쳐나온 계기까지 곱씹어볼 수 있게 되었다. 리안은 재촉하는 기색 하나 없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느긋하게 에나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카말라는 그에 감사를 느끼며 천천히 목소리를 꺼냈다.

“처음 여행을 떠났을 시절에는 그저 세상의 밝은 면만을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슴다. 세상은 넓으니 그만큼 좋은 일들이 한가득할 거라고 생각했지 말임다….”

그러나 실제로 어제와 같은 사건을 겪고 나서는 제가 그리고 있던 세계의 풍경화가 가장자리에서부터 야금야금 먹칠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카말라는 그동안 자기가 이것을 외면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고 있었는지까지는 아직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이러한 훼손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나는 하나뿐인 파트너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데 언제까지나 심보러 씨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용과 용기는 한끗차이라던가. 이대로라면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을 보러 가자고 심보러에게 당당하게 내건 약조가 간단히 깨질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의 가벼운 악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분통했다. 분통해하기만 하면 의미가 없으니, 당장 눈에 보이는 길로 들어가서 힘을 기르고 싶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걱정 없이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슴다. 그럼 그 모습을 보는 저도 덩달아 행복을 느끼게 되겠죠…! 어, 물론 그게 완전히 이루어지기는 힘들겠지만… 고통을 덜어내는 손이 늘어날수록 누군가의 슬픔도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를 꺼내놓고 보니 약간 막막하다는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이게 본심이라 어쩔 수 없었다. ‘본심을 이야기해달라고 하셨으니, 에에… 저도 어쩔 수 없다고요?’ 카말라는 속으로 구시렁대면서 목을 축이기 위해 컵을 기울였다. 윽, 그새 얼음이 녹아서 단맛이 많이 묽어져 있었다. 상대방은 카말라가 내놓는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고 있다가 문득 손가락을 뻗어서 컵의 테두리를 찬찬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리안은 대단한 조형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컵에 시선을 고정하며 카말라가 떠올린 것을 그대로 지적했다.

“너무 이상적인데… 지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렇지만 일단 제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요?”

연청색 눈동자가 반짝 하고 이쪽을 바라보았고, 카말라는 머릿속에 들어있던 문장을 아무런 고민 없이 내뱉고 흠칫 놀라서 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즐겁게 웃고 있었다.

냉한 인상에 저렇게 순한 미소도 떠오를 수 있었구나, 멀거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말라가 어수룩한 목소리를 냈다.

“어… …누님?”

리안은 웃음기를 겨우 감추고 카말라에게 불쑥 묻는다.

“하나지방 말고 다른 곳이라도 괜찮을까? 총본산… 그러니까 아루미아 지방에 있는 레인저 스쿨이 이번에 지원자를 많이 받는댔거든.”

아루미아 지방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여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카말라는 그의 말을 듣다 말고 고개를 매우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러다가도 아, 하고는 길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니 리안은 걱정 말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같이 가면 돼. 네가 준비 다 되는대로 가자.”

“…바로 당장도 가능함다!”

흥분에 차서 말했다가 지나치게 키운 목소리에 스스로 화들짝 놀라고, 리안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당장은 너무 힘드니까… 내일도 좋지 말임다, 어, 아니다. 주말이니까 리안 누님도 쉬셔야 하지 말임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기한을 소심하게 늘리는 카말라에게 명랑한 목소리가 닿았다.

“내일 가자. 빠르면 빠를수록 좋긴 한데 오늘 당장 가려고 하면 네 준비가 덜 될 수도 있고… 월요일은 내가 바쁘네. 괜찮지?”   

카말라는 다시 한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리와 얼굴을 자주 못 보게 되는 건 아쉽지만… 그만큼 편지를 더 자주 보내주면 되겠지, 카말라는 속으로 다짐하며 ‘초코워터’가 되어버린 음료수를 쭉 들이켰다. 리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댔다.

“널 시험하는 말을 해서 미안해. 단순히 레인저가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그가 들고 있는 음료도 거의 다 식었는지 컵을 비우는 속도가 빨랐다.

“앗, 잘 이해하고 있슴다. 아니, 오히려 절 도와주신다고 하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뭐… 나는 어디까지나 네가 꿈을 이루는 첫문을 여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뿐이야. 네 앞길을 일구어 나가는 건 온전히 네 몫이고.”

카말라는 그의 나긋나긋한 말씨를 듣고 그저 얌전히 긍정하기만 했다.

'스쿨에 들어가려면 입학시험도 치러야 하고, 재학 기간에는 공부에 붙잡혀 살면서 여러 가지 테스트도 받게 되겠지, 스쿨을 졸업할 땐 그동안 쌓은 것들을 한꺼번에 성과로 내야 할 테고…'

제 처지가 연못 안에 갇힌 잉어킹이나 다름없었지만, 적어도 스쿨에서 어떤 과정을 밟게 될 지는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고 걱정이 아예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카말라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다 말고 문득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만큼 출중한 실력을 갖춘 레인저가 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정진해야 하는 걸까?’

지망생으로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궁금증에 불안감이 은근히 묻어나온 것 같았다.

“네 마음속에 지닌 열기를 잃지만 않으면 돼. 어차피 쉽게 꺼지지도 않을 것 같더라.”

그가 곧바로 주는 확신이 카말라의 동요심을 붙들었다.

“너는 멋진 레인저가 될 거야. 내가 장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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