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걷히기 전에

프롤로그 2-카일

오두막 by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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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 좋게 발을 내디뎠던 첫 모습과는 다르게 소년은 지금 꽤나 지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몸통만 한 알을 실은 수레를 끌고 이 끝도 없는 숲을 헤맨 지 한참이 됐기 때문이다. 수레 손잡이를 잡은 손이 미끌거렸다. 앞머리 아래에도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카일은 한숨을 푹 쉬곤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알은 그를 얕보기라도 하는 듯 여전히 담요 위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더 갔을까. 그는 집채만 한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물을 챙겨오지 않은 것이 뒤늦게 후회됐다. 혀로 한 번 쓸은 아랫입술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겨우겨우 찾은 쉼터였기에 그는 먼저 수레부터 나무 귀퉁이에 끌어다 놓았다.

조끼 주머니에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한 편지를 꺼내 다시 한 번 죽 훑었다. '숲의 마법사에게'. 카일은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참으로 불친절한 편지다. 장난인가, 하는 생각이 설핏 스쳤다. 잔뜩 부풀어 올랐던 기대감이 바늘로 찔린 듯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조심스레 집어넣곤 양손을 입가에 모았다. 마법사는 여러 면에서 평범한 인간보다 뛰어나다 들었다. 숲의 마법사가 진짜 있다면 이 정도 소리는 단번에 들을 수 있을 테지. 그는 있는 힘껏 고함을 쳤다.

“마법사님-!” “숲의 마법사님-!”

남아있는 힘이란 힘은 다 썼건만 마법사는커녕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카일은 잠시 생각했다. 그냥 편지랑 알 둘 다 여기 놓고 가버릴까. 그때, 나무 뒤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흠칫하며 몸이 절로 굳었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두꺼운 나무 기둥 옆으로 무언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 걸음. 발소리가 들린다. 두 걸음. 얇은 다리가 보인다. 그늘진 나뭇가지 아래에서도 허여멀건 그 색만큼은 정확히 드러났다. 세 걸음.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어깨에 닿을 둥 말 둥 하는 짧은 머리. 네 걸음. 수수께끼의 인물이 몸을 돌려 카일을 정확히 응시한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카일은 차마 눈을 뗄 수 없다.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순간, 잔잔하던 숲에 갑작스러운 바람이 한차례 지나간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상대의 얼굴 곳곳에 둥그렇고 끝이 뾰족한 그림자를 남겼다. 그림자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던 눈동자를 비춘다. 밝은 남색 눈동자가 소년을 똑바로 쳐다본다. 밝은 빛 아래에서 각각 고요한 밤과 가을의 밀밭을 닮은 머리카락이 두 사람의 눈썹 위에서 얕게 흔들린다.

‘예쁘다.’ 정제되지 않은 감상이 툭 튀어나온다.

카일은 이 모든 것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릿속에 새겨둔다. 이 순간은 그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죽을 때까지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참의 대치 후, 상대의 입이 열린다. 높은 목소리가 작지만 일직선으로 카일을 향해 꽂힌다.

“누구지?”

카일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아직 탐색이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상대를 관찰한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어려 보이는 외관. 그, 아니, 그녀는 아무리 봐도 그의 또래에 가까워 보인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매끄럽던 소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진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카일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숲의 마법사··· 맞으세요?”

“···그건 왜 물어?”

“숲의 마법사에게 전달해야 할 물품이 있어요. 본인··· 맞으세요?”

소녀는 카일의 뒤에 있는 거대한 알과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하고 삐져나온 종이를 슬쩍 본다.

“내게 주면 돼.”

소녀가 앞으로 걸어온다. 카일은 내심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곧이어 두 사람의 거리가 처음의 두 배 이상으로 가까워진다. 밝은 곳에서 마주한 소녀의 모습은 마치 도자기와도 같다.

카일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하다. 악명 높은 숲에 사는 정체불명의 마법사. 그는 분명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인일 것이라 상상했다. 눈앞의 저 아이가 정말 마법사가 맞을까? 겉모습은 아무리 봐도 그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한낱 아이일 뿐이라면 왜 출입이 금지된 숲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겠는가? 혼란이 지펴낸 의심의 불꽃이 미약하게 타닥거리기 시작한다.

카일이 그렇게 생각에 잡아먹히고 있는 사이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한 손을 가슴 정도 높이로 들어올린다. 그리고 앞쪽을 향해 손바닥을 뻗어 보인다.

‘뭘 하려는-’

카일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알이 천천히 그의 앞을 날아갔다.

‘?!’

놀란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곧이어 주머니 속 편지지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종이는 금세 그의 옷을 빠져나가 유유히 앞으로 나간다. 어리벙벙한 그를 내버려 둔 채 눈앞의 소녀는 허공에 또다시 손짓을 한다. 둥둥 떠 있는 종이가 저절로 펴진다.

그녀는 그대로 한 손을 입가에 댄 채 편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카일은 멍하니 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관찰한다. 가까이서 보니 미모가 더욱 돋보인다. 부드럽게 내리 깐 속눈썹이 길다. 허공에 휘저은 손가락은 가늘다. 미간이 잠시 좁혀진다. 따끔거리는 시선이 종이를 넘어 그에게 닿는다.

“그러고 보니, 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숲이 이방인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뾰족뾰족한 가시에 찔리는 느낌이다.

“아까 말했잖아요. 전달해야 할 물품이 있어서 왔어···요.” 카일이 말했다.

소녀는 말없이 그를 응시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그때 문득 머리 위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

집에서 보았던 신비한 새가 높은 나뭇가지 위에 고고하게 앉아있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잠시 카일을 스치고 오랫동안 소녀에게 머물렀다. 교감이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새는 금세 날개를 퍼덕이며 우아하게 날아가 버렸다.

“···설마.” 소녀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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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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