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걷히기 전에

프롤로그 2-아이비

오두막 by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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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는 좁은 구멍 속에서 몸을 둥그렇게 만 채 곤히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주기적으로 흘러나오는 안정된 숨소리는 그녀가 아늑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의 거대한 친구는 아이비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기를 즐긴다.

잔잔한 평화는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어느 낯선 소년에 의해 깨졌다.

“마법사님-!” “숲의 마법사님-!”

아이비는 인상을 찌푸리며 느리게 눈을 떴다. 오랜만에 자는 낮잠이었는데. 일어나자마자 짜증이 몰려왔다.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갈색 담요가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는 그대로 잠시 앉아있었다. 잠이 깬 직후의 나른함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천천히 나무를 두드렸다. 나뭇결이 비틀리며 둥근 입구가 형성됐다. 아이비는 로브를 대충 걸치곤 입구 아래로 내려왔다.

한 손으로 나무 기둥을 짚은 채 옆으로 돌아 나왔다. 침입자라.

저 앞엔 자신과 키가 비슷해 보이는 소년이 보인다. 놀란 눈치다. 마을의 사람인가.

급작스럽게 바람이 분다. 소년의 앞머리가 휘날린다. 투명한 눈망울 속에서 그의 감정이 선명하게 읽힌다. 충격. 혼란. 경이.

숲의 변덕이 멈췄다. 잔잔해진 나뭇잎들은 희미하게 사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아이비는 생각한다. 손님일까, 침입자일까. 후자일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올 수도 없었을 테니. 하지만 확인은 해 봐야 한다. 찬찬히 입을 열었다.

“누구지?”

잠자코 대답을 기다린다. 하나 상대는 아무 말도 없다. 아까부터 계속 얼이 빠져 있군. 쫓아낼까. 아니다.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이자는 허락받은 자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을 쫓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아이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다.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질문한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몇 초 후 정신을 차린 듯한 소년이 입을 연다.

“숲의 마법사··· 맞으세요?”

숲의 마법사를 찾는다고? 머리가 점점 복잡해진다.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말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다.

“···그건 왜 물어?”

소년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을 망설인다.

“숲의 마법사에게 전달해야 할 물품이 있어요. 본인··· 맞으세요?”

물품? 그러고 보니 소년의 뒤에 있는 수레에 담요를 깔고 앉은 웬 큼지막한 알이 하나 있다. 그리고, 조끼 주머니에 있는 건 편지인가. 아이비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낼 만한 단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린다. 그녀의 양육자이자 스승.

“내게 주면 돼.”

그녀는 몇 걸음 앞으로 간다. 간단한 마법을 통해 가볍게 알과 편지를 가져왔다. 공중에 띄운 편지지를 펼치자 역시, 그가 보낸 것이다. 아이비는 편지를 찬찬히 훑는다. 눈에 익은 정갈한 필체와 특유의 예의 바른 말투. 다만 저 배달원은 눈치채지 못했을 작은 수가 하나 숨겨져 있다.

손가락을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자 기존의 짤막한 글귀들이 사라지고 곧 장문의 편지가 드러난다.

 

오랜만이구나, 나의 하나뿐인 제자. 이곳은 날씨는 늘 그렇듯이 화창하단다. 너는 그곳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니. 새로운 씨앗이 돋아나니 문득 네가 보고 싶어지더구나.

그나저나,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단 것은 즉 네게 ‘그 알’이 제대로 전해졌다는 뜻이겠지. 네게 그것, 아니, 그분을 보낸 것은 중대한 과업을 맡기기 위함이란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구나. 말이 길어짐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두 명의 초대 마법사가 있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첫 번째 마법사는 인간을 환영하며 그들에게 선의를 베풀었단다. 반면 두 번째 마법사는 평생을 그의 거처 안에서 은신하길 택했지. 당시에 그들에겐 힘의 원천인 ‘코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의 욕심으로 첫 번째 마법사의 코어가 부서지고 말았고, 깨진 코어에서 그가 지닌 방대한 힘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온 대륙에 퍼졌단다. 욕망에 눈이 먼 인간들은 환희했으나 그것도 잠시, 마법사의 눈꼬리를 타고 내린 눈물은 배신으로 인한 그의 원망과 서러움 역시 흘려보냈고 그 양은 가히 온 땅을 삼킬 정도였다. 인간들은 뒤늦게 그의 형제였던 두 번째 마법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두 번째 마법사는 탄식을 흘렸으나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지못해 원념이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자신을 희생해 그 일대를 하나의 커다란 숲으로 감쌌지. 그러나 그 역시 형제를 죽인 인간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기에 힘을 받은 인간들이 마법사로 발현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도록 벌을 주었어.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난 지금, 온전히 잠재우지 못한 사념이 다시금 눈을 뜨려 하고 있다. 그걸 막기 위해선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대륙의 진짜 주인, 숲의 왕을 깨워야 해. 그분께선 처음 인간들이 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 두 마법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선 태어났던 알 속으로 다시 들어가 깊은 잠에 드셨지. 우리가 그분이 잠들어 계신 알을 찾아낸 게 벌써 몇백 년 전이란다. 내 소중한 친구를 통해 그 알을 네게 맡기니 부디 숲의 왕을 깨워내 우리의 세계를 지켜주길 바라마.

진심을 담아, T

‘길게도 쓰셨군.’

‘이런 귀찮은, 아니, 중요한 일을 왜 하필이면 나한테 맡기신 건지···. 뭐, 일단 눈앞의 이것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려나.’

“그러고 보니, 너,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숲이 이방인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눈앞의 소년은 과할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까 말했잖아요. 전달해야 할 물품이 있어서 왔어···요.”

그의 체내에 맴도는 기운을 감지해봤지만 특별한 점은 없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그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며 얼핏 거대해 보이는 무언가가 갑작스레 날아들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스승의 오래된 새가 숲의 나무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오만한 눈동자는 여전하군.’

새는 잠시 눈앞의 소년을 흘기듯 바라보고 이내 아이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소년이 숲의 중심부까지 안전히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짐작됐다.

“···설마.”

아이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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