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선율 - 첫 만남 2
첫 만남2
세드릭은 오후 느지막이 눈을 떴다. 호되게 앓고 나면 으레 그렇듯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아팠다. 그래도 눈을 떠 몸을 일으킨 세드릭은 시종을 부르지 않고 홀로 몸을 씻었다. 머리까지 꼼꼼히 말리고 나서 거울을 봤다. 조금 수척한 낯을 한 아이가 서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초연한 눈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세드릭은 단정히 챙겨입은 의복의 옷매무새를 고쳤다. 자신을 구해준 마법사, 헤나투 나시멘투에게 상을 내리길 청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그 시각, 헤나투는 황제의 명을 받고 급하게 황성에 도착해 있었다. 이번엔 황제의 시녀장이 직접 그를 데리러 와서 헤나투는 제법 긴장한 상태였다. 마차를 타고 황제의 집무실까지 가는 내내 무슨 일일까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설마 어제 황자님을 안아든 일 때문인가. 그런 생각까지 했을 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제 만나뵌 황자님은 아픔에 익숙해 보였고, 어른스러웠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우습게도 앞일에 대한 걱정보단 황자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간단한 해열 마법이라 해도 수 분 내에 열이 내리는 게 당연했는데 황자는 열이 내리지 않았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열이 내렸다. 마법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계열이라 더 의구심이 들었다. 마법이 잘 듣지 않는 체질인가 했지만 밤새 서적을 뒤져봐도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결국 잠들지 못하고 치유 마법이나 수련하고 있던 헤나투는 해열 마법의 마법식까지 뜯어고치기에 이르렀다. 한창 몰두하고 있던 즈음에 황제의 명이라며 공간이동 마법사에게 잡혀 황성에 오긴 했지만 수척한 낯을 하고 아픔에 익숙해하는 아이가 떠올라 어쩔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황제의 집무실까지 도착해 헤나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은 알현실에서 뵙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집무실에 부를 정도면 어떤 무거운 이야기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헤나투는 집무실에 들어서서 예를 갖췄다. 황제는 손을 내저어 의자에 앉으라 명하고 서류에 사인을 하고 헤나투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황제는 흥미로운 낯을 하고 헤나투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소문의 천재 마법사였지. 상급 마법사 임명식에서 경의 칭호를 주며 보았던 기억이 나는군. 자네가 유독 젊어서 주변의 기대가 크다는 말도 들었어."
"과, 과찬이십니다."
"그럼 서론은 됐고, 본론을 꺼낼까 한다. 그대가 어제 황자를 도와주었다지. 보고를 받긴 했지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텐데 아이를 가진 어미로 따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 아이를 구해주어 고맙다."
"그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황제의 깔끔하고 담백한 감사인사에 어쩔 줄을 모르던 헤나투는 황제의 낯이 진지한 것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황제가 관을 내려놓고 감사인사를 하는데 어찌해야 될 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헤나투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인 상을 내리려 하는데...... 수도 근처에 있는 작은 영지를 내려주려 한다."
"......거두어 주십시오. 과분합니다."
"황명으로 쥐여주고 싶지는 않군."
"......폐하, 저는 정말 보상을 바라고 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거두어 주십시오."
"이리 거절을 하니 더더욱 안겨주고 싶어지는데."
황제는 이제 다리를 꼬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산이었지만 헤나투는 난감한 낯을 하고 곤란해하기만 했다. 황제가 내리는 상을 세 번이나 거절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덥썩 받기엔 당연한 일을 행했는데 과분한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 헤나투를 구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그 아이가 깨어났나보군. 들라 하라."
갑작스러운 세드릭의 등장에 헤나투는 당황했지만 급하게 일어나 예를 갖췄다. 세드릭은 요정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헤나투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 황제와 황자를 번갈아 바라보지 않게 노력했다. 그런 헤나투를 두고 황제와 세드릭은 가벼운 포옹을 하고 대화를 하며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아직 덜 자라 짧은 다리가 달랑거렸다. 자그마한 손에 들고 온 작은 상자가 달칵거리며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황자."
"폐하께 청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니지요."
"마침 잘 왔습니다. 나시멘투 경에게 상을 내리려 하는데 그가 도통 받질 않는군."
"어떤 상을 내리셨는지 여쭈어도 됩니까?"
"수도 근처의 영지를 내려주려 했지."
"어마마마......."
세드릭도 그것이 무겁고 과분한 상인 것을 알았는지 당황한 낯으로 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황제는 심드렁하게 세드릭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실버블론드가 부스스해졌다. 세드릭은 얌전히 황제의 애정표현을 받으며 대답할 때를 기다렸다.
"저도 폐하께 나시멘투 경에게 상을 내리길 청하려 했지만 그는 너무 과합니다. 연구하기도 바쁜 학자에게 영지를 관리하라니요."
"너를 구해준 사람에게 내릴 상인데도 그리 과분한가."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상을 내려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황제는 정말 다른 상은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잠깐 미간을 좁혔다. 세드릭은 황제가 무어라 더 덧붙이기 전에 입을 열었다.
"제가 청하려 했던 것은 황족 전용 도서관 출입증입니다. 나시멘투 경께서 만족하신다면요."
"그래? 그게 더 학자에게 맞는 상이긴 하겠군. 어찌하겠나, 받겠나?"
"......황실 도서관 출입증으로도 족할 듯 합니다, 폐하."
"그럼 황자의 청을 수용하는 걸로 하지. 헤나투 나시멘투 경에게 황족 전용 도서관의 출입증을 내리겠다."
헤나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잔뜩 기력이 쇠했다. 헬쓱한 낯으로 그나마 타협을 보려 했지만 황제는 이미 시녀장을 불러 황족 전용 도서관 출입증을 가져오게 한 뒤였다. 반쯤 체념한 헤나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황명을 받듭니다.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좋은 자세로군. 그래서, 이제 만족하나, 황자."
"사실은......나시멘투 경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홍조를 띄운 세드릭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작고 고급스러운 선물상자를 헤나투에게 내밀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그대에게 어울릴 것으로 골라봤습니다."
"전하, 거두어 주십시오."
"내가 감사를 표하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나시멘투 경."
"......감사히 받겠습니다, 전하."
이 집무실에 들어서서 말문이 막힐 것 같은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헤나투는 정말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상자를 받아들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상을 받는게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대의 신분이 황제와 황자라 그렇지 그렇게 유난스러운 반응도 아니었다. 상의 무게가 무거워서 그렇지 호의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황자가 건넨 작은 상자도 그리 무겁지 않아서 속으로 안도했다.
"한번 열어보아요. 그대의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오. 무엇을 선물했기에."
헤나투는 연구실에 가서 상자를 열려던 계획을 폐기하고 상자를 장식한 리본을 풀었다. 기대에 찬 듯한 황제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자를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페이지를 고정해두는 금속 장식과 만년필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자력과 염력을 사용할 줄 안다고 하여서요."
"과연. 실용적인 선물이로군."
"감사드립니다, 황자 전하."
헤나투는 예의를 차려 대답했지만 근래에 망가진 만년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황제와 세드릭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옅게 웃었다.
"내 용건은 이게 끝이네. 바쁜 사람을 급히 불렀으니 얼른 돌려보내야 옳겠지. 시녀장에게 출입증을 받아가고. 이만 가봐도 좋아."
"허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전하."
세드릭의 선물을 챙긴 헤나투가 다시금 예를 차렸다. 시녀장에게 출입증을 받고 집무실을 빠져나가는데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황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황자 전하."
"마차가 있는 곳까지는 배웅하려 합니다. 그대의 짐도 챙겨두라 했어요."
"아...... 잊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당연한 일입니다.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던 것처럼요. 오히려 이것밖에 해줄 것이 없어서 미안한걸요."
소리없이 웃은 세드릭은 자신과 보폭을 맞춰주는 헤나투를 보고 손을 꼼질거렸다.
마차는 가까운 곳에서 대기중이었다. 세드릭은 헤나투를 올려다보더니 마차 앞까지 도착해서야 그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제 옷에 달려있던 섬세하고 작은 아쿠아마린이 달린 브로치를 풀어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내 눈동자에 맞춘 보석이라 그대의 눈동자보다는 색이 조금 맑지만, 분명히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합니다."
"전하, 정말 과분합니다."
"사양하지 말아주세요, 나시멘투 경. 즉흥적인 선물이라지만 정말 그대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하는 것입니다."
"전하......."
헤나투는 난감해하면서도 황자의 선물을 거절하지 못했다. 황자의 선물이기도 했지만 호의에 호감으로 답하는 아이를 거절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다. 헤나투는 곤란해하는 낯을 하면서도 얌전히 브로치를 받아 상자 속에 같이 넣었다.
"그럼, 이제 이별할 시간이군요. 다음에 또 만나길 바랍니다, 나시멘투 경."
"앞으로도 몸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전하."
"염려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세드릭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보이고 먼저 등을 돌렸다. 신분제 사회인 이상 아랫사람이 먼저 등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헤나투가 떠날 때까지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을 상기하고 또박또박 발걸음만 옮겼다.
헤나투는 멀어지는 황자에게 예를 표하고 한참 후에야 마차에 올랐다. 세드릭의 뒷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차는 헤나투가 타자마자 출발했다. 마차 안에 가득 들어찬 서적과 여러가지 상자를 본 헤나투는 낭패다 싶었지만 이를 물릴 수도 더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녹초가 된 채로 창밖을 살피기만 했다. 우아하고 화려한 멋이 있는 황궁을 벗어나 잘 닦인 황도를 건너 텔레포트를 완료할 때까지, 쭉.
익숙한 마력의 흐름을 더듬다보면 금세 고요한 동부 마탑에 도착해 있었다. 때는 오후 한창인지라 헤나투는 저녁을 거르지 않기 위해 바쁘게 하사품을 정리했다. 마차 한 대가 꼭 집 한 채처럼 느껴졌기에 정리하는 것도 일이었다(실제로도 마차는 제법 컸다.). 헤나투가 집 짓는 비버처럼 바쁘게 움직인 끝에, 마지막 하사품을 서랍 안에 넣고 나면 품에 넣어두었던 황자의 선물만이 남았다. 헤나투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포장을 다시 뜯었다.
고급스러운 멋이 있는 금빛의 심플한 앵커와 검은 바디에 은빛 별자리가 새겨진 만년필, 그리고 작은 아쿠아마린이 붙은 아름다운 브로치까지. 황제에게 하사받은 것도 물론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 값어치나 무게가 상당하지만, 오늘만큼은 황자가 마음을 써서 선물했을 세 가지 선물이 마음에 와닿았다. 페이지 앵커와 만년필이라니, 학자에게 이보다 실용적인 선물이 또 있을까.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페이지 앵커를 만지작거린 헤나투는 귀환 마법과 부식 방지 마법 등을 비롯한 마법 열 다섯개를 차례차례 새겨넣고 나서야 정복 상의 안주머니에 페이지 앵커를 집어넣고 만년필도 펜파우치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브로치는…….
“과분한 것을 주셨습니다, 황자 전하.”
정복 케이프 오른쪽 깃에 단정히 꽂아 정리했다. 거울 속 남자는 머리가 덥수룩하고 깐깐해 보였지만 브로치 탓인지 얼굴이 조금 환해 보였다. 헤나투는 한참 정복을 만지작거리다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이제 슬슬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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