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즈 - 세드헤나

바람의 선율 - 첫 만남 1

햇살이 좋은 어느 날이었다. 팔에 가득 안긴 책을 고쳐 안은 헤나투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수습 마법사 딱지를 뗀 지도 오래 되었지만 상급 마법사가 되며 연구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진 때였다. 머릿속으로 밤새 붙잡고 있던 마법식을 고치며 걸음을 옮기던 헤나투는 어느새 일행과 떨어지게 된 것을 깨달았다. 낭패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오가는 궁인도 없는 한적한 궁에 도달한 것 같았다. 들고 있는 짐은 무겁지 않았지만 일정이 밀리면 연구할 시간이 줄어들기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갈림길마다 목을 쭉 빼고 여기저기를 살폈지만 이쪽엔 정말로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십여 분을 헤맸지만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서성이던 헤나투는 구색을 맞출 정도로만 정돈된 수풀 사이에 아이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품에 안고 있던 책을 내팽겨치며 달려갔다.

아이는 열이 들뜬 얼굴로 뜨거운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다. 밝은 금발에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 수수한 것처럼 보였지만 고급 옷감으로 편하게 지은 옷을 입은 아이는 어딘가에 부딪쳤는지 이마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헤나투는 사색이 된 채로 마법사 정복을 벗어 아이를 감싸안고 근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주변에 누구 안 계십니까! 동부 제 1 마탑 소속 상급 마법사 헤나투 나시멘투입니다! 아이가 쓰러져 있어요!"

헤나투는 평평한 곳에 아이를 눕히고 조끼를 벗겼다. 답답하게 목을 죄는 타이를 살짝 풀어주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아이가 숨을 토한 것이다. 그럼에도 체온이 너무 높았기에 해열에 도움이 되는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열은 여전히 높았다. 아무리 자신이 치유 마법에 능통하지 않다지만 간단한 마법인데도 열이 내리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아이를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넓고 조용한 궁에는 두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 마법을 사용해 손수건을 적셔 아이의 얼굴과 손을 닦아준 헤나투는 아이의 안색이 돌아올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작디 작은 손을 살살 주물거리며 아이의 의식이 돌아오길 바라는 시간이 꼭 억겁 같았다. 주변에 궁인이라도 돌아다녔으면 상황이 달랐을텐데,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들고 뛸 수도 없었다. 긴장감과 두려움에 가슴이 꽉 죄여올 무렵, 금빛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깊은 푸른빛 눈동자가 눈물을 머금고 빛을 받아냈다. 헤나투는 믿지도 않는 신께 감사를 표하며 아이의 손을 힘을 주어 쥐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쓰러져 계셔서 정신이 드실 때까지 응급조치를 취하며 기다렸습니다. 어지럽거나 아픈 곳이 있으십니까?"

"......아."

제 몸 상태를 살피는 헤나투를 본 아이는 상황 파악을 하려는지 짧은 소리를 내뱉고 느릿하게 눈을 세 번 깜빡였다.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한 아이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헤나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린데도 미색이 보통이 아닌 아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 어지럽고 더운 것만 빼면 괜찮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습니까."

"머리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의사에게 보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죄송하지만 제가 이쪽 길을 모릅니다.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온 거라......."

"진정하세요. 나는 아주 괜찮습니다."

괜찮다 말하는 아이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아직도 단어 사이에 뜨거운 숨이 느껴졌고 낯은 여전히 창백했다. 게다가 붉게 물들어 있던 이마가 살짝 부풀어 혹까지 난 듯 했는데 아이는 누워서 태평히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 도리어 헤나투를 진정시키듯 왼손으로 손등을 토닥거리기까지 했다.

헤나투는 속이 답답해져 왔지만 해가 기울어가는 것을 깨닫고 더는 이렇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젖은 손수건은 대충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넣고 실례한다는 말을 하며 정복에 아이를 감싸 안아올렸다. 작은 몸뚱이의 시선이 훌쩍 높아지자 조금 놀랐는지 아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이의 시선이 제 뺨에 닿는 것을 아는데도 조급한 마음에 옷으로 아이를 빵처럼 꽁꽁 동여매고 척척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여기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간단한 치유 마법을 사용했으니 괜찮으실 테지만 의사에게 제대로 보여야 나머지 치료도 할 수 있으실 겁니다. 밤이 되면 아직 추우니 더 늦어지기 전에 길부터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조금 실례를 했지만 괜찮으시지요, 공자님."

"......아아, 괜찮습니다. 길이라면 내가 알고 있습니다. 분수대를 지나 십자 모양 길이 보이면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왼쪽 코너로 돌아가면 출구가 있을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말은 더 하지 마시고 눈을 감으십시오."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열이 오른 뺨을 품에 비비적댔다. 어리광 같은 모습에 조금 안도하며 아이가 설명한 대로 분수대를 지나 왼쪽 코너를 돌았다. 그러고보니 아이는 목소리마저도 맑고 고왔다. 정말 어느 가문의 공자님이신 건지. 한숨을 푹 내쉰 헤나투는 저 멀리에 사람들이 몰려 있고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가 맞았다. 저쪽이 출구였다.

"공자님, 저쪽에 사람이 몰려 있는 걸로 봐선 금세 치료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더 깨어 계세요."

"......그러고보니 그대의 이름이 어찌 되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헤나투 라우렌시오 나시멘투입니다. 동부의 제 1마탑 소속 상급 마법사입니다."

"그대의 성취가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벌써 상급 마법사가 되었다니, 그대가 소문의......."

"황자 전하!"

"나시멘투!"

아이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저 멀리서 갑주 차림의 기사 여럿이 황자 전하를 외치며 달려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주저앉았다. 그 뒤에서 달려온 동부 제 1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이 자신을 약하게 꾸짖듯 불렀다. 헤나투는 그제야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가 황궁의 보물, 1황자임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춘 헤나투는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냉철한 머리로 상황을 파악한 그는 아이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듯 숙여보이며 묵례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 충성하는 자세로 대기하던 기사들 중 하나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자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으니 벌을 주십시오."

뒤늦게 숨을 헐떡대며 도착한 나머지 마법사 무리들과 시종들은 황자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죄를 청하고 있었다. 헤나투는 시선을 허공 어드메에 둔 채로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황자를 얼른 의사에게 보여야 하는데 그 말을 내뱉기가 쉽지 않았다. 황자의 호위임에도 황자를 놓친 죄는 컸다. 황자의 성격을 모르니 황자가 죄를 벌한다 한다면 이곳의 누구라도 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황자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헤나투는 황자의 안색을 살피려 고개를 숙였다가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는 황자를 바라보았다.

황자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일어나세요. 내 일부러 몸을 숨겼으니 벌을 하려면 나를 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부 마탑에서 방문했던 마법사들은 이 일과는 연관이 없으니 돌아가도 좋습니다. 민망한 모습을 보였으니 잊어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시멘투 경, 죽을 죄를 진 것처럼 서있지 말고 이 사람을 좀 옮겨주세요. 저쪽 연둣빛 머리칼을 가진 기사에게, 예, 고맙습니다."

"......황자 전하.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다 하지 않았습니까. 다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 없습니다."

마법사 정복에 싸인 채로 담담히 상황을 정리한 황자는 개중 가장 침착하던 연둣빛 머리칼을 가진 기사의 품에 안겼다. 헤나투는 자신의 품에 있던 무게가 사라지자 공허함을 느꼈다. 

기사는 익숙하게 황자를 안아들고 헤나투를 향해 묵례했다. 헤나투 또한 그에게 묵례했으나 찝찝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마법사 무리에게 다가가려다 말고 헤나투는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제가 발견했을 때에는 황자 전하께서 쓰러져 계셨습니다. 꼭 궁의를 부르셔야 합니다."

"......황자 전하."

헤나투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 듯한 기사의 부름에 황자는 작은 한숨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모습이 꼭 조숙한 어린아이의 그것이라 헤나투는 걱정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뒤에서 미적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발을 떼기 어려웠다. 황자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이젤 경, 궁의에게 연락을 하세요. 그리고 나시멘투 경, 가까이 와 주시겠습니까."

"......예, 전하."

어정쩡한 자세로 가까이 다가간 헤나투는 바닥만 보고 있었다. 시야에 자그마하고 하얀 손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아까보다 훨씬 나은 낯을 한 아이가 말갛게 웃고 있었다. 작은 손이 제 팔뚝을 두드렸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오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황자 전하. 부디 오늘 같은 일은......."

헤나투가 무어라 덧붙이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자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황자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지만 눈을 접어 웃었다.

"네, 건강을 잘 챙길테니 그런 표정 마시고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 이 사람도 정말 쉬어야겠습니다."

"예, 황자 전하."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마법사들도 뒤늦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우르르 대답했다. 헤나투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마법사 무리에 합류했고, 황자 일행은 조금 서둘러 궁을 벗어났다. 더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예를 갖추고 있던 마법사 무리들은 뒤늦게 몸을 바로 하고 한숨을 팍 내쉬었다.

"큰일 난 줄 알고 가슴 졸였다, 진짜."

"나시멘투 경, 괜찮아?"

"......괜찮습니다. 일행에서 떨어져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연구밖에 모르는 네가 일부러 한 일도 아닐 테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돌아가서 한소리 들을 각오는 해둬."

선배 마법사의 걱정어린 눈을 뒤로 하고 헤나투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다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그런 헤나투를 의아한 낯으로 보던 선배 마법사가 등을 찰싹 때렸다.

"정복 상의는 어디다 두고 왔어?"

"아......."

다들 정신이 없어서 제 정복 상의로 황자를 감싸고 있었단 사실은 몰랐나보다. 헤나투는 사실을 고할까 생각했다가 그만두고 터덜터덜 걸으며 입을 열었다.

"짐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김에 같이......."

"너 진짜 연구에 빠져 있느라 주변을 못 챙기는 것 좀 어떻게 해야 돼. 내가 몇 번을 말하냐. 무리에서 떨어진 것도 요즘 몰두하고 있는 건축용 마법 때문이었지?"

"그, ......예에."

그러고보니 황자를 처음 보았을 때 짐을 다 내팽개쳤었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대충 대꾸한 헤나투는 선배들이 의식적으로 황자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는 것을 깨닫고 황혼으로 물든 하늘에 슬쩍 시선을 두었다. 황자 전하는 괜찮으실까. 걱정이 깊어갔다.

*

천장이 높고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가득한 방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지만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따금씩 진찰을 하는 궁의가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다였다. 진찰이 얼추 끝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황제는 사람을 물리고 조용해진 방을 둘러보았다. 아이가 쓰기엔 방이 지나치게 컸다. 황제와 국서, 황자 셋이 남자 황제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호위들을 따돌리고 홀로 앓았느냐."

"......정령들의 힘과 축복이 상충하는 느낌이 들어 급히 능력을 사용해 폐궁으로 숨어든 게 답니다."

"이마의 혹이나 떼고 그런 말을 하지 그러냐, 아들아."

"......송구합니다, 폐하."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는 무거웠다. 황제는 더 추궁하지 않고 황자의 이마에 있는 혹을 툭 건드렸다.

"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된다고 몇 번이고 말해도 듣질 않는구나."

"혹시 사람들이 휘말리면 어찌합니까."

"재해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폐하."

뜻을 알아챈 국서가 황제의 손을 포개어 잡으며 만류했다. 그러나 황제는 국서의 손을 꽉 잡아줄 뿐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 재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네 곁에 둔 기사들을 왜 믿지 않는 것이냐. 나는 네 걱정을 이해하나 너 또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다. 나는 내 아들이 재해에서 무사하길 바란다."

"......어마마마."

끝내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 황자가 손을 뻗어 황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 나름의 애교였는데도 심각한 표정이 풀리지 않자 애매한 웃음을 건 황자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도로 다물었다. 국서는 황제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고 아들의 뺨을 토닥였다. 유리세공품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사람이 다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동감합니다. 허나 그리 하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이 다치질 않아야지요."

"네 아비가 옳은 말을 하는군."

"......날이 갈수록 무서워집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이 커지는 능력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황자."

이번에는 황제도 말문이 막혔다. 태어났을 때부터 강대한 능력을 타고난 탓에 줄곧 아프기만 하던 아들이었다. 하루이틀 괜찮다가도 사나흘을 앓는 아이를 보며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그래도 해가 지나며 능력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배워 안 아픈 날이 더 늘어서 만족하고 있었건만 자신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있을 줄이야. 우두커니 서 있던 황제는 침대에 걸터앉아 황자의 이마에 입맞췄다.

"네 살 때 호되게 앓았던 일을 기억하느냐. 그때는 네가 꼭 죽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리 자라 벌써 일곱살이 되질 않았니."

"......."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만큼 스스로를 걱정한다면 네가 염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황자는 이것이 황제가 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위로임을 깨달았다. 난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국서도 연신 제 뺨을 토닥이며 걱정을 표하고 있었다. 황자는 눈물이 날 것처럼 울컥하는 것을 꾹 삼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 해보겠습니다.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하나 있는 자식이 이리 조숙합니다, 국서양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은 국서가 빙그레 웃으며 황자와 이마를 맞대어 눈을 감았다.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금세 귓가에 넘쳐흘렀다.

"세드릭, 힘들면 게으름을 부려도 됩니다. 마음을 너무 혹사시키지 마세요."

"......예, 아바마마."

제 아비의 다정한 염려에 속절없이 무너진 세드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고개를 물린 국서가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셋이 같이 잘까요. 어떠십니까, 폐하."

"침대도 넓은데 그리 할까요, 에녹."

"......아!"

갑작스럽게 소리를 친 아이를 놀란 듯 바라본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제 일곱살이라고 혼자 자려는 건가? 싫다 이건가?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생각을 한 두 사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세드릭이 빠르게 말을 꺼냈다.

"폐궁 분수대 근처에 사람을 보내어 나시멘투 경의 물품을 챙겨주십시오. 그가 저 때문에 겉옷과 책을 잔뜩 버렸습니다. 보답을 해야 해요."

"......이 어미랑 같이 자기 싫어 꺼낸 변명이 아니고?"

"아닙니다. 저는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와 함께 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밤이슬을 맞아 그의 책이 젖지 않았을까 우려됩니다. 어마마마, 제 청을 들어주셔요."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동부 제 1마탑의 헤나투 나시멘투라 했었지. 음, 하고 고민하는 척을 하던 황제가 설렁줄을 잡아당겨 시종을 불렀다. 시종에게 세드릭이 했던 부탁을 그대로 전달하고는 셋이서 잘테니 아침까지 누구도 들이지 말라 명한 황제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자신을 챙기라 했더니 곧장 남부터 챙기는 모습, 잘 봤다."

"어, 어마마마......저는 그런 것이 아니옵고."

"되었다. 그는 따로 불러 상을 내릴 것이니 그런 줄 알고 그만 잠들거라. 이 어미와 아비가 곁에 있어줄테니 악몽도 멀리 도망갈테지."

장난스럽게 웃은 황제는 고개를 돌려 수척한 아들의 뺨에 입맞췄다. 국서도 세드릭의 반대쪽 뺨에 입을 맞추더니 침대에 누웠다.

"푹 주무세요, 황자."

"......안녕히 주무십시오, 어마마마. 아바마마."

황제의 뺨에 쪽, 국서의 뺨에 쪽 입맞춰 그들의 인사를 그대로 돌려준 세드릭이 안도한 듯 웃으며 눈을 감았다.

긴 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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