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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 기사님의 로망

플로리안 민체코 x 베아트리스 민체코

“플로리안, 너 오늘 아버지하고 싸웠다며?”

“흐어어어억!!”

분명히 근처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오는 목소리에 플로리안은 기겁하며 파드득 튀어 올랐다. 그나마 익숙한 목소리가 누군지 빠르게 파악했기에 비명을 낮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건 피했다.

반절의 익숙함, 약간의 한심함과 안쓰러움을 담아 베아트리스는 동생인 플로리안을 응시했다. 일부러 놀래키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신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오늘 플로리안은 정신을 딴 곳에 팔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밝은 민트색 머리카락은 민트 농장에서 천지로 뒤덮여있는 잎사귀 사이에 묻혀도 위화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였을까. 그건 제 눈길을 슬슬 피하는 저 동생도 마찬가지라, 사실 그를 찾아내는데 좀 힘들긴 했다. 자, 그럼 이제 누나를 고생시킨 값을 받아내야지? 베아트리스는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접어 웃었다.

“뭘 그리 놀라고 그래? 자자, 일 다 끝났어? 어머니가 만든 민트 아이스크림 가져왔으니까 녹기 전에 먹자.”

“그냥 솔직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한테서 자세히 털어내고 싶은 거잖아요….”

조용히 투덜댔지만 베아트리스의 요구를 거부하지는 않는 플로리안이었다. 내 동생이긴 하지만 참 순하기도 하지, 그 흔한 사춘기니, 반항기니 부를만한 것도 딱히 없었고. 아니, 이번엔 그냥 민트 아이스크림을 거부할 수 없었던 건가? 휴식공간에 마련되어 있는 파라솔을 향해 걸어가는 남매의 뒷모습은 퍽 사이좋아 보였다.

너무 뜨겁지 않은 적당히 화창한 날씨, 햇빛을 가려주는 커다란 파라솔,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완벽한 초여름의 삼박자를 맞춘 플로리안과 베아트리스는 휴식을 만끽했다. 한 손엔 아이스크림이 담긴 유리잔을, 다른 손엔 작은 은수저를 들고 베아트리스는 눈을 반짝였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플로리안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기에, 약간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반짝. 반짝반짝. 기대감 서린 무언의 압박에 결국 플로리안은 손을 들었다. 제 누나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로 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얌전히 제공하느냐, 버티다가 제공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

“그렇게 봐도 별 건 없는데요…. 그냥 오늘 아침 아버지한테 검술 연습하는 걸 들켰거든요.”

그래?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플로리안이 몰래 근처에 사는 은퇴한 검사에게서 검술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는 건 베아트리스도, 그들의 어머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들켰다’는 단어를 쓰기엔 플로리안도 딱히 비밀로 하려는 노력을 들이지 않았었다. 고로 플로리안의 말대로 큰일이 아닌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래서? 고작 그거 가지고 네가 아버지와 싸웠을 리 없는데? 네가 검을 잡든 꽃꽂이를 하든 아버지는 딱히 상관 안 하실걸?”

플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들이 뭘 좋아하든, 취미생활로 뭘 하든 터치하지 않는 주의였기에 웬만해선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플로리안은 말을 이었다.

“누님 말대로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검술은 왜 배우냐고 물으셔서,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거든요.”

푸웃. 방금 입에 넣은 아이스크림에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베아트리스에게 플로리안이 빠르게 손수건을 건네줬다. 콜록콜록, 잠시만. 놀라서 몇 번 기침하다 이윽고 진정된 베아트리스는 침착하게 플로리안에게 되물었다.

뭐가 되고 싶다고? 기사요. 플로리안은 긴장해서 손가락을 꼼질대긴 했지만, 베아트리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플로리안이? 내 동생이? 기사???? 베아트리스는 먹던 아이스크림도 내려놓고 환청을 들은 건 아닌지 고민했다. 저 순해 빠져서 맞으면 맞았지, 누굴 때리지도 못할 것 같은 애가? 아까처럼 뒤에 몰래 와서 말 걸기만 해도 놀라는 애가, 기사?

플로리안이 어렸을 때부터 기사를 동경해왔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단순히 어린애의 한철 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베아트리스가 공인한 플로리안의 순한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누님… 아무리 놀랐어도 그렇게 보면 저도 상처받는다고요…. 앗, 미안.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하고 베아트리스는 차분히 생각했다. 하긴, 되짚어보니 플로리안은 얼굴만큼 성격도 순해서 여태 누구와 싸울 정도로 고집부린 적이 거의 없었다. 늘 기가 센 아버지나 베아트리스에게 양보하고 져주는 게 일상다반사였으니…. 약간 반성하며 베아트리스는 플로리안을 찬찬히 뜯어봤다. 저 정도면 체격이나 체력이나 괜찮을 거고. 성격은, 뭐, 훈련받고 구르면서 익숙해지든지, 정 안되면 다시 집에 돌아오든지 하겠지?

어쨌거나 플로리안이 하고 싶다고 선택한 것이 기사든 뭐든, 베아트리스는 플로리안을 응원했으면 응원했지 말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여전히 궁금했던 한 가지만 이참에 풀기로 했다.

“넌 왜 기사가 되고 싶은 건데?”

“…멋있잖아요.”

…그래, 참 플로리안다운 단순하고 순수한 대답이었다. 베아트리스는 많은 감정을 담아 지긋이 플로리안을 쳐다봤다. 누나의 강렬한 눈빛 아래 플로리안은 우물쭈물하다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강하고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물론 이 영지에서 아버지하고 누님을 도우면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을 보고, 돕고 싶어요.”

우리 플로리안, 로망(romance)을 꿈꾸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도 꿈에서 멈추지 않고 그걸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는 건 좀 기특하기도 하네. 베아트리스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입에 털어 넣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응, 잘 알아들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으음… 일단 아버지를 설득해야겠죠. 어머니는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도와주겠다고 하셨어요.”

예상했다는 듯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턱을 괴었다.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아버지만 잘 설득하면 되겠네. 아마 아버지가 가장 문제 삼는 건 플로리안이 집을 오래 떠나 수도에서 생활하는 것 정도려나? 기사가 되려면 필연적으로 수도로 가야 할 테고, 우리 지방이 수도하고 상당히 떨어져 있어야지. 플로리안이 여태 민체코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도 한몫 불안을 더하지 않았을까.

베아트리스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치면서 머리를 굴렸다. 동생이 용기 내서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누나 된 도리로 조금 도와줄까? 베아트리스와 어머니까지 합심해서 아버지를 설득한다면 허락을 얻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어차피 언제까지고 플로리안을 싸고돌 순 없으니까 이번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그러고 보니.

“플로리안, 너 혹시 만에 하나 가주가 되기 싫다거나, 아니면 소가주인 내가 있는데 너까지 있으면 내가 불편할 거라든가, 그런 생각으로 집 나가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더듬이까지 파르르 떠는 걸 보아하니 확실하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얘는 진짜 너무 솔직한 게 탈이라니까. 베아트리스는 활짝 미소지으며 윙크를 날렸다.

“좋아. 그럼 아버지 설득하는 건 내가 도와줄게. 대신 수도에 올라가면 일주일에 편지 한 통은 꼭 보내줘야 한다?”

베아트리스의 제안에 플로리안의 눈이 더욱 커져 보름달처럼 둥그레졌다가, 이어지는 말에 긴장이 빠진 듯 피식 웃었다. 누님은 그냥 수도에서 도는 소문이나 가십거리를 저를 통해 듣고 싶은 거 아니에요? 어머, 부정은 못 하겠네. 로맨스 소설도 좋긴 하지만 역시 현실 드라마가 더 생생하고 긴박감 넘치지 않니?

그렇게 베아트리스는 동생이 이제 다 컸다는 대견함에, 플로리안은 믿음직한 누나가 자신을 도와주겠다 약속했다는 안도감에 웃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뒤….

“오늘부터 공주님을 모시게 된 기사, 플로리안 민체코라고 합니다!”

누님, 저 생각보다 엄청난 일에 휘말린 것 같은데요?

모모카 L. 레이카 공주님의 호위기사가 된 플로리안 민체코 경이 깃펜을 들었다.


Written 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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