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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독백

진 연 (커뮤 러닝 개인 로그)

—N763478

비 내리는 차원에 정착한, 진 연의 회고록

일상_비 내리는 카페에서

모처럼 여유 있는 오후를 보낸다.

비가 우산을 뚫을 듯 매섭게 내리고 있기 때문일까. 카페 오픈에 맞춰 맞이한 한 손님을 제외하고는 여태 방문자가 없어, 홀로 커피 향을 즐기고 있다.

축음기에 레코드판이 돌아간다. 빙글빙글 도는 원반에 바늘이 긁히자 잔잔한 재즈가 텅 빈 카페를 가득 채운다. 사람들의 목소리 대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적적하지 않게 한다. 진하게 내린 원두커피를 앞에 두고 간간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다 일어서 레코드판을 빼낸다.

다시 빗소리만 들리는 1층의 카페를 뒤로하고 계단을 오르면 잠긴 문이 나온다. 열쇠를 끼워 돌리면 어둑한 투룸 주거지가 나온다. 전등을 켜면 단출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따스한 방이 드러난다. 비의 세기에 따라 가끔 깜빡거리는 빛에 익숙해, 어려움 없이 침실 옷장을 연다. 붉은색을 띠는 건조 마법석의 색이 흐려지는 것을 보아하니 곧 교체해야 할 때가 왔구나 싶다.

검은색 기타 케이스를 들고 다시 카페로 내려간다. 아직 손님이 찾아올 기미가 없어 창가 근처 의자에 앉는다. 케이스 안에서 밝은 갈색 통기타를 꺼내 현을 점검하고 조율한다. 그리고 한 손은 넥을 쥐고, 다른 손으로 부드럽게 피크를 내려긋는다.

어느 적적한 비 내리는 카페의 오후. 노란 햇빛을 머금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과거의 향수를 되짚으며, 나는 기타의 울림을 반주 삼아 노래를 불렀다.

기회_옛 꿈으로의 여행을 떠나

섬 아일레인의 도서관은 온통 붉은색으로 빛난다. 처음 봤을 때는 건물에 불이라도 난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이제는 책을 24시간 존재하는 습기에서 보호하기 위해 건조 마법석을 아예 벽에다 박아놓아 그리 보인다는 걸 안다.

도서관을 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처음 자리를 잡을 시기에 이곳에 관한 정보가 필요해 종종 찾아오곤 했지만, 이제 기억을 되짚어보면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게 언제인지 흐릿하다.

비녀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지 습관적으로 확인한다. 정착한 지 3년이 지나니 이제 카멜레온 장치 없이도 이곳의 언어에 까막눈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착용하는 게 훨씬 편했다. 사람들도 저가 갑자기 말을 더듬거나 하게 되면 당황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본래 책과 친한 편이 아니었기에, 글을 읽는 건 말을 듣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비녀를 확인해가며 도서관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나가던 사서가 보고 아는 체한다.

“진 씨, 여기선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카페는 어쩌고요?”

“오늘 조금 일찍 닫고 왔어요. 음악 서적은 어느 쪽에 있나요?”

“2층으로 올라가서 600번 대 책장을 살펴보세요. 연말 축제 노래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있더라니, 진짜인가 봐요?”

“네. 안 하면 누군가가 인대가 끊어질 때까지 달리기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예?”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넘기고 층을 오른다. 눈 앞에 펼쳐진 건 전부 타인의 기록이다. 인연이 닿을 수도, 닿지 않을 수도 있는 수많은 기록이다.

또다시 새로운 주기가 돌아옵니다. 괴짜의 일지 같기도, 과학 잡지 같기도 한 대사서의 편지를 떠올리며 잠시 침묵한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편지를 받는 날에는 심경이 조금 복잡했다. 누군가는 이를 고향에 대한 향수라고 부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놓고 온 과거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누군가는 또 미래를 향한 새로운 꿈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과거의 꿈을 내려놓은 지도 벌써 3년이다. 그 길로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그러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타협한 지 오래된 마음은 쉽게 굳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위해 무대에 오르라고 격려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주기를 맞이하며 축복을 보낸다. 그래서 이번 한 번만, 떠나온 길을 돌아보기로 한다.

어쩌면 이건,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게 아닌, 새롭게 찾아온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무대_시작의 공명음을 듣다

무대에 처음 오르던 순간을 기억한다.

앳된 얼굴에 긴장이 선연히 드러났는지, 격려차 어깨를 두드려주던 형의 손길이 든든했다. 야간 카페의 화려한 조명이 늦은 밤을 밝힌다. 모든 손님의 눈이 제게 향해있다는 착각이 들어 작게 심호흡한다.

조금은 무섭다. 하지만 동시에 손에 들린 기타의 무게에 설레기도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대로 내려가고 싶지는 않다.

스툴에 걸터앉아 한 손에 픽을 들고 한 손으로 기타의 넥을 쥔다. 손가락에 줄이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하다.

숨을 들이마신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관객이 기다린다. 스물하나의 청년이 입을 여는 순간을.

무대에 다시 오르던 순간을 기억한다.

떨리는 손을 숨기려 괜히 등 뒤로 팔을 숨긴다. 그럼에도 표정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옆에 서 있던 참가자가 제게 상냥한 웃음을 건넨다. 그 위로 건조 마법석이 붉은색으로 따스하게 내리쬔다. 무대 뒤편에서도 웅성거리는 관객의 소리가 들린다.

두려웠던 추억이 밀려온다. 그러나 동시에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행복했던 기억도 되살아난다. 한 가지 다짐한 건, 이대로 내려가지는 않겠다.

이름이 호명되어 무대를 밟는다. 손에는 늘 함께했던 기타가 들려있다. 마치 옛날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에 가슴이 울렁인다.

조용히 숨을 내쉰다. 고개를 들고 입가에 미소를 띤다. 관객이 기다린다. 스물아홉의 청년이 입을 여는 순간을.

노래를 시작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환한 가로등의 빛이 창가에 스며들어온다. 손님이 다 떠나간 어둑한 카페에 축음기가 홀로 돌아간다. 귀에 익은 익숙한 선율에 입술을 뗀다. 유리창에 비가 부딪히는 소리에 스물한 살과 스물아홉 살의 노랫가락이 꿈결처럼 뒤엉킨다.

Today, today

What felt so far away feels a little closer

A Little Closer / FINNEAS


Written 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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