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엔리 700일 기념 글 조각
2019.07.19
하늘이 느닷없이 무게를 가지고 조각조각 추락한다. 그 너머에는 밤과는 다른 텅 빈 공백이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이곳은 심상 세계, 심상세계는 마법의 근원. 그 마법이 흩날리는 눈처럼 부서지고 흩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 하늘에 대항하여 대지는 아직 버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빛을 발한다. 무너지는 세계를 받아들고 꽃을 피워낸다. 마법의 부스러기라도 그러모아 아름답고 처절하게 발버둥을 친다. 빛 속에서 수많은 꽃들이 두텁게 얽히며 피어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 치열한 생존의지는 누구의 것일까?
세상에는 아직 발을 디딜 곳이 남아있었다. 엔리카는 걸을 수 있는 곳까지 걸었다.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엔리카에게는 한계가 명확하게 보였다. 심상세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세계를 헤집고 나갈 방법도 없다. 그러나 엔리카에게는 생각 할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시간은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였다. 멈춰서 망가지는 무언가에 시선을 오래 두다보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머리를 가득 채운 건 ‘그’ 일 수 밖에 없었다. 레이피스.
내가 어떤 말로 당신을 전부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하고 아끼는 연인. 제 앞에서 순하게 웃는데 그 미소가 아름다운 이. 저와 같이 파란 숲 내음을 좋아하고 자연의 경이에 감탄하는 사람. 종종 꽃을 가져와서 내밀던 사람. 이곳까지 찾아와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 그리고 자신이 혼자 돌려보낸 사람.
벌써부터 마음이 먹먹해졌다. 맞다. 자신이 돌려보냈다. 분명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많이 놀라고 불안해했을 텐데. 애달프게 혹은 절망에 빠진 채 헤매면서 갖은 방법을 찾아 헤매었을 텐데. 오랜 혼수상태 끝에 눈을 뜨자마자 처음 마주한, 다급하게 부르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며 내뱉는 떨리는 음성과, 걱정이 가득하던 눈과 살피는 손. 한번 떠올리자 마개를 연 듯 그의 이미지가 눈앞에 쏟아진다. 내가 깨어난 것에 안심하고 또 불안해하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확신을 주고 나를 다독여주던 미소. 파란 나비가 날아가는 숲으로 걸어가며 우리가 함께 손을 맞잡고 손, 꽃밭을 거닐고 숲을 스쳤던 조용한 걸음. 그 모든 것.
심장이 저미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어찌 당신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을까. 그 모든 행동에서 절절한 애정을 느끼는데.
설령 어긋날지라도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데.
엔리카는 우뚝 멈춰 섰다. 걸음 앞에 놓은 세상은 무너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참담하도록 아름다웠다. 수 천 수 만 송이의 제비꽃, 날아오르는 나비. 그러나 그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 아래에 다른 마법사들의 시체가 묻혀있다면?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눈앞이 멀어지고 귓가가 멍해진다. 현심감을 잃고 감각이 붕 뜬다. 엔리카는 세차게 고개를 휘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다시 걸었다. 심상세계가 무너지는 여파로 정신이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좀 더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엔리카는 들판을 걷다가 숲으로 들어섰다. 사슴을 맞닥뜨렸던 지점까지 걸었으나 다행하게도 다시 사슴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죄어들었던 심장이 슬며시 풀렸다. 엔리카는 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이해해버린다. 당신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이 그 일을 벌이게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런 엔리카는 마법사였다. 마법이란 때론 잔인하다. 마법에는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가가 따르지 않고 거저 얻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냐만, 마법은 조금 다르다. 기적을 내놓는 대신 깜짝 놀랄 만큼 거대한 것을 손쉽게 세상에서 지워낸다. 몇몇 금기시 되어 있는 마법 중에는 마법의 결과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나 여파가 참혹하기에 금지되어있는것도 다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법이었고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엔리카는 지금껏 배웠고 믿어왔다......
사람의 영혼. 대가의 저울에 애초에 안 될 것이 올라갔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냐 의 문제가 아니었다. 반대편에 무엇이 올라가 있더라도, 설령 그 어떤 금은보화가 반대편에 있더라도 처음부터 응해서는 안 되는 선택지였다. 그러니 엔리카는 저울에 올라간 모든 것들을 천천히 저울 밖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레이피스, 그의 영혼은 처음부터 저울에 올려놓지 않았다.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마법은 주인 엔리카의 생각을 최우선으로 반영하여 모든 것을 돌려보냈다. 이것이 맞는 일일 것이다. 엔리카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처음부터 없던 일로 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당신에게 정말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숲이 끝나자 오두막이 나왔다. 이런 풍경이 나올 줄 알았기 때문에 아까처럼 의아하게 오래보는 일은 없었다. 다만 생각보다는 멀쩡했다. 오두막에서 거대한 굉음을 들었지만 당장 오두막을 덮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엔리카는 오두막 계단에 앉았다. 이곳은 자신의 심상세계 안에 들어선 레이피스의 공간이다. 오롯이 자신의 것만이 있어야 할 심상공간에 타인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꽤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기에, 오히려 친숙하고 평온했다. 내 안에 당신의 조각이 남는 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엔리카는 난간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리운 이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곳. 다시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쯤 당신은 무사히 밖으로 나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 공간을 빌려갔으나 공간의 주인은 엔리카 자신이었고 자신은 그것을 바랬다. 그러니 그대로 행해졌을 것이다. 물론 살아 있다고 모든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들이쉬고 내쉬는 것마저도 지독히도 힘겨운 삶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선택을 한 나를 원망할까. 영영 가망이 없었으면 모를까, 한번 주어졌다가 이루어지지 않은 기회에 더욱 더 비참해 할까. 그곳에서의 나의 흔적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까, 아니면 더 슬프게 만들까?
그런 당신을 생각하면 손가락이 곱아든다. 자꾸 후회할 것만 같아진다. 분명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른 길이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업고 끝없이 울린다.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요, 엔리카. 그건 내게 너무나 잔혹해요.’
레이피스의 말이 떠오른다. 잔혹이라는 단어가 심장을 서늘하게 누른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에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나 없이 그가 얼마나 힘들어 할지 안다. 그런데도 결국 자신은 잔혹한 결과가 나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엔리카가 어찌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까. 수백 수천의 비명을 외면하거나 목숨이란 것이 의미없다고 여기며 공멸을 제안할 수 있었을까.
‘부디 내게 잔인한 그 선택을 내리도록 해요.’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문장이다. 레이피스는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기 위해 꺼낸 말이었겠지만 그 아래에는 선명한 전제가 있었다. 내가 그 선택을 하리란 것. 당신은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요. 해선 안 되는 일에 단호해지는 사람이라는 걸, 덩달아 고집이 세기도 하다는 걸. 그걸 알고도 나를 사랑했잖아요. 내 뜻에 따라주었잖아요.
레이피스가 서늘한 날붙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엔리카는 안다. 꽃과 새의 울음소리에 기뻐하는 사람이 때로는 어떤 증오 없이도 만물에 매정해진다. 필요하다면 어떤 무참한 일이든 벌이고 죄책감 없이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번에 모든 마법사의 영혼을 희생시키고 자신을 살리려고 했듯이. 전부터 종종 엔리카에게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곤 털어놓곤 하였다.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사랑한다. 레이피스가 엔리카를 사랑하듯.
이번에도 그가 잘못 했다고는 도저히 말하지 못 했다. 모진 말에 그가 상처받을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그의 행위 앞에 객관적이지 못하게 된다. 마음이 한 발짝 그가 선 곳으로 움직이게 된다.
결국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괜찮지 않겠냐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풀어졌다. 위험은 미래가 있을 때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가 무너져간다. 해가 뜰 시각 같은데 해가 떠오를 하늘은 없다. 엔리카는 꺼져가는 마법이 내뿜는 희미한 빛에 의존하여 품속에 넣었던 사진을 꺼냈다. 서로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
다시 감각이 멀어지며 부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식이 잦아드는 것일지도 모르고 발밑이 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엔리카는 사진의 모습을 망막에 담은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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