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황혼 독주

미카엘라 x 체자레 아스포델

해가 지는 시각의 술집은 열기가 넘치고 시끄러웠다. 저녁 먹으러 온 사람들, 고된 하루를 잊으러 술 한잔하러 온 사람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시간 보내러 온 사람들이 한군데 뒤엉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소음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바로 앞사람의 대화조차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여러 목소리가 섞여 들어 누군가와 이야기하기에 걸맞은 장소는 아니었다.

미카엘라는 정확히 그 이유로 이 술집을 만남의 장소로 지정했다.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거대한 독백 속, 이보다 비밀스러운 거래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은 없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을 찾아라. 미카엘라의 주장에 동행한 이들은 토 달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오는 걸까?

대신 술집에 들어가서 흩어지기 전, 센리츠는 딱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미카엘라는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다. 추측하고 있어 봐야 괜한 시간 낭비였다. 그가 온다면 대화를 진행하고, 오지 않는다면 하룻저녁 버린 셈 치고 돌아갈 뿐.

빈 테이블이 튀어 보이지 않게 적당히 안주를 시킨 미카엘라는 후드를 벗지 않고 가만히 술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의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는 초면에도 관심을 끌기 일쑤였으나, 취기가 잔뜩 오른 술집 손님들의 흐린 시선은 홀로 앉은 여인을 스쳐 지나갔다. 눈 색에 필적하는 붉은 망토를 입고 왔으면 반응이 달랐을 테지만, 수도 시내에서 혁명군의 상징을 두르고 활보하는 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라 오늘은 눈에 띄지 않게 차려입었다.

물론 언젠가는 당당히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황성으로 진군할 때가 올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일렀다.

“한잔하겠어요?”

약간 가라앉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누가 시답잖은 수작을 걸어오나 싶어 고개를 든 미카엘라는 분홍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마찬가지로 후드를 푹 눌러쓴 여성이 건너편에 앉아 붉은 액체가 든 길쭉한 유리병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여성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잔 하나에 액체를 가득 따랐다.

“아스포델 공작령산 리큐르에요. 라벨에 공작가를 상징하는 연꽃을 그리는 게 허가된 유일한 제조주죠. 최상품이니만큼 맛은 보장해요.”

볼품없는 잔에서도 영롱하게 출렁이는 액체를 곁눈질하던 미카엘라가 여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은 후드 그림자에 일부 가려졌지만, 티 없이 깨끗한 파리한 피부와 목을 감싸듯 곱슬거리며 내려오는 은백색의 머리카락, 고양이 눈매의 분홍색 눈동자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접선하기로 한 이의 알려진 외견과 완벽히 일치했다.

“공작령에서만 나는 붉은 복숭아의 달콤한 맛이 일품인데, 도수가 강해서 단맛에 취해 멋모르고 계속 마시다가 정신을 잃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죠. 그래서 만월 독주라고도 불려요. 보름달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전설에 빗댄 이름이죠.”

그보다도 태도에서부터 오만하게 보일 만큼 자신감이 흘러넘치는데, 누가 귀족인 걸 몰라보겠나. 미카엘라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편하지 않은 상대 앞에서 술을 마실 정도로 신경줄이 굵지는 못해서.”

매몰찬 거절에도 건너편의 여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안타깝네요. 저도 개인적인 이유로 술은 입에 대지 않는 터라. 그렇다면 이 잔은 이대로 협상의 상징으로 남겨두기로 할까요?”

혁명군의 리더, 붉은 망토 미카엘라를 눈앞에 두고 솔레유 제국의 아스포델 공작, 체자레 아스포델이 미소 지었다.

체자레 아스포델은 술을 따라놓은 잔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상위 귀족이 자랑하는 최상품 술이라면 저 한 잔의 값어치가 평범한 서민 하루치 식삿값을 훌쩍 웃돌 텐데, 그대로 버려져도 개의치 않다는 태도에 미카엘라의 심사가 묘하게 뒤틀렸다. 차분하게 그의 속셈을 알아보러 나왔건만, 참지 못한 비꼬는 말이 미카엘라의 입에서 튀어 나갔다.

“설마 귀하신 몸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쪽이야말로 기사단 눈이 깔린 수도 시내에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어요. 덕분에 어중이떠중이 같은 실력은 아닌 걸 알았으니, 제게도 좋은 일이긴 하네요.”

부드러운 응수에 미카엘라가 헛웃음을 삼켰다. 화법이란 전쟁터에서 혓바닥을 칼 삼아 싸우는데 도가 튼 귀족한테 조금 욱했다고 이런 기 싸움을 걸다니. 시간 낭비이기 이전에 바보 같은 실수였다. 빠르게 만회하기 위해 미카엘라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하고 싶다고. 그쪽 같은 사람이 무슨 이유로?”

“뻔한 대답 아니겠어요? 당신들을 도움으로 내게도 돌아오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한 미카엘라의 붉은빛 시선에도 체자레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쉬울 상대일 거라곤 기대조차 안 했지만, 생각보다 빙빙 돌려지는 대화에 미카엘라는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싶었다. 저보다 한 살 어린 나이라고 들었는데, 성인이 되자마자 아스포델 공작가의 가주직을 물려받아 영지를 다스렸다는 게 과장은 아닌듯싶었다. 자꾸 개인적인 적개심이 피어오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티가 날까 봐 입술을 짓씹지도 못하고 미카엘라는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지금 이 자리에 달린 건 저 혼자만의 운명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다면 아무리 좋아 보일지라도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 귀족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도와 얻을 것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차가운 어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체자레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나긋한 목소리는 미카엘라의 귀에만 닿았다.

“귀족의 눈으로만 보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제 개인의 입장에선 당신들은 정말 유용한 패라서요.”

“패?”

기막혀하는 미카엘라를 바라보며 체자레가 어깨를 으쓱였다. 두 손을 맞잡아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상체를 숙인 모습은 흥정하는 협상가를 연상시켰으나, 그의 눈에는 이미 원하는 거래를 확정 지은 자의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우리 사이에 동료 같은 달콤한 단어는 필요 없지 않나요? 당신은 저에게 유용한 패고, 저 또한 당신에게 유용한 패죠. 그것으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의문은 그대로야.”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밀리겠다는 직감이 든 순간 미카엘라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협상이 파투 나는 일이 있더라도 얕보여서는 안 됐다. 거사의 실패로 전 리더였던 락스퍼가 공개 처형되고, 미카엘라가 얼마 전 새로이 혁명군 리더가 되었다는 건 체자레 아스포델도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리더십도 경험도 부족한 게 진실일지언정, 각오가 부족하게 보이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미카엘라는 사나운 표정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식은땀 맺힌 한 손을 테이블 밑으로 꽉 쥐었다.

“그쪽이 우리를 도와서 얻는 게 뭐지?”

“꼭 이유를 듣길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체자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량을 베풀어 쓸데없는 부탁을 들어준다는 어투여서 미카엘라의 입가에 짜증이 스칠 뻔했으나, 이어진 체자레의 말에 힘이 풀려 벌어졌다.

“저는 이 제국의 폐쇄적인 판도를 바꾸고 싶거든요.”

거창하면서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 미카엘라는 그의 말에 숨겨진 뜻이 있나 잠시 고민해야 했다. 몇십 년간 이어진 제국의 폐쇄적인 정치는 서민층에서도 마르고 닳은 이야깃거리였다. 상위 귀족과 황실이 서로의 권력이 커지는 걸 견제하는 싸움에 제국 내부가 진창이 되었으니, 제국 밖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발길이 끊긴 외부 여행자와 줄어든 무역 탓에 죽어나는 것은 생계가 막막해진 상인들과 그 여파로 물가가 올라 더더욱 허리띠를 졸라매는 서민들이었다.

물론 필수품이든 사치품이든 돈을 더 내고 사야 하는 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설령 물가가 몇 배로 올라도 그들이 배곯을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미카엘라의 눈앞에 앉아있는 이는 재산이 어중간한 하위 귀족도 아닌 아스포델 공작 가문의 가주였다. 그가 혁명군과 손잡아가며 제국 밖에서 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미카엘라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제국의 무역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는 뜻인가?”

단순한 귀족다운, 더욱 많은 걸 차지하려는 욕심인가 하여 넌지시 떠본 도발에 체자레는 반응하지 않았다. 되려 미소가 한층 의뭉스러워졌다.

“그것까진 마음대로 상상하시죠. 그게 이 대화에서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고작 그런 욕심으로 기꺼이 적과 손을 잡겠다는 게 믿기 어려워서.”

적이라. 체자레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옆으로 살짝 기울인 창백한 얼굴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질문을 던지는 여유로운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당신은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를 바보천치 취급하는 물음에 미카엘라는 이번에야말로 기분 상했다는 티를 드러냈다. 테이블을 확 엎어버리고 일어서서 나갈까 하는 충동을 미카엘라는 어렵사리 내리눌렀다. 제 기분이 대수인가, 여기까지 왔으면 그에게서 쓸모 있는 정보 하나라도 더 캐는 게 혁명군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래서 미카엘라는 이를 악물고 답을 뱉어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걸 방해하는 게 적이겠지.”

“정확해요. 적이라는 건 내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이들이죠.”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나한테 왜 하는 거지?”

“설득이 필요하다면서요?”

체자레가 몸을 뒤로 물리고 팔짱을 끼었다. 술집의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분홍색 눈동자가 밤에 뜬 만월처럼 선명히 빛났다.

“당신에겐 목표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한가요, 적을 섬멸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요?”

“똑같은 얘기 아닌가?”

“적을 완전히 없애야 이룰 수 있는 목표도 있지만, 저에겐 그게 필수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목표가 우선이 되어야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는 적을 제거하는 데 힘을 쓰는 건 주객전도죠.”

“그러니까 그쪽은 원하는 것만 가질 수 있으면, 제국이 혼란에 빠져도 상관없다?”

미카엘라의 추궁에 체자레가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느긋하게 대꾸하며 체자레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잔을 들었다. 잔에 담긴 붉은색 리큐르가 넘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출렁였다.

“우리가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제국은 이미 뿌리가 상한 나무나 다름없어요. 그리고 때론 소량의 독이 약으로 작용할 수 있죠. 술도 과하지만 않으면 하룻저녁의 좋은 친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반역이나 다름없는 발언을 부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아스포델 공작가의 가주에게서 듣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미카엘라가 코웃음 쳤다.

“냉정한 것 하나는 좋네.”

“그렇게 보이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당신들에게 유감이 없는 건 아니라서요.”

체자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이 미카엘라에게서 떨어져 옆으로 흘렀다. 동행한 동료들이 앉아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한 눈길에 한겨울을 닮은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카엘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누구를 지목하는 거지? 저와 같은 혁명군 간부인 센리츠? 아니면 귀족가를 배신하고 나온 제란 르루아? 짚이는 구석이 없어 혼란스러운 와중, 후드로 얼굴을 가린 이가 체자레 곁으로 다가왔다. 미카엘라의 어깨에 긴장이 들어갔다. 설마 이곳에서 몸싸움이 일어날까 싶었지만, 언제든 망토에 가려진 단검을 꺼낼 수 있게 손의 위치를 바꾸던 차에 이질적으로 평온한 체자레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더 할 말이 없다면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셈 치고 돌아가 볼게요. 어차피 이 자리에서 세세한 조건을 논할 수 없으니, 나중에 따로 연락책을 보내도록 하죠.”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뱉고 미카엘라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손은 단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우리가 그쪽 거래에 응할지는 내부적으로 의논해야 하니 너무 기대하고 있진 말아.”

“마음대로 하세요.”

술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고 체자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 서 있던 이가 호위처럼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체자레가 등을 돌리는 순간 가만히 테이블을 노려보던 미카엘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

몸을 돌려세우진 않았지만, 체자레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미카엘라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금전적인 거래 외에 민감한 정보도 거래할 능력이 있나?”

“당신이 원하는 정보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미카엘라가 입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는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독단 행동이었다. 오늘 체자레 아스포델을 만나 확인하기로 한 건 그가 진짜 혁명군에게 자금을 댈 의향이 있는지뿐. 정보 거래에 관한 건 혁명군 간부진 내에서도 오가지 않은 이야기였다.

변명하자면 혁명군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 없는 제의였다. 상대가 공작가인 만큼 거래가 성사된다면 황실과 귀족에 관한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둘러댄다면 간부진 대다수는 납득하리라.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것을 핑계로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네 친구를 찾고 싶다는 욕심이 아니고?

캄파뉼라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정확한 지적이어서 죄책감이 미카엘라의 입을 뒤늦게 다물렸다.

실수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후회는 들지 않았다. 귀족에게 납치당해 실종된 가족 같은 친구가 사실은 황궁의 포로로 잡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어떻게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헛소문이라 밝혀질지라도, 미카엘라는 확인하지도 못하고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체자레는 그런 미카엘라의 복잡한 심경을 꿰뚫어 보지 못한 듯했다. 여전히 고개만 돌려 미카엘라를 응시하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 나눌 얘기가 아닌 것 같으니, 다음 만남을 기약하도록 할까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둔 승낙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카엘라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야기는 괜찮게 흘러갔어?”

체자레 아스포델이 떠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후드를 쓴 두 사람이 미카엘라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키가 작은 쪽이 건넨 질문에 미카엘라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럭저럭. 협력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여.”

“좋은 소식이네.”

질문한 이가 빈 의자에 털썩 앉자 흔한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여성의 얼굴이 미카엘라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아직 서 있는 동료에게 남은 의자를 손짓했다. 시차를 두고 나가야 하니 앉아있으라는 뜻을 알아듣고 그 또한 여성 옆에 앉았다. 그들의, 센리츠와 제란 르루아의 시선이 동시에 미카엘라를 향했다.

“나중에.”

아무리 소음이 은밀한 대화를 가려준다지만, 혁명군 내부의 일을 열린 공간에서 이야기하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제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센리츠도 민감한 주제를 피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본인이 나왔어?”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미카엘라가 긍정하자 센리츠가 감탄했다.

“그쪽도 대단한 배짱이네. 우리를 만났다는 걸 들키면 파장이 클 텐데.”

“그러고 보니, 너희 혹시 그에게 원한 산 거라도 있어?”

한순간 분홍색 눈동자를 스쳐 간 서늘한 감정이 그가 이 만남에서 드러낸 가장 개인적이고 솔직했던 몇 초인 건 분명했다. 단순히 혁명군 전체를 향한 원한이었으면 그 시선이 저 둘을 콕 집어 향할 일도 없었겠지. 툭 튀어나온 질문에 제란이 고민하듯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전대 공작이라면 모를까,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모른다고 잡아떼기엔 짐작 가는 부분이 있긴 해.”

제란이 의문 담긴 눈빛을 보내자 센리츠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걸 네가 모르면 안 되지. 한층 목소리를 낮춘 속삭임은 미카엘라도 몸을 앞으로 숙여서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약혼자가 사하 엘제스잖아. 지금은 엘제스 가문의 이름을 쓰고 있지만, 본래 르루아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건 비밀도 아니야. 지금 유일하게 살아있는 네 사촌이기도 하고.”

아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에 미카엘라가 몸을 다시 일으켰다. 체자레 아스포델이 얽혀있다는 건 처음 알았지만, 반역자를 배출했다는 이유로 르루아 가문이 멸문당한 사건은 익숙했다. 그 원인을 제공한 제란 르루아를 알고 지낸 지 몇 년이 흘렀는데 모를 리가 있나.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냉정한 성정이지만, 그래도 체자레 아스포델이 제 약혼자는 제법 아끼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미카엘라가 제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의문이 풀린 듯 미간을 폈다.

“내가 아는 그 사하? 그럼 날 싫어할 이유는 충분하겠네. 싫어할 뿐일까, 만나자마자 죽이려고 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런데 그건 내 이야기고. 아무런 상관없는 너는 왜?”

“몰라서 물어? 너를 혁명군으로 끌어들인 게 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말조심해.”

미카엘라가 곧바로 대화를 자르고 들어오자, 둘은 입을 다물었다. 미안. 센리츠가 사과하고 짧은 정적이 흐른 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이제 가볼까? 확실하진 않을지라도 긍정적인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네. 좋은 소식은 오랜만이잖아.”

“모두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겠지. 오늘 만난 놈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따로 있을걸.”

제란의 지적에 센리츠가 미소를 거두고 입술을 모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동시에 같은 인물을 떠올렸으리라 미카엘라는 확신했다.

푸른 머리칼의 무희 캄파뉼라,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혁명군의 간부이자 귀족 살해자로 악명 높은 C.C.. 혁명군에 속한 이들 중 황실과 귀족을 곱게 보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가 품은 적의는 비교할 수 없게 깊었다. 귀족 출신 혁명군 동료에게도 경계를 거두지 않는데, 일시적인 협력 관계라고는 하나 상위 귀족과 손잡는 걸 기꺼워할 리 없었다. 미카엘라가 숨을 들이켜고 일어섰다.

“어떻게든 설득해야지. 소량의 독이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를 만큼 그가 머리가 없진 않으니까.”

조금 전에 떠나간 이가 남긴 말을 읊으며 미카엘라가 테이블에 남겨진 잔에 손을 뻗었다. 귀족의 악행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건 미카엘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싫든 간에, 체자레 아스포델이 한 말 중 한 가지는 옳았다.

중요한 건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닌, 목표를 이루는 것이었다.

“태양의 제국이 맞이할 황혼을 위하여.”

미카엘라는 망설임 없이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잔을 들이켰다.


Written 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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