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클로버
창작 세계관 '래디클' 관련 글
축축한 공기에 물 내음이 가득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밤은 캄캄하여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천체관측 탑의 탁 트인 꼭대기 층의 돌바닥을 시원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만 들려올 뿐. 세오르데인 에이아르가 들고 있던 우산을 기울이자, 앞에 선 여성의 우의 위로 떨어지던 빗물이 흔적을 감춘다. 키가 한 뼘은 작은 아델하이트가 세오르데인을 올려다본다. “시간도 늦었으
해가 지는 시각의 술집은 열기가 넘치고 시끄러웠다. 저녁 먹으러 온 사람들, 고된 하루를 잊으러 술 한잔하러 온 사람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시간 보내러 온 사람들이 한군데 뒤엉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소음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바로 앞사람의 대화조차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여러 목소리가 섞여 들어 누군가와 이야기하기에 걸맞은 장소는 아니었다. 미카엘라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그가 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동자가 언젠가, 오래전 보았던 하늘의 색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먼지와 오염으로 가득해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염려하는 눈을 마주 보았다. 나와 함께 신전으로 가지 않겠느냐. 두말할 것 없는 호의고, 어쩌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숙식과
소녀여, 네가 네 것이 아닌 꿈을 꾼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한낱 인간의 정신으로 엿본 세계의 끝과 시작이 두려웠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 증거로 너는 지금도 나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신을 향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경외심이 아니다. 네 빛나는 금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이유 모를 친근감에서 비롯된 거북함이다. 그 감정은 네 것이 아니기
별을 동반자 삼아 죽음의 궤도를 걷는 레유스티테 레텐시아의 첫발에는, 평범했던 소년 티테 엘리스가 있었다. 죽음은 공평하지만 공정하지 않다. 티테 엘리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은 부자와 가난한 자, 노인과 어린아이, 꿈이 많은 자와 꿈이 없는 자를 가리지 않고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이들을 평등하게 거둬간다. 제발 이 사람만큼은 데려가지 말라
우리는 이 가시밭길을 같이 걸어야 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서로를 부정하고, 서로의 정의를 부정한다. 수많은 부정 끝에, 오직 하나의 인정만이 우리의 운명을 한 배에 묶었다. 바람을 간신히 막아주는 낡은 판잣집 내부는 지독히도 어두웠다. 쥐새끼처럼 남의 집에 숨어들어 집주인을 기다리는 자기 모습이 미카엘라는 퍽 못마땅했다. 자신의 신념에 당
천유는 푹신한 쿠션이 달린 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다. 옆에는 똑같이 생긴 의자에 아델하이트 에이아르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손가락을 꼬았다 풀고 있었다. 앞에는 낮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얀 신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히스토리아의 신관, 카렌 키르헤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유는 작금, 이 상황이 매우, 엄청나게 불편했다. “아델하이트 양
광활한 제국의 주인, 붉은 황제시여. 당신의 광채 영원하여라. 먼 훗날 오늘을 다시 회상했을 때, 쓰라렸던 과거의 흉터조차 아름다워 보일 만큼 기적의 장미처럼 만개하여라. 장미란 친숙하고도 가증스럽다.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그 어느 꽃보다 크고 화려하게 만개하는 푸른 겹꽃은 자랑스러운 솔레유 황가의 상징이다. 나 역시 꽃의 아이 시절부터 태양과 장미가
있지, 혹시 생각해본 적 있어? 내가 만약 처음부터 모든 의무를 저버렸다면, 우리는 오늘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을까? 만약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꿈을 꾼다면… 계기는 분명치 않다. 너는 물끄러미 네 쌍둥이를 바라보다가 툭 입에서 말을 떨군다. - 만약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너는 어떡할래? 평소 같았으면 너는 수업에 가기 싫
우리는 현재에 살지 않아요. 내 시선은 삶이 종결되는 시간에 머물러있고, 당신의 의식은 밤이 뿌리내린 망망대해를 유영하고 있죠. 그러니 내게 당신의 악몽에 대해 말해주세요. 우리 홀로 외로이 방황하지 않도록. 알테라의 겨울은 매섭다. 일 년 대부분이 겨울인 나라는 하얗게 친숙하다. 짧은 여름이 지나면 몇 밤 가지 않아 새벽 풀잎에 낀 서리가 보인다.
어떠한 형태의 기록으로도 남겨져선 안 되는 이 이야기에 구태여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저 <무명 서기의 우울>이라 부르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저는 서기입니다. 제 이름을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대답하진 않겠습니다. 혹시나 오해하실까 미리 밝히자면 제가 신분을 감춘 높은 귀족이다, 이런 거창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 반대로
밤이 짙게 드리운 고요한 시각의 도서관을 그 누구도 찾지 않는다. 책을 찾으러 왔던 손님도 집으로 돌아가고, 부지런히 일하던 사서도 퇴근한 지 오래. 밖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한참 전에 멈췄다. 사람 한 명 남지 않은 도서관, 높게 세워진 책장 사이, 둥그런 홀 한가운데서 한 노인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등 하나 켜있지 않았지만, 천장에 은은하게
봄이라 함은 웅크려있던 꽃봉오리가 따스한 이슬을 맞아 피어나는 것이고, 또한 봄이라 함은 잠들어있던 생명이 깨어나 기지개 켜며, 움트는 잔디에 발을 딛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봄이라 함은, 겨우내 그리던 그대 미소를 두 눈에 담아, 세상에 색이 다시 물드는 것이니라. 그대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이름 없는 꽃밭에서였지요. 햇볕이 잘 드는 꽃밭에서, 그대는
처음 너를 봤을 때 설렜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 답했을 것이다. 당사자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 만남에, 달리 무엇을 느껴야 했을까. 그러나 은색으로 반짝이던 너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달을 닮은 듯한 색채가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나를 보던 그 눈길이, 오염되지 않은 맑은 호수처럼 티 하나 없는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