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 me your Nightmares
유나 마이얀 아이샤 알테라 x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우리는 현재에 살지 않아요.
내 시선은 삶이 종결되는 시간에 머물러있고, 당신의 의식은 밤이 뿌리내린 망망대해를 유영하고 있죠.
그러니 내게 당신의 악몽에 대해 말해주세요. 우리 홀로 외로이 방황하지 않도록.
알테라의 겨울은 매섭다. 일 년 대부분이 겨울인 나라는 하얗게 친숙하다. 짧은 여름이 지나면 몇 밤 가지 않아 새벽 풀잎에 낀 서리가 보인다. 침엽수가 시야에 보이는 유일한 녹색이 된 계절, 밖으로 나가려면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자칫 동상이라도 걸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해가 수평선 아래로 떨어진 지 한참이다. 저녁 만찬은 햇빛 대신 밝은 등불과 촛불 사이에서 이뤄진다. 무엇이 나왔는지는 곧 기억에서 사라진다. 지나간 시간은 그리 중요히 여기지 않는다.
궁전의 후문에 서 있자니 뽀얀 입김이 나온다. 모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러맸음에도 살을 에는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뒤에서 시녀가 넌지시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 말을 꺼내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온전히 지금에 집중하고 싶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는, 오랜만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돌길 옆으로 치워진 눈이 허리께까지 쌓여있다. 당신이 도착할 무렵, 눈은 다시 얇은 이불처럼 젖은 돌 위로 깔려있을 테지. 하얀 결정은 계속 쏟아진다. 내일, 아니, 모레까지. 쌓여가는 눈 속에서 많은 이들이 숨을 거둘 테다. 늘 그래왔듯이, 올해도 변하지 않는다. 긴 겨울에 익숙지 않은 당신에게도 이 지나가는 작은 눈보라는 험악한 길동무가 될 터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이곳은 당신의 시간이 멈추는 곳이 아니다.
당신은 반드시 온다.
눈을 깜빡이자 눈썹 위로 내려앉은 눈송이가 녹아내린다. 부러 눈앞 경치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오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는 기회는 손꼽을 만큼 적기에, 지금 이 환희를 만끽하고자 한다.
눈이 낙하한다. 돌길이 희게 변해간다. 새로이 쌓인 눈길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고개를 살짝 흔들어 시야를 가리는 눈을 털어내도 여전히 하얗기만 하다.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는데.
“지금 시각은?”
“22시에서 반 절가량 지났습니다.”
추위에 목이 멘 시녀의 목소리에 입술을 가늘게 다문다. 늦는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도주하다 붙잡혔을 리는 없다. 이날을 위해 모든 사전 준비를 완벽하게 해두었고, 차질 없이 이행된 것을 알고 있다. 추격자는 알테라의 국경을 넘지 못한다. 눈보라 때문에 지체되는 시간까지 미리 참작했으니, 당연한 의문이 든다.
잘못 본 걸까. 다시 확인할까. 침착하고 조금 더 기다릴까.
그래, 10분만 더 기다려보자. 장갑 속에서도 얼어가는 손을 마주 잡는다. 눈이 복숭아뼈까지 쌓여온다. 흩날리는 눈보라 속 세상이 희미해진다.
어둠 너머에서 대문이 묵직하게 긁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기에 얼어붙은 입꼬리가 드디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흔치 않은데, 귀빈은 다르긴 다르군요.”
새하얗게 나부끼는 눈보라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윤곽이 드러난다. 훤칠하게 키가 큰 인영이 곧바로 제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한다. 새까만 눈이 내려다보는 제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
“왕녀 저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어, 리온. 먼 길 다녀오느라 피곤할 테지만 보고는 바로 받아야 하니 잠시 후 내 서재로 찾아와.”
명 받듭니다. 그가 궁 안으로 모습을 감춘다. 그를 지켜볼 필요는 없으니 남은 당신에게 관심을 돌린다. 추위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움츠린 체격은 저보다 크지만 도리어 제가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내가 기다려온 이. 당신이 감히 예상하는 것보다, 나는 당신을 오래도록 기다려왔어.
“이곳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격식 차려 환대해드리고 싶네요. 나, 왕녀 유나 마이얀 아이샤 알테라, 당신이 굳건한 겨울의 땅, 알테라 왕국의 심장, 아우로레스 궁전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극진한 대접을 약속드립니다.”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전하, 지지 않는 태양의 나라에서 온 왕이시여.
세찬 바람이 불어 망토의 후드가 벗겨진다. 왕관의 무게가 사라진 검고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헝클어진다. 피로와 우울함에 잠긴 하늘색 눈에 선명하고도 익숙한 고독함이 비쳐 보인다. 푸른 장미가 깊숙이 새겨진 눈동자 속에.
가슴이 뛴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휘날리는 이곳에,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따듯한 고동이 울린다. 이 순간을 나는 얼마나 간절히 염원해왔던가.
나와 같은 시간을 보는 당신을, 나는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왔어.
* * *
“계획은 저하의 말씀대로 틀림없이 흘러갔습니다. 핏빛의 발키리라 불리는 여인이 저하가 말씀하신 시각에 쿠데타를 선언하며 왕궁을 급습했습니다. 명하신 대로 저는 미리 왕궁에 잠입해 솔레유 국왕 전하를 빼돌렸습니다만, 전하께서 따로 하셔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하셔서 잠시 차질이 생겼습니다. 추격자는 국경에 다다르기 전에 떨쳐냈고, 그 외 보고드릴만한 이상은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곱씹는 일은 흔치 않지만, 당신에게 집결되는 모든 과거의 순간과 대화는 놀랄 만큼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무사히 당신을 데리고 귀환한 제 측근 호위무사의 보고는 명료하고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도 이리 신경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로 해야 하는 일? 그게 무엇이었는데?”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안전을 염려해 제가 왕실 도서관까지 뒤따랐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벼운 물건을 숨겨두시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일까, 당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까지 꼭꼭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은. 그런 사소한 사건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사소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자못 궁금해진다.
손을 뻗어 책상에 놓인 작은 금색 종을 집어 든다. 작게 흔들자 청명한 음이 고요한 방에 퍼진다. 머리에 하얀 천을 감싼 시녀가 들어온다. 부르셨습니까, 왕녀 저하.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저 없이 지시한다.
“귀빈께 티타임 초대를 보내거라.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긴 하지만 문제는 없겠지.”
질문이 아닌 단순명료한 명령에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나간다. 다시 기다리는 시간이 찾아온다. 오후의 그림자가 진 시계에 눈길을 두었다가 종을 짧게 다시 흔든다. 곧이어 들어온 다른 시녀에게 지시한다. 환복해야겠구나.
드레싱룸으로 가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가볍게 울린다.
“차는 입에 맞으실까요, 라예스 전하.”
화한 박하와 상큼한 사과 향이 찻잔에서 피어오른다. 빙그레 웃으며 적절히 우러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금테를 입힌 하얀 도자기 찻잔을 내려놓는다. 척박한 땅에서 보기 힘든 귀중품이지만, 왕실의 손님을 대접하기에 걸맞은 잔이다. 기품있는 손동작은 달그락거리는 소음 하나 내지 않는다.
“…예.”
대답은 순간의 망설임 끝에서 돌아온다. 어젯밤의 고독한 모습이 겹쳐 보일 듯하지만, 지금은 그저 피곤한 기색이다. 단정하게 하나로 땋아 내린 검은색 머리카락 끝이 하늘색으로 점차 이어져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창백한 얼굴이 저를 응시하다 찻잔으로 시선을 떨군다. 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불편하지 않은 적막이 흐른다.
글쎄,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적어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매우 기껍다. 부드러운 음성이 파리한 입술 사이에서 나오기를 다시금 기대한다.
“유나 왕녀.”
“네, 말씀하세요.”
“굳이 내게 존칭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난 더는 솔레유의 왕이 아닌 망명자에 불과하니까요.”
곧장 대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찻잔을 들어 아직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파문이 인 연한 연녹색 찻물을 들여다본다. 색소 옅은 제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가 불규칙하게 일렁인다. 시야가 찰나 붉게 흐려진다. 눈을 깜빡이자 찻물은 도로 연녹색으로 돌아온다.
대화를 방해하는 이런 순간은 언제나 불유쾌하다. 그러나 또 그만큼 익숙해서 내색하지 않는 습관은 몸에 배어있다. 고개를 들고 당신에게 미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 해서 당신이 귀빈이 아니게 되지는 않지요. 부담가질 필요 없어요. 나도 당신을 나름 편히 대하고 있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전히 시선은 저를 향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일말의 아쉬움을 자아낸다. 건너편 당신의 두 손에 긴장으로 힘이 들어간 것이 보인다.
다시 찻잔을 내려놓는다. 말로 풀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는 극히 적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능변가라 자부한 적도 없다. 그러나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노력은 해보리라.
“당신을 구출해 이곳으로 데려오라 명한 이유라면, 이미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예전에도 말씀드렸었죠.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제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이는 당신뿐이니까요.”
세글자의 다디단 단어를 혀끝에서 음미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유나 왕녀. 힘이 없던 질문과 명백하게 다른, 단호하고 조금은 매서운 부름이 다가온다.
“왕녀가 내게 품은 감정의 깊이를 감히 이해한다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혹여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착각해서 도운 거라면, 분명 크게 후회할 거예요.”
“그것이 당신이 본 미래던가요?”
동요하지 않는다. 어설픈 질타에 상처받지도 않는다. 당신의 말이 틀렸냐 한다면, 그건 확신하지 못한다. 애초에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나 제 이해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도리어 돌아온 물음에 상처받은 듯 움츠리는 건 당신이었으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새끼를 품듯 다독인다.
“나를 어찌 생각하고 재단하든 상관하지 않아요. 사랑이라 단정 지어 당신이 편해진다면 그리하고, 사랑이길 원치 않는다면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어차피 본질은 같아요. 당신만이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여전히 저울은 한쪽에서만 위태롭게 흔들린다. 아, 외로운 사람. 나는 외로움을 갑옷처럼 두르고 단단해졌지만, 당신의 외로움은 가시가 되어 당신의 심장을 찌르는군요.
말뿐인 위로는 쓸모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구태여 가식적인 단어를 허비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당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당신의 고향이 나로 인해 멸망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요?”
당신은 두려움에 잠겨 우리의 거리를 차마 좁히지 못한다.
“알테라는 내 고향이지만, 내게 현재를 선물해주지는 못해요.”
그건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는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대상이 당신이라면, 기꺼이 내 숨이 다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죽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기약 없기에 허황하고, 그렇기에 그 끝은 비교되지 못할 만큼 감격스러우리라.
옅은 한숨이 들려온다. 당신의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고단함이 다시 당신의 눈동자에 스며든다. 찻물은 다 식어 김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일몰의 그림자가 창문을 통과해 테이블 위로 드리운다.
“…왕녀는 이제 어찌하고 싶은 건가요?”
짤막한 질문 안에 많은 말이 함축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기에, 신중히 답을 고심한다. 당신을 데려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태양을 업은 발키리를 정녕 적으로 맞이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알테라 왕가의 유일한 후계자, 겨울의 예언자, 유나 마이얀 아이샤 알테라가 내린 선택은 무엇인지.
“전쟁을 대비해야겠지요. 당장 선전포고가 날아오진 않을 거예요. 그러나 가을이 오면 당신의 누이를 선두로 태양의 군대가 알테라의 땅에 발을 디딜 거예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유예 시간이죠.”
나의 답은 이것으로 종결된다. 지나간 길에 핏자국을 남기며 전진하는 전장의 여신이 내게 검을 겨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런 제 답변이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당신의 고운 미간에 설핏 주름이 진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떨림이 배어 나온다.
“정면으로 맞설 생각인가요?”
“얼음의 땅에 푸른 장미를 억지로 비집고 싹틔우겠다는데, 왕녀로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지요.”
“승리할 확률은?”
알테라가 솔레유를 상대로 승전할 확률은요? 처음으로 제 말이 머뭇거리며 끊어진다. 저울이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무겁게 고개를 젓는 당신의 움직임에 따라 축 처진 긴 머리카락이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그래, 우리 사이에는 거짓이 의미가 없다.
“불가능해요. 왕녀 역시 모르지 않잖아요. 전장에서 라칸에 대적할만한 인재는 솔레유에도, 알테라에도 없어요. 이제 돌이킬 수 없지만, 처음부터 왕녀는 저를 빼돌려 그와 척을 지어서는 안 되었어요.”
따스하지는 않지만, 근심 어린 조언을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그것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못하는 상황은, 나에게도 있으니까요.”
시간이 늦었군요.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웠어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난다. 의자가 융단 위로 무겁게 쓸린다. 앞으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마주 일어선 당신을 올려다본다. 인사를 기다릴 필요 없이 나란히 응접실을 나선다. 서늘한 문고리에 손이 닿고 잠시 멈칫, 망설인다.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요, 라예스 전하?”
같은 간격을 두고 답이 돌아온다.
“말하세요, 왕녀.”
“왕실 도서관에 무엇을 숨기고 오셨나요?”
헛웃음이 들린다.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닌, 정말로 허무한 감정이 들리는 전부다. 고개를 돌리자 애매모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당신의 얼굴이 보인다.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 굳이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나요?”
빈말이라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우리만큼 예언의 허점을 잘 아는 이도 없으리라. 따라서 저 역시 빈말로 응수한다.
“나라고 모든 걸 알지는 못해요. 나에게까지 털어놓지 못할 비밀인가요?”
“설령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였어도 내 답은 변함 없을 테니 마음 상해하지 말아요. 그저 누구도 알 필요가 없는 비밀일 뿐이니까요.”
“미련하시네요.”
거친 말은 용서해주시길. 기분 상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고, 당신 역시 담담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을 뿐이다. 자조적인 미소를 입에 걸친 당신은 무례를 범한 제게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이.
“그 어설픈 다정함이 언젠가 당신에게 칼날이 되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요.”
진심으로 바란다. 말이 씨앗이 되어, 예언으로 꽃피우는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부럽군요. 왕녀의 그 한겨울 같은 강인함이.”
그리고 무엇보다, 슬프게 미소 짓는 당신이 어설프게 베푼 자비가, 당신의 목을 조르는 차가운 밧줄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 * *
느지막한 밤, 시야에 등불이 위태롭게 아른거린다. 두꺼운 캐노피가 걸린 침대에 촛대 그림자가 길게 유령처럼 비친다. 시녀가 말없이 캐노피를 걷는다. 마치 관뚜껑을 열고 자신이 스스로 들어가 눕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유쾌하지 않은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시녀가 굳는다. 머릿수건 아래 얼굴은 그늘에 숨어있지만,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새파래졌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안다. 앞치마 위로 맞잡은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다.
갑작스레 모든 것이 지겨워진다. 티타임 이후로 가벼워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추락한다. 얼음 같은 무표정 뒤로 이 모든 감정을 삼키고, 바닥에 끌리는 캐노피를 낚아챈다.
“이만 됐어. 불 끄고 나가도 좋아.”
돌아오는 답은 없다.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지. 서둘러 촛불과 등을 끄러 가는 발걸음이 빠르다. 곧 침실이 어둠에 잠긴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암흑 속에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마지막에 제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는지, 속삭임 같은 물러가겠다는 인사가 들린다. 나는 응답하지 않는다.
침대에 발을 올리고 캐노피를 닫는다. 푹신한 깃털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이불을 턱 끝까지 당겨 올린다. 알테라에서 저보다 좋은 침대를 쓰는 이는 없지만 잠은 쉽사리 오지 않는다. 뒤척이고 있자니 복잡한 사념만 늘어, 결국 다시 눈을 뜨고 침대의 천장을 노려본다.
“유나 왕녀 저하가 웃어주는 사람은 다 이른 시일 안에 죽는다더라.”
“바로 곁에서 시중들던 시녀가 저번 달에 비명횡사했다지?”
“조용히 말해. 왕녀 저하나 국왕 전하의 귀에 이런 소문이 들어가면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라고. 국왕 전하가 저하를 끔찍이 아끼시잖아.”
“그 소름 끼치는 눈을 가진 왕녀 저하도 조카라고… 피붙이의 정이라는 건가?”
“그야 왕녀 저하가 예언하는 아이샤의 핏줄을 갖고 계시니까. 꺼림칙해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엔 탐나는 능력이잖나.”
“친왕 전하와 친왕비 전하를 잡아먹고 태어나신 왕녀라도 말이지… 어이쿠, 쉿. 왕녀 저하 오신다.”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 알아도 알지 못하는 척. 입술을 앙다물고 버틴다. 고작 저런 수군거림에 무너질 제가 아니다. 제 앞에서 알테라의 영광된 미래라 아첨하면서도, 뒤돌아 죽음의 예언자라 경외하는 가식적인 이들의 변덕에 무너질 만큼, 저는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 제게 무겁게 의지하고 제가 원한다고 청하는 것은 전부 안겨주지만, 동시에 저를 두려워하는 제 유일한 피붙이, 알테라 국왕 전하마저도 사랑하지 않는다.
저주스러운 아이샤의 핏줄. 죽음을 보는 아이샤의 눈. 거울에 비친 유리 너머에서, 찻물에 비친 물속에서, 얼음에 투영된 냉기에도 깃들어 있는 생명의 끝을 수없이 본다.
이 이는 배를 곯아 죽고, 저 이는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해 죽는다. 어제 만난 여인은 사고를 당해 죽고, 아직 만나지 못한 남자는 강도에게 살해당해 죽는다. 제가 다가오는 죽음을 경고하면 그들은 저주가 내렸다고 울부짖고, 침묵하면 잔혹하게 방관했다고 원망한다.
언제부터인가, 더는 누군가를 살리려 노력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죽음과 절망의 행렬에서 나는 풍랑의 잎사귀처럼 휩쓸린다.
“…리온.”
나지막한 호명이 암흑 속에 묻힌다. 그러나 침실 밖에서도 그가 제 음성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새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캐노피의 윤곽이 어스름하게 보인다. 묵직하지만 조용한 발소리가 침대 근처로 다가와 멈춘다. 캐노피 너머에서 저음의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찾으셨습니까, 왕녀 저하.”
손을 뻗어 부드러운 천을 걷는다. 어둠보다 짙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 등 뒤로 접힌 새까만 날개 한 쌍. 캐노피를 쥐고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낮춘다. 그러나 시선만은 올곧이 저를 올려다본다.
“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면 눈을 내리깔지 마. 내게 얘기할 땐, 내 눈을 보고 얘기해.”
명령 같은 부탁에 고분고분 따르는 저 눈동자에 두려움은 없다는 사실이 조그마한 위안이 된다. 이불을 걷고 발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땔감이 타고 있음에도 바닥에 닿는 맨발이 서늘하게 식는다.
“내 모피 코트와 신발 좀 가져와 주렴. 잠시 발코니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오래 있지 않을 거야. 알테라의 겨울밤, 나이트가운에 단순히 모피 코트만 걸친 채로 바깥바람을 쐬는 행위는 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답답하다. 따갑게 얼굴에 부딪혀오는 한기가 차라리 반가울 정도로.
그가 말없이 모피 코트와 신발을 들고 와 대령한다. 하얀 발을 신발에 끼워 넣고 모피를 어깨에 두른다. 모자를 머리 위로 눌러쓰고 장갑까지 낀 손으로 손짓하자 그가 조용히 물러난다.
망설임 없이 발코니로 향하는 손잡이를 비틀어 열고 나간다. 지붕 덕에 발코니 바닥에 눈이 쌓이진 않지만, 바람에 휘날린 싸라기눈이 내려앉아 녹는 것까진 막지 못한다. 미끄러운 바닥을 조심히 딛고 난간을 붙잡는다. 장갑을 타고 냉기가 손끝으로 파고든다.
눈이 절로 귀빈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커튼 사이로도 창문 하나가 환히 밝혀져 있다. 오랫동안, 그 빛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 주무시지 않는군요, 받아주는 이 없는 말은 눈보라가 삼킨다.
굳이 찾아갈 생각은 없다. 시선 끝에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만 잠이 들 수 있는 나이는 한참 지났으니, 이리 홀로 서 있어도 쓸쓸하지는 않다.
그저 늘, 강인하게 외로울 뿐이다.
모자 아래로 머리카락이 비집고 나와 흩날려 시야를 가린다. 한기에 감각이 둔해지는 입술을 달싹인다. 아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라도 전달하고자 한다.
라예스 전하, 내가 부럽다고 하셨던가요. 나는 당신이 부러워요.
차라리 밤에만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이 부러워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할 만큼, 당신을 사랑해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부러워요. 아직 실낱의 가능성을 놓지 못한 당신이 부러워요.
당신이 누이를 의지했던 것만큼, 내게도 기댔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두려움, 불안, 악몽까지 전부 내게 말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행복했던 순간마저 엿볼 수 있게.
그래서 나는 당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가 봐요.
그날이 오면, 나는 당신을 안전한 먼 곳으로 대피시킬 거예요. 그 이후로 당신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어요.
마음 같아선 함께 가고 싶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요. 당신보다 이곳 알테라를 더 귀중히 여겨서는 아니에요. 나는 이곳에 남아 백야의 황제가 될 이를 마주할 거예요. 수없이 봐온 그 순간을 담담하게 맞이할 거예요. 그곳에서 내 현재는 드디어 미래와 맞물리게 되겠죠.
당신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설령 부질없는 노력이어도. 그저 마지막까지, 나는 당신을 위한 최선을 주고 싶어요. 당신의 결말을 내가 어디까지 연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살고 있어요. 그건 피할 수 없는 예언자의 숙명이에요. 그렇기에 나는 지극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당신을 내 곁으로 부른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미래가 아닌 현재를 위해 내린 선택이니까요.
잠들지 못하는 당신의 침실 창문은 여전히 환하게 밝혀져 있어요. 불은 내가 먼저 끄고 떠날게요.
좋은 밤 되길, 떨어진 태양의 왕, 라예스 전하.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갈 꿈은 악몽이 아니길 바라요.
Written 21-10-04
10634자 (8053)
본 로그의 캘리는 햄쭈(@hamjjju)님의 커미션 입니다.
- 카테고리
- #오리지널
- 페어
-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