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If we dream a Dream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있지, 혹시 생각해본 적 있어?

내가 만약 처음부터 모든 의무를 저버렸다면, 우리는 오늘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을까?

만약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꿈을 꾼다면…

계기는 분명치 않다. 너는 물끄러미 네 쌍둥이를 바라보다가 툭 입에서 말을 떨군다.

- 만약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너는 어떡할래?

평소 같았으면 너는 수업에 가기 싫다며 드러누운 쌍둥이를 타이르고 달래서라도 일으켰을 테다. 그러나 오늘은 낯선 거리가 선명하다.

네 쌍둥이가 침대에서 팔꿈치를 짚고 상체만 반쯤 일으킨 채로 눈을 깜빡인다. 너는 그 모습을 시간이 멈춘 듯 바라본다. 열린 창문을 통해 선선한 가을바람이 들어와, 양피지가 널린 탁상을 헤집는다. 검은 낙서가 가득한 종이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오르자 너는 문득 마음이 무거워진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야 함이 분명한데, 그 순간에 필요한 말은 네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뱃속 깊숙이서 올라온 장미 넝쿨이 혀를 옭아매는 것처럼.

-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할래?

솔레유 왕가의 신분. 메리골드라는 꽃의 이름. 태양의 왕좌로 향하는 계승권. 푸른 장미를 눈에 새기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네게 주어졌던 모든 의무와 혜택을, 만약 전부 버리고 떠나겠다면.

네 손끝이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차가워진다. 그 후 오간 대화는 네 기억 속에 희미하겠지. 그저 후련하고도 씁쓸한 미소가 네 입가에 걸렸다는 사실만 기억해도 좋다.

그리고 그건, 어느 멀지 않은 옛날의 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겠지.

* * *

너는 시니스타 소백작으로서의 생활에 물 흐르듯 순조롭게 적응했다. 되려 끝까지 너를 붙잡는 쌍둥이를 설득하는 과정이 더 어려웠다고 회상할 만큼.

가을이 진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붉은 단풍이 네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으나, 이제는 정원사가 미처 쓸어 담지 못한 낙엽만 부드럽게 땅을 구른다. 아버지를 도와 오전 업무를 끝마치고 나면, 너에겐 이렇게 한숨 돌릴 여유가 주어진다. 왕궁에서는 찾아보지 못한 평화를, 너는 이곳에 돌아오고 나서야 되찾게 되었지.

시니스타 백작저에 남아있는 네 어릴 적 추억은 몇 없다. 꽃의 아이로 태어난 너와 네 쌍둥이는 초능력을 발현하자마자 왕궁으로 들어갔기에, 네 미숙한 기억 대부분은 솔레유 왕국의 수도인 솔라리스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저택 안을 차분히 걷고 있자면, 네게도 떠오르는 빛바랜 파편이 있다. 일찍 내리는 첫눈을 맞으며 발그레한 볼로 정원을 걸었던 기억. 천둥 치는 밤에 쌍둥이의 손을 잡고 몰래 부모님 방으로 숨어들었던 기억. 목검을 휘두르다 값비싼 도자기를 깬 네 쌍둥이의 실수를 스리슬쩍 덮어주었던 기억. 그런 사소한 추억들이 조금씩 깨어나 네 안에 쌓여간다.

너는 그맘때쯤, 첫 편지를 받는다.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것은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너는 노을이 집무실을 짙게 물들일 때까지 편지를 열어보지 못했다. 붉은빛이 잉크 위로 어둑하게 일렁이는 시각이 다가와서야 너는 굳게 봉인된 봉투를 뜯는다.

다정한 너의 쌍둥이. 거침없는 글씨가 네가 떠난 왕궁에서의 생활을 낱낱이 알려온다. 수업이 갈수록 어려워져 도저히 네 도움 없이 못 따라가겠다는 엄살에 너는 가만히 미소짓고, 조만간 정식 기사 작위를 받을 예정이란 자랑엔 고생했다는 칭찬을 어떤 단어로 담을지 고민한다. 부모님이 네 쌍둥이가 장미 책봉식에서 왕세자로 선택되길 바라셨음을 모르지 않지만, 너는 그가 오직 검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것을 알기에 축하만을 보내려 하겠지.

무엇이 두려워 늘 그의 편지를 늦게 개봉하는지, 너는 아직 모른다. 오늘 역시, 너는 태양의 끝자락이 수평선에 걸려서야 답장을 하기 위해 깃펜을 든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잔잔한 소리가 방 안에 머무른다. 흔들리는 등잔의 불빛 아래 네 눈이 조금씩 침침해진다.

편지지 하나에 마침표를 찍고서 너는 눈을 비빈다. 꺼져가는 등불을 눈여겨보다 너는 기름을 채워 넣는다. 불꽃이 다시 책상을 환히 밝히자, 네 시선에 잉크가 묻어 번진 편지지 귀퉁이가 들어온다. 깔끔하게 새 편지지에 답신을 쓸까 고민하다가, 너는 자세히 살펴보려 편지지를 들고 가까이 들여다본다.

아무 생각 없이 얇은 양피지를 훑어내리는 네 눈에 들어온 글씨의 내용은, 나 역시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다. 조금씩, 무겁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울리고, 이윽고 내 앞에 멈추어 선다. 우리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쓸쓸한 텅 빈 공간. 눈을 위로 올려보아도 너무 어두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는 나에게 무어라 말하지만, 기이한 소음이 끼어 잘 들리지 않는다. 점차 안개가 걷히듯 윤곽도, 소리도 선명해져 가면,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말과 함께 고통이 느껴지고 나는 직감한다.

아, 죽었구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어난다.

편지지가 손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너는 네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것을 자각한다. 동상이라도 입은 듯, 네 손끝은 차갑게 화끈거리고 있겠지. 잉크가 번진 귀퉁이부터 붉게 빛나며 타들어 간다. 그제야 기름을 먹고 몸집을 불린 불꽃에 편지지가 스쳤으리라는 깨달음이 온다.

너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네 손으로 썼음이 분명한데, 네 기억에 없는 단어의 향연을 마주하고 있자니 공포가 물밀 듯 밀려와 너를 집어삼킨다. 없애야 한다는, 저 편지지를 불살라야 한다는 간절한 강박만이 네게 남아있다.

너는 쓰다만 편지지를 낚아채 창문을 활짝 연다. 불씨가 하나둘, 바람을 타고 사라진다. 그렇게 종이가 전부 타들어 갈 때까지, 너는 창문에서 재를 날려 보낸다. 까맣게 부스러져 마지막 흔적도 없이 편지지가 증발하고 나서야 네 손끝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것이 눈에 띌 테다.

어렴풋이 낯익은 공포와 화상을 입어 쓰라린 고통이 유독 생생하게, 오래도록 네 기억에 남을 것이다.

* * *

왕궁을 떠난 이후로, 너는 어릴 적부터 찾아오던 악몽을 떠올린 적 없다. 참으로 의아하게도, 그 악몽은 네 뒤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너를 갉아먹던 절망 그 자체였음에도. 꿈을 더는 꾸게 되지 않았다 해도, 이리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는 기이하게 여긴다.

언제부터였을까. 네 기억은 묘연하다. 마치 잠결에 세상을 걷고 있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희미할 테다. 너는 새삼스럽게 몇 달간의 평화에 너무 익숙해졌구나, 자신을 탓하겠지.

그리고 다시 깨어난 공포가 더욱 사납고 위협적으로 고개를 들어, 너는 아이처럼 움츠러든다. 네가 편지를 쓸 용기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린다. 떨리는 손으로 늦은 답장을 작성하고, 편지의 내용이 다시 변질되는 일은 없어 너는 안도하지만, 한때 망각 저편에서 잠잠하던 친숙한 두려움은 잠재우지 못한다.

너는 오래도록 고뇌한다. 네 쌍둥이에게 이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해 털어놓아야 할까? 너조차 이 현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함에도. 결국 너는 안부 이후로 단 한 줄도 적지 못하고 편지를 봉한다.

쌍둥이의 답장이 돌아오기까지의 기억 역시 너에게는 안개가 낀 듯 흐릿할 테다. 다시 찾아온 악몽을 애써 잊으려 업무에 몰두했던 까닭이라, 너는 자신을 설득하겠지. 다행히 연말을 맞이해 네게 주어진 일거리는 부족하지 않다. 그건 네 쌍둥이 역시도 마찬가지였는지, 다음 편지는 해를 넘어가서야 네 손에 들어온다.

새해에도 장미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이리 시작한 편지의 내용은 발랄하다. 허례허식에 시간을 낭비하는 습관이 없는 네 쌍둥이의 편지는 여전히 정답고 간결하다. 너는 침착하게 국왕 전하가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승하했다는 비보와 곧 다음 국왕의 대관식이 열릴 것이란 소식을 읽어내린다.

- 시니스타 백작가에서도 누군가는 대표로 대관식에 참석해야 할 텐데, 네가 오는 건 어때? 간만에 우리 얼굴도 좀 보자.

너는 두 손에 편지를 든 채로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본다. 쌍둥이를 볼 수 있다는 얘기에 네가 솔깃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도로 가는 길이 이유 모르게 꺼려질 테다. 너는 고개를 살짝 돌려 솔라리스가 있는 방향을 응시한다. 금색의 휘황찬란한 왕궁이 이곳에서 보일 리 없지만, 까마득하고 위압적인 그 그늘이 네 머리 위로 드리우는 착각이 든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너는 눈을 감는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꾹꾹 눌러둔 피곤함이 이제서야 몰려오는 기분에, 너는 잠시 편지를 내려놓는다. 어차피 답장을 쓰기 전에 대관식 참석 건에 대해 부모님과 상의를 해야 할 테니, 너는 당장 펜을 들지 않는다.

편지를 보관함에 넣어두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얇은 종이의 촉감 대신 불붙는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들어, 너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려다본다.

편지가 불타오른다. 불이 어디서 붙었는지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너는 물컵을 찾는다. 하지만 어디에도 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네 손은 차마 불타는 편지를 놓지 못한다. 비명을 삼키며 편지를 구길 듯 말아쥐자 편지의 글씨가 진홍색으로 빛난다. 네 눈이 본능적으로 불길하게 타오르는 낯선 글자를 하나씩 눈에 새겨넣는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네게 말할 수 없는, 내 가장 깊은 비밀. 예지몽은 나에게 축복도 선물도 아닌, 그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자 저주일 뿐이야.

있지. 대관식이 끝난 밤, 내가 솔레유 왕국의 33대 국왕으로 임명된 날. 나는 처음으로 꿈에서 내 살해자의 얼굴을 봤어.

라칸, 내 살해자는, 네 얼굴을 하고 있었어.

편지가 손에서 재로 변한다. 눈을 깜빡이자 낯선 장소에 서 있다. 아니, 다시 보니 처음 오는 곳은 아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자주는 아닐지언정, 필연적으로 걸음이 거치는 곳이었다.

광장이 내려다보인다. 수도 솔라리스의 자랑인 가지런한 하얀 벽돌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이 광장을 가득 메운다. 이 정도 높이에서 광장이 내려다보일 정도면 시계탑 내부에 들어와 있음이 분명하다. 시계탑 종소리가 울린다. 하루를 떠나보내는 진혼곡은 침울하고 서글프다.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소음이 불청객처럼 난입한다.

날카롭게 무언가를 베어내는 소리. 무겁게 날이 추락하는 소리. 익숙한 목소리의 찢어지는 비명.

시야가 천천히 돌아간다. 멀리서 단두대가 보인다. 떨어진 날 아래, 원래도 붉었을 머리카락이 참혹하게 젖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비명의 메아리가 귓가에 남아, 관중의 웅성거리는 잡음은 먹먹하다.

그곳에 그가 있다. 두 손에 수갑을 차고, 자랑이던 검은 빼앗긴 채로. 양옆으로 기사에 팔이 붙잡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푸르고 검은 장발의 머리카락은 산발이라 마치 미친 여자처럼도 보인다.

그의 옆으로 달려가야 함이 마땅하다. 당장이라도 수갑을 풀어달라 간청하고, 넋을 잃은 그를 위로하고 달래야 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무언가가 머리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다. 손을 머리 위로 올리자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는다. 조각된 장미의 윤곽이 만져진다. 오한이 등을 타고 내린다.

푸른 장미가 조각된 왕관. 오직 솔레유 국왕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숨이 막혀온다.

그가 돌아본다. 똑 닮은 하늘색 눈에 스며든 절망은 너무나도 낯익어 거울을 보는 착각이 든다. 그 눈에 완연한 원망이 지극히 낯설어, 이 광경은 꿈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입술을 깨물어 피투성이가 된 입 모양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란다. 구분이 묘연해진 의식이 현실로 향해 유영하기를 절절히 갈망한다.

깨어나고 싶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제발 깨어나고 싶다. 더는 뜬 눈으로 저 시선을 마주보기 괴로워, 눈을 질끈 감는다.

네 손에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이 닿는다. 서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네 눈에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이 비춘다. 의자에 기대 잠시 꿈을 꾸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와, 너는 마른세수를 한다.

너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미동이 없다.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네 어깨를 휘감은 추위가 느껴진다. 의자 팔걸이에 늘어진 로브를 어깨 위로 걸치고 일어선다. 네 눈길이 다시 온전해진, 타오른 적 없는 편지에 머무른다.

글씨는 더는 진홍색으로 빛나지 않는다. 대신 끈적한 암흑 같은 검은 글씨가 네 시선을 붙든다.

왜, 왜. 네가 없어도 악몽은 선명해져만 갈까. 내가 여기서 무얼 더 해야 이 악몽이 끝날까?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미쳐버릴 것 같아.

라칸, 네가.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없었더라면.

편지가 네 손안에서 형편없이 구겨진다. 소리 없는 네 절규가 방을 가득 채운다. 너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는다. 선명하게 다리를 파고드는 한기가 무정한 현실을 일깨운다.

악몽에서 깨고 싶다면 눈을 뜨면 되지만, 현실에서 깨어나고 싶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라, 너는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차라리 허구임이 자명한 꿈을 꾸겠다는 심정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언젠가는 깨어나리라는 새벽이슬 같은 희망을 품고, 자진하여 악몽을 짊어지고 마는 그 비참한 마음을.

* * *

그 후로 편지의 왕래가 끊겼다. 네가 쌍둥이의 편지에 도저히 답장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악몽을 꾸고 난 후 두 달간은 비명의 환청과 불타는 환상통에 시달려 너는 침대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대관식에 누가 시니스타 대표로 참석했는지, 너는 모른다. 직접 참석하기는커녕 답신조차 보내지 않은 너를 두고 네 쌍둥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짐작하지 못한다.

네가 이런 사고를 할 수 있을 만큼 몸과 정신이 회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서늘한 겨울 기운은 물러간 지 오래다. 창문을 열어놓고 있어도 훈훈한 산들바람만이 들어온다. 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창밖을 보면 새싹이 트다 못해 푸르게 우거진 풍경이 보이겠지.

봄이라 하기에 늦은 시기, 여름이라 하기에 아직은 이른. 그런 날에 너는 악몽에서 한 발짝 멀어져 일어난다.

구름 사이를 걷는 것 같은 아직 혼곤한 의식 덕에, 너는 책상에 쌓여있는 편지를 뜯어볼 여유조차 없다. 몇 달을 호되게 앓고 일어난 너를 재촉하는 이 또한 없었기에, 너는 그대로 며칠간 편지에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너는 머지않아 그 편지를 열어보아야 했다고 반성할 테다. 아니, 사실 일찌감치 열어보았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테니, 무의미한 후회일 테다.

네 쌍둥이의 환한 미소를 눈앞에 두고, 너는 다시 꿈을 꾸고 있나 멍하니 고민한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네 시선은 방치된 편지로 향한다. 이것이 꿈이라면, 저 편지가 불타올라, 너를 악몽 속으로 밀어 넣으리란 공포가 순간 들어서.

그러나 네 뺨에 따듯한 손이 닿는 순간, 네가 다시 잠들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어느새 심각해진 표정으로 네 얼굴을 요모조모 돌려보며 중얼거리는 네 쌍둥이의 목소리는 심각하다.

- 행복해지겠다며 다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더니만,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되었네?

입에 익은 그의 이름이 네 입술 틈새를 비집고 나온다. 그에 반응하듯 너를 마주 보는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핀다.

- 오랜만이지. 네가 올 생각이 없어 보이길래, 내가 찾아왔어.

이미 늦은 저녁, 막 도착했음이 분명한데 피곤하지도 않은지, 빈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주저앉은 네 쌍둥이는 그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풀어놓는다. 너는 가만히 그 수다를 경청하며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댄다. 모처럼의 평온이 네 마음에 찾아와 숨이 트인다.

- 이제 대관식도 끝났겠다, 나도 솔레유의 성을 포기하고 시니스타 가의 일원으로 돌아왔겠다. 그런데 마침 알테라에서 이번 미드써머 페스티벌을 방문하겠다고 전갈을 보내왔지 뭐야. 알테라 왕녀께서 직접 오신다길래 솔레유 왕실 측에서 호위를 보내 일찍이 맞이하기로 했어. 시니스타 백작가과 연이 있는 내가 정식 기사 작위를 받았으니, 자연스레 호위 일행에 들어가게 됐어. 나도 불만은 없었지, 겸사겸사 너도 언젠간 보러 가야겠다 싶었으니까.

알테라의 왕녀라는 호칭이 네 귀에 매섭게 꽂힌다.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동요가 갑자기 파도처럼 너를 휩쓸어, 기어코 시선을 떨군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쌍둥이의 당황한 물음이 먹먹하게 먼 곳에서 들려온다.

- 시니스타 경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 언질 받았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청명하게 닿는다. 너는 힘겹게 고개를 든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푸른색 드레스, 여름 망토를 어깨에서 아직 벗지 못해 단정할지언정 다소 갑갑해 보이는 옷차림. 길게 기른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네 또래의 여성이 너를 차분하게 직시한다.

알테라 왕녀 저하. 곧바로 일어서 예를 갖추는 네 쌍둥이에게 가만히 목례하고, 흔들림 없는 시린 겨울의 눈이 요동치는 네 눈동자를 담는다.

- 당신이 시니스타 소백작이로군요. 몸이 편치 않다고 들었는데 실례했어요.

하얀 저 얼굴에 기억에 없는 누군가를, 너는 겹쳐 본다. 환각을 떨쳐내려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순간 연결된 시선이 끊어진다. 문가에서 몸을 살짝 돌린 채, 알테라의 왕녀가 네게 떠나가는 인사를 건넨다.

- 더는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싶으니, 나중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편히 쉬시길.

네 쌍둥이가 창백해 보인다는 걱정어린 잔소리와 함께 너를 침대 안으로 밀어 넣는다. 너는 저항하지 않고 이불 안에 파묻힌다. 알테라의 왕녀를 모셔야 하는 의무를 진 그를, 너는 순순히 보내준다. 온기가 떠나간 자리에 공허함만이 남을지라도.

“오늘 밤 당신을 찾아갈 꿈은 악몽이 아니길 바라요.”

왕녀의 목소리가 들려와 퍼뜩 눈을 뜬다. 그러나 방에는 너 홀로 남아 있다. 여름에 때아닌 오한이 네 몸을 덮쳐 온다. 그 마지막 인사가 무색하게도 이미 시야 언저리에는 불길한 어둠이 일렁이고 있다.

우리가 만약 오늘 밤 꿈을 꾼다면, 그것은 필히 지독하게 외로운 악몽이리라.

* * *

너는 평온과 초조함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다. 밤이 되면 불안이 수면 대신 찾아와, 너는 결국 오늘도 잠을 뒤로하고 발코니로 나온다. 작은 발코니엔 의자 하나 없지만 너는 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휴식을 바라 나온 것도 아니다. 너는 그저 잠들어야 한다는 막막함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싶었을 뿐이니까.

- 좋은 밤이에요, 시니스타 소백작.

목소리는 아래에서 들려왔기에, 너는 시선을 내린다. 그곳에 발목까지 오는 하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알테라의 왕녀가 있다. 물끄러미 너를 올려다보는 눈에 이해 불가한 호의가 담겨있어 너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린다. 그것이 왕녀를 향한 예의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 왕녀 저하. 호위도 없이 홀로 계십니까?

-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 물려두었답니다. 혼자 있으니 조금 적적하긴 하네요. 소백작이 괜찮다면, 잠시 내려와 내 말동무를 해주지 않겠어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대며 다른 이를 대신 내려보낼 수 있었으나, 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등불을 손에 들고 정적에 잠긴 계단을 내려와 저택 정문을 연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정원에 아직 왕녀 홀로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얇은 숄 하나만 여윈 어깨에 두른 모습에 너도 모르게 묻고 만다.

- 춥지 않으신가요.

- 괜찮아요. 로레타에 비하면 무척 포근한 날씨인걸요.

북부에 가까운 시니스타 백작령은 밤이 되면 기온이 서늘하게 떨어지지만, 북부 왕국 알테라의 수도는 여름에도 종종 서리가 내리는 곳이니 너는 말을 얹지 않는다. 왕녀가 사뿐히 걸어 주황색과 붉은 갈색이 어우러진 겹꽃 무리 앞에 선다.

가까이서 봐도 괜찮을까요? 예의 바른 물음에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허리를 숙여 메리골드를 바라보는 왕녀의 뒷모습에 너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 왕녀 저하, 제게 그리 예우를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작은 영지의 소백작에 불과한 사람이니까요.

왕녀가 앞으로 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너를 올려다본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창백한 입술에 머무른다.

- 그렇다 해서 당신이 나의 귀빈이 아니게 되지는 않지요.

왕녀의 말이 의아하게 들린다는 것을 네가 알아채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려, 왕녀는 이미 시선을 다시 꽃밭으로 돌린 참이다. 제가 왕녀 저하의 귀빈이라뇨? 시니스타 백작저에 귀빈으로 머무르고 있는 이는 네가 아닌 알테라의 왕녀가 분명하나, 너를 돌아보는 왕녀의 눈동자엔 한 줌의 혼란도 없다.

-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시니스타 소백작?

왕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분명 처음이지만, 이상하게 메아리가 네 기억 저편에서 익숙하게 울려온다. 네 숨이 턱 막혀온다. 그러나 네 입술은 의지와 상관없이 차분하게 답변을 내놓는다.

- 말하세요, 왕녀 저하.

북부의 왕녀는 황야를 닮은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네가 아닌, 머나먼 다른 이를 보는 듯한 눈빛을 한다. 다음 말이 무거운 추를 달고 네 가슴에 떨어진다.

“왕실 도서관에 무엇을 숨기고 오셨나요?”

시간이 멈춘다. 시야가 일그러진다. 네 세계가 타들어 간다. 내 세상이 선명해진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왕녀는 여전히 고독한 표정을 지으며 평온하게 서 있다. 메리골드 꽃밭이 아닌, 어느 화려한 응접실을 배경으로 삼고.

왕녀를 마주 본다. 왕녀의 눈에 비친 얼굴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허탈한 웃음이 가슴속에서부터 터져 나온다.

허망할 수밖에,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나. 너는 이제 이 환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겠지.

너를 옭아매던 붉은 글씨. 너를 끈질기게 추격해온 악몽의 그림자. 그 모든 부정의 증거가 가리키는 곳은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어 한 진실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땅, 다 마신 박하와 사과 향이 빈 찻잔에서 피어오른다. 서고 구석에 버리듯 숨겨둔,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할 내 비밀을, 너는 결국 파헤치고 만다. 그러나 비참하게 환상에서 깨어난 네게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기에, 차의 잔향은 다시 메리골드 꽃의 향기가 되어 돌아온다.

시니스타 백작저의 여름 정원은 눈물 나게 평화롭다. 불타던 세상이 조금씩 얼어붙는다. 미처 다 타지 못한 양피지처럼 그 흔적만이 마음에 남는다.

- 왕녀에게 보내야 하는 편지가 있었지요.

어느새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 알테라의 왕녀를 향해 조용히 읊조린다. 그렇게 메리골드 꽃을 한 송이 꺾어 침실이 아닌 집무실로 향한다.

오래전 난로가 꺼진 집무실은 한겨울처럼 차디차다. 망설임 없이 펜을 잡고 편지지를 꺼낸다. 잉크가 펜촉 끝에 방울진다. 손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어, 오직 온전한 진심만이 펜 끝으로부터 남겨진다.

왕녀가 갑작스러운 이 서신을 반길지는 모르겠습니다. 알테라가 몰락한 원인은 내게 있으니, 그 어떤 사과를 드려도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요. 사과도 그러할진대, 부탁은 더욱더 몰염치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이가 왕녀밖에 없어, 다시 고개를 숙이고자 합니다.

같이 동봉한 서신이 제 누이의 손에 닿도록 안배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서신에는 내가 현재 머무르고 있는 장소를 밝혀두었습니다.

내 모든 명예를, 다른 무고한 이들의 삶마저 무너뜨리고서야 마음을 돌린 나를 원망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문득 물어보고 싶어 몇 자 더 적습니다. 왕녀는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 것까지 예견하고 있었을까요? 나조차도 명확한 계기를 단정 짓지 못하는 이 변심을, 왕녀는 그 멀리 보는 눈으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다만, 이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기에. 이미 멀리 사라진 기회라 할지라도, 나는 이제 최악이 아닌 차선을 잡아보려 합니다. 지금 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해도, 과거로부터 그만 도망치고, 내 죄가 나를 따라잡아 마땅한 대가를 거두어가기를 기다리고자 합니다.

이만 꿈의 망망대해에서 눈을 뜰 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여태 왕녀가 내게 베푼 모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내가 아직 보내지 않은 편지를, 너는 끝맺는다.

꺾어온 메리골드를 편지지와 함께 봉하고 도로 책상에 내려둔다. 이곳에 있는 왕녀에게 전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음을, 네가 가야 하는 곳으로 발을 돌려야 함을, 이제서야 인정한다.

눈을 뜰 용기가 없어 여태 외면하고 있던 머나먼 기억을 깨운다. 얼음이 녹지 않는 땅. 갈 곳 없어 마지막으로 구제를 청하러 온 이들이 머무르는 겨울의 신전.

나의 마지막이 될 장소. 내가 다시 과거의 죄업과 재회할 장소.

내가 최종적으로 눈을 감을 그곳에서, 너는 이제 깨어나겠다 결심한다.

* * *

이것은 이제는 되돌아오지 않는 어떤 가능성. 씁쓸한 바람을 담은 꿈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꿈을 꾼다면….”

악몽이 아닌, 행복한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나는 죄를 짓는 걸까?

내가 꽃의 이름을 버리고 살아갈 수 있던 기회는 이미 지나갔음을 모르지 않는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귀애했던 이가 다시는 제게 웃어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 모든 것은 제 손으로 매듭진 업이라는 비참한 사실도. 희망은 단념한 지 오래다.

그러니 내게 남은 것이 사랑하고, 또 증오했던 네 손에 죽는 것뿐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나를 찾아와줘. 이곳, 엘로하임 신전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익숙한 발소리가 들린다.

이젠 회피하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인연과 악몽을 이곳에서 종결하겠다.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네 죄를 물으러 왔어.”

악몽을 꾸고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울지도 않겠다. 그것이 그에게,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존중이자 예의임을 안다.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밤을 집어삼킨다.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었던 꿈을 떠나보낸다. 눈을 떠야 하는 시간이 야속하게도 빠르게 다가온다.

다시금 하나의 꿈이 끝난다.


Written 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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