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Red Emperor’s Reminiscence

라칸 라넌큘러스 솔레유 x 비올레 아스포델

광활한 제국의 주인, 붉은 황제시여. 당신의 광채 영원하여라.

먼 훗날 오늘을 다시 회상했을 때, 쓰라렸던 과거의 흉터조차 아름다워 보일 만큼

기적의 장미처럼 만개하여라.

장미란 친숙하고도 가증스럽다.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그 어느 꽃보다 크고 화려하게 만개하는 푸른 겹꽃은 자랑스러운 솔레유 황가의 상징이다. 나 역시 꽃의 아이 시절부터 태양과 장미가 얽혀 하나 된 문장을 우러러보며 경례했고, 지금은 그 장미의 위엄을 머리와 등 뒤에 업고 전진한다.

두 시간의 간극은 결코 짧지 않다. 온 제국민이 나를 왕위에 오른 지 채 2년도 안 되어 대륙을 정복한 붉은 황제, 전쟁의 여신이라 떠받들지라도, 내가 걸어온 그 길은 처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다.

언뜻 익숙한 초상화를 바라보며 신입 서기에게 과거지사를 들려주었던 게 떠오른다. 돌아보면 그리 친절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니, 청자 있는 혼잣말이라 함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럼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찬찬히 되짚는다. 어디서부터 나는 이 황실 정원을 뒤덮는 호화찬란한 장미를 애증하게 되었을까.

푸르게 개화한 장미 꽃받침 아래 손을 가져간다. 정성을 담아 싱그럽게 손질된 꽃줄기는 끔찍이도 연약해, 당장이라도 뚝 실수로 끊어버릴 것 같다. 아래로 미끄러지는 손끝이 세모꼴의 가시에 닿는다. 힘을 주자 미약하지만 날카로운 통증이 손끝에 맺힌다. 이런 사소한 생채기에도 내 치유력은 발휘되어 피는 흐르지 않는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어디 누가 먼저 꺾이는지 볼까.

그러나 충동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없다.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중앙 귀족 가주들을 들볶다 못해 이제는 불쌍한 장미까지 괴롭히고 계십니까.”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가 휘는 일 없이 입꼬리만 유유히 올라갔음을 안다. 고요한 발걸음이 내게서 두 발자국 떨어진 채로 멈춘다. 여전히 손을 장미에서 떼지 않고, 가벼이 묻는다.

“그대가 여기까지 어쩐 일일까.”

“이건 또 서운하군요. 제가 꼭 용건이 있어야만 폐하를 찾을 수 있는 사이입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할 말은 없다. 비올레 아스포델은 공식적으로 라칸 라넌큘러스 솔레유의 연인이라 알려져 있으니. 그러나 말은 그리해도 내 허락 없이 그가 거리를 좁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를 그대로 놔둬도 큰 탈이야 없겠지만, 표면상 연인을 그리 둔다면 후일 귀찮아지는 것은 내가 될 테니 몸을 반만 돌려 손을 내민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춘다. 내 손을 받치는 그의 손은 미온하다. 그가 몸을 바로 세우자 목 부근에서 느슨하게 묶은 어두운 머리카락이 허리께 근처에서 찰랑거린다.

그가 등 뒤로 숨기던 하얗게 만개한 장미 한 송이를 내게 건넨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썹이 위로 꺾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런 것까지 주고받을 사이이던가? 채 추궁하기도 전에 네모난 안경테 뒤의 가느다란 눈매가 휜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눈짓하는 곳을 보니 오후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궁의 사용인들이 보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의 인식만큼이나 중요하고 위험한 것은 없지요.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보이지 않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냉정해 듣기 나쁘지 않다. 사용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도로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내게 내민다.

“제게 폐하와 함께 걸을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쉬이 포기할 사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묵묵히 손을 얹어 에스코트를 허락한다. 미로처럼 얽힌 정원 깊숙이 들어가서야 나는 입을 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지?”

서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걸음을 멈춘다. 바람 한 점 없어 잎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어제 폐하께서 황실 도서관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나는 쉽게 인정한다.

“원하시던 물건은 손에 넣으셨습니까?”

“내가 무얼 원하는지는 알고?”

“아둔한 제가 알 리 있습니까. 다만 평소 폐하께서 자주 왕래하지 않는 곳을 부러 시간 내 찾으셨기에, 특별히 찾는 물건이 있을 것이라 어림짐작했을 뿐이지요.”

“아둔하다라.”

코웃음이 나올 만큼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다. 백 년 묵은 구렁이도 저자 앞에선 없는 손을 들고 도망가리라. 팔짱을 끼고 그를 돌아보자 그는 여상하게 미소짓는다.

“쓸데없이 머리 좋은 그대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골치를 썩이는지 안다면 그런 얘기는 하지 못할 텐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가 인정하신 머리 좋은 제가 주제넘은 조언 하나 올려도 될지요?”

말씨야 공손하지만, 듣기 싫다 하여도 돌리고 돌려 끝내 발언하리라는 것을 알아 고개를 기울인다. 무언의 승낙에 그가 웃으며 머리를 살짝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춘다. 붉은 눈, 초록 눈 하나가 기이하게 노을빛을 받아 빛난다.

“알테라 폐왕녀의 말을 너무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설령 그가 누구의 이름을 들먹이며 폐하를 흔들려 하든.”

그가 왜 내게 그런 조언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가지만, 어디서 정보가 그에게 흘러갔는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주변을 단속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웃음이 입가에 번지지만 눈까지는 닿지 않는다.

“누가 나를 흔들려 하든 내가 동요할 것 같더냐. 그대의 신의가 실망스럽군. 하지만 그 어떤 무례도 서슴지 않는 태도는 언제나 인상적이구나.”

이름 하나, 기억 하나에 무너질 시기는 지났다. 기억을 봉인하진 않되, 소중히 담아두지도 않는다. 그저 언젠가 빛바래길 바라는 그림처럼, 강물처럼 흘러가게 둔다. 가끔 이유 모를 미련이 남아 강물에 손을 넣고 휘젓는 한이 있더라도, 흐르는 물을 붙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그의 두 눈에 진한 만족이 서린다.

“송구합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이 목이라도 잘라 사죄드릴까요?”

“아니. 그 목이 제대로 붙어있는 것이 내게 더 큰 이익이 될 테니까.”

경계할지언정, 그는 내 손으로 잘라내기엔 아까운 인재임을 알고 있다. 그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을지언정, 그와 나눈 거래는 아직 유효함을 믿는다. 그러니 이번 무례도 눈감아준다. 비록 입안에 쓴맛이 남을지라도.

“폐하의 하해와 같은 너그러움에 감사드립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내게 손을 내민다. 달리 볼 일이 남아있지 않으시다면 이만 들어가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대 먼저 돌아가거라.”

냉정한 거절에 그 어느 쪽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가 나긋하게 인사하고 물러간 후, 나는 다시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덩굴로 손을 뻗는다. 연한 노랑 장미가 손에 잡힌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꺾어 겹겹이 포개진 꽃잎을 눈여겨본다. 노란 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땅으로 추락한다.

참으로 닮았다, 그 여자는. 한창때 떨어진 저 장미 꽃잎과.

* * *

여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장미가 시들어 간다. 선명한 노란빛이었을 장미의 색이 갈색으로 말라간다. 옛 알테라 왕국이었던 땅으로 새로이 옮긴 앰버라이트 후작령은 이제 더 긴 겨울을 견딘다. 가을로 접어드는 달임에도, 벌써 매서운 겨울의 한기가 머리를 들이민다.

그 여자의 입맛에 맞는 날씨려나. 방금까지 얼굴을 맞대고 불편한 담소를 나눴던 알테라의 폐왕녀가 떠오르자 고개가 돌아간다. 시선 끝이 닿는 곳은 앰버라이트 후작가 저택의 꼭대기 층 창문이다. 커튼을 아직 닫지 않은 높은 창문 뒤에서, 서늘한 얼음 색의 눈이 나를 마주해온다.

“혹시 책을 좋아하시나요, 폐하?”

“글쎄, 어려서부터 공부와는 꽤 담을 쌓아왔던 터라.”

“한 번쯤 황실 도서관에 방문해보시길 권해요. 그곳에서 폐하가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으니.”

“이것도 네 그 잘난 예언인가?”

“편한 대로 생각하시길. 다만 폐하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욕심 많은 여인 아니십니까? 저도 한때 탐냈던 금보다 귀한 보물에 폐하 또한 흥미를 느끼실 거라고 추측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분에 대한 미련을 떨쳐낼 수 있겠지요. 그 여자가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여자가 산 사람의 눈빛을 띠고 입에 올리는 사람은 그제나 지금이나 한 명뿐이라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무슨 속셈일까, 그것은 아직 모른다. 황실 도서관은 예전부터 엄격하게 통제되어 출입할 자격을 가진 이는 지극히 적다. 황실의 일원, 또는 기록을 관리하는 서기. 그 외에는 황실의 허가 없이 드나들 수 없다. 그 여자 역시 황실 도서관에는 한 발짝 들어가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진짜배기 예언이라면 흰소리를 들은 셈 머릿속에서 치우겠건만. 예언, 그리고 예언자는 딱 질색이다. 그러나 그 모호한 눈빛이 발목을 잡는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멀리 보이는 인영을 올려다보자 여자는 옅은 금발을 휘날리며 커튼을 닫고 사라진다. 기척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시야를 가로막는 하얀 장막을 노려본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시선을 내리자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내려뜨린 내 연인이 눈에 들어온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그 얼굴에 고개만 살짝 움직여 아는 체 한다. 지금 그까지 상대하고픈 마음은 없지만, 내 바람과 다르게 그는 곁에 와 멈추어 선다. 그의 눈이 조금 전까지 내 눈길이 머물렀던 창에 닿는다. 그의 입가가 슬쩍 비틀린다.

“폐왕녀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담화를 나누었던 모양이군요.”

“그렇다 해도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상관없는 일이라뇨. 폐하의 언짢은 기분을 풀어드리는 것이 연인 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달리 제가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혀에 기름을 바른 듯 말만큼은 청산유수다. 지금 그대 덕분에 기분이 더 언짢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줘야 하나 싶지만, 그것조차 파악하지 못할 그가 아니기에 관둔다. 기분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는지, 그는 눈치 빠르게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창을 향해 눈짓한다.

“폐하를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불손하군요. 폐왕녀의 목숨을 살려주고 안위까지 보장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안위라. 이번에는 내 입술이 뒤틀린다. 저 여자가 들었다면 기가 막혀 할 일이다. 악을 쓰며 죽겠다는 이를 고집스럽게 살려놓아 평생 감시되어야 할 처지로 밀어 넣은 것이 나다. 비록 폐왕녀의 감옥이 화려한 저택일지라도, 그의 신세가 제가 죄인으로 변방에 감금되었던 때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폐왕녀는 허락 없이 저택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택 안에서도 지켜보는 눈 없이 어디에도 맘 편히 가지 못한다. 그 잘난 왕족의 이름은 이제 평민보다 못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드높은 자존심에 견디지 못했을 테지.

그러나 지금의 폐왕녀는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가 없다. 그 모습마저 과거의 나와 소름 끼치게 비슷해 연민조차 들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영영 보지 않고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것은 약조였지.”

알테라의 본성을 침략한 날, 자결하려는 그 여자를 막은 이유는 동정심도,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그저 그 여자만이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의 정확한 행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는 결국 원하던 정보를 내놓았다. 한참 반항하던 모습이 착각으로 치부될 만큼, 갑자기 돌변한 태도로 순순히 내게 그의 자필 편지를 건네주었다. 꾸며낸 편지가 아닐지 잠시 의심했었으나, 그의 필체가 확실했다.

“폐왕녀 측에선 내 요구를 만족시켰다.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어 내가 내 입으로 한 약속쯤은 지켜야지.”

내가 그대와의 거래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안경알 뒤의 눈매가 가늘게 접힌다. 흡족한 웃음이 그의 입술에 머무른다. 대화를 시작하고 나서 그가 처음 보이는 진솔한 감정이다.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되돌아보기에 달가운 기억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이 관계의 초석이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내 가장 밑바닥에서 다시 눈을 뜨고 간신히 일어났을 때의 결의를 절대 망각해서도 안 된다.

* * *

손님에게 내놓을 따듯한 차 따위는 없다. 규율상 손님을 받을 수도 없는 죄인 처지이니 별수 없다. 꽃병 역시 사치품이라 그가 들고 온 보라색 장미 꽃다발 또한 탁자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그의 모습과 달리 나는 굉장히 볼품없어 보이리라 예상한다. 계절에 맞지 않는 낡은 옷, 자르지도 다듬지도 못해 지푸라기처럼 엉킨 머리카락, 거르는 끼가 많아 수척해진 얼굴. 거울은 없어도 좁은 창문 유리로 내 모습을 비춰보기엔 부족하지 않다.

얼마나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일까. 비소가 갈라진 입술 끄트머리에 걸린다. 무서울 것 하나 없이 당당히 수도를 활보하던 때가 고작 작년이었다. 일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고, 그보다 많은 것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 순간, 일어서겠다는 의지 하나만은 되찾겠다고,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결심한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낮은 탁자 건너편의 사내를 직시하자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과거의 눈빛을 되찾으셨군요, 라칸 경.”

“아니요.”

과거의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나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절대적인 신의에 눈이 멀어 손 놓고 보기만 했던 불행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연인과 친부모를 비롯한 이미 잃은 수많은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내겐 남은 친우도, 국민도 많다. 아직 잃을 것이 무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나는 더는 주저앉아있지만은 못한다.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지요. 아스포델 경도 그것을 바라고 나를 찾아온 것 아닌가요?”

“이런, 저하의 말이 옳군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관대하게 넘어가 주시길.”

그리고 부디 말을 낮추어주십시오. 저하는 이제 그 누구보다 높이 설 분 아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시험을 통과한 듯,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와 호칭이 달라진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이 어둡지 않다. 그 기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만, 슬쩍 눈썹이 모이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오랫동안 몸과 마음에 익은 충성심 탓이다. 이해한다는 저 눈빛이 거슬려, 부러 강하게 나간다.

“한번 굳힌 마음을 돌릴 일 없으니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계획도 차근히 세워지고 있으니 이제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뿐이지.”

눈물 흘렸던 이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는 울고만 있을 수도 없다. 저 창 너머 지금도 울부짖고 있을 수많은 이들을 떠올린다. 고개를 돌려 팔 하나 간신히 내밀 수 있는 좁은 창문을 응시한다.

내가 죄인으로 이 저택에 갇혀 산지 어언 아홉 달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피부로 느꼈던 계절은 냉랭한 겨울이었고, 새빨간 피멍에 묻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상흔이 아물지 않아 세월 역시 흐르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있던 나날들.

그러나 비밀리에 찾아온 친우 로코리엘 앰버라이트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에 눈을 돌렸을 때, 나를 반긴 건 먼 기억에 남아있는 국민의 행복한 웃음이 아니었다. 곡식을 추수하고 감사절 축제를 벌이고 있어야 할 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마저도 병자와 노인, 아이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파체니아와의 전쟁에 강제로 징집돼 귀환하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비록 내가 귀양보내진 이 변방 마을에만 국한된 비극이 아니었을 테다. 그렇기에 로코리엘이 조심스럽게 친부모의 부고를 전해왔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저 저 먼 북방의 시니스타 백작령까지 전쟁의 여파가 닿았다는 것에 경악했을 뿐. 그리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수도마저 무너지는 게 시간문제라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대로 간다면 모두가 멸망하는 길밖에 없어.”

그러니 경 역시 내가 몇 번을 매몰차게 내쳤음에도, 내 앞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겠나.

처음 쿠데타를 건의하러 왔을 때 진노하여 그를 내쫓고 다시는 얼굴 보이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여서라도 그를 다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무어 중요하겠는가. 국민은 죽어가고, 자신의 몸에 솔레유의 피가, 푸른 장미의 힘이 흐르고 있는데. 아직 자신에게 그들을 구할 의무가 남아있는데.

“하지만 그것만이 저를 따로 부른 이유는 아니겠지요.”

눈치 빠른 사내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그 앞에서 숨길 사유도, 둘러댈 필요도 없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경이 나를 도와 얻는 것은 무엇이지?”

로코리엘 앰버라이트는 내가 대역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강직하게 내 편에 설 친우다. 앰버라이트 백작은 제 친동생을 매우 아끼니 기꺼이 나를 지지하겠노라 약조했으리라. 파체니아 국경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아렌제 자작도, 억울한 누명으로 아들을 잃은 메린트 후작도. 나를 위한다는 명분이 없더라도, 쿠데타에 가세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납득한다.

그러나 비올레 아스포델, 그는 무엇을 바라고 내 편에 서는 것일까. 사람의 선의만을 믿기엔, 배신의 상흔은 아직 쓰라리게 심장에 박제되어 있다.

“나는 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최소한 동기만큼은 파악해야 내가 경을 진정으로 신임할 수 있지 않겠나?”

“합당한 의심이지요.”

현명한 주군을 모시게 되어 기쁘군요. 그가 안경테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삐뚤게 보이는 웃음이지만, 되려 그렇기에 더 진심 같고, 덜 가면 같다.

“제가 저하를 지지하는 이유는, 저하만이 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인데?”

부, 권력, 또는 사람. 진부하나 모두 예상 범위 안이다. 그러나 저 가느다란 입술에서 떨어지는 것은 상상치 못한 낱말이다.

“저하의 옆자리를 제게 주십시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해할 여지가 없다. 시선이 탁자에 흐트러진 보랏빛 장미 다발에 스친다. 헛웃음이 절로 나와 다리를 꼬고 턱을 쓰다듬는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 사내라고는 보이지 않는데. 그게 사모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라고 나를 속이려 드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메린트 소후작을 그리 잃은 저하께 감히 제가 사랑을 운운하겠습니까. 가능하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제가 청하는 것은 저하의 연정이 아닙니다. 저하라는 이름의 울타리지요.”

솔레유의 국왕보다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줄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두 눈을 슬쩍 접어 웃는 그의 말에 팔짱을 낀다.

“왕실만큼은 아닐지라도, 아스포델 공작가의 울타리가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저하라면 손발에 채운 수갑을 정녕 울타리라 부르겠습니까?”

비틀린 그의 미소를 보며 나는 그를 이곳에서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즐거운 기분은 아니지만, 그가 내어준 조금의 틈 사이로 그의 내면을 살짝 엿볼 수 있던 까닭이다. 저 눈에 담긴 고요한 분노와 혐오가 저만치 뚜렷한데, 어찌 읽지 못하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몇 없다. 그만큼 귀족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스포델 공작이 모르는 새 제 손으로 위험한 독사를 키우고 있었군. 아스포델 공작은 제 조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기에, 그 누구도 비올레 아스포델을 공작가의 후계로 고려하지 않는다. 실제로도 비올레 아스포델은 공작위에 일말의 관심을 보인 적 없다. 그가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착오는 비단 나만의 오판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에서야 나는 내 착각을 수정한다.

하지만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가 욕심내는 것이 공작위가 아닌 공작의 목이라는 것을.

“그래, 그건 내가 줄 수 있는 범위 안이지.”

나중에 더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군. 웃으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바르게 내민다. 그가 수려하게 미소짓고 내 손등이 위로 향하게 받쳐 손등에 입을 맞춘다.

우정, 충성심, 복수심도 아닌 거래의 이름으로 나는 그를 허락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탁자의 장미 다발을 눈짓한다.

“그럼 이만 감시자들이 돌아오기 전에 가보거라. 꽃다발은 도로 가져가고. 이곳에 두고 갔다가 경이 다녀갔다는 비밀을 들킬 계획은 아니겠지.”

제 생각이 짧았군요. 그가 웃으며 장미 다발을 품에 집어 든다. 꽃잎 하나 떨어져 바닥에 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그를 짧게 주시하다 등을 돌린다. 그가 들어왔던 비밀 통로를 향해 나지막한 발걸음이 멀어진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는 그에게 묻는다.

“그런데 경. 내가 어찌 경이 내게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믿나?”

발걸음이 멈춘다.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울리는 것을 보니 그 역시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

“물론 믿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저하의 자유입니다. 허나 제가 여태 저하께 거짓을 고한 적이 있습니까?”

없다. 그렇기에 침묵한다. 그는 이 저택에 감금된 나를 찾아와 쿠데타를 제의했을 때도, 더 먼 과거에서는 역모죄를 쓰고 감옥에 갇힌 내게 다가오는 사별을 경고했을 때도.

우리가 다소 과격했던 첫 대화를 나눴을 때도.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거짓을 말한 적 없다.

* * *

“라칸 솔레유 경을 뵙습니다.”

오늘 받은 인사가 한둘이 아니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묵례한다. 얼굴을 확인한 건 그다음이다. 갸름한 얼굴선, 길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 가느다란 눈매를 찬찬히 살펴보다 그의 눈동자에 시선이 닿아서야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스포델 경이시군요.”

처음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본 게 쌍둥이의 대관식이었다.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각각 색이 다른 저 눈동자는 흔치 않아 잊기 어렵다. 그러나 이름만큼은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리고 있자니 그가 웃으며 제 소개를 해온다.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비올레 아스포델이라고 합니다. 오늘 그 장미 장식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아부에 슬쩍 제 가슴팍에 달린 푸른 장미 장식을 내려다본다. 기사단의 상징인 카밀레꽃 아래 왕실의 상징이 화려하게 돋보인다. 절로 자랑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리지만 뒤늦게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미간이 찌푸려진다.

무슨 뜻으로 왕실의 푸른 장미 장식을 콕 집어 칭찬하는 것인가. 내가 더는 왕실의 계승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내게 바라는 것이 있어 이리 아부를 떠는 것인가. 별 의미 없는 말인가. 이래서 귀족과의 대화는 머리 아프고 귀찮다. 계승권을 거부하고 기사의 길을 택한 판단이 백만 번 옳았다고 다시금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그는 그 이후 말이 없다. 그저 웃으며 나를 응시하고 있기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는데 늦게나마 생각이 미친다.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입을 연다.

“칭찬으로 듣지요. 내게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리 불렀습니까?”

복잡하게 빙빙 에두르는 대화는 싫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내가 그리 나올 것을 익히 짐작했는지 그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다. 축제의 행렬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을 향해 그가 눈짓한다.

“제게 내주실 귀한 시간이 있으시다면요.”

솔직히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가 껄끄러운 사람이라는 것쯤은 짧은 시간 내에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스바로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남아있었고, 그가 떠난다면 다른 귀족이 말을 걸러 오리라. 그보다 대하기 쉬운 상대가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에 잠시 고민하다 수락한다.

“그래서, 남이 엿들으면 곤란할 만큼 내게 중히 말해야 하는 게 무엇인가요?”

하지만 그에게 별로 시간을 할애하고픈 인심도 없었기에, 타인의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묻는다. 그는 바로 답하지 않고 옆으로 눈을 굴려 주위를 살핀다. 둘의 숨소리밖에 없는 침묵에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그는 한걸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춘다. 부드러운 저음이 차갑게 내 귀를 파고든다.

“라칸 경. 경은 국왕 전하가 경에게 불순한 의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짝, 매서운 타격음이 정적을 대신 채운다. 먼저 나간 손이 화끈거리고 나서야 뒤늦게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충격이 컸을 법한데도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다. 그에 더 속이 끓어올라 멱살을 잡고 그의 얼굴을 가까이 끌고 오자 그늘 속에서도 붉게 달아오른 뺨이 보인다.

“지금 내가 널 왕실 모독죄로 체포해도 할 변명은 없겠지.”

“충분히 각오하고 꺼낸 말입니다. 그러나 경께서도 아시잖습니까? 근래 국왕 전하가 경을 대하는 태도가 자못 변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선명히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돌리시는 건지요?

당장 허리춤에 걸린 검을 빼 들어 그의 목을 친다 하더라도 그는 저항하지 못할 테다. 나는 전선을 직접 지휘한 기사단장, 그는 전쟁터에 발 한번 디뎌보지 않은 귀족이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으레 목숨이 위험할 때 사람이 본능적으로 내비치는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거짓 또한 보이지 않는다. 실성한 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기에 돌부리처럼 걸리는 일이 있어, 나는 멱살을 잡은 손을 풀고 대신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그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짐작하고 있는 걸까. 근래 나를 피하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내 쌍둥이를 떠올린다. 내게 적의를 대놓고 드러내는 알테라의 왕녀와 부쩍 는 담소도. 내 뒤에 자주 따라붙던 측근 시종의 집요한 시선도. 의아하게 여기지만 나는 켕길 것 없기에 평소대로 행동할 뿐이다. 언젠가 그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리라는 믿음을 품고.

아픈 곳을 찔린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반격해,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슬슬 붓기 시작한 그의 한쪽 뺨을 한참 노려보다 낮게 으르렁거린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올레 아스포델 경.”

“경께서 그저 빛난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진창으로 추락하기엔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죠.”

저 아름다운 장미에 진흙이 묻으면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의 차분한 시선이 푸른 장미 장식에 닿고, 내 뒤의 골목 입구를 향한다. 붓지 않은 쪽의 입술이 슬쩍 비틀려 올라간다.

“벌써 경을 찾는 이가 있나 보군요. 당장 저를 체포하실 마음이 없으시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답하지 않는다. 그것을 긍정이라 여겼는지 그가 우아하게 허리 숙여 내게 인사한다.

“믿는 건 경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순진한 믿음에 눈이 멀어 다가오는 그림자까지 외면하시지 않기를 감히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메린트 소후작과의 약혼식이 멀지 않으셨군요. 참석의 여부는 확실치 않으니 미리 축하드립니다. 기묘한 웃음과 함께 그는 나를 지나쳐 골목에서 떠나간다.

홀로 서 있자니 그의 말이 계속 메아리치는 착각이 들어, 나 역시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온다. 미드써머 페스티벌을 즐기는 사람들의 흥겨운 목소리가 다시 나를 감싼다. 그 무엇보다 기쁘게 보아야 하는 광경이지만,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은 마음은 도통 가벼워지지 않는다.

“라칸 솔레유 님. 국왕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익숙한 시종의 목소리다. 최근 들어 친숙해진 껄끄러운 시선이 나를 잡아끈다. 말없이 시종에게 턱짓하자 그가 길을 안내한다. 뒤따르는 발이 유독 무겁다. 하지만 그 무게는 내 쌍둥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휘발되어 사라진다. 마냥 밝지는 않지만 나를 향하는 작은 미소를, 나는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기에.

나는 환히 웃으며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온 마음을 담아,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네게 애틋한 경애를 표한다.

내가 네 옆에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만큼은 내가 끝까지 지키겠다고 이 붉은 쌍검에 맹세해. 네가 나를 귀중히 여기듯, 나의 모든 것은 너를 위해 있어.

그러니 우리 먼 훗날 기억에서 희미해질 이 날을 회상하게 된다면, 이 소중했던 마음만은 잊지 않기를.

진실로, 그리 바란다.

* * *

수많은 기억에 묻힌 채로 장미는 돌아오는 계절마다 계속 피어난다. 가을의 잎새를 따라 장미의 꽃잎이 떨어지고, 겨울 눈이 하얗게 쌓여 녹음이 죽고, 따스해진 봄에 다시 돋은 봉오리가 연약해 보이더라도.

여름의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 그 어느 꽃보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제국을 수호하는 꽃이 만개한다.

그 봉오리가 무슨 색으로 개화할지는, 오직 시간만이 알고 있겠지.


Written 2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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