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어느 하루의 오해

이스(천유) x 아델하이트 에이아르

천유는 푹신한 쿠션이 달린 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다. 옆에는 똑같이 생긴 의자에 아델하이트 에이아르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손가락을 꼬았다 풀고 있었다. 앞에는 낮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얀 신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히스토리아의 신관, 카렌 키르헤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유는 작금, 이 상황이 매우, 엄청나게 불편했다.

“아델하이트 양, 천유 씨.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천유는 무슨 얘기를 하려고 카렌이 저렇게 비장한 말로 둘을 불러다 앉혀놨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안 볼 때 사고 쳤어? 반쯤 강제로 끌려오며 아델하이트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천유에게 돌아온 것은 몹시 억울하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아직도 이스를 처음 만난 막 나가는 22살인 줄 알아?”

“22살이나 26살이나 솔직히 별 차이 없지 않나.”

그때나 지금이나 흥미있는 연구가 관련되면 아델하이트는 막 나가는 무대포가 된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천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델하이트는 이미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이스는 전지적 순혈 마나티 시점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어. 인간에게 22살이 갓 사회에 적응하는 시기라면, 26살은 충분히 자리 잡고 결혼도 하고 애도 한둘 있을 나이라고.”

앞서가던 카렌이 힐끗 둘을 돌아봤다. 입술을 꾹 다문 게 영 표정이 곱지 않았다. 천유는 순간 아델하이트가 아니라 제가 신관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닌가 고민하느라, 아델하이트에게 결혼 생각은 티끌만치도 없으면서 말은 잘한다고 비꼬는 것을 잊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진실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셋이 어색하게 앉아있는 동안 시계 초침이 한참 홀로 째깍이며 흘렀다. 카렌이 드디어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천유 씨, 무례하겠지만 사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아델하이트 양을 만나고 있는 건가요?”

진지하게? 천유는 진지하게 이 질문의 저의가 뭔지 역으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저보다 나이도 어린 저 인간 신관이 어찌나 진중한 분위기를 잡고 있는지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질문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진지하다면 아델이 더 진지한 쪽 아냐? 나야 시간이 남아도니 옆에서 무료함 좀 때우는 편이고.”

카렌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천유는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인제 와서 쩨쩨하게 존댓말을 써달라고 할 위인은 아니니 예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 테고. 내용이 문제였나? 그러나 연구에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은 아델하이트지 천유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심심한 겸 아델하이트의 연구도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다는데 여기서 문제 될 발언이 있었던가?

“…아!”

천유는 아델하이트를 옆눈으로 쳐다봤다. 갑작스레 탄성을 내지른 아델하이트는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던 어깨를 풀었다. 천유는 미간을 모았다. 뭔가 이 사태에 대해 깨달은 게 있으면 혼자만 알지 말고 얼른 말하라고 짜증 내기도 전에 카렌이 선수를 쳤다.

“아델하이트 양, 진심으로 저런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건가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권유하고 싶습니다.”

“그게요, 선생님. 그게 아니라.”

아델하이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을 감췄다. 귀 끝이 새빨개진 것이 천유에게나 카렌에게나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그래서, 뭐가 아닌데? 그러나 이번에도 천유에게 따질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한창 불타는 연애를 할 나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때문에 상대는 더욱더 깊게 골라서 만나야 합니다. 나중에 아델하이트 양이 그만큼 받게 될 상처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아.

깨달음이 몰려옴과 동시에 천유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카렌의 질문을, 그리고 자신의 대답을 순서대로 돌이켜보자 왜 저 정중한 신관이 저를 쓰레기 보듯 노려보고 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천유는 심히 억울해졌다. 옆에서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아델하이트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단,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선생님, 이스하곤 그런 사이가 정말 아닌데요.”

“숨길 생각하지 마세요. 대놓고 애칭까지 부르는 관계인 게 뻔히 보이는데.”

천유는 억울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저 ‘이스’라는 애칭 아닌 가명의 유래를 설명하려면 못할 건 없겠지만, 그걸 저 눈 돌아간 신관이 잠자코 들어주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 아델을 만났을 때 귀찮아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꿋꿋이 찾아오다 결국 부를 별명을 하나 만들더라고. 그게 하필 도서관 I 책장 근처여서 이스(Ise)가 되었는데 계속 불리다 보니 쟤도 입에 붙고 나도 익숙해져서.’

무리다. 사정 모르고 들었으면 저도 개소리라 여겼을 테다. 썩 싸가지 있는 첫 만남도 아니었던 터라 저 쓰레기 보는 눈빛이 대형폐기물 보는 눈으로 바뀌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니, 신관님. 우리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오해는 풀어야 했다. 히스토리아 섬에 들르는 횟수가 적은 건 아니었기에, 올 때마다 저 따가운 눈빛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급격히 고달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천유의 눈물겨운 노력은 카렌에 의해 무참하게 씹혔다.

“아델하이트 양,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옛 선생으로서 조언 하나만 할게요. 인간과 마나티는 사는 시간부터가 다릅니다. 아델하이트 양은 똑똑하니 이론적으로 당연히 이해하고 있겠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는 건 다른 이야기에요. 지금도 천유 씨는 아델하이트 양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만, 나이는 한참 많지 않습니까. 갈수록 인간의 입장에서 느끼는 상대방에 대한 괴리감은 커져만 갈 테고….”

그 뒤로 구구절절 틀린 것 하나 없지만 뻔한 설교가 이어지자 천유는 미간을 문질렀다. 맞는 말이고, 그가 동생이나 다름없는 제자인 아델하이트에게 보이는 염려도 정당했다. 그러나 저 인간 신관의 친동생이 순혈 마나티와 세기의 로맨스 한 편을 쓰고 알콩달콩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배경을 알고 있으니 조금 짜증이 날수밖에.

“그러니까 잠깐 내 얘기 좀 들어보라니까.”

“천유 씨와는 따로 얘기를 나눌 테니 아델하이트 양과 대화를 마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말투만 예의 바르지 천유의 해명을 들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소리였다. 서늘한 눈빛은 여전했다. 옆에서 떠는 듯한 미약한 진동이 전해져오자 천유는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어찌나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지 아델하이트의 귀 전체가 새빨개져 있었다.

저게 진짜 누구는 쓰레기에 도둑놈으로 몰리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오나? 팔꿈치로 아델하이트를 툭 치자 그제야 아델하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중간중간 새어 나오는 웃음 사이에서 아델하이트는 천유의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분투를 시작했다.

“선생님, 잠깐만 얘기 좀 들어보세요.”

* * *

천유와 아델하이트가 카렌을 힘겹게 설득하고 방을 나온 것은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직 입가가 실룩거리는 아델하이트를 못마땅히 내려다보다 천유가 낮게 으르렁댔다.

“누군 히스토리아 섬에서 영구적으로 추방당할까 봐 피 말리고 있었는데, 너는 이게 웃기지?”

“미안, 미안. 그런데 상황 자체가 너무 웃겨서. 그래도 내가 영혼을 바친 변호로 오해는 다 풀었잖아?”

“풀린 것치고 여전히 날 보는 눈이 썩 곱지 않던데?”

그건 선생님이 깐깐하신 만큼 고지식한 면도 있으셔서…. 아델하이트가 이번엔 카렌을 변호하려는 시도 위로 나긋한 목소리 하나가 겹쳐졌다.

“한참 찾았는데 여기 있었네. 아델, 천유 씨. 방금 둘이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다는…”

“아니라고!!!”

끝내 천유가 폭발했다. 이쯤 되면 저 까탈스러운 성미치고 오래 참긴 했다. 기다란 옷깃을 휘날리며 눈 깜짝할 새 사라진 천유의 등 뒤로 아델하이트와 세오르데인의 멀뚱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세오르데인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오해를 전해 들었다고 하려 했는데. 가버렸네.”

“오빠, 중요한 부분부터 서두를 꺼냈어야지.”

저 성질 풀어주려면 한참 걸리겠네. 다음 연구 도와달라고 꼬셔볼 생각이었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아델하이트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붙잡았다.

그렇게 천유는 조용한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분노를 삭였고, 아델하이트는 천유를 꼬셔낼 미끼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세오르데인은 그저 웃었으며, 카렌은 어린 제자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Written 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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