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Melancholy of an Anonymous Scribe

라칸 라넌큘러스 솔레유 x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어떠한 형태의 기록으로도 남겨져선 안 되는 이 이야기에 구태여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저 <무명 서기의 우울>이라 부르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저는 서기입니다. 제 이름을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대답하진 않겠습니다. 혹시나 오해하실까 미리 밝히자면 제가 신분을 감춘 높은 귀족이다, 이런 거창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 반대로 어차피 들어도 모를 이름을 굳이 말씀드릴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서요. 이름난 가문의 후계자인 것도 아니고, 있는 듯, 없는 듯, 약소한 귀족 집안의 사람일 뿐입니다. 심지어 이 나이에 초능력도 발현하지 못한 한심한 인간이라 할 수 있죠.

그런 제가 황실의 서기로 취직한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죠. 황궁에서 일하는 수많은 서기, 그중 가장 낮은 계급의 신입이라지만 말입니다. 제가 비초능력자로 확정되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 걱정하던 부모님에게 제 취업은 희소식 중 희소식이었답니다. 합격통지서가 날아오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짐을 꾸려 한치의 아쉬움 없이 수도로 보내주셨으니 말이에요. 덕분에 섭섭함은 전부 제 몫이 되었다죠. 이 또한 배부른 투정이겠지만요.

평범하다면 평범한, 별 볼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장점이라 자부하는 점은 몇 없지만, 비상한 기억력은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글, 기록, 사람의 얼굴은 한 번 보고 외우는 게 저에겐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 기억력 덕에 공부는 잘한다고 선생님께 평가받았고, 면접관도 이 점을 후하게 쳐 가산점을 준 게 아닐까 싶거든요.

제 두 번째 장점은 감입니다.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제 어릴 적 파다한 사고를 수습해준 소중한 재능입니다. 타고나길 호기심 많은 성격이라 큰 사고를 여럿 칠뻔했는데, 덕분에 문제를 크게 키우지 않고 덮을 수 있었죠. 집안 어른들 몰래 숨어 가보를 구경하다 귀중품을 깰 뻔했을 때나, 유랑극단을 관람한답시고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길을 잃었을 때나, 뭐 그런 추억들 말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 뛰어난 감으로도 이 사태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호기심이 웬수죠. 전 그저 도서관의 구석진 책장에 숨겨진, 처음 보는 책을 발견했고, 책을 펼치니 인쇄된 글자가 아닌 수기로 쓰인 기록이라 궁금해서 한번 슬쩍 보려고 가져오기만 했는데 말이죠.

…그 기록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었다면, 저는 절대로 그 책을 펼쳐보지 않았을 겁니다.

* * *

오늘도 그 꿈을 꾸었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다. 조금씩, 무겁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울리고, 이윽고 내 앞에 멈추어 선다. 우리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쓸쓸한 텅 빈 공간. 눈을 위로 올려보아도 너무 어두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는 나에게 무어라 말하지만, 기이한 소음이 끼어 잘 들리지 않는다. 점차 안개가 걷히듯 윤곽도, 소리도 선명해져 가면,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말과 함께 고통이 느껴지고 나는 직감한다.

아, 죽었구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어난다.

그 꿈을 꾼 날엔 늘 그러듯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는 항상 눈치채고 나를 달래주었다. 아무리 쌍둥이라 할지라도 네가 나를 번거롭게 여길까 싶어 먼저 말을 꺼내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지만, 네가 그 어둠을 간파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누구보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

누구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빛나는 내 사람.

‘괜찮아, 불안해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큼은 내가 지켜.’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라칸, 너는 절대로 모를 거야.

* * *

이 책, 아니, 일기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아무튼, 이 일기를 집어 든 것이 제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지난날의 사고는 새 발의 피도 아니에요. 이건 사고의 범위를 아예 벗어났어요. 말 그대로 재앙입니다, 재앙.

제가 이 일기를 본 게 발각되면 황궁에서 쫓겨나는 처벌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해고에서 끝난다면 감지덕지죠. 최악의 경우, 제 목은 물론 가족 일가친척의 목까지 다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일기는 반년 전, 라넌큘러스 황제 폐하의 손에 죽은 폐왕, 메리골드 전하의 일기였으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설마, 설마. 소지한 것으로만 황실 반역죄로 몰릴 물건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도서관에 버젓이 있을 리가요 (황실 도서관에 출입이 가능한 사람은 제한되어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합시다). 더군다나 솔레유 왕가, 아니, 이제는 솔레유 황가에 관한 모든 공식적인 기록은 태양의 대관에 보관되는 것이 원칙인데요. 설마, 설마.

…네, 백 번을 부정해도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표지에 저자의 이름이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첫 몇 장만 대충 훑어봐도 착각할 수 없었죠. 몰래 다시 도서관에 가져다 놓을까 고민도 했지만, 그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가능성을 상상도 하기 싫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머리를 감싸 쥐고 절망의 한숨을 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분, 메리골드 전하에 관한 제삼자의 기록도 아닌, 솔레유 왕국을 배신한 대역죄인 본인의 손으로 친히 남긴 일기. 초대 황제 라칸 라넌큘러스 솔레유 폐하의 존함을 친밀한 애정 어린 이름으로 적은 일기.

목숨이 소중하고 제대로 정신머리가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바로 일기를 불살라버렸을 겁니다. 제 생존본능 역시 불을 켜고 지금 당장 손에 들고 있는 책을 파기하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망할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마치 소설에서 나오는 운명적인 이끌림 때문이었으려나요.

그 일기를 태워버리기는커녕, 저는 그것을 제 방에 꼭꼭 숨겨두었습니다.

* * *

너는 나에게 종종 물어왔었다.

‘무엇이 널 그렇게 불안하게 하는 거야?’

아주 어렸을 때는, 모자란 단어를 어떻게든 엮어 설명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땐 그저 그 꿈을 어렴풋이 무섭다고만 느꼈을 뿐, 차츰차츰 쌓여가는 그 공포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끝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철이 들고 나서는, 어째선지 이야기하기가 꺼려졌었다. 너는 항상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기에, 늘 빛나는 자리에 서 있었기에. 언제나 자신감에 차 밝게 웃고 있는 네 얼굴에 근심을 드리우기 싫어서였을까.

그런 네가 나를 이해해줄 리 없다고 단정 지은 것이 원인이었을까.

솔직히, 프락시넬라 선왕 전하가 왕세자로 선택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어야 했어. 선왕 전하 역시 내가 아닌 너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싶어 하셨던 것을 모르지는 않아.

몰래 엿들으려는 의도는 없었어. 그곳에서 선왕 전하와 네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내가 무엇을 엿들을지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그곳으로 걸음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저 우연이었어. 하지만, 라칸… 너는 대체 무슨 이유로 선왕 전하의 호의를 사양했던 걸까?

너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어. 네가 정치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건 나도 알아. 공부는 내가 더 잘했던 것도 알고. 그렇지만 왕의 자질이란 그런 한두 가지 면모로만 단정되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잖아.

내 초능력? 예지몽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가진, 단편적인 미래를 보는 능력이 왕국을 바른길로 이끌 거라고, 넌 선왕 전하를 설득했었지. 라칸, 네가 틀렸어. 미래를 보는 것과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건 하늘과 땅만큼 다른 일이야. 태양의 광채가 가득한 길을 걷기에 내가 적합하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네게 말할 수 없는, 내 가장 깊은 비밀. 예지몽은 나에게 축복도 선물도 아닌, 그저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자 저주일 뿐이야.

있지. 대관식이 끝난 밤, 내가 솔레유 왕국의 33대 국왕으로 임명된 날. 나는 처음으로 꿈에서 내 살해자의 얼굴을 봤어.

라칸, 내 살해자는, 네 얼굴을 하고 있었어.

* * *

그 후 매일 밤, 저는 방에 숨어 몰래 메리골드 전하의 일기를 읽었습니다. 수도에 개인 집을 마련할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아 황실에서 지원해주는 기숙사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죠. 심지어 독방을 쓸 정도의 돈이나 지위도 없어서 일찌감치 들킬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만, 룸메이트와 그리 친하지 않아서 별다른 관심을 받진 않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조금 쓸쓸했을 테지만, 처음으로 존재감 없는 사람이란 것을 다행이라 여겼지 뭡니까.

매일 잠들기 전, 한두 장씩. 그리고 다시 일기를 안전하게 숨겨두고 잠들 때까지 그 내용을 곱씹었습니다.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솔레유 왕국이었던 시절의, 33대 국왕.

쿠데타 직후 적국 알테라로 도주하고, 추적 끝에 라넌큘러스 폐하가 손수 처형한 폐왕. 폐하가 솔레유 제국을 선포한 후 그분에 대해 언급하는 간 큰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솔레유 선왕들의 기록을 접할 수밖에 없는 제 직업 특성에도 불구하고, 메리골드 전하에 대한 기록은 심히 부족했습니다. 라넌큘러스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우려해, 웬만한 자료는 빠르게 태양의 대관의 후미진 장소에 보관되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분의 통치 기간이 2년도 되지 못한 점도 한몫했겠지요.

없는 기록을 뒤적이면서 알게 된 정보는 비슷비슷했습니다. 똑똑했지만 유약했고, 우수한 초능력을 지녔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성정을 지닌 분이었다고요. 왕의 자격인 로즈아이(Rose Eye)를 가진 후계자, 일명 ‘꽃의 아이들’ 중에서도 메리골드 전하를 유력한 왕세자 후보로 꼽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분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상위 귀족 가문과 마찰이 심했고요.

그들이 메리골드 전하에게 그나마 표면적인 예의라도 갖추는 까닭은 그분의 초능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경미한 사건 사고부터, 경고 없이 찾아오는 침략과 자연재해까지. 그분의 예지몽은 절대로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내용의 예지를 볼지 제어를 못 하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지요.

그런 시각에서 메리골드 전하는 귀족들이 뒤에서 수군대던 것과 달리 통치 초반부터 무능한 국왕은 아니었습니다. 앞에 나서는 걸 꺼렸다뿐이지, 인수인계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았음에도 왕의 직무는 차질 없이 묵묵히 다 해내셨으니까요. 파체니아 도시동맹의 침략을 미리 예지하지 못했더라면 국경에 큰 피해를 보았을 거라 백성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었죠. 평판이 나쁜 국왕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요.

그분이 무슨 뜻으로 당시 기사단장님이셨던 라넌큘러스 폐하에게 반역죄를 물어 투옥하고, 폐하의 약혼자셨던 스바로그 메린트 님을 사형에 처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이죠. 그분이 명성과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라넌큘러스 폐하를 시샘해서, 폐하가 인망이 있는 후계자여서, 본인의 위상이 위태로워질까 경계해서. 그 밖에도 카더라 추측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에 쉽게 납득하고 넘어가기엔 걸리는 점 역시 많았습니다. 라넌큘러스 폐하와 메리골드 전하의 사이가 어렸을 적부터 각별했던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거든요. 꽃의 아이 중에선 설령 친형제가 있더라도, 가족보단 경쟁자라 냉정히 여겨집니다. 그러나 두 분은 꽃의 아이들이 그러듯 격식 차려 미들네임인 ‘꽃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기보단,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라넌큘러스가 아닌 ‘라칸’으로, 메리골드가 아닌 ‘라예스’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했던 어머니의 말이 일기를 보고 있자니 사무치게 와닿더군요. 일기를 파헤칠수록, 얘기로만 들었던 쿠데타의 내막에 이런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둠 속에서 뒤척이다가 저는 불현듯 궁금해졌습니다.

라넌큘러스 폐하는, 이 일기에 대해, 메리골드 전하의 진실에 대해, 알고 계실까요?

* * *

믿고 싶지 않았어. 믿지 않으려 죽도록 노력했어.

하지만 내 예지몽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어.

너에게 몇 번이나 이 악몽을 털어놓으려 결심하고, 그만큼 다시 단념했던 걸, 넌 알고 있을까.

처음엔 그저 이 무거운 짐을 네게 떠넘기기 싫어서 침묵했었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나는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변심하게 된 그 이유조차 너무 나답고 치졸해서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었어.

라칸, 넌 항상 사랑받았어. 나는 물론이고, 같이 지냈던 다른 꽃의 아이들도 너를 경계하고 질투하는 동시에 널 동경하고 가까이하고 싶어 했었지. 네 기사단 선배와 후배들도, 네 약혼자인 메린트 소후작도 너를 귀애했고, 간혹 수도에 얼굴을 보이는 우리의 친부모님도 나보다는 너를 자랑스러워하셨지. 너는 솔레유 왕국의, 국민의 영웅이었으니까.

오해하지 마. 그게 싫었다는 건 아니야. 네가 그만큼, 사랑받을 만큼 노력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첫 번째로 선택받은 왕세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누가 보든 내 자질이 가장 영광스러운 저 자리를 채우기 충분치 않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기에. 자꾸만 너와 나를 비교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너를 원망하게 되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차마 말할 수 없었어. 네가 나를 누구보다 믿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하지만 나는 네게 그 믿음을 돌려주지 못했기에. 공포감뿐만 아니라 죄책감까지 내 목을 죄어왔어.

너와 함께 걸어가고 싶었는데. 계속 네 옆에 있고 싶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너는 태양 아래로, 나는 아득한 수렁으로. 우리는 반대로 걸어가고 있더라.

그리고 네 손을 놓기를 선택한 건,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진실이 참으로 쓰라렸어.

* * *

일기에 대해 골몰하느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수님에게 야단맞은 적도 많았지요. ‘들어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으면서 뭘 믿고 농땡이지? 별 뛰어난 능력도 없으면서 여유 부릴 배짱은 있나 봐?’ 눈물 쏙 빠지게 혼나고 정신을 좀 차렸습니다. 운 좋게 얻은 직장에 취직하자마자 해고되긴 싫었으니까요.

…사실 사수님에게 자백하지 않은 사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수님이 알게 되었다면 바로 절 총책임자 앞으로 끌고 가셨을 거고, 전 그날로 해고당해 고향으로 돌아갔으리라 예측해봅니다. 일부러 일으킨 사고는 아니었지만, 제 불찰이 맞아서 변명거리조차 없었거든요.

회상하자면, 저는 그날따라 일기의 내용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 멍하니 필사하라는 기록은 뒷전에 두고, 손 가는 대로 낙서만 하고 있었습니다. 네, 이미 여기서부터 감점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정신 차리고 보니 백지를 가득 채운 건 일기에서 읽은 내용이었습니다. 무려 한 장이 아니라 한 무더기로.

제가 정신 나간 게 틀림없었죠. 비범한 기억력이 이때는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누가 볼 줄 알고 공적인 장소에서 위험천만하게 그런 짓을.

그 자리에 저만 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바로 종이 뭉치를 끌어모아 전부 불태워버릴 작정으로 사무실을 나섰습니다만, 타이밍이 안 좋게도 누군가 들어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정면으로 그 사람과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나 그분이나 넘어지는 꼴은 면했지만, 들고 있던 종이가 바닥으로 엎어지는 건 막지 못했지요. ‘죄송합니다’만 반복하며 정신없이 종이를 한장 한장 줍다가 올려다본 그 얼굴에 저는 굳어버렸습니다.

흔하지 않은 녹색과 적색의 눈동자가 네모난 안경테 너머로 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약간 흐트러진 긴 검은 머리카락을 다시 가볍게 어깨 뒤로 넘기는, 저 오드아이의 남성이 누군지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황궁에서 이분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위협적인 외양이나 체격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도리어 곱상하게 생긴 편에 속했지만, 저는 뱀을 눈앞에 둔 먹잇감처럼 얼어있다가 그분이 무언가 물어보는 덕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만.”

네, 네. 괜찮습니다. 당연히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며 빠르게 일어섰습니다. 식은땀에 손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주워 모은 종이 뭉치를 또 놓칠 뻔했지만, 정신머리와 같이 종이도 간신히 다잡았습니다.

비올레 아스포델. 성만 들어도 알겠지만, 그는 중앙 귀족 중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아스포델 공작가의 사람입니다. 또한 라넌큘러스 폐하의 연인으로 유명한 초 주의 인물이죠. 정략 애인인지 아닌지는 뒤에서 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지만, 폐하의 측근이라는 건 분명하기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감이 그분은 절대로 척을 지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속내를 전혀 모를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말을 저에게 돌려준 아스포델 님은 몸을 숙여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습니다.

…앗, 그 종이. 한 장을 미처.

당황해서 허둥대고 있는 사이에 그의 눈길은 이미 종이에 써진 낙서, 아니, 기록을 훑고 있었습니다. 점점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제 심장도, 간도, 정신도 가루가 되어 사라졌습니다. 반역죄로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 이대로 죽는구나.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식은 먼저 가겠습니다.

자신의 명복을 빌며 머릿속으로 유서를 바삐 작성하느라, 아스포델 님이 저에게 뭐라 말하고 있다는 걸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 말았습니다.

뭐라,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는 표정이 언제 바뀌었었냐는 듯,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고 그 미묘한 미소를 다시 지으며 천천히, 친절하게 반복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책무 이상으로 깊게 관여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정신으로 그와 헤어지고, 종이를 전부 모아 태워버리고, 퇴근했는지 모릅니다. 며칠을 두려움에 떨며 보냈지만, 사수님에게서나, 황제 폐하에게서나 별다른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아, 그저 그분이 제 실수를 관대하게 넘어가 목숨 하나를 살렸구나 싶었지만.

지금 와서 숙고해보자면, 그분은 제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걸 간파하고,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를 해준 거였을지도 모릅니다.

* * *

한 번도 이 왕좌가 호락호락한 자리라 여긴 적은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힘들고 고달팠다. 차라리 장미 가시로 가득한 의자에 앉는 것이 덜 고통스러우리라 생각할 정도로.

하루하루, 이 지위가 나에게 과분한 자리라는 걸 되새길 수밖에 없었어. 아마 그리 생각하지 않는 건 너뿐이었을 거야, 라칸. 경쟁에서 밀려난 다른 꽃의 아이들도, 자부심 가득한 귀족들도, 그렇게 눈치를 주는데 내가 몰랐을 리가.

아예 대놓고 내 면전에서 험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내가 솔레유의 위상을 땅에 처박은 건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고, 눈이라도 돌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계속 들려와. 내 악몽이 선명해져 갈수록 그들의 가시 같은 말도 날카로워지더라.

그리고 나에 대한 험담에 늘 따라붙는, 너에 대한 찬양.

원망하지 않으려 노력했어. 내가 부족한 건 네 책임이 아니었고, 네가 뛰어난 건 더더욱 탓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너와 있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우리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지더라.

어렸을 때는 늘 붙어 다녔지만, 내가 왕이 되고, 네가 기사단장이 되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 우리를 지켜보는 눈 또한 삼엄해져 공적인 석상에서는 너는 나를 ‘전하’로, 나는 너를 ‘라칸 경’으로, 익숙지 않은 호칭으로 부르다 보니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네 곁에는 너를 굳건히 지지하는 기사단의 친우 앰버라이트 경도, 다정한 연인인 메린트 소후작도 있었지. 다 하나 같이 돋보이는 사람들 틈에서 가장 환하게 웃고 있는 너와 달리, 네가 곁에서 사라진 나는 항상 혼자였어.

그래. 이건 내 철없는 심술이고, 내 업이고, 돌이킬 수 없는 내 잘못이야. 알테라의 유나 왕녀의 조언을 들어 너를 더욱 멀리 떨어뜨린 것 역시. 너에 대한 불신을 점점 키워가게 된 것 역시. 누가 심었을지 모르는 씨앗이지만, 그것을 키워낸 것은 오롯이 내 책임이니까.

‘라칸 님은 정점에 어울리는 고귀한 분이시지요. 그분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전하 또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언제나 들려오는 그 말에 소리 내 덧붙이진 않지만 ‘전하와 달리 말입니다’가 메아리처럼 맴돌더라.

한때는 네가 내 옆에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도리어 네가 옆에 있으면 숨을 못 쉬어 마치 물속에서 호흡하는 착각이 들어. 차라리 네가 없었으면, 바라게 되었어.

* * *

…마지막 장을 넘기고, 일기를 덮었습니다. 이젠 손때가 묻은 티가 나는 책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거울이 있었다면 아마 뒤숭숭한 제 심정을 대변하듯 굉장히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메리골드 전하의 기록은 이것으로 끝이었지만, 제 고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지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그분들은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결말에 다다르고.

…왜 메리골드 전하는 자신의 일기를 그 구석진 장소에 숨겨두었을까요? 일기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면, 왜 파기하지 않았을까요. 없애버릴 기회가 오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셨을까요? 하지만 메리골드 전하의 초능력을 돌이켜보면, 그분만큼은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는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는데.

메리골드 전하의 의중을 이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일기에 남겨진 말, 감정, 비밀. 그것이 남은 전부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저는 이 일기의 존재를 라넌큘러스 폐하에게 고해야 할까요?

일기를 끝까지 읽고 나서야 확신했습니다. 폐하가 메리골드 전하의 일기를 본 적이 없을 거라고. 일기의 끝장, 마지막 유언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폐하가 이 유언을 들으셨다면, 지금도 메리골드 전하를 온전히 증오만 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괜한 오기였을까요. 주제넘은 동정심이었을까요. 전하지 못한 기록을, 정당한 수신인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의무감이었을까요?

지금 와서 이 일기를 내보이면 제 안위가 위험하지 않냐고요? 물론 제 목은 걸어야 할 터입니다. 서기로서의 직업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목숨 말입니다. 무섭지 않냐고요? 당연한 말 아닙니까? 전 황제 폐하를 한 번 가까이서 뵌 적도 없는 소시민인데, 갑자기 이런 막중한 과업을 떠안게 되면 숨이 가빠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하지만 라넌큘러스 폐하는 메리골드 전하의 마지막 기록을, 최후의 진실을 보실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점점 감겨오는 눈을 비볐습니다. 지금 당장 고뇌하고, 결정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서기 중에서도 계급이 한참 낮은 신입이니까, 평소에 황제 폐하는커녕 폐하의 그림자조차 볼 기회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오늘은 그만 고민하고 잠들어도 괜찮겠지요.

그 기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 줄 알았더라면, 저는 그날 불안감에 밤을 꼴딱 새웠을지도 모릅니다.

* * *

왜, 왜. 네가 없어도 악몽은 선명해져만 갈까. 내가 여기서 무얼 더 해야 이 악몽이 끝날까?

방패 역할을 해주던 네가 사라지자 보란 듯이 표면적으로나마 예의를 지키던 귀족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네가 내 악몽의 주축이자, 동시에 내 가장 강력한 지지자인 모순적인 사실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어쩌면 알고 있었어야 했다.

의견 하나 제의하면 쏟아져나오는 반대. 우아하게 손 뒤로 가린 비웃음. 어디를 가든 들려오는 ‘라칸 님만 여기 계셨더라면.’

네가 이곳에 없어도 늘 네 생각밖에 할 수 없었어. 내가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해도, 어디를 가나 네 이름만 그렇게 들려오는데. 아예 환청까지 맴도니 차라리 네가 빨리 돌아오는 게 낫겠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알테라의 왕녀 유나가 몇 번인가 서신을 보내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본인은 나를 예언자 동지라 여겼지만, 내 쌍둥이마저 믿지 못할 정도로 몰려있던 내가 같은 예언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믿을 수 있었을 리가.

그 악몽은. 아니, 미래인가? 다가오는 현실인가? 더는 구분을 못 할 정도로 생생해지고, 목에 닿은 칼날이 소름 끼치게 차가워서.

초능력을 일시적으로 막아주는 일식석. 그 금빛의 귀한 보석으로 장식한 지팡이를 손에서 한 시도 떨어뜨린 적이 없었지만 왜, 왜. 왜 악몽은 여전히 나를 매일 밤 찾아오는 걸까.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미쳐버릴 것 같아.

라칸, 네가.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없었더라면.

* * *

황제 폐하의 전속 서기관님이 급하게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어째서 제가 그분의 업무를 대신 맡게 된 걸까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게 빠르게 일을 일임한 사수님은 사라졌고, 저는 손에 열쇠 꾸러미를 든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차마 고개를 돌려 옆에 서 계신 분을 볼 패기는 없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심장 터져 죽을 것 같아요.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 멸망 전 키리오스 신정국에서 섬기던 얼굴 모를 신에게까지 빌었습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와중 그분이 말을 거시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열쇠 꾸러미를 놓칠뻔했습니다.

“안 잡아먹으니까 갓 태어난 새끼사슴처럼 떨지 않아도 돼.”

날 전쟁터 반대편에서 맞이한 적군의 병사도 너만큼 떨지 않았겠다. 라넌큘러스 폐하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비어있는 복도에 울렸습니다. 그리 말씀하시기도 했고, 면전에서 계속 떨고 있는 건 폐하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던 터라,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아 그분을 살짝 올려다보았습니다.

황제의 관을 가볍게 소화하는, 아래로 갈수록 하늘색에서 검은색으로 이어지는 풍성한 장발의 머리카락. 날카로운 하늘색 눈동자에 새겨진 솔레유의 상징, 푸른색 장미.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무예를 게을리하지 않고, 오히려 전장의 선두에서 병사를 통솔했던 인재답게 젊은 나이에도 카리스마 있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지닌 분이셨습니다.

전장의 여신, 핏빛의 발키리. 붉은색의 황제. 거창한 이명이라 치부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그 화려한 수식어조차 폐하의 위엄을 반절도 담아내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한낱 신입 서기인 제가! 어쩌다가 폐하를 수행해 태양의 대관에서 문헌을 찾아드리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장소가 장소인 만큼 폐하의 직속 호위까지 다 물리고, 저 혼자서! 저의 무엇을 믿고!

하기야 살면서 칼이라곤 페이퍼 나이프밖에 안 들어본 제가 제국에서 손에 꼽는 검사이신 폐하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지만요. 폐하가 절대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저 붉은 쌍검이 없었더라도, 10초도 채 안 걸려 죽을 자신은 있습니다. 설령 괴한이 기습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죽으면 죽었지, 아마 폐하는 멀쩡하실 거예요.

신도, 사수님도 결국 저를 버렸습니다. 제 수명이 벌써 10년 치는 줄어든 기분이에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절규하다 보니 어느새 태양의 대관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태양의 대관. 역대 솔레유 국왕의 초상화와 기록이 온전히 보존된 방. 서기의 총책임자도 이 방에 출입하려면 황제 폐하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장소를 제가 들어가 보게 된다니.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감격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로 울고 싶었습니다.

제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라넌큘러스 폐하는 대관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의 묵례에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붉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망설임 없이 먼저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저 또한 위압적인 인상의 기사분들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폐하의 뒤에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져 종종걸음으로 뒤쫓았습니다.

호화롭게 금으로 도배된 널찍한 방. 초대 솔레유 국왕부터 시작해서 34대 솔레유 국왕이자 동시에 초대 솔레유 제국 황제인 라넌큘러스 폐하의 초상화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황제들의 초상화도 점차 늘어나겠지요. 걸음이 너무 뒤처지지 않게 신경 쓰며 옆눈으로 처음 보는 초상화를 눈에 담았습니다.

푸른 장미의 축복을 받은 29대 국왕 클레리안 아스터 솔레유 전하의 초상화를 한참 지나쳐, 병으로 급작스럽게 승하하신 32대 국왕 나르뮨 프락시넬라 솔레유 전하의 초상화에서 잠깐 발을 멈추고, 그리고….

장미꽃이 조각된 액자에 담긴, 다른 초상화에 비해 앳된 용안. 지금 앞서 걸어가고 있는 폐하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정말 많이 닮은 얼굴. 검은색에서 하늘색으로 어우러지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느슨히 땋아 내린 채로 두 손을 모아 정적에 잠긴 모습. 라넌큘러스 폐하와 달리 머리 위에 쓰인 푸른 장미의 왕관이 그리도 무거워 보이는 33대 국왕이자 폐왕.

일기의 주인,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

메리골드 전하를 직접 뵌 적은 없으니, 용안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생각보다….

슬퍼 보이십니다. 전하의 푸른 장미꽃이 새겨진 하늘색 눈을 보며 떠오른 소감은 그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 말이 들려올 때까지 저는 소리 내 말 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기겁해서 돌아보니 어느새 다가오셨는지, 라넌큘러스 폐하가 제 곁에 서서 메리골드 전하의 초상화를 같이 올려다보고 계셨습니다.

* * *

스바로그 메린트, 메린트 가의 소후작. 왕실에 대한 역모를 꾸민 죄로 사형에 처했다. 네가 그렇게 사랑했던 붉은 머리카락은 검붉은 피에 젖어 빛을 감추었고, 네가 그리 아끼던 그 녹색 눈동자는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라칸 라넌큘러스 솔레유, 왕실 출신 기사단장, 나의 쌍둥이. 너 역시 반역죄를 쓰고 감옥에 갇혔다. 왕실의 일원이라는, 내 친혈육이라는 구실로, 네 측근이었던 이들의 거센 항의로 인해 바로 사형당하는 건 면했다.

네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죽었다. 그렇게 존경받던 너 또한 이제 죄인일 뿐이다. 끝까지 사형을 면하더라도 멀리 추방당해, 다시는 볼 일이 없겠지. 이로써 내 악몽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소멸할 것이다.

하지만 밀어붙이면 당장 네 목을 칠 수 있었음에도, 몇 날 며칠을 그냥 보류하기만 했던 것은. 그날 너도 네 약혼자처럼 죽이지 않고, 그저 감금하기만 했던 것은. 사형을 결국 귀양으로 번복해 너를 저 먼 국경 언저리에 보내버린 것은,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남은 마지막 미련이었을까.

라칸. 나는 이제 와서도 너를, 살리고 싶은 걸까.

깊고 깊은 이 공포와 증오 속에서도, 나는.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는 걸까.

* * *

사람이 당황하면 말하는 방법을 잊는 경우가 있다던데, 저에게는 이 순간이 그랬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떠한 변명도, 사죄도, 살려달라거나, 아예 죽여달라는 청조차도.

라넌큘러스 폐하는 덤덤하게 메리골드 전하의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감도 안 잡히는, 흔들림 없는 눈이었습니다. 감정이 전혀 없는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감정이 너무 많아 무엇도 표출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네게는 그의 모습이 슬퍼 보이나?”

라넌큘러스 폐하가 다시 물었습니다. 긴장한 채로 저는 마른 입술을 축였습니다. 말이 헛나왔다고 즉시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차마 거짓을 고할 수 없었습니다.

폐하는 웃으셨습니다. 진정으로 유쾌해서 웃는 게 아니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기에, 저는 가만히 입을 닥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웃던 폐하는 이윽고 입을 여셨습니다.

“네가 나보다 낫네. 난 아직도 그가 무슨 의도로 그 모든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무슨 생각으로 그날 나를 체포했는지. 무슨 생각으로 스바로그를 죽였는지. 무슨 생각으로 왕국과 백성을 배신했는지. 그 모든 일이 있고 난 다음에야 무슨 생각으로 내 손에 순순히 죽어줬는지.

말에서 격식이 아예 사라진 것이 마치 혼잣말과 같았기에, 저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거의 금기처럼 여겨왔던 주제를 가볍게 꺼내 드는 폐하의 모습은 너무나 견고해 보여, 정말로 강한 분이시구나, 그리 여길 때.

라넌큘러스 폐하가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저를 마주 보는 그 하늘색 눈동자엔 흠집 하나 없었지만, 어쩐지 유리처럼 빛나고 있는 착각이,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깨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눈을 깜빡이자 다시 굳건한 벽이 되어, 잘 못 봤나,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인가 보네. 그리 주저할만한 비밀도 아닌데. 1년이라도 황궁에 드나든 귀족이나 사용인들은 잘 아는 이야기야. 어때, 신입 서기. 너도 들어볼래?”

미천한 저에게 선택지라도 주시겠다는 듯, 폐하는 팔짱을 끼고 기다리셨습니다. 머리가 핑핑 돌고 있어 제대로 나열된 문장을 꺼내는 것이 무리였던 저는 간신히 고개만 다시 끄덕였습니다. 폐하는 피식 웃고 곰곰이 기억을 되짚듯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내가 메리골드에 의해 감금되기 전, 알테라 측 국경으로 장기 파견을 떠났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한 반년 정도 수도를 떠나 있었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서찰 하나 제대로 주고받기 힘들었지. 그 때문인지 수도로 귀환하는 날까지, 아무런 느낌도, 언질도 받지 못했어. 수도로 발을 들이자마자 체포되었을 땐 당황했지만, 그저 무언가 오해가 있었나보다 싶었지.

검을 뺏기고 감옥에 던져질 때까지, 크게 반항하지는 않았어. 메리골드와 얘기할 수만 있다면 쉽게 오해가 풀릴 거라 믿었거든. 몇 번이나 그를 알현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는데도 돌아오는 건 침묵밖에 없으니,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했어.

날 찾아온 건 비올레 아스포델이었어. 만나본 적 있으려나? 긴 검은 머리에 오드아이. 내 애인이라고 칭하는 게 더 빠르려나. 아무튼, 그가 감옥으로 찾아와 다짜고짜 전해준 소식이 스바로그가 처형될 거란 이야기였어. 말이 돼? 당장 헛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냈지. 스바로그만큼 청렴결백하고 왕실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가 반역죄로?

그날 저녁, 내 약혼자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어. 본보기로 삼을 생각이었는지, 허튼 생각 말라는 의도였는지, 갇혀있던 날 끌고 나와서 처형식을 보여주더라고. 구속구를 채운 채로 질질 끌려 나왔을 때부터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지만, 몇 날 며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터라 저항을 못 했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국민을 지키고 싶다는 다짐이, 힘이 없으니 그저 허무한 말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내가 그때 바로 무고한 이에게 오명을 씌운 메리골드의 죄를 묻겠노라 선언했다면 좋았겠지만, 창피하게도 한동안 충격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 그만큼 얌전하고 다루기 쉬운 죄인도 없었을 거야. 그런 나에게 현실을 일깨워준 건 프레이에 메린트였어. 스바로그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자, 메린트 후작 본인이지. 아들의 죽음에 책임을 지라, 냉정하게 고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

맞아, 죄는 메리골드의 것이지. 하지만 책임은 나에게도 있다는 걸 인정해. 지금 돌이켜보면 파견을 떠나기 전에도, 그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거든. 이유를 캐묻든, 멱살을 잡든. 왕이지만 동시에 내 쌍둥이였으니 내가 나서서 뭐라도 했으면. 스바로그는 살아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아무리 후회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 그 얘긴 거기까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파체니아 도시동맹과 전쟁이 재발해 난리도 아니었어.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지,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지, 제대로 된 사령관도 없어 패배하길 반복하고, 국경은 점점 밀려나지. 그 참혹한 광경을 내 눈으로 보고서야 결심할 수 있었어. 그가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면, 그걸 막아서는 건 내 몫이라고.

나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저택에서 벗어나 직접 메리골드와 대면하기로 마음먹었어. 그가 날 찾아오길 거부한다면, 내가 그에게 갈 수밖에. 다행히 로코리엘 앰버라이트의 조력도 있었고, 나를 지지해주는 기사단원들도 남아있었고, 전쟁 당시 국경에 맺어둔 인연도 있었기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

황궁, 그때는 왕궁으로 불렸었지. 왕궁에 들어서자마자 쇠락하는 왕도 왕이랍시고 고집스레 그의 편에 남은 귀족과 기사단원들과 부딪혔어. 어쩌면 메리골드를 지지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더 싫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쿠데타의 날이야. 아마 기록에서 지겹게 봤을 테니 세세한 얘기는 넘어가지.

난 바로 그의 침실로 향했지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어. 비상시 대피용 비밀 통로 하나로 미리 빠져나갔겠구나 싶었지. 왕실 도서관 부근에서 검은 깃털을 하나 발견하고, 옛 알테라 왕녀의 호위가 검은 깃털을 가진 새 혼혈이라는 것을 떠올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 곧장 알테라로 향하는 가도를 봉쇄하라고 명령을 내렸지. 한창 늦은 지시였지만 말이야. 이런 면에서 예언 능력자들은 대적하기 껄끄럽더라고.

그 후로 내가 왕위에 올라 알테라와의 전쟁을 종결시켰지. 알테라 왕국 함락에 대해선 너도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할게. 그곳에도 그는 없었어. 그의 소식이 들려온 곳은 뜬금없게도 키리오스 신정국의 엘로하임 신전이었어. 내게 직접 찾아와달라는 전언까지 남겼지.

그리고 나머지는 알다시피. 나는 그의 소원대로 엘로하임 신전으로 그를 찾아가서, 내 손으로 그를 죽였어. 왜 그랬는지, 무슨 연유로 모든 일을 벌였는지 물었는데도 끝까지 답을 주지 않더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직도 모르겠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뭔지 알아? “이렇게 된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네. 미안했어, 라칸. 나를 용서하지 마.”

…저질러 온 용서받지 못할 모든 일을 뒤로하고, 그는 무슨 뜻으로 그런 유언을 남긴 걸까.

라넌큘러스 폐하의 회상이 끝났습니다. 한동안 폐하도,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의 진심을 모르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듯, 폐하의 서늘한 눈길은 메리골드 전하의 초상화에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아, 메리골드 전하. 전하는 그래도 마지막 유언을, 마지막 진심을. 그 뜻이 닿지는 않았을지언정.

라넌큘러스 폐하에게, 전하실 수 있었나요.

“폐하는… 폐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용기인지 만용인지 모를 무모함에 꺼낸 물음이었습니다. 폐하는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 눈썹을 위로 휘었습니다. ‘내가 그에 대해?’ 되묻는 말에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폐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해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는 그릇된 선택을 했고, 그에 따라 정당하게 폐위되었어. 그의 동기는 모를지언정, 그의 행동은 지탄받아 마땅하고, 절대 용서받아선 안 돼. 그가 저버린 책임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고통받았는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라. 라예스 메리골드 솔레유는 왕으로서 잘못된 길을 걸었어.”

그러니 나는 절대로 그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고, 그와는 다르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국민을 지키는 길을 걸을 것이라 맹세했어.

폐하의 눈에 거짓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시선이 여전히 그 초상화에 머무르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메리골드 전하의 일기에서도 닮은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었지요. 악몽의 주축에 라넌큘러스 폐하가 있었음에도 폐하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메리골드 전하의 미련.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메리골드’란 거리감 있는 호칭으로 부르면서도, 그가 마지막까지 비밀로 품고 간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라넌큘러스 폐하의 미련.

그날 밤, 방으로 돌아온 저는 드디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숨겨둔 곳에서 일기를 꺼내, 몰래 품에 감춰 밖으로 나갔습니다. 인기척이 없는 골목까지 가서, 가지고 나온 등불에 종이 한 장, 한 장. 전부 재로 변해 바람에 사라질 때까지.

저는 홀로 조용히 일지를 태웠습니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잘못된 운명이었던 걸까.

우리가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고, 평생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까.

하지만.

네가 있었기에.

태어날 때부터 너와 함께였기에.

우리 둘이서 하나의 장미꽃을 싹 틔우고 피워냈기에.

너만큼은 끝까지 이 어둠을 몰랐으면 한다.

너는 나와 달리, 빛나는 길로만 가기를 바란다.

* * *

짐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기숙사에 들어와 생활한 게 반년 남짓밖에 안 되었고, 이것저것 물건을 모아두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요.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 깊게 캐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수님은 잘 가란 인사 하나 없으셨고, 인사부는 형식적으로 기록에 남길 사유만 물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올 것이 왔다는 듯한 분위기였지요. 해가 지날수록 초능력이, 초능력자가 우대받는 사회에서 저 같은 비초능력자가 도태되는 것은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었을지도요.

조금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황궁을 떠났습니다. 등 뒤에 시선이 느껴져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잠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인 것은 아마 착각이었겠지요.

라넌큘러스 폐하. 폐하는 그날의 대화도, 저라는 서기가 있었다는 사실도 머지않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겠지요. 제가 계속 황실 서기로 남았더라도, 다시 폐하의 용안을 가까이서 뵙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수로라도, 만에 하나라도, 제가 폐하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침묵하고 떠나는 것뿐일 테지요.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도, 어둠도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그분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으니. 메리골드 전하 역시도 폐하가 빛 아래에서 걷기를 소원하셨으니.

서로를 사랑했던 만큼 증오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끝까지 그 사랑하는 마음을 전부 버릴 수 없었던. 그렇기에 어떤 길을 선택할지라도, 서로 다른 길을 걸을지라도, 지독하게 닮을 수밖에 없었던, 가여운 분들이여.

황제 폐하, 그 태양의 빛 영원하소서. 져버린 푸른색 장미의 눈물과 후회는 전부 제가 안고 갈 터이니.

황제 폐하, 그 누구보다 화려한 장미시여. 부디 언제까지나 붉은색으로 피어나소서.

* * *

미안해, 라칸.

나를 용서하지 마.


Written 20-01-29 / 18691자 (14001)

Rewrite 21-09-19 / 20420자 (15381)

본 로그의 캘리는 햄쭈(@hamjjju)님, 그림은 개구락찡(@gagurak)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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