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어

[갈로크레] nothing better than past

"그것이 바로 나의 주요 그대의 지배자이다.¹"

Also by 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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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7

엔딩이후 날조

과거사도 날조 

모든게 날조입니다

적폐해석 있음

만약의 if

노동요 Yann Tiersen - Comptine d`un autre ete - l`apres-midi

후반부는 Superfly 氷に閉じこめて

갈로 티모스 X 크레이 포사이트

nothing better than past 

: 사람들은 언제나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지

Galo Thymos X Kray foresight

   기적이 일어난 이후로 약 반년, 세계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멸망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놓고 무슨 말이냐 싶지만 사람들은 윤택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버니쉬가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혐오와 증오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열악한 경제, 생활, 물품, 인프라, 무너진 힘의 균형 갖가지 요소가 세계를 그리고 프로메폴리스를 조악하게 만들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크레이 포사이트를 원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크레이 포사이트를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그토록 비윤리적인 짓을 저지른 자를 원한다는 것이 비이성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1차적으로는 크레이 포사이트라면 열악한 조건에서도 적절한 대처로 또다시 재건을 이루어주리라는-그야 경력직이니 더 잘하겠지 싶기도 했을지 모른다- 믿음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사람들은 그를 동정했다. 비록 대부분의 인류가 버려질뻔 했고 수많은 버니쉬들이 비인도적인 취급을 받았으나 그것은 인류를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며, 기존의 시민들이 이해한 탓이었다-아직도 버니쉬들의 태반은 시민으로서 등록되지 못했다-. 그중에 버니쉬에대한 비공감 역시 한몫 하였다. 버니쉬가 그저 인간이었고, 고통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에 의한 촉발로 멸망할 뻔한 것 역시 사실이었기에-비록 그들이 상황에 내몰렸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최후의 선택따위의 이야기를 했다- 크레이 포사이트의 행위가 얼마나 잔인했던가 그런것이 와닿지 않았다.

그들역시 사람이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슬퍼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엔 너무나 긴 세월동안 버니쉬는 인간이 아닌 재해였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 역시 크레이 포사이트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조차 크레이 포사이트의 필요성을 인정하곤 하였다.

크레이 포사이트는 그토록이나 빛나고 사랑받는 자였다.

사랑이 죽음조차 이겨내듯이 사람들은 크레이 포사이트가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를 인간취급 하는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역시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대로 돌아가는 냉소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찌되었던 시민들은 점차 강하게 요구했고 임시로 사람들을 이끌던 자들은 결국 그에 굴복했다.

크레이 포사이트, 그는 이제 앞으로는 없을 예외가 되어 구속에서 풀려났다.

뒤늦게 인류의 구세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수완을 발휘하였다.

물론 그 별명은 멸칭이기도 했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넘어가는 것은 우스울정도로 가벼운 취급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부진을 비웃듯 크레이 포사이트는 사태를 해결해나갔다. 누군가는 마법을 부리는게 아니냐 할정도로 말끔한 일처리였다. 또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게 아니느냐는 의심까지 있었지만 크레이가 그토록 쉽게 복구와 개선을 해나가는 것은 그가 프로메폴리스라는 도시를 사랑한 까닭이다.

그는 프로메폴리스와 그 근방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기억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라앉은 기억은 이미 한 번 이해했다면 연쇄적으로 떠오르기 마련이었고 사건이후 많은 것이 소실되고 부숴지고 변형되었지만 변치 않는 것들이 있었다. 지형, 기후, 자원, 지식, 그리고 사람들따위. 죽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남아있었고 그들의 또 대부분은 크레이에게 크고 작은 호의와 부채감, 갚지 못한 빚 따위가 있었다.

비록 크레이가 그들을 버리려 했다고 해서 그 은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갈로 티모스가 크레이 포사이트를 여전히 좋아하는 것처럼.

갈로 티모스는 크레이 포사이트가 석방된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렸다. 심지어 3일전부터 자리를 맡는다며 성화를 부렸고 그를 동료들과 리오는 비웃었지만 갈로는 작은 문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며 거봐, 하는 얼굴로 웃어보였다.

프로메어가 사라지고부터 지구의 기후는 정상화되어가 입김이 나오는 기온에 익숙치않아 달달 떨면서도 갈로는 들떠있었다.

크레이 포사이트.

갈로 티모스의 영웅.

영웅이었던 사람이라 해야할수도 있지만 갈로 티모스는 약 반년하고도 삼개월간의 고민 끝에 그는 여전히 크레이 포사이트를 좋아한다고, 갈로 티모스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 첫맺음은 거짓으로 맺어지고 그동안 그가 내내 갈로 티모스를 싫어했다고 하더라도 갈로 티모스가 갈로 티모스로 자라난 것은, 크레이 포사이트의 존재 덕분이었으니까.

세간에서는 갈로 티모스를 영웅이라 부른다. 그에 들뜨면서 자랑스러워 하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크레이 포사이트가 없었더라면 갈로 티모스는 그저 한마리의 바보였을거라고.

자기비하가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언제나 헛소리 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갈로 티모스는 언제나 냉정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뜨거워지지 않게, 그러나 자유롭게.

그는 언젠가의 대화를 내내 기억하고 떠올렸다.

언제였더라, 학교에서 친구와 싸운 적이 있었다.

학교는 당연하게 크레이 포사이트를 불러냈다.

관례에 가까웠지만 유명해지던 당시, 크레이 포사이트는 갈로 티모스의 법정대리인과 마찬가지인 취급을 받았으니까.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며 그러나 사과를 하지 않던 고집스러운 갈로를 데리러 온 크레이는 갈로를 대신하여 사과하고 갈로와 싸운 녀석에게 사인을 해주고 같이 사진까지 찍어주었다. 그동안 한쪽 구석에 처박혀 발끝만 보고있던 갈로는 제 발끝과 발끝을 툭 마주쳐온 크레이의 습관, 쉽게 바닥에 무릎을 대며 아래에서 자신과 시선을 맞춰주는 크레이의 다정함에 가슴속을 채웠던 저열한 불평-왜 크레이는 사과를 하는거지? 나쁜 말을 했어. 왜 크레이를 부르는 거야? 크레이는 아주 바쁜 사람이라고, 크레이는 왜… 같은 것들-이 스러져가는 것을 느꼈다.

 "갈로, 남을 때리는건 안된단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화해해야지? 사과하렴."

그 말에 다시 가슴속에 무언가 뭉쳐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과를 하고서, 친구도 미안했다고 하며 붉어진 얼굴을 보고서 갈로는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을 수 없이 화가나서 싸웠고, 이어진 상황에 반발했지만 그 속 어딘가에선 친구를 아프게 한 자신이 싫었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온화히 이루어지는 대화 뒤로 부끄러움에 시달리던 갈로는 다정한 목소리-"돌아가야지, 갈로."-를 따라가면서 갖가지 감정에 시달렸다. 크레이는 화를 낼까? 크레이가 나를 나쁜 아이로 보면 어쩌지. 나는 왜 그런 짓을 한걸까.

두려움, 수치심, 후회 그런 것들이 둥둥 떠다녔고,

 "갈로, …아이스크림 먹을래?"

그러나 그 한마디에 당연하게 네! 라고 외치고서 그 스스로의 단순함에 더욱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가벼워진 기분은 무엇 탓이었는지, 사실 지금의 갈로 티모스도 알지 못했다.

아이스크림에대한 기대감이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다정한 크레이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어색해하면서도 주어진 소프트콘을 크게 먼저 한입 베어물고 입안에 퍼지는 부드러운 단맛에 저도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가도 속을 찰랑이는 불안감에 갈로는 흘끗 크레이를 보았다

공원을 바라보는 크레이의 옆얼굴은 언제나와 다를 바 없었고 그러나 노을녘때문인지 아니면 갈로가 처한 상황때문인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있었더니 흘러내린 크림이 손등을 적셨다. 크레이는 당연하다는듯 알아채 손수건으로 닦아내주었다. 나 이제 어린애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자 머금는 미소 앞에서 갈로는 또 조용해졌었다.

 "…갈로."

살짝 숨이 섞인 목소리. 다정한 부름에 알 수 없이 겁이 났다. 나같은 말썽꾸러기는 필요없다고 하면 어쩌지? 겁이나 허둥거리던 갈로는 멍청한 짓을 했다.

그러니까, 크레이의 말을 막기 위해 그의 아이스크림을 크레이의 입에 갖다 박은 것이다! …당연히 크레이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녹아서 뚝뚝 떨어지는 점도짙은 액체에 갈로는 이젠 아예 머릿속이 세었다.

끝장이다.

그런 절망적인 울음이 머릿속을 멤돌았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까맣게 암전되듯 좁아졌던 시야가 다시 넓어졌다. 처음보는 얼굴로 웃던 크레이는 또 익숙한듯, 갈로의 탓에 들고다니던 휴지를 꺼내 얼굴을 닦아내었다. 금세 말끔해지는 모습을 보며 갈로는 언제나 크레이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부서진건 다시 고치면 돼. 더러워진건 닦아내면 돼.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크레이는 그런 말을 곧잘 했다. 갈로는 곧잘 뭔가를 부수거나 넘어트리거나 지저분하게 했었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완전히 사고를 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때마다 크레이가 봐준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순간에 들려준 말 덕분에 갈로는 무언가를 부수고도 꼭 겁먹지는 않았다. 지금의 누군가 듣는다면 원흉은 너냐! 라는 말도 들을 법 했다. 하지만 갈로 티모스는 그래서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갈로를 보살펴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보육원등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갈로의 의지가 완고했고 크레이가 갈로를 보살피기로 하였기 때문이었지만 그는 너무 바쁜 사람이어서, 갈로와 한가지 타협을 해 그에게 보호자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보호자는 그역시 버니쉬에게 아이를 잃은 사람이었다. 크레이가 추진한 사회적인 멘탈케어 프로그램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로인해 양자결연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대염상 이전 프랑스라는 나라에 있던 팍스, 시민연대계약 이라는 제도와 비슷한 양식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보다는 더 넓은 의미로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을 만들어냈고 이 역시 사람들에게 많은 치유를 안겨주었다. 그로서 새로운 가족을 찾는 사람도 그저 지원을 받았을 뿐인 사람도 다양했다. 갈로를 돌보는 사람은 여전히 크레이에게 훨씬 깊은 친애를 느끼는 갈로에게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상대가 바로 그 크레이 포사이트였고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편이 더 편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경제적인 지원에 만족하기도 했고.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갈로 역시 그를 좋아했다. 다만 그건 친구에 조금 더 가까운 관계였고 갈로는 종종 그의 말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어째서 일까. 크레이의 대부분의 말은 갈로의 영혼을 울렸다.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다정함? 아니면, 그가 갈로의 영웅이라서?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갈로 티모스는 종종 그에대해 생각했으나 결국 정답을 찾진 못했다. 어쨌건 그런 것들이 갈로의 대부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라난 갈로는 그런 자신이 꽤 좋았다. 더 나아지고싶다는 향상심은 있었지만 적어도 그 자신 그대로의 갈로 티모스 자신이 좋았다. 그날의 말도 그런 말중에 하나였다.

 "이제 내가 싫어졌니?"

 "아뇨!"

 "사과한게 싫었던것 같은데."

 "사과하지 않았으면…더 후회했을 것 같아요. 크레이 덕분에 알았어요!"

이제와 떠올려 보면 그때 크레이의 표정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자신을 대견해 하는 줄로만 알았지.

 "…아아. 똑똑하구나 갈로. 하지만, 만약에 다음에 또 같은 말을 아니 그보다 더 나쁜 말을 들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와 떠올려 보면, 그는 자신이 꺾이길 바란 것도 같았다. 멍청한 소리를 내뱉고 스스로 지켜내지 못해서 자기모순에 무너지길 바랐다던가. 하지만 그는 크레이 포사이트가 기른 갈로 티모스였다. 

 "적어도 때리진 않을 거에요. …또 싸울지도 몰라요. 하지만…크레이가 알려줬잖아요. 부수면 고치면 되고, 더러워지면 닦아내면 된다고. 그러니까 싸우고서, 반드시 화해할거에요."

그 자신이 한 말이지만 꽤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해 웃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리 다를 바 없는 생각이었다. 완전연소로 완전소화! 갈로의 말버릇은 이때쯤부터 생겨나기도 했다. 연소되지않은 감정이 가슴속에 남아있으면 어떻게 될 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

짧은 침묵. 노을이 낮은 건물들 아래로 지고있었다. 창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찔러서 갈로는 한 순간 눈을 감았고 그 사이 크레이의 손이 닿아 갈로의 손에 남은 크림들을 닦아내는 감촉을 느꼈다.

끈적거리고, 어쩐지 더웠다.

 "갈로. …너는 강한 아이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강하지는 않아. 언제까지나 강한 사람도 있을 수 없지. 너도 언제든 나쁜 말을 하게 될 수가 있어."

갈로는 순간 그러지 않을거라고 말하고 싶었고 햇빛에 저항하기위해 눈을 떴지만 결국 다시 감고 말았다.

 "그러니까. 좀 더 용서하고 좀 더 냉정해지고, 좀 더…다정해지렴. 싸우고서 화해하는 것도 좋아. 하지만 다툼은 결국 마음에 상처를 남긴단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고 사과하더라도 약해지는 순간에 생각나기도 하겠지. 내뱉은 사람도 들은 사람도."

갈로는 그때 크레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진정되곤 했고 그러나 지금은 약간의 후회 역시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때 크레이의 표정을 봤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랬다면…크레이를 좀 더 알고 그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헛된 생각을 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잠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추위도 잊던 갈로는 그러나 작은 변화를 곧장 알아차린다.

회색의 기다란 벽 가운데에 자리집은 작은 문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지만 갈로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하던 가드들은 긴장한 얼굴로 갈로의 눈치를 보다가 그의 앞도 막아섰지만 갈로는 그에 저항하기보다 고개를 쭉 빼서 시선을 고정했다.

약간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진다.

유독 흐리던 날씨 탓에 선명하지 않았고 공기에 섞인 먼지가 부유했다. 열린 틈으로 공기가 흘렀고, 문틈으로 흐리게 보이던 실루엣은 빛을 받아 점점 선명해져간다. 언제나 반짝거리던 금빛은 흐린 빛을 띄었지만 그럼에도 갈로의 심박수는 늘어만갔다. 이내 발끝이 문을 넘어서고 경계를 넘어서 바깥으로 나온다. 결국 갈로는 참지못하고 가드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크레이에게 뛰어갔다. 가드들은 당황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들은 갈로를 막기보다 열광하고 야유하고 각종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에게로 집중했다. 그들 역시 은연중엔 갈로를 특별취급 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감동의 재회. 가 되어야 했지만. 갈로는 차마 바로 크레이를 끌어안지 못했다. 뇌리에 남아 떠도는 말들이 있었다. 크레이를 빼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갈로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기대감, 원망, 그러나 기쁨따위가 얽혀 뭉개졌다. 그러나 갈로는 두 손을 뻗었다. 언젠가 처럼, 아직 어렸을 때 처럼. 떨면서도 손을 내밀었고 크레이는….

 "잘 지냈니, 갈로."

크레이는 쉽게 갈로의 손을 잡아주었다. 갈로는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을 느꼈다. 한순간 기쁘게 올라갔던 기분이 이해하지못할 불안감으로 추락하였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 결국 뚫린 가드들 틈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크레이는 손을 놓고 공무원들의 안내에 따라 차 안으로 들어갔다.

소란에 귀가 멀 것 같았다. 코끝에 차가운것이 닿아 그제야 하늘을 보니 무언가 흰 것이 내리고 잇었다. 뒤늦게 그게 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로는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것에 쉽게 알아차릴 수야 없었다.

프로메폴리스는 30여년 만에 겨울을 맞이하였다.

어설프게 준비된 방한장비나 도구들따위에 불안이 일었지만 크레이 포사이트는 예상이라도 한 듯이 그에 대처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이주를 염두에 두었다 하였지만 그것만은 아니었기때문에 예상한 것이 맞았다. 그 역시 개발을 하면서도 계속, 계속 어떻게든 많은 이를 살리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할 수가 없어서 되지 않아 포기했던 방식이었을 뿐이었다.

기후의 변화에 사람들이 대량으로 얼어죽을 것을 쉬쉬하던 의회는 침묵하였다.

다행히 프로메폴리스의 기후는 겨울에 건조하지 않은 편이었다. 덕분에 안개는 자주 꼈지만 방화의 위험성은 줄어 갈로 역시 교대로 방치된 사람들의 구원을 하기위해 돌아다녔다. 반은 순찰이기도 했다. 반발하던 전 버니쉬들역시 살기위해 프로메폴리스로 몰려들었고 정상적으로 등록된 시민들과 달리 지원을 받기 어렵기도 하고 아직도 불안감과 공포를 지닌 전 버니쉬들에게 다가가 지원을 하기에 갈로는 가장 적임자였다. 리오 역시 적합했지만 그가 전 버니쉬들을 선동할 것이 두려운 의회가 금지하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게라와 메이스도 같이 지원에 나섰다. 그들도 두려워하긴 하였으나 의회는 그들의 그릇이 리오만하진 않다고 여긴 모양이었고-그에 게라와 메이스는 날뛰려다가도, 그들 역시 버니쉬에게의 헌신과 공동체 정신따위에 익숙했기에 참았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어른이었다-. 그 외에도 몇몇 인원이 지원을 했지만 도시의 외곽으로 나오면 사람은 있는 것 같았지만 거리에 활기가 없었다. 곳곳에 지어진 천막과 불법가설건물이 늘어가는 걸로 얼마나 사람이 모여드는지를 가늠해볼 뿐이었다.

간간히 피어있는 모닥불을 보며 갈로는 문득문득 그 불을 꺼버리고 싶었지만 이젠 그에도 익숙해졌다. 오토바이에 딸려있던 지원물품 캐리어를 퉁퉁 두드리자 어디에 있던건지 삼삼오오 몰려드는 사람들과 그들을 줄세우는 몇몇 이들. 난민과 다름없던 그들의 눈빛이 밝아져가는 것과 이제는 어린아이들도 갈로의 근처를 기웃대는 것에 익숙해지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 한켠에서는, 갈로는 내내 떠올렸다. 크레이는 분명 화내지 않고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다정한 목소리를 내어주었다. 그런데 갈로 그는 무엇을 두려워 했던가? 그 직후 크레이 역시 바쁜 일정에 시달리기도 했고 이제는 크레이가 원한다고 해서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게 아니었기도 하고…그런 변명을 주워섬기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으나 갈로도 알고 있었다. 도시의, 아니 세계의 영웅 갈로가 요구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크레이 포사이트와의 시간을 내어주리라. 그렇다면 이 만남의 지연은 온전히 갈로가 원한 지연이라는걸.

적성에도 맞지 않는 생각을 계속 하던 갈로는 산너머로 넘어가는 햇빛이 눈을 찔러 눈을 감았다 뜨며 결심했다. 그래. 더 생각해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부딪혀보자! 하고.

그렇게 위세좋게 결심했지만 크레이의 숙소 문앞에 서자 갈로는 손 안쪽이 땀으로 축축한 걸 보고 옷에 벅벅 긁어 닦아내었다가 주름진 옷을 정돈하고, 그런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에 자꾸 크레이가 그를 내치던 말들이 빙빙 돌았다. 갈로의 안에도 있는 약한 마음이 다음에 올까?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도 이해못할 불안감이 명치를 두드려 결국 문고리를 잡고 열면 크레이와 눈이 딱 마주쳐 저도모르게 갈로는 문을 다시 쾅 닫아버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부끄러움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이번엔 조심히 문을 열었지만 원래 크레이가 있던 곳에 크레이가 없어 갈로는 깜짝 놀라 안으로 들이친다. 그러나 멀지않은 곳에서 풍기는 익숙한 냄새에 들끓었던 속이 가라앉았다. 주방인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도 자연히 걸음을 옮겨 따라가면 자연히 익숙한 등이 보였다. 그 앞에서 무얼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아직도 좋아하니? 코코아."

 "나 이제 어린애는 아니…지만, …좋아해."

크레이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굴었다. 아니 조금 다른가. 오히려 전보다 다정했다. 갈로만이 안절부절 못하고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마치 그런 폭언은, 증오는 없었던 것처럼 굴어서 갈로는 그 안온함에 젖어들고만 싶어졌다. 작게 열어둔 창문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물내음, 코코아와 커피의 향이 공간을 채웠다. 갈로는 어설프게 서성이다가 크레이가 거실의 소파에 앉아있으렴, 하는 한 마디에 또 망설이고 그러나 착한 아이처럼 말을 들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그에게 더이상 순한 아이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하였으나 다정히 구는 크레이의 앞에서 갈로는 어쩔 수 없이 잦아들었다. 깨달아버린다. 갈로 티모스는 역시 크레이 포사이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조금이라도 더 이 안온한 분위기를 다정한 목소리 속에서 있고 싶다고. 차라리 싸우는 도중이거나 크레이가 갈로를 냉대했다면 어떻게든 강한 척을 하며 네녀석이라던가 네놈이라던가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러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갈로가 언제나 크레이를 갈망하는 탓도 있었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크레이는 갈로에게 동경의 대상이자 줄곧 키워준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코코아와 약간의 간식을 가져온 크레이는 갈로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갈로의 말을 기다리는 듯 했다. 시선은 갈로에게 닿지 않았으나 갈로는 그 기다림을 느꼈다. 그러나 사실 할 말이 정리 된 게 아니었어서, 무슨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결국 갈로 역시 코코아를 홀짝였다. 단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까지 공간을 채워 갈로는 차라리 발사된 기어 안에 있는게 더 편할거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건 크레이였다.

 "…그러고보니 저번엔 대답을 못들었구나. 잘 지냈니, 갈로?"

 "……."

부드러운 목소리. 익숙한 크레이의 목소리. 저번에 느꼈던 위화감은 착각인것만 같았다. 그러나 심장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뛰었고 뱃속이 차가웠다. 속에 무언가가 뭉쳐갔고, 그러다가 목을 무언가가 간지르는 기분과 또 다시 머릿속을 울리는 말에, 나쁜 말을 해버릴것같아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이제는 어색함을 넘어서 불편한 침묵 사이로 거세지는 빗소리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또 울려퍼진것은 크레이 포사이트의 목소리였다. 그보다 앞서 테이블에 툭 놓이는 커피잔에서 나는 소리가 둔탁하였다.

 "……, 이제와서 내가 죽지 않은게 아쉬워졌니?"

 "뭣,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크레이!" 

그 소리에 얻어맞은 기분으로 결국 갈로 역시 말을 뱉어내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이해해. 당연하겠지. 네 가족을 빼앗고, 인생을 빼앗고, 평생을 존경한 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나같아도 죽이고 싶어했을거야."

그런 말을 하면서 크레이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었다.

갈로는 문득 그 영상을 떠올렸다. 그가 말하는 이해가, 무슨의미인지 다 털어내라고 하고싶었다.

그간은 크레이에대해 알지 못하는게 있어도 괜찮았다. 모든걸 알아야만 가족인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갈로는 이 순간 크레이의 모든것을 알고싶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갈로. …내가 죽었으면 좋겠니?"

덜컥 치밀어오른 불안감에 결국 갈로는 손을 내뻗어 크레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동안의 불안의 원인을. 갈로는 크레이의 팔을 움켜쥐는 순간 견딜수없이 두려웠고 안도했다. 갈로가 힘주어 건드리면 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손안의 체온이 여전히 따뜻하다는 사실에. 붙잡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크레이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짓고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적어도 갈로의 생각에는 그랬다. 언제 갑자기 사라져버릴지 모를것 같았다. 곧 죽어버리더라도, 괜찮아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고자 하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정말로 죽어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런 생각을 깨닫자 손을 붙잡는 것으론 모자랐다. 충동적으로 움직여 끌어안자 바닥으로 테이블이 엎어지고 잔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갈로는 크레이를 붙잡은 팔을 놓고싶지 않았다.

 "절대로, 절대로 아니야."

불안정한 목소리. 그게 어릴때와 다름 없다고, 크레이는 생각했다. 이제 막 만났던 시기에는 더욱 그랬다. 갈로는 크레이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굴었다. 잠깐 잠들어서 어딜 다녀오면 정말로 숨이 멎을것같이 울고있고 불안에 떨어서 결국 계속 붙어있었던 시절의 갈로 티모스와 지금의 갈로 티모스가 거의 같다고. 그때엔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건지…크레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크레이가 알아서 사라진다면 좋은게 아닌가? 프로메폴리스의 앞날 때문에 불안한걸까? 아니면 구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싫은걸까. 그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으나 무엇하나 붙잡지 않았고 대신하여 익숙하게 손을 들어 갈로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흠칫 놀랐으나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진정되는 기색도 없었다.

 "…갈로."

부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텐데도 갈로는 고집스럽게 되려 힘을 주었다. 조금 답답했으나 또 같은 의미로 부르지는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나는, 당신도 구하겠다고 했잖아. 왜…도망칠 생각 뿐인거야. 왜, ….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

목소리에 섞이기 시작한 울음에 크레이는 한결 더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내내 어딘가 붕 떠있던 감각이 선명해져간다. 곤란함과 함께 불쾌함이 스물거렸고 또….

어느새 크레이는 도닥이던 손을 멈춘다. 갈로는 눈물을 멈추려 했지만 결국 훌쩍이는 소리를 내면서도 이제는 아예 으스러트릴듯이 끌어안았다.

 "크레이. …당신을 전혀 원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거야. 하지만 말야. 당신은 나의 영웅이었어. 날 불속에서 구해줘서가 아니라. 당신이 다정하게 대해줘서. 아아, 물론 당신은 그게 다 가짜라고 했지. 내내 날 미워했다고. 하지만… 하지만 말야."

갈로는 떨면서 정말정말 떨어지기 싫다는 내색을 하면서도 용기를 내 떨어지고 얼굴을 마주한다. 굵직한 눈물을 떨어트리면서도 이번엔 제대로 크레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제대로 직시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신이 해준 말이. 그 순간들이 나를 구했어. 나를 만들었어. 이 갈로 티모스를, 나를 만든건 당신이야.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것도 당신이야."

그리고 웃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건 잘 되지 않았다. 보란듯이 웃어주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하는 동안 쌓인 불안이 그리고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언젠가 그가 울면 떠나지 못하던 크레이가 생각나서. 차라리 볼썽사납더라도 그래서 크레이가 떠나지 않는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결국 눈물을 멎으려 하지 않았다.

불도 분노도 완전히 연소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물과같은 감정은 어찌해야할지 갈로는 알지 못했기에 쓸려다녔다.

 "…있잖아, 크레이. 나, 당신을 구해주고싶어. 그리고…."

갈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단어로 맺어지지 못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조급함에 내쫓기며 시달리며 휩쓸리면서도 갈로는 시선을 제대로 맞췄다.

 "떨어지라는 말이라던가, 사라지고싶다던가 하는 말 말고는 뭐든지 이루어주도록 노력할테니까.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좋으니까. 나를, 당신이 구해줘. 나는, 갈로 티모스는, …당신이 없으면 안돼. 아니 역시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당신을 구해줄테니까. 당신도 나를 좋아해줘."

좋아해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절박하였다. 갈로 티모스는 이내 깨닫는다. 크레이 포사이트의 말을 먹고 자라난 갈로 티모스는 크레이 포사이트가 없어진다면 평생토록 채워지지 못할 결핍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크레이 포사이트는…, 아직도 제대로 현실감을 거머쥐지 못하였으나 이제야 땅에 붙은 자신의 발을 깨달았다. 애원과도 같은 말에, 아니 갈로 티모스의 애원에 속이 좋지 않았다. 스스로에대한 역겨움에 토할것 같았다. 올곧은 시선에 질식할 것 같았다. 마치 고백같은 말들에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그러나 여전히 넓다란 소파에 앉은채로 갈로 티모스를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듯이 어디선가 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떨어져 피부위로 닿은 눈물이 뜨거운것도 같았다. 

….

크레이는 다시 쾅 닫혔던 문을 떠올렸다. 잠깐 내비쳤던 갈로의 얼굴을 보며 자연히 주방으로 향해 칼을 찾던 손을 떠올렸다. 당연하게도 칼붙이따윈 모두 치워두었던 탓에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적의 날, 인류의 구세주가 태어난 날. 모든 숙원이 이루어지고 드디어 불안하지 않은 평화가 찾아오고. 

크레이 포사이트가 더이상 쓸모없어진 날. 그가 견뎠던 모든 일이 쓸데없는 짓이 된 날. 그 이래로 모든것이 견디기 힘든 것이 되었어서. 더이상 죽음에의 갈망도 참지 않게 되기 시작하고 망가짐을 받아들이던 크레이 포사이트는 아직도 그에게 절망을 안겨줄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상관없을텐데. 갈로가 어떤 표정을 한다던가 어떤 말을 한다던가, 어떤 기분일지. 그에의한 평판을 신경쓰지 않아도 될텐데. 그럼에도 갈로가 그를 역겨워한다면, 그의 얼굴을 보는걸 싫어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가 없는게 나을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찾아온 추락감에 붙일 변명이 더이상 없는데도 존재하기에 그치고는 멍청하고도 미련하고 느리게 깨달았다. 크레이 포사이트는 갈로 티모스에게 없는게 나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유나 이득에 상관없이 그저, 단순하게. 갈로 티모스에게 크레이 포사이트라는 존재가 거부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었다. 

내내 증오하고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동시에 내내, 그에게 거부당하는 자신을 두려워했었다. 거부당할 바에야 미움받을 바에야 그 전에 죽어서 사랑받는채로 맺음 되기를 바라기도 했던 것이다.

크레이 포사이트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여전히 갈로 티모스는 그곳에 있었다. 또 눈을 감으면 이마가 맞닿았고 거기부터 열이 퍼졌다. 프로메어가 사라진 뒤 그를 내내 시달리게 했던 한기가 잦아들었다. 애원하듯이 자기를 봐달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스며들어서 몸속을 울렸다. 부유하던 정신은 조금 더 명확해져, 갈로를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거절하고 밀어내라는 양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크레이 포사이트는 이제 더이상 많은 것을 견뎌내고 좋은 사람인체를 하기 어려웠다. 사정관으로서,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고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는 멀쩡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 자신은 알았다. 그럼에도 밀어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인지 갈로를 위해서인지 그는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 못하는 것인지 하지 않는 것인지도. 그는 아주 조금, 하지 못하는것에 치우친다고 느꼈다. 입술을 적시는 눈물의 짠맛이 달게 느껴져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춘다. 붙잡은채로 떨리는 손을 느끼며 알게된다. 이제는 더이상 아무것도 견딜 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갈로를 위해서라면 조금 더 또다시 버거운 삶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갈로."

이름을 부르면 불안에 떨리는 눈동자가 사랑스러웠다. 그러고보면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갈로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걸 떠올린다. 누구나 사랑할법한 아이. 그런 단어로 갈로 티모스를 떠올린 것은 갈로 티모스를 질시하는 동시에 자신도 사랑해왔다는걸 받아들인다.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으며 알 수 없는 투지를 불태우는 눈 안쪽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동시에 어린시절부터 쭉 그랬듯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는 버릇마저 여전한것도, 역시 사랑스러웠다. 모든 생각의 끝맺음이 사랑스럽다로 맺음지어질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오래간 참아온 사랑은 에리스 알데빗을 비웃을게 아니었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어. 어디로도 가지않아."

그런 말을 하더라도 채 불안함을 지우지 못하는 눈은 낯설었다. 언젠가 갈로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다툼은 결국 마음에 상처를 남긴단다. 홧김에 내뱉은 말이고 사과하더라도 약해지는 순간에 생각나기도 하겠지. 내뱉은 사람도 들은 사람도 ' …라고 했던가. 한 번 새겨진 상처는 쉽게 갈무리 되지 못할 것이다. 믿던이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진 기억은 어쩌면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공들여 치료한다면 언젠가는 치유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크레이는 답지도 않게 낙관하였다. 열에 취한듯 갈로의 뺨에 입맞춤을 남겼다. 어린 시절의 갈로를 위로할때 그랬듯이.

갈로에게도 그 기억이 남아있던걸까. 불안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며 크레이는 후후 웃고 말았다. 오랫동안 잊고있던 것 잃어버렸던 것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오랫동안 피해왔던 타인과의 접촉을, 그에 느껴지는 다정함과 안온감을, 그리고 안심감을 따뜻함을. 그리고 프로메어가 떠난것을 실감한다. 아아, 이제 그는…, 평범한 행복을 느낄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에 젖어들다가 불안이 사그러들고도 여전히 가까운 눈을 느리게 깨닫는다. 묘한 열기가 깃들어있었고 낯설었다. 뭔가를 갈등하는 듯한 눈에 이해할 수 없는 위기감이 퍼졌지만 밀어낼 수 없기에 이번엔 그가 갈로의 말을 기다렸다. 기다리며 계산하였다.

언젠가는 갈로도 만족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애정이 옮겨갈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고, 온전한 사랑을 주고 받겠지. 어쩌면 채 3년도 걸리지 않아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이제는 재앙도 없으며 갈로 티모스는 사랑하기에 알맞은 어른으로 자라났으니까. 적어도 그것 하나는 그 자신의 잘한 일임을 자축하고, 습관적으로 그런 그의 미래를 위해 더욱 프로메폴리스를 좋은 곳으로 만드는 목표를 세우던 크레이에게 갈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말해달라고 되물었다.

 "―그, 러니까. …키스. 해도 돼?"

 "………."

크레이는 아주 잠시. 도망가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상정을 넘어선 말에 차라리 이 모든 깨달음이 꿈이기를 바랐다. 현실이 마그마가 터지기 직전이었고 꿈을 꿨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사형집행의 직전이라도 지금보다 나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부끄러워하며 참는 남자의 눈으로 보는 갈로의 눈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에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현실임을 깨닫는다.

크레이는 분명 갈로를 밀어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3분전의 생각을 철회하고 갈로를 힘주어 밀어내었다. 갈로도 버티려 했지만 간절한 크레이에 비하면 힘이 모자랐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두통이 밀려왔다.

 "미안, 그러니까, 이걸 먼저 말했어야 했나. 나…크레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키―"

갈로의 입을 틀어막고 고민에 빠졌다.

…뭐가, 뭐가 잘못된 걸까. 불만어린 눈에 또 서리는 불안에 결국 놓아주긴 했지만 크레이는 이젠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적어도 쫓아내고 대처를 준비할 시간을 원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게 그렇듯, 사건은 불시에 닥치고 사고는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것이라.

 "좋아해 크레이! 내 옆에 있어줘!"

 "그런 의미 아니었잖아!"

 "그런 의미가 되어버린것 같아! 아니, 쭉 그런의미 였을지도?!"

갑자기 올라간 텐션, 멍청한 대화에 크레이는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소파로 주저앉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미 한 번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일까. 그 것이 타성이 되지않도록 억누르고 이젠 키스하고 싶다는 말같은것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옆에 달라붙어 뭐라 조잘대는 갈로의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꼭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에 차마 떨쳐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해야 이 멍청이의 착각을 바로 잡을 수 있을지 계획을 짜올렸다. 바보-갈로-도 이해할 수 있게 말하는 것은 다행히 익숙했고 그러니 납득시킬 수 있을거라고 낙관했다.

또다시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무력하지 않았고 기분좋은 졸음이 몰려왔다. 

잠들기 직전, 크레이는 그래도 역시 이게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자고 일어나서도…이 손이 맞닿아 있기를 바랐다.

그가 여전히 인간임을. 숙명에서 벗어나 평범한 소원을 가지게 되었기를, 바랐다.

: 사람들은 곧잘 옛날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쁨이 미래에 있지 않은 인간은 불행할 뿐이다.

¹괴테, 프로메테오스 시 한 구절

" 나를 한 인간으로 단련시켜 준 것은
전능한 ´때´와
영원한 ´운명´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바로 나의 주요 그대의 지배자이다. 

(중략)

나는 여기에 앉아서
내 모습 그대로의 인간을 만든다.
나를 닮은 종족을 만드는 것이다.
괴로워하고 울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리고 그대 따위는 숭상하지 않는
나와 같은 인간을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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