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그대, 죽음에서 눈 돌리지 말지어니

레유스티테 레텐시아 x 아델하이트 에이아르

밤이 짙게 드리운 고요한 시각의 도서관을 그 누구도 찾지 않는다. 책을 찾으러 왔던 손님도 집으로 돌아가고, 부지런히 일하던 사서도 퇴근한 지 오래. 밖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한참 전에 멈췄다.

사람 한 명 남지 않은 도서관, 높게 세워진 책장 사이, 둥그런 홀 한가운데서 한 노인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등 하나 켜있지 않았지만, 천장에 은은하게 빛나는 별이 수놓아져 있어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새겨놓은 착각조차 들었다.

“예쁘죠? 현재의 기술로 이 천장을 구현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는데, 제 기억 속 모습 그대로라 볼 때마다 미소짓게 되네요.”

어서 오세요, 손님. 별 도서관에 방문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겠네요. 노인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곱게 땋아 틀어 올린 노인의 은발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주름진 눈가에 자리잡힌 하늘색 눈동자엔 마치 할머니가 손주를 바라보듯, 세월에 마모되지 않은 다정함이 담겨있었다. 짙은 색의 사서복은 구겨짐 없이 단정했고, 낡은 구두도 잘 손질되어 있었다. 구두가 바닥에 닿는 노인의 발치엔 그림자가 없었다.

천천히, 상대방의 모습도 윤곽을 드러냈다. 턱선을 스쳐 어깨 위까지 흘러내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기묘한 느낌의 푸른끼가 돌고 있었다. 도서관의 천장과 흡사하게 밤하늘을 수놓은 것 같은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치고, 손에는 보라색 초롱불을 든 채로. 눈을 가려 인상을 쉽게 판별할 수 없었지만, 십 대의 앳된 모습을 숨기지 못한 소년은 빙그레 웃었다.

“한 달 전, 사서 한 분을 모시러 왔었고, 그보다 삼 년 전, 연로하신 학자 한 분과 저 위층 연구실에서 토론을 빙자한 설득을 펼쳤죠. 아직 할 연구가 남아있어서 못 간다고 버티시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변성기를 거치다 만 소년의 청아한 목소리가 빈 도서관 내부에 스며들었다. 결코 큰 목소리는 아니었음에도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소년의 손에 들린 초롱불 주변으로 보라색 빛무리가 하나 떠돌다 스며들었다. 잠시 빛나며 작게 흔들린 초롱불에 눈길을 주었다가, 소년은 다시 노인을 응시했다. 눈을 가린 천 뒤로도 그 시선의 끝은 명확했다.

“아델하이트 에이아르. 저는 죽음의 사도, 레유스티테 레텐시아입니다. 당신을 안식의 별로 인도하러 왔습니다.”

부디 당신은 연구를 끝마쳤길 바라보죠. 그 끈질긴 설득을 두 번 하는 건 저라도 힘에 부칠 것 같네요. 소년은 미미한 웃음으로 무거운 선고에 농을 담았다. 아델하이트가 눈을 휘며 웃고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한때 나름 이름 날린 학자였는데, 우리 같은 끈질긴 족속에게 불가능한 걸 바라시는군요.”

레유스티테의 입꼬리가 살짝 굳었다. 아델하이트는 다시 도서관의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유스티테가 한숨 같은 옅은 숨을 내뱉으며 아델하이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천장의 별이 은은하게 둘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찬란한 빛 아래에서 레유스티테의 미소는 어두웠다.

수년,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이들의 끝을 찾아가 고했다. 세계가 끝나는 시간마저 눈에 담은 적이 있다. 수 없는 눈물과 미소, 한탄과 애원, 오래 고이 품어온 소망을 손수 거둬갔다.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하고, 어떤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굳게 단련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 오늘도, 누구에게나 잔인하리만치 공평하게, 한결같이 경고한다.

그대, 생의 끝에서 찾아온 죽음에서 눈 돌리지 말지어니.

“안식의 부름에 거역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한낱 인간인 제게 그럴 권리도 없고, 무엇보다 저는 충분히 살 만큼 살고, 이룰 만큼 이뤘으니까요.”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아델하이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레유스티테는 헛웃음을 참으며 아델하이트를 한차례 훑었다. 대담한 건지, 무모한 건지, 믿는 구석이 따로 있는 건지. 아델하이트의 눈에서나, 말에서나, 거짓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소년은 긴장을 풀어 하얀 손에서 초롱불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넋두리하고 싶다면 얘기를 들어줄 여유는 조금 있어요. 이래 봬도 그렇게까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글쎄요, 이걸 넋두리라고 해야 할까요?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고맙긴 하겠지만요. 어찌 보면 당신만큼 이 이야기를 듣기에 딱 맞는 경청자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리 아프시진 않죠? 가벼이 묻는 말에 레유스티테는 고개를 저었다. 물질적인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 저에게도, 영혼만 남은 당신에게도 이제 그런 배려는 쓸모없지요. 마음만 받을게요. 아델하이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다시피, 제가 별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쭉 반짝이는 별들을 사랑해왔어요. 별은 당신이 모시는 죽음의 데이스, 모르테 님의 상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죽음이 두렵다기보단, 저는 평생 염원하던 별의 실체를 가까이서 볼 영광이자 기회를 얻은 것에 더 설레요.”

불경한 말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제 진심이에요. 어찌 보면 평생 가야 끝날 수 없는 연구를 잡았던 셈이죠.

레유스티테의 하얀 얼굴이 빤히 아델하이트를 응시했다. 그의 무표정한 입에서 소리 맺힌 질문이 나오기까진 한참 걸렸다.

“죽음의 끝에서 생을 돌아볼 때도, 후회 한 점 없는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자신인가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후회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요? 다만 제가 선택한 모든 길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해요. 최선을 다해 제가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결과를 맞이한 것에 만족할 뿐이죠.”

감히 상상도 못 할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요. 아델하이트의 하늘색 눈동자가 눈을 가린 천을 꿰뚫을 기세로 레유스티테를 바라보았다. 입에 걸린 미소는 여전히 다정했다.

“군인 오빠, 아니, 티테 엘리스 씨. 당신은 어떤가요? 당신이 현재 걷고 있는 길에 후회는 없나요?”

* * *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이 홀로 남겨졌을 때 티테 엘리스는 고작 16살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이 사치가 된 고아 소년은 펜을 내려놓고 스스로 검과 총을 덜덜 떨리는 손에 들었다. 벌레 한 마리 해치지 못할 것 같은 순한 인상의 소년이 애써 의연한 얼굴로 제 부대와 발맞춰 신전에 축복을 받으러 가는 처지는 딱했으나, 그 이상의 동정심을 가지기엔 요새 너무도 흔한 풍경이었다.

부정할 길 없이 멸망해가는 세계. 신들이 편을 가르고, 가족이 생이별하고, 한때 평생 친구라 약속했던 이들이 전장에 등이 아닌 총을 맞대고 서는 세상. 당장 티테가 속한 부대에만 가족을 잃고 성인이 되지 못한 나이에 자원입대한 소년 소녀가 한 손을 넘었다. 본래는 보호시설로 보내졌겠지만, 그런 당연한 윤리 인식이 먼지보다 못해진 지 오래였다.

때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몰아쳐도, 죽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미칠 듯 밀려와도, 티테 엘리스는 울지 않았다. 이곳에 서 있는 것 또한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축복의 시간은 짧았다. 신관의 반복되는 의무적인 축복의 말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티테 역시 그저 담담하게 머리 위에 얹어졌던 손이 거두어지자 경건히 감사를 표하고 몸을 돌려 나왔다. 어린 나이순으로 입장했기에 티테는 나머지 부대원의 차례가 끝나길 기다리며 신전 정원에 앉아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매캐한 회색의 이른 밤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지금 군인 분들의 축복 의식이 진행 중이라 신관님을 뵈려면 한참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높고 명랑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을 때 이 암울하고 우울한 장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티테의 고개가 돌아갔다. 작은 소녀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곧게 서 있었다. 밀 갈색 머리카락을 곱게 두 갈래로 내려 묶은 소녀는 깨끗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차림새가 험한 길거리에서 갈 곳 없이 떠도는 아이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티테는 빠르게 신전에 머무는 소녀라 결론짓고 예의적인 미소를 지어주었다.

“괜찮아. 이미 내 볼일은 끝났거든. 동료들을 기다리는 중이야.”

그제야 소녀는 티테 옆에 놓인 총을 발견했다. 소녀의 동그란 두 눈이 커졌다.

“군인이셨구나! 너무 어리게 보여서… 앗 이거 실례되는 말인가. 미안해요, 제 사촌 오빠가 딱 군인 오빠 또래인데,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거든요.”

잠시 우왕좌왕하는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티테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않아, 틀린 말도 아니고. 소녀는 도르륵 눈을 굴리다 호기심을 참지 못했는지 슬쩍 질문했다.

“몇 살이에요?”

“열여섯.”

“전 아홉 살이에요. 이름은 아델하이트 에이아르고. 군인 오빠 이름은 뭐예요?”

“…티테 엘리스.”

소녀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성실히 답해줄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제멋대로 소녀와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순수하게 가벼운 얘깃거리를 오랜만에 입에 담을 수 있어서였을까. 생각보다 많이 외로웠던 건가. 소녀의 발랄한 질문과 티테의 짧은 답이 몇 번 더 오가다 멈췄다. 어느새 티테 옆 땅바닥에 자리 잡고 앉은 소녀는 발끝의 시들어가는 풀을 만지작거렸다.

“…군인 오빠는 왜 군인이 되기로 했어요? 누군가는 나가서 싸워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전쟁은 무서운걸요. 그 길을 가는 게 무섭지 않아요?”

어린 소녀답지 않은 무거운 주제였지만, 티테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도 엊그제 학생 신분이었는데 내일, 혹은 모레, 사람을 향해 총을 쏘게 되리라 누가 추측이나 했을까. 천진난만해 보이는 이 소녀라고 시대의 어두움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티테로서도 달리해줄 수 있는 조언은 없었다.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어. 사실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지조차 몰라. 난 그저 레유가 살았던 생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서 이 길을 택한 거야. 누구에게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있으니까.”

엘리스! 떠날 시간이야!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휴식하고 있던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총을 메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티테가 일어서자 소녀도 따라 일어섰다. 원피스에 마른 풀물이 들어버린 소녀는 티테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며 맑게 미소 지었다. 소녀의 하늘색 눈동자가 자연스레 휘자 저 매연에 가려진 하늘이 본래 이런 색이었을까, 티테는 문득 생각했다.

“이거 줄게요, 군인 오빠.”

소녀가 원피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하얀 꽃 한 송이였다. 다섯 개의 꽃잎이 말라가기 시작하는, 작고 볼품없는 꽃. 티테는 말없이 소녀에게서 꽃을 건네받았다. 소녀가 활짝 웃었다.

“펜타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을 닮은 꽃이에요. 어떤 길을 가더라도, 작은 별처럼 반짝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내 바람이에요.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별이 죽음의 데이스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이 소녀는 모르는 걸까. 헛웃음이 나올뻔했지만 티테는 소녀의 호의를 내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먼저 갈게요! 저랑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소녀는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흔들고 사라졌다. 엘리스! 빨리 안 와? 동료의 반복되는 재촉에 티테는 몸을 돌리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별은 보이지 않았다.

* * *

다시 만날 수 있게 돼서 기뻐요. 비록 살아서 다시 만났다고 이야기하기엔 조금 애매한 상황이지만요. 이제 노인이 된 소녀의 다정한 웃음은 여전했다. 레유스티테의 손이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애써 따라 짓는 옅은 미소가 작게 흔들렸다.

“…그 옛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자가, 세상에 아직 남아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신전의 소녀와 소년 군인은 다시 나이 든 도서관 관장과 앳된 모습의 죽음의 사도가 되어 서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과거의 잔상이 그림자처럼 둘의 실루엣을 덮어씌웠다.

“저도 사실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어요, 아시다시피 세계 재창조 당시 잊은 기억도 많았거든요. 제 부모님에 대한 기억도, 세올 오빠에 대한 기억도 한때 잊었었는데, 다른 무언가를 잊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요.”

하지만 당신이 나타난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 기억이 되살아나더라고요. 그리하여 소녀는 노인이 되어 그와 첫 만남이 아닌 재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델하이트의 올곧은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레유스티테는 더 말이 없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너무 무례한 질문이었을까요?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당신의 질문으로 인해 노여워한 적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지금도 무언가를 포기할 수 없어 순수한 인간이 아닌 죽음의 사도로 평범한 시간 축에서 벗어난 길을 가고 있어요. 그게 맞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그뿐이에요.

아델하이트는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 티테 엘리스 씨가 걸었던 길만큼이나 험난하고 고된 길이겠지요. 여전히 당신의 하늘에서 희망의 별이 그 빛을 잃지 않았기를 바라요. 당신에게 다시 펜타스 꽃을 선물해드리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네요. 아델하이트가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겠지요? 마지막 길 안내를 부탁드려요.”

레유스티테는 잠시 망설였다.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는 듯 창백한 입술이 달싹였지만, 이내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다시 다물렸다.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무난한 마지막 인사였다.

“그래요. 당신이 살아온 생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죽음의 안식으로 도달한 것을 환영합니다.”

손과 손이 맞닿았다. 아델하이트의 손가락 끝부터 보라색의 밝은 빛무리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손, 팔, 가슴, 몸 전체가 차차 보라색 빛에 휩싸였다. 아델하이트였던 빛무리가 레유스티테의 손안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작은 빛은 몇 번 레유스티테의 손을 휘감다가, 바닥에 놓인 초롱불 안으로 스며들었다. 초롱불이 한 번 흔들리고, 다시 고요함만이 남았다.

“세상이 바뀌면, 옛 세계가 완전히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면, 이제 레유를 기억해주는 사람도, 세렌 스승님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겠죠. 레유 엘리스와 세렌 알레테이아는 그저 잊힌 이름이 되겠죠. 그것이 새로운 세계의 순리라 할지라도, 전 당신들이 잊히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소중한 이름들, 제가 간직하고 가면 안 될까요?”

자신을 사랑하고 끝까지 보호하려 노력했던 가족. 전장에서 죽어가던 자신을 살린 전(前) 죽음의 사도. 과거의 미련이라 할지라도 티테 엘리스는 그 소중한 이름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새롭게 탄생하는 세계에서, 제가 당신들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 될게요.”

티테 엘리스는 옛 세계와 잊혀도 괜찮다 여겼다. 그것이 레유스티테 레텐시아가 선택한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별을 볼까요, 아델하이트? 레유스티테는 초롱불을 손에 들고 빛나는 천장에서 발을 돌렸다. 도서관에서 나와 정원에 서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맑은 밤하늘엔 은하수가 가로지르듯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던 레유스티테는 천천히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천을 풀었다. 밝은 노랑과 분홍색, 옅은 보라색 동공이 어우러진 눈동자에 반짝이는 별이 깃들었다. 평생 별을 사랑한 아델하이트가 떠나기에 어울리는 밤이었다.

“아델하이트, 당신의 영혼에 평화 있기를.”

죽음의 사도, 레유스티테 레텐시아는 경건히 기도를 올렸고.

“다음 생에도 그 다정한 미소 잃지 않기를.”

소년 군인, 티테 엘리스는 마지막 남은 과거의 파편을 바람에 떠나보냈다.

비록 당신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테지만, 언젠가 당신이 말했던 대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시기가 되도록 늦었으면 한다. 아팠던 과거는 잊고, 생의 찬란한 순간을 충분히 보았으면 한다.

다시 재회하는 날, 나를 반겨줄 당신은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그때까지 나 역시 맞이할 무수한 죽음의 세례를 회피하지 않을 테니.

우리 머리 위에 드리운 별의 반짝임을 내가 잊지 않도록. 별의 상징이 죽음뿐만 아니라 희망임을 기억할 수 있도록.

당신은 다시, 당신이 최선이라 여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 * *

다음 날 아침, 별 도서관의 관장, 아델하이트 에이아르가 자택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둔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향년 82세. 소박한 장례식에는 소수의 지인만 참석해 조용히 끝났다.

장례식이 끝난 후, 아델하이트의 관 위엔 누가 가져왔는지 모를 하얀 펜타스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싱싱한 꽃의 향기가 다정하게 아델하이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Written 21-08-28

7941자 (5988)

본 로그의 그림은 제엠(@jmillcm)님의 커미션 입니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