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마침내 찾아온 봄의 이름은

레미아 키르헤 x 아샤유리

봄이라 함은 웅크려있던 꽃봉오리가 따스한 이슬을 맞아 피어나는 것이고,

또한 봄이라 함은 잠들어있던 생명이 깨어나 기지개 켜며, 움트는 잔디에 발을 딛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봄이라 함은, 겨우내 그리던 그대 미소를 두 눈에 담아, 세상에 색이 다시 물드는 것이니라.

그대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이름 없는 꽃밭에서였지요.

햇볕이 잘 드는 꽃밭에서, 그대는 한쪽 팔에 갈대로 엮은 바구니를 끼고 사박사박 걷고 있었어요. 챙이 넓은 모자 아래로 보이는 그 화사한 금발에 순간 넋을 잃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무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단지 바라만 보고 있을 텐데도 눈이 부셔, 충동적으로 말을 걸고 싶은 마음에 놀라서였을까요? 난생처음 느껴보는 욕심에 당황하기도 전, 인간과 섣부르게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이 성과를 발휘한 것일까요?

그때, 그렇게 돌아서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그대가 모자를 놓치고 말았지요. 당혹감에 젖어 돌아보는 그대의 표정이 눈에 밟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손을 뻗어 날아가는 모자를 잡아챘습니다.

후회는 잠깐이었지만, 그대의 진한 금색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을 때 머리가 새하얘지긴 했다고, 이제 와서 고백합니다. 인간 마을 부근으로 나갈 때 늘 그렇듯, 나는 마나티(동물, 새 등의 특징이 외형에 드러나는 인외종족)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귀를 숨기려, 늦은 봄임에도 망토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지요. 그대 눈에 내가 얼마나 수상해 보였을까요.

“…괜찮아요. 무서워 말아요.”

혹시라도 겁먹어 도망칠까, 모자를 손에 들고 먼저 말을 건넸었죠. 잠시 황망히 방황하던 나의 시선이 그대에게 닿았을 때, 아마 그때부터 이 감정은 돌이킬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태양처럼 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 미소가 오롯이 나만을 향하고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 그대가 그날 보여준 미소에, 다른 큰 의미는 없었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빛이었고, 용기였어요.

“고마워요. 꽤 아끼는 모자라, 이대로 잃어버렸다면 많이 아쉬웠을 거예요.”

먼저 다가와 준 이가 그대였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을까요? 도리어 내가 무서움에 한발 물러선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기도 하지요. 나는 그대에게 어떤 답을 돌려줬는지, 횡설수설했던 탓에 기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마 괜찮다고 했을까요? 도움이 되어 다행이라고 했을까요?

다음에도 만날 수 있겠냐는 물음은, 아마도 꺼내지 못했었지요.

그대를 점차 알아가게 된 것은, 연보라색 꽃이 가득한 어느 꽃밭에서였지요.

“아, 그때 모자 잡아준 사람. 맞죠?”

스치듯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억해줬다는 사실이 못내 놀랍고 기뻤습니다. 이번에도 그대가 먼저 다가와 줬기에, 얼굴에 슬쩍 퍼지는 미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망토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도 살랑이고 있지 않았을까요?

“네, 반가워요. 나를 어떻게 알아보신 건가요?”

그때도, 지금도, 밋밋한 회색 망토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멀리서 알아보고 다가와 준 걸까요?

혹시 그날 이후로, 그대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쭉 이곳을 찾은 나를 눈치채고 부담스럽게 생각한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나름 기척을 숨기는 데엔 일가견이 있어, 들켰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안 들키면 안 들키는 대로 스토커처럼 기다리는 행동 역시 문제 아닐까, 뒤늦게 생각이 들어버려.

네가 미쳤구나, 아샤유리.

자신을 향해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습니다.

그대의 눈치를 보았으나 나를 전혀 꺼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 안도했고, 죄책감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그대의 미소는 티 없이 밝았습니다.

“그야, 이 하얀 머리카락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어찌나 눈이 가는지. 후드를 쓰고 있다는 게 아까워질 정도인걸요.”

홀린 듯 후드를 벗을 뻔했다가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타인에게도 이리 상냥하니, 아마 내가 마나티라는 것을 밝힌다고 해도 그 다정함이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언제나 조심, 또 조심. 요즘 마나티와 인간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괜히 불화의 씨앗을 키워 좋을 것 없다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본능적인 방어였지요.

답이 없음에도 그대는 개의치 않아 했습니다. 나를 향한 그 믿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해요.

“난 레미아 키르헤예요. 당신 이름은 뭔가요?”

“……아샤유리, 예요.”

그저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외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었나요? 그대 보기에 싫지 않은 표정이었으면, 바라게 되네요.

그대에게 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 것은, 화창한 유월의 아름다운 꽃밭에서였지요.

우연을 가장한 짧은 만남을 이어가며 그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내 하루의 낙이었어요. 그대가 약초를 채집하러 나오는 꽃밭으로 순찰 루트를 잡으려 필사적으로 정찰부대 리더에게 매달렸다는 사실을 다행히 그대는 모르겠지요.

왜 갑자기 고집을 부리는지 수상쩍어하던 리더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상당히 애를 먹긴 했지만,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 마냥 행복했습니다.

간절한 소망을 하늘이 들어준 걸까요, 그대와의 사이도 점차 가까워져 어느덧 친구 대하듯 나에게 편하게 말을 걸어주는 모습이 기꺼웠습니다.

“아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아샤, 그 애칭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꽃밭 언저리에 자라는 약초를 캐며 그대는 심심풀이 삼아 그렇게 그대의 일상을 나에게 들려주었지요.

“그래서 나한테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나, 뭐라나. 하여간 눈은 높아가지고. 관심 없다고 그렇게 거절했는데도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내 동생이 화내면서 쫓아냈단 말이지. 고작 15살 된 애한테 기가 눌려 도망가는 게 웃기지도 않아서.”

그대가 어여쁘다는 것을 어찌 모를 수가 있었을까요. 인간의 나이로 치면, 그대 나이대 여성들이 많이들 결혼할 시기라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추악한 질투가 고개를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으나, 겉으로나마 미소지어주는 내 모습이 다정하게 비쳤었으면 좋겠네요.

“아, 키르헤 둘째, 레미아 씨 아닌가요?”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긴장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였을까요, 그대는 마치 나를 보호하듯 내 앞을 가리고 서, 지나가던 사람에게 인사했었지요.

“아, 네. 안녕하세요.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마침 옆 마을에 갈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레미아 씨는 오늘도 일에 열심이네요. 옆에 사람은 친구인가요?”

그대의 작은 관심 한 톨 얻으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던 나였지만, 평소 타인의 눈길을 그리 반기지는 않았습니다. 의심을 피하려 간단하게나마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갑작스런 돌풍이 불어왔습니다. 나도, 그대도, 지나가던 그대의 지인도 순간 움츠러들었지요. 바람이 후드 안쪽에 모여드는 것을 대비하지 못했기에 아차, 싶었습니다. 급하게 후드를 잡아당기려 손을 올렸지만 아마 늦었으리라, 반쯤 포기하고 있었어요.

든든한, 풀물이 잔뜩 든 두 손이 순식간에 후드를 잡아당겨,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가 되어 당황했지만, 그대 얼굴이 손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보이는 것만큼 당혹스러웠을까요. 자칫하면 숨결이 닿을 것만 같아, 날숨조차 함부로 내쉬지 못했습니다.

전혀 흔들림 없는 그대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때 깨달았지요. 아, 그대는, 이미 알고 있구나, 라고.

“이런, 바람이 이렇게 부는 걸 보니 태풍이라도 올라오려는 걸까요. 얼른 가봐야겠네요. 레미아 씨도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 사람이 떠나가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수그러진 고개를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후드를 잡아주던 손길이 사라진 지도 오래였습니다.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그대 시선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 내리깐 눈을 그대로 두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었지요.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요?”

내가 마나티라는 걸? 당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그대는 내가 물어보고 싶은 바를 이해했겠지요.

“글쎄… 확신한 건 지금? 그 후드를 계속 벗지 않는다거나, 네 이름을 소개할 때 성이 붙지 않아 멋대로 추측하긴 했지만.”

아샤, 네가 계속 숨기고 싶다면 그래도 돼. 나도 우리 종족 간 생기는 갈등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었으면 좋겠네. 그때 모자 잡아준 보답은 이걸로 갚았다고 봐줘.

다정한 그 말에 간신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여전히 밝게 웃어주는 그대 모습에, 천천히 손을 올렸습니다.

사르륵. 귀에 후드가 스치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대 눈에, 내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하얀 여우의 귀가 비쳤을 테지요. 그렇게 있는 내 모습 그대로, 그대는 눈에 담았을 테지요.

“역시, 후드를 벗은 모습이 훨씬 예쁘네, 아샤.”

아니요, 아니에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세상 누구보다, 레미아, 그대가 가장 어여쁜걸요.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욕심임을 알게 된 것은, 희미한 꽃향기가 가득한 져가는 꽃밭에서였지요.

그 사건 후로,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땐 그대 곁에서 늘 후드를 벗고 있게 되었지요. 그대 눈에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심이었을까요.

“아샤, 처음 네 머리카락을 봤을 땐 마치 겨울의 하얀 눈 같다고 생각했었거든?”

간혹 허리 밑까지 늘어지는 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어주던 그대가 꺼낸 말이었습니다. 느껴지는 그대 손길이 퍽 기분 좋아, 가만히 미소짓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넌 겨울이 아니라 마치 봄과 더 비슷하더라. 네 눈에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어있고, 그 위로 새파란 하늘이 펼쳐진 것 같잖아?”

내 눈에 물든 색을 그렇게 아름답게 표현해 준 이가, 그대가 처음이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여기, 네 머리카락 속에도 하늘이 숨어있네! 내 머리카락을 한 줌 들어 올리며 까르르 웃는 그대의 눈동자야말로 그 어떤 호박보다 귀중하고, 유일한 태양보다 밝았음을, 그대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대 맑은 웃음에 정신이 팔려,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그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손을 뻗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심장이 차갑게 밑바닥까지 떨어져 내렸습니다.

새카만 까마귀 깃털. 그대도 내 손에 들린 깃털을 봤는지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요. 순간 굳어버린 내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깃털?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갔나? 까마귀 하니까 동생 생각이 나네. 걔 까마귀 엄청 좋아하거든. 왜, 저번에 얘기했던 동생 있잖아?”

“아, 이름이 라베라고 했었지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화를 이어갔지만, 품에 넣은 깃털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 깃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 말인즉, 그대라는 내 비밀을 들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날 그대와 헤어지고, 깃털의 주인은 날 찾아왔습니다. 검은 까마귀의 날개를 펼치고, 녹색과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진한 벚꽃색의 눈동자로 나를 엄격하게 응시하는 이 앞에서. 린메이, 나의 사촌 형 앞에서 나는 아마도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주눅 들어 있었겠지요.

“이제 마나티의 나이로 너도 성인인데, 굳이 내가 길게 잔소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잘 생각해서 마무리 짓거라.”

나보다 서른 살은 많은 만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라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대 말마따나, 나도 마나티와 인간 사이의 갈등을 모르지는 않았으니까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러나 아이 같은 고집이 나오는 것은 역시, 그대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를 고려조차 할 수 없어서겠지요. 린메이는 그런 나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알아. 너나, 그 인간 아이나 무슨 잘못이 있어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겠니. 하지만 새겨두는 게 좋을 거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이 만남을 지속한다 해도, 우리 종족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진 않아. 인간의 수명은 순혈 마나티인 우리의 반밖에 되지 못하고, 30년 뒤에도 너는 청년의 모습 그대로겠지만, 그 인간 아이는 중년이 되어있을 거야.”

얼핏 보아하니 갓 성년이 된 나이대로 보이던데. 아무리 길어도 앞으로 70년이면 수명이 다하겠지. 너는 그때 고작 100살 남짓일 테고, 그 아이 없이 보내야 하는 시간이 100년은 남아있을 거야.

짧은 봄에 현혹되지 말거라. 긴 겨울을 어찌 견디려 그러니.

나는 미소지었어요. 그것이 울듯 일그러진 미소라 해도, 한 치 거짓 없는 미소였어요.

“긴 겨울이 두려워, 영원한 겨울 속으로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그것이 아무리 짧은 봄일지라도, 나는 그 봄을 그 무엇보다 원하니까.

린메이는 한숨을 쉬었지만 더는 말리지 않았습니다. 이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 보여, 나는 그만 안심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린메이의 용건이 끝이 아니어서, 조금은 이른 안심이었습니다.

“이럴 때 소식을 전하게 되어 참 유감인데, 너에게 임무가 하나 배정되었다. 너도 이제 어엿한 정찰부대원이니 한 사람 몫은 해야지.”

레미아, 그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 순간, 그대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임무를 받은 것은 하늘의 농간이었을까요. 싫다고, 임무를 바꿔 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럴 나이는 한참 지났고, 내 욕심에 주어진 책임을 팽개칠 만큼 철이 없지도 않았으니까요.

마지막 날까지, 그대에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그대는 아마 눈치챘겠지요. 하지만 끝까지, 묻지 않는 그대의 상냥함에, 나는 결국 아이처럼 기대버렸어요.

미안해요, 레미아.

“오래 떠나있게 될 것 같아요.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인간의 시간으론, 아마 훨씬 길게 느껴지겠지요. 그래서 차마 나를 기다려달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내가 무슨 염치로 그대를 잡을 수 있었을까요.

영겁 같은 시간 끝에 그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습니다.

“난 클레마티스가 피는 곳에 있을 거야.”

그대의 따스함이 내 마음에 닿아,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내가 돌아올 곳이 그대였다는 사실이, 나에겐 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대를 다시, 제대로 마주 보게 된 것은, 그 클레마티스 꽃밭에서였지요.

얼마나 머릿속으로 이 그리운 곳을 그렸었는지, 일 년이란 시간이 가깝게 지났는데도, 어제 본 것처럼 친숙했어요. 아침에 가까워지는 새벽녘, 꽃밭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어 상념에 빠지기 좋은 시각이었지요.

그래서 좋았지만, 그대 역시 이곳에 없다는 점만은 슬펐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부러 그대가 없으리라 확신한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무려 일 년이란 시간 동안 그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무서웠고, 동시에 그대가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까 두려웠어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바램이.

“우연이네, 나도 참 많이 그리웠는데.”

기적처럼 그대에게 닿았을 때.

“아샤,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을까요.

후드를 내리는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돌아보자, 만발한 클레마티스꽃 한가운데 서 있는 그대가 눈에 들어왔어요. 보고 싶어 했던 모습 그대로, 그 밝은 미소 한 치 변함없는 채로.

레미아, 태양의 눈을 가진, 자유로운 나비 같은 내 사람.

“많이, 늦었지요. 미안해요.”

떨리는 목소리에 배어있는 것은 울음이었을까요, 기쁨이었을까요. 그대 앞에서 늘 이리 미숙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그대에겐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대를 받쳐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은 참 멀어 보였습니다.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그대를 말없이, 타는 갈증이 가시는 기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무사히 잘 돌아왔으니 됐어. 그래도 정 미안하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을래?”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요.”

그대의 부탁이 무엇이었든,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나요. 세상의 끝까지 가라 하면 갈 것이고, 별을 가져와 달라 하면 가장 빛나고 귀중한 보석을 그대 앞에 대령하겠지요.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내게 무얼 요구하든지 간에.

천천히,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 그대의 입술이 열렸습니다.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를 두고 오래 떠나지 말아줘. 떠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나한테로 돌아와 준다고 약속해줘.”

내가 언제나 너를 기다릴 수 있도록. 너만을 마음에 담고 살 수 있도록.

그대 뒤로 쏟아져 내리는 광채에, 그대 그 환한 미소에, 오롯이 나만을 향하고 있는 그 시선에. 나는 결국 울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생각도 못 하고, 나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잠겨있었지요.

“참 이상해요. 그리 괜찮다, 자신을 설득하며 살아왔지만, 마음이란 것은 너무나도 간사해서 늘 더 원하게 되더라고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끝없이 애정을 갈구하게 되더라고요.

따듯한 감촉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약초를 따느라 거칠어진 손가락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잠시 온기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작은 손바닥이 내 뺨을 감싸왔습니다. 그대 입술에서 떨어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뭄 속 다디단 빗방울 같아,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않게 손으로 붙잡고 싶었다 말하면, 그대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웃어줄까요.

“나를 갈구해줘. 내 애정을 원한다고 말해줘.”

너에게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나만이 네 유일이라고, 약속해줘.

여전히 눈물은 흐르고 있었지만, 환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약속할게요, 레미아. 그대 손 위로 내 손을 올리며, 영원의 맹세를 나는 입에 담았지요.

레미아. 마침내 찾아온 봄은, 그대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알고 있을까요.

그대는 그대 자체로, 나의 봄이었고.

그대와 함께 있을 땐, 나에겐 언제나 봄이었다는 것을.


Written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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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덤(@dum_cm)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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