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光睡蓮歌 -달의 빛은 연꽃을 노래하고-
체자레 아스포델 x 사하 엘제스
처음 너를 봤을 때 설렜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 답했을 것이다. 당사자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 만남에, 달리 무엇을 느껴야 했을까.
그러나 은색으로 반짝이던 너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달을 닮은 듯한 색채가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나를 보던 그 눈길이, 오염되지 않은 맑은 호수처럼 티 하나 없는 순수한 눈빛이어서 그랬던 걸까.
…아, 사하. 그때부터 너는, 나의 빛이었구나.
체자레. 당신이 달 아래에서만 빛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을 위해서 기꺼이 태양을 포기하겠습니다.
사하. 영원을 믿지는 않지만, 당신만큼은 나의 생에서 바래지 않는 빛이길, 감히 바라보아요.
소녀가 앉아있는 서늘한 방 안에는 적막만 감돌고 있었다. 삭막하다 못해 살풍경한 풍경과 달리, 소녀는 한껏 화려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연초록색 드레스에는 금색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가느다란 목과 팔에는 무겁지 않나 생각될 만큼 세공된 보석이 잔뜩 달려 있었다. 팔목에 걸린 팔찌를 손끝으로 스치듯 매만지는 소녀의 입가에 잠시 비웃음이 걸렸다.
숨 막히는 정적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의해 유리처럼 깨졌다. 소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꾸민듯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들어오세요, 말하는 목소리는 건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 특유의 청량함이 서려 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준비되셨으면 응접실로 나와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가주님의 명입니다, 잔잔하고 감정 하나 없는 전언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하녀는 다른 말 없이 바로 방을 나섰다. 잠깐의 대화 사이에도 둘이 눈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잠깐 천장을 보고 옅은 한숨을 쉬었을까. 소녀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잠깐 망설였다.
지금 여기서 싫다고 할까? 확 도망이라도 쳐?
그러나 소녀는 충동적인 잡념을 지우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싫다고 반항하면? 도망치면 그다음은? 아직은 때가 아니야, 소녀는 조용히 되뇌었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야. 기회는 반드시 와, 그러니 지금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자.
소녀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벽난로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 젊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백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고 자신과 꼭 닮은 분홍색 눈을 가진 남자, 리브 아스포델을 보고 소녀는 설핏 미소지었다.
“그리 제가 오길 기다리고 계셨나요, 아버지.”
그리 불안하신가요. 그리도 서글픈 눈을 하고 계신가요. 소리 내 묻지 못한 인사를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체자레.”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에게 손짓하며, 체자레는 고급스러운 붉은 천이 덧대어진 의자에 앉았다. 자신과 같이 앉아서 기다리자는 뜻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리브는 체자레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맞은편 자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전부 비워둔 채였다. 빠르게 눈을 굴려 주변을 훑어보고, 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체자레는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그래서 제 약혼자 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게 있으신가요?”
에둘러 가지 않은 직설적인 질문이었음에도 리브는 손만 쥐었다 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참을성 있게, 체자레는 기다렸다.
“사하 르루아, 르루아 백작의 조카라고 하더구나. 나이는 너보다 한 살 어리고…. 아직 초능력을 발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흠. 체자레는 한 손으로 제 손목에 걸린 팔찌를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많지는 않은 정보였지만 여태 가문의 하녀나 하인들에게서 들은 정보보다는 훨씬 많은 양이었다. 평소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자신에게 해준 말이라곤 “가주님께서 아가씨의 약혼처를 결정하셨다고 합니다”가 다였으니 말 다 했지. 잘나신 자신의 할아버님이자 가주님은 본가에 와 계실 때 자신과 말을 섞는 것조차 치를 떠시니 그렇다고 치고.
르루아 가문이라. 이 저택 내에서는 그렇다 치고, 밖에서도 뒷말이 꽤 오가겠는데. 자신이 받는 취급이야 어떻든, 체자레는 엄연히 상위 8가문의 귀족이자, 아스포델 공작의 직계 핏줄이었다. 르루아 백작가 역시 귀족 사회에서 낮은 계급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귀족들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8가문에 비하면 누구나 부족하다 입을 모을 것이다. 그랬기에 체자레는 공작의 의도를 더 투명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뭐, 언제나 그랬듯, 이렇게라도 자신을 한시라도 빠르게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겠지. 직계 핏줄이랍시고,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넘볼 수 없도록 낮은 계급의 가문에 결혼 시켜, 될 수 있으면 아예 가문에서 영원히 내보내려는 마음을 이 저택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얼마 전 자신이 사촌 오빠인 케레이스보다 강력한 초능력을 발현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쫓기듯 급하게 자신의 약혼을 주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화가 났다.
“체자레.”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애꿎은 장신구를 괴롭히고 있던 손길이 멈칫했다. 살짝 시선을 돌리자 리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체자레는 그를 안심시키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괜찮아요.”
여덟 살의 어린아이치고는 지나치게 성숙한 대답이었지만, 이 저택에서 쥐죽은 듯 살면서 체자레는 빠르게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유령이나 다름없이 살아왔는데, 인형 취급 몇 시간 정도쯤이야. 의례적인 만남이 끝나고 빠르게 회수될 비싼 옷이니 장신구를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체자레의 모습을 눈에 담은 리브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 더 말하기도 전에 아스포델 가문의 집사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르루아 백작가에서 오신 손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게.”
하지 못한 많은 말을 눌러 담으며 리브는 담담하게 말했다. 흔들리던 눈빛은 어느새 굳건한 가면 뒤로 숨긴 채였다. 리브 또한 엄연한 아스포델 공작가의 핏줄이자 귀족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교육 덕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쯤은 익숙했다.
체자레는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온 이들을 조용히 관찰했다. 남색의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인이 체자레와 리브를 보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인의 곁에는 같은 남색의 단발을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 저 아이가 내 약혼자가 될 아이인가 보구나. 그럼 저 여인은 아이의 어머니 되시려나.
지극히 메마른 감상을 하던 중, 체자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빛이 난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색채였다. 은색? 아니, 빛이 들어서 그렇지, 회색의 눈동자인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체자레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마주 보았다. 르루아 가문의 여인과 리브가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들려왔지만, 체자레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주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리브가 체자레의 손을 가볍게 잡자 체자레는 자신의 소개를 할 차례가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체자레 아스포델이라고 해요.”
평범하고, 자신의 약혼자 될 이에게 건넨 인사치곤 지나치게 삭막한 면이 있었지만, 체자레의 미소만큼은 의례적인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체자레는 조용히 아이가 입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녕하세요, 사하 르루아 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체자레는 자신의 약혼자의 첫인상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 * *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지만 사하가 걸어가는 아스포델 저택의 외딴 복도는 늘 어둡고 조용했다. 사용인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저택의 구석진 곳은 사실 버려지고, 방치된 곳이 아닐까 싶었지만, 사하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얼마나 좁고 어둑한 복도를 걸었을까. 희미한 선율이 메아리치듯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노랫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구슬픈 울음소리 같기도 한 연주는, 사하가 한 방문 앞에 서서 조용히 노크하자 끊기듯 멈췄다. 방금까지 들리던 악기 소리와 무척이나 닮은 목소리가 이내 들어오라 허락하자 사하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복도만큼이나 어둑했다. 작은 전등은 빛을 발하기보단 구석진 곳까지 그림자를 드리웠고, 열려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한 줌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방안에 앉아, 흰색의 비파를 안은 채로 사하를 맞이하는 이는 그 누구보다 눈부셨다고, 사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사하. 온 줄 알았다면 마중 나갔을 텐데.”
“괜찮아. 처음 오는 것도 아니고, 안내는 이제 필요 없으니까.”
체자레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비파를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굳이 초대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하는 체자레의 맞은 편에 앉아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얼굴 옆으로 흘러내리는 은발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체자레가 물었다.
“차라도 내올까?”
“아니, 괜찮아.”
사하는 좀 전에 한 대답을 번복했다. 나 때문에 번거롭게 안 그래도 돼. 그러나 체자레는 이미 일어서서 주전자에 물을 데우고 있었다. 보통 귀족들은 이런 잡다한 일에 하인이나 하녀를 시켰겠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체자레의 손길은 능숙했다.
첫 만남은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꽤 편해진 태도로 서로를 대하게 된 체자레와 사하였다. 그만큼 자주 보는 얼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몇 없는 믿을만한 사람이었기에 그렇기도 했다. 사하에게도, 체자레에게는 더더욱.
“…오늘은 안 나가고 방안에 계속 있었어?”
“아, 오늘 오후에 가주님이 저택으로 돌아오신다고 했거든. 도착하시는 정확한 시간을 모르니까, 아예 마주칠만한 상황을 방지하려고. 네가 조금 늦게 왔더라면 오는 길에 가주님하고 만났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본가 저택을 좋아하시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다른 상위가문의 가주들처럼 수도에 있는 저택에서 생활하면 오죽 좋을까. 그럼 나도 좀 숨 쉬고 살 수 있을 텐데.
평소에는 누가 들을까 조심하느라 생각으로만 그쳤을 말은 사하 앞에서 스스럼없이 나왔다. 사하는 아무 말 없이 체자레가 건네준 차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체자레만큼은 아니었을지라도, 사하 본인도 눈치는 빠른 편이었다. 아스포델 공작의 손녀라는 화려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체자레가 자신의 약혼자로 정해지기 전까진 그에 대해 거의 들어보지 못했었다. 그것도 이상했지만, 더욱 이상하다 느낀 점은 왜 공작이 자신을 체자레의 약혼자로 지목했느냐였다.
후계자로 지목되지는 않았다지만 아스포델 공작의 손녀와, 가주에게 예쁨받으며 자라긴 했지만 르루아의 후계자가 따로 있었기에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르루아 백작의 조카.
르루아 가문에게는 절대적으로 이익인 약혼이었지만, 이상하지 않다 여기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그렇기에 사하는 더욱 행동을 조심했다. 체자레에게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는 것과는 별개로 사하는 아스포델 저택에 올 때마다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가시방석에 놓인 상황을 해결해 준 것은 체자레 본인이었다. 그날도 사하는 아스포델 저택에 방문해 체자레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르루아 백작령은 아스포델 공작령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수도의 르루아 저택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던 사하는 보다 수월하게 체자레를 만나러 올 수 있었다. 그런 사하에게 체자레가 어느 날 물어왔었다.
“그렇게 눈치 볼 거라면, 그냥 직접 물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네가 이 자리에 있는지.”
마시던 차에 사레가 들릴 만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온 질문이었다. 사하는 작게 기침하며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체자레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차피 너도 나하고 엮이게 되면서 이 진흙탕에 발을 들이게 된 만큼,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어. 숨긴다 해도 언젠간 알게 되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잘 듣고, 네가 직접 결정해. 네가 싫다고 해도 약혼을 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만큼 억울한 건 없으니까. 사하는 찻잔을 내려놓고 체자레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딪혀올 것이라면, 사하 역시 피할 생각은 없었다.
“넌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첫 질문부터 쉽지 않았다. 사하는 잠시 고민했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아스포델 공작의 손녀, 전 후계자 리브 아스포델의 외동딸, 체자레 아스포델. 나이며, 초능력이며, 사하가 체자레에 대해 자잘하게 알고 있는 점을 전부 말하기까지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마지막 말을 꺼냈다.
“…그리고, 알려진 게 너무 없어서…. 아스포델 공작이 그만큼 손녀를 아끼고 싸고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정도?”
“정말 그런 것 같아?”
한층 더 차가워진 체자레의 미소를 보며 사하는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끼고 싸고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땐 곧이곧대로 소문을 믿었겠지만, 체자레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본 지금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저택에서 내쳐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체자레는 버려진 아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인이나 하녀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구석진 방만해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주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지. 틀에 꽉 박히고, 자신이 정해놓은 선 밖으로 나가면 쌓아 올린 모든 게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늙은 겁쟁이나 다름없는.”
사하가 흠칫 놀라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주변을 둘러보았을 만큼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렇지만 체자레는 한번 말이 터지자 이 기회에 모든 것을 쏟아내려 작정했는지, 사하에게 적응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고귀한 핏줄에 먹칠하는, 평민의 핏줄을 이은 아이니까.”
공식 석상에서 내 어머니를 본 기억이 없지? 보았을 리가. 딱 봐도 내 어머니는 솔레유 제국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티 나거든. 아스포델 공작의 후계자가 귀족도 아닌, 섬나라 출신의 평민과 결혼해서, 딸까지 낳았다? 그게 밝혀지느니 가주님은 차라리 혀 깨물고 죽는 것을 택할걸.
지금 아스포델 가문의 후계자가 내 사촌 오라버니인 케레이스 아스포델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가주님이 후계자 결정을 번복했을 때 말이 많았다고 듣긴 했지만…. 그거 내 아버지가 자신의 의지로 케레이스 오라버니에게 양보했다고 그랬었나? 자신보다 케레이스 오라버니의 자질이 더 뛰어나다고 판단해서? 웃기지도 않는 소리.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케레이스 오라버니는 너무 유약해. 공작가를 이끌어가기엔 한참 부족한 사람이지.
누가 봐도 뻔하지, 내 아버지가 가주님의 압박에 의해서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한 게.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격해진 감정 때문이었는지 체자레가 잦게 기침을 하자 사하는 급하게 그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었다. 식어버린 차를 들이켜며 기침을 진정시킨 체자레는 잔뜩 우러난 찻물보다 배는 쓴 기색을 담아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가주님은 할 수 있었다면 나나 어머니를 쫓아내거나 심하면 아예 죽여서라도 치워버리고 싶었겠지. 그러나 쫓아내기엔 사회에 어떤 소문이 퍼질까 두려웠을 거고, 우릴 살려두는 것으로 아버지를 입막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죽은 듯이 있기만 한다면 목숨만큼은 붙여두겠다고. 나를 르루아 가문에 약혼시킨 것도 백작가 정도면, 공작가와 인연이 생긴다는 이익에 눈멀어 나 같은 흠 정도면 넘어가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을걸.”
그게 전부야. 어차피 귀족 가문 사이에서 정략결혼쯤이야 흔하다고 해도, 이렇게 꼬이고 꼬인 약혼은 손에 꼽지 않을까. 사과는 하지 않을게. 어차피 너나 나나 원해서 이 약혼을 한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어느새 다시 담담하게 물어오는 체자레를 사하는 눈에 담았다. 알게 된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여전히 많고. 그렇지만 제일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역시.
“억울하지 않아?”
의외의 반응이었는지 체자레의 눈썹이 추켜 올라가 둥글게 휘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그걸 말이라고.”
손가락 끝으로 의자를 톡톡 두드리던 체자레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서늘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눈가는 한층 부드러워진 채였다.
“하지만 지금 억울하다고 말을 해봤자,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내가 힘이 있나, 권력이 있나. 반항도 무턱대고 하는 건 미련한 짓이야. 지금은 내가 어린아이라고 방심하고 있다지만, 그게 언제까지 나를 지켜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얻을 게 있다고 확신했을 때, 그때 움직여야지.”
그리 말하는 체자레는, 이미 어린아이라 할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더 눈엣가시가 된다면 아버지와의 거래고 뭐고,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질 수 있어. 지금 이 차조차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할 만큼, 믿을 것 하나 없어질 테지.
“섣불리 움직였다간 내가 위험해지는 건 물론이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곤란한 상황에 처해질 거야. 어머니는 몸도 편찮으신데 나 혼자서 멋대로 일을 벌일 수는 없어. 그리고 너도.”
사하는 멈칫했다. 체자레와 나눈 대화 중 가장 놀랐을 때를 꼽자면 당연히 지금을 꼽으리라. 그야 그럴 것도….
“왜 날 싫어하지 않아?”
체자레가 한 모든 말을 들은 사하는 체자레가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끔찍하게 여긴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생각했다. 자신이 체자레의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좋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체자레를 얽매이는 수많은 족쇄의 증거 중 하나의 역할을 버젓이 맡고 있는데.
어떤 답을 들을까 무서워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체자레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사하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체자레가 자신보다 더 당황스럽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너를 싫어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서?”
거짓 한 줌 없는 말투와 눈빛이었기에 사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의문 가득한, 조금은 안도한 것 같아 보이는 사하에게 체자레는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제 눈길을 사로잡은 사하의 빛나는 회안을 응시하며 체자레는 싱긋 웃었다.
“내가 놓인 이 상황이 정말 치가 떨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을 담아.
“사하, 내 약혼 상대가 너라서 다행이야.”
* * *
그저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그래서 더 예상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하루가, 사하에게는 그 어느 날보다도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날이 되리라는 것을.
해가 계속 지나며 어느덧 체자레는 열셋, 사하는 열둘의 소녀 소년이 되었다. 그들의 관계도, 만남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다. 오히려 더 늘었다면 늘었을까. 사하는 르루아 백작령에 아주 가끔만 돌아가며 수도의 저택에 머물렀다. 수도도 아스포델 공작령과 아주 가까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하는 될 수 있는 한, 자주 체자레를 찾아와 아스포델 저택에서 며칠을 머물다 갔다.
그런 그들을 보고 다른 이들은 약혼자 간의 사이가 좋다며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이는 세간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아스포델 공작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둘이 서로를 너무 좋아해 계급 차이가 나는 약혼을 추진했다는 소문이 도는 편이 그에게도 유리했으니까. 그래서 아스포델 공작은 사하가 체자레를 찾아오는 것을 제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최근 들어 사하의 방문은 더욱 잦아졌었다. 체자레의 안색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저택 구석진 곳에 방치된 체자레의 방은 그리 따듯한 편은 아니라 혹시 감기가 드는 것일까 염려해, 그나마 불을 피워 따듯한 응접실로 나올 핑계를 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자신의 치유 초능력을 써서 체자레를 회복시켜주고 싶어서 그러기도 했다.
나 때문에 오히려 네가 피곤해지는 건 아닌가 몰라, 쓰게 웃으며 체자레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하에게 말했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준비가 된 사하였다. 체자레 역시 사하를 자주 보는 걸 기꺼워했기에 그 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콜록콜록.
낮게 들끓는 기침 소리에 사하는 체자레를 돌아보았다. 오늘 첫눈이 내리려나, 그런 혼잣말을 하며 작은 창문 근처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체자레는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사하는 그런 체자레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을 건넸다.
“체자레. 아무래도 좀 누워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면 여기 와서 앉기라도 해. 안색이 정말 안 좋아.”
체자레는 설핏 미소지었다. 사하의 목소리에 어린 걱정이 어느덧 익숙해졌다. 비록 사하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신을 볼 때마다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내오곤 했으니까. 그래서 고집부리지 않고 체자레는 창문에서 돌아서 사하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체자레의 시야가 점멸했다.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사하는 체자레가 자리에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몸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 체자레가 완전히 바닥으로 넘어지기 전에 그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하 역시 어린아이였고, 성장기가 온 체자레보다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같이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귓가 근처에서 힘겹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와 사하는 안도하는 동시 공황에 빠졌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이러다가 체자레가 진짜로 잘못되면 어떡하지.
사하는 억지로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지금 체자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빠르게 손에 치유의 힘이 깃든 빛을 모아 체자레의 등에 대자 조금이나마 숨소리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차라리 바닥에 눕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바닥은 생각보다 차가웠기에 사하는 그대로 체자레를 끌어안은 상태로 있었다.
사람을 불러야 해. 도움을 청해야 해. 그렇지만 누구를?
사하는 이 저택에서 체자레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은 체자레의 아버지인 리브 아스포델과 체자레의 어머니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스포델 가의 사용인은 전부 아스포델 공작에 의해 고용된 사람이었고, 사하는 그런 그들에게 정신을 잃은 체자레를 맡겨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리브 아스포델을 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체자레를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사하는 갈팡질팡하다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리자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체자레, 사하.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니?”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익숙했기에, 사하는 밀려오는 안도감에 멈췄던 숨을 내쉬고, 급하게 그를 불렀다.
“도와주세요! 빨리…! 체자레가…!”
사하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리브 아스포델이 뛰쳐 들어왔다. 체자레와 닮은 분홍색 눈이 바닥에 주저앉은 사하에게로, 그가 끌어안고 있는 체자레에게로 빠르게 옮겨갔다. 서둘러 둘의 곁으로 다가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리브는 사하에게서 체자레를 받아들었다. 리브의 얼굴은 체자레 못지않게 창백했다.
체자레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방을 나서려던 리브는 문득 사하의 존재를 기억한 듯 사하를 돌아보았다. 리브를 따라 일어섰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던 사하는 말 없이 리브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 또한 그리 좋은 안색은 아닐 거라 확신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줄 수 있겠니?”
얼마나 오래 걸릴지 리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와 체자레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사하는 그대로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저 무사하기를, 체자레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리브가 사하가 있는 방으로 돌아온 것은 한 시간이 훌쩍 넘긴 후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사하는 빠르게 고개를 들어 지쳐 보이는 리브의 얼굴을 마주했다. 절박함이 서린 사하의 눈빛에 리브는 사하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하. 내가 너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겠니?”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사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저는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체자레를 우선시 할 수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사하의 눈은 정직했다. 사하의 말을 들은 리브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함과 슬픔, 그보다 깊고 어두운 절망이 스며든 눈이 사하의 빛나는 회안을 붙들었다.
“달루나가, 체자레의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자레에게서 직접 듣기도 했었고, 사하가 방문할 때 리브를 자주 볼지언정 달루나를 본 적은 손에 꼽았다. 희미한 기억 속의 달루나의 모습은, 체자레가 크면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닮은 인상의 여인, 곱게 늘어진 은발과 파리한 얼굴뿐이었다.
“…겨울병이라고 한단다. 불치병이고, 아마도, 체자레가 물려받은… 같은 병이지.”
리브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내용은 사하의 심장을 날카롭게 스쳐 갔다.
달루나도 오랫동안 병을 앓아와서, 증상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단다. 약이 있긴 하지만 그저 증세를 늦출 뿐, 완전히 낫게 할 수 있는 약은 아니라 달리 방도가 없어. 유전에 의해 물려받는 병이라 걱정하긴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보게 되니…. 리브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단정하게 묶은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흔들렸다.
다른 저택 사람들은 달루나가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체자레가 그 병을 물려받았다는 사실도 몰라. 그리고 그렇게 둘 생각이고. 리브의 눈에 드문 단호함이 보였다. 그들이 알아봤자 도움을 주지는 않을 거고, 안 그래도 위태로운 위치에 놓인 내 사람들에게 약점을 더 이상 만들어 줄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사하. 너도 비밀로 해주어야 한다. 체자레의 안전이, 목숨이 달린 일이야. 체자레가 너를 믿으니, 나도 너를 믿고 말해주는 거란다.
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해주세요.”
사하에게 체자레는 소중했다. 소중하단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로, 체자레는 사하의 작은 세상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체자레가 사라지면 남을 그 공허함이, 사하는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런 사하의 표정을 바라보며 리브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어린 사하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달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리브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약을 두 배로 구해야 할 자신이 바빠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체자레의 옆에서 그를 돌볼 사람은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체자레를 부탁한다, 사하. 항상 그래왔듯이, 그 아이 옆에 있으며 신경 써주렴.”
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싸늘하고 어두웠다. 한 서린 겨울밖에 남지 않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방문 앞에서 사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에 새겨진 무늬를 외울 정도로 자주 드나든 문턱이었건만, 오늘은 쉽게 발이 떼 지질 않았다. 몇 번이고 손을 들었다 다시 내리고, 차가운 복도에 얼마나 오래 서 있었을까.
“거기 서 있기만 하다가 갈려고?”
건너편에서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사하는 움찔했다. 그러나 들려온 음성이 메마르고도 잠겨있었기에, 사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조용히 들어선 방은 복도보다도 어둡고 차가웠다. 암흑 속에서 깜빡이던 사하의 눈은, 유일하게 방에서 빛나는 체자레의 은발을 머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달빛 아래 선 체자레의 얼굴은 대조되는 검은색 드레스가 아니었어도 수척하고 새하얬다.
하얀 손끝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모아, 체자레는 방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사하는 차마 몸을 생각해서라도 능력을 그렇게 막 쓰지 말라는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찾을 수 없었던 거지만.
“사하, 체자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구나.”
사하의 삼촌인 르루아 백작이 아스포델 가문에서 날아온 편지를 읽고, 사하에게 난감한 얼굴로 말해줬을 때처럼, 사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체자레가 겪는 아픔이 덜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네가 가봐야겠구나. 장례식 전에 도착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네가 옆에 있어 주는 게 그 아이에게도 위안이 되겠지.
아무런 말도, 위로도 건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체자레에게 과연 어떤 도움이 될까 싶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체자레는 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체자레의 얼굴에 운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사하는 안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몰랐다.
웃고, 이따금 조용히 분노를 표출할지언정, 사하는 체자레의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엔 체자레는 사방에 적이 너무 많았고,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짓는데도 경계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작은 반짝임이 사하의 눈길을 끌었다. 체자레는 사하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은발 위에 자리한 머리 장식을 매만졌다. 은색의 달과 분홍색 꽃이 어우러진 장식은 누가 봐도 체자레와 퍽 어울리는 모양새였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체자레의 얼굴에는 씁쓸함과 비틀어진 웃음만이 존재했다.
“이거,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준 첫 선물이라고 들었거든.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그러셨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 죽을 때까지 한시도 떼놓지 않으시다가, 이젠 내가 죽을 때까지 간직하게 생겼네.
차마 괜찮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체자레가 괜찮지 않다는 건 사하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하는 천천히 다가가 체자레의 손을 잡았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워, 사하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유 능력을 쓸 뻔했다. 체자레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전까지.
“그거 알아, 사하?”
건조했지만 처절했고, 서늘했지만 분노가 서린 목소리에 사하는 간신히, ‘뭐를?’ 한 단어를 꺼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아픈 건 알고 있었어.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 하지만 근 반년간, 어머니의 병세는 갑자기 악화했어. 약은 꼬박꼬박 드시고 있다고 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설마 내가 모를 줄 알았을까. 체자레는 여전히 울지 않았다. 목소리는 점차 잠겨 들어갔지만, 파리한 얼굴엔 눈물 하나 흐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한 것은, 내가 아프기 시작한 후, 얼마 안 된 일이라는 것을.”
아니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그 말에 텅 빈 겉껍데기인 위로 빼고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체자레는 영리했고, 똑똑했고, 자신이 놓인 위태로운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약을 두 배로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리브를, 달루나가 자신의 몫의 약을 체자레에게 주라고 설득했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체자레 역시 눈치채고 있었지만, 차마 싫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을. 그저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 것을. 약을 꼬박꼬박 먹으면서도 하루하루 죽어가는 느낌이었을 것을, 사하는 알고 있었다.
“슬퍼. 원망스러워. 하지만 지금 가장 강하게 드는 감정이 뭔지 알아?”
무서워. 담담하게 꺼낸 그 말이 너무나도 무겁고, 잘못 건드리면 깨질 유리 같아서 도리어 사하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이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워. 하고 싶은 것 하나 못하고, 이루고 싶은 것 하나 못 이루고. 저택 밖으로 한 발짝 못 나가, 숨도 제대로 못 쉬다가 그렇게 차갑게 죽는 건, 그 무엇보다 싫어.”
사하의 손 아래, 체자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문을 등지고 선 체자레의 얼굴은 어둠에 잠겨있었지만,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그렇게 죽지 않을 거야, 사하.”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난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슬픔과 분노, 결의가 뒤섞인 분홍빛 눈을 마주 보며 사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알아.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설령 누가 너를 낭떠러지로 내몰더라도, 네가 떨어지게 두지 않을 거야. 사하는 조용히 다짐했다.
체자레,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해낼 거야. 그 무엇이든지.
* * *
사하는 혹시라도 곤히 잠든 체자레를 깨울까 발소리를 죽이고 의자 근처로 다가갔다. 노크 소리에도 깨지 않아서 깊이 잠든 것 같았지만, 사하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열여섯이 된 체자레는 더 이상 어린아이라 하기에는 성숙해 보였다. 그 특유의 분위기나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한몫했겠지만. 창백하고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얼굴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어본 어른의 것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사하는 잠시 체자레를 깨워야 하나 고민했다. 책을 보다 그대로 잠들었는지 자고 있는 자세가 썩 편하게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졸리면 편하게 누워서 자도 되련만, 체자레가 깨어있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바쁘게 지내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만 될 뿐이었다.
아무리 약을 먹고 있다고 해도 병의 차도는 날이 갈수록 확실히 드러났다. 잠이 많아지는 것 또한 겨울병의 증상 중 하나였기에 사하가 방문했을 때 체자레의 잠들어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잠들었을 때만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었으면 바랬지만, 체자레가 잠들어 있는 모습은 평온하다기보단 생명 없는 인형 같았기에 사하의 마음은 오히려 불편해졌다.
“왔으면 깨우지 그랬어?”
어느새 깼는지 체자레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자세를 고쳐앉고 있었다. 약간 흐려진 눈은 사하를 담고 둥글게 접혔다. 체자레의 진심 된 미소는 손에 꼽을만한 사람들에게만 지어지는 것이었기에 사하 역시 드물게 작은 미소를 마주 지어주며 대답했다.
“많이 피곤해 보여서.”
사하의 눈길이 아직 체자레의 손에 들려있는 두꺼운 서적으로 향했다. 말로 꺼내지 않은 조용한 물음에 체자레는 보던 곳을 표시해두고 책을 덮었다. 표지에 보이는 제목을 보아하니 의학서적이 분명했기에, 사하의 눈이 관심으로 미약하게 반짝였다. 체자레는 이를 눈치채고 작게 웃었다.
“다 보면 빌려줄게. 나보단 네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네 능력이 능력이다 보니.”
인맥과 재력이 되는 귀족 가문은 자식이 초능력을 발현하는 순간부터 능력을 제대로 제어하고 활용할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을 붙이는 게 보편적이었다. 사하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치유와 관련된 능력은 크게 우대받았기에 르루아 백작이 수소문해 좋은 선생을 붙여주었다 들었었다. 치유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있기 위해 의학 또한 배우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하가 의학을 배우는데 의지를 불태우는 이유는 오로지 체자레 때문이었다.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악을 쓰고 반쯤은 이해 가지도 않는 온갖 의학서적을 구해 읽어보는 체자레 옆에서 사하 역시 자연스레 따라 같은 책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체자레에 사하가 놀라 무슨 일이 있었냐 물어보기 전에 체자레가 눈짓했다. 밖에 아무런 기척 안 느껴지지? 사하는 체자레의 의도를 파악하려 눈을 몇 번 천천히 깜빡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무슨 얘기를 하려고?
체자레는 책을 옆으로 성의 없이 던지고 팔짱을 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사하.
“가망이 없는 것 같아.”
가볍게,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말이었기에 사하가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히려 목소리가 떨리는 쪽은 사하였다. 하지만 사하가 달리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체자레가 가로막았다.
“오해한 것 같은데, 끝까지 들어봐, 사하.”
난 포기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평소와 다름없는 결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사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체자레의 잔잔한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체자레는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갈까 싶었는지 아예 일어서 사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어느덧 길게 길러 가슴 밑까지 흘러내리는 사하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체자레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프기 시작한 지 벌써 3년이 흘렀어. 그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겨울병에 대한 건 모두 찾아봤지. 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제국 전체의 의학서적을 뒤지다시피 하면서까지 말이야. 아마도 웬만한 어른보단 우리가 이 분야에 대해서 더 잘 알걸? 그런데도 완치할 방법은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지. 3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냐, 특히 나에게는.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건, 이 제국에서 절대로 찾을 수 없어.”
적어도 이 제국의 황제가 폐쇄정치를 이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솔레유 제국 안에서 해답은 찾을 수 없어.
사하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부정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체자레가 맞다고 인정하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발언이었다. 아무리 귀족 세력의 입김이 셀지라도 황제의 통치에 반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엔 후환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괜히 현재 황제인 리길 콜레우스 솔레유가 암암리에 독재자라 불리고 있겠는가.
당장 최근에도 헬리오스 공작가의 전 가주, 아게나 헬리오스가 반역죄를 지어 그의 가문 전체가 멸문당했었다. 다른 가문도 아닌 상위 8가문이자, 그중에서도 영향력이 높았던 헬리오스 공작가였기에 더욱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사하는 체자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체자레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만큼은 차분하고 진지했다.
“다들 말하지만 않을 뿐이지, 알고 있잖아. 제국 밖 섬나라들과 교류도, 무역도 거의 끊긴 지금 이 제국은 제자리걸음만 할 뿐, 절대 발전할 수 없다는 걸. 그게 의학 지식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든.”
그리고 결정적으로, 겨울병은 제국에서 시작된 병이 아니야. 당연히 제국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병에 관련된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어. 치료법을 찾기 위해선 제국을 넘어서는, 외부의 지식이 필요해.
이 세상 어딘가엔, 내가 찾고 있는 치료법이 존재한다고 믿어. 체자레의 분홍색 눈이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그럼 제국 밖으로 나가서 찾아보려고? 쉽진 않을 텐데.
사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체자레를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니, 떠나겠다는 얘기가 아니야. 언젠간 제국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냐. 체자레는 사하를 반듯이 응시해왔다.
“사하, 난 아스포델 공작가의 가주가 될 거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사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체자레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순간 하얘질 만큼 무겁고도 위험한 발언이었다. 체자레에게는 어쩌면, 황제의 통치를 의심한 것보다도. 이 저택 안에서 체자레가 가주의 ‘가’자만 꺼내도 경을 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체자레가 모를 리는 없었다.
내가 황제의 폐쇄정치가 문제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문제는 황제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냐. 귀족, 그러니까 상위 8가문이 황실의 세력을 견제하느라 오히려 폐쇄통치를 악화시키고 있으니, 문제의 중심은 귀족에게 있지. 황제 하나 바뀐다고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 이거야. 귀족가부터 바꿔나가야 해. 천천히, 안에서부터.
그러기 위해선 내가 힘이, 권력이 있는 자리로 올라가야 하지. 어중간한 위치는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으니, 정점까지.
“…리브 님은, 뭐라고 하셨어?”
체자레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아직 얘기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마도 결사반대하실걸. 내가 건강한 몸으로 저 우아한 싸움판에 끼어든다 해도 뜯어말리실 판에, 아픈 상태로는 더 볼 것도 없지. 그리 말하면서 검지손가락을 입술로 가져다 댔다. 그러니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건 이 가문 내에서 내 입지가 조금 더 확실해졌을 때일 거야. 뭘 걱정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나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어서.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너도 비밀로 해줘.
체자레의 부탁을 사하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매번 너에겐 고맙고 미안한 일만 생기네, 조용히 속삭인 체자레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 이미 밑 작업은 시작된 지 오래니까.
천천히, 아스포델 공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습기에 종이가 젖어 들어가듯, 체자레는 아스포델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저택의 하인이나 하녀 중 아스포델 공작 개인에게 충성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공작은 단순히 돈을 주는 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체자레가 공략할 대상은 그들이 아니었다.
아스포델 가문의 귀족들. 공작의, 체자레의 핏줄, 친척들. 지금은 아스포델 공작이 가문 전체를 빈틈없이 꽉 쥐고 있었기에 그들의 발언권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자레가 어떤 방식으로든 아스포델 공작을 끌어내린다 하더라도, 그들의 협조 없이 체자레가 가주의 자리를 거머쥐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체자레에겐 다행히도, 날이 갈수록 그런 공작에게 불만을 품은 가문의 일원들은 늘어만 갔다. 체자레는 그런 그들의 호감을 사려 노력하며 교묘하게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스포델 공작이 점찍어둔 후계자, 케레이스 아스포델보다 체자레는 두뇌도, 능력도, 대처도 뛰어났다. 체자레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던 가문의 일원들도 이는 충분히 알 정도였으니.
더 나아가 그보다 머리가 굴러가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케레이스가 다음 아스포델 공작이자 가주의 자리로 오른다면, 현재 공작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억압하리라는 것을. 그런 그들에게 체자레는 다른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가장 유혹적인 선택지였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줄게.”
뜬금없는 체자레의 말에 사하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기회? 체자레는 담담하고도 쓰라리게 웃었다.
“지금까지 네가 내 옆에 있으면서 겪어왔던 눈치싸움은 곧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야. 이제 진짜로 진흙탕 싸움밖에 남지 않았어. 어쩌면 말 그대로 피 터지는 전쟁이 될 수도 있겠지.”
내 아버지는 그렇다고 치고, 네 안전까지 나는 보장할 수 없어. 아버지는 성인이고, 좋든 싫든 엄연한 아스포델 가문의 귀족이고, 본인 하나쯤은 지킬 힘이 있어. 넌 아직 성인이 되려면 5년이나 남았고, 아스포델 공작가에 비하면 르루아 백작가가 그리 큰 힘이 있는 것도 아니야. 네가 르루아의 후계자도 아니니 더욱 버리는 패로 보일 수도 있어.
힘들 거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러니 네가 떠나고 싶다면, 편하게 살고 싶다면, 내가 넌 어떻게 해서든 빼내 줄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체자레는 제 할 말을 마치고 조용히 사하의 답을 기다렸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후회도,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그의 하얀 손가락만 무릎 근처의 드레스 자락을 조금 세게 구기듯 쥐었을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정적을 깨뜨린 사하의 목소리는 간절했고, 애달팠고, 절박했다. 체자레의 손을 잡아 오는 사하의 손은 그의 목소리처럼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너를 떠나. 다른 무슨 말이라도 좋아. 내가 귀찮다고 해도 돼. 내가 싫다고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하지만….”
떠나라는 말만큼은 하지 마.
갈수록 작아져 거의 들리지도 않은 마지막 말은, 체자레의 귀에 선명하게 박혀왔다. 처음 널 본 순간부터, 체자레, 난 네가 아니면 안 되었어.
체자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젖은 눈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푹 숙여버린 사하의 머리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하의 손 아래에서 체자레가 자신의 손을 살짝 빼자 사하는 본능적으로 매달리려고 한 듯 움찔했지만, 차마 붙잡지는 못했다. 체자레는 자유로워진 손을 천천히 올려, 앞으로 쏠린 사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사하, 넌 참 미련한 사람이야.”
나직한 목소리에 작은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고, 사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분홍색의 눈동자가 회색의 눈물 젖은 눈동자를 응시해왔다. 널 보고 있으면 왠지 타버릴 것을 알면서도, 불빛으로 뛰어드는 나방이 생각나기도 해.
체자레는 빙긋이 웃었다. 그렇지만 난 이기적인 사람이라, 네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놓아줄 수는 없겠네. 부디 이 선택을 네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 사하.
* * *
아스포델 가문에 작은 파란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아스포델 공작가의 후계자인 케레이스 아스포델이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아 그의 성인식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아스포델 공작이 한 선언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공식적으로 케레이스에게 아스포델 공작이자 가문의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 물론 이것저것 정리하고, 인계할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지금부터 케레이스를 아스포델 공작으로 대우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싸늘한 정적이 파티장 안으로 내려앉았다. 바늘 하나를 떨어뜨린다면 방 안의 모든 이들에게 들릴 게 분명한,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체자레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지금이었다, 자신의 노력이 어느 방향으로든 결실을 볼 순간이.
이 판은 나의 승리로 끝날 것인가, 쓰라린 패배로 끝날 것인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가주님.”
얼어붙은 침묵을 깬 이는 아스포델 가문의 일원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고,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이였다. 그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포델 공작을 서늘하게 응시하며, 자신의 말을 반복했다. 저는 아스포델 가문의 일원으로서 케레이스 아스포델을 차기 가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언제 침묵했냐는 듯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소란이 일었다.
동의합니다. 발언을 재고해주십시오, 가주님. 케레이스 님은 공작의 자리에 어울리는 재목이 아닙니다. 아스포델 가문의 미래를 위한다면, 이것이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공작님.
얼굴이 점차 붉으락푸르락 분노로 달아오르던 아스포델 공작이 이내 ‘그만!’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울리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냉담한 시선으로 공작과 그의 옆에 선 케레이스를 볼 뿐이었다.
“그럼 케레이스 말고 달리 적합한 후계자가 있나!”
벼락처럼 화내는 공작에게 처음 침묵을 깨뜨린 사람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체자레 공녀님이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처음 후계자였던 리브 님의 따님이니, 적합성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공녀. 체자레 공녀. ‘그 아이’, 하다못해 ‘아가씨’도 아닌. 원래 자신의 것이어야 했을 이름.
환희로 가득한 웃음을 간신히 꾹꾹 눌러 담으며 체자레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백해진 케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당황으로 떨리는 그의 눈이, 손이 보였다. 저리도 유약하고 순진해서야. 사람으로서의 흠은 아니지만, 한 가문의 가주가 가지기에 좋은 성정은 아니지.
체자레는 아스포델 공작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러나 케레이스를 싫어하냐고 물으면, 선선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던 것도 한몫했지만, 케레이스는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케레이스만큼 체자레가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물이 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체자레는 케레이스를 끌어내리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았다.
파티도, 선언도, 어영부영 끝났었다. 아스포델 공작은 그대로 물러서기에 고집이 강한 이였고, 가문의 일원들 또한 이번만큼은 절대로 물러서지 못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아무리 공작이 저 천한 핏줄을 이은 계집애에게만큼은 가주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고 발악해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디찬 시선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할아버님, 저 가주 자리를 잇지 못하겠습니다.”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케레이스가 애걸하다시피 공작에게 매달리자, 아스포델 공작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케레이스가 가주 자리를 잇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케레이스가 몸이 편치 않아, 사촌 동생인 체자레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소문이 귀족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기까지는 그로부터 채 몇 주도 필요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아스포델 공작가의 후계자로 선언되던 날부터, 체자레는 보란 듯이 어머니가 소중히 간직하던 섬나라 풍의 의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저택 안에서 체자레에게 막힌 길은 없었고, 갈 수 없는 방은 없었다. 살면서 거의 보지도 못한 의복을 입고 다니는 그를 일부 일원들은 괴짜 보듯이 했지만, 그 달리 흠잡을 데는 없었기에 일찍 여읜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또는 기행 정도로 받아들였다. 아스포델 공작은 그런 그를 눈에 담기도 싫다는 듯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날도 얼마 가지 않았다.
“저도 이제 가주 대리의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고, 공작님은 몸이 많이 편찮으신지 방에서 제대로 나오시지도 못하는데. 아스포델 가문의 별장으로 공작님을 요양 보내드리는 건 어떨까요? 적적하시지 않게 케레이스 오라버니가 모시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말이죠.”
노골적으로 위험분자를 깔끔하게 치워버리겠다는 뜻이 보였지만,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체자레의 시선이 창백한 얼굴로 바닥만 바라보는 케레이스에게 머물렀다가, 그 옆에 선 자신의 숙모이자 케레이스의 어머니에게서 멈추었다. 그 역시 창백한 낯이었지만 체자레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쳐왔다. 그의 입술이 보일 듯 말듯 달싹였지만 체자레는 어렵지 않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약속은, 지켜주세요.
체자레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고개를 약간 숙여 말없이 그에게 전달했다. 물론이죠, 거래의 조건대로, 케레이스나 공작님이나 더 이상 제 앞을 방해하는 일이 없다면, 당신들의 목숨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이 권력 싸움에서 발을 뺄 수 있도록 도와드리죠. 오래되지 않은 날의 대화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울려왔다.
체자레는 소박한 마차가 아스포델 공작과 케레이스를 태우고 사라지는 것을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굳이 마중 나가지는 않았다. 피차일반 그쪽에서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뭐하러. 안 그래도 할 일이 더욱 많아진 체자레였기에, 그들에게 더 시간을 할애하기엔 썩 내키지 않았었다.
어차피 자신이 이 저택에 머무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체자레는 준비가 되는 대로 수도로 올라가 수도의 저택에서 생활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본격적으로 귀족 사회에 데뷔하기 위한 이유도 컸지만, 그리 좋은 기억이 남지 않은 저택에서 필요 이상으로 생활하긴 싫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리브 아스포델 역시 큰 설득 없이도 체자레와 같이 가겠다고 했다.
체자레는 가벼운 손길로 자신의 팔찌에 달린 작은 나비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짙은 푸른색의 보석은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 체자레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지난 생일 선물로 팔찌에 장식을 직접 달아주던 모습은 눈만 감아도 선명하게 떠올라, 체자레는 답지 않게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만 있으면. 곧 수도에서 만날 수 있을 테지. 이제 더 가까이에서 생활하니, 더 자주 볼 수도 있을 거고.
얼른 보고 싶다, 사하. 체자레는 나비 장식에 입 맞추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문이 쾅 하는 소리와 부서질 듯 열리며, 이국풍의 의복을 입은 이가 뛰쳐 들어왔다.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리브 아스포델은 보기 힘든 체자레의 여유 없는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그를 담담히 맞이할 뿐이었다.
“진짜예요?”
숨을 채 고르지도 못하고 체자레가 물어왔다. 질문의 형태이긴 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답에 확신을 얻고자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리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넋이 나가려는 머리를 붙들며 체자레는 이성을 유지하려 입술을 짓씹었다. 웬만한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체자레에게도, 이번의 일은 그만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르루아 백작가의 후계자, 제란 르루아가 귀족의 직위를 버리고 반란군에 가담했다. 르루아 가문 전원이 반역죄로 투옥되었다.
결코 쉽게 넘어가질 수 있는 죄목이 아니었다. 헬리오스 가문의 멸문 이후로, 반란군이 점차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굳건히 하고 있어서, 더더욱. 아게나 헬리오스 본인이 반란군을 창립한 ‘락스퍼’와 동일인물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 지금 그 무게를 더 실감할 수 있어서, 체자레는 그저 막막했다.
가문을 버리고 반란군에 들어간 제란 르루아 본인? 볼 것도 없이 잡히는 순간 처형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체자레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철없이 뒷생각도 하지 않고 일을 저지른 제란 르루아야, 처형되든 말든. 사하의 사촌이라 할지라도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이라 제 선 안에 들인 사람은 아니었다.
거기서 그쳤다면, 체자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제의, 귀족들의 분노가 거기서 끝날 리는 없었다. 르루아 백작, 제란 르루아의 어머니, 일가친척 전부.
그리고, 사하.
체자레는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제 르루아 가문에서 안전한 이들은 없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한 명의 일원도 남기지 않고 헬리오스의 성을 가진 이들이 전부 사형에 처한 과거만 봐도, 사하에게 불똥이 튈 것은 확실했다. 심지어 공작가도 상위 8가문도 아닌, 방계의 백작가라면 선처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르루아 가문의 상위 가문인 메린트 후작가?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르루아 가문을 싸그리 죽여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체자레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해 가주 대리로 가문을 이끄는 지금, 르루아 가문의 선처를 부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뿐만 아닌 가문 전체가 흔들릴 것을 알았다. 가문 일원 사이에서, 귀족 사회에서 조금씩 쌓아 올린 자신의 입지도, 단 한 순간의 선택으로 날아갈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하만큼은. 사하, 너 하나만큼은.
체자레에게 사하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체자레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리브가 방안을 왔다 갔다 하는 체자레를 보며 그를 달래야 하나, 말을 꺼내려고 했을 때쯤.
“…르루아.”
체자레가 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사하, 르루아.
르루아 가문의 일원은 전부 사형선고를 받아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빠져나가기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지만, 사하가 르루아 가문의 일원이 더 이상 아니게 된다면?
솔직히 말해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한 가능성에 패를 걸 만큼 체자레에게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하를 르루아 가문 자체에서 빼낼 수만 있다면….
“저번에, 엘제스 백작님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준 적이 있었죠?”
아스포델 공작의 억압적인 지배하에 피해를 본 것은 비록 아스포델 가문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포델의 방계 가문인, 엘제스 백작가와 이드리스 백작가 또한 공작의 방식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엘제스 가문은 이드리스 가문보다 축적해둔 부가 적은 편이었기에, 갈수록 하락세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주 대리로서 가문의 일을 물려받게 되자마자 체자레가 한 일 중 하나는 방계 가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아스포델 공작은 한낱 백작 가문 둘이 공작가에 무슨 영향을 끼치겠냐고 비웃었지만, 체자레는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정작 체자레만 해도 공작이 그렇게 무시하던 가문의 일원들의 도움으로 가주 대리 자리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그런 현재, 체자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드리스 백작과는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엘제스 백작과는 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최근 엘제스 백작 영애의 초능력 선생을 찾는 데 지대한 도움을 준 이후로, 엘제스 백작은 체자레에게 빚을 지었다며,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었다.
그 도움, 아무래도 지금 써야 할 것 같은데. 체자레는 혼잣말을 하고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리브에게 말했다.
“아버지, 엘제스 백작님에게 서신을 보내주세요. 아니, 아니다. 제가 직접 보낼게요.”
“체자레, 괜찮은 것 맞니?”
리브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체자레는 웃었다. 유쾌함은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지만 단호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괜찮도록, 제가 만들 거니까.”
그날부터 체자레는 따로 누구를 볼 시간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바빠졌다. 평소 처리하던 가문의 일은 물론이고, 황실에 자신의 약혼자, 사하에 관한 탄원서를 보내고, 엘제스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숨돌릴 틈이 없었다.
“사하를 엘제스 가문으로 입양해 달라고?”
제란 르루아의 사건이 터지고 체자레가 귀중한 시간을 내서 만난 첫 사람은 당연하게도 엘제스 백작이었다. 퍽 곤란한 얼굴로 서신에 써서 보낸 내용을 되묻는 그에게 체자레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곤란하신 건 알고 있어요. 당신도 한 가문의 가주인 만큼, 가문에 혹시라도 불이익이 올까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절대로 르루아 가문 건으로, 당신이나 당신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해 체자레는 수도에 올라온 지 채 1년도 안 되어 만든 모든 연줄을 다 끌어다 쓰고 있었다. 친분을 만들어둔 가문을 설득해, 철없는 르루아 백작 후계자의 행동에 의해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한 자신에게 동정표를 던지도록. 많이 바빠지긴 했어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옛날부터 체자레와 사하가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는 소문은 돌고 있었으니까. 이거 하나만큼은 할아버님께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네. 체자레는 비웃듯 생각했다.
“당신의 직계로 입양해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저도 사하가 괜히 엘제스 가문의 후계자 문제로 복잡해지는 건 원치 않고. 그저 사하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르루아 가문에서 빼내려는 게 다예요. 이번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앞으로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성심성의껏 지원해드린다 약속할 수 있어요.”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늘 발언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재고하고 꺼냈던 체자레 치고 파격적인 제안이라는 걸, 엘제스 백작은 모르지 않았다. 엘제스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체자레가 그만큼 절박했던 만큼, 그가 체자레의 거래를 거절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 뒤론 체자레 본인도 놀랄 만큼 일이 일사천리로 풀렸다. 제아무리 아스포델 공작 대리가 직접 보낸 탄원서라 할지라도 황실의 부정적인 응답을 예상했던 체자레는 내심 놀랐었다. 아무리 미성년자라 할지라도 사하는 엄연히 르루아 가문의 일원이자 르루아 백작의 조카였기 때문에 체자레는 혹시라도 황실의 답변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반복해서 읽어도 체자레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무미건조한 내용 외엔 도출해낼 수 없었기에, 체자레는 당장 황실 쪽에 대해선 신경을 끄기로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하 본인의 의사뿐이었다. 제아무리 약혼자라 할지라도 반역죄로 투옥된 그를 면회 갈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체자레는 서신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서신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르루아의 성과, 가문의 권리를 전부 포기하는 각서를 쓰고, 그가 ‘사하 르루아’가 아닌 그냥 ‘사하’로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면 자신이 데리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체자레가 사하를 데리러 가겠다고 한 날까지 답장은 없었던지라, 체자레는 여유로운 미소 뒤로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거절했다면, 어떡하지.
사하가 르루아의 성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체자레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이 사하에게 요구한 것이 그의 부모를, 가족을, 자신이 아끼던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나오라는 요구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체자레는 뒤늦게 사하가 그를 거절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야 했다.
그랬기에 감옥의 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하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체자레는 깊은 안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야, 사하. 데리러 왔어. 체자레가 손을 내밀어 사하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아 출발하기까지, 사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음 외에 정적이 흐르는 마차 안에서, 둘은 작은 창문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 정적을 먼저 깨뜨린 쪽은 체자레였다. 곱게 접어 로브의 주머니 속에 넣어둔 서류 한 장을 꺼내, 체자레가 가만히 사하에게 내밀었다. 사하는 말 없이 그것을 받아 열어 보고, 눈을 올려 체자레를 바라봤다. 이건? 그늘이 서린 회색의 눈동자가 조용히 물어왔다.
“네 입양 서류야. 오늘부터 넌 ‘사하 엘제스’라는 이름으로, 엘제스 백작의 먼 조카로 살게 되는 거야.”
금시초문인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하는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체자레의 말을 경청했다. 이 소식에 놀라기엔, 지난 몇 주간 그가 겪은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놀랄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의 텀을 두고, 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의 뜻이었다.
“나를 어떻게 빼냈나 했더니, 그런 방법을 썼었구나.”
“방법이라 하기엔, 편법에 가깝겠지만 말이야.”
체자레는 가만히 웃었다. 이름은 엘제스라지만, 엘제스 저택에 갈 일은 아마도 얼마 없을 거야. 어차피 내 약혼자니까 너도 나와 같이 아스포델 저택에서 같이 살 거라고, 미리 말해뒀거든. 나중에 엘제스 백작님은 같이 만나봐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체자레의 말이 끝나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체자레는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사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하는 손끝으로 입양 서류를 한참을 만지작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냥 약혼을 파기하고, 나를 끊어내는 게 너한테도 덜 위험했을 텐데.”
예상했던 원망의 말도, 들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감사의 말도 아닌, 평소의 사하가 자주 해주던 걱정의 말이었기에, 체자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당황도 잠시, 체자레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전에 말했었잖아, 기억 안 나?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다면, 딱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그리고 그때 넌 거절했었지. 체자레는 생긋 웃었다. 그러니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놓아줄 생각은 없어.
이젠 전에 네가 했던 말을, 내가 그대로 돌려줘야겠네. 담담히 말하며 체자레는 사하를 곧게 응시했다.
“너를 홀로 남게 한 나를 원망하고 싶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어.”
그러니 내 옆에 있어. 내 옆을 떠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체자레의 말이 끝나자 드디어 사하의 얼굴에 표정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떠올랐다. 웃음이었을까, 울음이었을까. 후회였을까, 안도감이었을까. 그 모든 것이 섞인, 복잡한 무엇의 감정이었을까.
“내가… 내가 너를 원망할 리 없잖아.”
너만큼은, 내가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체자레,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네가 전부인데.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한테 네가 남아있는 한, 난 항상 괜찮았어.
체자레는 가만히 사하의 손을 잡았다. 그들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 * *
장발의 짙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사하는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에서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가도 될까, 체자레. 나직이 묻는 그의 질문에 체자레의 목소리가 문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들어와, 사하.
방으로 들어온 사하의 눈은 늘 그렇듯, 체자레부터 찾았다. 거울 앞에 앉아, 하녀들이 자신을 단장해주는 걸 마무리 짓기까지 기다리고 있던 체자레는 거울에 비친 사하의 모습을 향해 빙그레 웃어주었다.
다 끝났으면 이만 가봐도 돼. 나가는 건 사하가 날 에스코트 해줄 테니까. 하녀들이 체자레의 말에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자, 체자레는 사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잘 어울리네. 처음 입어본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익숙해 보이는걸.”
사하는 체자레와 같은 푸른색의 섬나라 풍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옷을 맞춰줄 테니 입어보지 않겠냐는 체자레의 제의에 그는 선선히 수긍했었다. 사실 무엇이라도 체자레가 입어달라 요청했다면, 과연 사하가 거절했을지부터가 의문이었지만.
하얀색의 섬나라 풍 의복을 입은 체자레가 사하 곁으로 다가와, 가볍게 손을 잡아 왔다. 준비됐어? 사하가 물었다. 준비는 예전부터 되어 있었어, 체자레가 답했다.
오늘은 체자레의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그의 성인식이자, 그가 공식적으로 아스포델 공작이자 가주로 인정되는 날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음에도, 체자레는 들뜨기보단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하를 향해 체자레가 웃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사하, 잠깐 고개 좀 숙여볼래?”
어느덧 체자레의 키를 훌쩍 넘긴 사하는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귓가에 서늘한 손길이 닿고, 장식 없는 피어싱을 조심스레 빼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묵직한 무언가를 귀에 차례대로 달아주고,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거울에 비친 남색의 머리카락 사이에, 붉은색의 나비가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체자레가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우리 약혼식은 네 스무 번째 생일이 지나고 나서 공식적으로 올리겠지만, 지금 뭐라도 주고 싶었거든. 사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체자레의 눈동자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럼 이제 가볼까, 사하. 나방처럼, 나비처럼, 저 눈부신 빛을 향해 날갯짓을 해볼까.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체자레는 속삭였다. 저 밖으로, 아직 한참 남은 길로, 다시 나아가볼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도달하기엔 갈 길이 멀다 못해 그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체자레는 충분히 견뎌낼 준비, 걸어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함께 그 길을 가준다고 한다면, 언제 끝에 도달할지 모르는 힘든 길도,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사하, 나의 빛. 체자레는 미소지었다. 신도, 운명도, 믿지는 않지만. 네 빛이 영원하길, 나는 오늘도 조용히 달에 기도를 올려보아.
저 영롱한 달빛이 언제나 우리를 위해 노래하고 있기를.
Written 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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