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로우조로│행방불명된 길치의 유언

검은 주인을 닮는다더라


나는 가본 적도 없는 그곳의 기후를 사랑했다.

너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로우는 자신에게 건네진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용의 비늘 아래에서 벗어난 와노쿠니의 연회가 연일 7일째 이어지던 밤이었다. 축제에 가까운 파티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선의 토니토니 쵸파, 선장 겸 선의 트라팔가 로우, 선의 불사조 마르코가 붙들어 맨 끝에 3일째에 눈을 뜨고, 5일째에 그들이 기절하든지 말든지 술을 들이붓던 조로는 7일째 되던 날 하얀 종이를 들고 연인의 앞에 나타났다.

“보면 몰라? 비블 카드다.”

한 손으로 심드렁하게 종이를 쥔 조로는 손목만 까딱여 종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합친 듯한 크기의 하얀 종이가 무기력하게 팔락인다. 비블 카드가 뭔지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라고 지적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다음에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걸 주는 거냐고 따져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말을 삼켰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이런 걸 건네는 남자는 분명 아무 생각도 없을 게 뻔했으니까.

생명의 종이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필요한 것은 도착지가 되는 사람의 신체 일부다. 머리카락, 내지는 손톱, 피, 그런 것들.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성장을 멈추는 그것들은 종이가 되면 자신들이 나고 자란 몸의 주인을 찾으며 사람의 영혼을 감히 대변했다. 그의 손안에서 힘없이 팔락이는 하얀 종이 역시 롤로노아 조로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의 의미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그래서 로우는 받고 싶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계승되는 바다의 기술은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만들어냈는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었으나 로우는 최초로 이 종이를 만든 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죽을 때 함께 사라지는 종이 같은 걸, 대체 누가 만든단 말인가.

때문에 로우는 모자챙을 꾹 누르고 얼굴을 가린 뒤에 안 받겠다고 말했다. 수술 중 세 번도 넘게 심장이 멈췄던 남자는 지금 기분이 안 좋냐 물었다. 로우는 짜증을 내며 받기 싫은 거라 말했다. 기절하는 와중에도 선장을 지키기 위해 든 검을 놓지 않았던 남자는 네가 받지 않으면 다르게 줄 사람이 없다고 그랬다. 그래서 능력으로 그의 심장을 꺼내 몇 번이고 손으로 직접 마사지해야 했던 로우는, 그가 일어날 때까지 그의 검에 묻은 피를 대신 닦아내며 눈뜨기를 기다리던 로우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에게 죽음의 두려움이 없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바다에서 대검호 같이 정신 나간 꿈은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꿈이었으니까. 그에게 물러설 때는 야망을 포기할 때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한계를 단정 짓지 않고, 전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할 때는 단 한 순간뿐이다.

미래의 해적왕이, 자신의 선장이 피하지 못할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이다음에도 밀짚모자에게 죽을 고비가 찾아오고 그걸 대신 막아서 넘길 수만 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질 것이다. 그래놓고서 그 정도면 싸게 먹혔다고 생각하겠지. 알고서 시작한 사랑이었다. 따지자면 그것마저 사랑했다는 것에 가깝겠다. 로우의 마음은 돌려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맹세컨대 로우는 우선순위에 연인을 넣어놓지 않는 그를 원망한 적 없다. 항로가 엇갈리게 될 날이 다가오며 함께한 시간보다도 떨어진 시간이 길어질 것을 알고 있다. 허나 그 모든 것들이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 두 마디도 되지 못하는 종이 너머로 죽어가는 그를 봐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설마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그러냐.”

조로가 말했다. 그때까지 열이 오른 눈가를 눌러서 진정시키기 바쁘던 로우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네가 대체 날 얼마나 한심하게 본 지 모르겠는데,”

“네 수술에만 XF형 수혈 팩을 다 썼어.”

상대방의 말을 끊은 로우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런데도 부족해서 너와 혈액형이 같다던 로보야를 수술실에 들였다가, 결국 이 나라 사람 중에서 XF형을 가진 사람들을 줄 세웠어. 나라를 구한 의인들에게 피를 주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었지, 나미야는 수혈 팩을 구하기 위해 돈까지 쓰려고 했다. 이 나라에 그런 건 없어서 무산됐지만.”

“…….”

“네가 죽을까 봐, 동맹 해적단에게 고개 숙인 네 동료들은 널 한심하게 생각한 건가?”

“…….”

“몸을 보살피라든가, 조금은 생각하고 움직이라든가 하는 말은 안 한다. 넌 그렇게 해서는 이룰 수 없는 목표를 가졌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하니까. 그럼 최소한 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아야지. 그건 한심한 게 아니다, 조로야. 간절한 거라고. 거기에 날 집어넣는 게 싫다면 네 동료라도 집어넣어라.”

말을 잇는 내내 폭죽이 터졌다. 연회에 빠질 수 없다던 불꽃이었다. 현란한 색깔들이 밤을 물들이고, 연회가 벌어지는 광장으로부터 떨어진 숲 절벽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날 수술실에서는 기계들이 요동쳤다. 수술을 보조하는 펭귄과 샤치가 긴박하게 바이탈 체크하는 목소리 말고 들리는 게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청소와 소독을 하는 폴라 탱 호 수술실에서는 아직도 네 피비린내가 났고, 그곳에서 가장 간절했던 건 나였다. 사황과의 결전에 목숨을 걸었던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너처럼 죽기 위해 싸우진 않았다.

“…네가 말한 대로, 난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건 안 해. 그래서 다음부터는 그럴 일 없게 할 거다, 같은 말은 너한테도, 나미 녀석들한테도 못 하겠지.”

조로는 자신의 비블 카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키겠다고 다짐한 약속을 남겨놓고서 죽을 생각은 없어.”

함께 밤을 지새우던 날이면 듣던 이야기였다. 자신의 꿈이자 친구의 꿈을 위해, 이 악물고 나아가는 이야기. 미래의 해적왕에게 대검호가 되겠다 약속한 이야기.

“…어쩔 수 없는 순간이 또 올 수도 있겠지. 카이도를 쓰러트린 지금이라면 딱히 무서운 것도 없는 것 같다만. 이 바다에서는 확신이 가장 위험하니까.”

“…….”

“그런 게 아니라면 난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다.”

거짓말.

“그 확신을, 네게 주고 싶었을 뿐이고.”

확신이 위험한 이 바다에서 비블 카드는 사라질 약속을 뜻했다. 결국 그는 제 손안에서 종이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유언으로 남는 일은 이미 경험해본 바 있었다. 그럼에도 로우는, 믿어버릴 것만 같았다. 죽지 않겠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괴물같이 자고 일어나면 낫는 그의 신체를. 끈질긴 그의 생명을.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를 들고 다시 만날 어느 날을,

“대검호가 될 때까지 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이건 내가 루피에게 했던 약속이라고.”

믿고 싶었다.

“…네 비블 카드는 엄청 타들어 가겠지.”

“글쎄.”

“내 손톱만큼 남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거야.”

“대검호까지 그렇게 멀리 남았다는 건가.”

“종이가 걸레짝처럼 너덜거릴 게 뻔하다고.”

“그래도 간단히 사라지진 않을 거야.”

“…안다. 직접 봤으니까.”

그는 죽음을 각오하던 마지막까지 용을 베고자 했다. 로우는 비블 카드를 받아드는 대신에 그것을 들고 있는 조로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갑작스럽게 품에 안긴 그의 양팔이 엉거주춤하는 게 느껴졌으나 상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의 피부를 대신하고 있는 붕대 너머로 규칙적인 진동이 느껴진다. 한 번의 심장박동으로 많은 양의 혈액을 내뿜을 수 있도록 단련된 심장은 다른 사람보다 느리게 뛰었다. 로우는 눈을 감고 그것을 가만히 들었다.

“…네 약속을 믿는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어.”

“뭔데.”

“너도 내 비블 카드를 갖고 있어라.”

“…….”

“그리고 언젠가, 네가 지킬 약속이 없어졌을 때. 그걸 보고 네가 직접 나를 찾아와. 얼마나 헤매든 상관없으니까…, 그러고 나면…….”

생명을 깎아 능력을 쓰는 나보다도 죽음이 가깝게 느껴지는 남자. 그러나 우습게도 너의 죽음만큼이나 상상하기 쉬운 건 네가 대검호가 되어서도 태평하게 길을 잃어놓고 넉살을 떠는 모습이었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로우는 언젠가를 상상해본다. 세 자루의 검은 허리에, 검초록색 두건은 팔뚝에 맨 채로 팔짱을 끼고서 웃는 그를.

주인의 영혼을 대신하는 종이는 떨어지면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더라도 서로를 끌어당겼다. 신세계에서 비블 카드는 언젠가 사라질 약속이었으나 어느 바다에서는 언제든 상대가 있는 방향을 알 수 있는 비블 카드를 그 사람의 영구 지침 삼기도 했다. 조로는 죽지 않겠다고 말했으니, 로우는 그 종이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윽고 뭔갈 고민하는 듯싶던 조로는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우는 그제서야 그의 비블 카드를 건네받았다.

남자의 비블 카드는 그를 담아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구김이 없었다.

*

로우는 조로에게 손가락 세 마디만 한 비블 카드를 찢어서 건넸다. 조로는 항상 로우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카드를 들고도 와노쿠니에서 길을 잃었다. 세 번 정도 능력으로 그를 절벽 숲에서 꺼내온 로우는 다시 손바닥만 한 비블 카드를 건넸으나 조로는 그걸 들고도 로우를 찾지 못했고, 결국 싸우전드 써니 호가 떠나던 날, 로우는 조로의 복대에 종이 한 장 크기의 비블 카드를 쑤셔 넣었다. 단독 행동을 하는 일이 잦은 탓에 혹시 모를 때를 위해 준비해둔 비블 카드가 많았던 게 다행이었다. 항해사와 고고학자가 입을 가리고 웃고, 요리사는 경악했으며, 연인은 누굴 길치 취급하냐며 찢어가려고 했으나 로우는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뒤에 싸우전드 써니 호는 떠났다. 먼저 떠난 그들의 배를 보던 로우는 주머니에서 받은 카드를 꺼냈다. 비블 카드는 배가 가는 방향으로 찔끔찔끔 움직였다. 마치 자기 자신을 두고 떠났다는 듯이.

*

그 뒤로는 바쁜 일상의 반복이었다. 카이도를 끌어내린 뒤로도 밀짚모자와 하트의 동맹은 깨지지 않았다. 포네그리프 해독 및 D의 역사를 파헤치기 위한 협력 관계로 변했을 뿐.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 묻는 선원들에게 26년 전 어인섬에서 사라진 로드 포네그리프라고 대답했을 때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던 건 여러모로 감사한 일이다. 로드 포네그리프의 정보를 찾기 위해 신세계의 바다를 역행하고 그랜드라인에서 캄벨트까지 흘러 들어갔을 동안에 그의 비블 카드는 손톱만큼 작아졌다가, 다시 복구되었다가, 어느 날은 끝이 조금 닳았다가, 사흘이 지나도록 어디 하나 사라지지 않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중에 티끌만큼 작아졌던 카드가 가까스로 크기를 되찾을 때면 왼눈을 감은 전보 벌레가 울었다. 그러고는 다 쉰 목소리로 묻는 것이다.

쫄았냐?

그럼 로우는 직전까지 두 손안에 비블 카드를 넣어놓고 기도 했던 자신을 숨기고 말했다. 그럴 리가.

그날도 별다르지 않았다. 폴라 탱 호는 로드 포네그리프와 함께 사라진 어인족을 봤다던 섬으로 가기 위해 신세계 바다 밑을 헤엄치고 있었고, 싸우전드 써니 호는 그들만의 모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누구랑 붙었던 거냐.”

-사람은 아니고 섬에 있는 괴수들이었다.

“괴수?”

-원래도 섬마다 기후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거긴 진짜로 특이했어. 처음엔 엘바프에 온 줄 알았다. 크지 않은 게 없어서 말이다. 하필 처음 만난 녀석이 뱀이어서 고생했지. 뱀한테는 성대가 없는 거 알았냐? 어쩐지 쵸파가 말을 거는데도 대꾸를 안 하더라고. 하늘섬에 사는 건 있었는데….

나른한 목소리로 말이 이어진다. 로우는 전보벌레의 수화기를 책상에 내려놓은 채 조용히 그가 떠드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정보 교환을 빌미로 각자가 눈에 담았던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하나의 일상이었다.

-…그쪽은 어때?

“로드 포네그리프의 소재를 아는 사람을 찾은 것 같아서 그곳으로 가는 중이다. 항해는 항상 똑같아. 어둡고, 조용하지.”

로우는 선장실에 나 있는 창을 보며 말했다. 어릴 때는 깊은 바닷속이 구름 너머 위에 있는 우주와 연결되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는 했다. 단순히 빛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다른 세상일 수가 있는 걸까 싶어서. 밤이 어둡다면 심해는 새까맣기까지 했다. 해류조차 만들어지지 않는 심연을 싫어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컴컴한 심해 속에서 조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다른 우주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유독 항해가 긴가 봐?

“신세계의 바다는 넓으니까.”

-그러냐.

“별일이군. 네가 그런 걸 다 눈치채고.”

-최근 들어 네 비블 카드가 작아지는 건 거의 못 본 것 같아서.

로우의 손에 들린 볼펜이 멈춘다.

-너희는 동쪽으로 가고 있구나. 우리랑 똑같네.

“…남쪽이다.”

-네 비블 카드는 아래로 안 가는데.

“그건 내가 이미 바다 아래에 있어서 그래.”

방향을 잡는 기준은 네가 보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였다. 로우는 당연한 상식을 묻는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에 오, 과연 그런가? 따위의 간단한 납득이 돌아온다. 연인이 되기 전부터 포기한 부분이었다. 수화기를 옆에 둔 채 여태까지 모아온 정보를 정리하고 있던 로우가 다시 볼펜을 까닥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가다듬어야만 했다.

“…네 비블 카드야 말로 거의 사라질 뻔 했던데, 괴수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거 아닌가?”

하루종일 너를 보고 있었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두 사람의 화법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 마지막에 해군이랑 부딪혀서 말이지. 하필이면 대장이 있어서.

조로가 태평하게 말했다.

“…뭐?”

-피하고 다니지만은 않았거든.

짧은 한마디에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정의에 덤벼들지가 녹아있다. 그야 그랬겠지. 네가 도망이라는 걸 알기는 했던가. 선장이 명령하면 또 모르지. 문제는 밀짚모자가 도망 같은 건 더 이상 입에 담지 않는 데에 있었고, 너는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니까…. 조로의 비블 카드를 받은 로우에게는 종이의 주인을 혼자서 원망하는 버릇이 생겼다. 따지자면 비블 카드를 받았던 그 날 그때부터 생긴 버릇이었는데, 조로는 아직까지도 그 존재를 몰랐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럼 다음에는 네 현상금이 더 올라가 있는 건가?”

조로의 비블 카드가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로우는 거리낌 없이 다음을 입에 담았다. 이어 상대방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대장을 좀 몰아붙인 정도로는 안 오르지! 왜? 추월당할까 봐 겁나냐?

“선장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로우는 태연히 말했다. 현상금에 자존심을 거는 유치한 나이는 졸업한 지 오래였으나, 부러 조로의 앞에서는 있는 척했다. 그가 또 한 번 웃었다. 그 웃음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던 로우의 얼굴에도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쌓이고 쌓이는 원망들은 그의 쪽으로 움직이는 비블 카드를 보면 저항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그런 다음에는 그가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또 조로의 비블 카드가 타들어 가고, 몸을 아끼지 않는 그를 원망하고, 비블 카드가 다시 돌아오고, 연락하고, 생사를 확인받으며 그가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점차 견고해졌다. 강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달구고 식혔다가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었으나 조로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시원한 웃음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 설령 다음에 해군 대장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한다고 해도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비블 카드는 다시 만날 약속을 뜻했다. 단언컨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를 보며 미칠 거라 생각했던 것치고 훨씬 살만한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로우는 눈 내리던 어느 날에 연인의 비블 카드가 타들어 갈 때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로우는 생명이 꽃피우는 계절에 연인의 비블 카드가 조막만큼 남았을 때도 항로를 수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우는 해가 가장 높게 뜨는 날에 연인의 종이가 너덜거릴 때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 삶은 기구했으나 슬프기만 하진 않았고 너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타고난 듯이 굴었으니까.

그래서 로우는, 조로의 비블 카드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

…캡틴, 항로를 수정할까요?

*

조용함이라고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배였다.

코팅하지 않는 이상 심해에 가라앉을 수도 없는 배였지만,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 가라앉는다 해도 떠들썩할 것 같았던 그들의 배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수면 위에서 고요하게 노란색 잠수정을 기다렸다. 갑판을 수놓은 잔디들은 싱그러웠다. 눈치도 없이.

싸우전드 써니호에서 로우를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은 갑판을 지나 낯익은 주방 탁자에 앉은 로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원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담배를 문 상디가 차를 내왔고, 김이 식을 때쯤에는 눈이 부어있는 나미 옆에 브룩이 앉았다. 전용으로 준비되어있는 자리에 앉은 프랑키는 전원이 꺼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로우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듣는 대신에 두 가지를 물었다. 하나는 선장을 지키다가 죽었는지, 또 하나는 고통 없이 일격에 눈을 감았는지. 거짓말에 일가견이 있었을 항해사는 두 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가만히 차를 들이켜면 멱살을 잡혔다. 탓하려는 거냐고. 주변이 혼란에 빠지면 머리가 차갑게 식는 사람들이 있다. 로우가 그랬다. 응수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곧 나미가 그를 말렸다. 조로와 달리 왼눈밖에 보이지 않는 그는 로우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로우는 그제서야 덤덤하게 목적을 밝혔다. 그저 유품을 받고 싶었다. 뭐라도 좋으니까. 울고 있던 나미의 떨림이 멈췄다. 손등으로 눈 밑을 닦은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두건은 갈가리 찢겨서 기워낼 수도 없더라. 그래서 태웠어. 그게 망자에게 물건을 보내는 방식이라길래.”

그렇다면 귀걸이는?

“귀걸이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근데 로빈이 말하기로는 금 장신구는 해적의 장례금이래. 그 바보 자식은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차고 다녔을걸? 아니면 걘 정말 나쁜 새끼인 거야. 그게 아니면 대체 이 배에 누가…, 동료를 수습하는데, 돈을 필요로 한다고 그걸…!!

…그래서 그냥, 같이 묻어줬어. 저승의 배를 타는 덴 금화가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검 세 자루는?

“뒤늦게 조로가 있던 곳으로 갔을 때, 찾은 건 딱 한 자루였어. 엔마. 걔가 끝까지 쥐고 있는 검이 그거 하나더라. 처음엔 와노쿠니에 돌려주려고 갔는데 거절당했어. 같이 묻어달래. 그 검은 이미 그를 주인으로 인정했다고. 그런 검들은 주인을 잃었다고 무작정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지 않는대. 다르게 쓰일 일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땅에서 나올 거라고. 흑도 슈스이가 그랬듯이.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어. 특히 화도일문자는 루피가 어떻게든 가져가고 싶어 했는데…….”

그렇다면 뼛조각은?

“우리에게도 정말, 정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어.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태어난 곳에 묻어주고 싶었어. 그러려고 했고. …트라오 너라면 알겠지. 시체가 썩지 않게 하려면 무슨 조치가 필요한지. 쵸파는 할 수 없었어. 아니, 우리가 하지 말아 달라고 빌었지. 그래서, 전투가 있던 그곳에 묘비를 세웠어. 섬의 영구 지침은 루피가 갖고 있지만, 너라면,”

나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우가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기다려. 루피를 만날 거라면 직접 데려올 테니까.”

상디가 말했다.

“밀짚모자야는 됐어, 내 배로 돌아간다.”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브룩이 당황했다.

“로드 포네그리프에 대한 단서는 다음에 가져다주마.”

“어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프랑키가 말했다.

“…유품이 받고 싶다며.”

나미가 물었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

“그게 그의 유언이야.”

로우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탓할 게 필요하다면 우리를 탓해도 괜찮아.”

자신의 배로 돌아가기 위해 갑판에 서 있으면 로빈이 말을 걸어왔다. 나미처럼 눈이 붉지는 않았으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어느 때든 이성을 앞세우는 그녀는 이 순간에도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동맹 선장을 배웅하려 했다. 그녀가 건넨 말은 그것이 전부였으나 로우에게는 보였다. 그를 따라가지 않은 자신을 탓할 누군가가. 빠르게 옮기지 못한 자신을 탓할 누군가가. 도와줄 수 없었던 자신을 탓할 누군가가. 동료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할 그들이. 그들과 동맹을 맺은 것을 후회한 적 없다면 거짓이었으나 그들의 죄책감을 보탤 만큼 묶여온 시간이 얕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로우에게는 밀짚모자를 쓴 해적기가 아니어도 탓할 게 있었다.

“너희가 아니어도 탓할 건 충분하다.”

로우는 자신이 미웠다.

네가 그렇게 굴 때마다 차라리 그냥 묶어놓고 수술해버리고 싶어.

…뭐, 다리라도 잘라놓게?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지만, …네게 영원을 주고 싶다는 의미다. 넌 너무 목숨 아까운 줄 몰라. 그렇게 무모하게 굴면서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내가 진짜 그렇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건데…, 한편으로는 너에게 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되면 넌 내가 없는 세상에서 평생 산다는 거니까.

허, 완전 제멋대로군. 거기다 욕심까지 많은 거 보니 확실히 네가 선장은 맞나 보다. 어느 쪽이든 쓸데없는 걱정이니까 그만둬. 난 그런 거 받을 생각 없거든.

그렇게 말해도 줬어야 했는데.

*

솔직하게 말하면 써니 호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혼란한 주변을 떠나 고요한 심해로 가라앉는 순간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이 누가 될지는 뻔했으니까.

종이가 사그라지던 날,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와중에도 그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움직이는 종이를 보며 로우는 조로에게 그것을 건네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폭죽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연회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던 도읍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를 믿기로 했던 그 날에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지킬 약속이 없어졌을 때, 얼마나 헤매든 상관없으니 나를 직접 찾아오라고 말했던 그때 끝내 덧붙이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네가 지킬 약속이 없어졌을 때. 그걸 보고 네가 직접 나를 찾아와. 얼마나 헤매든 상관없으니까…,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서로가 목표하는 바다가 없는 그때는 같이 이스트 블루로 가자. 네가 태어났다던 마을로.

그가 큰 부상을 입고 연락해올 때, 다른 바다를 항해하는 각자의 배 안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끝은 항상 이스트 블루였다. 누구의 목적지도 될 수 없는 약한 바다였음에도 로우는 그곳의 이야기가 좋았다.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 조로는 죽다 살아나서 연락할 때면 유해지는 면이 있었고, 로우는 짐짓 심각한 척 그곳에 대해서 이것저것 캐묻고는 했다. 

노스 블루에서 리버스 마운틴을 넘고 곧장 그랜드 라인으로 들어선 로우가 이스트 블루에 대해 아는 건 책으로 본 게 전부였다. 기후가 온화한 그곳은 바다마저도 그렇게 거칠지도 않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나고 자라는 식물마저도 독성이 없었다. 위험하다고 해봐야 웃음 버섯이 전부인 바다. 노스 폴과 가까웠던 로우의 고향에서는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스물 여섯 살의 로우는 여덟 살 때도 즐겨보지 않았던 동화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조로 때문이었다.

항상 피와 땀으로 절여져 사는 남자에게는 기묘하게도 잘 말린 햇볕의 냄새가 났다. 밀짚모자 일당의 세탁꾼이 훌륭한 덕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로우는 그 향을 맡을 때면 그가 나고 자란 이스트 블루의 바다를 상상하고는 했다. 기후가 온화하며 파도마저 다정한 그곳. 갈라진 네 개의 바다에서 가장 약한 바다는 다르게 말하자면 갈라진 네 개의 바다에서 가장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로우는 조로와 함께 이스트 블루로 가고 싶었다. 조로가 로우에게 건넨 비블 카드가 죽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면 로우가 조로에게 건넸던 비블 카드는 그곳으로 함께 돌아가자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결국 조로의 비블 카드는 그와 함께 사라졌다. 약속을 증명하는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코라 씨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유언으로 남겼으나, 너는 내게 남긴 모든 것과 함께 사라졌다.

무언의 유언을 헤아리는 것과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

“진심이에요, 캡틴?”

목소리를 낸 건 샤치였다. 하트의 선장이 써니 호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날로부터 심해로 잠행하는 대신에 해수면 위에 반을 내놓고 다니는 잠수정 갑판에는 스무 명의 선원들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있었다. 그들을 불러 모은 로우는 모자챙을 잡아 눌렀다. 10년 넘게 그의 밑에 있었던 하트의 선원들은 그것이 로우의 대답임을 깨달았다.

“마지막 남은 로드 포네그리프의 행방이 코앞인 이 시점에, 그랜드 라인으로 돌아가겠다고요?”

“당연히 너희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어. 당분간 혼자서 따로 움직일 생각이다.”

사황 중에서도 최강이라던 카이도와 빅맘을 끌어내리고 그들이 사라진 틈을 파고드는 대신 로드 포네그리프를 찾겠다고 할 때조차 웃으면서 선장의 뜻을 따르던 선원들이었다. 마지막 남은 로드 포네그리프를 위해 해왕류의 바다라는 캄벨트로 들어갈 때도 묵묵히 따르던 선원들이 어째서 의아함을 품는지, 로우는 알 수밖에 없었다.

“해적 사냥꾼의 검 때문이야?”

베포가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말라고, 캡틴은 귀엽다고 봐주지 않는다며 온갖 호들갑을 떨었을 선원들은 베포의 입을 틀어막는 대신에 선장을 보았다. 그들을 둘러보던 로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숨겨지지 않는 일이라면 적어도 그들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캡틴, 이렇게 말해서 죄송한데요…, 그건 밀짚모자 일당이 찾지 않을까요.”

“그들은 계속 앞으로 향할 거야. 그게 그가 바라는 거니까.”

“…….”

“너희도 알지 않나. 자신을 그리워하길 바라며 죽는 사내가 아니라는 걸.”

자신도 아는 것을 그들이, 그의 선장이 모를 리가 없다. 밀짚모자는 자기 자신의 죽음만큼이나 조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두려워했던 자신으로서는 평생 이길 수 없는 유대감이었다. 그러니 그가 남겨둔 생의 흔적들을 쫓는 미련은 자신의 몫인 것이다.

“얼마나 걸리실 것 같으세요?”

“…예상 가는 곳이 있다. 두 자루 다 그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로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 다물고 있던 펭귄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을 모은 그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대로 선실 내부로 들어갔다. 엄격한 위계질서는 없었으나 선장에 대한 예우만큼은 확실했던 하트 해적단에서 그건 충분히 하극상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것도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닌 펭귄이었다. 해적단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신뢰하고 있었던 펭귄. 설명하기 힘든 충격에 잠겨 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닫혔던 선실 문이 금방 열렸다. 거기에서 나온 펭귄은 배낭을 들고 있었다.

“여행하는데 무거우면 안 되니까 옷보다는 돈을 중심적으로 챙겼어요. 저희에게 바로 연락되는 전보 벌레랑 읽으시던 책도 넣었고요. 베포, 우리가 도착하기로 한 섬 영구 지침 어디에다 뒀어?”

“그거! 내 방에 있어!”

로우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베포가 선실 내부로 쏜살같이 달려든다. 침묵도 잠시 앉아있던 선원들은 펭귄이 들고 온 배낭으로 몰려들었다. 마치 짠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요즘 날이 얼마나 더운데, 웨스트 블루 특제 크림은 넣었어? 기름종이랑 철가루는?? 옷이 들어가면 공간이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겉옷 한두 개는 챙기자. 해적단 심볼이 가장 크게 박힌 게 뭐더라? 그건 그냥 입고 가시라고 하는 게 어때. 야, 쪄 죽을 일 있어? 캡틴은 더위 안 타잖아. 그러고 보니까 캡틴이 즐겨 쓰는 볼펜이 왜 안 보이냐. 너 설마 안 챙겼어? 모자는 잘 챙겼네.

베포를 따라 선실로 들어갔다가, 또 금방 이것저것 챙겨서 갑판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선원 몇몇이 그걸 반복할수록 펭귄이 들고 왔던 배낭의 부피가 점점 커졌다. 선원들은 베포가 찾은 영구 지침이 들어가고 난 뒤에야 거드는 것을 멈췄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왔다가, 두 손으로 들지도 못하게 된 배낭을 힘겹게 로우 앞으로 굴린 펭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잘 다녀오세요.”

많은 것을 포함한 말이었다.

내일 낮에 떠나겠다던 로우는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에 떠났다.

절대 늦지 않은 시각에 기상한 선원들은 온기가 남지 않은 선장실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의 태도를 보며 매정하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트의 선원들은 그 매정한 태도가 자신들을 향한 신뢰임을 알았다. 기어코 쟘발의 덩치만큼 커진 탓에 여행길에 선택받지 못한 배낭 속에서도 사라진 물건이 있음을 알았다. 이윽고 명령의 부재가 익숙한 잠수정은 다시 바다로 숨어들기 위한 준비로 바빠진다. 선장과 한 약속을, 자신들만큼은 지키기 위해서.

*

하트의 선원들은 그가 정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움직이길 거부한 선장이 드디어 의지를 갖고 나와서, 바다로 흩어진 그의 검을 찾으며 소중한 이를 잃은 상실감이 조금이라도 채워질 거라 믿고 보냈으리라. 그러나 로우는 자신이 정말 괜찮아지고 싶었다면 바다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살아온 섬이 지도에서 사라졌을 때조차 바뀌지 않은 세상이다. 코라 씨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내가 괴로웠을 뿐. 그의 죽음이라고 다를까. 그의 목에 얼마나 걸렸든, 생전 어떤 사람이든 그의 죽음은 세상을 붙들어 매지 못한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을 살며 바람은 불고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플레반스는 지워졌다. 그렇게 코라 씨는 잊혀졌다. 그렇게 너는 잊혀진다. 기어코 나를 미치게 만드는 건 그런 것들이다.

신세계 초반부에 있던 로우는 패잔병들의 배를 얻어탔다. 자신들이 한 건 고작 해적놀음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걸 깨닫고 도망치기 바빴던 그들은 로우에게 목숨을 구걸했고, 로우는 그 배의 안전과 해적들의 목숨을 보장해주는 대신에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샤본디 제도까지 동행할 것. 다른 하나는 그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을 것. 때문에 그들은 신세계에서 가장 뜨거웠던 소식인 해적 사냥꾼의 죽음에 대해서 한 마디도 떠들 수 없었고, 샤본디 제도에 도착한 로우가 그들의 배에서 인기척도 없이 사라졌을 때 그 소식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되어 있었다.

*

능력을 써서 조용하게, 때로는 무력으로 난폭하게 배를 얻어 타며 신세계를 역행했던 로우였으나 목표하는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따로 배를 구해야만 했다. 9년 전 내란으로 멸망한 섬으로 배를 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밤과 뇌운이 섞인 듯한 하늘로 뒤덮인 섬은 햇빛이라고는 한줌도 들지 않았다. 곳곳에 안개가 피어오르며 불길함이 움트고 있는 듯한 섬은 소문대로 어떠한 인기척도 찾을 수 없었다.

다 부서진 돌길 중에서도 그나마 사람이 오다니며 닦인 듯한 흔적을 찾아 걸었다. 어떤 이야기든 대수롭지 않게 툭툭 던지는 조로가 유일하게 자세히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섬은 로우가 칠무해였던 시절에 종종 들었던 곳이었다. 섬을 별장으로 삼겠다는 황당한 핑계로 펑크 해저드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면 해군 관계자 다섯 중에 넷은 의문을 품다가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던 것이다. 별장이라뇨. 아, 그 매의 눈의 섬처럼요?─하고.

검 두 자루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로우는 이 섬을 떠올렸다. 비록 세계 최고의 대검호는 칠무해 제도가 폐지되자마자 미련 없이 신세계로 떠났다고 할지언정, 이 섬은 앞으로도 남자의 별장이라 불릴 것이고, 남자는 조로가 목숨과 약속을 다 바친 목표였으니까.

한계치까지 공간을 펼치면 가까스로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 섬은 둘러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닷가 한 바퀴를 돌면서 파도에 쓸려왔을 두 자루의 검을 찾던 로우는 곧 숲속 안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섬에 산다던 휴먼 드릴들이 혹시라도 갖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직까지도 화약의 잔향이 남아있는 숲을 걷다 보면 그가 이런 곳에서 2년을 퍽도 잘 보냈구나 싶었다. 유독 이 섬에 대해 말하기 싫어하던 건 이 섬에 있는 기억이라고는 길을 잃었던 것밖에 없어서였을까,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걸었다. 사시사철 우기에 가까운 섬은 조금만 움직여도 몸에서 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로우는 능력을 써서 숲을 빠져나가는 대신에 멀리서 보았을 때부터 기괴하게 굽어 있던 식물인지 산인지 줄기인지 모를 것을 방향표 삼아 길을 찾았다. 열아홉, 혹은 스무 살의 조로가 그랬을 것처럼.

바닷가에서부터 빼곡하게 심겨 있던 나무들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듬성듬성 나 있었다. 조로의 검을 찾지 못한 것과 별개로 길을 찾은 것을 깨달은 로우가 걸음을 재촉하면 얼마 가지 않아 공터가 나왔다. 곳곳에 무너진 돌벽과 부러진 총칼들이 꽂혀 있는 그곳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뚝 선 고성. 반쯤 열린 성 입구 앞에 널린 건 해져가기 시작하는 해군의 제복이었다. 이곳에 누가 살았는지 확신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로우는 시체를 밟고 성에 들어가는 대신에 처음으로 손가락을 폈다. 성안에 있는 것과 바꾸기 위해 처음으로 기색을 찾는 순간이었다. 당황스러움은 아주 잠깐이었다. 손가락을 교차시켜 그 안에 있던 의자 하나를 바꾸자마자 눈앞에 나타나는 건.

“이상한 능력이로군.”

매의 눈이었다.

그는 시선도 주지 않고서 말했다. 곳곳에 놓인 촛불이 전부인 고성 안은 밖보다도 어두웠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불빛만 곁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연약한 불빛으로 확인한 남자는 커다란 의자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서 한 손에는 레드 와인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었다. 탁자에는 레드 와인 병과 방금 막 식사를 마친 듯한 식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듯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2년간 칠무해에 있었을 때도 직접 만나보지 못했던 남자의 실물에 로우는 조용히 귀곡을 움켜쥐었다.

“신세계에 있다고 들었는데.”

“온 목적은?”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로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죽음은 1면에 실려 전 바다에 뿌려졌고, 지금도 신문을 손에 들고 있는 남자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우는 이곳에 온 목적이 조로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조로의 죽음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밝히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검사도 아닌 로우가 이곳에 올 만한 이유는 그말고는 없었음에도.

그럴듯한 말을 찾기 위해 모자챙을 잡아 내려 눌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된 매의 눈에게 집중이 빼앗겨 보지 못했던 벽에는, 거대한 흑도가 기대어져 있는 벽에는 수배서가 붙어있었다. 현상금이 만료되었음을 알리는 붉은 도장이 찍힌, 조로의 수배서가.

“바다의 패권을 쥐려는 사람은 많아도 강함 그 자체를 쫓는 이는 얼마 없지.”

다급히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날카롭게 갈린 노란 눈이 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시선의 의미는 다 파악했다는 듯이. 결국 로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를 기억할 무엇이라도 갖고 싶었다고. 그가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내 곁에 그가 살아있었다는 무언가가, 당신을 향한 집념이라 할 지언정 필요했다는 말을. 그의 스승에게, 그가 죽는 일이 있어서라도 되고 싶었던 목표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로우는 목적을 밝히기 싫었던 게 아니라 하지 못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때문에 침묵을 유지했다. 직접 입 밖으로 인정한 사실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댈 수 있는 핑계는 많았다.

예컨대 배가 길을 잘못 들었다든가 하는 것. 실제로 그랜드라인에 어떤 섬들은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서로가 서로의 자기장에 영향을 끼치며 기록 지침에 혼란을 주고는 했다. 이 섬은 무풍지대인 캄벨트만큼이나 바람이 불지 않은 탓에 직접 오려면 노를 저어야 했으면서도.

그러나 미호크는 로우의 변명을 기다리는 대신에 손에 든 와인잔을 테이블에 두었다. 그다음에는 읽었던 신문을 접어 와인잔 옆에 던졌고, 그다음에는 왼쪽으로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서서 응접실처럼 보이던 방을 빠져나갔다. 볼일이 끝났다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로우가 체념하기 전에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한 손에는 검 자루가 들려있었다. 검집이 붉고, 십자 모양으로 코등이가 깎인 검이. 보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3대 귀철이었다.

“이 주변 파도는 여름이 되어서야 거세지지.”

조로의 검이었다.

시선이 빼앗기는 것도 잠시, 한순간 흐트러졌던 이성이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응접실의 입구에서 고고하게 서 있었다. 미련은커녕 한 조각의 흥미조차도 보이지 않고 방을 떠났던 모습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열린 응접실 문으로 들어온 역광이 만드는 그림자를 덮어쓴 채 조용히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재는 것 같기도 했다. 설명할 수 없는 무거움이 공기를 짓누른다. 패왕색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왕의 자질을 타고난 자들이 상대를 찍어 눌러 굽히고, 압도하려 했다면 눈앞에 검호는 사납게 위협하고 있었다. 굴복과 복종이 아닌 결투와 추격을 원하는 듯한 기색은 사람을 이끄는 왕보다도 사냥을 앞둔 맹금류에 가까웠다. 침묵으로 절제되어있을 뿐, 그것이 그의 본성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로우가 섬에 온 목적을 읽어낸 남자가 그랬듯, 남자가 검을 들고 온 목적을 읽어낸 로우는 그곳에서 물러서는 대신에 귀곡을 바로 들었다.

“내게서 이 검을 빼앗을 생각인가?”

그림자가 목소리를 내었다. 말하지 않은 단어가 귀에 들렸다. 감히. 착각이 아니었다. 남자는 빛을 등지고 설 때부터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감히 내게, 맞설 생각을 하느냐고.

“해적이라서 말이지. 가져야 할 건 반드시 빼앗는다.”

그래서 로우는 온몸으로 대답했다. 감히, 그럴 생각이라고. 왕에게 길러지고, 왕과 힘을 합치고, 왕들을 끌어 내리면서도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본 적 없던 로우였다. 항상 지배와 명령을 거부해왔다. 그 무엇보다도 로우가 자유롭기를 바란 은인이 있기도 해서였지만, 타고난 천성이 그랬다. 선택받은 극소수가 왕으로 태어나고, 눈앞에 대검호가 맹수로 태어났다면 로우는 꺾이지 않는 자로 태어났다.

보이지 않았으나 남자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로우는 손을 들었다. 고성은 남자의 둥지였으나 로우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서 있는 모든 곳이 자신의 공간이었다. 조로의 목표였던 남자를 이길 생각은 없었다. 검을 되찾으면 남자에게도, 섬에게도 더 볼 일은 없다. 침묵이 길어진다. 맞붙을 것을 예측한 바로 다음 순간, 남자는 로우에게 검을 던졌다. 능력을 펼치려던 손이 허둥거리다가 가까스로 그것을 받아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는 건 그다음이었다.

“내게 있는 건 한 자루뿐이다.”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몸을 움직였다. 촛불과 가까워지며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무엇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직전에 풍겼던 강렬한 적의는 단순한 변덕이었다는 것처럼. 그러나 로우는 그가 의자에 돌아가서 앉을 때까지도 별다른 반응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검을 손에 쥐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낀 위화감 때문이었다. 귀곡을 들면서 다른 검이라면 몰라도 요도에게만큼은 예민한 로우였다.

3대 귀철은 그가 들던 세 자루의 검 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검이었다. 수준에 맞는 주인을 만나며 성질을 가다듬고 있었으나 이름에 귀신이 괜히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이따끔씩 조로가 원치 않는 것까지 베면서 흉악하게 굴었다. 조로는 그것을 괜히 싸우고 싶어서 투정을 부린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했다. 실제로 그렇게 한번 소란을 피우고 난 3대 귀철은 잠잠해졌다. 그만큼 그의 호전성을 쏙 빼닮은 검이었는데, 조용했다. 그 고요함에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던 미호크가 로우를 흘겨보았다. 로우는 그 시선에 의문을 갖는 대신에 자신의 키만 한 귀곡을 땅에 세워 제 어깨에 기대 놓고, 3대 귀철을 빼 들었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로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검은 불꽃이 지나가면서 새겨진 듯한 무늬까지 전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대검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흑도처럼.

“그 검은 네가 가지고 가라. 스승으로서 할 일은 다 했다.”

미호크는 와인잔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널빤지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린 부둣가에 귀곡을 지지대 삼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로우는 자신의 옆에 놓인 3대 귀철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남은 그의 흔적을 찾겠다고 나섰으나 정작 검을 찾아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몰랐다.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밀짚모자 일당에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보내기 싫었다. 때늦은 욕심이었다. 함께 심해의 밑에서 밤을 지새우다가도 해가 뜨면 밀짚모자의 해수면으로 돌아가는 그를 보며 항상 참아야 했던.

그렇게 찾아서 가졌건만, 막상 손에 쥐고 나니 절실하게 느껴진 것이다. 이 검은 나를 위해 남겨진 게 아니다. 검을 찾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피해오던 사실은 새까맣게 물든 3대 귀철의 칼날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검은 사람을 고른다. 그리고 사람은 검에서 묻어난다. 아무것도 베지 않음에도 만족하는 귀곡의 성질이, 상대의 목과 몸통을 분리할 뿐 죽이지 않는 자신의 능력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가 들고 다녔던 세 자루의 검은 롤로노아 조로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고는 했다.

귀철은 싸우고 싶어 했다. 미련 속에서 무뎌지고 싶지 않아 했다.

항상 투지에 불타며, 언제나 자신을 날카롭게 갈고 닦던 조로처럼.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존재를 부정하며 눌러오던 것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가지 않았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았다.

“그립지 않은 건가?”

로우는 미호크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에 조로의 수배서가 붙어있던 벽, 그리고 그곳에 기대어져 있는 그의 흑도와 그가 가지고 있던 조로의 3대 귀철, 그 모든 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물었다.

“그립지 않다.”

미호크는 단칼에 대답했다.

“이곳에 오지 못하고 죽었다면 날 밟고 올라서겠단 야심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것을 위해 죽었겠지.”

목소리에는 확신이 배어있었다. 거기엔 제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필시 그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그게 아니었다면 반드시 약속을 지켰을 거라는 믿음이 섞여 있었다. 섬을 닮은 색깔로 물든 바다 어딘가를 보던 로우는 옆에 있던 3대 귀철을 집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뒤를 돌면 아니나 다를까 미호크가 서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상대를 내려보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그사이를 좁히는 대신에 로우는 상대에게 3대 귀철을 던졌다.

“제자 양성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계속 시도해보는 건 어때?”

미호크가 그랬던 것처럼.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미호크는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로우가 그랬던 것처럼.

“가져야 할 건 반드시 빼앗는다더니.”

빼앗아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라도 괜찮다고 했으나, 그의 검만큼은 무엇이 될 수 없다. 검들은 조로를 닮아있었고 조로는 제게 무엇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신에 로우는 모자챙을 잡아 내렸다.

“귀곡이 다른 요도를 싫어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거든.”

“…….”

“요도는 한 자루면 충분하겠지.”

귀곡을 어깨에 맨 로우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찬가지다.”

미호크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자는 한 명으로 충분해.”

로우의 눈이 커진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미호크가 먼저 등을 돌렸다.

“검은 받겠다.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떠나라.”

미호크의 손안에서 유독 짧아 보이는 3대 귀철이 점점 멀어진다.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로우는 상대를 붙잡거나 말을 얹는 대신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불길함이 심어진 섬에는 우울이 자랐다.

*

그가 아직 세상에 있었던 시절에 딱 한 번, 로우가 중상을 입은 적 있었다.

사라진 로드 포네그리프의 단서를 쫓던 중이었다. 하필이면 부딪힌 게 사황의 세력이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산하 세력이었는데, 개개인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으나 수적으로 한참 밀렸다. 거기다 원하는 소득을 얻기 위해 무리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갔던 탓에 능력 소모가 심했는데, 미리 만들어둔 퇴로가 틀어 막히면서 일이 틀어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폴라 탱 호는 자신들만의 도주로인 바닷속으로 잠수하길 성공하면서 무사히 도망쳤다. 문제는 배가 잠수할 때까지 시간을 벌었던 로우였다.

원래부터도 체력소모가 심한 능력을 계속 펼쳐두고 싸운 데다가 자잘한 부상이 겹쳐 몸이 무거웠던 그 순간에 허리에 총상을 허용해버리고 만 것이다. 환부를 눌러가며 급한 출혈을 막으려 했으나 피가 빠지는 것과 별개로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탄환을 제거하기 위해 능력을 쓰면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헤집었다. 고통과는 달랐다. 몸에 남은 마지막 힘이 모두 빼앗기는 것 같았다. 강렬한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자신이 죽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뱃멀미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로우는 벽을 짚고 선원들에게 걸어가던 도중에 쓰러졌다. 몸에 박힌 탄환이 해루석으로 제조되었다는 사실을 안 건 나중이었다.

다시 눈을 뜨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선원들이 울면서 안겨 왔다.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피가 너무 많이 흘렀다, 수술하는데 무서웠다, 지금 며칠이나 지난 줄 아냐…, 하나 같이 겁에 질린 말들이었으나 꼼꼼하게 꿰매진 바늘 자국과 빈틈없이 감긴 붕대를 보며 로우는 무척이나 흡족했더란다. 저라는 집도의 없이도 훌륭히 주어진 일을 해낸 그들이 기특했다. 다음엔 조심하겠다는 상투적인 말로 울음을 달래면 눈물 콧물을 짜내던 이들이 하나둘씩 침상에서 일어나더니, 안으면 선장이 으스러질까 뒤로 빠져있던 베포가 엉거주춤 다가왔다. 그렇게 과보호 받을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펭귄에게 자신의 진료 차트를 받아야 하나 생각하던 때였다. 베포는 크고 털이 복슬복슬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덮고 있던 걸 보여줬다. 전보 벌레였다. 폴라 탱 호 선장실에만 있는 녹색 껍질의 전보 벌레. …상대가 걱정 많이 했을 거야. 베포는 그것을 로우의 침상 옆에다가 올려놓으며 덧붙였다. 조용히 자고 있는 전보 벌레를 보던 로우는 문득 조로도 이랬을까 생각했다.

남자도 이렇게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눈을 뜨자마자 연인에게 연락하라고 혼이 났을까. 어딘가 얼이 빠진 채 멍청하게 수화기를 들어 올리면 호들갑을 떨던 선원들이 눈이며 코이며 벌게진 얼굴을 의젓하게 꾸미고 이만 쉬라며 자리를 비켜줬을까. 연결음을 들으면서 상대가 지금 이 순간 전보 벌레 앞에 있을까 생각하며 긴장했을까.

사실 비블 카드의 불합리함을 따지자면 로우의 죄질이 더 컸다.

로우의 비블 카드는 쉽게 구멍이 났다. 영혼을 대변하는 종이와 시전자의 체력과 건강, 생명을 깎는 로우의 능력은 상극이었다. 조금만 무리했다 싶어도 로우의 정신력과는 상관없이 카드에 구멍이 뚫렸다. 로우가 처음으로 자신의 비블 카드를 남기고 해적단을 떠났을 때는 하루에 한 번씩 전보를 넣어서 선원들에게 생사의 안전을 확인시켜줘야만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다 보면 와노쿠니에서 써니 호가 먼저 떠나던 날, 그의 복대에 서류 한 장만한 자신의 비블 카드를 쑤셔 넣기 바빠 쓸데없는 일에 카드가 자주 타니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이지 못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게 조로는 한 번도 로우의 비블 카드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던 것이다. 중상을 입은 건 처음이었지만, 체력까지 깎아 능력을 쓰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 이윽고 연결음을 반복하던 전보 벌레가 눈을 부릅떴다. 연결됐다는 뜻이었다.

여태까지 그가 그래왔듯이 겁먹었냐고 능청을 떨지, 상황이 바뀌어보니 생각이 좀 달라지더냐고 농담에 진심을 섞어서 물을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웬일이냐? 네가 먼저.

조로가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걱정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듯이.

“일이 조금… 있어서.”

며칠씩이나 누워있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이 목이 심하게 잠겨 있었다.

-아, 그 돌멩이 때문이면 로빈 바꿔주랴?

“내 비블 카드는 잃어버린 건가?”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서 말하면 잠긴 목 안쪽이 긁혔다. 그래도 가끔은 꺼내서 봐주는 줄 알았는데. 혹시 그러다가 잃어버렸나. 그렇게까지 큰 걸로 줬는데? 기어코 밀짚모자에게 찢어서 나누어줬다든가. 오히려 너무 커서 전투 중에 잃어버렸을지도. 어쩌면 길을 잃었을 때, 아니면 술을 마시다가…, 선원들이 울면서 매달릴 때도 잠잠하던 머리가 지끈거린다. 짚이는 곳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로우는 실망하기 전에 서둘러 기대치를 덜었다. 덤덤하다 못해 둔하게 굴 때가 있는 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뭐가 됐든 다음에 만나서 다시 주면 됐다. 비록 다시 만날 약속으로 주고받은 카드였지만, 제게 남아있으니 괜찮았다. 자신이 그 종이를 잃어버릴 일은 없었으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하고 싶은 말 없어. 묻는 그대로다. 잃어버린 거라면 조만간 그곳으로 배를 대지. 다시 가져가라.”

-됐어, 필요 없다.

“왜?”

기대치를 덜어가던 로우는 문득 생각한다. 마음을 어디까지 덜어야 하는지.

-왜냐니…,

“필요 없나?”

너에게 있어서 내 약속은. 우선순위에 드는 건 바라지도 않던 내 마음은, 너에게.

-안 잃어버렸으니까.

조로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새건 필요 없어. 게다가 저번에 이야기했을 때 너네 간다던 그, …아무튼 그 섬. 우리가 있는 곳과는 멀잖아. 그러니까 굳이 항로를 바꾼다든가 낭비되는 짓 하지 말라고.

선장이 중태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폴라 탱 호는 파도 밑을 헤엄치고 있었다. 깊게 내려가지 않은 덕에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의 푸른 빛에는 햇빛이 섞여 있었으나 빈말이라도 그것은 하늘답다고 할 수 없었다. 로우의 어깨가 본인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천천히 아래로 처진다.

“…당장 네가 보고 싶어도?”

-다치면서 머리도 같이 부딪혔냐?

조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로우는 아래로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의도한 게 아니었는지, 수화기 건너편에서 험악한 말버릇이 한숨에 섞여 들려왔다. 둘 중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겁먹었나?”

그것을 겨우 깬 건 로우였다.

-그럴 리가.

조로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헛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왜 모르는 척 한 거지?”

-설마 지금 내가 걱정했는지를 묻는 거냐?

“아니면 숨길 이유가 없잖아.”

-그런 거 안 했어.

“조로야.”

-누구랑 붙고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거기서 죽을 거 아니었잖아.

무신경한 말투였으나 안에 담긴 것이 무거웠다. 세워진 베개로부터 편하게 몸을 기댄 로우는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돌이켜본다. 로우 역시 자신이 그곳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도주에 성공했고, 쓰러진 곳은 배의 안이었으며, 선원들은 유능했다. 그러나 조로가 의미하는 건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로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조로는 정말로 로우를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짧은 문장으로 조로는 말하고 있었다. 네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쉽게 죽으려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왜냐면 내가 그랬으니까. 그러니 조로는 로우의 비블 카드가 손톱만큼, 어쩌면 손톱보다도 더 타들어 갔어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확신이 흉터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지금 내 비블 카드는 어디로 향하고 있지?”

로우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 대신 수화기 너머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손에 없는 건가?”

-말했잖아, 걱정 안 했다고.

결국 헛웃음이 터졌다.

“평소에 챙기고 다니긴 하나?”

-잠깐만 조용히 해 봐. 지금 꺼내고 있잖아.

안 갖고 다니겠군. 로우는 확신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때쯤엔 저도 모르게 터졌던 헛웃음은 입가의 미소로 남아있었다.

-오, 동쪽으로 가고 있네.

폴라 탱 호는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우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에 이번에도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오른쪽으로 가고 있는데 왜 동쪽이 아니냐고 속 터질 소리를 할 게 뻔하기도 했거니와 로우는 동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스트 블루는 정말로 눈이 안 내리나?”

-너 거기 진짜 지겹게도 묻더라.

“마지막 남은 포네그리프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해적왕이 태어난 바다니까.”

-…흠.

엉터리 이유도 그럴듯하게 말하면 쉽게 속아 넘어가던 남자는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숨을 쉬는 것도 잠깐, 네 개의 바다 중에서도 가장 약한 바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낮지만 마냥 굵지도 않은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그가 살아온 평화를 읊는다. 눈을 감고 누운 몸을 옆으로 돌린 로우는 조로가 말하는 바다를 상상했다.

로우는 가본 적도 없는 이스트 블루의 기후를 사랑했다.

조로 때문이었다.

죽지 않으려던 것과 별개로 로우는 언제나 자신의 죽음에 대비하고는 했다.

10살 때부터 죽을 게 확실시된 시한부 인생이었다. 병이 나은 13살 이후로는 도플라밍고와 죽을 생각을 했다. 그 습관은 드레스로자에서 살아남은 뒤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로우는 죽을 생각이 없음에도 한 번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는 했다. 배의 선원들이 자신이 없어도 항해를 이어갈 수 있도록 했고, 모아둔 기념주화를 어떻게 처리해줬으면 하는지 유서 아닌 유서를 남겼으며, 사람과 깊은 관계를 거부했다. 남기고 갈 것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로우는 항상 남겨진 자였다. 죽음이 항상 발목에 매달려 있는데도 그랬다. 세상에 미련이 없는 것은 자신인데, 신의 부름을 받는 건 로우의 미련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남겨지게 될 사람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그 남자에게 끌렸을지도 몰랐다. 자신을 두고 갈 만큼 약하지도 않은데, 남겨져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은 마음이 허락받을 때까지도 그랬다.

와노쿠니에 도착하기 직전, 폴라 탱 호 안에서 로우는 종종 조로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생각하고는 했다. 마음이 통했다고 한들 상대가 죽었다고 몸에 새겨주지는 않을 테니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서도 보관될 수 있는 것이었으면 했다. 귀곡은 자신과 묻힐 것이고, 심볼이 박힌 옷들은 해지기 쉬운데다가 편지는 바래져서 후에는 읽을 수도 없을 것이다. 보관만 잘한다면야 몇백 년은 거뜬하겠지만 누구도 아닌 조로에게 기대하기는 힘든 부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다가 떠올린 게 바닷물에도 녹슬지 않는 금이었으나, 귀에 있는 두 쌍의 피어싱만으로 기억해달라고 하기에는 뭔가 약한 것 같았다. 애초에 귀에 그런 걸 달고 있는 사람이 저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에게 허락받은 이상 로우는 자신만이 남길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었다. 어렵게 입수한 와노쿠니의 지도에 엎드린 채로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던 것도 잠깐이었다.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로우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자신만이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으며, 로우 그 자체인 것이, 이미 제게 있었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붉은색 하트로 맺혀질 그것.

수술수술 열매.

수습을 부탁하면 선원들은 반드시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받은 조로는, 아주 기겁을 하겠지. 로우는 다시 책상에 머리를 숙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에게 수습을 부탁할까. 수술수술 열매의 가치에 대해서는 질릴 만큼 들었다. 어릴 때는 그 능력을 노린 자들에게 습격받으며 원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직접 느끼기도 했다. 악마가 깃든 열매들이 다 그렇다지만 특히나 혼란을 갖고 올 어떤 미래가 너무나 확실한 것으로 자신의 열매만 한 게 없다. 조로에게 그 열매를 맡긴다면 어떻게 들고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갖고 다니든 적에게 절대 빼앗기지 않을 건 분명했다.

생각할수록 정말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책임이라는 말로 묶어 맨다면 질색하다가도 마지못해 받아줄 것이다. 그 열매를 조로가 직접 먹어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일은 만약이라는 가정에서조차 일어나기가 힘든 일이었다. 조로 한정으로 욕심을 참는 게 익숙했던 과거의 자신은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하며 유품 선정을 마쳤었더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을 아끼지 않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여러 가지로 늦은 뒤였다. 그가 나를 두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렵기 시작할 때는 더 이상 남자를 두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약속이 간절했고, 언제든 다음이 있을 거라 믿었다.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고, 살아서 보낼 앞으로를 생각했다.

로우는 그랬다.

*

매의 둥지에서 빠져나온 로우는 워터 세븐에서 머물렀다. 바다열차 덕분에 무역과 교류의 도시로 거듭한 그곳은 목표를 정한다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었다. 3대 귀철을 포기한 로우는 선원들이 기다리는 신세계로 돌아가는 대신에 소문을 찾아다녔다. 세계에 단 21자루만 있다던 명검 중에서도 백색 검집이 특징인 검에 대한 소문을.

이제 와서 다시 그의 유품에 집착하려는 건 아니었다. 검을 가지겠다는 욕심은 미호크의 손에 들린 3대 귀철과 함께 떠나보냈다. 단지 로우는 조로와 함께 모든 약속을 짊어졌던 그 검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싶었다. 조로의 종착지는 대검호가 사는 그랜드라인의 쿠라이가나 섬이 아닌 친구의 검을 돌려주러 갈 이스트 블루의 시모츠키 섬이다. 친구와 했던 약속에 대해 주워듣다 보면 몰라도 알게 되었다.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동료의 의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밀짚모자가 유일하게 되찾고 싶어 했던 검이 화도일문자였던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봄에 태어난 생명들이 가장 활기차다던 여름에 너는 죽었고, 그 강렬한 태양 빛에 죽어서도 고향 땅에 갈 수 없었으니 너와 함께 바다에 나왔던 그 검만큼은 이스트 블루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거기에 네가 내게 그런 수습을 바라지 않았을 거라는 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야망을 버리고 목숨을 바칠 만큼 중요했던 선장의 곁을 떠나고, 친구와 약속했던 목표인 대검호가 사는 곳으로도 가지 않은 검은 행방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다. 백색 검집이라는 눈에 띄는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도일문자는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어떤 소문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그 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던 술주정뱅이의 말을 믿고 바다를 건너서 가면 다섯 자루 중에 세 자루는 어떻게 보관을 한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고, 한 자루는 검집 색이 비슷했지만 다른 검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있지도 않은 경우였다. 그렇게 번번이 허탕을 쳐도 허무하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 밀짚모자조차 찾지 못한 화도일문자였다. 오히려 찾기가 어려운 편이 더 빠르게 납득이 됐다. 무엇보다도 주인의 곁에서 떠나지 않은 엔마와 가야 할 곳을 잘 찾아간 3대 귀철과 달리 전 세계를 헤매고 있는 듯한 화도일문자는, 정말 조로의 검다워서. 그래서 로우는 괜찮았다.

사흘에 한 번씩 센트 포플러 역으로 가는 해적의 얼굴을 외운 블루 역의 역무원들은 더 이상 그의 티켓을 확인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흘에 한 번씩 반복하던 귀찮은 절차를 생략할 수 있게 된 로우는 열차에 타는 즉시 창가에 가까운 자리로 가 앉았다. 로우의 키만 한 귀곡은 바닥에 세워 둬도 등받이 너머로 쑥 튀어나오고는 했고, 덕분에 로우는 얼굴을 가려도 불청객에게 여행을 방해받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열차를 채우는 사람들이야 뻔했고, 그들은 파도를 헤치고 선로를 달리는 바다열차에 쉽게 흥분하고는 했다. 저마다의 분명한 목적지로 들뜬 관광객들로 가득 찬 바다열차 안에서 로우는 창문 너머에 있는 바다를 보았다. 시계탑 앞에서 보자고 약속하면 밀림에서 발견되는 남자를 제자리로 데려오는 건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로우는 그래서 괜찮았다.

봄의 여왕의 도시라 불리는 센트 포플러는 본래 한적한 휴가를 보내기 좋은 휴양처로 유명했다. 적당한 강수량의 비옥진 땅은 어떤 식물이든 다른 섬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자라났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여겨볼 건 나무였다. 센트 포플러와 근접한 섬중에는 조선업으로 유명한 물의 도시가 있었다. 좋은 배에는 좋은 나무가 쓰인다. 섬이 부유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아이스버그 시장이 7개의 조선 회사를 합쳐서 만든 갈레라 컴퍼니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조선 회사로 성장하며 센트 포플러의 목재 도매시장이 늘어난 건 그러한 맥락이다. 

문제는 센트 포플러에서만 나오는 고급 목재를 배의 자재로 쓰기 위해 노리는 해적들의 습격이었다. 대부분은 워터 세븐에서 함부로 까불다가 조선공들에게 얻어터지고 쫓겨난 이들이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들은 로우가 이 섬을 오는 이유였다. 갈레라에서 배를 고친 이들은 곧장 신세계로 넘어가려고 했고, 화도일문자는 그 바다에 있을 리 없었으니까.

센트 포플러는 생명을 관장한다고 일컬어지는 봄의 여왕이 돌보는 도시였음에도 거리의 색감이 크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세워진 건물 대부분이 하얀 석조 건물이었다. 항구 근처 상인의 얼굴을 일방적으로 외운 지금에서는 새하얀 거리의 미관이 섬 중앙에 있는 꽃 동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았지만, 동화로 봄을 배운 로우에게는 여러 의미로 겨울에 가깝게 느껴지는 섬이었다.

기실 꽃을 위해서 길거리를 죄다 덮는 색깔로 녹색 대신 하얀색을 고른 건 그들의 센스를 칭찬해야 할 부분이었다. 어딜 가도 녹색투성이였다면 자신은 이 섬에 오지도 못했으리라. 의식적으로 고개를 턴 로우는 오늘따라 조용한 항구의 골목에서 저도 모르게 늘어지는 상념을 다 잡는다. 오늘은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자야. 노스 블루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책에서 나오는, 봄섬. 분명 그곳에서 해적 사냥꾼이 쓴 검을 보았다고 했다. 그랜드라인 전반부에 있는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기세가 꺾인 패잔병들의 배가 필요했다.

조용히 소동을 기다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궤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흔한 농성과 협박이었다. 적당히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나설 때를 기다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연달아 큰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와는 무게가 달랐다.

“해군입니다!! 이 일대는 저희 해군이 포위하고 있으니 허튼 저항은 그쯤 하세요!”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듣는 그 순간 저편에 묻혀있던 기억과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떠오른다. 로우는 모자챙을 잡아 눌렀다. 해적의 습격이 잦은 만큼 해군이 들리는 일도 적지 않은 섬이었으나, 이렇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중장이나 대령급이 올 정도의 섬은 아닐 텐데도 왔다는 건 다른 목표가 있을지도 몰랐다. 온 목적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나서봤자 좋을 게 없는 상황이다. 로우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해군들이 어디까지 포위하고 있을지는 몰랐으나 잡힐 예정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하얀색에 숨어드는 건 로우의 오랜 특기였다. 걸음을 옮기기 위해 골목 밖으로 몸을 내딛는 그 순간이었다.

해군 대령은 아직도 로우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흘리듯이 검을 쓰는 그녀를 눈에 담은 그 한순간, 로우는 귀곡을 고쳐들고 능력을 펼쳤다. 자신의 상관을 보좌하던 해병들이 갑작스러운 난입에 당황한다. 그러나 그것이 잦아들기도 전에 그들을 이끌던 대령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직전까지 항구에서 소란을 피우던 해적을 묶는 대령이 있던 자리에는 처음보는 나무 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다.

“트라팔가!!”

항구에서 건물 옥상으로 단숨에 옮겨진 타시기는 주변의 풍경을 보자마자 자신을 급습한 인물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고개를 들면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이 장검을 빼든 채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무너지려던 자세를 바로잡고, 직전에 집어넣었던 시구레를 꺼내 들었다.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던 모자 그늘 밑으로 가려진 로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 검, 어디서 난 거냐.”

단번에 그를 베기 위해 몸의 자세를 낮추던 타시기는 그의 시선이 제게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로우는 검을 보고 있었다. 타시기의 허리춤에 매여있는 두 번째 검에게. 위화감은 그다음에 찾아온다. 장소를 이동시키기 위해 열려있었을 그의 공간은 아직도 닫히지 않은 채였다. 명백한 적의를 띄우고 있으나 그 안에 살기는 없다. 일전에 목숨을 구해진 치욕을 잊지 않은 타시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령 눈앞의 해적이 이해하지 못할 변덕을 부리고 있다고 한들 거기에 어울려 줄 수는 없었다. 그가 노리는 게 제게 있는 검이라면 더더욱. 그도 그럴게, 로우의 시선이 닿아있는 검은.

“세 번은 안 묻는다. 와노쿠니의 국보에 준하는 명검을, 어떻게 그랜드라인을 떠도는 해군이 들고 있지?”

“…당신이 어떻게 이 검을 알아본 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타시기가 자신의 몸을 틀었다. 허리에 맨 검을, 로우로부터 지키겠다는 듯이. 노란 꽃무늬가 새겨진 보라색 검집과 세 개의 동그라미가 정삼각형으로 엮인 독특한 형태의 코등이를 보던 로우는 빼 들었던 귀곡을 집어넣었다. 이어 열었던 공간이 천천히 닫혀 사라진다.

“…그 검은 주인과 함께 묻힌 검이다.”

유독 검에게 약한 해병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타시기는 로우를 따라서 손에 든 시구레를 돌려놓는 대신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와노쿠니에서 사황을 쓰러트린 당신이라면 코즈키 오뎅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겠죠!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검은 반드시 와노쿠니로…!”

“해적 사냥꾼의 검이다.”

단호한 목소리가 상대의 말을 끊었다.

“그건 롤로노아와 함께 묻힌 검이야.”

로우는 타시기가 매고 있는 엔마를 보며 말했다.

붉은 테로 감긴 안경 너머에서 부릅 뜨인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로우는 그녀의 이해를 재촉하는 대신에 고개를 돌렸다. 하얀 석조 건물들은 지붕조차도 색이 단조로웠다. 오로지 꽃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건물들을 바라보는 척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살짝 입을 벌려 호흡했다. 그러고 나면 엔마를 볼 때부터 조여가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혁명군이 떠난 바르티고에 숨어서, 해군의 눈을 피해 세력을 모으고 있던 해적들을 체포하며 찾은 검입니다.”

타시기는 낮췄던 상체를 들어 올리고, 도약을 위해 벌린 발의 보폭을 좁힌 뒤에서야 검을 집어넣었다.

“그들에게 마찬가지로 검을 얻은 경위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는 도굴꾼에게 비싼 값을 주고 산 검이라고….”

“도굴꾼.”

로우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되짚었다. 말에는 헛웃음이 섞여 나왔다. 가장 믿고 싶지 않은 단어였기 때문일까.

“기본 천만베리부터 시작하는 명검들은 주인과 함께 묻히는 일이 잦으니까요. 무덤을 엄중히 관리해도 도난당하는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흰수염이 소유했다고 알려진 최상 명검 무라쿠모키리마저도 묘비의 돌로 굳어가기 전까지는 도굴꾼들이 계속 노렸을 정도예요.”

“…….”

“세상에 쉽게 나올 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엔마를 조사하다가… 와노쿠니가 예전에도 흑도 슈스이를 원치 않게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검을 그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설마 롤로노아 조로가 엔마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을 줄은….”

방금까지 적대했던 것치고는 상냥한 설명이 이어졌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탓이었다. 그의 무덤이 파헤쳐진 일이 그깟 검 때문이라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다가도, 언젠가 나미가 했던 말들이 속을 차갑게 식혔다. 죽은 뒤에도 끝까지 손에 쥐고 있다던 검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조로와 함께 싸운 검을 만난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는다던 검을 원망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직접 쓰지는 않는 건가?”

그래서 로우는 마음에도 없는 것을 물었다. 타시기는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도 잠시,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있던 엔마를 검집 채로 뽑아 양손 위에 올려놓았다.

“한심한 이야기지만, 제 패기 수준으로는 다룰 수 없습니다.”

엔마가 잡아먹는 패기에 대해서는 로우도 들은 바 있었다. 3대 귀철이나 엔마를 들기 전까지 데리고 있었던 흑도 슈스이나 길들이기 전까지는 까다롭기 짝이 없었는데, 엔마는 그 둘을 합친 것보다도 까다롭고 사나웠다고. 다른 건 몰라도 검에게 패기를 빼앗겨 죽는 우스운 꼴만큼은 스스로가 용납을 못 한다며, 패기가 빨린 오른팔로 능청을 떨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에게 쉽게 등을 잡히고. 저는 검사로서… 좀 더 강해져야 해요.”

엔마를 들고 있는 양손이 떨렸다. 눈앞에 해군은 진심으로 자신의 나약함에 분해하고 있었다.

“차라리 내게 맡기는 건?”

어느샌가 검집에 돌려놓은 귀곡을 다시 어깨에 맨 로우가 물었다.

“나라면 그 검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위험은 물론, 검이 부리는 변덕에도 휘말리지 않고 와노쿠니에 돌려놓을 수 있어.”

“…….”

“감당하지 못하겠다면 지금이라도 내게 넘기는 쪽이 네 신변에도 좋을 거다.”

“…아뇨.”

엔마를 내려다보던 타시기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또 당신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저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습니다. 다루지도 못하는 검을 드는 게 멍청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해도 제가 직접 맞설 거예요. 무엇보다도 저는 두 번 다시 해군이 해야 할 일을 해적에게 맡기지 않을 겁니다.”

덤덤해 보이는 목소리에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등에 짊어진 정의와 검에 대한 예의 둘 모두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로우는 눈앞에 있는 그녀 같은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았다. 강한 사람. 펑크 해저드에서 어떻게 죽을 지조차 고르지 못하던 해병은 이곳에 없다. 엔마의 행방에 대해 말하던 나미의 마지막 문장이 떠오른다.

“…그 검은 와노쿠니에서 이미 한번 돌려받기를 거부한 검이다. 다르게 쓰일 일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땅에서 나올 거라고 하더군.”

“정말입니까? 그, 그렇다면 이 검을 이제 누구에게, 돌려줘야…!”

툭 던지듯이 말을 전하면 타시기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로우는 알아듣지 못한 그녀에게 맥락을 짚어주는 대신에 등을 돌렸다. 틀어진 계획에 허둥지둥하던 타시기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내디뎠다.

“…빼앗지는, 않는 겁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갔다. 혼자서 몇번이고 곱씹었던 문장은 툭 건드리면 말라비틀어질 것 같이 건조했다. 로우는 일부러 다시 그녀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에 들린 엔마를 볼 수 없었다. 이미 3대 귀철을 손에 쥐어 보면서 알았다. 가져보았자 내 것이 아니라는 확신만 강하게 들 뿐이라는 걸. 제 손안에 얌전히 있어 줄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노란색 잠수정에 흘러 들어왔겠지. 그러나 조로의 검 중에 로우에게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힘겹게 납득해오던 사실 중에서도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렇게 한 번씩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눈앞에 나타나는 검들의 의도였다. 맞붙는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던 매의 눈은 심지어 직접 건네기까지 했다. 대체 어떤 신이 누구의 운명을 붙잡고 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무엇이든 간에 미움을 받고 있는 건 확실했다.

찾았던 3대 귀철은 로우의 기대를 배신했고,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엔마는 로우의 의지를 꺾었다. 더 이상 마음이 괴로워지기 전에 자연스럽게 속에 남은 기대치를 덜어내다 보면, 문득, 자신이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다시 정의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로우는 배신감을 느끼는 대신에 귀철에게 베이고 엔마에게 찔리며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녕 사랑하는 연인이었다면, 나에게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됐다. 네 우선순위에 내가 없다는 걸 안다고 해서, 종이 너머로 네 죽음을 지켜봐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처럼.

“…항구까지는 직접 갈 수 있겠지.”

“도굴꾼 말이에요!”

로우가 마무리를 준비하면 타시기가 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무덤을 파헤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들킬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엔마가 정말로 그의 무덤에서 나온 검이라면… 아마도 묻히기 직전에 누가 빼돌린 것 같아요.”

그의 안식이 방해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나면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조로는 어떤 검들과도 묻히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와노쿠니에 대해 알려준 답례입니다.”

“딱히 감사할 필요는 없어.”

로우가 능력을 펼쳤다.

“덕분에 내게도 확신이 생겼거든.”

그리고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타시기가 급하게 옥상 난간을 짚고 몸을 바깥으로 뺐으나, 보이는 것은 하얗게 물든 건물 전경뿐이었다.

*

화도일문자는 이미 친구의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가 이스트 블루로 돌아가는 데 내 도움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

꿈을 꿨다. 너의 꿈이었다. 어딘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너는 세 자루의 검은 허리에, 검초록색 두건은 팔뚝에 맨 채로 팔짱을 끼고서 있었다. 나는 달려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네가 내 앞에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꿈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공간을 펼치면 파란색 반원은 점점 커지는데 그 안에 네가 담기질 않았다. 내가 공간을 늘리면 늘리는 대로 멀어지는 그 와중에, 네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조급함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면서!!”

결국 참지 못하고 내질렀다.

“…나한테 확신이 주고 싶었다면서.

이대로 누가 툭 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이 몸이 휘청거렸다.

“결국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고 가버렸잖아.”

처음 서 있었을 때부터 고개만큼은 내 쪽으로 향했으나, 나는 그제서야 너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넌 끝까지 너밖에 모르지. 나는 네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기대를 덜어내고 그다음에 또 기대했어. 한 번도 괜찮았던 적 없어. 동맹이 끝난 다음에는 널 내 배에 태우고 싶었어. 네가 해주는 이야기들이 좋았어. 네가 태어난 이스트 블루가 좋았어. 너와 함께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 네 형편없는 길 안내에 우린 결국 세 시간은 늦게 도착할 거고, 나는 길을 모른다는 핑계로 너랑 걷고 싶었어.”

한 번 입밖으로 나온 건 걷잡을 수 없었다. 때늦은 원망에도 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분명히 멈춰 서 있는데도 너는 점점 흐려지다가 이내 번져갔고, 나는 흔들리는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대체 내 뭘 믿고 비블 카드를 준 거냐. 내가 정말로 괜찮을 줄 알았어? 네 동료한테 소식을 전해 듣고서 멀쩡하게 잘 살 줄 알았냐고. 처음부터 비블 카드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았어. 너도 알잖아. 난 내 밑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근데도 내가, 그때, 네 약속을 믿었던 건…

네 약속이 모두 지켜진 다음에는, 얼마나 헤매든 나를 찾아오기로 했으니까…….”

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을 닦거나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혼자 답을 내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했다. 확신이 필요했다. 꿈이라도 좋으니까.

“조로야.”

너는 한 번이라도.

“난 처음부터 네 유언이 갖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네가 죽을 때 조금이라도 날 생각 했으면 좋겠어서.”

나를 사랑하긴 했는지.

*

새벽에 깬 로우는 일어나자마자 헛기침을 토해냈다. 호흡을 진정시키려 해도 자꾸만 헛숨들이 들어차서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물이라도 마시기 위해 급히 다리를 침대 밖으로 빼면 식은땀이 흐르던 몸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올해 아쿠아라구나가 지나가면서 통째로 잠겼다던 여관의 나무 바닥에서는 썩은 내가 났다. 손끝에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몸에서는 계속 열이 올랐다. 바닥에 닿은 가슴팍으로 자신의 심장박동이 들려온다. 살아있기에 열병이 오른 것처럼 끙끙 앓던 로우는 결국 우는 것을 포기하고 축축한 바닥에서 눈을 감았다.

아침 6시에 가까운 시간에도 방 안은 어두웠다.

여름이 끝나가는 탓이었다.

*

나다, 펭귄.

…그래, 이제 돌아갈 거야.

*

선원들과 다시 만나기로 한 섬은 마지막 로드 포네그리프의 위치가 기록된 게 확실시되는 섬이었다. 웬만한 기록 지침으로 찾아가기 힘든 섬은 영구 지침이 아니면 찾기가 어려웠는데, 하트 해적단이 어렵게 구한 영구 지침 그 하나가 로우의 손에 있었다. 워터 세븐에 머무르던 로우가 그들보다도 더 먼저 신세계 중반부에 위치한 섬에 도착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었다.

그 섬으로 향한 배이자, 여정 아닌 여정의 마무리가 될 마지막 배는 섬 주민의 어선이었다. 어차피 경계 당할 바에야 처음부터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협박할 심산으로 귀곡을 들이밀면 그들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마음대로 하라고 응수했다. 뜻하지 않게 워터 세븐의 생활이 길어지던 로우는 그들의 태도가 해적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보이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걸 확인한 시점에는 조용히 배를 타는 승객이 되었다. 그러고 나면 오늘 같은 날에 우리 섬에 들르는 걸 운 좋은 줄 알라며 어부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로우는 팔짱을 끼고 무시했다.

와노쿠니만큼은 폐쇄적이진 않았으나 펑크 해저드보다도 찾기 어려웠던 섬이 해적을 두려워하지 않을 일 같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아직 신세계에 남아있는 사황의 비호 아래 있는 섬. 여태까지 정보를 찾기 힘들었던 이유는 사황 세력이 작정하고 은폐한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26년 전 어인섬에서 사라진 마지막 로드 포네그리프의 위치를 품고 있는 섬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섬 주민들에게 걸리지 않고 선원들에게 미리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깨끗한 머리로 로우는 침착하게,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던 계획을 따랐다. 그렇게 마지막 로드 포네그리프를 해독하고 나면, 밀짚모자는 분명 해적왕이 되겠지.

로우가 워터 세븐에 머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밀짚모자가 해적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당황한 적이 있었다. 저보다도 먼저 로드 포네그리프를 찾은건지, 아니면 마지막 조각 없이도 원피스를 찾은건지, 어느 쪽이든 그가 평소 벌이던 기행을 생각하면 딱히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그때만큼은 화도일문자에 대한 것보다도 밀짚모자의 소식을 먼저 찾았다.

다행히 해적왕의 탄생이라고 떠들어대는 소문의 근원은 검은 수염을 격파한 그의 행보를 부풀려서 찍어낸 신문에 불과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세상 사람들은 해적왕이라면 당연히 밀짚모자가 될 거라고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흰수염이 해적왕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몇십 년 전 바다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그런 한편으로는 로우 역시 이 바다에서 해적왕이 된다면 그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가 되어야만 했다. 조로가 희생되어 이어질 수 있었던 꿈이었으니 반드시 그가 이뤄야만 했다. 조로가 없이도 그가 해적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믿기 힘든 주제에 그랬다.

워터 세븐을 벗어난 로우는 덜어낸 기대가 다시 채워지는 일이 없도록 그곳에다가 체념을 덮었다. 아직 작은 충격에도 위태롭게 흐물거리는 그것은 시간만이 단단하게 굳혀줄 수 있었다. 폴라 탱 호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동화책들을 정리하자. 이스트 블루는 이제 평생 갈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이며 도착한 섬 항구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밀짚모자의 해적기였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우가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먼저 어선을 반기는 동네 아이들이 웃으며 부두로 뛰어왔다. 뛰지 마! 그러다가 또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저 멀리서부터 아이들의 선생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곳곳에 세워진 건물들은 전부 나무와 골재 몇 개를 섞어서 만든 것 같이 보였다. 해가 하늘 가운데에 떠 있는데도 양지가 뜨겁지 않았고, 바람이 불면 풀 내음이 났다. 부둣가에서는 해풍이 불어야 할 텐데도 그랬다. 파도 위에서 볼 때부터 녹지가 많아 보이던 섬은 시골 마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지루해 보였고, 온화했으며─

“거봐, 내가 우리 섬에 들르는 건 행운이라고 그랬지? 기후가 특히나 제멋대로인 신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지. 이 평화도 되찾은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멍하니 서 있으면 배에서 고기를 나르던 어부가 어깨를 툭 쳤다. 로우는 아무런 대꾸도 돌려줄 수 없었다. 여름의 열기가 꺾여가는 섬의 기후가, 파도마저 다정하게 만드는 바람으로 펄럭이는 그들의 해적기와 너무나 잘 어울려서.

“해적이어도 겁나지 않아요. 이곳은 루피 씨가 지켜줄 테니까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던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을 지켜보며 걸어오던 여자였다. 로우가 자신이 섬에 도착한 뒤로 지금까지 쭉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신나있던 아이들이 발치에 몰려든다. 아저씨도 해적이에요? 아저씨도 팔이 이렇게 막 늘어나요? 아저씨는 왜 부하가 없어요? 우와 아저씨 검 진짜 길다, 이거 만져봐도 돼요? 손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들이 이뤄내는 합주에 로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환자라면 모를까 건강한 아이는 힘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여자가 그제서야 웃으며 아이들을 물린다.

“딱히 빼앗을 생각은 없어. 조금 신기해서 봤을 뿐이다. 내게도 오랜만이라서…. 저들의 해적기가.”

그제야 한시름 던 로우가 뒤늦게 여자의 말에 대답했다.

“어머! 루피 씨랑 친분이 있는 분이셨군요!!”

로우는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귀가 한순간 커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의학적으로 그것이 가능할 리는 없었음에도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은인의 친구에게 이렇게 대접할 수는 없다고 하나둘씩 난리 나기 시작한다. 저를 빼놓고 하나둘씩 척척 진행되어가는 이야기에 말을 얹는 대신에 로우는 한숨을 쉬었다. 듣질 않는 사람을 말려봤자 자신의 기력만 빠질 뿐이다. 그러고 나면 입안이 묘하게 씁쓸했다. 이 섬은 정말 여러모로, 루피 같아서.

“그 녀석이 소유할 줄도 알았나.”

의미없는 혼잣말이 새어나간다.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가 해적왕이라더니. 막상 목표와 가까워지니 마음의 변화라도 생겼나 보지, 밀짚모자야. 그에게 변화가 생길 일은 충분했고 그래서 답답했다. 비록 재밌어 보인다는 말로 세워둔 모든 계획을 무시하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못 참는다면서 옆에 있던 저까지 곤란하게 만들고, 자유로워야 해적이라며 자신의 속을 썩였지만, 루피의 그런 모습을, 조로는 가장 지키고 싶어 했을 테니까.

단단해지지 못한 체념이 흔들리고 서서히 무너진다. 그런다고 기대가 다시 솟아오르는 건 아니었으나 이대로라면 이 섬에서 자신이 느끼게 될 사실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아직 해야 할 게 많은 섬이었다. 로우는 버릇처럼 모자챙을 아래로 잡아 눌렀다. 순식간에 바뀌는 인상에 여자의 다리 근처에서 뛰어놀던 아이 중 몇몇이 놀라 여자의 무릎 뒤로 숨는다. 그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던 여자가 슬프게 웃었다.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고 있지만, 저 깃발은 이 땅이 루피 씨의 소유라는 뜻이 아니에요.

*

이 섬에서, 그의 동료가 죽었어요.

*

로우는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료가 묻힌 곳을 캐물었다. 혼자 마음이 급해서 질문이 추궁이 되어가던 즈음엔 더 이상 체념도 기대도 채우지 못 하게 되어버린 빈 공간에서 무언가가 자꾸 울컥였다. 확실한 것은 헤매는 건 이제 지겨웠다.

그래서 해적왕이 되는 걸 꼭 보여줘야 해서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깃발을 꽂았다니. 너는 끝까지 너답구나, 밀짚모자야.

*

숨이 턱 끝까지 찼으나 능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 주변에 있을 무엇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헤매면서도 일부러 네가 죽은 곳을 찾지 않았다. 일부러 너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복수할 대상은 너의 선장과 동료들이 남겨두지 않을 게 뻔했고, 그곳에 나를 위한 건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네 무덤을 보고 멀쩡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너를 더 이상 쫓지 않기로 했음에도 나는 네가 있는 곳에 왔다. 결국 이런 식이다. 네가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더라도. 네가 죽음을 결심한 그 순간에 날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설령 한 번도 날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가버리고 만다. 그렇게 네 검들을 만나면서, 네가 살아온 흔적을 엿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그냥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거야. 네가 볼 때면 항상 동쪽으로만 가던 내 비블 카드처럼.

신이 나를 가지고 장난칠 뿐이라고 해도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내 삶은 기구했으나 슬프기만 하지 않았고, 너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타고난 듯이 굴었으며, 나는 결국 너를 찾아가니까.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라도 그게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 결전을 치렀다던 곳으로 올라갈수록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힘들지도 않았는데 호흡이 떨렸다. 지금이라도 능력을 쓸까 싶다가도 지금만큼은 네게 직접 걸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마침내 로우가 도달한 그곳에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이 또 올 수도 있겠지.

백색의 검이 땅에 박혀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난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다.

조로의 약속을 짊어지던 검이 있었다.

그 확신을, 네게 주고 싶었을 뿐이고.

화도일문자가 그곳에 있었다.

간단히 사라지진 않을 거야.

서류 한 장 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를 꿰뚫은 채로.

알아, 직접 보고 있으니까……. 되돌려줄 이가 사라진 말들이 속에서 부서져 흩어진다. 못 찾았다더니. 선장이 갖고 싶어했다더니. 기어코 내게 거짓말을 했구나. 그러나 로우는 어떤 배의 항해사를 탓하는 대신에 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까이서 본 종이에는 핏자국들이 남아있었다. 남자가 이곳에서 살아 있었다는 증거였다. 로우가 머리를 숙였다. 맥박이 빨라지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어 숨을 쉬면 그간 참아왔던 그리움이 흘러 넘쳤다. 화도일문자에 박힌 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던 조로의 유언이 조금씩 움직인다.

로우가, 있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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