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에센트 크로니클

기억은 마치 비구름 뒤 별처럼

세오르데인 에이아르 x 아델하이트 에이아르

축축한 공기에 물 내음이 가득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밤은 캄캄하여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천체관측 탑의 탁 트인 꼭대기 층의 돌바닥을 시원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만 들려올 뿐.

세오르데인 에이아르가 들고 있던 우산을 기울이자, 앞에 선 여성의 우의 위로 떨어지던 빗물이 흔적을 감춘다. 키가 한 뼘은 작은 아델하이트가 세오르데인을 올려다본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내려가지 않겠어요? 아무리 우의를 입었다고 해도 빗속에 오래 서 있으면 빗물이 그 속으로 스며들 거예요.”

한발 앞서나간 오지랖은 아마 그의 하늘색 눈이 제 것과 굉장히 닮았다는 친밀함에서 유래했을 터다. 아델하이트가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조금만 더 있어도 될까요? 괜히 저 때문에 돌아가지도 못해서 미안하네요.”

“그럼 같이 우산이라도 쓰고 있어요.”

솔레유 왕실 소유의 천체관측 탑에 초대받은 손님을 홀로 둘 수 없어 세오르데인이 빗속에 남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낙심한 학자들과 퇴근하는 동료 기사들을 차례차례 보내고 마지막까지 남겠다고 자처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유는 사소하다. 젖은 우의 아래에서 얼굴만 빼꼼 내놓고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델하이트의 모습이 눈에 밟힌 탓이다.

앞으로 기울인 우산 밖으로 나온 세오르데인의 어깨가 빗물에 흠뻑 젖기 전에 아델하이트가 가까이 다가선다. 울적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표정이 조금 쓸쓸해 보인다. 빗소리가 잠시 침묵을 채운다. 먼저 입을 연 건 세오르데인이다.

“많이 아쉬운가 봐요. 3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혜성이라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그래서 대학자님이 이 탑을 오늘 하룻밤만 통으로 빌려서 쓰게 해달라고 왕실에 사정사정했다고 들었는데. 한동안 침울해하시는 거 달래드려야겠네요.”

“일주일 내내 맑다가 하필 오늘 밤에만 비가 이리 쏟아진다니, 정말 유감이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어린 학자의 얼굴은 의연하다. 별빛도 달빛도 없는 밤하늘 아래 아델하이트의 눈에 어쩐지 빛이 서려 있는 기분이 들어 세오르데인은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빛나는 하늘색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그거 알아요? 전 세계에서 비가 동시에 내릴 순 없다는걸요. 그러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비가 와서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 다른 곳에선 누군가가 별을 보고 있을 거예요.”

반짝이는 두 눈이 세오르데인을 응시한다. 우의 아래로 튀어나온 연갈색 앞머리에 빗방울이 맺혀있다.

“기억도 똑같다는 걸 아시나요?”

새로이 던져진 대화의 주제는 뜬금없지만, 아델하이트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해서 세오르데인은 웃지 않고 되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아델하이트가 몸을 돌려 세오르데인을 마주 본다.

“기억은 잊힌다 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하늘에 비구름이 끼는 것처럼 잠시 가려질 뿐이죠. 마치, 저기 저 별들처럼.”

펼쳐진 우산 위로 빗줄기가 요란하게 쏟아진다. 그러나 먹먹한 물줄기의 소음 속에서도 아델하이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와닿는다.

“비는 계속 내리지 않아요. 언젠가는 하늘이 개고, 다시 별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뒤로 아델하이트의 입술이 작게 달싹인다. 세오르데인이 집중하듯 미간을 살짝 모은다.

“미안해요. 마지막 말을 못 들었어요.”

“별거 아니에요. 이제 돌아갈까요? 오래 붙잡아둬서 미안해요.”

아델하이트가 돌아선다. 그가 우산 밑을 벗어나기 전에 세오르데인이 빠르게 뒤따른다. 우산을 접고 탑을 내려가는 계단 내부로 들어서자 빗소리가 잦아든다. 둘은 적막 속에 계단을 끝까지 내려온다. 탑의 입구에 다다라서 아델하이트가 얼굴에 미소를 매달고 세오르데인을 돌아본다.

“먼저 돌아가 볼게요. 숙소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늘 고마웠어요.”

바래다주겠다고 제안하기도 전에 아델하이트가 선수를 치고 탑을 나선다. 그 발걸음을 만류하지 못하고 세오르데인이 급하게 이름만 부른다.

“아델하이트!”

저도 모르게 경칭도 없이 친숙하게 나간 이름에 세오르데인이 멈칫한다. 그러나 빗속에 우뚝 멈춘 아델하이트를 오래 세워둘 수는 없어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인사를 건넨다.

“다시 오게 되면 꼭 연락해 줘요. 당신이 별을 보는 순간에, 저도 함께 보고 싶네요.”

아델하이트의 표정이 잠깐 울 것처럼 보인 건 아마 어둠 탓이겠지. 그가 웃으며 손을 한 번 흔들고 깜깜한 밤 속으로 사라진다. 세오르데인은 여전히 비 내리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빗소리가 전하지 못한 전언이 밤하늘 속에서만 메아리친다.

비는 계속 내리지 않아요. 언젠가는 하늘이 개고, 다시 별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오빠도 반드시 날 기억하고, 잘 돌아왔다고 반겨주는 날이 올 거야.


Written 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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