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잠든 신이 눈을 뜨는 순간을 기다린다
모르테 x 이데카 율리안
소녀여, 네가 네 것이 아닌 꿈을 꾼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한낱 인간의 정신으로 엿본 세계의 끝과 시작이 두려웠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 증거로 너는 지금도 나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신을 향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경외심이 아니다. 네 빛나는 금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이유 모를 친근감에서 비롯된 거북함이다.
그 감정은 네 것이 아니기에 너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시에 수많은 세월을 거쳐 네 영혼에 새겨진 것이라 없는 거로 치부하지도 못한다.
너는 모순처럼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나를 마주하게 된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커지는 괴리감에 너는 필히 괴로웠을 테지.
네가 평온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나는 오늘도 너에게 묻는다.
친우여, 너는 여전히 필멸의 꿈을 꾸고 있는가.
소녀여, 어젯밤에도 꿈을 꾸었느냐.
의문형이 아닌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의문형이 아닌 대답이다.
-이미 답을 알고 계시면서, 굳이 제게 확인받을 필요가 있으신가요.
네 말이 옳다. 바다를 내다보는 네 눈에 비친 것은 푸르른 물결이 아닌 혼란의 소용돌이다. 한 인간의 몫이 아닌 기억이 차곡차곡 한정된 공간에 쌓여간다.
너는 지난 삶을 기억할 수 있는가. 그 지난 삶, 그 전의 삶까지도. 수많은 환희와 슬픔, 생애와 죽음이 네 눈앞에 열쇠를 들고 흔드는 걸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네 어깨를 내리누르는 것은 윤회의 흔적이자 신벌의 낙인이다. 더 먼 생애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너는 짐작했을 테지. 네 영혼 안에 잠든, 그 모든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그러나 너는 그에 관해 단 한 단어도 꺼내지 않는다. 자물쇠는 굳게 걸어 잠겨있다.
친우여, 너는 여전히 네 죄를 인정하지 않는가.
소녀여, 너는 왜 안식의 잔을 받기를 거부하는가.
몇백 년 너를 결박하던 심판의 사슬을 풀어주겠노라 건넨 손에 화답은 오지 않는다. 봉인된 힘, 빼앗긴 기억이 남긴 공허는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네게도 느껴질 텐데. 네 손은 다른 것을 쥐고 있느라 급급하다.
이해한다. 세지 못할 인간을 별의 길로 인도하며 그만치 미련도 상대해 왔다. 아무리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누구나 못내 아쉬운 눈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뒤돌아보고는 한다.
너도 지금은 고작 스물두 살 인간 소녀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니 영향받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너 역시 모를 리 없다. 신을 담은 인간의 껍데기는 때 이르게 무너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네가 맞이하게 될 결과는 정해져 있다. 내가 네게 제시하는 것은 잔혹한 굴레의 탈출구다.
그런데 너는 왜 비극적인 결말을 앞둔 자의 표정을 짓고 있는지.
-신의 눈으로 보시기엔 아둔하다 느끼실지 모르지요. 하지만 이 잔이 의미하는 게 제 죽음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너는 그렇게 외면한다. 금 가는 그릇에 담긴 영혼이 결코 내게 인도받을 일 없는 존재라는 진실을.
친우여, 너는 여전히 달콤한 허상을 버리지 못하는가.
소녀여, 너에게 그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저는 당신께서 찾으시는 그분이 아니에요.
너는 네 안에 잠든 신에게, ‘이데카 율리안’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그것이 인간의 입을 통한 그의 진정한 의사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결국 네가 원하는 바를 거절할 수 없음을 안다.
사랑을 품은 죗값을 치르는 창조의 신. 그가 내게 갖는 의미란 생명 그 이상이고, 그가 내 안에 창조해 낸 것은 마음 그 자체다.
그에게 내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나는 이제 가늠하지 못한다. 그가 귀히 여기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가. 곁에 있던 순간에도, 사라지던 순간에도 묻지 못한 것을 그가 돌아온다 한들 물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네 선택을 기다린다. 심판의 저울을 멈춰두고 오롯이 네 진심만을 담은 선택을.
-죽음의 신이시여, 부디 돌아가 주세요.
그게 끝내 네게 독이 될지라도.
‘뤼세른’,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때가 왔노라.
내가 눈을 감아주고, 네가 거부한다 해도 시간은 흐른다. 기억은 계속 떠오른다. 네 안에 잠든 운명이 다가온다.
보기 싫다면 눈을 감고, 듣기 싫다면 귀를 막아라.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나니.
소녀여, 선택할지어다.
Written 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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