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겠지요.

BG3 by 김야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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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내 타브의 죽음을 소재로 했습니다. 혹여나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이와 관련하여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은 감상을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BGM:: 유다빈밴드-고열

https://youtu.be/1bdL3XsXI2E?si=pV62KkmzYXDPvuP7



오늘 레이젤이랑 섀도하트가 싸웠다. 진짜 뭔 사달 나는 줄 알고 식겁했는데 어찌저찌 잘 말렸음. 그놈의 분강… 분강? 븐광? 아 철자 뭐더라… 하튼. 그게 뭐라고.

무척이나 가볍고, 정말 자기 할 말만 끄적여놓은 한 줄짜리 일기. 주변에는 이상한 그림도 몇 개 그려져 있었다. 아니, 이건 낙서라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지금 이걸 읽으라고 이때까지… 아스타리온은 작게 중얼거리며 책상 서랍의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자물쇠 따기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몰래 열어보지 말아 달라는 진지한 말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 와중에 그런 본인을 믿지 못한 건지 비전 자물쇠 마법을 걸어둔 걸 보고 크게 싸웠던 적도 있었지만… 이것도 벌써 십여 년은 훨씬 지난 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지금까지 몰래 자물쇠를 풀지 않은 것에 대한 ‘상'이라며, 서랍 열쇠를 건네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거창한게 들어있길래 이러나.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바닥만 한 빨간색 양장 책을 넘겼던 아스타리온이었기에, 묘하게 열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실수로 그냥 넘기는 페이지가 없게끔 꼼꼼하게 한 장씩 읽어갔다. 수십 년 전, 그가 건네준 테이의 사령술을 읽을 때처럼.

미친미친미친미친…

할신 팔뚝 쩐다.

… 잠시 책을 덮었다. 진짜 이런 걸 읽으라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성질을 죽이기 위해 이를 살짝 갈 수 밖에 없었다. 

“진짜야? 이런 걸 읽으라고?”

방 밖에 있을 그이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다는 듯 아스타리온은 계속해서 제 할 말을 이어갔다.

“… 왜 내 이야기는 한 줄도 안 보여? 할신 얘기도 적혀있는데, 그 전에 나에 대한 건 뭐, 코빼기도 안 적혀있잖아!”


허 참, 내 참…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다시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어갔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와오늘진짜많은일이있었는데너므ㅈㅓㄹ렬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진 글씨체였다.-

몰래 빵 훔쳐먹다 게일한테 걸림. 눈치 빠른 자식… 생각 탐지 반지 주는 걸로 비밀 유지 서약을 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게일이 조금 애잔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신이 뭐라고.

샤는 쫌팽인가?? 엿이나 먹어라.

레이젤 짱 칼라크 짱 내일 일어나면 뽀뽀해주고싶네… …덕분에 살았다 정말로.

나 윌이 저렇게 욕하는 거 첨 봐… 좀 두근두근 했을지도. 그리고 미조라 미친 놈.

아스타리온은 그다지 좋지 못한 종이에서나 나는 먼지 냄새를 맡으며 글자들이 적힌 페이지를 손끝으로 어루만져보았다. 왜, 그런 장난감이 있지 않은가. 누르면 소리 나는 인형 같은 거… 그저 손바닥만 한, 작은 일기장일 뿐이었지만, 이렇게 글자를 만지면 그의 옛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한 페이지를 더 넘기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스타리온 본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스타리온 때문에 좀 어지러운데… 뭐 방법이 있나. 배고프다는데…

친해지면 뱀파이어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까?

-카사도어 자르. 그의 주인.

-납치 담당? 

-발더스게이트에 있는 자르성 꼭 둘러볼 것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지?? 미쳤나봐 진짜!

제발 정신 차려, 이안. 너 그럴 때 아니야.

그래, 그랬었지. 아스타리온은 잠시 추억에 잠겼다. 나는 너에게서 피를 가져갔고, 너는 나에게서 정보를 가져가려 했었지. 둘은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원했다. 피와 정보를 위해 애정을 나눈 관계. 서로가 서로를 속인다고 여기며 지내왔었다. 처음에는 그랬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렇게 말 하지 말 걸!

어떻게 사과하지..? 

쓰면서 펜으로 강하게 누른 것인지 뒷면까지 번진 잉크 자국을 어루만졌다.

‘... 네가 걱정 돼.’

그 말을 기점으로 둘은 바뀌었다. 그저… 서로의 애정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입을 맞추면 각자가 갖고 있던 걱정거리가 잠시동안 잊혔었다. 물론 그것이 본인들의 문젯거리를 해결해 준 건 아니었지만. 아스타리온은 씁쓸함에 잠시 입술을 깨물었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처음으로… 일기다운 일기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꽤나 긴 장문의 글. 아니, 편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하는 형식으로 적혀있었으니까.

이게 맞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관계를 되돌리고 싶지 않아. 조금 열받지만, 이제 그 녀석 얼굴 못 보면 짜증이 날 정도니까 말이야. 젠장, 그렇게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좀 덜 했을 텐데. 그랬으면… 이렇게 죄책감 쌓는 일도 없었을 텐데.

물론, 아스타리온이 그 아이들의 부모를 잡아갔다는 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니, 솔직하게 적자. 만약 아스타리온이 직접 납치했다고 했어도, 나는 걔한테 이별하자고 말 못 할 거야. 그 정도로 그 녀석이 좋아. 너무… 너무 많이. 그래서 내 동생들에게 미안해지기도 해. 내 여정의 시작은 그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끝이 아스타리온을 향해 가는 것으로 변하고 있잖아.

이게 맞는 걸까?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 본인 스스로? 아니면… 이걸 읽는 자?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또 싸움. 왜 저렇게 말을 얄밉게 하지.

눈도 안 마주친 지 일주일째다. 해보자, 이거지?

진짜 미워.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라! … 그런데 너무 오래는 말고 한 일주일 정도만…

일부러 윌이랑 둘이서만 조사했던 건데. 바보. 바보 모기 자식.

“… 애인 두고 다른 놈이랑 돌아다니면, 눈이 안 돌아가겠냐고. 누가 누구보고 바보래…”

아스타리온은 쓰게 웃다가 손의 힘을 풀었다.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힘주고 있었다. 행여나 일기가 구겨지면, 그가 화낼 테니 조심해야지. 그와 동시에 그때의 일들을 떠올려봤다. 제 애인인 그가 윌과 단둘이서만 무언가 하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궁금증에 물었지만, 그는 답을 피했고,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됐었다. 결국 이 일은 둘의 말다툼으로 번졌다. 그리고 그 오랜 냉전이 깨진 것은…

카사도어 미친 놈.

하. 그래, 이때였다. 그의 궁에 쳐들어갔을 때. 감옥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여 굳어버린 그의 얼굴을 봤을 때. 자신과 다른 스폰들이, 그의 동생과 관련된 이들을 납치했단 걸 알았을 때… 그는 실망했었고, 이쪽은 절망했었다. 정말로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스타리온은 그 의식을 그대로 물려받으려 했었다. 7천 명의 증거, 7천 명 중에서도 반드시 묻어야 하는 증거가 있었기에.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제 동료이자, 애인. 앞으로를 함께 하려했던 반려는 이를 원치 않았다. 하지 말아달라 했다. 이겨내지 않아도 되니까, 같이 모든 걸 마주하고 살아가 보자 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은 검은 미사를 멈추고 7천 명의 스폰을 데리고 언더다크로 들어왔다. 그것도 벌써 몇십 년 전의 이야기라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던 아스타리온이었다. 그들의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구나. 그리고 다음 장부터는 함께하기로 한 시간부터의 이야기들이 적혀있겠구나.

와, 예순이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까 미간에 주름 생겼더라. 아스타리온한테 보여주니까 좋아했던 거 같다.

“그래, 좋았어. 우리 둘이 닮아가는 거 같아서.”

지상에서 꽃 한 송이가 날아들어왔었다. 명상 하고있는 아스타리온 머리 맡에 장식해뒀더니 어쩐 일로 센스가 있냐며 놀렸다. 칭찬이냐 욕이냐?

“당연히… 둘 다지. 난 너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었어.”

이제는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도 꽤 벅차다… 자헤이라는 대체 어떻게 그렇게 건강했던 거지?

“… 그러게. 같이 다니면서 물어봐둘걸.”

왜 팔자주름은 또 싫대?!

“… 나는 그대로인데, 너만 계속 변하는게 무서워서 그랬어.”

늙기 싫다.

“너도 그랬구나.”

오랜만에 게일이 놀러왔다. 우리 둘다 일어서면서 곡소리를 내니 아스타리온이 질색하더라. 근데 어쩌냐, 앞으로 나는 점점 더 낡고, 지쳐갈텐데.

“…”

아스타리온.

잠시 아무말이 없던 그는, 제 이름만 덩그러니 써져있는 페이지를 보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응, 자기야.”

그러나 마법으로 감춰져 있던 글자들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교적 최근에 쓴 듯, 아니,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잉크 냄새가 선명하게 흘러넘쳤다. 힘없는 손으로 애써 꾹꾹 눌러 적은 글을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갔다.

아스타리온. 내 잘생기고 섹시하고 바보 같은 흡혈귀.

사실 이 일기장은… 몇 년동안 묵혀뒀었어. 없는 기력 쥐어짜 내서 글 쓸 시간에 네 얼굴 몇 번 더 보는 게 이득이겠거니, 해서 말이야. 하지만 오늘은 펜을 들어야 할 거 같아. 어젯밤 꿈에… 위더스가 나왔거든. 그 해골바가지, 이유 없이 나타날 놈은 아니잖냐. 아마도… 내가 곧, 위더스를 만나러 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그 전에, 마지막 인사 몇 줄은 남겨둘게. 내가 지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글로 적는 건 이해해 줄 거지?

음, 막상 펜을 잡으니, 뭐라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이 페이지를 온통 네 욕이랑 사랑 고백으로 적어놓고 싶은 마음인데. 그런데 그건 평소에도 많이 해왔고 말이야.

좀 낯간지러운 말이긴 하지만, 꽤 오랜 시간 같이 보냈다. 그렇지? 발더스게이트의 영웅… 뭐시기라 불리던 나는 벌써 하프 엘프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겨 장수한 할머니가 됐잖아. 그러는 동안에 넌… 정말 하나도 늙지 않았고, 여전히 빌어먹게 잘생겼고. 그래서 네가 내 주름을 보고 좋은 듯 싫은 듯 애매하게 반응했던 거겠지. 어때, 읽고 나니 딱 찔렸지? 나 눈치 빠른 거 새삼 다시 느껴지지? … 그래서 나도 참, 슬펐어. 차라리 모르는 채로 지냈으면 좀 나았을 거 같아서. 그때 이후로 종종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검은 미사를 막지 않았으면… 너도나도 지금의 생활과는 많이 달랐을 텐데, 같은 생각. 네가 초월체가 되었다면 늙어가는 나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실없는 생각 말이야. 정말 말 그대로 실없는 생각이야.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어. 나는 이미 늙었고, 너는 스폰으로서 지내야 하는 것을.

처음엔 주름 한두 개 생겨나는 것에 별 타격이 없었어.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지니 새삼… 무섭더라. 늙고 싶지 않았어. 너랑 같이 오래 살고 싶었어. 하하… 내가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어렸을 땐 굶어 죽는 건 싫으니 빨리 나이 먹어 자연사나 해버리는 게 꿈이었는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아스타리온. 나조차도 모르게 너한테 스며들어서, 나를 겁먹게 만들고, 이런 걸 사랑이라 말하게 만들잖아. 내 인생의 목표를 너로 수정하게 했으니까 책임지라고 해야 했었는데. 그걸 직접 말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 몇 글자로 알려야 하는 게 원통할 지경이야. 어휴, 늙으니까 원망만 늘어나네.

하지만 그 목표가 별로였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으니, 용서해 주도록 할까. 오히려 즐거운 ‘달성'이기도 했고. 그래, 즐거움… 너랑 함께했던 시간을 한 단어로 축약한다면 그게 딱 맞을 거야.

… 팔 아프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적어둬야지.

… 이제는 펜을 들고 있을 힘이 없으니 꼭 해야 할 말만 적어야겠다.

나에게 즐거움을 준, 소중한 흡혈귀야. 진부한 얘기지만,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어. 네 덕에 나는 마주하는 법과 사과하는 법을 배웠어. 마음 안에 누군가를 두는 법을 알게 됐어. 그 누군가와 함께 이겨내진 못해도, 마주하고 나아가는 법을 배웠어. 그 모든 일들에 아스타리온 너라는 존재가 있었어. 여전히 죽는 건 무서워. 너를 다시 못 본다는 건 싫어. 하지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라면… 이번에도 직접 두 눈으로 마주하고, 해낼 거야. 이 과정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싶지만, 솔직히 그러기 쉽지 않겠지. … 널 두고 가서 미안해. 내가 오래 살지 못해서 미안해. 마지막 인사에 미안하다는 말만 가득해서 미안해.

그러니 내가 떠나가도, 나를 너무 오랫동안 기억하지 마. 네 기나긴 인생에서 나는 아주 찰나의 동료였고, 반려였잖아. 매번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애인이었잖아. 이 세상엔…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도 더 너를 소중히 여겨줄 존재가 있을 테니까. 그런 사람을 만나서 두 배, 세 배 더 행복해지길 바라. … 그래도 너무 냉큼 만나러 가진 말고, 장례식이 끝나고 한… 열흘 정도만 시름시름 앓다가 가. 너도 나 때문에 속 좀 썩어봐라. 그러고 나서 날 차버렸다고 생각하고, 새 사랑 만나러 떠나버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드로우 하프 엘프에게도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그때도 나를 만난다면… 수작 한 번만 걸어줘. 다음 생에서는, 너한테… 정말 잘해줄게. 너만큼 오래 살아볼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스타리온이라는 남자를 사랑할게.

아스타리온. 내 동료. 내 연인. 내 반려. 사랑해. 늙어가는이 순간에도.

사랑해.

사랑해.

(추신, 이 일기장. 버려줘.)

조심스레 책장을 또 넘기고, 또 넘기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살펴봤지만, 더 나타나는 글씨는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계속해서 일기장을 더듬거리며, 제 목소리에 반응하던 페이지에 말을 걸었다.

“…정작 갈 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여기에 할 말 다 적어놔서 그런 거였네. … 더 없어? 나한테 할 말. 제발, 몇 마디만 더 해봐, 자기야. 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말이 많았는데…”

눈가에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렇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울고싶을 때 눈에 그런 감각이 들 테니. 몇십 년, 몇백 년 동안 잊혔던 감각들을. 그런 허황된 감각 때문에, 제 몸에서 날 리가 없는 열기 때문에 눈이 붓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잠겨간다.

오늘은 아스타리온의 동료이자, 연인이었고, 반려였던 그가 죽은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고, 아스타리온이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던 그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그는 이 죽음을 부정했고, 못 본 척했었다. 그 순간이 제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일기장을 읽는 것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그는 ‘살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기장에 글을 적은 이는, ‘살아있는 아스타리온'에게 글을 남겼으니까. 언데드인 자신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죽은 반려'.

아스타리온은 제 옛 동료들에게 했던 약속대로, 일주일 만에 감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보존마법으로 애써 유지해 두던 반려의 몸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아마 몇십 년, 어쩌면 몇백 년 동안은 만질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네 말을 잘 들은 적이 있었나? 나는 너 절대 안 놔줘, 자기야. … 그러니까, 너무 늦지 않게 다시 태어나.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얼굴로 다시 꼬시러 갈게. 그때까지 너도 외간 남자 만나지 말고. 잠시 재미 보는 정도는 용서해 줄까?”

반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치곤 지나치게 장난스러웠지만, 그 정도가 이 둘에겐 딱 알맞았다. 이 순간이 진정한 마지막이 아니라고 믿는 자가 건네는 인사말로는 말이다. 인사를 마친 아스타리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언더다크에 머물러주고주고있던 제 동료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시작했다. 일기장은 다시 책상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가두었다.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 우리들의 리더, 제 연인을 위한 끝내주는 장례식의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아참, 그 말을 안했구나. 늙지 않는 내 몸처럼, 이 감정도 아마 변함 없을 거야. … 사랑해. 오직 너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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