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변이의 충족원리
찰칵, 하고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거리낌 없이 묵직한 현관문을 연다.
"차단기 내려."
퍽, 하고 조명이 나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집안의 모든 조명이 꺼져있었으므로. 이 집의 거주자들은 길고 긴 여행을 떠났다. 집이 방치된 지 한 달 반은 넘었으리라.
단독 주택 뒷편에서 차단기를 내린 동현이 뽈뽈대며 현관으로 다가왔다. 현관문을 잡고 있던 민석은 입가에서 소형 무전기를 떼어낸다.
"도어락 열고 들어왔으니 세콤은 문제 없고. 전기도 내렸으니 감지기며 CCTV도 문제 없지."
"우와아, 어떻게 연 거예요. 형?"
민석은 하얀 장갑으로 덮힌 검지손가락을 입술 앞에 가져다 댄다.
"영업 비밀."
말을 끝내곤 곧장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동현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 현관을 밟는다. 묵직한 철제 현관문은 일단 닫아두었지만, 전기가 내려갔으니 잠기지는 않을 것이었다.
"집 좋네. 이런 데는 얼마나 하나?"
민석이 널찍한 거실을 둘러보며 중얼댔다.
"몇 십 억은 하던데요? 저도 궁금해서 좀 찾아봤죠."
"하, 서울 안의 공기 좋은 산자락이다 이거지."
민석은 툴툴대며 바닥의 먼지를 발끝으로 스윽 밀어내 본다. 바닥에도 가구에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다.
두 사람이 조사하고 있는 이곳은 우면산 산자락의 2층짜리 단독 주택. 최근 어떠한 사고에 휘말려 길고 긴 여행을 떠나버린 한 부부의 소유였던 집이다. 동현은 그들을 조사할 당위성이 생겼으나, 세콤이 눈을 부라리고 있을 주택에 어떻게 잠입해야하나 고민했다. 결국 알고 지내던 베테랑 조사원인 민석에게 도움을 청하고 만 것이다.
"머리카락이라도 찾아 봐. 작고 후에 아무도 안 건드린 거 같으니까...... 여기저기 떨어져 있겠지."
"그냥 칫솔만 가져가면 안 되나?"
"다시 가져다 놓을 자신은 있고?"
"으음...... 없죠."
"그럼 열심히 바닥 살펴."
동현은 얌전히 고개를 떨궜다.
"......거실 말고. 침실이나 서재 같은 데에서 찾아봐야지. 그 부부 걸 찾고 싶으면."
동현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거실 전체의 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흑색의 비중이 조금 더 높은 저녁놀이 넓은 창을 투과해 거실을 내리비추고 있다.
소파와 TV 따위의 정석적인 거실 가구들은 그 모양새에서 우아함이 묻어나온다. 바닥에 깔린 카펫 역시 결코 평범한 가격대는 아닐 것이었다. 유리 문이 달린 장식장에 놓인 감사패와 표창장과 트로피에는 모두, 가장이었던 남자의 이름이 박혀 있다.
"우와아...... 이런 사람이 그런 사고에 휘말려서 죽다니...... 인생사 참 허무해요."
"가는 데엔 원래 순서 없어."
민석은 다소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현은 분위기에 눌려 괜히 거실을 다시 둘러보는 체 한다.
소파 뒤쪽에 걸린 커다란 가족사진에는 세 사람이 찍혀 있다. 엄마를 많이 닮은 아들 뒤로 부모 두 명이 나란히 섰다.
'저희 집안은 원래 어머니 핏줄이 강해요.'
그 학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댔다.
동현은 민석을 따라 안쪽의 방으로 이동했다.
유선이 로스쿨 동기라는 남자와 재회한 건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집안 청소를 하다가 계단에서 굴러 병원에 입원하고 만 아버지의 병문안을 하러 가던 도중, 유선은 다른 병실 앞 명패에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윤필규라는 이름이 그리 흔하지는 않다. 병동 복도를 걷던 유선은 냉큼 발길을 돌려 그 병실의 문을 열었다. 아늑한 1인실이었다.
먼저 병문안을 온 인물과 약간의 트러블은 있었지만,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이는 유선의 로스쿨 동기였던 윤필규가 맞았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고 며칠 째 코마 상태에 빠져있다는 정보 역시 얻었다. 그에게 다양한 방면으로의 호감을 갖고 있었던 유선은 그야말로 분개했다. 그 길로 동현이 호출당했고,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빠짐없이 조사해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족으로 아버지의 병문안에는 오 분도 사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동현은 말도 안 되는 인물들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사건에 휘말렸다.
그 때의 일들은 다시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평범한 조사원 한 명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사건이었다......
아무튼 그 사건은 이 주도 안 되어서 종식되었다. 피해자의 선처라는 말도 안 되는 결말을 맺었다. 애시당초 말도 안 되는 사건이니만큼 어울리는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사건 종결 후 동현은 다시 유선에게 호출되었다. 실상 대부분의 근무 시간을 로펌에서 보내는 동현이긴 하지만, 일 대 일의 시간은 귀한 것이다.
"윤필규를 다시 데려오고 싶어."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들뜬 얼굴로 그런 말을 했다. 동현은 어쩐지 엄청난 패배감을 느끼고야 만다.
그는 본래 유선의 로펌에서 일했었다. 그 땐 대표 상속이 이루어지기 전이었으니 유선 아버지의 로펌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모종의 사건에 얽히는 바람에, 그는 제 발로 로펌을 나갔다. 유선이 말하길 '바보 같은 이유로 퇴사한 멍청이' 란다.
"......다시 법조계에서 일할 의향은 있대?"
변호사를 때려친 뒤 어째서인지 신생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그다. 모 작가의 데뷔작이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끌어 지금은 중견 출판사가 다 되었지만.
"없겠어? 출판사 같은 데서 일하는 거보단 백 배는 잘 벌게 될 텐데."
백 배는 오버였지만 동현은 대강 납득했다.
그래서 유선은 동현에게 그의 뒷조사를 의뢰했다. 좀 더 높은 효율의 헤드헌팅을 위해 그가 여태껏 대체 무얼 하고 다녔는지 빠짐없이 긁어오라고 명령했다.
간단한 예비 조사 과정에서 그의 부모가 최근 비행기 사고에 휘말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분야에서 상당히 저명한 대학 교수. 어머니도 같은 직업이지만 그녀의 성과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그렇다면 친아들 두 명-윤필규에게는 연년생 동생이 하나 있었다-에게 이들의 모든 재산이 떨어지지 않나. 동현은 우선 세속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부모의 자택까지 처분한다면, 어마무시한 상속세를 다 낸다고 쳐도, 대충 일하며 놀고 먹어도 지장이 없을 규모의 돈이 수중에 생기는 건데. 그러면, 그가 굳이 빡센 법조계로 이직할 이유가 없지 않나......
결국 동현은 유산의 흐름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이 지점에서는 동현이 오히려 유선의 도움을 받았다. 법률적인 문제는 아무래도 그녀의 쪽이 훨씬 빠삭하고 연줄도 많을 것이었으므로.
그리고,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유선과 동현은 로펌 근처 카페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이곳저곳에 유리벽으로 가벽이 둘러 세워져 있어 마치 룸 같은 공간을 제공하는 카페다.
"윤필규한테는 아버지의 유산이 상속되지 않았어."
"어? 왜?"
"그러니까...... 이게......"
유선은 들고 온 서류를 몇 번 뒤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윤필규한테 동생이 있다는 건 알지?"
"알지. 연년생이잖아."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어필을 하려고 했지만, 유선은 들은 체도 않고 아인슈페너를 공격적으로 한 입 마셨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자기 재산은 윤필규 동생한테 전부 물려준다는 증서를 써 뒀어."
"엥?"
"뭐, 그래도 유류분이라는 게 있으니 애비 재산의 반의 반절은 받을 수 있겠지만."
유류분이란 상속인을 위해 법률상 유보된 상속재산의 일정 부분을 뜻한다. 직계비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법정상속분의 절반을 유류분으로 가져갈 수 있다.
만약 상속자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해 보자. 이 때 그의 배우자는 사망하였으나 직계비속인 자식 두 명이 생존한 채라면, 그들은 각각 재산의 1/4 씩을 유류분으로 상속받을 수 있다. 그들의 법정상속분은 1/2이기 때문이다.
동현은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따뜻한 카페라떼를 한 모금 넘긴다.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았나? 그런 유언까지 미리 써 뒀을 정도면."
유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팔짱을 끼곤 서류를 잡아먹을 듯이 내려다본다.
"뭔가 구린내가 나."
"나긴 해."
"윤필규 같은 아들을 싫어할 리 없는데. 그것도 대학 교수씩이나 되는 인간이......"
"어머니 쪽은 어때?"
"그쪽은 별 거 없어. 유언도 증서도 없어."
잠깐의 침묵. 동현은 턱을 괴곤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본다.
"가정사를 좀 파 보는 게 나을 수 있겠는데......"
입 밖으로 뱉고 나서 동현은 후회했다. 가정사 같은 걸 헤드헌팅에 어떻게 써 먹어? 라는 유선의 비아냥을 들을 준비까지 마치고 나서, 슬금슬금 시선을 들어 변호사 님을 쳐다보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아까와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고개까지 작게 끄덕이는 게 아닌가.
"팔 수 있는데까지 파 봐. 가족에 관련된 서류는 이것저것 다 떼어서라도."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라는 질문을, 동현은 할 수 없었다.
변호사 님의 눈동자에서 애수의 빛을 엿보고 만 탓이었다.
별안간 가정사를 파 보라시니 탐정으로서는 의뢰인 님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동현은 우선 윤 씨 일가와 가장 가까운 인물을 찾았다. 현재 남아있는 두 아들의 외가와 친가가 된다. 하지만 신기했던 점은, 그들의 친가가 절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모두 사망해 있었다는 점이다.
사망한 윤 씨 일가의 가장, 이하 윤 교수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남동생은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었는데, 삼십여 년 전 모종의 교통사고로 부부가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출생년도로 보아 아슬아슬하게 생존해 있을 것만 같았던 윤 교수의 부모님 역시 동생 부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이전 세상을 떴다.
윤 교수는, 말할 것도 없이 얼마 전 활주로에 처박혀 사망했다. 그의 아내와 함께.
즉, 친가의 부모도 자식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2대가 통으로 사라진 것이다. 남은 사람이라곤 3대인 윤필규와 그의 동생 뿐. 그들이 결혼하여 자식을 남기지 않는 한 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곘지.
동현은 별 수 없이 외가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그쪽은 아직 건재했다. 윤 교수의 아내, 이하 이 교수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다. 평범하게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 부모님도 두 분 다 멀쩡하게 살아계신다. 상당히 다행인 일이었다.
아들의 이름은 윤유준. 올해로 스물 아홉. 천안 소재 대학에 재학 중. 가계도 상 윤필규의 외사촌동생이 된다. 외사촌임에도 성씨가 같은 건 참으로 기이한 우연이다.
이모보단 사촌동생 쪽이 더 심리적으로 가깝겠지, 라는 판단을 내렸다.
동현은 그 길로 천안으로 남하했다.
"탐정이요?"
유준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탐정 자격증도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탐정 자격증이요?"
유준은 별 헛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찾아오신 거예요?"
"뭐, 같은 과 학생들한테 물어물어. 이 시간이면 거의 도서관에 있을 거라 그러길래."
"예? 누가요?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개인정보나 흘리고......"
"에이, 친척이라 둘러댔죠."
"전혀 친척일 얼굴이 아닌데?"
유준은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를 접어 억지로 웃음을 만들었다.
"당신이랑 윤필규 씨도 전혀 안 닮았는걸요."
동현은 순하게 처진 눈을 가늘게 떠선 미소지었다.
나이가 좀 있는 대학생이 가볍게 한숨을 쉬곤 자리를 뜨려 들기에, 동현은 급하게 그 뒤로 따라붙었다.
"아, 혹시 지금 시간 안 되시면 내일 만나도 되고. 저야 근처 모텔에서 자면 되니깐."
"순순히 가지는 않겠다는 거네요."
"거액이 달린 일이라서요......"
순 거짓말이었지만 비굴한 척하기엔 썩 괜찮은 말이었다. 유준은 흡연 구역 팻말이 달린 공터에 서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든다. 반사적으로 라이터를 꺼낸 동현이었으나, 유준은 한 손으로 그를 제지한다. 나머지 손으로 익숙하게 담뱃불을 붙였다.
"필규 형이라......"
희뿌연 연기를 길게 내뱉곤 중얼댄 말이었다.
"가정사가 궁금한 거죠?"
"엇, 어떻게?"
"굳이 사람까지 써 가면서 캐낼 건 그거 밖에 없지."
"그 정도로 특이적입니까?"
유준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탐정을 살핀다. 곧이어 턱을 조금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 보는 것이다.
"탐정이라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모양이네."
"아는 게 없으니까 천안까지 내려왔죠. 탐정은 원래 발품을 파는 직업이거든요."
동현은 당당한 얼굴로 그 오만한 면상을 주시한다.
언제부터 이런 연출가가 다 되었을까.
동현은 잠시 고민했지만, 명확한 시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탐정으로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스킬이라는 생각 정도는 했던 것 같다.
유준은 턱을 내려 희멀건 연기를 뱉어낸다.
"누가 그 형을 그렇게 궁금해 하는데요?"
"의뢰자 님이 궁금해 하시죠."
"놀라울 정도로 정보값이 없는 대답이네......"
기다랗고 하얗던 담배는 어느새 절반 이상이 잿더미로 변화했다. 유준은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뱃대를 짧게 살피다가, 이내 근처 재떨이에 눌러 불씨를 꺼 버렸다.
"얘기가 좀 길어질 텐데. 커피는 탐정이 사는 건가?"
"그럼요. 커피는 물론이고 소정의 사례금도."
"설마, 형 얘기 팔아서 돈 만질 날이 올 줄은 몰랐네."
"그건 무슨 뜻이죠?"
"필규 형은......"
유준은 사각 테 안경의 다리를 밀어 올렸다. 인공적인 대화의 간극.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올곧은 사람이거든요."
밤 열 시가 넘어가니 웬만한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문을 닫았다. 그것은 동네 카페도 마찬가지라,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야행성인 가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본래 대학가의 술집이란 요일을 가리지 않고 문전성시이지 않나.
"혹시 조용한 가게 아세요?"
하고 물으니 유준은 조용히 탐정을 흘기다가 자연스레 앞장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발을 들인 곳은 후미진 상가 중층의 칵테일 바. 다 쓰러져 가는 건물처럼 보여서, 영업하는 가게가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탐정과 정보 제공자는 구석진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들 외의 손님은 창가 쪽의 두 테이블 외엔 전무하다. 마스터에게 적당한 칵테일과 안주를 주문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집안의 가정사라......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지?"
"특이적인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그것부터......"
"아니, 그걸 설명하려면 서문이 길어지거든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데."
"중심만 말하셔도 되는데."
"그러면 칵테일을 얼마 못 마시잖아요?"
유준은 구김살이 선명한 셔츠를 가다듬다가, 제 앞에 깔루아 밀크가 놓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모는 우리 엄마와 상당히 닮았다.
같이 있으면 쌍둥이가 아니냐고 되물어질 정도로 닮았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지 않고, 두 살 차이나 나는 자매에 불과하다. 어쩌면 학생 시절엔 쌍둥이냐는 질문을 듣지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초중고의 12년이란 한 살 차이가 어마무시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시기이므로......
어쨌거나 중년에 이르른 엄마와 이모를 보았을 땐 그렇다는 말이다.
또 신기한 점을 말해주자면, 엄마와 이모의 어머니, 즉 나에게 있어 외할머니가 되는데, 그녀 역시 당신의 딸들과 붕어빵이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나이 차가 많이 나니 쌍둥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었겠으나. 같이 있으면 누가 보아도 모녀 관계라고 납득할 만한 얼굴 조형이었다.
그리고, 남자로 태어난 나도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날카로운 눈꼬리와 오똑한 코는 모계의 핏줄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의 얼굴을 구성하는 네 가지 장기 중 두 가지가 똑 닮았으니 전체적인 경향성이 모계를 따른다고 해도 되겠지. 아니, 어쩌면 얇은 입술도 외가의 영향이지 않을까. 아빠는 빈말로도 입술이 얇다고 할 수 없으니.
여태까지의 진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우리 집안은 여성의 유전자가 강하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유전자의 조합은 절대적으로 우연성에 입각하므로 우연과 우연이 겹친 우연이라고 판단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 유전자의 그 방대한 수, 아주 정교하지는 못한 복제 절차, 매우 명확하지는 않은 우열 관계, 모두 밝혀지지는 않은 발현 과정 따위를 하나하나 되짚어 본다면, 이것은 필연에 가까운 우연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외사촌들을 보고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외사촌이라 함은 당연히 필규 형과 서천 형을 뜻한다.
첫 번째 충격은, 바로 서천 형과 내가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 충격은, 바로 필규 형이 나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각기 다른 벡터의 충격이었다.
나는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두 사촌 형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이모와 이모부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모 가족 전부에게 관심을 가진 셈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비밀을 엿보고 말았다.
그 비밀 하나로 모든 게 이해가 되어서, 나는 묘하게 안도했다.
이런 사실로 안도하는 나 자신이 제일 역겹다고 생각하면서.
안도한 것이다.
어쩌면 스릴을 쫓는 버릇은 그때부터 형성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건, 이건 모계 유전이 아니라는 거다.
그 사람은 스릴에서 도망치기 위해 급급했으니까......
이모 가족은 서울 소재 주택가의 한 단독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나도 서울에 살고 있던 건 같았지만, 이모 집에 가려면 한강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아빠의 자가용으로 어림잡아 한 시간은 걸렸으리라. 그러니 같은 시에 산다고 한들 교류는 많지 않았다. 학군도, 생활 반경도 확연히 달랐으니까.
하지만 몇 달에 한 번은 사촌 형들의 얼굴을 봤다. 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모와 이모부의 얼굴도 봤다. 우리 엄마의 바보 같이 다정다감한 성격 덕이었다. 언니, 나 오랜만에 이쁜 조카들 보고 싶다, 라는 연락을 거리낌 없이 했던 것이다. 그 쌀쌀맞고 무서운 이모에게.
물론 이모가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들 하나뿐인 조카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일은 없었다. 나의 감정을 고려했다기보단 멍청해 보일 정도로 착한 우리 엄마의 감정을 우선시했던 것 같긴 하나. 아무리 차가운 인간이라도 무한한 햇살 아래에선 조금이나마 따스함을 보이게 되는 거였으려나......
아무튼 이모와 엄마는 이모의 단독 주택에서 자주 만났다. 것도 일요일에. 이모부는 일이 바쁘셔 이따금 뵙지 못했지만, 두 사촌 형은 거의 항상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촌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엄마의 계략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필규 형은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서 고작 한 살 차이가 절대적인 위계를 형성하였던 걸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나에게 있어 그는 가히 '어른'에 가까웠다. 실제로 조숙하여 어른스러운 형이기도 했고.
서천 형은 필규 형과 연년생이었으므로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뾰족하게 올라간 눈꼬리는 친형제인 필규 형의 것보단 나의 것과 더 비슷해서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건 서천 형도 같았는지, 내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금세 눈을 맞춰왔다. 언젠간 고개를 갸웃대기도 했다.
여느 가족 모임이 그렇듯이 어른들은 어른들의 대화를, 아이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했다. 이모와 엄마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형들은 그들의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간혹 필규 형의 방을 엿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서천 형의 방에서 잡다한 이야기를 하고 놀았다.
"형 방에는 재밌는 게 없거든."
이라며, 서천 형이 내 손을 잡아끌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유준이는 클수록 저 형을 닮아가네."
단정한 이목구비의 필규 형은 동생의 방 한가운데에 서선 중얼댔다. 깔끔한 책상과 책장, 간결한 물건 배치, 빠짐없이 들어찬 수험서와 교양서. 정석적인 모범생의 방 같은 이미지다. 만화책이나 보드게임 같은 놀잇감이 하나도 없는 게 열 살이었던 나에게는 생경했다.
서천 형은 책상 앞 의자에 걸터앉아선 가늘게 미소지었다. 나는 그 옆에 놓인 깨끗한 침대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형이랑 자리가 바뀐 거 아냐?"
"응? 필규 형이 침대에 앉을래?"
나는 아연해선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서천 형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니. 그 자리가 아니라...... 필규 형 말고, 나랑 유준이가 친형제인 것 같아서."
"응?"
"우린 이상하게 닮았잖아."
"응, 그렇긴 한데......"
자연스레 필규 형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니나다를까 표정이 조금 좋지 않아서, 나는 황급히 얼버무렸다.
"아, 아니. 필규 형은 이모부를 엄청 닮았는걸."
"그건 그렇지."
서천 형은 필규 형을 흘기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내가 이모 아들인지도 모르겠다."
"으~음. 형아, 과학상자 구경시켜주면 안 돼?"
필규 형에게 가학적인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기도 했지만, 사실 형의 과학상자는 그의 방에 놀러올 때마다 구경하곤 했다. 무려 과학상자 6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길 좋아했던 나에게도 과학상자는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에 걸맞는 1호 짜리 상자였고, 결과적으로 나의 탐구심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아, 그럴까. 너희 학교에서도 과학상자 대회 같은 거 해?"
서천 형은 의자에서 일어나선 말끔하게 정리된 선반으로 다가갔다. 묵직한 과학상자 옆에서 무언가의 상패가 반짝였다. 필규 형은 아무 말도 않고 동생을 바라보다가, 문간 벽에 기대어 서기 시작했다.
"응. 근데 나는 1호라서 별로 만들 게 없어."
"다른 친구들은 좀 더 큰 걸 가지고 있어?"
"반 친구가 3호 갖고 있는 거 봤어. 바퀴도 들어 있어서 엄청 부러워."
"이모한테 사 달라고 하지 그랬어."
밝은 회색을 띠는 직육면체 모양의 과학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서천 형이 말했다. 움직일 때마다 상자 안의 부품이 서로 부딪혀 절걱이는 소리가 났다.
"우리 엄마, 그런 거 하나도 몰라. 1호가 제일 좋은 거 아니녜."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냐? 사 주기 싫어서."
"흥, 그럴지도 몰라."
"멋진 걸 만들어서 보여드려 봐. 더 나은 걸 사 주실지 누가 알아."
공구상자 같은 뚜껑을 여니 예쁘게 도색된 철제 부품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형은 조립설명서을 집어들어선 적당히 따라할 만한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막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던 나는 손이 야물지 못했으므로, 1호도 아닌 6호의 모델을 따라 만들기 위해선 형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저번엔 헬리콥터를 만들었었나? 그럼 오늘은 크레인을 만들어 볼까."
어느새 침대에서 바닥으로 몸을 옮긴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필규 형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얼굴은 표정 하나 없이 창문을 향해 있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금방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었지만.
"왜 그러니?"
다정하고 평탄한 목소리가 꼭 아나운서 같다.
"형은 안 만들어? 같이 만들면, 음, 빨리 만들 수 있는데."
벽에 기대어 있던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 옆에 앉아있던 서천 형이 선수를 쳤다.
"형은 볼트를 어떻게 조이는지도 몰라."
"엉?"
"바보 같지?"
"정말 몰라?"
필규 형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형은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뭘 조립하는 거엔 흥미가 없어."
"그럼 뭘 좋아해?"
"음, 글쎄......"
"책."
설명서를 훑으며 필요한 부품을 바닥에 늘어놓던 서천 형이 끼어들었다. 필규 형을 쳐다보지도 않곤 말을 잇는다.
"전에는 무슨 연애 소설 같은 걸 읽고 있던데."
"고전 명작이야."
"문학은 교과서에 나온 것만 읽음 되지 않아? 학교 추천 도서를 다 읽을 생각은 아닐 거 아냐. 시간 낭비야, 그런 거."
"아, 그래......"
필규 형은 눈을 감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책이나 읽어. 유준이는 나랑 노는 게 더 재밌을 테니까."
솔직히 맞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서천 형은 당시의 내 인식으로도 평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나는 얌전히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바닥으로 떨궈 길쭉한 부품들을 살피기나 했다.
"동생 안 놀아주고 뭐하냐는 욕을 듣긴 싫어."
"내가 일러줄게. 과학상자 조립도 안 도와줬다고......"
"......무서워하면서 뻗대기는."
"뭐?"
"부모님이 야단치는 목소리, 무서워하잖아. 너."
서천 형의 얼굴 근육이 굳는 모습을 보고, 나는 더욱 고개를 숙여 조립설명서를 탐독했다.
"머리에 든 것도 없는 게......"
디귿 자 모양 부품을 있는 힘껏 쥐는 형의 손. 힘을 얼마나 주었는지 관절이 새하얗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그것이 움직여 꼭 남에게 부품을 집어 던질 듯한 모양이 되려던 것까지 관찰하고 나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의외로 부품이 벽에 부닥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떠선 슬금슬금 두 형을 살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부품을 늘어세우는 서천 형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야각을 살짝 비틀어 벽 쪽을 바라보니, 어쩐지 미묘하게 비웃는 표정의 필규 형이 가만히 서 있다.
"언젠간 죽여버릴 거야."
그런 미세한 중얼거림은 내 귀에만 겨우 닿았다.
작은 크레인 하나를 만드는 데에 두 시간이 걸렸다. 중학생인 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늘 안에는 완성하지 못했으리라. 소형 모터도 달려 있어 하단부의 스위치를 누르면 크레인의 갈고리가 자동으로 움직인다. 하루종일 스위치만 누르고 놀아도 재밌을 것만 같았다.
완성품을 엄마에게 보여주자는 건 형의 발상이었다. 더 큰 과학상자를 사면 이런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자, 라면서.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한 손으로 크레인을 들고, 다른 손으로 형의 손목을 잡고 엄마와 이모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부엌 테이블로 향했다.
그런데, 그 사이 이모부가 자리에 합석하셨던 것이다. 이모 옆에 앉아선 차인지 커피인지 모를 것을 마시고 계셨다. 형의 몸이 순간 굳는 것을 나는 눈치채고야 말았다.
"우와, 이게 뭐야? 크레인? 유준이가 만든 거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엄마였다. 손뼉을 한번 짝, 치고는 나에게서 크레인을 받아 이리저리 살폈다.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전번에도 형의 과학상자로 무언가를 만들긴 했지만, 그때는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았었다. 그때 만든 헬리콥터가 더 멋졌었는데.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무심코 이모부에게 시선을 던졌다.
안경 뒤의 두 눈은 역시 필규 형을 닮았다. 하지만 시선은 그와 다르게 매서워서, 나는 조금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과학에 관심이 많으니? 유준이는."
형의 목소리가 세월의 풍파를 맞으면 저렇게 될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뇌리에서 밀어냈다.
"네, 넷."
"형이 많이 도와줬어?"
이모부의 시선이 잠시 서천 형을 훑다가 나에게로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무서워졌다. 남몰래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으음, 저, 모터 써 본 적이 없어서, 형이 도와줬어요."
"다른 건?"
"바퀴도 안 달아 봐서, 형이......"
그의 시선이 이제는 완연히 형을 향했다. 엄마는 내가 만든 크레인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모는 그 앞에서 크레인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1호 밖에 안 만져 본 거 치곤 엄청 능숙하던데요, 유준이."
"그래? 1호만 가지고 있어?"
엄마가 크레인을 테이블에 내려다 두곤 고개를 갸웃댄다.
"응? 과학상자요? 어머, 1호가 가장 좋은 게 아니었어요?"
"얘는. 숫자가 클수록 좋은 거야, 과학상자는."
"그럼 뭐가 가장 좋은 건데?"
"6호."
"어머...... 난 1호가 가장 좋은 건줄 알았어. 왜, 한자 검정도 1급이 가장 좋은 거잖아."
"예나 지금이나 바보 같긴......"
이모는 콧바람을 흥 내뱉더니 녹차인지 보리차인지 모를 색의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이모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천 형을 바라보았다.
"그럼 네 과학상자를 유준이한테 줘라."
"네?"
"과학상자 대회 같은 건 한 번만 나가도 되지 않니? 상까지 받았잖아. 내년이면 3학년이니까 그런 놀이는 그만 둬야지."
과학상자가 놀이라고?
하긴 형은 중학생이니까 놀이 정도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블럭 조립이나 퍼즐 맞추기와 비슷한 결의 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슬쩍 형을 올려다 보니, 눈은 웃지 않은 채 입꼬리만 히죽 올라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걔는 뭘 하고 있니?"
이모부가 돌연 물었다. 시선은 이미 형을 떠나 접시 위의 크래커를 향하고 있다. 나는 일순 '걔'가 누구인지 고민했지만, 형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답을 꺼냈다.
"......옆에서 시험 공부하고 있었어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앉아선 제 방에서 가져온 책을 읽고 있지 않았나. 내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몇 번 깜빡이니, 형은 아무도 모르게 내 손목을 꼬옥 잡았다.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이모부는 무표정하게 크래커를 베어물었다.
"잘 하는 게 없으니 암기력 테스트인 학교 시험이라도 잘 봐야지."
그 말투가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형의 커다란 과학상자를 물려받은 나는 이듬해 과학상자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작품을 만드느라 상당한 양의 부품을 사용하고 잃어버렸지만, 학교에서 제공하는 예비 상자 덕에 재료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결과는 시 대회 은상. 형과 만들었던 헬리콥터에 다양한 장식과 기능을 덧붙인 초등학생 다운 작품이었다.
자랑은 내가 아닌 엄마가 했다. 이모의 얼굴을 보자마자 글쎄 우리 아들이, 로 시작하는 장대한 칭찬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실상 자식 자랑은 이모가 훨씬 많이 하는 편이었으니까, 어쩌면 자기도 아들 자랑이라는 걸 좀 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끄러워져서 후다닥 형의 방으로 달려갔다.
필규 형은 집에 없었다. 서천 형의 방문을 두드리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형이 문을 열어주었다.
"유준이 아냐."
손을 몇 번 까딱댄다.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제스처다. 나는 언제 보아도 깔끔한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필규 형은?"
"도서관 갔어."
"좋아하는구나, 책."
"유준이는 책 좋아해?"
"나는 과학상자가 더 좋아. 이젠 혼자서 헬리콥터도 만들 수 있다?"
"......잘 됐네."
형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나는 각을 맞춰 정리된 침대에 기어올라갔다. 푹신한 이불에서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형, 중학교 3학년?"
"응, 너는 초등학교 4학년이지."
"응. 필규 형은, 이제 고등학생."
"문과를 가겠대."
"문과?"
"문과, 이과. 몰라?"
"글월 문文?"
"뭐야, 잘 아네."
자세히는 모르지만 문과는 사회, 이과는 과학을 배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는 것도. 나는 틀림없이 이과를 선택하게 되겠지.
필규 형이 문과를 간다는 이야기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야 필규 형의 방에는 도서관 라벨이 붙은 소설책이 쌓여있었으니까. 오히려 그가 이과에 진학하는 게 이상한 일이리라.
"필규 형, 책 좋아하니까 문과 갔구나."
"인생 참 편하게 살아."
"응?"
"바보는 고민이 없다고들 하잖아."
서천 형은 내뱉듯이 말하곤 의자를 빙글 돌려 책상 위의 문제집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모양의 그래프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는 수학 문제집이다.
"......됐다. 내가 초등학생이랑 무슨 말을 하냐."
이모 부부가 둘째인 서천 형을 편애한다는 사실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눈치 없는 우리 엄마까지 알 정도니 말 다 했다. 엄청나게 노골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필규 형의 방에 들어가서 생생하게 느꼈는데, 이렇게나 깔끔한 서천 형의 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던 것이다. 정말 학생으로서의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이 구비되어 있는 방. 그것이 내가 필규 형의 방을 보고 가진 감상이었다.
그렇다고 편애받는 서천 형이 행복해하는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이모부가 엄격해서 그러겠거니, 이모가 까칠해서 그러겠거니 하며 짐작할 뿐이었다. 형은 이모 부부 앞에만 서면 잔뜩 긴장했으니까.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이상한 집안이다. 나는 이모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점차점차 키워나갔다.
오늘은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 서천 형과 적은 수의 대화를 하다가, 요의가 들어 화장실로 향했다. 4학년이니까 혼자 갈 수 있지, 라는 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후였다. 집의 구조 상 화장실을 가려면 이모와 엄마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부엌을 지나야만 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려다가, 어느새 테이블에 앉아 계신 이모부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시 대회에서 은상을 탔다면서."
나는 별 수 없이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엄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대고 있다.
"네. 서천 형 덕분에......"
"과학을 좋아하니?"
"네, 좋아해요."
"어느 부분?"
"부분?"
"우주라든가, 화석이라든가, 인체라든가."
"아, 저, 인체가 좋아요."
"호오, 인체?
"우리 몸이, 복잡하게 살아가서 신기해요."
이 지점에서 이모부는 작게 웃었다.
"좋은 흥미구나."
그제야 나는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이모 집은 화장실도 반짝거리고 향기가 나서 좋았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안전하게 뒷좌석에 앉으라고 했지만, 다른 차들이 달리는 걸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결국 조수석에 앉았다. 커다란 앞 유리 너머로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들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필규 형 불쌍해."
"응?"
"이모랑 이모부가 서천이 형만 편애하잖아."
"으, 음...... 그랬어?"
"필규 형 방, 내 방보다 한산해."
"어머...... 아무리 조카라도 그렇지."
"응?"
"어?"
"뭐라고?"
"어어, 엄마가 방금 뭐라 했니?"
"조카라고 했잖아."
"으, 음...... 그랬어?"
"했잖아!"
"유준이는 이모 조카 맞지~"
엄청난 비밀의 일부가 언뜻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핸들을 잡고 있으니 나를 향한 판단력은 분명 흐려져 있으리라. 나는 열심히 떼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필규 형이 이모 조카야? 엄마한테 다른 형제는 없으니깐, 그럼, 이모부 형제의 아들?"
"아, 아하하...... 사회 시간에 촌수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말해줘!"
"아이, 아니야~ 유준이가 이모 조카지."
"서천이 형이랑 필규 형은 사촌이야?"
"아아, 아니라니깐."
"서천이 형의 친가 사촌인 거지?"
마침 눈앞의 신호등이 빨갛게 변했다. 엄마는 긴 손톱으로 핸들을 톡톡 쳐 댄다. 나는 바로 옆 조수석에서 엄마를 부담스럽게 쳐다보았다.
엄마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더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필규 형은 원래 서천 형의 친가 사촌이었다. 하지만 형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님이-이모부의 남동생 부부가 된다-교통사고에 휘말려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졸지에 혼자 남게 된 갓난아기 필규 형을 입양한 이들이, 지금의 이모 부부. 난임 부부였던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지는 걸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조카가 홀로 남았으니 입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었겠냐며, 엄마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털어놓았다.
그리고 조카를 입양한 그 해에, 이모 부부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 아이는 물론 현재 잔뜩 편애받고 있는 서천이 형임에 틀림이 없다.
이게 비극의 시작이었겠구나. 뭣도 모르는 나이였던 나도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윤필규 씨는 윤 교수 부부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친아들이 아니라 조카였던 거죠. 동생의 아들이었던 거니."
동현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 위의 과일 안주를 노려본다. 물론 안주에 무언가 이변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당면한 진실을 머릿속으로 되짚고 있을 뿐이다. 유준은 동현을 몇 초 흘기다가 도마를 연상케하는 그릇 위로 손을 뻗어 오렌지를 집어먹는다.
"난임으로 고민하던 차에 동생 부부가 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래서 혼자 남은 조카를 큰 맘 먹고 입양했는데, 그 해에 친자식이 생겨버렸다, 이거군요."
유준은 별 대답 없이 오렌지를 우물댄다. 표정 변화가 일 미리그램도 없는 걸 보아하니 특출나게 맛이 있지는 않은가 보다. 동현은 순식간에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는다.
"어? 그런데, 제가 이런저런 자료를 뜯어봤을 땐 분명 입양이라는 글자는 하나도 안 보였는데."
"정작 사촌 형들은 자기들의 비밀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으니. 법적으로 뭔가 숨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 법은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요."
"흠, 그럼 그 건에 대해선 이쪽에서 성심껏 찾아보도록 하고......"
동현은 구부정하던 허리를 세워 앉은 자세를 가다듬는다.
"뭔가 이야기가 더 남은 것 같으신데요."
"아, 뭐...... 아주 없진 않아요."
"꼭 듣고 싶습니다."
"술을 좀 더 시킬까요? 클라이막스인데 흥이 덜 나는군."
유준은 비싼 술의 이름을 꺼냈고, 동현은 애써 미소지었다. 접대비로 뭘 이렇게 많이 쓴 거냐며 버럭댈 유신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형들이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자 함께 노는 횟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필규 형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집을 뛰쳐나가 기숙사에 입사했다. 같이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나도 나이를 먹지 않은 건 아니라 초등학교를 졸업해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그동안 형들은 대학에 다녔다가 군대에 들어갔다가 다시 복학했다가. 청년기에 들어서도 오 년이란 큰 간극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시간이 날 쯤엔 형들은 군대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역했을 즈음엔 내가 대학 입시에 찌들어 있었다. 참으로 접점이 생기지 않는 인생 그래프 사이에서, 나는 서천 형과 상당히 오랜만에 재회했다. 아마 언젠가의 추석 이후였으리라. 친가에서 명절의 푸닥거리를 하고 외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니까.
"올해 신입생이라며?"
나는 형과 같은 학교가 아니었다. 지금은 자리에 없는 필규 형과도 동문이 아니었다. 말의 의미를 멍하니 곱씹다가 겨우 대답했다. 나의 템포가 한 박자 느린 대화였다. 카페의 아메리카노는 조금 탄 맛이 났다.
"형은...... 3학년인가?"
"응, 내년이면 졸업반이라니 시간이 빠르네."
"대학원 가?"
"아마 일본으로."
"일본?"
"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그쪽에 계셔."
이제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도 낯빛이 바뀌지 않는다. 흥미로운 변화를 은근히 관찰하면서, 나는 다음으로 꺼낼 말을 고민했다.
"화학을 좀 더 심도 깊게 공부하는 거야?"
"내 경우엔, 생화학이 되네."
"생명과학이랑 비슷한가? 이모부가 그쪽 연구하시지?"
"맞아. 아버지는 약리학이고, 나는......"
인위적인 간극을 감상했다. 매끈한 피부와 오똑한 콧날은 누가 보아도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있을 법하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오히려 퇴폐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독성학을 배우러 갈 거야."
"독?"
뜻밖의 발언이었다. 놀라서 굳어버린 얼굴 근육을 자각했다. 형은 그런 내 얼굴을 잠시 살피다가, 얄쌍한 눈꼬리를 접어 피식 웃고야 마는 것이다.
"약이랑 독은 거울 같은 거니깐."
당시의 나는 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학부 1학년이란 잡다한 교양 강의를 머릿속에 쑤셔넣는 기간이니까. 전공 과목은 전혀 듣지 않은 상태였다. 차후 배우게 될 유기화학이니 생화학이니하는 기묘한 이름의 전공에는 솔직히 별 흥미가 없었다.
"음, 어쨌든 이모부의 뒤를 잇는 거구나."
"그렇게 되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후로 좀 더 나누었다. 화제는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게 필규 형으로 흘러갔다. 필규 형은 서천 형과는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 전공이 또 의외였는데, 무려 법학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의 이미지는 문학소년에 가까웠으므로 도서와 많이 관련되지 않은 전공을 택한 게 신기했다.
"그럼 필규 형은 올해 졸업반이네?"
"그렇지."
"법학과 졸업하면, 뭐 해? 변호사가 되는 건가?"
그 쪽 계열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나였다. 형은 내 말을 듣자마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법조계로 가려면 로스쿨을 가야지. 법 전문 대학원."
"아하."
로스쿨이라는 명칭은 들어본 적 있다. 그것이 대학원이라는 건 처음 알았지만.
"......형은 정말로 로스쿨까지 갈 모양이지만 말이야."
"어?"
"변호사가 되고 싶은 것 같던데."
"필규 형이 그래?"
"아니. 형 다니는 학교에 지인이 있어서. 알음알음 전해 들었지."
그 말의 진위 여부는 제쳐두고서라도 실로 흥미로운 정보이긴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한번 갸우뚱 기울이다가, 얼음이 다 녹아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마셨다.
집으로 돌아가서 두 가지 정보를 찾아보았다. 첫 번째는 필규 형의 행적이었다. 모 대학 법학과 SNS 페이지 따위를 뒤적이며 그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원래 범생이 같은 성격이니 개인 SNS를 할 거라는 기대는 일찍이 접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결국 내 손에 떨어진 것은 고작 사진 한 장. 그것도 그가 주요 피사체는 아니었다. 학교 축제 때의 사진인 모양인데, 학과 주점 앞을 지나가던 그의 모습이 우연히 찍혀 있었다. 여전히 이모부를 닮은 얼굴이었다. 역시 그 얼굴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두 번째는 약리학과 독성학. 전자를 서치할 때는 이모부의 이름이 종종 보였다. 후자는 국내의 정보가 아주 희소했는데, 이따금 '그 분야는 일본이 강세다'라는 의견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형이 굳이 일본까지 가는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시험을 거쳐 약학과에 진학했다.
뭔가 큰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학부 2년 약학 4년의 커리큘럼이라면, 다른 대학생들보단 2년 더 청춘을 즐길 수 있겠구나 싶었을 뿐이다.
이모부가 나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건 꽤나 당연한 일이었다.
서천 형은 이상한 추락 사고에 휘말렸다. 그리고 예정되었던 대로 일본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사이 필규 형은 로스쿨에 입학했고, 변호사 시험을 거쳐 변호사 자격을 따냈다. 성인이 된 이후 그들과의 교류는 더욱 소홀해졌다. 그러나 집안의 소문으로 엿들은 그들의 모습은 제법 멋있어서, 시간을 들여 전공을 갈아치운 나는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저 멀리에서 방관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몇 년 후, 서천 형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석사에 박사까지 밟는 것치곤 짧은 체류였다. 의아하여 당사자에게 메시지로 물으니 지도 교수가 갑자기 죽었단다. 다른 랩으로 옮기자니 특이한 학문이라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는데, 마침 한국에 새로 생긴 관련 랩이 있기에 귀국했다고.
서천 형은 필규 형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작년에 변호사를 그만두었단다. 더욱 의아하여 까닭을 물으니 그건 나도 모르겠다며 얼버무렸다. 하기사 두 사람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자세한 이유까진 모를 법도 했다.
이모부는 나와 자주 컨택하려 들었다. 별로 달갑지 않은 관심이라 자리를 피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겨우 여친과 만난다는 이유로 도망칠 순 없을 것 같았다. 그치만 걔랑 만나는 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래......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여태 이모 가족을 신경쓰고 있었다. 조카와 삼촌 관계라기엔 너무나도 닮은 두 사람의 얼굴이 뇌리 한구석에서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잊을만 하면 의식 위로 부상해 집중을 흩뜨렸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추측이 가지에 가지를 치고 죽죽 뻗어나갔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야만 추측의 밑동이 잘려 말끔해질 것만 같았다.
결국 말도 안 되는 방법을 동원해 삼십 년 전의 사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밑동은 잘리지 않았다. 외려 강건하게 뿌리를 박아 나의 노력과 시간을 빨아먹더니 끝내 진실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남은 건 그 사람의 자백 뿐이었다......
서울의 흔한 고가 레스토랑에서 이모부와 대면했다. 이십 년 남짓이 지나도 얼굴의 인상이 달라지지 않는 건 신기한 일이다. 저 나이가 되면 보통은 주름이며 나잇살이 전체적인 모양새를 새로이 다듬지 않나.
아침 기차를 타고 천안에서 상경한 터라 아침밥도 먹지 못했다. 테이블 보라도 뜯어먹고 싶을 정도로 성질이 포악해진 걸 지각했다. 그런 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모부는 여전한 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졸업은 언제니?"
낮고 잘 울리는 목소리는 저주파와 닮았다.
"올해 3학년이니까, 별 일 없으면 내년엔 졸업할 것 같습니다."
왠지 교수님 앞에 있는 느낌이라 저절로 경어체가 입에 붙었다. 실제로 교수이기도 하지만.
"졸업하고 나선 뭘 할 생각이고?"
"뭐... 약사고시 봐야죠."
"연구를 할 생각은 없는 거냐?"
반으로 뚝 잘린 식전빵을 와구와구 뜯어먹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작은 그릇에 담긴 버터를 쓱쓱 발라 입 안으로 쑤셔넣고 싶었지만, 일단은 얌전히 한 입 베어물었다. 맛있는 통밀빵이다. 침샘이 아릴 정도로 맛있다.
"대학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서천이 형 하는 거 보니깐 자신이 없어져서요."
"그 애가, 왜?"
"형 같은 수재가 오 년을 공부하고도 박사를 못 땄으니."
"그건 사고 때문이다."
"들었습니다."
"운이 없었지. 마지막 학기에 담당 교수가 죽었어."
"음, 운인가...... 그렇네요."
그 사건에 대해서도 조금이지만 조사해 보았다. 당뇨였던 교수가 인슐린 주사를 잘못 놓아 저혈당 쇼크로 사망하고 말았던 사건. 어쩐지 수상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외국은 탐사 범주 밖의 세계였다.
"지금은 국내 대학원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천이 형."
"그래. 계속해서 독성학을 연구하고 있다."
"약리학과는 정반대 이미지죠?"
그리 물으니 엄한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지기에, 슬쩍 시선을 떼어 막 서빙된 애피타이저를 바라보았다. 노란 콩과 소스를 곁들인 아스파라거스 구이. 대여섯 개도 아니고 딱 두 개만이 넓다란 접시에 올려져 있다. 은근히 화가 나는 양. 이런 생각을 하고 마는 건, 분명 내가 굶주려 있기 때문에......
눈치도 보지 않고 아스파라거스를 우적댔다. 짭짤한 소스가 적당히 입맛을 돋군다.
아마 메인 요리까지 먹어 치우면 이야기를 꺼낼 에너지가 생길 것 같았다. 가방 안에 넣어온 잡다한 서류를 상기한다.
두 접시 정도 쓸모 없는 대화를 나눴다. 자기네 대학의 학생들은 갈수록 공부를 하지 않는다. 이래서야 약사고시도 통과하지 못할 녀석들이 한 트럭이다. 저희 교수님들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이 그닥 진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생선 튀김은 바삭하니 맛있었다. 구운 닭고기는 곁들여진 크림이 조금 느끼했다. 가혹하게도 둘 다 양이 적었다. 위산을 중화시키기에 적당한 양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뒤의 두 접시는 각자의 신변을 잡았다. 면역학은 재미있지만 분량이 살인적이더군요. 약물학은 어땠니. 그것도 대충 흥미롭긴 했습니다. 성적은 면역보다 약물이 더 잘 나온 게 코미디였지만요. 정말로 대학원은 가지 않을 거냐? 글쎄요. 이대로도 연구원으로는 취직할 수 있을 거니까, 굳이? 게살로 만든 듯한 이름 미상의 요리는 놀라울 정도로 혀에 착 감겼다. 상대만 없었다면 접시를 핥았을지도 모른다. 고소한 소스를 두른 전복구이까지 먹고 나니 그제야 두뇌의 회전수가 원상복귀된 기분이 들었다.
직원이 스테이크의 굽기를 묻기에 미디움이라고 대답했다. 이모부는 미디움 레어를 주문했다.
"레어는 핏기가 남아있지 않나요?"
"연해서 선호한다."
"맞아, 피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습니다."
"피?"
"이모부, 혈액형이 어떻게 되시죠?"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관찰하는가 싶더니, 곧 입술을 떼어 간결하게 대답했다.
"AB."
"이모는 O형, 서천이 형은 A형, 필규 형은 B형. 그렇죠?"
"왜 그런 걸 알고 있지?"
"4인 가족 안에 네 종류의 ABO 혈액형이 전부 있다니 신기해서요. 초등학생 때 서천이 형한테 들은 뒤로 줄곧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억력이 좋구나."
"그리고 이모부의 동생 분은 A형이셨죠."
좋지 못한 기류를 기민하게 감지하였는지,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슬슬 몸에 당분이 도는 느낌이다.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물질대사라면 눈앞의 교수는 상대하고도 남는다.
잠깐의 침묵을 깨뜨린 건 종업원이었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스테이크를 각자의 앞에 배급하고는 곧장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아무도 나이프를 들지 않았다.
나는 담담함을 가장하며 달라붙은 입술을 떼었다.
"그 아내 분은 O형이셨고요."
먼저 나이프를 든 건 나였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잘 익은 고깃덩이를 날선 칼로 숭덩 잘라낸다. 사람의 피 얘기를 하며 고깃덩이를 가르니 역시 그로테스크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건 또 아니다. 나는 태연하게 자른 스테이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이모부가 조카를 입양했다는 건 일찍이 들었습니다."
"누구한테서?"
"제 어머니한테서."
"동생 부부의 혈액형은 어떻게 안 거지?"
맛이 일품인 스테이크를 부드럽게 씹어 삼켰다. 상대는 아직 나이프를 들지 않았다. 나는 개의치 않고 다음 조각을 잘라냈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댔죠. 그 때의 수술 기록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사람이 대학 병원 카운터에서 일하거든요."
그 아는 사람이란 곧 나의 여자친구다. 엄청난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우연이 아닌 필연. 무슨 소리냐면. 여자친구가 마침 대학 병원 카운터 일을 했던 게 아니라, 그저 대학 병원 카운터를 여자친구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고작 그 정도의 간편한 선후관계 도치.
"지금은 입양된 사촌 형이 기록을 원한다고 거짓말 좀 쳤습니다."
대답은 없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노려볼 뿐이다. 과연, 필규 형이 화나면 저런 얼굴이 되겠구나. 나는 아직 그가 진정으로 화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애당초 화를 내긴 하는 사람일까. 그런 가정 환경에서도 화 한 번 내지 않은 사람이니.
"잠깐."
입가로 향하던 포크를 멈춰세웠다. 나는 슬쩍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친다.
"수술 기록은 수술한 병원에만 남아 있다. 유준이 네가 어떻게 그 병원을 찾았지?"
"이모께 사고 당시 경과를 좀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촉촉한 스테이크 조각을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그 엄하던 이모부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는 꼴을 보고 있으니 뱃속이 간질간질하니 미묘한 쾌감이 든다.
"이모도 눈치는 채셨었겠죠. 조카라고 하고 데려온 아이가, 커 갈수록 이모부를 너무 닮아가니."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최소한의 힌트를 흘리고 말았다. 그것이 죄악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울분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는 판단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하면 왜 동생 분 부부가 출산 직후 사고사하셨는지 짐작이 가긴 합니다."
그의 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스테이크가 조금 아까웠다.
"산부인과에서 알려준 아이의 혈액형이, A형도 O형도 아닌 B형이었다. 그래서 운전 중 말다툼을 하다가 주의가 산만하여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모께 들은 바로는 교차로에서 빨간불에 멈추지 않고 달렸다가 그대로 트럭과 충돌했다는데, 그렇다면 이 가설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지 않습니까?"
"멍청한 일이지. 아내가 weak BB형 항원의 수가 적은 혈액형. O형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있다라면 충분히 B형이 나올 수 있는데."
"제가 아까 수술 기록을 확인했다고 했을 텐데요."
수혈을 할 때, 의료인들은 수혈 받는 이의 발언을 신용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혈액형을 알고 있다고 주장해도 검사 후 다른 혈액형이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혈 전에는 정밀한 검사를 거쳐 수혈자의 혈액형을 다시 체크하게 된다. 수혈에 있어 혈액형은 목숨이 걸린 중요한 요소이니까.
"정확히 O형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B형의 유전자가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 왔다는 게 되겠죠."
그리고 당신은 AB형이다.
이모부는 분노로 새빨갛게 물든 눈두덩을 숨기지도 않고 나이프를 들었다.
즉, 서천 형과 필규 형은 사촌이자 이복 형제다.
이모부가 어떤 연유로 동생의 아내와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갈무리한 결과가 이것이었고, 당사자의 반응으로 나는 진상을 확신했다.
그는 당장 내일 외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학회나 컨퍼런스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아내와의 시간을 갖기 위한, 단순한 관광 여행이랬던가. 남은 이야기는 돌아와서 다시 나눠보도록 하자.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이모부는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이모 부부의 귀국일. 나는 공항 2층의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셋이서 얘기를 좀 하자는 이유로 불러내어졌기 때문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둘이나 상대하기 위해선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카페인과 당분 섭취 같은 거 말이다.
창가 자리에 앉은 내 앞으로 활주로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모 부부가 탄 비행기가 착륙하면 나도 슬슬 출구 게이트로 향할 예정이었다.
하늘 저 멀리서 거대한 양철 독수리가 다가왔다.
SNS에서 시선을 떼고 그 모습을 감상했다.
유연한 곡선을 따라 하강하는 항공기.
왼쪽으로 몸체가 기울었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균형을 잃은 비행기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상식을 벗어난 상황을 마주하면 사람은 우선 행동을 멈춘다.
눈앞의 현실을 잠시라도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운이 좋게도 나는 빠르게 이해하고 말았다.
운이 나쁘게도 나는 빠르게 눈치채고 말았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유일한 소지품인 휴대폰을 꽉 쥐곤 카페에서 달아났다.
커피와 빵은 선불이었으니 도둑으로 몰릴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자신을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나를 따라 도망치는 직원과 손님들의 비명은 금세 굉음에 묻혔다.
"버드 스트라이크였대요. 좀 아깝죠? 살아서 만났다면 입막음비 정도는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유준은 그렇게 말하곤 히죽 웃었다. 비싼 양주로 얼근하게 적셔진 뇌가 점점 회전수를 낮춰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맞은 편의 동현은 한층 더 심각한 얼굴로 텅 빈 안주 그릇을 노려보고 있다.
"......그렇다면, 당장 지금 윤필규 씨에게 얽힌 혈연 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는 거군요."
윤 교수 부부가 살아있었다면야, 그들의 체모라도 몰래 채취하여 사설 기관에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망한 이상 무용지물인 방법.
유준은 한쪽 입꼬리를 실룩이더니 값 나가는 양주를 홀짝였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는지 대답이 없다. 초점이 흐린 눈동자가 몇 바퀴를 빙글 돌다가 겨우 동현에게 닿았다.
"이모 부부가 살던 집이 아직 매각되지 않은 거로 압니다."
"예?"
"엄마한테 들었어요. 이미 따로 거처가 있는 형들이 거기에 살진 않을 테니 내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둘 다 손을 대지 않는다고."
"어, 그러면. 아직 빈 집인 채로 있는 겁니까?"
"여행을 떠나기 전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겁니다."
아직 가동 중인 냉장고 안에 잠들어 있을 식료품. 옷이 걸린 채 먼지가 뽀얗게 쌓였을 옷걸이. 물기 하나 없이 메말랐을 세면대와 욕조. 그런 광경을 떠올리니 이상하게도 멜랑꼴리한 감정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서울로 돌아온 동현은 일단 동료 조사원에게 연락했다. 빈 집에 잠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구식 잠금장치라면 동현 혼자서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지만, 교수씩이나 되는 인간이 주택 보안에 신경쓰지 않았을 것 같진 않았다.
이사 준비로 바쁘던 동료 조사원은 우선 투덜댔다. 하지만 술을 사겠다는 말에 금세 달려왔다. 하여간 남이랑 어울리는 걸 참 좋아하는 형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윤 교수 부부의 머리카락을 채취할 수 있었다. 작은 비닐팩에 길이가 다른 머리카락을 각각 담아 어둠이 내려앉은 단독주택에서 빠져나왔다. 휴대폰으로 슬쩍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아홉 시에 가까운 시각이다.
"아직 집에 식탁은 있죠?"
그리 물으니 조수석의 형은 으음, 하고 낮게 신음소리를 낸다.
"짐에서 꺼내야 돼."
"아, 뭐야."
"네 사무소에서 먹자."
동현의 사무소는 사무소라고 하기도 미안한 규모다. 간판을 달 수도 없는 서울 어딘가의 좁은 뒷골목에 처박혀 있어 우연한 방문객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냥 영감님한테 붙어있지 그랬냐. 왜 굳이 독립한 거야?"
"제가 소장인 탐정사무소를 차리는 게 꿈이었다니깐요."
"로펌 사무원 아니었냐, 너?"
"아, 아니거든요!"
"방금 그것도 로펌 일이라면서?"
"이왕 비꼴거면 로펌 탐정이라고 해 줘요~"
"오케이. 안주는 족발로 부탁한다, 로펌 탐정."
그러더니 담뱃갑에서 한 까치를 꺼내 입에 물기 시작하는 것이다. 동현 역시 흡연자였으므로 니코틴이 슬슬 땡겼지만, 이미 운전대를 잡고 말았으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기도 뭐하고.
"한 대 줘?"
"형 뭐 피우죠?"
"한라산."
"아이, 농담하지 말고."
"왜? 생각보다 피울만 해. 담백~하다."
"던힐 육미리?"
"정답."
"좀 센데? 전 사미리......"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술 사이로 쑤셔넣어졌다. 별 수 없이 불까지 붙여선 힘껏 빨아본다. 활짝 열린 앞좌석의 창문으로 쌩쌩 들이치는 바람이 서늘하니 좋다.
이제 남은 건 당사자 윤필규의 체모뿐인가.
그쪽은 오히려 걱정이 없다. 일단 살아있으니까.
게다가 그의 주위에는 그 녀석도 있지.
지난 산백파 사건에서, 동현은 나름 관계가 깊었던 대학 동기와 재회했다.
순전한 우연이었다.
대학 시절 둘이서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던 추억이 아직 생생하다. 솔직히 동현보단 그가 더 열성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여태 둘이서 스케일이 커진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은 여전히 속죄 의식에 사로잡혀 있나......
하지만 눈빛은 아직 살아있는 것 같던데.
동현은 그를 구슬릴 말을 고민해 보았다.
조수석의 형은 오늘따라 말이 없는 그를 흘기다가, 곧 배달 앱을 켜 안주를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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