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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의 이후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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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까지 뻥 뚫린, 높고 높은 천장의 병원. 도진은 벽면에 달라붙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다. 사람이 많다. 1층 가장자리에 배치된 대기용 소파가 사람들로 뒤덮여 있다. 단체 건강검진이라도 있는 걸까. 혹은 단순히 병자가 많은 탓인가. 연례행사처럼 여겨지는 독감이 올해도 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겨우 독감으로 대학 병원을 찾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하릴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밖은 아직 찼다. 필규가 누워있던 병실을 환기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던 때를 상기한다. 신경으로 느껴지는 오한에 그는 무심코 코트를 여몄다. 겨울의 마지막 달이다. 입춘이 지났으니 슬슬 전염병도 한풀 꺾일까. 제 옆을 걷던 현은 "그동안의 빅데이터로 미루어 보아," (빅데이터?) "대충 그렇지 않을까요?" 라는 답을 꺼냈다.

"둘 다 멀쩡해 보여서 좀 놀랐어요."

다각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도진은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인다.

"걔도, 작가님도 멀쩡해 보여서 놀랐다고요."

"나도?"

현이 눈을 흘긴다. 후드티 위에 걸친 하얀 패딩이 퍽 따뜻해 보인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으음."

말을 아꼈다.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땐 입을 닫는 게 최선이다. 애매한 눈웃음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흘려 넘겼다. 마뜩잖은 표정의 상대는 곧 흘기던 눈을 제자리로 돌렸고, 도진은 화제를 돌릴 거리가 무엇이 있나 고민한다. 1층에 발이 닿은 것은 그와 동시였다.

1층 중앙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다. 장기간의 투병 생활로 무료한 고객들을 위해 가끔 피아니스트를 초청한다고 했던가. 피아노는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어, 초청 연주자가 없을 때도 누구나 연주할 수 있다. 장비가 꽤나 고급인 탓에, 또 그 앞에 놓인 주의문 탓에 선뜻 나서는 사람은 그다지 없는 듯했지만.

오늘은 피아노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야에서는 옆모습만이 겨우 보일 뿐이다.

"피아노를 치려는 것 같은데, 저 사람."

링거 폴대를 한껏 부여잡은 채, 다른 손으로는 목발을 꽉 잡은 채 비틀대며, 고고히 빛나는 피아노로 향한다. 날개뼈에 닿을 정도로 기른 머리칼은 그와 같이 새까맣다. 귀를 덮은 머리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콧날은 높고 새하얗고, 완전한 대비를 이루어서, 저 화려한 악기와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도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만다.

"아, 저 학생......"

어째선지 현은 놀란 기색이다.

"아는 사람이야?"

"......모르세요? 병문안, 저보다 자주 오신 거 아니었어요?"

끼익, 피아노 의자가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 달카당, 목발이 내팽개쳐지는 소리. 도진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다시금 고개를 갸웃댄다.

"윤필규 옆 옆 병실에, 반년 동안 혼수 상태였던 학생이 있었거든요."

그 학생이 며칠 전에 깨어났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 라는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요동쳤다. 우레 같은 음파가 건물에 들어찬다. 머리가 울릴 만큼 세차게 증폭되는 건반음. 애초에 이곳은 소규모 리사이틀을 염두에 두고 지어진 병원이라 했다. 해당 피아노를 연주하시면 소리가 병원 구석구석까지 전달됩니다. 그런 주의문이 피아노 앞에 명시되어 있었고,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피아노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학생'은 피아노 뚜껑을 열었고, 건반을 사정없이 두들겼고, 날카로운 음색이 웅성대는 소란을 찢어내어서, 아하, 화를 내고 있다, 학생은.

화를 내고 있다. 누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곡조. 도진은 음악에 문외한이다. 확실한 건 음표 하나하나에 분노와 오열과 한탄과, 아무튼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방출하고 있다는 것.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연주. 날 선 가락이 골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하여, 송연하다. 소름이 끼친다. 꽉 쥔 손엔 식은땀이 흥건하다.

피아노에 붙어 있던 시선을 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야가 일렁인다. 어느새 학생 주위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몰려든 사람들. 인공 볕 아래서 음산하게 번쩍이는 정서의 매개체. "어라, 괜찮으세요?" 전혀 괜찮지 않다. 날것의 감정은 차라리 칼날과 같다. "작가님?" 자아가 갈기갈기 찢어진다. 이상한데,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지. 인식의 왜곡을 느낀다.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너라면 별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굳이 왜곡까지 해 가며 보고싶겠어?' "작가님?" 그건 맞는 말이다. 필규와 현의 여동생 정도의 길고 긴 간극이 있다. 음? 이상하다. 왜곡이 아니라면 왜 저기에 있지? 필규의 절대명령으로 패배했던 게 아닌가? 저 형사는? "저기요, 작가님!" '사건 종결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왜 알짱대는 거라 생각해?' 그걸 내가 알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지. 손목을 잡혔다. 어디론가 끌려간다. 노랫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형의 목소리도 다시 멀어졌고, 그 형사는 여전히 리사이틀을 바라보고 있다. 

왜 웃고 있는 걸까......

"그 형사가 있었어."

도진이 중얼댔다. 손목을 잡아 끌던 현은 흠칫 놀라선 그 시선을 따랐고, 강상호는 두 사람의 시선 끝에서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연주를 관람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의 중년 남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빵에 들어가기 싫으면 XX 육교로 나와라, 라는 메시지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나갔던 것 같다. 사실 잡혀 들어가도 별 상관없었다. 이런 인생에 딱히 유감은 없고 사회에서 아등바등 더 살아봤자 항상 죽고 싶은 나날만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으므로. 하지만 궁금증이 앞섰다. 내 범행을 눈치챈 (목격한?) 녀석은 과연 누굴까. 나가서 무슨 일을 당하든 면상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는 육교를 오르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두컴컴해서 잘은 안 보이지만, 나이는 우리 아빠 정도 되었을까. 반소매 셔츠 아래로 슬쩍 보이는 몸은 제법 탄탄한 편이다. 은테 안경이 달빛을 받아 가늘게 반짝인다.

"실물은 처음 보는데? 하하하하."

"실물이라니?"

"사십 육, 아니, 사륙이라고 부르는 게 좋은가?"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씨발, 뭐지? 처음 보는 새낀데, 왜 나를 알고 있지? 타임라인에서 보았던 닉네임들을 반추한다. 가장 아재 같은 말투를 구사하던 유저를 떠올린다. '준마이슈'? 우리 학교에서 노숙자 후장에 독약 꽂아 죽인 그 새끼? 뭔가 이미지가 안 맞는데. 주춤, 뒤로 물러서니 손에 잡히는 건 육교의 난간.

"내가 누군지 고민하고 있는 건가? 아하, 아하하, 이거 재밌군."

"야, 씨발. 그 나이 처먹고 여고생 위협하는 건 너무 치졸하지 않냐?"

"하하하, 위협이라니?"

"신원을 알았으니, 다음 피해자로...... 어? 아니, 잠깐, 다음 순서는 분명......"

그 컨셉충 새낀데.

이건 이상하다. 인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럼 다른 사람은? 하나, 둘, 셋, 준마이슈, 그리고 나. 내가 마주친 사람은 선생님과 선배와 연예인과 기자와, 나까지 다섯. 수가 안 맞는다. 계정은 여섯 개일 수 있지만 사람은 여섯 명일 수 없다. 계정을 둘이서 같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 곤란하다. 이상하다.

가슴팍에 무언가 강하게 부딪히는 느낌. 동시에 무게중심이 뒤로 쏠리고, 뒤늦게 고개를 드니 보이는 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 새끼. 아, 씨팔, 추락사가 목적인가. 난간이 너무 낮다. 이거 큰일인데. 손이 가벼워졌다. 충격으로 들고 있던 폰을 떨궜다. 아슬아슬한 자세. 난간을 부여잡으려 팔을 뻗는다. 이번엔 어깻죽지를 밀쳐졌다. 다리가 공중으로 뜬다. 육교는 꽤 높다. 잘못 떨어지면 진짜 죽는다. 하지만 명확하게 잘못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큰일 났네. 주마등은 없다. 의외다. 맑은 밤하늘에 미묘한 모양의 달이 떠 있었다

밤이라 차량의 통행이 덜한 건 다행인 일이었다. 몸뚱아리 곳곳이 쩍 하고 박살 나는 소리가 났지만 안타깝게도 의식은 미약하게 살아있었으므로. 도로에 누워있던 내 위로 트럭이라도 한 대 지나갔다면 비명도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을 테지. 끔찍한 격통이 지나니 하반신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하, 신경이라도 끊어졌나? 생각하던 와중 119가 도착했고, "제가 그 아이 선생님입니다" 익숙하지만 친하지는 않은 목소리가 들리던 도중 정신이 완전히 암전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반년이 지나있었다.

꿈도 꾸지 않은 상쾌한 기상, 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천장을 마주하기 전까진.

벽에 붙은 전자시계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까만 바탕에 하얀 LED가 반짝인다. 오전 8시 반을 조금 지났고, 2월을 조금 넘겼으며, 내가 기억하던 년도에 더하기 일 년. 

당면한 상황을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걸렸다. 학교는 당연히 일 년을 꿇어야겠지. 뭐, 상관없나, 어차피 실기 100%로 대학 갈 예정이었으니까. 선배는 잘 졸업했을까. 선배는 선배니까 당연히, 잘 졸업해서 좋은 대학을 갔겠지. 내 병문안을 와 줬었을까? 선배랑 탁구 치면 재밌었는데. 수능 응원해주고 싶었는데. 내 핸드폰은 어디로 갔을까. 계속 찾고 있는데 안 보인다. 선생님은 잘 계실까. 의도가 어찌 되었든 '제가 그 아이 선생님입니다'라고 해 줘서 좀 기뻤던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이니까 잘 계시겠지 뭐. 교사는 웬만해선 안 잘리지?

그 살인자 타임라인은 어떻게 됐을까?

내가 안 잡혀가고 있는 걸 보면 건재한 모양인데.

깨어나고 며칠이 지나도 경찰은 찾아오지 않았다. 여고생의 단순한 실족으로 판단한 걸까.

대신 부모가 왔고, 적당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왔고, 축하한다고 안타깝다고 어쩌고저쩌고. 냉장고에 병문안 음료수가 하나둘 쌓여간다.

친구들의 말이 맞다. '안타까운 일'은 있다. 육교에서 떨어지면서 허리와 다리가 박살 났었는데, 신기하게도 손은 박살 나지 않았다. 사고 이전과 동일하게 움직일 수 있다. 철심을 박은 허리는 아직 보조기를 차야 하고 소생 중인 다리는 목발을 짚어야 하는데.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 병원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 수액을 갈아주던 간호사 언니가 말해주었다. 병원 중앙으로 가면요, 1층까지 내려다 볼 수 있어요. 천장이 뻥 뚫려있거든요. 1층엔 엄청나게 비싼 피아노가 있답니다. 병원 고객이라면 누구든지 칠 수 있어요. 병원장님이 음악에 조예가 있으셔서, 가끔 피아니스트를 초대하기도 해요...... 다정하고 친절한 간호사 언니. 그런 것까진 자랑스럽게 말해주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런 얘길 들으면 당장 가서 박살 내고 싶어지잖아. 건반을 있는 대로 눌러서 고장 내버리고 싶어지잖아......

"멋진 연주였어. 듣다가 쓰러진 사람이 안 나온 게 신기할 정도군."

"무슨 낯짝으로 날 보러 왔어?"

"결석자에게 통보를 하나 하러 왔지."

"통보?"

"《예약된 출제의 기록》은 당분간 폐쇄다. 눈썰미 좋은 형사 녀석이 슬슬 내 뒤를 캐고 다니기 시작했거든."

남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그러니 사람을 죽이고 싶어도 참도록 해. 그 몸으로는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겠지만."

"폐쇄? 야, 잠깐만. 당신 누구야?"

"누구?"

"누구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가 안 맞잖아."

"수가 안 맞는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그래가지고 살인하겠어? 사륙 군, 조금만 더 고민해 보시길."

하며, 아늑한 병실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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