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상
네가 여기에 누워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빠르긴 빠르구나.
도진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들었다. 한순간 경직되었던 몸은 의외로 쉬이 풀렸고, 피부가 기억하는 경험이란 참 무섭구나, 그런 생각을 일순 했다. 그러니 목소리의 주인은 그게 뭐가 무섭냐고 묻는 것이다. 익숙하다는 건 좋은 거야, 도진아. 너 같이 예민한 인종은 좀 무뎌질 필요가 있거든. 공간감이 있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 너무나도 눈에 익은, 현실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복제품의 당신이, 나를 향해 자연스러운 눈웃음을 치고 있어서.
"별로 좋지 않아."
제 사촌의 얼굴을 빼다박은 환상을 향해 굳이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었다. 몇 년 전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 면상을 보니 목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던 탓에, 도진은 부러 입술을 움직였다. 사촌은 입꼬리를 틀어올려 웃었다. 이런 곳에선 말하지 마, 도진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신병자라고 욕하겠다.
이런 곳에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여기에 깨어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세상에, 아직 상황 판단은 제대로 되는구나. 좀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도진아. 나는 또 네가 의식불명 환자를 못 본 체 하면 어쩌나 했지.
네가 가장 잘하는 건 현실에서 도피하는 거 아니니. 사촌은 그런 목소리를 덧붙였다. 얄미울 정도로 정확한 지적이라 도진은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 여실한 결과를 앞에 두고 그렇지 않다고 떼 쓸 수야 없는 일이었으므로.
도진은 잠시 사촌에게서 눈을 돌려, 당면한 최대 과제를 눈에 담는다.
눈앞의 병원 침대에는 제 동거인이 누워 있다. 도진은, 그가 쓰러진다면 그 원인은 분명 과로로 인한 피로일 것이라 늘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는 성실했고, 열정이 넘쳤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었으며, 일단 힘이 닿는 데까지는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는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었다. 모두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고, 조금 딱딱하긴 하지만 누구보다도 모두의 선善을 목표하는 사람.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인간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제 주위에 있어도 괜찮은 건가, 하고 가끔은 느꼈다.
아무튼 그런 성격이라면 남한테 화를 입을 일은 없겠지. 그리 생각한 게 화근이었을까. 오만이었을까......
동거인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던 저녁. 초인종이 울리고 대뜸 이웃사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이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했다. 칼에 찔렸다고도 했다. 도진은 잠시 서천이 무슨 추리소설 이야기를 하는 건가 고민했다. 하지만 서천은 딱히 소설과 친하지 않았고, 평소와 다르게 (아니, 요 근래에는 비슷한 꼴을 자주 보았던가) 덜덜 떨리는 그의 동공이 현실의 이야기임을 자각시켰다.
도진은 차가 없었고 서천은 운전하기에 적합한 정신이 없었으므로, 제 가게에서 손님을 맞고 있던 현을 억지로 잡아끌어 운전석에 앉혔다. 아니, 뭔데? 이거 뭔데? 택시비 받을 거예요? 라는 투덜거림도 필규가 찔렸다는 말을 들으니 쑥 들어가는 것이, 도진은 어쩐지 우습다고 느꼈다.
그래, 우습다고 느꼈다. 남의 언행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도진의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느껴봤던 감각인데, 그것이 언젯적의 일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더라. 머리를 맞고 찔렸는데도 살아있다고? 하긴, 사람 목숨이라는 게 꽤 질기긴 하지...... 구역질 나는 평정을 관찰하면서, 도진은 자신이 지금 제정신인지 제정신이 아닌지 고민했다.
제정신이 아닌데 제정신인 척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언젠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직면하고 정신의 최하단부부터 순서대로 붕괴한다면 그 후폭풍을 제 정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이 서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 정도로 고민하고 있다면 나는 제정신인가?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눈으로 흘려보내며 도진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차 안의 세 명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고, 현은 딱 한 번 그 놈 상태가 어떻냐고 묻긴 하였는데, 서천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수술 중이라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그냥, 머리를 맞았고, 칼에 찔렸고......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를 되읊으면서 양 손가락을 끊임없이 꿈지럭댄다. 그런 모습이 차창에 비쳐 눈동자에 비친다. 도진은 요 사이 퍽 가까워진 형제를 생각한다.
병원에 도착한 후의 상황을 되짚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양잿물과 같은 뿌옇고 미끈한 심상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으므로. 도진은 구태여 그러한 악몽을 헤집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현존하고 살갗으로 느껴지는 악몽은 지금도 제 옆에서 끌끌대며 웃고 있으니.
네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말해줄까. 환자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걸터앉은 환상이 물었다. 그 특징 없는 손은 곧 환자의 머리칼 정도를 어루만졌고, 도진은 울컥 끓어오르는 무언가의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어쨌든 상대는 말을 잇는다. 자꾸 화내지 마. 그렇게 용을 써서 힘든 건 내가 아니라 너 뿐이니까.
이 녀석의 수술이 진행 중일 때 너희 일행이 병원에 들어왔지. 너희 셋은 얌전히 수술실 앞에서 기다렸어. 가장 덜덜 떨고 있던 건 의외로 동생 녀석이었던가. 그야 그렇겠지. 그 서점 사장에게 이 녀석은 그냥 친한 지인이고, 도진이 너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딱히 떨 이유가 없었던 거야. 하지만 요즈음 들어 깨나 유약해진 동생이라면 숨도 못 쉬고 훌쩍거릴만 하지. 음, 동의하지?
걱정 마. 네가 기억하지 못한 건 전부 내가 기억하고 있어. 위로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도진은 진지하게, 제 눈앞에서 일렁이는 이것을 환각으로 보아야 하는지 인격으로 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최종적인 결론은 집에 남아있을 정신과 정제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재미없긴. 천영이 미소지었다. 도진은 그가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불쾌한 골짜기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말 그대로 불쾌하다.
그 다음에, 수술실에서 이 녀석이 실려나왔지 아마. 상태가 심각하다는 집도의의 대답을 너희 모두가 들었고.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이고, 언제 죽을지도 미지수다. 네 머릿속 지식으로 인터프린팅한다면 대충 그런 말이 되었겠군. 그 말을 듣고 병실로 옮겨졌어.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어서 1인실로 옮겨졌던가. 1인실은 비싸지 않나? 그래도 대작가님이시라면 그 정도 비용은 댈 수 있지? 그럼 됐고.
그 이후의 일이라면 도진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한다. 서천은 눈을 감은 형을 보고 비틀거렸고, 현은 정신적 취약자 둘 사이에서 누구를 더 위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도진을 미심쩍게 바라보더니, 저는 얘 데리고 먼저 갈게요. 잠시만 혼자 계세요. 그런 말을 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제 반응이 떠올랐다.
정말 정상인 같은 반응이었어. 칭찬해 주고 싶구나. 물론 그 친구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정상인 흉내를 내는 네가 훨씬 걱정되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도진은 상대의 발언을 곱씹는다. 그것은 읽어내지 못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발언의 꼭 진실이라는 법은 없으므로.
누가 봐도 범죄 사건이니 날이 밝으면 시끄러워질 거야. 지금처럼 냉정한 척 하고 있으렴. 피해자랑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면 친한 형이라고 둘러대. 대뜸 작가랑 편집자라고 밝혀서 찌라시들 좋을 일이나 하지 말고. 그리고......
그리고, 천영은 가장 중요한 것을 속삭였다.
될 수 있다면 역으로 정보를 캐내.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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