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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타입 12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 - 리본

그 순간 자기 자신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었던 이기심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유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커다란 두 눈이 조금씩 젖어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리본이 아무리 어리광을 받아준다고 해도 그건 ‘유메’를 향한 호의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렇게 리본과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유메’가 아니라 ‘하나’인 척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째서 이제야 알았을까.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자기 자신이 싫었다. 아마 자신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겠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못 만나겠지. 왜냐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자기혐오가 점점 유메를 늪으로 밀어 넣었다. 나오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늪 말이다. 유메는 애써 두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렸다. 리본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건 미약한 자존심이었다.

한편 리본은 유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혼란스러웠다. 이상했다. 하나는 타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리본이 아는 하나는 언제나 웃으면서 모두를 대했다. 이따금 제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 있으면 투덜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 마저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 사람이 울 수 있다니.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리본은 잘게 떨리는 어깨를 보았다. 슬픔을 직통으로 맞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바보, 리본.

익숙한 목소리가 리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리본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늑하게 꾸며진 가정집 내부에 존재하는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리본, 그리고 유메. 그 외에 불청객으로 추정되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리본은 제 귓가에 들린 목소리의 정체를 추측해보았다. 솔직히 말해 추측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듣고 싶었으며, 이제는 영영 듣지 못할 줄 알았던 하나의 목소리였으니까. 목소리는 약간 리본을 한심하게 여기는 투로 말했다. 바보라니. 또 그런 소리를 하다니. 리본은 어이가 없었다.

리본은 종종 여행을 떠날 때가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의뢰 외에도 갑작스럽게 사라진 하나를 찾기 위해서. 여행이라고 해봤자 그가 갈 법한 장소를 물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를 다 둘러보았음에도 하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10년이 넘도록 이렇게 숨어 있을 수 있다니. 어떤 의미에서 하나도 대단했다. 리본은 눈앞에 슬픔에서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을 보았다. 유메는 울지 않았다. 슬픔을 몇 번이고 삼킨 채로 리본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다.

‘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언제나 그랬다. 10년이 넘도록 여기서 만날 때마다 유메의 표정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때때로 자기 자신과 힘겹게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지끈. 갑작스럽게 리본의 머리를 파고드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유메는 그런 리본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리본은 머리가 쪼갤 것 같은 고통에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한순간이나마 자세가 휘청였다.

“리본… 괜찮아요?”

“못 볼 꼴을 보였군.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으니…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오도록 할게.”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괴로워 보였다. 무심코 유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괴로운 리본은 처음 본다. 언제나 제 앞에서는 여유로운 모습만 보여주었는데. 멀어지는 리본의 뒷모습을 보면서 유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흔한 위로도, 격려도 해주지 못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가만히 지켜보는 일뿐. 스스로의 무력함에 이제 지긋지긋해졌다.

털썩, 주저앉았다. 억지로 참고 있었던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넘쳤다. 투명한 물방울이 천천히 볼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유메는 최대한 소리 죽여 울면서 ‘하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과연 하나 씨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막연히 자신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소리 죽여 울면서 유메는 이제 움직여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이렇게 가만히 울고 있어봤자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세상은 부지런한 사람의 몫이다. 게으른 이에게는 무엇도 주어지지 않는다.

유메는 어느 정도 진정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소파나 낮은 테이블을 붙잡고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단순히 일어나는 것만으로 버거운 자기 자신이 싫었다. 무엇을 해도 좋아할 수 없다니. 아마 이건 저주가 아닐까. 유메는 한심한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한껏 올린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모든 게 어색했다. 유메는 자기 자신을 탓하는 행동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하나 씨는… 이렇지 않겠지.’

막연한 상상으로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늘 궁금했다. 어째서 리본은 하나를 좋아할까. 어째서 자신을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한 번 생긴 의문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유메는 제 얼마 되지 않는 지인을 떠올렸다. 츠나라면 혹여 알고 있지 않을까? 저번에 물어보았을 땐 적당히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대답해주지 않을까?

희망이자 동시에 절망이었다. 하나에 대해 알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못난 자신을 탓하겠지.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유메는 의외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된 편이었다. 스스로의 행동쯤은 예측할 수 있다. 궁금해해서는 안 되는데. 알아서는 안 되는데. 호기심은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알지 않으면 안 되는 막연한 불안감까지 생겼다.

‘한 번 해보자.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나도 낮았다. 어차피 알게 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을 터. 그저 호기심만 충족할 뿐이다. 유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펑펑 쏟아지던 눈물은 어느새 바짝 말랐다. 유메는 화장실로 들어가 가볍게 세수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유메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

가장 먼저 찾아간 건 사와다 츠나요시였다. 유메와 얼마 안 되는 지인 중 한 명이었다. 약 10년 전만 해도 자신처럼 숫기가 없었던 소년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메는 츠나를 만나기 위해 집 밖을 나섰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 끝에는 봉골레 패밀리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었다. 설마 자신이 이런 골목을 통해 올 줄이야. 평범한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형광등이 복도를 밝히는 유일한 빛이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유메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어둠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안 그래도 복잡한 골목 속에 꼭꼭 숨겨져 있었는데. 무서운 사람들이 잔뜩 있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렇기에 뒤에서 기웃거리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한쪽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사와다 츠나요시, 오늘 자신이 만나고자 한 사람이었다.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긴장이 풀린 탓에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유메가 휘청거리자마자 츠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불쾌한 접촉이 되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유메는 그런 츠나의 행동에 어쩔 줄 모른 채 당황하기만 했다.

“어, 어, 괜찮아? 하마터면 위험할 뻔 했어.”

“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츠나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신 거예요?”

“뭔가 이쪽으로 오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길 거 같았거든. 평범한 사람이 이 안으로 들어갔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번질 수 있으니까. 확인할 겸 나오긴 했는데… 나오길 잘했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니.

유메는 힐끗 복도 안쪽을 보았다. 불빛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리 없이 꺼져버렸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섬뜩한 감각에 유메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츠나는 그런 유메를 배려하고자 문을 닫아주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묵직한 철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두운 복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유메는 참았던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츠나는 그런 유메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이게 평범한 일반인이 낼 수 있는 반응이었지. 츠나는 자신이 일반인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눈앞에서 지독한 어둠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서 있을 수 있게 됐다. 츠나는 세심하게 그런 유메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렸다. 힘을 빼고 유메를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이번에 이렇게 찾아오게 된 건… 츠나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거든요.”

“물어볼 거? 나에게?”

의외라는 듯 츠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내용이 없었다.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 츠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이렇게 깊은 골목 속에 숨은 입구까지 찾아올 정도면 무척이나 간절한 질문이겠지? 그걸 자신이 말할 수 있을까? 불안하다는 듯이 유메를 힐끔 보았다. 유메는 몇 번이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안정시켰다. 물어보는 게 이렇게 떨리다니. 스스로를 탓하는 것조차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혹시 하나 씨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나요?”

“……그건 갑자기 왜?”

아주 잠깐이었다. 츠나는 한 박자 늦게 유메의 질문에 대답했다. 대답이라고 해봤자 유메가 원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되물음. 어째서 그걸 묻냐는 말투였다.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를 낸 츠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혹여 유메에게 상처 주지 않았을까. 황급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으나, 그는 츠나의 대답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찰나의 머뭇거림을 유메는 놓치지 않았다.

“미안해. 하나 씨에 관련해서 내가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없… 어. 이건 말해주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라,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거든.”

구차한 변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나가 모습을 감춘 지 자그마치 10년이나 지났다. 아무리 전 세계를 돌아다녀도 하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죽었으리라. 하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리본은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츠나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죽음을 부정하고 있다. 명백하게 밝혀진 사실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언젠간 돌아와주지 않을까. 하늘같이 찬란한 미소를 흩뿌리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모두 저마다 얄팍한 희망을 가지고 나날을 보냈다. 하나와 관련된 정보는 전부 극비로 취급하고 있었다. 봉고레 내부에서도 최대한 소문을 옮기지 않도록 자제했다. 당연히 외부인인 유메는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저, 그저 어디에서 하나의 이름을 들었는지 오히려 묻고 싶었다.

‘아마 리본이… 뭔가 말하지 않았으려나.’

그러고 보니 유메는 리본과 친하게 지냈다. 현재 유메가 지내고 있는 집도 리본이 구해다 주었다. 어디서 그런 집을 구해온 건지 의문이었으나, 츠나는 딱히 해로울 게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유메가 특별한 힘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만약 그랬다면 리본이 스스로 나서지 않았을까. 리본과 알고 지낸 지 자그마치 10년이 넘었다. 강산이 변할 정도로 긴 세월은 깊은 신뢰감을 쌓기에 충분했다.

츠나의 완곡한 거절에 유메는 그저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조금이나마 기대했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아마 여러 번 되물어도 똑같은 답변만 하겠지. 자신은 하나에 대해 알 권리가 없다는 사실은, 재차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유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힘겹게 대답했다.

“알았… 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유메는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츠나는 가슴이 아팠다. 마음 같아서 알려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모두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 떠나는 유메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츠나는 유메를 부르는 대신 어두컴컴한 복도 안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조금 어폐가 있다. 유메는 리본이 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나는 누구일까. 도대체 왜 사람들이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걸까. 그나마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던 츠나도 말해주지 않았다. 유메는 매우 협소한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무난하게 자신이 말 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인다. 무릎을 모은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식사, 잠…. 요 며칠간 유메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지내왔다. 하나에 대한 의문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눈을 감을 때마다 계속해서 자신의 상상 속에 하늘을 닮은 여인이 나타났다. 알고 있는 외견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리본에게 잘 어울릴만한 여성을 그려냈다. 그때마다 유메는 숨이 턱 막힌 듯 아팠다.

‘리본 씨. 저를 왜 유메가 아니라 하나로 보시는 거예요?’

지금이라면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유메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때, 아무나 자신에게 답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너무 큰 소원인 걸까? 자신은 사소한 의문조차 해소할 수 없는 걸까? 너무나 울적했다. 우울함을 넘어서 삶의 의지를 잃을 법했다. 그렇다고 극단적인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건 또 무서웠다.

온몸이 뻐근했다. 자세를 편하게 고치면서 동시에 현관을 보았다. 리본 씨는 언제 오려나. 약속한 일주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슬슬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유메의 시선은 현관에 고정된 채, 그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

유메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채 슬퍼하고 있을 때였다. 리본은 제 주변에 늘여진 시체를 보았다. 족히 열 명은 넘을 정도로 많은 이가 목숨을 빼앗겼다. 리본은 깔끔한 걸 중요하게 여겼다. 임무를 할 때마다 최소한의 공격만을 했었지만… 현재 리본의 주변에는 다소 잔혹하게 죽은 이들이 많았다.

이번 임무에서는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현재 리본의 주변에는 살아있는 이가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게 들렸다. 보통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터다. 비인륜적인 생활을 보낼 때마다 종종 찾아왔었으니까.

그러나 시야 구석에서 화려하게 머리를 늘어트린 여성이 한 명 보였다. 다소 편안한 복장으로 리본을 보며 웃고 있었다. 하나였다. 약 10년 전,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하나. 리본은 하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저것은 본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보고 있는 환각, 혹은 환청이다. 그 증거로 하나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10년의 세월을 전혀 보내지 않은 채로, 어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될까? 이상한 저주를 받아서 아기가 된 자신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하나는 리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었다. 살짝 비웃는 느낌이 강했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분명 자신의 집착이 만들어냈을 헛것임에도 그의 존재감은 강했다.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계속해서 마주하고 있을 때처럼 리본에게 좋은 소리를 해주지 않았다.

이게 뭐야, 리본. 내가 돌아오질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기다려? 너 바보야? 차라리 깔끔하게 단념하라고.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은 그럴 정도로 용감한 이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계속해서 그가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리본이 하나에게로 다가갈 때마다 그의 형체가 연기처럼 흩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흩어졌다가 되돌아오는 걸 보며, 리본은 다가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리본은 제 총을 매만졌다. 딱딱한 금속이 손끝에 느껴졌다.

유메라는 애가 불쌍해. 괜히 리본에게 걸려서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잘 대해주는 것도 아니고, 거의 내버려 두고 있잖아. 차라리 그럴 거면 접근하지 말던가.

“…….”

리본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제 귓가에만 들리는 환청이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리본은 유메를 만날 때마다 잘 대해주었지만, 그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독하리만큼 잔인한 행동을 몇 년에 걸쳐서 반복하고 있다. 리본은 유메를 잘 알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얼핏 하나와 비슷했다.

하늘과 땅만큼 다른 인물임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처음에는 하나가 다른 모습을 통해 나타난 줄 알았다. 하지만 같이 지내며 그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유메는 몇 번이고 리본을 대할 때마다 서투른 행동을 보였다.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점마저 하나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에게서 하나를 투영해보았다. 리본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참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질 못했다.

리본은 그대로 죽은 이만 가득한 창고를 빠져나왔다. 좁은 곳에서 피 냄새를 오래 맡았더니 후각이 둔감해지고 있다. ‘하나’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던 도중 길가에 핀 꽃을 발견했다. 꽃은 선명한 노란색을 품고 있었다. 막상 그 꽃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하나가 알려주었던 정보가 떠올랐다.

꽃에는 저마다 꽃말이 있다고 했지. 심지어 같은 꽃이어도 색깔마다 의미가 다르다. 수량에도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했다. 리본은 이름 없는 꽃을 바라보며, 예전에 아주 잠깐이나마 즐겁게 들었던 정보를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하나’에게 제대로 된 선물을 해주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이래서야, 혼나도 이상하지 않군. 리본은 그대로 꽃을 지나쳐 밝은 곳으로 향했다.

‘하나’를 만나기 전,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꽃집에 방문했다. 꽃집 점원은 새카맣게 도배한 리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다 검은 장미를 입에 담았을 때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면서 착실히 꽃을 포장했다. 화려한 검은 장미가 마침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운이 좋았다. 검은 장미만 있으면 수수하니 돋보일 만한 작은 꽃도 여러 송이 챙겨주었다. 꽃다발의 무게는 크기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다. 리본은 꽃잎을 살펴보았다. 모두 관리를 잘하고 있었던 건지 나름 괜찮은 편에 속했다.

그대로 값을 지불하고 나섰다. ‘하나’가 이걸 좋아하려나.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여태껏 제대로 된 선물을 해주지 못했다는 자신에게 타박하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언제나 그렇듯 아늑했다. 잘 꾸며진 주택이 리본을 반겼다. 오늘따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본은 의아하게 여기며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그대로 문을 열었다. 문은 손쉽게 열렸다.

‘하나’는 거실 소파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문이 열렸다는 걸 알자마자 자세를 고쳤다. 어쩐지 눈빛이 평소보다 나른하게 느껴졌다. 리본은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화려한 장미를 보자마자 의아하게 여긴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사소한 행동마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부디 이 꽃다발을 좋아해주었으면. 작은 바람을 담아 그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꽃다발을 받은 유메의 두 눈이 떨렸다. 무슨 의미일까. 유메는 꽃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장미나 백합, 튤립과 같은 꽃은 구별할 줄 알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리본에 건넨 검은 장미는 이상할 정도로 불길하게 느껴졌다. 유메가 주춤거리며 꽃다발을 받지 않는 것에 리본이 의아하게 여겼다. 침묵이 두 사람의 곁에서 서성거렸다.

“하나, 무슨 일이야?”

“……저는. 저는, 하나가 아니에요. 제발, 제발 저를 하나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리본 씨. 제발, 제발…!”

꽃에 대해 무지하더라도, 무엇을 위해 건넨 건지 알 수 있다. 본능적으로 저 꽃다발은 자신을 위해 사온 게 아니었다. 하나, 하나 씨를 위해 사온거다. 유메는 차오르는 슬픔을 견디지 못한 채 리본을 향해 소리쳤다.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울부짖었다. 리본은 그런 유메의 울부짖음에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의아함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듯 유메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너는 ‘하나’잖아.”

그렇게 말하는 리본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자의 눈빛처럼 보였다. 유메는 제 말이 끝내 리본에게 닿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은 ‘하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나? 몇 번이고 흘렸던 눈물이 다시 한번 고개를 내밀었다. 가슴이 콕콕 쑤시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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